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광민]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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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草人! 2022. 3. 15. 13:57
작성

© 草人 최광민 2006-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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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발터 벤야민의 말을 대충 빌리자면, '고전'이란 당대에 이슈를 일으키는 작품에게 붙여지는 이름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사랑받는 작품을 뜻한다.

굳이 그의 말에 공조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철든 이래로 나는 왠지 유행에 '의식적'으로 둔감했고 또 둔감해지려고 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국에 소개되었을 무렵, 사람들은 {상실의 시대} 등 그의 소설을 화두처럼 붙들고 열광하거나 혹은 비판했지만 나는 시큰둥했는데, 유행에서 벗어나 중립적으로 작품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 그때도 아직 그의 책을 읽을 때가 아니란 생각이 막연히 들었던 듯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혹은 촌상춘수 (村上春樹) - 이름도 별로였다. 게다가 나는 종종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를 혼동하기까지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지금 내 손에는 그의 1985년 작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世界の終わりとハードボイルド・ワンダーランド}이 들려져 있다. 

소설이 발표된 지도 20년이 흘렀으니 이 책도 세월의 때가 묵을 만큼 묵었다. 주인공의 나이는 나와 동갑으로 설정되어 있으니 그의 심리를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소설 속에는 최근의 초유의 관심사가 된 "핵치환"이란 단어도 등장한다. (물론 배반포나 줄기세포와는 상관없다.) 한국에 소개된지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어도 소설 자체로  즐길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책을 펴들었다.

소설의 주제와 모티프는 테이블 위에서 '마음'을 방사하는 일각수의 두개골 만큼이나 내게 이루 말할 수 없으리만큼 익숙하다. 사실은 왠지 나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ごしんせつに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당신은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이 '노'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표시인지, 나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하물며 그런 것조차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모르겠어. 나는 다만 이 도시에 대해서 알고 싶을 뿐이야. 이 도시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형성되어있고, 어디에 어떤 생활들이 있는지 알고 싶은 거야. 무엇이 나를 규정하고, 무엇이 나를 흔들어대고 있는 지도. 그것말고 더이상 무엇이 있는 지는 나도 모르겠고."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고 내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것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감이 잡히지 않아요? 이곳은 명실상부한 세계의 끝이에요. 우리들은 영원히 이곳에 머무를 수 밖에 없어요."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파트는 老박사의 뚱뚱한 (=살진) 17세 손녀가 부르는 {자전거의 노래}.

사월의 아침에
나는 자전거를 타고
알 수 없는 길을 따라
숲으로 향해 떠났다.
새로 산 자전거
색깔은 핑크
핸들도 안장도
색깔은 모두 핑크
브레이크 고무까지도
역시 핑크

사월의 아침에
어울리는 색은 핑크
그 밖의 색깔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새로 산 자전거
구두도 핑크
모자도 스웨터도
모두 모두 핑크
바지도 속옷도
역시 핑크

길을 가다가 나는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의 옷은
모두 파랑
수염 깍는 것도 잊어버린 듯
그 수염도 파랑
마치 긴긴 밤과 같은
짙은 파랑
긴긴 밤은
언제나 파랑

"숲으로 가는 것은
그만두는게 좋아, 그대여"
라고 아저씨는 말한다.
숲의 계율은 짐승들을 위한 것
그것이 가령
사월의 아침이었다고 해도
물은 거꾸로
흐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사월의 아침에도

그래도 나는
자전거를 타고 숲으로 떠난다.
핑크빛 자전거 위에서
사월의 맑은 아침에
무서운 것 따위는 하나도 없어.
색깔은 핑크
자전거에서 내리지만 않으면
무섭지 않다.
빨강도 파랑도 갈색도 아닌
진짜 핑크

난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웃후}를 부르게 된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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