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08-22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 최광민] 비천무 단상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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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비천무 단상
김혜린, {비천무}
김혜린의 {비천무}란 만화를 처음 "본" 것은 학부 1학년 때 {독수리 만화방}에 앉아 미팅 시간을 두어 시간 기다리던 때였다.
김혜린의 {비천무}란 만화를 처음 "본" 것은 학부 1학년 때 {독수리 만화방}에 앉아 미팅 시간을 두어 시간 기다리던 때였다.
만화방에서 무협만화 서가 앞에 서 있다가 우연히 이 만화를 뽑았지만 몇 장을 훑은 다음 곧바로 다시 책장에 꽂았다. 내가 순정만화 터치의 그림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땐 그냥 "보"기만 했지 "읽"지는 않았다.
이 만화를 다시 보고 심지어 "읽"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오스틴의 내 아파트에서였다. 옆 동에 살던 한국인 입학동기가 LA에서 우편으로 주문한 이 만화를 보고서 퉁퉁부은 눈으로 비천무 6권을 빌려준 것이다. 나는 그로부터 8시간 동안 자리 한번 뜨지 못하고 이 만화에 빠져버렸다.
이 만화를 다시 보고 심지어 "읽"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오스틴의 내 아파트에서였다. 옆 동에 살던 한국인 입학동기가 LA에서 우편으로 주문한 이 만화를 보고서 퉁퉁부은 눈으로 비천무 6권을 빌려준 것이다. 나는 그로부터 8시간 동안 자리 한번 뜨지 못하고 이 만화에 빠져버렸다.
{비천무}는 내가 보아온 여느 한국 만화가 아니었는데 물론 그림체가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다. 작화는 간간이 다소 유치하고 정밀하지도 않은데다가 인물들의 모습은 내가 여전히 좋아하지 않는 순정만화풍이다. 무협이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여느 무협물이라고 할 수도 없다. 강호 절대고수의 신묘한 개인기에 의존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역사물에 가깝다, 그것도 치밀하게 잘 짜여져있는 역사물에 속한다. 그렇다고 정통 대하물이라고 할 수도 없다. 역사와 사건 보다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동양사에서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시점은 바로 몽골이 전 아시아를 휩쓴 1200년대에서 1300년대까지의 약 100년 간이다. 특히 원나라가 패망하던 시점은 전 아시아의 민족들이 동시에 억눌렸던 머리를 들던 때였기 때문에, 이 당시의 역사는 중국사의 한 부분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전 아시아의 역사가 새로이 쓰여지는 때라고 불러야 할 만큼 역동적인 시점이다. 이 만화는 1343년 하북성 산매현에서 시작해 20년 동안의 중국 역사를 치밀하게 다룬다. 하지만 내가 크게 감명을 받았던 부분은 이런 객관적인 사료를 장황하게 나열했다는 점이 아니라, 그 역사를 해석하는 작가 (김혜린은 대본과 그림을 함께 작업했다.)의 너무나 특이한 관점이었다.
가령, 이 만화에 소위 "바탕했다는" 영화 {비천무}는 남자주인공(진하)를 고려인으로 그린다. 하지만 만화에서의 진하는 고려인이 아닌 한족이며, 실제 고려인(아신과 아리수 및 망향단)들은 몇 장면에나 등장하는 미미한 존재이지 결코 극 전체를 이끌어가지 않는다. 이 만화는 오히려 서사에 불필요한 민족주의적 관점을 해체해 버린다. 여자 주인공 설리는 몽골 장군과 당시 원제국에서 가장 천대받던 남송출신 남인사이의 혼혈서녀다. 남자 주인공은 호북유가라는 한족 권세가의 유일한 혈족이고, 전체를 관통하는 대략의 스토리는 해방의 기치를 올린 한족들, 그리고 나날이 쇠망해가는 몽골인들 사이의 투쟁. 그리고 황제라는 절대권력을 선취하기 위한 한족들 사이의 투쟁에 초점 맞춰져 있다.
이 만화에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없다. 이 점이 또 선악이 분명한 기존 무협과 다르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가 세상을 주름잡는 군웅이든, 패퇴해가는 날개꺽인 몽골의 전사들이든, 한족의 민중들이든, 혹은 이름없는 고려의 유민들이든, 절대적으로 악하거나 선하지 않다. 인간의 선악의 구분은 민족적 출신성분에 기초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개인 자신에 기초하지만, 그나마도 매우 희석되어있다. 오히려 이 만화에 나오는 자들은 모두 외로와서 어느 누구하나 동정을 불어일으키지 않는 이가 없다. 패퇴하는 몽골족들은 힘을 잃어 쓸쓸하고, 힘을 잡아가는 한족의 군웅들은 그 힘이 가져다주는 결과로으로 인해 또한 외롭다.
영화는 이 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는데, 하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90여분의 러닝타임으로는 고작해야 러브스토리 하나 제대로 만들기도 벅차기 때문일 게다. 영화는 이 시대가 가지는 역사의 역동성과 주인공 둘을 둘러싼 인물들의 심리를 전혀 간파하지 못했고, 대신 원작을 뒤틀어서 진하와 설리의 러브스토리와 주인공들의 기괴한 무공에만 초점을 맞추려 했다. 가령, 영화 속 철기십조는 그 복식과 행태를 보아 닌자물이나 혹은 SF에 어울릴 정도였다. 만화 속 주인공의 무공은 여타 무협물과 달리 과장되어 있지도 않고, 철기십조는 그냥 특수부대에 불과하다. 영화는 실패가 예고되어 있었다.
이야기 속에 애잔한 사랑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하이틴 로맨스물의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20여년의 궤적을 따라가며 성숙해 간다. 짝사랑도 등장한다. 주인공들을 향한 짝사랑들이다. 그 짝사랑을 이루기 위해 한 사람은 친구를 배신하고, 한 여자는 음모를 꾀하고, 한 남자는 자멸의 길을 택한다. 하지만 그들을 다루는 시각이 매섭지는 않다. 오히려 너무나 따뜻해서 당황스러울 정도다. 이 만화에는 또한 우정과 배신, 아들과 아버지의 정리, 또 고향에 대한 그리움들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잡지 못했다.
만화를 거의 읽지 않는 나를 8시간이나 한 자리에 앉아 읽게 만들고, 또 한번 읽어도 동일한 감동을 준 만화는 여태까진 내 인생에 이 만화 하나 밖에 없는 듯 싶다. (나는 6권짜리 이 만화책을 4번이나 반복해 읽었다.) 그 대사 하나하나가 어떻게 그렇게나 날카로우면서도 으젓하고 가슴을 후빌 수 있는지 지금도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草人
동양사에서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시점은 바로 몽골이 전 아시아를 휩쓴 1200년대에서 1300년대까지의 약 100년 간이다. 특히 원나라가 패망하던 시점은 전 아시아의 민족들이 동시에 억눌렸던 머리를 들던 때였기 때문에, 이 당시의 역사는 중국사의 한 부분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전 아시아의 역사가 새로이 쓰여지는 때라고 불러야 할 만큼 역동적인 시점이다. 이 만화는 1343년 하북성 산매현에서 시작해 20년 동안의 중국 역사를 치밀하게 다룬다. 하지만 내가 크게 감명을 받았던 부분은 이런 객관적인 사료를 장황하게 나열했다는 점이 아니라, 그 역사를 해석하는 작가 (김혜린은 대본과 그림을 함께 작업했다.)의 너무나 특이한 관점이었다.
가령, 이 만화에 소위 "바탕했다는" 영화 {비천무}는 남자주인공(진하)를 고려인으로 그린다. 하지만 만화에서의 진하는 고려인이 아닌 한족이며, 실제 고려인(아신과 아리수 및 망향단)들은 몇 장면에나 등장하는 미미한 존재이지 결코 극 전체를 이끌어가지 않는다. 이 만화는 오히려 서사에 불필요한 민족주의적 관점을 해체해 버린다. 여자 주인공 설리는 몽골 장군과 당시 원제국에서 가장 천대받던 남송출신 남인사이의 혼혈서녀다. 남자 주인공은 호북유가라는 한족 권세가의 유일한 혈족이고, 전체를 관통하는 대략의 스토리는 해방의 기치를 올린 한족들, 그리고 나날이 쇠망해가는 몽골인들 사이의 투쟁. 그리고 황제라는 절대권력을 선취하기 위한 한족들 사이의 투쟁에 초점 맞춰져 있다.
이 만화에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없다. 이 점이 또 선악이 분명한 기존 무협과 다르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가 세상을 주름잡는 군웅이든, 패퇴해가는 날개꺽인 몽골의 전사들이든, 한족의 민중들이든, 혹은 이름없는 고려의 유민들이든, 절대적으로 악하거나 선하지 않다. 인간의 선악의 구분은 민족적 출신성분에 기초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개인 자신에 기초하지만, 그나마도 매우 희석되어있다. 오히려 이 만화에 나오는 자들은 모두 외로와서 어느 누구하나 동정을 불어일으키지 않는 이가 없다. 패퇴하는 몽골족들은 힘을 잃어 쓸쓸하고, 힘을 잡아가는 한족의 군웅들은 그 힘이 가져다주는 결과로으로 인해 또한 외롭다.
영화는 이 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는데, 하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90여분의 러닝타임으로는 고작해야 러브스토리 하나 제대로 만들기도 벅차기 때문일 게다. 영화는 이 시대가 가지는 역사의 역동성과 주인공 둘을 둘러싼 인물들의 심리를 전혀 간파하지 못했고, 대신 원작을 뒤틀어서 진하와 설리의 러브스토리와 주인공들의 기괴한 무공에만 초점을 맞추려 했다. 가령, 영화 속 철기십조는 그 복식과 행태를 보아 닌자물이나 혹은 SF에 어울릴 정도였다. 만화 속 주인공의 무공은 여타 무협물과 달리 과장되어 있지도 않고, 철기십조는 그냥 특수부대에 불과하다. 영화는 실패가 예고되어 있었다.
이야기 속에 애잔한 사랑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하이틴 로맨스물의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20여년의 궤적을 따라가며 성숙해 간다. 짝사랑도 등장한다. 주인공들을 향한 짝사랑들이다. 그 짝사랑을 이루기 위해 한 사람은 친구를 배신하고, 한 여자는 음모를 꾀하고, 한 남자는 자멸의 길을 택한다. 하지만 그들을 다루는 시각이 매섭지는 않다. 오히려 너무나 따뜻해서 당황스러울 정도다. 이 만화에는 또한 우정과 배신, 아들과 아버지의 정리, 또 고향에 대한 그리움들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잡지 못했다.
만화를 거의 읽지 않는 나를 8시간이나 한 자리에 앉아 읽게 만들고, 또 한번 읽어도 동일한 감동을 준 만화는 여태까진 내 인생에 이 만화 하나 밖에 없는 듯 싶다. (나는 6권짜리 이 만화책을 4번이나 반복해 읽었다.) 그 대사 하나하나가 어떻게 그렇게나 날카로우면서도 으젓하고 가슴을 후빌 수 있는지 지금도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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