[© 최광민] 박통과 나

일상

[© 최광민] 박통과 나

草人! 2022. 5. 13. 11:57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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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박통과 나




# 유신

연표에 따르면, 내가 태어난 1971년은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새마을 운동의 전성기였고, 충남 공주에서는 무령왕능이 발굴되었던 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971년은 제 3공화국의 마지막이었고, 1971년 7월 제 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통)이 다음 해 유신헌법 확정해 유신공화국이라 불리는 제 4공화국이 출범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니까 10살 무렵까지의 유년시절은 박통과 함께 "유신"의 공기를 마시며 보낸 셈이다.

"유신"이라면 김"유신"밖에 모르는 세대에게는 생소한 단어겠지만, "유신"은 심지어 국민학교 교과서 안에도 깊이 침투해 있었다. 국민학교 교과서에 "영수와 망원경"이란 단원이 하나 있었는데, 발목을 삐어서 소양강댐에 친구들하고 물놀이를 못나간 주인공 영수가 마침 아버지에게서 선물받은 망원경으로 친구들 노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던 중 물에 빠진 친구들을 발견해 구출한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바로 그때 영수가 망원경으로 물가를 둘러보던 중 발견하는 것 하나가 "유신"이라고 쓰여진 큰 간판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보던 {동아전과}에 나와있던 "유신"이란 생소한 단어의 말뜻을 기억한다.

"유신 = 낡은 제도나 체제를 아주 새롭게 고침". '

무엇이 낡은 것이었으며 어떻게 고친 것인지에 대한 언급은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았던 듯 하다. 이 교과서의 단원을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이유는 세가지다. 나는 당시 망원경을 너무나 좋아해서 언젠가 꼭 사고 싶어했고 ({소년중앙} 광고에 종종 나오던 "코펙스 망원경"), "유신"이란 생소한 단어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는 "망원경"을 "마낭경"으로 발음한다하여 선생님에게 몹시 혼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박통의 "유신"이 1868년 일본의 메이지 덴노 (明治天皇)에 의해 단행된 메이지 이신 (明治維新) 온 점은 일본군 장교였던 그의 과거사와 또 일본 문화에 크게 경도되었던 그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10.26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1979년 10월 26일은 내 동생이 태어나기 몇 주전이었고, 당시 나는 국민학교 2학년 생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동아방송(TBC)에서는 {밀림의 왕자 타잔}을 방송하고 있었고, 그날도 어머니를 따라 산부인과에 가서 대기실에 앉아 이 만화를 보던 기억이 난다. 10.26 사건이 일어나고서부터 한동안은 TV와 라디오를 틀면 온통 뉴스와 장송곡 뿐이라 매우 짜증을 냈었는데, 아무튼 사건 직후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도서실을 비우고 거기에 박통 분향소를 설치했었다. 굉장히 많은 동네사람들이 분향소를 찾았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우리들은 담임선생님 인솔로 반별로 분향소에 가서 묵념을 했다.

묵념을 하고는 각자 향로 옆에 있는 방명록에 이름과 반, 그리고 번호를 적었고, 교감 선생님은 바른생활 점수에 반영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날부터 매 쉬는 시간마다 분향소에 갔고, 당연히 방명록은 내 이름으로 가득찼다. 내가 박통의 열렬한 추모자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작 국민학교 2학년 밖에 안 되는 놈이, 그저 바른생활 점수를 잘 받겠다고, 혹은 선생님에게 칭찬받겠다는 생각에 그런 잔머리를 굴린 것이다. 국민학교 2학년 때의 나는, 이렇게 나름대로는 세상사에 영악한 놈이었다.

3일 쯤 후, 수업을 마치고 또 분향소에 갔는데 거기서 나와 같은 짓을 하고 있던 옆반 녀석을 분향소에서 마주쳤고, 방명록에 이름을 쓰고 있던 그 녀석과 눈이 마주쳤을때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과 모욕감이 뼛 속까지 밀려왔다. 분향을 마친 후 운동장에 앉아 내가 그동안 한 짓이 얼마나 한심한 짓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그 "행동"으로 몇 달 후 모범상을 받았다.

그날은 내 인생 처음으로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된 날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이 내게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나는 지금도 그 행동을 두고두고 반성하며 다시는 어떤 맥락 속에서도 그와 유사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이것 이외에 박통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박통은 그저 이런 불쾌한 일화를 제공한 사람으로서만 기억될 뿐이고, 따라서 늘 유쾌하지 않은 연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 일기

박통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시간, 인근 동사무소에서는 싸이렌이 울러퍼졌고 동네 할머니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흰 소복을 입고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나랏님이 돌아가셨다"며 통곡을 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난 "대통령은 왕이 아닌데 왜 나랏님이냐?"고 물어보다가 동네 할아버지에게 혼벼락을 맞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민주주의의 새싹"이었던 셈이고, 민주주의는 그때의 그 통곡하던 할머니와 나에게 전혀 다른 의미였던 셈이다. 그 분들에게 민주주의는 얼떨결에 이식된 이념이었다. 그러나 내 세대에게 민주주의는 (비록 완전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미 너무나 자연스럽게 의식구조 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분들 곁에 서 있노라니, 할머니들의 통곡 때문이었는지 방송 속의 비장한 장송곡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밤 나는 그림일기장에 TV에서 보았던 박통의 영결식 장면이 그려놓고는 이렇게 썼다.

"대통령 할아버지, 천당에 가셨을 것이다."

일기장은 검사를 받기 위해 다음날 선생님께 제출했다. 물론 그때는 어느 누구도 일기장 검사를 "인권유린"이라고 부르지도, "인권유린"으로 인식하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그날 오후에 담임 선생님은 일기장을 우리들에게 돌려주셨는데, 왠일인지 선생님은 위의 문장에 빨간볼펜으로 두 줄의 밑줄을 그어 놓았고, 늘 찍어주던 "참 잘했어요"란 별 다섯개짜리 고무도장도 찍어주지 않았다.나는 잘못된 것이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해주지 않으셨다.

그 후로도 몇 년이 더 흐른 후,
나는 그제서야 빨간줄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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