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카테고리의 글 목록






추천영상: 12인치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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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사랑의 힘}

사랑의 힘 -- 최영미 커피를 끓어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밤도 밤이 아니다 술잔은 향기를 모으지 못하고 종소리는 퍼지지 않는다 그림자는 언제나 그림자 나무는 나무 바람은 영원한 바람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면 겨울은 뿌리째 겨울 꽃은 시들 새도 없이 말라죽고 아이들은 옷을 벗지 못한다 머리칼이 자라나고 초생달이 부풀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처녀는 창가에 앉지 않고 태양은 솜이불을 말리지 못한다 석양이 문턱에 서성이고 베갯머리 노래를 못 잊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미인은 늙지 않으리 여름은 감탄도 없이 시들고 아카시아는 독을 뿜는다 한밤중에 기대앉아 바보도 시를 쓰고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하는 정녕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도 기꺼이 속아주지..

2022.07.31

안도현, {기다리는 이에게}

Wikimedia Commons 기다리는 이에게 - 안도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불 꺼진 간이역에 서 있지 말라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비로소 싸움이 아름다운 때가 왔다 구비구비 험산 산이 가로막아 선다면 비껴 돌아가는 길을 살피지 말라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함성이 기적으로 울 때까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그대가 바로 기관차임을 느낄 때까지

2022.07.29

안도현, {양철 지붕에 대하여}

Wikimedia Commons 양철 지붕에 대하여 - 안도현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2022.07.29

이수익, {우울한 샹송}

Wikimedia Commons 우울한 샹송 - 이수익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 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 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

2022.07.29

오규원, {개봉동 ...}

작성 © 草人 최광민 2022-07-02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개봉동, 오규원, 시 순서 개봉동과 장미 개봉동의 비 개봉동과 장미 -- 오규원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1978)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

2022.07.03

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

2022.01.27

장경린, {그게 언제였더라}

그게 언제였더라 - 장경린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나를 스쳐 지나가는 단골 약국의 친근한 약병들 검은 열차들 작은 집과 다리와 먼 산 나를 스쳐 지나가는 젊은풍속과 늙은 불안감들 욕망들 시와 담배 연기로 지워버린 가랑비 웅덩이에 고인 빗물 그게 언제였더라 갈매기들이 해안 초소에서 튀어나오던 저녁 해물탕 꽃게 다리를 빨아먹던 저녁 작은 하늘에서 큰눈이 쏟아지던 날 자신의 일기에 밑줄을 그으며 낯설고 기뻐서 술병을 따던 저녁

2022.01.27

왕범지 (王梵志) 시 모음

[노트] 왕범지의 시는 왠지 좀 툴툴거리는 말투의 반말로 읽는게 제 맛인 듯 싶다. 그렇게 옮겨본다. ---- 梵志翻着袜, 人皆道是錯. 乍可刺你眼, 不可隱我脚. '범지는 버선을 뒤짚어 신었어!' 모두들 내가 잘못했다 말하지. 당신들 눈엔 가시처럼 보여도 내 발이 아프진 않아 ----- 我不樂生天 亦不愛福田 飢來一砵飯 困來展腳眠 愚人以為笑 智者謂之然 非愚亦非智 不是玄中玄 하늘에 태어나길 바라지도 복 많이 받기도 원하지 않아 그저 배고프면 밥 한사발 먹고 피곤하면 발 뻗고 잘 뿐. 바보는 비웃지만 현자는 맞다고 해 어리석은 것도 지혜로운 것도 그렇다고 심오한 뜻이 있는 것도 아냐 ------ 吾富有錢時 婦兒看我好 我若脫衣裳 與吾疊袍袄 吾出經求去 送吾即上道 將錢入舍來 見吾滿面笑 繞吾白鴿旋 恰似鸚鵡鳥 邂逅暫時貧..

2022.01.16

이바라키 노리코, {기대지 않고} + {내가 제일 예뻤을 때}

일본 (여류)시인 이바라키 노리코는 73세 때 이 시를 썼다. 倚(よ)りかからず --- 茨木のり子 もはや できあいの思想には倚りかかりたくない もはや できあいの宗教には倚りかかりたくない もはや できあいの学問には倚りかかりたくない もはや いかなる権威にも倚りかかりたくはない ながく生きて 心底学んだのはそれぐらい じぶんの耳目じぶんの二本足のみで立っていて なに不都合のことやある 倚りかかるとすれば それは椅子の背もたれだけ 기대지 않고 -- 이바라키 노리코 더이상 기성사상에 기대기 싫다 더 이상 기성종교에 기대기 싫다 더 이상 기성학문에 기대기 싫다 이제 그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기 싫다 오랫동안 살면서 진정 배운 건 그 정도 내 두 다리로 서 있은들 무엇이 불편하단 말인가. 기댄다면 그건 의자 등받이일 뿐 중년의 이바라키 노리코는..

202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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