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12-30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크리스마스 특집 #1: 과연 크리스마스는 사투르날리아, 동지, 혹은 태양신의 탄생일에서 유래했을까?
요약
고대 교부들의 크리스마스 날짜를 계산한 방식을 추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연 "크리스마스 혹은 성탄절은 동지축제 혹은 태양신의 탄생일이 기독교화 한 것이다"란 흔한 속설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지를 살펴본다.
순서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12-30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크리스마스 특집 #1: 과연 크리스마스는 사투르날리아, 동지, 혹은 태양신의 탄생일에서 유래했을까?
요약
고대 교부들의 크리스마스 날짜를 계산한 방식을 추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연 "크리스마스 혹은 성탄절은 동지축제 혹은 태양신의 탄생일이 기독교화 한 것이다"란 흔한 속설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지를 살펴본다.
순서
- 모든 혼란의 단초
- 원래 예수 당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개인의 "생일"을 경축하지 않았다
- 크리스마스의 유래에 대한 통상적인 문화인류학적 설명의 예
- 크리스마스: 종교적 축일인가? 세속적 축제일인가? - 프로테스탄트들의 입장
- (가설): 과연 크리스마스는 로마 농신제인 사투르날리아에서 비롯되었을까?
- (가설): 크리스마스는 태양신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동지축제에서 과연 유래했을까
- 동지는 오시리스나 호루스의 탄생일이었을까?
- 동지는 디오니소스의 탄생일이었을까?
- 동지는 아도니스의 탄생일이었을까?
- 동지는 솔, 헬리오스, 엘-게발, 미트라스 등 태양신들의 탄생일이었을까?
- 동지는 엘라가발루스의 태양신 "엘-게발"의 탄생일이었을까?
- 동지는 아우렐리아누스의 태양신 "솔"의 탄생일이었을까?
- AD 354년 로마에서 기념된 12월 25일의 "인빅투스" 축제?
- AD 362년 동지 무렵에 기념된 율리아누스의 태양신 "솔/헬리오스"의 축제?
- 예수의 추정된 탄생일들과 관련된 역법
- AD 2세기 이집트 교회의 추정일들: 이집트력 파촌 25일, 파르무티 25일, 투비 15/11일, (율리우스력) 11월 17일
- AD 2/3세기 라틴 교회의 율리우스력 12월 25일
- AD 3/4세기 동방교회의 율리우스력 1월 6일
- 정리
{Chronography of 354}, AD 354년 연감/달력
# 모든 혼란의 단초
{복음서}가 얼마나 정밀하게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가는 일단 별도로 하더라도, 최소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때는 꽤 용이하게 추정이 가능하다. 그는 (1) "30살이 조금 넘"은 나이였을 때 (2) 당시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 치하에 (3) 폰티우스 필라투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아의 총독이던 무렵이자 (4)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와 페레아의 지역을 관할한 분봉왕이던 때 (4) 유월절 축제 직전에 처형되었다. 몇가지 가정을 더 동원하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그 날까지 특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편, 예수는 정확히 어느 해, 어느 날에 태어난 것일까? {복음서}를 포함한
{신약성서}는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제국의 등록령이 있던 무렵 즈음으로만 기록할 뿐이다. 그런 이유로 고대로 부터
예수의 탄생년과 탄생일을 두고 여러가지 견해가 기독교도들 간에 분분했고, 보다
후대로 가면 이런 불분명한 탄생일 문제로 인해 바야흐로 예수의 "역사성" 마저
부정하는 주장들이 등장하게 된다. 가령, 전통적으로 여겨져 온 예수의 탄생일
12월 25일은 "지중해 종교 태양신들의 탄생축일을 기독교화 시킨" 것일 뿐이며,
더 나아가 "예수도 결국은 태양신 숭배의 변형"이란 것이다.
그럼 왜 {복음서}나 1-2세대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탄생일을 보다 정확하게
특정해서 후대에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사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너무 멀리 나갈 필요는 없다.
# 원래 예수 당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개인의 "생일"을 경축하지 않았다.
예수로 부터 한 세대 정도 뒤의 인물이자 바리새/바리사이파 계열의 유대교
제사장 출신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생일"에 관한 당시 유대교의
율법규정에 대해 {아피온 반박} 제 2권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교는 개인의 생일을 경축하지 않았을 뿐더러 율법으로 금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도서} 7장의 내용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생일을 경축하는 일은 아마도 유대교를 믿는 예수 당시 대부분의 (혹은 최소한 바리새파) 유대인들의 문화 속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주로 팔레스티나에서 활동했던 오리게네스 (AD 184/185 – 253/254)에 따르자면 AD 3세기의 기독교도들 역시 개인의 생일을 축하하지 않았던 듯 싶다. 오리게네스의 {레위기 강론}은 이를 명시한다.
그는 AD 3세기 초반의 (최소한 이집트 교회 및 시리아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했던 교회축일을 적고 있는데, 여기에는 주일, 유월절 준비일, 유월절/부활절, 오순절이 언급되어 있지만 성탄절을 축제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을 축일로서 기념하는 일은 당시에 없었거나 혹은 모든 지역교회에 의무적으로 지켜진 것이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일, 즉 크리스마스를 경축하는 기독교의 관례가 부활절이나 주현절과는 달리 상당히 오랫동안 동방에서 정착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물론 요세푸스와 오리게네스의 진술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생일까지 몰랐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생일을 당연히 알고는 있었을 테지만, 그들은 그저 그 날을 "경축"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이유로 예수의 실제 탄생일에 대한 여러 이견들이 고대사회에 분분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26. Nay, indeed, the law does not permit us to make festivals at the births of our children, and thereby afford occasion of drinking to excess; but it ordains that the very beginning of our education should be immediately directed to sobriety. It also commands us to bring those children up in learning, and to exercise them in the laws, and make them acquainted with the acts of their predecessors, in order to their imitation of them, and that they might be nourished up in the laws from their infancy, and might neither transgress them, nor have any pretense for their ignorance of them.
(전략)....진실로 우리의 율법은 자녀의 생일을 경축하는 일을 금하고 있다.....(후략) --- 요세푸스, {아피온 반박} 제 2권 / 번역: 최광민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교는 개인의 생일을 경축하지 않았을 뿐더러 율법으로 금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도서} 7장의 내용을 반영한 것이다.
좋은 이름 (=명예 / 필자 주)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 한국어 개역개정, {전도서} 7:2-7
따라서 예수의 생일을 경축하는 일은 아마도 유대교를 믿는 예수 당시 대부분의 (혹은 최소한 바리새파) 유대인들의 문화 속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주로 팔레스티나에서 활동했던 오리게네스 (AD 184/185 – 253/254)에 따르자면 AD 3세기의 기독교도들 역시 개인의 생일을 축하하지 않았던 듯 싶다. 오리게네스의 {레위기 강론}은 이를 명시한다.
Not one from all the saints is found to have celebrated a festive day or a great feast on the day of his birth. No one is found to have had joy on the day of the birth of his son or daughter. Only sinners rejoice over this kind of birthday....the saints not only do not celebrate a festival on their birth days, but, filled with the Holy Spirit, they curse the day. --- Origen, {Homilies on Leviticus} (VIII.3.2)
성자들의 생일에 맞춰 교회의 축일의 정해진 경우는 없다. 누구도 아들과 딸의 생일을 기념했다는 경우가 없다. 오직 죄인들만이 이런 생일을 축하했을 따름이다. 성자들은 그들의 생일을 경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 날을 저주했다. --- 오리게네스, {레위기 강론} (VIII.3.2) / 번역: 최광민
그는 AD 3세기 초반의 (최소한 이집트 교회 및 시리아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했던 교회축일을 적고 있는데, 여기에는 주일, 유월절 준비일, 유월절/부활절, 오순절이 언급되어 있지만 성탄절을 축제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을 축일로서 기념하는 일은 당시에 없었거나 혹은 모든 지역교회에 의무적으로 지켜진 것이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If it be objected to us on this subject that we ourselves are accustomed to observe certain days, as for example the Lord's day, the Preparation, the Passover, or Pentecost, I have to answer, that to the perfect Christian, who is ever in his thoughts, words, and deeds serving his natural Lord, God the Word, all his days are the Lord's, and he is always keeping the Lord's day. He also who is unceasingly preparing himself for the true life, and abstaining from the pleasures of this life which lead astray so many—who is not indulging the lust of the flesh, but "keeping under his body, and bringing it into subjection,"— such a one is always keeping Preparation-day. Again, he who considers that "Christ our Passover was sacrificed for us," and that it is his duty to keep the feast by eating of the flesh of the Word, never ceases to keep the paschal feast; for the pascha means a "passover," and he is ever striving in all his thoughts, words, and deeds, to pass over from the things of this life to God, and is hastening towards the city of God. And, finally, he who can truly say, "We are risen with Christ," and "He has exalted us, and made us to sit with Him in heavenly places in Christ," is always living in the season of Pentecost; and most of all, when going up to the upper chamber, like the apostles of Jesus, he gives himself to supplication and prayer, that he may become worthy of receiving "the mighty wind rushing from heaven," which is powerful to destroy sin and its fruits among men, and worthy of having some share of the tongue of fire which God sends. --- Origen, {Against Celsus} VIII 22
...우리는 주일, 유월절 준비일, 유월절 (=부활절), 오순절과 같은 날을 기념하며, 그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신의 로고스/말씀이신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 기독교도들은 모든 날들을 주님의 것으로 여기고 늘 주일을 준수한다..... 오리게네스, {켈수스를 반박하며} 8권 22장 / 번역: 최광민
이것은 예수의 탄생일, 즉 크리스마스를 경축하는 기독교의 관례가 부활절이나 주현절과는 달리 상당히 오랫동안 동방에서 정착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물론 요세푸스와 오리게네스의 진술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생일까지 몰랐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생일을 당연히 알고는 있었을 테지만, 그들은 그저 그 날을 "경축"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이유로 예수의 실제 탄생일에 대한 여러 이견들이 고대사회에 분분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 초기 기독교의 세력범위에는 여러 종류의 역법이 혼용되고
있었다
게다가 예수가 탄생한 시점은 로마제국 내에 단일한 역법이 확고하게 통일된
것이 아니라, 로마, 이집트, 그리스 등지에서 서로 다른 역법들이 혼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도들이 예수의 탄생일을 설령 알고 있었더라도,
전승이 지중해와 시리아 동부로 전수되는 과정에서 역법에 따른 혼동이
가미되었고, 그 결과 불분명한 여러 전승에 아울러 실제 크리스마스가
교회력에 정착되기까지 혼란이 가중된 것은 아닐까?
# 크리스마스의 유래에 대한 통상적인 문화인류학적 설명의 예
비교신화학과 문화인류학이 기성종교를 해부하고 해설하는 방식은 참 독특하고 매력적인데, 그 방식이란 것은 대상들의 공통요소를 뽑아내고, 거기서부터 다시 역사적 실체들을 재구성해나가는 방식이다. 이 관점에서 볼때, 어떤 두 대상이 공통요소를 가진다는 것은 이 둘이 공통된 역사적 기원을 가졌거나 또는 직접적으로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비교신화학이나 문화인류학은 어떤 종교적 모티프의 독자적 발생 혹은 우연의 일치란 개념을 잘 믿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적 선후관계, 혹은 지리적 교류 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으면, 표면적 "상관"관계를 "인과"관계 혹은 "차용"관계로 잘못 해석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가령, 아래 인용된 것은 한 백과사전이 설명하는 크리스마스의 기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입장을 때때로 수긍할 수 없다.
왜 그런지 한번 자료를 깊이 검토해 보자.
비교신화학과 문화인류학이 기성종교를 해부하고 해설하는 방식은 참 독특하고 매력적인데, 그 방식이란 것은 대상들의 공통요소를 뽑아내고, 거기서부터 다시 역사적 실체들을 재구성해나가는 방식이다. 이 관점에서 볼때, 어떤 두 대상이 공통요소를 가진다는 것은 이 둘이 공통된 역사적 기원을 가졌거나 또는 직접적으로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비교신화학이나 문화인류학은 어떤 종교적 모티프의 독자적 발생 혹은 우연의 일치란 개념을 잘 믿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적 선후관계, 혹은 지리적 교류 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으면, 표면적 "상관"관계를 "인과"관계 혹은 "차용"관계로 잘못 해석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가령, 아래 인용된 것은 한 백과사전이 설명하는 크리스마스의 기원이다.
"(전략)...이때를 기하여 태양이 하루하루 북으로 올라와 낮이 길어지기 때문에 옛날에는 동지를 중요한 축제일로 삼았으며, 특히 태양신을 숭배하던 페르시아의 미드라교에서는 12월 25일을 ‘태양탄생일’로 정하여 축하하였다. 이 미드라교의 동지제가 로마로 넘어가 크게 유행하였고, 4세기경부터 현재 기독교의 크리스마스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마스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이교도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던 봄의 광명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동지(冬至)의 축일, 다시 말하면 태양숭배의 습속을 이용하여 그리스도 탄생을 기념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농경사회의 로마에서는 ‘사투르날리아’라는 농경신 새턴의 제일(祭日)이 12월 21~31일(혹은 17~24일까지, 또는 1월 1일)까지 계속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이 신은 본래 그리스에서 왔다고 전해지는 고대 이탈리아의 신으로서, 크로노스와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다...(중략)...이 크로노스 신(로마에서는 사투르누스신)을 제사하는 ‘사투르날리아’ 기간에는 노예도 자유롭게 주인의 연회에 참석할 수가 있으며, 혹은 주인이 거꾸로 노예에게 봉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연령 /성별 /계급의 구별 없이 연회 /경기 /행렬 따위가 벌어졌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도 서로 선물을 교환하였다. 이 기간 중에서 12월 25일은 동지가 지난 다음으로 태양이 소생하는 날이라고 하여 특히 기념되었다. 또 ‘미트라의 축일’도 이 날이었다. 미트라는 본래 페르시아인의 신으로서 태양과 동일시된 인도-유럽 민족의 옛 신성(神性)이었다. 이것이 로마 사람들, 특히 군인/병사 사이에서 숭배되어 유럽 각지에 전파되었다. 이것은 태양신, 불패의 태양으로서 숭경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켈트 민족의 제사(祭司)계급이었던 드뤼도들도 그들의 높은 성소(聖所)에서 이 기쁜 날을 축하하고, 또한 게르만인도 이 날을 유쾌하게 축하하였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농경력(農耕曆)상의 성대한 제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을 결합시킨 것이 크리스마스이다. --- 출처 : 두산 대백과사전.
그런데 나는 이 입장을 때때로 수긍할 수 없다.
왜 그런지 한번 자료를 깊이 검토해 보자.
기존의 "대중적"인 문화인류학 서적만을 읽은 사람들은 아마도 다음의 1차사료
(=원전)들을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없을 것이다.
# 크리스마스: 종교적 축일인가? 세속적 축제일인가? - 프로테스탄트들의 입장
로마의 전통적 농경축제(사투르날리아), 혹은 소아시아에서 유래해 로마에 도입된 미트라스교의 미트라스 탄생축일(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이 크리스마스의 기원이라는 주장을 처음 펼친 사람은, 17세기 말의 독일 프로테스탄트 학자인 야브론스키(Paul Ernst Jablonski)와 로마카톨릭 수도사인 아르둥 (Dom Jean Hardouin)이었다.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가 이교적 기원을 가졌다고 주장한 점에서는 일치했으나, 그 해석에 대해서는 정반대였다. 전자는 로마 카톨릭이 이교의 축제를 흡수함으로써 타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주장을 펼쳤고, 후자는 반대로 로마 카톨릭이 교리의 손상없이 이교의 축제를 기독교적으로 순화시켰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주장을 펼쳤다.
동지일인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은 사실 전통적인 로마의 태양신 솔의 축일과는 상관없는 날이었다. AD 2세기 로마에는 태양신에게 헌정된 두 개의 신전이 있었다. 하나는 훗날 동방에서 미트라스교를 변형/수입해 AD 274년에 국가종교를 선포하게 되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집안이 관리하는 신전으로 이 곳에서는 율리우스력으로 8월 9일이 태양신에게 바쳐지는 축일이었다. 다른 솔의 신전에서는 8월 28일을 태양신에게 바쳐지는 축제일로 지켰다. 어느 경우든지, 춘분-추분-동지-하지 등 태양과 관련된 날이 전통적인 로마의 태양신 축제일로 여겨진 경우는 없다
그런데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 동지는 오시리스나 호루스의 탄생일이었을까?
일단 이집트 종교의 주신들인 "오시리스"나 "호루스"의 생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 우선 고대 이집트의 역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AD 200년 경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클레멘스 (혹은 클레멘트, c.150 – c. 215)는 당대에 전해지는 예수의 탄생일들을 언급한다.
우선 클레멘스는 로마의 역사를 계산하면서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코모두스 황제가 죽을 때까지 194년 + 1달 + 13일이 흘렀다는 자신의 계산을 언급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는 율리우스력으로 AD 192년 12월 31일에 살해당했다. 그럼 이 날부터 194년 1달 13일을 역셈해 보자. 율리우스력으로 11월 중반이 예수의 탄생일로 계산된다. 이것이 클레멘스의 계산이다.
그런데 당대에 예수의 탄생일로 계산되던 날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파촌(Pachon) 25일과 파르무티 (Pharmuthi) 25일이 그런 날들이다. 이집트 달력에서 파촌과 파르무트는 모두 봄철이며 부활절 무렵에 속한 두 달이다. 파르무티는 이집트 달력에서는 8번째에 해당하고, 파촌은 9번째 달로서 현재 3-4월에 해당한다. 참고로 이집트 달력의 한 해는 여름에 끝난다.
우선, 옥타비아우스 집권 28년의 파촌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보는 계산법에 대한 클레멘스의 기록을 읽어보자.
그런데 클레멘스는 또 어떤 이들은 예수의 탄생일을 예수의 수난/부활절 무렵의 계절로 계산한다고 적는다. 즉, 이 셈법에 따르면, 예수의 수난은 티베리우스 황제 16년의 파메노스 (7번째 달) 25일, 혹은 파르무티 25일, 혹은 파르무티 19일에 있었던 것이 되고, 파르무티 25일은 예수의 탄생일이 된다. 이 무렵의 계절은 봄철이다. 카르타고의 교부 키프리아노스의 것이라 잘못 알려진 AD 243년의 다른 날짜 계산법 (De paschæ computus)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은 현재 달력으로 3월 28일이 된다.
클레멘스는 또 다른 계산법도 전해주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상당한 교세를 떨쳤던 바실리데스파 이단자들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날을 기념하는 주현절을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 15년의 투비 (Tubi) 15일 혹은 투비 11일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동방의 교회력에서 1월 6일이 주현절로 기념되고 있다.
도대체 왜 AD 200년 무렵 (바실리데스파 이단자를 포함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도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수의 탄생일을 계수하고 있었던 것일까? 무슨 대단한 음모라도 있었던 것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역법의 혼동을 고려해 보자. AD 200년 경, 이집트 일대에서 사용되던 적어도 세 종류의 달력/역법을 생각하면 아주 쉽게 풀릴 수도 있다.
BC 25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강제로 일치시킨 이집트 공용력과 율리우스력의 달을 맞춰보면 아래와 같이 된다.
다시 처음 계산으로 돌아가보자.
클레멘스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부터 코모두스까지를 222년으로 잡는데 ("In all, from Augustus to Commodus, are two hundred and twenty-two years;..."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Book 1, Chapter XXI)), 이것은 아마도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를 패배시키고 이집트에 진군한 BC 30년 무렵부터 계산된 듯 싶다.(192 + 30 = 222).
우선, 클레멘스는 예수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의 시대 (BC 30년)로부터 28년 후라고 적는다.
따라서 이것은 BC 2년이 된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라 (부분)월식 후에 있었던 헤롯대왕의 죽음이 BC 4년이었다고 보기 때문에 클레멘스가 계산 상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BC 4년, 2년, 1년) 여러 번의 월식이 있었고, 따라서 요세푸스가 "어떤 월식"인지를 밝히지 않은 한, 클레멘스의 계산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게 된다.
당시 정황을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7.6.4에서 인용한다.
아무튼 BC 2년부터 코모두스의 사망까지를 계산하면, AD 194년이 나온다. 예수탄생 ~ 코모두스 죽음까지가 194년 1달 13일이란 기록에 따라 예수의 탄생일을 계산해 보자. 만약 클레멘스스가 율리우스력을 따랐다면, 예수의 탄생일은 BC 2년 11월 17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클레멘스가 4년마다 일년을 366일의 윤년으로 하는 형식의 로마 율리우스력을 따르지 않았다면?
만약 클레멘스가 1년을 365일로 고정한 이집트 공용력을 따랐다면, 그는 매년 6시간 씩을 잃게 되며 지난 200여 년간 총 49일을 잃게 된다. 이 경우, 그가 말하는 194년은 194 * 365 = 70,810일 + 1달/30일 + 13일 인 셈인데, 이를 다시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70,853/365.25 = 193.985 년이 된다. 이 계산에서 예수의 탄생일은 BC 1년 1월 5/6일이 된다.
AD 4세기 말/5세기 초반에 살았던 수도사 요하누스 캇시아누스는 AD 420년 경 당시 이집트 수도원들이 옛 관습에 따라 (mos iste antiqua traditione servatur) 예수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와 예수의 세례일인 주현절을 같은 날 함께 기념하고 있다고 {Collationes} (X, 2 in Patrologia Latina P.L., XLIX, 820, http://www.earlymedievalmonasticism.org/texts/Cassian-Collationes.html) 에 적고 있다.
하지만 AD 430년대에 들어서는 이집트에서도 크리스마스와 주현절을 분리해서 기념하게 되었고, Khoiak 29이 크리스마스가 된다. 이날은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이다.
단성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예수의 탄생, 동방박사의 방문,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 의한 예수의 침례를 모두 같은 날인 (율리우스력) 1월 6일에 기념했다. 모든 정교회에서는 예수의 탄생과 동방박사의 방문을 (율리우스력) 12월 25일에, 예수의 침례를 1월 6일에 기념했다. 서방의 라틴교회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12월 25일에 기념하고, 동방박사의 방문을 1월 6일에 기념했다. 그리고 예수의 침례는 1월 6일 다음의 일요일에 기념하도록 정해졌다.
어떤 역법을 따른 것인가? 여러 그룹 간에 서로 다른 역법을 사용해 생긴
날짜의 편차가 있었고 세대가 지나면서 서로 다른 날로 고정된 것은 아닐까?
## 라틴교회의 율리우스력 12월 25일
동지일은 로마의 율리우스력에서 12월 25일이다. 율리우스력은 128년마다 하루를 잃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집전하에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325년까지 실제적으로 동지일은 율리우스력 12월 22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러다가 16세기 말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율리우스력을 그레고리우스력으로 개정할 무렵, 동지일은 율리우스력 12월 12일이 되었다.
이때 그레고리우스는 동지일을 예수 당시나 혹은 율리우스력이 생긴 때가 아닌 니케아 공의회 (AD 325년) 당시의 날짜 (22일)로 다시 세팅해 버렸는데,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새 달력에서 25일에 기념하도록 되었고 동지는 22일이 된 것이다. 따라서 율리우스력의 동지인 25일과 그레고리우스력에서의 크리스마스인 25일은 사실상은 서로 다른 천문학적 의미를 가진 날이다.
그럼 이제 다시 크리스마스를 보자.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이란 근거는 성서에는 전혀 없다.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 "축일"로 기념한 전통을 남긴 최초의 "기록물"은 로마교회의 기록으로 AD 336년의 일이다. 그러나 로마에서 AD 200년대 초반에 활동한 로마사제 히폴리투스는 비록 12월 25일을 교회가 "축일로 기념"하고 있는지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라고 바로 그날을 예수의 "탄생일"로 특정하고 있었다.
# 크리스마스: 종교적 축일인가? 세속적 축제일인가? - 프로테스탄트들의 입장
로마의 전통적 농경축제(사투르날리아), 혹은 소아시아에서 유래해 로마에 도입된 미트라스교의 미트라스 탄생축일(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이 크리스마스의 기원이라는 주장을 처음 펼친 사람은, 17세기 말의 독일 프로테스탄트 학자인 야브론스키(Paul Ernst Jablonski)와 로마카톨릭 수도사인 아르둥 (Dom Jean Hardouin)이었다.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가 이교적 기원을 가졌다고 주장한 점에서는 일치했으나, 그 해석에 대해서는 정반대였다. 전자는 로마 카톨릭이 이교의 축제를 흡수함으로써 타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주장을 펼쳤고, 후자는 반대로 로마 카톨릭이 교리의 손상없이 이교의 축제를 기독교적으로 순화시켰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주장을 펼쳤다.
참고로, 학식높던 예수회 수도사 아루둥은 1696년 발표한 저작에서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키케로, 플리니우스, 베르길리우스 등 몇몇 그리스/로마 작가들의
몇몇 작품을 제외한 모두 고대의 기록물들이 AD 13세기 경에 로마교황과 맞선
신성로마제국을 지지할 불순한 목적을 가진 세베루스 아르콘티우스 (Severus
Archontius)가 이끈 일군의 수도사들에 의해 모두 위조된 것이며, 신약성서도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로 원래부터 작성된 것이었으며, 반-종교개혁 공회의인
로마카톨릭 측의 트렌트 회의 이전의 모든 주교회의도 공상에 불과하단 주장을
펼친 다소 괴짜였다. 현대에는 러시아 수학자 아나톨리 포멘코 (Anatoly
Timofeevich Fomenko, 1945 -)가 유사한 궤적의 주장을 펼치는 인물이다.
한편, 크리스마스에 대한 견해는 16-17세기 종교개혁기에도 프로테스탄트 교단마다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였다. 가령, 유럽의 루터교단, 영국국교회, 네덜란드 칼뱅파 개혁교회 등은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주요성일로 간주한 반면, 영국/미국의 장로교단, 회중교회, 재세례파, 퀘이커 등은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축일"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했다. 고대 사회에서의 "축일"이란, 종교적 기념일 뿐 아니라 거기에 부속된 세속적인 "축제"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유럽에서 로마카톨릭 성인들과 관련된 교회의 축일이 세속적 축제와 연동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런 종교적 기념일과 세속적 축제를 뒤섞는 것에 일반적으로 반대했다.
스위스 개혁교회, 네덜란드 개혁교회, 영국 청교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등의 뿌리가 되는 프랑스 출신의 스위스 종교개혁가 장 칼뱅이 크리스마스에 대해 가진 견해는 복합적인데, 후대 영미계 퓨리턴들의 주장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그가 1555년 크리스마스에 구약성서 {미가}의 내용을 두고 한 설교를 읽어보자.
한편, 크리스마스에 대한 견해는 16-17세기 종교개혁기에도 프로테스탄트 교단마다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였다. 가령, 유럽의 루터교단, 영국국교회, 네덜란드 칼뱅파 개혁교회 등은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주요성일로 간주한 반면, 영국/미국의 장로교단, 회중교회, 재세례파, 퀘이커 등은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축일"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했다. 고대 사회에서의 "축일"이란, 종교적 기념일 뿐 아니라 거기에 부속된 세속적인 "축제"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유럽에서 로마카톨릭 성인들과 관련된 교회의 축일이 세속적 축제와 연동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런 종교적 기념일과 세속적 축제를 뒤섞는 것에 일반적으로 반대했다.
스위스 개혁교회, 네덜란드 개혁교회, 영국 청교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등의 뿌리가 되는 프랑스 출신의 스위스 종교개혁가 장 칼뱅이 크리스마스에 대해 가진 견해는 복합적인데, 후대 영미계 퓨리턴들의 주장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그가 1555년 크리스마스에 구약성서 {미가}의 내용을 두고 한 설교를 읽어보자.
칼뱅은 크리스마스의 그 종교적 의미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정말로 우려했던 것은 하루를 특별히 간주해 성일로 지키는 것이 "날들에 대한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동일한 경고를 "주일성수"에 대해서도 한
바 있다.
특별히 영국의 급진 칼뱅파인 퓨리턴 (청교도)들의 반발이 주목할 만한데, 그들은 영국국교회가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주요 축일로 삼는 것에 대해 교황파, 즉 로마카톨릭교회의 잔재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정교회,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루터교단,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성공회의 입장이라 할 수 있는 "Quod Scriptura non vetat, permittit = 성서가 금하지 않았다면, 허용한다"에 맞서는 퓨리턴들의 성서관을 특징짓는 표어이기도 한 "Quod Scriptura non jubet, vetat = 성서가 명령하지 않았다면, 금한다"에 따라 퓨리턴들은 크리스마스를 "축일"로 기리는 일을 주로 세가지 입장에서 반대했다.
즉 그들의 논거는, (1) 성서는 안식일 (= 주일/일요일의 퓨리턴식 표현) 이외의 어떤 축일도 명시적으로 성별하고 있지 않으며, (2) 성탄절을 축일 (즉, 공공축제일)로 삼을 경우 술파티 등 종교적으로 불건전한 행태가 만연하게 된다는 점, (3) 그리고 12월 25일이란 날짜는 초기 교회가 이교의 축제일을 기독교화 한 것이므로 결국 이교의 관습을 따르게 되어 성탄의 의미를 오염시키게 된다는 것이었다. 제 3항이 얼마나 타당한 근거인지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이들 영국 퓨리턴들의 입장은 이후 이들이 주로 이주한 미국 동부의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거의 200년 간 그 위력을 발휘했다. 우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온 "필그림"들을 이끈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1621년 12월 25일에도 숲에서 작업지시를 내렸는데, 이때 비-필그림 출신으로 정착에 합류하게 된 이민자들이 이에 저항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들이 크리스마스에 놀이를 포함한 파티를 벌이자 브래드포드 총독은 이를 몰수하고, 굳이 크리스마스를 "축제일"로 지키겠다면 집 안에서 하라는 경고를 내렸다. 이후 영국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한 청교도로 장악된 영국의회는 1647년 크리스마스를 축일로서 기념하는 관습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때 부활절 및 오순절 축일도 "축제일"로서 기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어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도 "축제일"로서의 크리스마스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존 녹스 이래로 칼뱅파 장로교회가 국교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스코틀랜드에서는 1640년과 1690년 두차례에 걸쳐 "축제일"로서의 크리스마스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포고령을 의회가 통과시켰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954년이 되어서야 크리스마스가 법정공휴일이 되었다. 그 결과 노동을 강조한 (그리고 거의 모든 종류의 위락과 오락행위를 증오한) 퓨리턴들의 달력에는 (유럽 문화에서 종종 종교적 축제와 겹치는) 거의 휴일이 없었는데 거의 300일이 노동하는 날로 지정되어 있었다. 반면 고대로마로 부터 근세 유럽과 미국의 경우는 대략 240일이 노동하는 날이었다.
각설하고,
현행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이교적"이란 설명은 17세기에 등장해 19/20세기에 반-로마카톨릭 진영과 반-기독교 진영을 통해 널리 퍼지고 이제는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 가설이 여전히 확정된 답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 "정설"에 대치되는 고대 사료들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백과사전이 늘 확정된 사실만 기술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로마의 전통적인 사투르날리아 축제와 미트라스 (정확히는 솔 인빅투스) 제전의 성격을 분명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Now, I see here today more people that I am accustomed to having at the sermon. Why is that? It is Christmas day. And who told you this? You poor beasts. That is a fitting euphemism for all of you who have come here today to honor Noel. Did you think you would be honoring God? Consider what sort of obedience to God your coming displays. In your mind, you are celebrating a holiday for God, or turning today into one but so much for that. In truth, as you have often been admonished, it is good to set aside one day out of the year in which we are reminded of all the good that has occurred because of Christ’s birth in the world, and in which we hear the story of his birth retold, which will be done Sunday. But if you think that Jesus Christ was born today, you are as crazed as wild beasts. For when you elevate one day alone for the purpose of worshiping God, you have just turned it into an idol. True, you insist that you have done so for the honor of God, but it is more for the honor of the devil.
오늘 설교시간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을 봅니다. 이유가 뭘까요? 오늘은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 날이 크리스마스라고 여러분들께 알려줘나요? 이 불쌍한 사람들이여, 여러분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오늘 여기에 왔다고 말하는 것은 미사여구일 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 필자 주)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기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여러분이 여기 나온 것이 어떤 의미로 신께 복종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 생각에 하나님을 위해 축일을 기념하는 것이며, 오늘은 특별히 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여러분들이 그동안 종종 충고받아온 바대로, 일년에 하루를 정해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생긴 모든 좋은 일들을 되새기고, 일요일에 듣게 되겠으나 그 분의 탄생 이야기를 계속 되풀이해 듣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늘 태어나셨다고 여러분이 믿는다면 (= 즉, 그러기에 오늘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해야만 한다고 믿는다면 / 필자 주), 여러분들은 무지한 들짐승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신께 경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루를 특별한 날로 받들 때, 여러분들은 바로 그때 이 날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기리기 위해 이런 일을 한다고 주장하겠죠? 그러나 사실 이런 일은 오히려 보다 악마를 기리는 것입니다. / 번역: 최광민
야Let us consider what our Lord has to say on the matter. Was it not Saul’s intention to worship God when he spared Agag, the king of the Amalekites, along with the best spoils and cattle? He says as much: ‘I want to worship God.’ Saul’s tongue was full of devotion and good intention. but what was the response he received? ‘You soothsayer! You heretic! You apostate! You claim to be honoring God, but God rejects you and disavows all that you have done.’ Consequently, the same is true of our actions. For no day is superior to another. It matters not whether we recall our Lord’s nativity on a Wednesday, Thursday, or some other day. But when we insist on establishing a service of worship based on our whim, we blaspheme God, and create an idol, though we have done it all in the name of God. And when you worship God in the idleness of a holiday spirit, that is a heavy sin to bear, and one which attracts others about it, until we reach the height of iniquity.
우리 주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나 생각해 봅시다. 아말렉인들의 왕 아각과 최고의 전리품과 가축들을 따로 떼어놓았을 때 사울은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의도가 있던 것이죠? 사울은 "나는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에는 신심이 가득하고 좋은 의도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답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 점쟁이, 이단자, 배교자 같은 자여, 너는 신을 기린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너를 버리시고 너에게 하신 모든 일은 철회하신다'였습니다. 결과적으론 이것은 여러분이 하는 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떤 날도 다른 날보다 더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의 탄생을 수요일, 목요일, 혹은 또 다른 어떤 날에 기념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욕망에 따라 어떤 날을 특정해 예배의식을 강제할 때, 우리는 신을 모독하는 것이며, 또 비록 우리가 이 일을 신의 이름으로 한다하더라도 결국 우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축제 분위기의 나른한 마음으로 신께 예배하는 것 자체는 견딜 수 없는 큰 죄이며, 우리가 죄를 높이 쌓아갈 때까지 다른 죄들을 그 주위로 끌어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 번역: 최광민
Therefore, let us pay attention to what Micah is saying here, that God must not only strip away things that are bad in themselves, but must also eliminate anything that might foster superstition. Once we have understood that, we will no longer find it strange that Noel is not being observed today, but that on Sunday we will celebrate the Lord’s Supper and recite the story of the nativity of our Lord Jesus Christ. But all those who barely know Jesus Christ, or that we must be subject to him, and that God removes all those impediments that prevent us from coming to him, these folk, I say, will at best grit their teeth. They came here in anticipation of celebrating a wrong intention, but will leave with it wholly unfulfilled. —From Calvin’s sermon preached on Christmas day 1551 in John Calvin, Sermons on the Book of Micah, trans. Benjamin Wirt Farley (Phillipsburg: P&R Publishing, 2003), 302–04
그러기에 미가 (선지자)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용에 주의를 기울여 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나쁜 것들만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미신을 퍼트릴 수 있는 것 역시 제거하신다는 점입니다. 일단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축일로서 / 필자 주) 오늘 크리스마스를 준수하지 않는 것과, 일요일에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를 듣는 일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여기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에게 우리가 복종함, 그에게 다가가는데 방해가 되는 이런 모든 장애물을 신께서 제거하신다는 점을 거의 모르고 있는 이런 사람들은 기껏해야 이를 갈게 되겠죠. 그런 사람들은 잘못된 것을 기린다는 생각에 여기 온 것이나,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 장 칼뱅, 1551년 크리스마스 설교 / 번역: 최광민
특별히 영국의 급진 칼뱅파인 퓨리턴 (청교도)들의 반발이 주목할 만한데, 그들은 영국국교회가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주요 축일로 삼는 것에 대해 교황파, 즉 로마카톨릭교회의 잔재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정교회,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루터교단,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성공회의 입장이라 할 수 있는 "Quod Scriptura non vetat, permittit = 성서가 금하지 않았다면, 허용한다"에 맞서는 퓨리턴들의 성서관을 특징짓는 표어이기도 한 "Quod Scriptura non jubet, vetat = 성서가 명령하지 않았다면, 금한다"에 따라 퓨리턴들은 크리스마스를 "축일"로 기리는 일을 주로 세가지 입장에서 반대했다.
즉 그들의 논거는, (1) 성서는 안식일 (= 주일/일요일의 퓨리턴식 표현) 이외의 어떤 축일도 명시적으로 성별하고 있지 않으며, (2) 성탄절을 축일 (즉, 공공축제일)로 삼을 경우 술파티 등 종교적으로 불건전한 행태가 만연하게 된다는 점, (3) 그리고 12월 25일이란 날짜는 초기 교회가 이교의 축제일을 기독교화 한 것이므로 결국 이교의 관습을 따르게 되어 성탄의 의미를 오염시키게 된다는 것이었다. 제 3항이 얼마나 타당한 근거인지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이들 영국 퓨리턴들의 입장은 이후 이들이 주로 이주한 미국 동부의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거의 200년 간 그 위력을 발휘했다. 우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온 "필그림"들을 이끈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1621년 12월 25일에도 숲에서 작업지시를 내렸는데, 이때 비-필그림 출신으로 정착에 합류하게 된 이민자들이 이에 저항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들이 크리스마스에 놀이를 포함한 파티를 벌이자 브래드포드 총독은 이를 몰수하고, 굳이 크리스마스를 "축제일"로 지키겠다면 집 안에서 하라는 경고를 내렸다. 이후 영국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한 청교도로 장악된 영국의회는 1647년 크리스마스를 축일로서 기념하는 관습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때 부활절 및 오순절 축일도 "축제일"로서 기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어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도 "축제일"로서의 크리스마스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존 녹스 이래로 칼뱅파 장로교회가 국교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스코틀랜드에서는 1640년과 1690년 두차례에 걸쳐 "축제일"로서의 크리스마스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포고령을 의회가 통과시켰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954년이 되어서야 크리스마스가 법정공휴일이 되었다. 그 결과 노동을 강조한 (그리고 거의 모든 종류의 위락과 오락행위를 증오한) 퓨리턴들의 달력에는 (유럽 문화에서 종종 종교적 축제와 겹치는) 거의 휴일이 없었는데 거의 300일이 노동하는 날로 지정되어 있었다. 반면 고대로마로 부터 근세 유럽과 미국의 경우는 대략 240일이 노동하는 날이었다.
각설하고,
현행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이교적"이란 설명은 17세기에 등장해 19/20세기에 반-로마카톨릭 진영과 반-기독교 진영을 통해 널리 퍼지고 이제는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 가설이 여전히 확정된 답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 "정설"에 대치되는 고대 사료들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백과사전이 늘 확정된 사실만 기술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로마의 전통적인 사투르날리아 축제와 미트라스 (정확히는 솔 인빅투스) 제전의 성격을 분명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 (가설): 과연 크리스마스는 로마 농신제인 사투르날리아에서
비롯되었을까?
사투르날리아 축전은 BC 217년에 로마에 도입되었고 원래는 로마달력 1월 1일의
14일 전인 날 하루동안 기념되었다 (XVI Kal. Jan.).
이후 점차 축제기간이 늘어나 키케로가 살던 BC 1세기 중반까지는 일 주일 간의 축제로 늘어나 있었다. BC 46년 율리우스력의 개정 결과 12월에 이틀이 추가되면서, 사투르날리아의 개시일은 1월 1일로부터 16일 전인 12월 17일이 되었고, 12월 15일의 콘수알리아 (consualia) 축제와 12월 19일의 오팔리아 (Opalia 혹은 Opiconsivia) 축제 사이에 끼어 있었다. 콘수알리아 축제는 추수와 곡식저장을 신격화한 신 콘수스를 기리는 축제로 8월 21일과 12월 15일 두차례 개최되었다. 오팔리아 축제는 농업을 관장하는 여신 오프스 혹은 오피스 여신을 기리는 축제로 8월 25일에 개최되지만, 추수의 끝과 저장을 기념하면서 12월 19일에도 열렸다. 오프스는 사투르누스의 배우자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투르날리아 제전은 17-23일 (율리우스력으로는 12월 25일이 동지일)에 걸치게 된다. 축제기간의 법무행정 상의 공백을 막기위해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가 기간을 3일로 조정하는 시도를 했고, 칼리귤라는 5일로 축제기간을 조정하려고 했다 (Suetonius, XVII; Cassius Dio, LIX.6).
AD 2/3세기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이다.
아래는 로마 역사가 캇시우스 디오의 기록이다.
한편,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한동안 폐지되었던 5일제 사투르날리아를 재개시켰다 (Dio, LX.25). 정확히 말하면, 그가 회복시킨 날은 칼리귤라가 도입한 제 5일째의 추가일이다.
캇시우스 디오의 기록이다.
AD 4/5세기 로마 작가 마크로비우스의 기록을 다시 보자.
눈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왜 사투르날리아 제전과 크리스마스를 나란히 놓는 것이 무리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래의 가정들을 당연한 사실인 듯 너무 굳게 믿다보니 마크로비우스 등 고대인의 원저작을 치밀하게 보려고 하지 않는다.
널리 퍼진 "대중적인 가정"들을 다시 살펴보자.
위에 인용한 마크로비우스의 {사투르날리아}에 따라 날짜들을 정확히 되짚어 가면 이 주장의 문제가 무엇인지 인지하게 될 것이다.
1월 1일부터 날짜를 뒤로 적어놓고 계수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투르날리아가 7일이라는 계산은, 연장된 사투르날리아 (3-5일)의 뒷부분에 Sigillaria 축제의 3일을 합쳤을 때나 그렇다는 것이다.
이후 점차 축제기간이 늘어나 키케로가 살던 BC 1세기 중반까지는 일 주일 간의 축제로 늘어나 있었다. BC 46년 율리우스력의 개정 결과 12월에 이틀이 추가되면서, 사투르날리아의 개시일은 1월 1일로부터 16일 전인 12월 17일이 되었고, 12월 15일의 콘수알리아 (consualia) 축제와 12월 19일의 오팔리아 (Opalia 혹은 Opiconsivia) 축제 사이에 끼어 있었다. 콘수알리아 축제는 추수와 곡식저장을 신격화한 신 콘수스를 기리는 축제로 8월 21일과 12월 15일 두차례 개최되었다. 오팔리아 축제는 농업을 관장하는 여신 오프스 혹은 오피스 여신을 기리는 축제로 8월 25일에 개최되지만, 추수의 끝과 저장을 기념하면서 12월 19일에도 열렸다. 오프스는 사투르누스의 배우자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투르날리아 제전은 17-23일 (율리우스력으로는 12월 25일이 동지일)에 걸치게 된다. 축제기간의 법무행정 상의 공백을 막기위해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가 기간을 3일로 조정하는 시도를 했고, 칼리귤라는 5일로 축제기간을 조정하려고 했다 (Suetonius, XVII; Cassius Dio, LIX.6).
AD 2/3세기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이다.
XVII. He held the consulship four times; the first, from the calends [the first] of July for two months: the second, from the calends of January for thirty days; the third, until the ides [the 13th] of January; and the fourth [411], until the seventh of the same ides [7th January]. Of these, the two last he held successively. The third he assumed by his sole authority at Lyons; not, as some are of opinion, from arrogance or neglect of rules; but because, at that distance, it was impossible for him to know that his colleague had died a little before the beginning of the new year. He twice distributed to the people a bounty of three hundred sesterces a man, and as often gave a splendid feast to the senate and the equestrian order, with their wives and children. In the latter, he presented to the men forensic garments, and to the women and children purple scarfs. To make a perpetual addition to the public joy for ever, he added to the Saturnalia one day, which he called Juvenalis [the juvenile feast] --- Suetonius {De Vita Caesarum--Divus Augustus} XVII
....[전략]...대중들에게 영구적인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헤, 아우구스투스는 사투르날리아에 하루를 추가하고 이를 유베날리아로 명명했다 --- 수에토니우스, {황제들의 생애 - 디부스 아우구스투스 편} 17장 / 번역: 최광민
아래는 로마 역사가 캇시우스 디오의 기록이다.
"....And he increased their hopes still further by ordering that the celebration of the Saturnalia should extend over five days, as well as by accepting from each of those who received the dole of grain only an as instead of the denarius that they were wont to give the emperor for the manufacture of images...." --- {Roman History}, Cassius Dio,LIX.6, Vol. VII of the Loeb Classical Library
...그는 대중들의 기대를 뛰어넘어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5일 이상 지속되어야 한다는 포고를 내렸다......[후략] --- 캇시우스 디오, {로마사} LIX 6 / 번역: 최광민
한편,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한동안 폐지되었던 5일제 사투르날리아를 재개시켰다 (Dio, LX.25). 정확히 말하면, 그가 회복시킨 날은 칼리귤라가 도입한 제 5일째의 추가일이다.
캇시우스 디오의 기록이다.
...In the case of the Saturnalia he restored the fifth day, which had been designated by Gaius but later abolished... --- {Roman History}, Cassius Dio,LX.25, Vol. VII of the Loeb Classical Library
사투르날리아의 경우,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제 5일째 축제일을 부활시켰는데, 이는 가이우스에 의해 제정되었다가 나중에 폐지되었던 것이다. --- 캇시우스 디오, {로마사} LX 25 / 번역: 최광민
AD 4/5세기 로마 작가 마크로비우스의 기록을 다시 보자.
...I think that we have now given abundant proof that the festival of the Saturnalia used to be celebrated on only one day, the fourteenth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but that it was afterward prolonged to last three days: first, in consequence of the days which Caesar added to the month of December, and then in pursuance of an edict of Augustus which prescribed a series of three rest days for the Saturnalia. The festival therefore begins on the sixteenth day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and ends on the fourteenth, which used to be the only day of its celebration.5 [24] However, the addition of the feast of the Sigillaria has extended the time of general excitement and religious rejoicing to seven days.... --- Macrobius, {Saturnalia} Book 1.10.1-23, tr. Davies (1969).
이제 사투르날리아가 원래는 1월 칼렌드로부터 14일 전 하루동안 즐기는 것이었다가 나중에 3일 간의 축제로 발전된 사실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제시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래의 하루에 이어 우선 카이사르가 일련의 날들을 12월에 추가했고, 아우구스투스의 포고령에 의해 사투르날리아는 3일의 축제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그 축제는 1월 칼렌드로부터 16일 전에 시작되어 14일 전에 마치게 되었고, 이 기간 동안만이 사투르날리아가 지켜지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즐거움과 종교적 이유로 시길라리아 축제가 추가되어 7일 간의 축제로 늘어났다. --- 마크로비우스 {사투르날리아} 1권 10장 / 번역: 최광민
눈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왜 사투르날리아 제전과 크리스마스를 나란히 놓는 것이 무리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래의 가정들을 당연한 사실인 듯 너무 굳게 믿다보니 마크로비우스 등 고대인의 원저작을 치밀하게 보려고 하지 않는다.
널리 퍼진 "대중적인 가정"들을 다시 살펴보자.
- 사투르날리아는 사투르누스/크로노스를 기리는 축제다.
- 그 축제의 끝자락 무렵에 동지가 있다.
- 동지는 고대 로마에서 중요한 날이었다.
- 동지일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은 사투르누스를 기리는 날이다.
- 고대 말에 크리스마스는 율리우스력으로 12월 25일로 세팅되었다.
- 따라서 크리스마스는 사투르날리아의 변형이다.
위에 인용한 마크로비우스의 {사투르날리아}에 따라 날짜들을 정확히 되짚어 가면 이 주장의 문제가 무엇인지 인지하게 될 것이다.
1월 1일부터 날짜를 뒤로 적어놓고 계수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 원래 사투르날리아는 율리우스력이 나오기 전 로마 달력 1월 1일부터 (Kanlend)의 계수해 14일 전의 날 하루였다. 따라서 사투르날리아가 사투르누스의 제일을 포함하려면 바로 이 날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날은 동지일이 아니다. 동지일은 로마달력의 신년으로부터 8번째의 전날로 계수된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BC 46년에 로마달력을 개정할 때 더해진 12월의 날들로 인해, 사투르날리아는 로마 새해로부터 16일 전에 시작되게 된다. 역시 동지를 포함하지 않는다.
-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3일, 칼리귤라와 클라우디우스는 5일의 사투르날리아를 공인했다. 이것은 개시일로부터 3일과 5일을 말한다. 사투르날리아 축제의 개시일은 고정되어있다. 그런데 동지일은 7일로 최고로 연장된 사투르날리아 축제의 마지막이다. 만약 사투르날리아에 사투르누스의 제일이 포함된다면, 따라서 반드시 축제의 첫날, 혹은 첫날로부터 3일 안, 혹은 5일 안 쪽에 들어있어야 한다. 역시 사투르누스는 동지와 상관이 없다.
사투르날리아가 7일이라는 계산은, 연장된 사투르날리아 (3-5일)의 뒷부분에 Sigillaria 축제의 3일을 합쳤을 때나 그렇다는 것이다.
# (가설): 크리스마스는 태양신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동지축제에서
과연 유래했을까?
그럼 (토기나 밀납인형을 선물로 주고받던 풍속이 알려져 있는) 로마
Sigillaria 축제와 태양신, 동지 등과의 관련은? 모호하다. 참고로 연말에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은 여러 문명권에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의 경우도 연말에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그리스의 새해는 지역에 따라 달랐다. 아테네와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에서는 하지 후 첫 달이 뜰 때가 신년이었다. 도리아
지방에서는 추분이 새해 시작이었다. 반면, 그리스 중부지방인 보에티아에서는
동지가 신년의 시작이었다.
동지일인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은 사실 전통적인 로마의 태양신 솔의 축일과는 상관없는 날이었다. AD 2세기 로마에는 태양신에게 헌정된 두 개의 신전이 있었다. 하나는 훗날 동방에서 미트라스교를 변형/수입해 AD 274년에 국가종교를 선포하게 되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집안이 관리하는 신전으로 이 곳에서는 율리우스력으로 8월 9일이 태양신에게 바쳐지는 축일이었다. 다른 솔의 신전에서는 8월 28일을 태양신에게 바쳐지는 축제일로 지켰다. 어느 경우든지, 춘분-추분-동지-하지 등 태양과 관련된 날이 전통적인 로마의 태양신 축제일로 여겨진 경우는 없다
그런데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By the way, December 25 is also the birthday of Osiris, Adonis, and Dionysus.” -- Dan Brown, {The Da Vinci Code}, Chapter55
어쨋거나, 12월 25일은 또한 오시리스, 아도니스, 디오니소스의 탄생일이기도 하지. --- 댄 브라운, {다빈치 코드} 제 55장
도대체 언제부터?
## 동지는 오시리스나 호루스의 탄생일이었을까?
일단 이집트 종교의 주신들인 "오시리스"나 "호루스"의 생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 우선 고대 이집트의 역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 이집트의 연말과 새해는 서구의 율리우스력이나 그레고리우스력의 1월
무렵이 아니라 한 여름에 해당한다 (이집트는 엄연히 북반구란 점을 기억하자).
이집트의 역법을 이해하는 중요한 힌트는 고대 이집트의 달력이 태양의 주기가
아닌 나일강의 범람주기, 즉 시리우스 주기에 맞춰져 있었다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의 역법에 대해 짧게 정리해 보자.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역법은 기본적으론 달의 주기를 바탕하고 여기에 계절의 주기(즉, 태양 혹은 시리우스)로 편차를 보정한 태음력 (synodic)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이 이집트 공용력 (civil calendar)는 지식의 신 토트가 창안한 것으로 여겨졌다.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이미 사용되던 이 이집트 공용력은, 농업주기 즉 나일강 범람주기에 맞춰 일 년을 세개의 계절로 나누고 한 달은 정확히 30일로 설정하였다. 이렇게 하면 약 5일이 비기 때문에 나머지 5일로 구성된 작은 달 (그리스어로 epagomenoi)을 연 말에 두고, 고대 이집트의 다섯 주요 신들의 탄생일을 이 5일 간의 달에 설정했다. 태음력에서의 한 달은 약 29.5일이 되며, 시리우스에 맞춘 항성력에서의 한 달은 약 27.333일이 된다. 이집트인들이 일 년을 정확히 365일로 간주하였고 윤년/윤달을 사용해 오차를 보정하는 장치가 없었다. 이 결과 고대 이집트 공용력은 대략 매 4년 마다 하루씩 계절과 어긋나게 된다. 각 계절에 정확히 120일을 할당하였기 때문에 완전한 음력인 것도 아니다.
이집트 공용력과 함께 병존한 것은 시리우스 주기에 따른 항성력/sidereal, 즉 시리우스력 (sothic calendar)이다. 시리우스의 주기가 나일강의 범람주기와 일치했기 때문에 농경주기에 보다 밀접히 연결된 농민들의 역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시리우스의 주기는 약 365.25일이다. 이 주기는 약 365.2422일에 해당하는 태양력과 근접해 있다. 이 경우 이집트 공용력에 비해서는 계절과 훨씬 잘 일치되기는 하지만, 아직 이 보다 명확한 윤년 개념을 도입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보정은 여전히 필요했다
고대 이집트력의 개정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 후 이집트에 성립된 그리스계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시작되었다. BC 239년에 프톨레마이오스 III 유에르게테스 I세는 이집트 공용력과 항성력을 강제로 일치시키는 조치 (카노포스 포고령)를 취한다. 이집트 역법에 처음으로 윤년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이 조치위 취지 가운데 하나는 축제/제전의 개최시기를 동일한 계절에 맞추자는 것이었다. 가령 현재 겨울에 치러지는 축제/제전이 세월이 지나 여름에 치러지는 것을 막자는 것인데, 따라서 BC 3세기의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종교축제를 이집트 공용력에 따라 지켰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 방법으로는 매 4년 마다 신년 직전에 있는 5일 간의 epagomenoi에 하루를 더하는 방법에 채택되었다. 이집트의 신년은 동지 무렵이 아니라 한 여름이다.
고대 이집트의 역법에 대해 짧게 정리해 보자.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역법은 기본적으론 달의 주기를 바탕하고 여기에 계절의 주기(즉, 태양 혹은 시리우스)로 편차를 보정한 태음력 (synodic)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이 이집트 공용력 (civil calendar)는 지식의 신 토트가 창안한 것으로 여겨졌다.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이미 사용되던 이 이집트 공용력은, 농업주기 즉 나일강 범람주기에 맞춰 일 년을 세개의 계절로 나누고 한 달은 정확히 30일로 설정하였다. 이렇게 하면 약 5일이 비기 때문에 나머지 5일로 구성된 작은 달 (그리스어로 epagomenoi)을 연 말에 두고, 고대 이집트의 다섯 주요 신들의 탄생일을 이 5일 간의 달에 설정했다. 태음력에서의 한 달은 약 29.5일이 되며, 시리우스에 맞춘 항성력에서의 한 달은 약 27.333일이 된다. 이집트인들이 일 년을 정확히 365일로 간주하였고 윤년/윤달을 사용해 오차를 보정하는 장치가 없었다. 이 결과 고대 이집트 공용력은 대략 매 4년 마다 하루씩 계절과 어긋나게 된다. 각 계절에 정확히 120일을 할당하였기 때문에 완전한 음력인 것도 아니다.
이집트 공용력과 함께 병존한 것은 시리우스 주기에 따른 항성력/sidereal, 즉 시리우스력 (sothic calendar)이다. 시리우스의 주기가 나일강의 범람주기와 일치했기 때문에 농경주기에 보다 밀접히 연결된 농민들의 역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시리우스의 주기는 약 365.25일이다. 이 주기는 약 365.2422일에 해당하는 태양력과 근접해 있다. 이 경우 이집트 공용력에 비해서는 계절과 훨씬 잘 일치되기는 하지만, 아직 이 보다 명확한 윤년 개념을 도입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보정은 여전히 필요했다
고대 이집트력의 개정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 후 이집트에 성립된 그리스계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시작되었다. BC 239년에 프톨레마이오스 III 유에르게테스 I세는 이집트 공용력과 항성력을 강제로 일치시키는 조치 (카노포스 포고령)를 취한다. 이집트 역법에 처음으로 윤년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이 조치위 취지 가운데 하나는 축제/제전의 개최시기를 동일한 계절에 맞추자는 것이었다. 가령 현재 겨울에 치러지는 축제/제전이 세월이 지나 여름에 치러지는 것을 막자는 것인데, 따라서 BC 3세기의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종교축제를 이집트 공용력에 따라 지켰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 방법으로는 매 4년 마다 신년 직전에 있는 5일 간의 epagomenoi에 하루를 더하는 방법에 채택되었다. 이집트의 신년은 동지 무렵이 아니라 한 여름이다.
그런데 이집트 신관들과 평민들은 이 포고령을 순순히 따르지 않았던 듯 싶다.
보다 확실한 개정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소시게네스의 자문을 받아 개정한 기원전 46년의 율리우스력이다. 이 개정은
일년을 365일로 설정하고 매 4년마다 로마력 2월을 윤달로 정해 보정함으로써,
일 년을 365.25년으로 보정하는 작업이었다
이 포고령으로 이집트의 공용력은 비로소 공식적으로 개정된다. 이 조치가 있기 전까지는, 이집트의 새해는 시리우스가 떠오르는 토트(달)의 첫 날이었는데, 개정 후에는 토트(달)이 시리우스가 떠오는 후 41일 뒤로 조정되었다. 그래서 개정 공용력 (흔히 알렉산드리아력이라고 한다.)의 새해는 시리우스 항성력의 파오페(달) 12일이되었다. 이 달력은 후대의 이집트 기독교도들인 꼽트교도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수되고 있다
그럼 BC 30년에 강제로 세팅된 이집트력과 율리우스력을 비교해 보자. 이집트력의 새해는 토트달에서 시작하며 이 새해의 첫날은 율리우스력 8월 29일로 세팅된다
오시리스 생일은 고대 이집트의 공용달력에서 1년의 마지막 5일의 첫날에 기념되었다. 이것은 율리우스력이나 현행 그레고리우스력에서는 한 여름에 해당한다. 12월 25일 혹은 동지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율리우스력에 대응하는 근사일은 플루타르코스(c. 46 – 120 AD)의 기록에 바탕해 AD 1세기 말경에 맞추겠다
이 포고령으로 이집트의 공용력은 비로소 공식적으로 개정된다. 이 조치가 있기 전까지는, 이집트의 새해는 시리우스가 떠오르는 토트(달)의 첫 날이었는데, 개정 후에는 토트(달)이 시리우스가 떠오는 후 41일 뒤로 조정되었다. 그래서 개정 공용력 (흔히 알렉산드리아력이라고 한다.)의 새해는 시리우스 항성력의 파오페(달) 12일이되었다. 이 달력은 후대의 이집트 기독교도들인 꼽트교도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수되고 있다
그럼 BC 30년에 강제로 세팅된 이집트력과 율리우스력을 비교해 보자. 이집트력의 새해는 토트달에서 시작하며 이 새해의 첫날은 율리우스력 8월 29일로 세팅된다
- Thot 1일 = (율리우스) 8월 29/30일
- Paophi 1일 = 9월 28/29일
- Athyr 1일 = 10월 28/29일
- Choiak 1일 = 11월 27/28일
- Tybi 1일 = 12월 27/28일
- Mechir 1일 = 1월 26/27일
- Phamenoth 1일 = 2월 25/26일
- Pharmuthi 1일 = 3월 27일
- Pachon 1일 = 4월 26일
- Payni 1일 = 5월 26일
- Epiphi 1일 = 6월 25일
- Mesori 1일 = 7월 25일
-
epag. 1일 = 8월 24일 : 5일 간의 추가일 (= 신들의
탄생기념일들)
오시리스 생일은 고대 이집트의 공용달력에서 1년의 마지막 5일의 첫날에 기념되었다. 이것은 율리우스력이나 현행 그레고리우스력에서는 한 여름에 해당한다. 12월 25일 혹은 동지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율리우스력에 대응하는 근사일은 플루타르코스(c. 46 – 120 AD)의 기록에 바탕해 AD 1세기 말경에 맞추겠다
율리우스력 | 계절 | 고대이집트어 / Kemetic | 꼽트어 | 그리스어 | 주요 축제 | 기념되는 신(들) |
새해 시작 8월 경 |
1 Akhet 범람기 #1 |
중왕조: Tekhi 신왕조: DHhwty |
Tout | Thoth |
1st Akhet: 새해, Wag 축제 (오시리스), Abydos의 오시리스 축제, Djehuty 축제, Hathor 축제 (Festival of Intoxication) |
Djehuty (Thoth) |
2nd Akhet 범람기 #2 |
중왕조: Menkhet ('Clothing') 신왕조: pa-en-ipet ('The one of Karnak') |
Paopi | Phaôphi |
2nd Akhet: Festival of Ptah South of His Wall (MenNefer) Opet Festival (Waset) |
Ptah | |
3rd Akhet 범람기 #3 |
중왕조: Khenet Het-Hert ('Voyage of Het-Hert') 신왕조: Hwt-Hr(w) ('Het-Hert') |
Athor |
Athyr |
3rd Akhet: Festival of Hathor (Dendera & Edfu) |
HetHert (Hathor) |
|
4th Akhet 범람기 #4 |
중왕조: Nekheb-Kau ('Apportioner of 'ka´s') 신왕조: kA-Hr-kA ('Ka upon Ka') |
Khoiak | Khoiak |
4th Akhet:Festival of Wesir at Abedjou Festival of Sokar at MenNefer Festival of Sekhmet |
Sekhmet | |
1st Peret 경작기 #1 |
중왕조: Shef-bedet ('Swelling of Emmer-wheat') 신왕조:Ta-ahbet ('The Offerings of Mut') |
Tobe | Tybi |
1st Peret: Festival of Nehebkau Festival of the Coronation of the Sacred Falcon (Edfu) - 에드푸에서 기념된 매로 표상된 호루스 축일 Festival of Min Festival of the Departure of Mut |
Mut, Min | |
2nd Peret 경작기 #2 |
중왕조: Rekeh-Aa ('Big Burning') 신왕조: Pa-en-pa-mekhru ('The one of the censor') |
Mechir | Mekheir |
2nd Peret: Festival of Victory (Edfu) Great Brand Festival |
Aset (Isis) |
|
3rd Peret 경작기 #3 |
중왕조: Rekeh-nedjes ('Little Burning') 신왕조: Pa-en-Amen-hotep ('The one of Amenhotep') |
Parmhotp | Phamenôth |
3rd Peret: Small Brand Festival Festival of Amenhotep |
Amun, Amenhotep I |
|
4th Peret 경작기 #4 |
중왕조: Renen-wetet (Harvest deity) PaenRenenutet ('The one of Renenutet') |
Parmoute | Pharmouthi | 4th Peret: Renenutet 축제 |
Renenutet | |
1st Shomu 추수기 #1 |
중왕조: Khonsu (Moon deity) 신왕조: Pa-en-Khonsu ('The one of Khonsu') |
Pakhons | Pachôn |
1st Shomu: Khonsu 축제, Festival of the Departure of Min |
Khonsu | |
2nd Shomu 추수기#2 |
중왕조: Khenet-KhetyPerti ('Khentekhtai-perti') A deity 신왕조: Pa-en-inet ('The one on the wadi') |
Paone | Payni |
2nd Shomu: Beautiful Feast of the Valley (Waset) |
Heru (호루스) |
|
3rd Shomu 추수기 #3 |
중왕조: Ipet Hemet ('She whose incarnation is select') 신왕조: Ipi-ipi (derived from Ipet hemet?) |
Epep | Epiphi |
3rd Shomu: Festival of the Beautiful Reunion; (Dendera & Edfu 지역에서의 하토르 및 호루스 축제) |
Wadjet | |
4th Shomu 추수기 #4 |
중왕조: Wepet Ronpet ('Opening of the year') 신왕조: Mesut-Ra ('Birth of Ra') |
Mesori | Mesore |
4th Shomu: Re-Horakhty 축제; 새해기념 축제 (Wep Renpet) |
Ra-Horakti (라와 융합된 호루스) |
|
5일 간의 잔여일 (Epagomenal Days) | 제 1일: 오시리스 탄생일 | 제 2일: 호루스 탄생일 | 제 3일: 세트 탄생일 | 제 4일: 이시스 탄생일 | 제 5일: 네프티스의 탄생일 | 1/4일의 차이로, 어떤 해는 제 6일 차가 삽입. |
AD 2세기 초반의 아폴론 신관이자 작가인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에서
인용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집트 신들을 그리스 신들의 이름으로 대치시키고
있으니 주의해서 읽어보자. AD 1세기 바로 이집트에서 유통되던 신들의 족보는
아래와 같이 복잡하다.
플루타르코스는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52장 속에서 이집트인들 중에 "오시리스는 해, 이시스는 달" 이란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하는 이집트인들이 AD 1세기 중후반에도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럼 오시리스는 태양신인가? 그런데 플루타르코스는 또 다른 부류의 이집트인들이 같은 시절에 "오시리스는 달, 티폰/세트는 해" 라고 주장하고 있었음을 {모랄리아} 제 41장에 적고있다. 따라서 최소한 AD 1세기 후반 - 2세기 초반까지도 오시리스의 속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립된 이론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다시 플루타르코스를 인용해보자.
## 과연 동지는 디오니소스의 탄생일일까?
한편, 디오니소스는 탄생일은 최소한 두가지다: 한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의 실체를 본 세멜레가 불타버릴 때 태아상태로 구출된 디오니소는 제우스 허벅지에 꿰매져 있다가 태어난다. 이 탄생축제는 포도수확이 있던 9월에 기념되었다. 두번째 탄생축제는 지중해 일대에서 '레나이아' 축제로 불리던 것으로, 9월 무렵에 담근 포도주가 출하되는 1월에 있었다. 이 뿐 아니라 고대사회의 모든 디오니소스 축제는 태양이라기보다는 포도의 재배주기 및 포도주의 출하시기와 연관되어 있다. 물론 농사주기가 태양의 주기를 따르긴 하지만, 태양의 천문학적인 의미와는 연결짓는 건 무리다.
오시리스와 디오니소스의 탄생일이 동지와 연관된 12월 25일 이었다는 고대 원기록은 없다. 사실은 그런 기록이 있을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들이 원래부터 "태양신"의 신격을 가졌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AD 5세기의 로마 문법학자이자 신-플라톤주의자였던 이교도 마크로비우스는 자신의 저서 {사투르날리아}에서 지중해 여러 신격들이 어떤 방식으로 태양신으로서의 속성을 획득하게 되었는 지를 간략하게 적는다. 그의 주장은 현대 신화학자들의 무리한 해석들과 유사하다.
# 과연 동지는 아도니스의 탄생일일까?
소아시아/앗시리아 지역에서 신봉되던 아도니스의 예를 들어보자.
이 진술 속에서 마크로비우스가 아도니스를 태양에 연관짓는 논리를 정리해보자.
이런 논리전개 방식은 전형적인 현대 신화학자의 즐겨 사용하는 논리(적 비약)과 유사하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조셉 캠벨이 주로 농경주기와 관련된 신들과 태양신을 연결했던 것과는 달리, 마크로비우스는 거의 모든 남신을 태양신으로 간주하고, 모든 여신들 땅의 여신으로 간주했다. 이들 태양신들에는 마르스, 유피테르, 사투르누스, 헤라클레스 등을 망라한다.
계속해서 마크로비우스의 진술을 읽어보자.
그럼 "태양신"은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최고의 신격이었는가? 꼭 그렇지도 않다. 사람들의 상식과 달리, 사실 태양신은 이 지역의 판테온에서 상당히 왜소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태양신으로 "폭넓게 간주된" 신들 말고, 태양신으로 "정확히 특정된" 신들이 누구였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스와 로마의 12주신 중 하나인 아폴론/아폴로가 먼저 떠오를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에게 태양신은 대체로 티탄 (거신족) 헬리오스나 휘페리온, 로마인에게는 솔을 의미했다.
# 과연 동지는 솔, 헬리오스, 엘-게발, 미트라스 등 태양신들의 탄생일일까?
그럼 관심을 솔, 헬리오스, 엘-게발, 미트라스 등 "진짜" 태양신들의 제전으로 옮겨보자.
원래 미트라스교는 로마인에게 이질적인 종교였다. 굳이 말한다면 그 "원형"이 고대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이 남성적인 종교는 아마도 BC 1세기 말 혹은 AD 1세기 중/후반에 로마제국 동부 혹은 로마에서 새로운 비의종교로 새롭게 창시되어, 로마제국의 정복사업을 따라 급속도로 널리 퍼져나갔다. 페르시아 본토의 미트라교와 로마제국 동부변방에서 수입된 로마 미트라스교를 같은 종교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매우 많다. 교리와 상징면에서 유사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AD 1세기 말에는 로마제국의 다른 쪽 끝인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영국)에 이미 미트라스를 위한 예배소 (Mithraeum)가 세워졌다. 이 형태의 미트라스교는 비밀종교/미스테리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나중에 국가종교의 형태로 변용되는 솔 인빅투스와는 다소 간 차이가 있다. 밀교 형태의 미트라스교에서 미트라스와 태양인 솔/헬리오스는 늘 분리되어 등장하고 묘사되기 때문이다. 미트라스와 그의 확장인 솔 인빅투스는 군인황제가 난립하던 무렵에 기존의 로마 종교와 경합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태양신"이 그 자체로서 주신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다. 로마제국에서는 AD 3세기가 지나 엘라가발루스나 아우렐리아누스 등 군인황제의 비호 아래 소아시아에서 유입된 태양신 엘-가발(엘라가발)이나 미트라스의 형태로 국가종교 형태로 소개된 후에야 비로소 태양신은 이제 최고신의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로마에 태양신이 유피테르를 정점으로 하는 로마종교 판테온을 압도하게 되는 과정은 AD 3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 동지는 엘라가발루스의 태양신 "엘-게발"의 탄생일이었을까?
AD 193년에서 211년 동안 로마황제였던 세베루스는 40세가 되기 전에 자식 없는 홀아비가 되었다. 새로이 결혼하기 위해 세베루스는 별점을 쳤는데, {Historia Augusta}에 따르면 이 무렵 자신이 "왕"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율리아 돔나라는 아랍 혹은 아르메니아계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와 재혼하게 된다. 이 율리아 돔나의 아버지인 율리우스 바시아누스는 시리아 관할권에 있던 에메사의 왕/신관을 겸임한 인물로서, 이 에메사에서는 검은 바위로 표상되는 "산신"이라는 뜻의 신 엘-게발을 태양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이 에메사의 태양신 엘-게발은 세베루스의 치하에 로마 전역에 퍼져나간다.
한편, 돔나의 언니인 율리아 메사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 엘라가발루스/헬리오가발루스 (재위 AD 218-222)의 할머니가 된다. 에메사의 피를 잇는 엘라가발루스는 재위에 오르기 전 엘-게발의 신관이었다. 그는 AD 218년 로마황제가 되자마자 자신의 신 엘-게발을 데우스 솔 인빅투스로 개명해 로마에 도입하고, 로마전통의 최고신 유피테르보다 높은 지위에 둔다. 아울러 아스타롯, 미네르바, 우라니아 등의 그리스/로마 여신들을 엘-가발/데우스 솔 인빅투스의 아내로 설정했고, 엘-가발의 신관이었던 그 자신의 집례로 로마인들에게 이 새로운 태양신을 강요한다. 이 엘-가발 버전의 솔 인빅투스의 축일은 동지일이 아니라 한 여름이었다고 AD 2-3세기의 역사가인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헤로디아노스는 {로마사} 5권 6장에 적는다.
엘라가발루스의 암살 후, 엘라가발루스 버전의 이 '솔 인빅투스'는 잊혀져 간다. 그러다가 로마황제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년)가 재도입한 버전의 '솔 인빅투스'는 엘라가발루스의 엘-가발/솔 인빅투스보다 로마의 전통 태양신 솔에 가까운 기원을 가지고 있다.엘라가발루스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솔 인빅투스 도입이 의도한 것은 명백하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태양신의 신격을 정점으로 하고, 그 신 아래 여러 다양한 신격을 모아들이려 했다. 즉, 제국 내 여러 신들을 태양신으로의 통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기독교를 포함한 당대의 종교들이 태양신을 서로 베낀게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국가종교인 솔 인빅투스/미트라스교가 제국 내 다른 종교들을 "의도적으로" 끌어와 종합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AD 3세기 초반에 집권한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경우, 당시의 지중해 일대에서 유행하던 종교들인 오시리스교, 디오니소스교, 아도니스교 뿐 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물을 강탈해 그가 로마에 도입한 태양신 헬리오가발루스의 신전으로 보냈고, 또한 여러 종교의식을 헬리오가발루스의 의식에 접목시킨 후, 오직 헬리오가발루스만 숭배할 것을 지시했다. 이것은 태양신 헬리오가발루스와 다른 종교의 주신들을 강제로 일치시키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일반인에게 퍼진 오시리스와 디오니소스 및 아도니스에게 공식적으로 태양신의 속성이 부여된 것은, "아주 고대의 일"이 아니라 AD 3세기 이후의 일이 된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Historia Augusta}에서 인용한다. .
## 동지는 아우렐리아누스의 태양신 "솔"의 탄생일이었을까?
{Historia Augusta}에 따르면, 태양신 솔의 확장인 솔 인빅투스를 도입한 아우렐리아누스의 집안은 대대로 로마의 전통 태양신인 솔의 신전에 봉직했고, 그의 어머니는 태양신 솔의 여사제였다. 여기서 로마의 태양신 솔에 대해 조금 더 덧붙이기로 하자.
로마 측 사료에 따르면 (August. de Civ. Dei, iv. 23) 솔은 BC 8세기에 로마인들의 이웃인 사비안 족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에 의해 로마인의 종교로 도입되었다. 솔의 신전은 라티움 평원을 가로지르는 누미키우스강의 강변에 있었다. AD 1세기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로마 공화정 시대에 솔의 옛 신전은 로마의 전차경주장이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에 위치해 있었다. 솔의 이 옛 신전은 솔 인빅투스라는 새로운 종교로 치환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또 다른 솔의 신전은 로마 7개의 언덕 가운데 하나인 콜리스 퀴리날리스 (Collis Quirinalis)에 있던 것으로 로마력 8월 9일에 초기 형태의 로마 태양신인 솔 인디게스 (Sol Indiges) 에게 제물을 바치던 곳이었다. 로마의 종교제례일을 기록한 유물인 BC 84-55년 경의 파스티(Fasti)에 따르면, 솔 인디게스를 기리는 축제는 로마력 12월 11일에, 또 솔(태양)과 루나(달)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일은 로마력 8월 28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로마의 태양신 솔의 제례일인 8월 9일과 28일, 그리고 12월 11일은 그가 태양신임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춘/추분, 동/하지 등의 태양주기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
"아우렐리아누스가 AD 274년 새로운 솔 인빅투스의 신전을 봉헌하면서부터 12월 25일 (동지)가 태양신의 탄생일로 지켜졌다" 혹은 "아울렐리아누스는 태양신의 탄생일인 12월 25일에 새로운 솔 인빅투스 신전을 AD 274년에 봉헌했다"는 속설은, 사실은 사료에 기반하지 않은 역사학자들의 순수추론이란 것을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른다.
보통 로마의 신을 기리는 제례는 해당 신에게 바쳐지는 축제와 운동경기의 개최와 긴밀히 연결된다. 로마 축제 중에 많은 것들이 그리스의 축제를 도입/변형한 것인데, 아우렐리아누스가 솔에게 헌정한 축제/경기가 바로 '아곤'이라는 형식의 축제로 원래 그리스에서는 다양한 그룹 (가령, 예술가) 일종의 경쟁으로 자웅을 가리는 축제들이었고, 아우렐리아누스 시대 전에도 이 형식의 축제가 로마에 도입된 적 있다. 이 형식의 축제는 4년 마다 개최되었다. (직접 연관은 없지만 역시 4년 마다 열리던 그리스의 올림피아드를 생각해 보자.)
특별히 아우렐리아누스가 새로 도입한 축제의 이름은 '아곤 솔리스' 즉, '태양에게 바치는 경기'란 뜻이다. 이에 대해 두가지 고대기록을 확인해 보자.
우선 (뒤에 자세히 설명할) AD 354년의 연감이다.
두번째로 살펴볼 자료는 라틴어 {불가타} 성서의 번역자로도 유명한 히에로니무스의 {크로니콘}이다. 이 연대기는 히에로니무스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그리스어로 작성한 연대기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시리아어 발췌 번역본도 남아있다.) 유세비우스의 원작 그리스어 판은 망실되었다. 이 연대기에서 2291 AA (=275 AD, 1년의 오차가 있음)에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에 태양신전을 세우고 태양에게 바쳐진 첫 경기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AD 354년과 362년 이전에 12월 25일 동지에 솔을 기리는 축제/경기가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없다.
## AD 354년 기념된 12월 25일의 "인빅투스" 축제?
현존하는 고문서 중 "인빅투스의 탄생일/축제"를 12월 25일로 기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AD 354년의 달력이다. 이것이 12월 25일과 솔 인빅투스 제전을 연결하고 있는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의 날짜로 특정하고 있는 라틴교회의 기록은 뒤에서 설명할 AD 3세기 초반의 라틴교부 히폴리투스의 기록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기록상으로만 본다면 기독교 측의 증거가 한 세기 이상 앞선다.
이 고대 달력/연감은 기독교가 공인된 당시 로마의 부유한 기독교도였던 발렌티누스에 의해 발행된 것으로, 기존 로마의 연대표 뿐 아니라 기독교 축일에 대한 내용도 함께 담고 있다. 일단 이 연대기의 일부인 달력 (The Philocalian Calendar) 부터 살펴보자.
이 AD 354년 12월의 달력에서 사투르날리아는 율리우스력 12월 17-23일에 해당하며, "인빅투스 탄생일(N=Natalis)/ N-INVICTI"은 12월 25일로 기록되어 있다. "CM-XXX"은 CM/Circenses missus (=games ordered) 30 이란 뜻으로 축일과 관련된 (전차) 경기가 30번의 (전차)경기가 치러졌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로마의 축제에서 전차경기는 평균적으로 24회 치러지는데, AD 354년의 달력에 따르면 그 해의 8월 28일이 로마의 태양신 솔과 달의 신 루나에 배정되어 있고 24회의 전차경기가 치러진다. 또한 태양신 솔에게 바쳐지는 경기인 루디 솔리스/Ludi Solis (= 태양에게 헌정된 경기)는 10월 19-22일에 배정되고 36회의 전차경기가 치러진다. 역사가들은 10월 19-22일의 루디 솔리스가 AD 274년 아우렐리아누스가 솔 인빅투스 신전을 로마에 봉헌한 사건과 관련되어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이 달력은 이 "인빅투스"가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고있다. "인빅투스"는 태양신/솔/미트라스에게만 붙여진 "칭호"는 아니기 때문에 보다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가령, 로마제국 초반의 달력에는 로마의 전통신 유피테르나 마르스에게도 "유피테르 인빅투스"나 "마르스 인빅투스" 같은 호칭을 붙이고 있다. 그 뿐 아니라 헤라클레스, 아폴로, 실바누스 등의 신/영웅들에 대해서도 "인빅투스"란 호칭을 붙이고 있었다. 따라서 "인빅투스"는 엘-가발, 미트라스, 솔 같은 태양 계열의 신들에 대해서만 적용된 호칭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아우렐리아누스가 도입한 "솔 인빅투스"를 달력에서 말하는 "인빅투스"로 이해하도록 하겠다. 그 이유는 그날을 기념하기 위한 어떤 (전차)경기들이 (아마도 30번) 있는데, 로마교회가 예수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이런 식의 경기를 용인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몇 년 후,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진술을 참고한다면, 이 "인빅투스"는 "솔/헬리오스/미트라스"가 합쳐진 '솔 인빅투스'로 보는 것이 일단 타당하다.
그런데 AD 354년 달력은 또한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명시하고 있는 문서이기도 하다. 이 달력의 한 파트를 구성하는 AD 336년에 작성된 로마교회가 추모하는 순교자의 추모일 목록인 {Depositio Martyum}에 따르면 (링크), "VIII Kal. Jan"이란 날에 "natus Christus in Betleem Judaea", 즉 "유대아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했다"라는 설명이 등장하고 있다. 이 말은 즉, "1월 1일로부터 8일 전 (필자 주: 즉 12월 25일) 그리스도가 유대아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라는 뜻이다.
아울러 이 달력의 또 다른 한 파트인 로마 콘술의 재임표에는 AD 354년 이전의 콘술들의 재임기가 나열되어 있는데, AD 1년의 로마 콘술로 카이사르와 파울루스를 언급하며, 역시 같은 주석이 달려있다.
라틴어로 다음과 같다.
여기 등장하는 로마 콘술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자였던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뜻하며, 따라서 이 연표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일은 BC 1년 12월 25일이 된다. 따라서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최소한 AD 4세기 초/중반 무렵에는 12월 25일을 공식적인 크리스마스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의 날짜로 특정한 것은 AD 4세기가 처음은 아니다. 남아있는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AD 2-3세기에 활동한 라틴교부 히폴리투스의 진술이다. 그는 {다니엘서 주석}에서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특정했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 AD 362년 동지 무렵에 기념된 율리아누스의 태양신 "솔/헬리오스"의 축제?
AD 362년, 기독교를 버리고 그리스/로마마 전통종교를 고수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이기에 종종 "배교자" 황제라 불리는 율리아누스는 산문형식의 {헬리오스 찬가}를 헬리오스 축제를 위해 썼다.
율리아누스의 {헬리오스 찬가}에서 일부를 옮긴다. (IV: Hymn to King Helios.)
이 부분에서 율리아누스는 로마인들이 1년의 시작과 끝을 어떻게 정하게 되었는지를 우선 논하면서, 로마인들이 전통적으로 얼마나 솔/헬리오스를 숭앙해 왔는지를 설명한다.
그 첫 파트를 정리해 본다.
율리아누스는 다음 파트에서 "그가 살던 시절" 율리우스력 12월 말의 솔/헬리오스 축제날짜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리스어 원문을 함께 옮긴다.
율리아누스의 진술에 따르면, (율리우스력) 새해 직전의 달, 즉, 크로노스(그리스어)/사투르누스(라틴어)의 이름을 딴 한 해의 마지막 달에 로마인들은 (1) 솔/헬리오스를 기념하는 대규모 경기행사를 벌이고 (2) "불패의 태양"에게 축제를 헌정한다. 이후 새해까지는 어떤 행사도 가지지 않는데, 크로니아 축제의 바로 뒤에 태양축제 (Heliaia)가 이어진다.
율리아누스가 언급한 그리스어 "크로니아"는 원래 그리스 아테네의 신년기념 축제인데, 이 축제가 열린 헤카톰바이온 12일은 현재 그레고리우스력으론 7월 말-8월 초에 해당하는 한 여름이었다. 그리스 달력에서 한 해는 한 여름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축제의 성격과 내용은 그리스신 크로노스에 대응하는 로마의 신 사투르누스에게 헌정된 로마의 사투르날리아 축제와 크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BC 1세기의 로마작가 루키우스 아키우스 (Lucius Accius)는 이 크로노스 축제가 사투르누스 축제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기도 했다. 따라서 율리아누스가 지금 말하고 있는 "크로노스 축제 / 크로니아"는 로마의 "사투르날리아"를 뜻한다.
AD 354년의 달력에서 율리우스력 12월 17-23일이 사투르날리아/크로니아에 대응한다. AD 362년 율리아누스가 {솔/헬리오스 찬가}를 작성한 시점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율리아누스가 12월 25일을 특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말하는 태양축제 (Heliaia)는 율리아누스 당시 율리우스력 12월 25일에 열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율리아누스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연말에 솔/헬리오스에게 바쳐지는 이 경기들과 축제는 "최근에 시작"된 것이다. 이 "최근"이 언제를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서 진술한대로 의견이 분분하다.
율리아누스의 진술에 담긴 정보를 해석하기 위해 그럼 여기서 역법의 트릭을 한번 더 생각해 보자.
BC 1세기에 개정된 율리우스력의 오차로 인해, 원래 율리우스력 12월 25일에 세팅된 동지가 율리아누스 시대에는 율리우스력 12월 22일이 되어있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선, 율리아누스 당시의 역법으로 날짜를 고정시켜놓고 생각해 보자.
참고: http://kwangmin.blogspot.com/2012/01/vs-5.html
이것이 말하는 바는?
그것은 즉, (1) 율리아누스가 말한 누마 폼필리우스 왕의 시대인 BC 8세기에 시작되었다는 태양축제일은 "실제 동지일"이 아니었다는 점 (사실은 신년), (2) 율리아누스의 시대인 AD 4세기 율리우스력 달력상 12월 25일 "그 날짜"가 원래부터 로마의 "태양축제"가 아니었다는 뜻도 된다. 즉, 역법의 오차로 인해 날이 계속 밀려온 셈이다. AD 1세기 로마 저술가 플리니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AD 1세기의 동지는 태양이 염소자리에 8도 진입한 날이었는데 이 날은 당대 율리우스력으로는 12월 25일이었다. AD 354년 달력을 보면 알겠지만, 태양이 염소자리에 진입한 날(SOL.CAPRICORNO)는 이 해의 12월 18일이다. 그래서 이 달력이 나오던 무렵의 실제 동지일은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이 아니라 22일로 변해 있었다.
각설하고, 그럼 율리아누스의 이 설명은 고고학적인 유물 및 고대 로마의 기록과 일치하는가?
유감스럽게도 그의 설명은 이미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율리우스력 이전의 공화정 시대 로마력에 등장하는 솔 (솔 인디게스)의 축제일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사실 율리아누스의 이 해설은 다소 견강부회적이다.
아무튼 "미트라스/솔 인빅투스의 탄생일은 12월 25일이다"라는 주장도 사실 이 문건(들)에서 "유도"된 것이다. 로마의 미트라스 신자들은 AD 2세기 무렵부터 미트라스를 "솔 도미누스 인빅투스" 즉 "무적의 주님 태양"이라고 불러왔다. 그들도 AD 354년 이전에 12월 25일을 "미트라스의 생일"로 여겼는가?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되기 직전에 벌어진 최후의 대규모 박해는 열정적인 솔 인빅투스 숭배자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일어났다. 그는 AD 307년에 솔 인빅투스 신전을 로마에 봉헌했다.
They tell that the sun having discovered Rhea secretly copulating with Saturn, laid a curse upon her, that she should not bring forth a child in either month or year: that Hermes being in love with the goddess copulated with her; and afterwards playing at counters with the Moon and winning from her the seventieth part of each one of her lights, out of the whole composed five days, the which he added to the three hundred and sixty, which days now the Egyptians call 'additional,' and keep as the birthdays of the gods; that on the first of these was born Osiris, and that, a voice issued forth with him in the birth, that 'the Lord of all is entering into light.'” ...[중략]...On the second was born Aroeris, whom some call Apollo, some the elder Horus. On the third Typhon, neither in due time, nor in the right place, but breaking through with a blow, he leaped out through his mother’s side. On the fourth was Isis born, in very wet places. On the fifth was Nephthys, the same as the “End,” and “Venus,” whom some call Victory. They say that Osiris was begotten by the Sun, as also Aroeris, by Hermes Isis, by Saturn Typhon and Nephthys; that Osiris and Isis fell in love with each other and copulated under the cloak of darkness in the womb; some say that in this manner was Aroeris begotten, and therefore is called by Egyptians, the elder Horus, by the Greeks, Apollo. --- Plutarch, {Isis and Osiris}, Chapter XII
그들 (=이집트인/ 필자 주)들은 말하길, 크로노스 (= 이집트의 겝/셉 / 필자 주)와 은밀하게 성관계를 하고 있던 레아 (=이집트 여신 누트)를 발견한 (남편 / 필자 주) 헬리오스 (=이집트의 라 / 필자 주)가 레아에게 몇달 혹은 몇년 간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란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레아를 흠모하던 헤르메스 (= 이집트의 토트? / 필자 주)는 여신 레아와 성관계를 갖고난 후 달(의 여신)과 내기에 이겨 달빛의 1/7을 빼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총 5일 치의 분량에 해당했다. 헤르메스는 이 날들을 360일에 더했고, 이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이 5일을 "추가일"이라 부르며 신들의 생일들로 경축하고 있다. 이 5일의 첫째날에는 오시리스가 태어났으며, 그가 태어날 때 "만물의 주인이 빛 속으로 들어간다!"라는 소리가 선포되었다...[중략]...두번째로 태어난 것은 아로에리스 (=헤르-우르 혹은 하르-웨르 ~ 호루스)인데 이를 아폴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연장자 호루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세번째로 태어난 것은 티폰 (=이집트의 세트 / 필자 주)으로 그는 제때에 맞춰 제곳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머니 옆구리를 뚫고 한방에 뛰쳐나왔다. 네번째 태어난 것은 이시스로 매우 습한 곳에서 태어났다. 다섯번째는 네프티스이며 죽음의 여신 혹은 아프로디테와 동일시되거나 혹은 혹자는 (승리의 여신) 니케라고 하기도 한다. 그들은 또한 오시리스와 아로에리스가 헬리오스/라에 의해서 태어났고, 이시스는 헤르메스/토트에 의해서 태어났고, 티폰과 네프티스는 사투르누스/크로노스/겝에 의해서 태어났다고도 말한다. 오시리스와 이시스는 사랑에 빠져 자궁 속 어둠 속에서 성교를 했다. 혹자는 말하길 이런 방식으로 아로에리스가 태어났다고도 하는데, 이집트인들이 "연장자 호루스"라고 부르는 신을 그리스인들은 아폴론이라고 한다.--- 플루타르코스,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편}, 제12장 / 번역: 최광민
플루타르코스는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52장 속에서 이집트인들 중에 "오시리스는 해, 이시스는 달" 이란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하는 이집트인들이 AD 1세기 중후반에도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There are some who without reservation assert that Osiris is the Sun and is called the Dog-star (Sirius) by the Greeks even if among the Egyptians the addition of the article has created some ambiguity in regard to the name; and there are those who declare that Isis is none other than the Moon for this reason it is said that the statues of Isis that bear horns are imitations of the crescent moon, and in her dark garments are shown the concealments and the obscurations in which she in her yearning pursues the Sun...
이집트인들 중 일부는 오시리스(=Ὄσιρις)는 태양이라고 망설임없이 말한다, 이 (별)개-별/시리우스은 그리스어로 '세이리오스 / Σείριος'라고 불리는데, 이집트인들조차 이 이름과 관련된 혼란 (= 즉, 오시리스 vs 세이리오스)을 피하기 위해 관사의 사용 (=ὁ Σείριος / 필자 주)이 고안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시스는 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두개의 뿔을 가진 이시스 신상의 모습은 초승달의 모습을 베낀 것이며.....[후략] --- 플루타르코스,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제 52장 / 번역: 최광민
그럼 오시리스는 태양신인가? 그런데 플루타르코스는 또 다른 부류의 이집트인들이 같은 시절에 "오시리스는 달, 티폰/세트는 해" 라고 주장하고 있었음을 {모랄리아} 제 41장에 적고있다. 따라서 최소한 AD 1세기 후반 - 2세기 초반까지도 오시리스의 속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립된 이론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다시 플루타르코스를 인용해보자.
41 But the Egyptians, by combining with these physical explanations some of the scientific results derived from astronomy, think that by Typhon is meant the solar world, and by Osiris the lunar world; they reason that the moon, because it has a light that is generative and productive of moisture, is kindly towards the young of animals and the burgeoning plants, whereas the sun, by its untempered and pitiless heat, makes all growing and flourishing vegetation hot and parched, and, through its blazing light, renders a large part of the earth uninhabitable, and in many a region overpowers the moon. For this reason the Egyptians regularly call Typhon "Seth," which, being interpreted, means "overmastering and compelling." They have a legend that Heracles, making his dwelling in the sun, is a companion for it in its revolutions, as is the case also with Hermes and the moon. In fact, the actions of the moon are like actions of reason and perfect wisdom, whereas those of the sun are like beatings administered through violence and brute strength. The Stoics assert that the sun is kindled 트and fed from the sea, but that for the moon the moving waters from the springs and lakes send up a sweet and mild exhalation.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천문학에서 가져온 과학적 결과를 곁들인 물리적 설명을 취합하여 생각하길, 티폰은 태양의 영역을 뜻하고, 오시리스는 달의 영역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후략]... --- 플루타르코스,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제 4장, / 번역: 최광민
그럼 도대체 오시리스 혹은 호루스의 "탄생일"은 언제인가?
과연 동지일이 바로 호루스의 탄생일인가?
일단 위의 도표에는 "한 여름에 위치한 호루스의 생일" 하나와 세 종류의
호루스의 제전이 등장한다.
첫째는 여름에 할당되어 있는 이집트의 신년 직전 연말에 배정되어 있는 잔여일 5일 간의 축제일 두번째에 할당된 "(연)장자" 호루스의 탄생일이다. 이 "호루스"는 오시리스-이시스의 아들이 아니라 오시리스-이시스-세트의 동기로서 그리스인들이 태양신 아폴론에 동일시했던 신이다. 그런데 이 "태양신" 호루스의 생일은 동지가 아닌 여름에 있다. 따라서 "호루스는 12월 25일에 탄생했다"는 진술은 "장자" 호루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다섯신들의 탄생을 경축하는 이 연말 5일 간의 잔여일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설명에 대해 AD 2세기 초반의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에서 다시 인용한다
두번째, 태양신 라와 결합한 호루스/Re-Horakhty (두 지평선의 호루스)의 축제 역시 이집트 달력의 마지막 달, 즉 여름에 있었다. 따라서 이 버전의 호루스를 기리는 축제 또한 "호루스의 탄생"과는 무관하다. 아울러 이 축제가 이 호루스의 "탄생"을 기념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세번째, 에드푸에서 신앙된 형태의 호루스를 살펴보자. 율리우스력으로 12월-1월 초는 나일강의 범람이 물러가고 경작이 시작되는 새로운 농경주기의 시작 해당한다. 이 무렵이 동지를 포함하는데, 이 무렵에 에드푸에서는 매로 표상된 호루스, 즉 (태양신이라기 보다는) 천공의 신으로서의 "성스런 매"에게 바쳐지는 축제가 있었다. 이 호루스의 한 눈은 태양 디스크, 다른 한 눈은 달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호루스는 "태양신"이라기 보다는 천공의 신으로 봐야한다. 더구나 이 "동지 무렵"의 축제가 이 호루스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도 아니다
네번째, AD 1세기 후반부에 기념된 호루스의 다양한 탄생축일에 대해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는 꽤 자세하고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인용한다.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Plutarch/Moralia/Isis_and_Osiris*/C.html
Epiphi 30일의 축제는 Wadjet 축제로 불리며, "호루스의 눈의 탄생 ὀφθαλμῶν Ὥρου γενέθλιον,"을 기념한다. 이 날은 태양과 달이 천공에서 일직선 상에 놓이는 날이다. 한 여름의 축제이며, 역시 동지일과 전혀 상관없다
다섯번째, Phaopi달 마지막 날부터 8일째에 있었던 축제 (Athyr달)는 "태양의 지팡이"를 기념하는 것으로 (언제인지는 특정되지 않은) "추분점 후"부터 "동지 사이" 어느 날에 있었던 축제이다. 즉, 해의 고도가 낮아지고 겨울로 접어드는 것을 상징하는 축제였다. 역시 플루타르코스를 인용한다
이어지는 다음 축제는 특별히 호루스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동지 전날 소를 몰고 신전을 일곱차례도는 행사가 이어진다. 이것은 오시리스를 찾는 이시스를 모방한 것으로, 이 경우 "태양"은 "오시리스"를 상징하게 된다
인용한다.
여섯번째, 플루타르코스는 {호루스의 탄생(일)들}이라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이집트 문서를 인용하여 태양과 관련된 또 다른 이집트인들의 축제를 기록하고 있다. 이 축제는 알렉산드리아력 Athyr달의 제 4일에 있었던 제전인데, 이집트인들은 이 날에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가 처음으로 태양에게 제물을 바친 날이라고 믿고 있다고 진술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집트력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력을 따르고 있으므로, 이 Athyr달은 율리우스력으로 10월 말에서 11월 말에 걸치는 기간이 된다. 동지는 물론 율리우스력으로 12월 말이다. 즉, 이 날은 호루스의 날이 아니라 태양을 위한 날이며, 이 달의 4일째이므로 동지보다 훨씬 전에 있던 축제일이다. 영어번역에서는 이 날 "호루스가 태양에게 제물을 바쳤다"란 정보를 "복수"인인 {호루스의 탄생(일)들 Γενεθλίοις Ὥρου}이란 이집트 문서에서 가져왔다 (And on the 4th day from the beginning of the month it is said that Horus, son of Isis, was the first that offered sacrifice, as it is written in what are entitled “The Birthdays of Horus")고 말하고 있을 뿐, 이 날이 "호루스의 탄생일"이라고는 진술하지 않았다.
영어 번역에서 인용한다
여기서의 "태양"은 누구를 뜻하는가?
첫째는 여름에 할당되어 있는 이집트의 신년 직전 연말에 배정되어 있는 잔여일 5일 간의 축제일 두번째에 할당된 "(연)장자" 호루스의 탄생일이다. 이 "호루스"는 오시리스-이시스의 아들이 아니라 오시리스-이시스-세트의 동기로서 그리스인들이 태양신 아폴론에 동일시했던 신이다. 그런데 이 "태양신" 호루스의 생일은 동지가 아닌 여름에 있다. 따라서 "호루스는 12월 25일에 탄생했다"는 진술은 "장자" 호루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다섯신들의 탄생을 경축하는 이 연말 5일 간의 잔여일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설명에 대해 AD 2세기 초반의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에서 다시 인용한다
They tell that the sun having discovered Rhea secretly copulating with Saturn, laid a curse upon her, that she should not bring forth a child in either month or year: that Hermes being in love with the goddess copulated with her; and afterwards playing at counters with the Moon and winning from her the seventieth part of each one of her lights, out of the whole composed five days, the which he added to the three hundred and sixty, which days now the Egyptians call 'additional,' and keep as the birthdays of the gods; that on the first of these was born Osiris, and that, a voice issued forth with him in the birth, that 'the Lord of all is entering into light.'” --- Plutarch, {Isis and Osiris}, Chapter XII
그들 (=이집트인/ 필자 주)들은 말하길, 사투르누스와 은밀하게 성관계를 하고 있던 레아를 발견한 태양이 레아에게 몇달 혹은 몇년간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란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레아를 흠모하던 헤르메스는 여신 레아와 성관계를 갖고난 후, 달(의 여신)과 내기에 이겨 달빛의 1/7을 빼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총 5일 치의 분량에 해당했다. 헤르메스는 이 날들을 360일에 더했는데, 이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이 5일을 "추가일"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를 신들의 생일로 경축하고 있다. 이 5일의 첫째날에는 오시리스가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날 때 "만물의 주인이 빛 속으로 들어간다!"라는 소리가 선포되었다 --- 플루타르코스,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편}, 제12장 / 번역: 최광민
두번째, 태양신 라와 결합한 호루스/Re-Horakhty (두 지평선의 호루스)의 축제 역시 이집트 달력의 마지막 달, 즉 여름에 있었다. 따라서 이 버전의 호루스를 기리는 축제 또한 "호루스의 탄생"과는 무관하다. 아울러 이 축제가 이 호루스의 "탄생"을 기념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세번째, 에드푸에서 신앙된 형태의 호루스를 살펴보자. 율리우스력으로 12월-1월 초는 나일강의 범람이 물러가고 경작이 시작되는 새로운 농경주기의 시작 해당한다. 이 무렵이 동지를 포함하는데, 이 무렵에 에드푸에서는 매로 표상된 호루스, 즉 (태양신이라기 보다는) 천공의 신으로서의 "성스런 매"에게 바쳐지는 축제가 있었다. 이 호루스의 한 눈은 태양 디스크, 다른 한 눈은 달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호루스는 "태양신"이라기 보다는 천공의 신으로 봐야한다. 더구나 이 "동지 무렵"의 축제가 이 호루스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도 아니다
네번째, AD 1세기 후반부에 기념된 호루스의 다양한 탄생축일에 대해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는 꽤 자세하고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인용한다.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Plutarch/Moralia/Isis_and_Osiris*/C.html
LII. In the sacred hymns to Osiris they invoke “Him that is carried within the arms of the Sun,” and on the 30th day of the month Emphi/Epiphi they celebrate “the Birthday of the Eyes of Horus,” when the Sun and the Moon are come into one straight line, inasmuch as they consider not the Moon alone, but the Sun also as the eye and the light of Horus. --- (tr. the Loeb Classical Library edition, 1936)
Epiphi 30일의 축제는 Wadjet 축제로 불리며, "호루스의 눈의 탄생 ὀφθαλμῶν Ὥρου γενέθλιον,"을 기념한다. 이 날은 태양과 달이 천공에서 일직선 상에 놓이는 날이다. 한 여름의 축제이며, 역시 동지일과 전혀 상관없다
다섯번째, Phaopi달 마지막 날부터 8일째에 있었던 축제 (Athyr달)는 "태양의 지팡이"를 기념하는 것으로 (언제인지는 특정되지 않은) "추분점 후"부터 "동지 사이" 어느 날에 있었던 축제이다. 즉, 해의 고도가 낮아지고 겨울로 접어드는 것을 상징하는 축제였다. 역시 플루타르코스를 인용한다
LII....And on the 8th day from the end of the month Phaophi they celebrate that of “The Sun’s walking-stick,” after the autumnal equinox, signifying that he requires as it were a support, and strengthening, as he grows weak both in heat and light, and moves away from us, bending down, and crooked.
이어지는 다음 축제는 특별히 호루스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동지 전날 소를 몰고 신전을 일곱차례도는 행사가 이어진다. 이것은 오시리스를 찾는 이시스를 모방한 것으로, 이 경우 "태양"은 "오시리스"를 상징하게 된다
인용한다.
And again upon the eve of the winter solstice they carry the Cow seven times around the temple; and this circular procession is named the “Seeking for Osiris,” as though the goddess were longing for the winter rays from the Sun; and they walk round so many times, because he completes his journey from the winter solstice to the summer solstice in the seventh month.
여섯번째, 플루타르코스는 {호루스의 탄생(일)들}이라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이집트 문서를 인용하여 태양과 관련된 또 다른 이집트인들의 축제를 기록하고 있다. 이 축제는 알렉산드리아력 Athyr달의 제 4일에 있었던 제전인데, 이집트인들은 이 날에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가 처음으로 태양에게 제물을 바친 날이라고 믿고 있다고 진술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집트력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력을 따르고 있으므로, 이 Athyr달은 율리우스력으로 10월 말에서 11월 말에 걸치는 기간이 된다. 동지는 물론 율리우스력으로 12월 말이다. 즉, 이 날은 호루스의 날이 아니라 태양을 위한 날이며, 이 달의 4일째이므로 동지보다 훨씬 전에 있던 축제일이다. 영어번역에서는 이 날 "호루스가 태양에게 제물을 바쳤다"란 정보를 "복수"인인 {호루스의 탄생(일)들 Γενεθλίοις Ὥρου}이란 이집트 문서에서 가져왔다 (And on the 4th day from the beginning of the month it is said that Horus, son of Isis, was the first that offered sacrifice, as it is written in what are entitled “The Birthdays of Horus")고 말하고 있을 뿐, 이 날이 "호루스의 탄생일"이라고는 진술하지 않았다.
영어 번역에서 인용한다
And on the 4th day from the beginning of the month it is said that Horus, son of Isis, was the first that offered sacrifice, as it is written in what are entitled “The Birthdays of Horus,” and in fact they on each day burn incense to the Sun of three different sorts, namely, resin at his rising, myrrh at noontide, that which is called “kyphi,” at his setting, of which the signification that each bears I will explain further on; and by means of all these they believe they propitiate and worship the Sun. And what need is there to bring together many things to the same effect? There are some that assert point-blank that Osiris is the Sun, and is named Sirius by the Greeks (for amongst the Egyptians the prefixing of the article has caused the name to be mistaken [The Greeks mistaking οσιρις for ο Σειριος. “Egyptians” in text must be a slip of the scribe.]), and make out Isis to be no other than the Moon; and one particular of her images, those figured with horns, are (say they) imitations of the crescent; whilst by those covered with black they interpret her wanings, and envelopment in darkness, during which she longs for, and follows after the Sun: for which reason they invoke the Moon for aid in love affairs; and Isis, says Eudoxus, presides over amours. These stories, indeed, have a certain share of plausibility, but as for those that make out Typhon to be the Sun, these are not even to be listened to. Let us, however, now resume our proper theme.이 첫 문장의 그리스어 원문은 아래와 같다
{호루스의 생일들}이란 문서에 따르면,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는 이 달 제 4일에 (태양에게) 제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매일 세 종류의 다른 제물을 태양에게 바치는데, 태양이 떠오를 때는 수지(=향료)를, 낮시간에는 몰약을, 그리고 일몰 때는 "키피 (혼합향료)"라 불리는 것을 바치는데, 그 제물들이 의미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 더 쓰도록 하겠다..... --- 플루타르코스,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 번역: 최광민
λέγεται δὲ καὶ θῦσαι τῷ ἡλίῳ τετράδι μηνὸς ἱσταμένου πάντων πρῶτος Ὧρος ὁ Ἴσιδος, ὡς ἐν τοῖς ἐπιγραφομένοις Γενεθλίοις Ὥρου γέγραπται..
여기서의 "태양"은 누구를 뜻하는가?
보통 오시리스-이시스-호루스 신화에서 태양은 "라"이다. 이어지는 진술에서
플루타르코스는 어떤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태양, 이시스=달 로 주장하는
반면, 또 다른 이집트인들은 세트를 태양으로 신앙한다고 진술한다.
플루타르코스의 진술 속에서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는 태양에
빗대어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진술에서 태양과 빗대어 등장되는 호루스는
오시리스의 형제인 "(연)장자 호루스"이며 그리스인들은 이 호루스를 태양신
아폴론과 동일시 했다.
과연 오시리스나 호루스는 동지에 '탄생'했다고 이해해야 할까?
## 과연 동지는 디오니소스의 탄생일일까?
한편, 디오니소스는 탄생일은 최소한 두가지다: 한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의 실체를 본 세멜레가 불타버릴 때 태아상태로 구출된 디오니소는 제우스 허벅지에 꿰매져 있다가 태어난다. 이 탄생축제는 포도수확이 있던 9월에 기념되었다. 두번째 탄생축제는 지중해 일대에서 '레나이아' 축제로 불리던 것으로, 9월 무렵에 담근 포도주가 출하되는 1월에 있었다. 이 뿐 아니라 고대사회의 모든 디오니소스 축제는 태양이라기보다는 포도의 재배주기 및 포도주의 출하시기와 연관되어 있다. 물론 농사주기가 태양의 주기를 따르긴 하지만, 태양의 천문학적인 의미와는 연결짓는 건 무리다.
오시리스와 디오니소스의 탄생일이 동지와 연관된 12월 25일 이었다는 고대 원기록은 없다. 사실은 그런 기록이 있을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들이 원래부터 "태양신"의 신격을 가졌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AD 5세기의 로마 문법학자이자 신-플라톤주의자였던 이교도 마크로비우스는 자신의 저서 {사투르날리아}에서 지중해 여러 신격들이 어떤 방식으로 태양신으로서의 속성을 획득하게 되었는 지를 간략하게 적는다. 그의 주장은 현대 신화학자들의 무리한 해석들과 유사하다.
# 과연 동지는 아도니스의 탄생일일까?
소아시아/앗시리아 지역에서 신봉되던 아도니스의 예를 들어보자.
"That Adonis too is the sun will be clear beyond all doubt if we examine the religious practices of the Assyrians...In the story which they tell of Adonis killed by a boar the animal is intended to represent winter, for the boar is an unkempt and rude creature delighting in damp, muddy, and frost-covered places and feeding on the acorn, which is especially a winter fruit. And so winter, as it were, inflicts a wound on the sun, for in winter we find the sun's light and heat ebbing, and it is an ebbing of light and heat that befalls all living creatures at death." --- Macrobius, The Saturnalia, Book I, Chapter 21:1-4).
이 진술 속에서 마크로비우스가 아도니스를 태양에 연관짓는 논리를 정리해보자.
- 아도니스는 멧돼지에 의해 죽었다.
- 멧돼지는 축축한 곳을 좋아하고 진흙에 뒹굴기를 좋아하고 도토리를 즐겨먹는 동물이다.
- 근데 이 지역 (소아시아, 앗시리아)의 겨울은 습하고 땅은 질며 게다가 도토리는 겨울열매가 아닌가!!!
- 그러므로 이 멧돼지는 바로 겨울을 상징한다.
- 따라서 아도니스가 멧돼지에게 죽은 것은, 곧 그가 겨울에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상징이 된다.
- 겨울에 죽는 것은 곧 태양이니 이는 곧, 그 무렵에 죽은 아도니스는 "태양신"이다.
- 아하!
이런 논리전개 방식은 전형적인 현대 신화학자의 즐겨 사용하는 논리(적 비약)과 유사하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조셉 캠벨이 주로 농경주기와 관련된 신들과 태양신을 연결했던 것과는 달리, 마크로비우스는 거의 모든 남신을 태양신으로 간주하고, 모든 여신들 땅의 여신으로 간주했다. 이들 태양신들에는 마르스, 유피테르, 사투르누스, 헤라클레스 등을 망라한다.
계속해서 마크로비우스의 진술을 읽어보자.
"That the discourse may not wander too far afield, by mentioning all the gods by name, let me tell you what the Assyrians believe about the sovereignty of the sun. To the god whom they revere as highest and greatest of the gods they have given the name of Adad, a name which, being interpreted, means 'One One.' Him, then, they worship as the most powerful god, but they associate with him a goddess called Adargatis, and to these two deities, by whom they understand the sun and the earth, they ascribe full power over all things." --- Macrobius, The Saturnalia, Book I, Chapter 23:17-18).
...[전략]...(앗시리아)인들이 가장 최고의 신으로 섬기는 신을 그들은 '아다드'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유일자'란 뜻이다. 그들은 그 신을 최고로 강한 신으로 섬기지만, 또한 그를 아달가티스라 불리는 여신과 연관짓고 있으며, 그들은 이 두 신들을 각각 태양과 땅으로 이해하며 만물 위에 군림하는 신들로 여긴다. --- 마크로비우스, {사투르날리아} 제 1권 23장 12-18 / 번역: 최광민
그럼 "태양신"은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최고의 신격이었는가? 꼭 그렇지도 않다. 사람들의 상식과 달리, 사실 태양신은 이 지역의 판테온에서 상당히 왜소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태양신으로 "폭넓게 간주된" 신들 말고, 태양신으로 "정확히 특정된" 신들이 누구였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스와 로마의 12주신 중 하나인 아폴론/아폴로가 먼저 떠오를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에게 태양신은 대체로 티탄 (거신족) 헬리오스나 휘페리온, 로마인에게는 솔을 의미했다.
# 과연 동지는 솔, 헬리오스, 엘-게발, 미트라스 등 태양신들의 탄생일일까?
그럼 관심을 솔, 헬리오스, 엘-게발, 미트라스 등 "진짜" 태양신들의 제전으로 옮겨보자.
원래 미트라스교는 로마인에게 이질적인 종교였다. 굳이 말한다면 그 "원형"이 고대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이 남성적인 종교는 아마도 BC 1세기 말 혹은 AD 1세기 중/후반에 로마제국 동부 혹은 로마에서 새로운 비의종교로 새롭게 창시되어, 로마제국의 정복사업을 따라 급속도로 널리 퍼져나갔다. 페르시아 본토의 미트라교와 로마제국 동부변방에서 수입된 로마 미트라스교를 같은 종교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매우 많다. 교리와 상징면에서 유사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AD 1세기 말에는 로마제국의 다른 쪽 끝인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영국)에 이미 미트라스를 위한 예배소 (Mithraeum)가 세워졌다. 이 형태의 미트라스교는 비밀종교/미스테리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나중에 국가종교의 형태로 변용되는 솔 인빅투스와는 다소 간 차이가 있다. 밀교 형태의 미트라스교에서 미트라스와 태양인 솔/헬리오스는 늘 분리되어 등장하고 묘사되기 때문이다. 미트라스와 그의 확장인 솔 인빅투스는 군인황제가 난립하던 무렵에 기존의 로마 종교와 경합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태양신"이 그 자체로서 주신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다. 로마제국에서는 AD 3세기가 지나 엘라가발루스나 아우렐리아누스 등 군인황제의 비호 아래 소아시아에서 유입된 태양신 엘-가발(엘라가발)이나 미트라스의 형태로 국가종교 형태로 소개된 후에야 비로소 태양신은 이제 최고신의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로마에 태양신이 유피테르를 정점으로 하는 로마종교 판테온을 압도하게 되는 과정은 AD 3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 동지는 엘라가발루스의 태양신 "엘-게발"의 탄생일이었을까?
AD 193년에서 211년 동안 로마황제였던 세베루스는 40세가 되기 전에 자식 없는 홀아비가 되었다. 새로이 결혼하기 위해 세베루스는 별점을 쳤는데, {Historia Augusta}에 따르면 이 무렵 자신이 "왕"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율리아 돔나라는 아랍 혹은 아르메니아계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와 재혼하게 된다. 이 율리아 돔나의 아버지인 율리우스 바시아누스는 시리아 관할권에 있던 에메사의 왕/신관을 겸임한 인물로서, 이 에메사에서는 검은 바위로 표상되는 "산신"이라는 뜻의 신 엘-게발을 태양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이 에메사의 태양신 엘-게발은 세베루스의 치하에 로마 전역에 퍼져나간다.
우라니우스 안토니우스의 초상과 에메사의 엘-가발 신전에 봉안된 검은 돌, AD 253년 경. (출처: Wikimedia Commons)
한편, 돔나의 언니인 율리아 메사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 엘라가발루스/헬리오가발루스 (재위 AD 218-222)의 할머니가 된다. 에메사의 피를 잇는 엘라가발루스는 재위에 오르기 전 엘-게발의 신관이었다. 그는 AD 218년 로마황제가 되자마자 자신의 신 엘-게발을 데우스 솔 인빅투스로 개명해 로마에 도입하고, 로마전통의 최고신 유피테르보다 높은 지위에 둔다. 아울러 아스타롯, 미네르바, 우라니아 등의 그리스/로마 여신들을 엘-가발/데우스 솔 인빅투스의 아내로 설정했고, 엘-가발의 신관이었던 그 자신의 집례로 로마인들에게 이 새로운 태양신을 강요한다. 이 엘-가발 버전의 솔 인빅투스의 축일은 동지일이 아니라 한 여름이었다고 AD 2-3세기의 역사가인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헤로디아노스는 {로마사} 5권 6장에 적는다.
In the suburbs of Rome the emperor built a very large and magnificent temple to which every year in midsummer he brought his god. He staged lavish shows and built race tracks and theaters, believing that chariot races, shows, and countless recitals would please the people, who held night-long feasts and celebrations. He placed the sun god in a chariot adorned with gold and jewels and brought him out from the city to the suburbs --- Edward C. Echols {Herodian of Antioch's History of the Roman Empire}
엘라가발루스의 암살 후, 엘라가발루스 버전의 이 '솔 인빅투스'는 잊혀져 간다. 그러다가 로마황제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년)가 재도입한 버전의 '솔 인빅투스'는 엘라가발루스의 엘-가발/솔 인빅투스보다 로마의 전통 태양신 솔에 가까운 기원을 가지고 있다.엘라가발루스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솔 인빅투스 도입이 의도한 것은 명백하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태양신의 신격을 정점으로 하고, 그 신 아래 여러 다양한 신격을 모아들이려 했다. 즉, 제국 내 여러 신들을 태양신으로의 통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기독교를 포함한 당대의 종교들이 태양신을 서로 베낀게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국가종교인 솔 인빅투스/미트라스교가 제국 내 다른 종교들을 "의도적으로" 끌어와 종합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AD 3세기 초반에 집권한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경우, 당시의 지중해 일대에서 유행하던 종교들인 오시리스교, 디오니소스교, 아도니스교 뿐 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물을 강탈해 그가 로마에 도입한 태양신 헬리오가발루스의 신전으로 보냈고, 또한 여러 종교의식을 헬리오가발루스의 의식에 접목시킨 후, 오직 헬리오가발루스만 숭배할 것을 지시했다. 이것은 태양신 헬리오가발루스와 다른 종교의 주신들을 강제로 일치시키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일반인에게 퍼진 오시리스와 디오니소스 및 아도니스에게 공식적으로 태양신의 속성이 부여된 것은, "아주 고대의 일"이 아니라 AD 3세기 이후의 일이 된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Historia Augusta}에서 인용한다. .
4 Sed ubi primum ingressus est urbem, omissis quae in provincia gerebantur, Heliogabalum in Palatino monte iuxta aedes imperatorias consecravit eique templum fecit, studens et Matris typum et Vestae ignem et Palladium et ancilia et omnia Romanis veneranda in illud transferre templum et id agens, ne quis Romae deus nisi Heliogabalus coleretur. 5 dicebat praeterea Iudaeorum et Samaritanorum religiones et Christianam devotionem illuc transferendam, ut omnium culturarum secretum Heliogabali sacerdotium teneret.
"But when he [Elagabalus] first entered the city -- to leave out what was done in the provinces -- he enshrined Heliogabalus [the sun god] on the Palatine Hill next to the temple of the emperors, and built a temple for him, being eager to transfer to that temple both the emblem of the Mother Goddess and the fire of Vesta, the Palladium, the sacred shields and all the objects sacred to the Romans, so that no god should be worshipped at Rome except Heliogabalus. He used to say, furthermore, that the religion of the Jews and Samaritans and the rites of the Christians ought to be transferred there, so that the priesthood of Heliogabalus might include the mysteries of every cult." --- Lives of the Later Caesar (Augustan History), Penguin edition, p. 292.)
....[전략]...엘라가발루스는 로마에서 헬리오가발루스를 제외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하게 했다. 더 나아가 엘라가발루스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종교 및 기독교도들의 종교가 헬리오가발루스의 종교로 통합되어야 하며, 따라서 헬리오가발루스의 사제들이 모든 종교의 의식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번역: 최광민
## 동지는 아우렐리아누스의 태양신 "솔"의 탄생일이었을까?
{Historia Augusta}에 따르면, 태양신 솔의 확장인 솔 인빅투스를 도입한 아우렐리아누스의 집안은 대대로 로마의 전통 태양신인 솔의 신전에 봉직했고, 그의 어머니는 태양신 솔의 여사제였다. 여기서 로마의 태양신 솔에 대해 조금 더 덧붙이기로 하자.
로마 측 사료에 따르면 (August. de Civ. Dei, iv. 23) 솔은 BC 8세기에 로마인들의 이웃인 사비안 족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에 의해 로마인의 종교로 도입되었다. 솔의 신전은 라티움 평원을 가로지르는 누미키우스강의 강변에 있었다. AD 1세기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로마 공화정 시대에 솔의 옛 신전은 로마의 전차경주장이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에 위치해 있었다. 솔의 이 옛 신전은 솔 인빅투스라는 새로운 종교로 치환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또 다른 솔의 신전은 로마 7개의 언덕 가운데 하나인 콜리스 퀴리날리스 (Collis Quirinalis)에 있던 것으로 로마력 8월 9일에 초기 형태의 로마 태양신인 솔 인디게스 (Sol Indiges) 에게 제물을 바치던 곳이었다. 로마의 종교제례일을 기록한 유물인 BC 84-55년 경의 파스티(Fasti)에 따르면, 솔 인디게스를 기리는 축제는 로마력 12월 11일에, 또 솔(태양)과 루나(달)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일은 로마력 8월 28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로마의 태양신 솔의 제례일인 8월 9일과 28일, 그리고 12월 11일은 그가 태양신임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춘/추분, 동/하지 등의 태양주기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
"아우렐리아누스가 AD 274년 새로운 솔 인빅투스의 신전을 봉헌하면서부터 12월 25일 (동지)가 태양신의 탄생일로 지켜졌다" 혹은 "아울렐리아누스는 태양신의 탄생일인 12월 25일에 새로운 솔 인빅투스 신전을 AD 274년에 봉헌했다"는 속설은, 사실은 사료에 기반하지 않은 역사학자들의 순수추론이란 것을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른다.
보통 로마의 신을 기리는 제례는 해당 신에게 바쳐지는 축제와 운동경기의 개최와 긴밀히 연결된다. 로마 축제 중에 많은 것들이 그리스의 축제를 도입/변형한 것인데, 아우렐리아누스가 솔에게 헌정한 축제/경기가 바로 '아곤'이라는 형식의 축제로 원래 그리스에서는 다양한 그룹 (가령, 예술가) 일종의 경쟁으로 자웅을 가리는 축제들이었고, 아우렐리아누스 시대 전에도 이 형식의 축제가 로마에 도입된 적 있다. 이 형식의 축제는 4년 마다 개최되었다. (직접 연관은 없지만 역시 4년 마다 열리던 그리스의 올림피아드를 생각해 보자.)
특별히 아우렐리아누스가 새로 도입한 축제의 이름은 '아곤 솔리스' 즉, '태양에게 바치는 경기'란 뜻이다. 이에 대해 두가지 고대기록을 확인해 보자.
우선 (뒤에 자세히 설명할) AD 354년의 연감이다.
Aurelianus imp(eravit) ann(os) V m(enses) IIII d(ies) XX. Hic muro Urbem cinxit, templum Solis et castra in campo Agripp(a)e dedicavit, genium populi Romani aureum in rostra posuit. Porticus ter 20 marum Antoniniarum arserimt et fabricatum est Pa neni oleum et sale populo iussit dari gratuite ... Agonem Solis instituit (Aurelianus). ---- [Chronographia anni 354], {Chronica Minora I}, ed. T. Mommsen, Berlin 1892, p. 148; = Frick p.120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5년 4개월 20일 동안 다스렸다. 그는 로마 주위에 성벽을 쌓고, 태양에게 바치는 신전을 봉헌했으며, 아그리파의 캄푸스에 요새를 건립했다......(중략) 그는 "아곤 솔리스"를 제정했다. ---- [Chronographia anni 354], {Chronica Minora I}, ed. T. Mommsen, Berlin 1892, p. 148; = Frick p.120/ 번역: 최광민
두번째로 살펴볼 자료는 라틴어 {불가타} 성서의 번역자로도 유명한 히에로니무스의 {크로니콘}이다. 이 연대기는 히에로니무스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그리스어로 작성한 연대기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시리아어 발췌 번역본도 남아있다.) 유세비우스의 원작 그리스어 판은 망실되었다. 이 연대기에서 2291 AA (=275 AD, 1년의 오차가 있음)에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에 태양신전을 세우고 태양에게 바쳐진 첫 경기가 있었다고 전한다.
305 b. (2291 AA, 275 AD) Primus agon Solis ab Aureliano constitutus.
첫 아곤 솔리스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제정되었다. --- Hieronymus (347-420 AD). Chronicon./ 번역: 최광민
그러나 AD 354년과 362년 이전에 12월 25일 동지에 솔을 기리는 축제/경기가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없다.
## AD 354년 기념된 12월 25일의 "인빅투스" 축제?
현존하는 고문서 중 "인빅투스의 탄생일/축제"를 12월 25일로 기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AD 354년의 달력이다. 이것이 12월 25일과 솔 인빅투스 제전을 연결하고 있는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의 날짜로 특정하고 있는 라틴교회의 기록은 뒤에서 설명할 AD 3세기 초반의 라틴교부 히폴리투스의 기록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기록상으로만 본다면 기독교 측의 증거가 한 세기 이상 앞선다.
이 고대 달력/연감은 기독교가 공인된 당시 로마의 부유한 기독교도였던 발렌티누스에 의해 발행된 것으로, 기존 로마의 연대표 뿐 아니라 기독교 축일에 대한 내용도 함께 담고 있다. 일단 이 연대기의 일부인 달력 (The Philocalian Calendar) 부터 살펴보자.
Chronography of 354 (출처:Wikimedia Commons)
{Chronography of 354}, 12월 편 (출처: tertulian.org http://www.tertullian.org/fathers/chronography_of_354_06_calendar.htm)
이 AD 354년 12월의 달력에서 사투르날리아는 율리우스력 12월 17-23일에 해당하며, "인빅투스 탄생일(N=Natalis)/ N-INVICTI"은 12월 25일로 기록되어 있다. "CM-XXX"은 CM/Circenses missus (=games ordered) 30 이란 뜻으로 축일과 관련된 (전차) 경기가 30번의 (전차)경기가 치러졌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로마의 축제에서 전차경기는 평균적으로 24회 치러지는데, AD 354년의 달력에 따르면 그 해의 8월 28일이 로마의 태양신 솔과 달의 신 루나에 배정되어 있고 24회의 전차경기가 치러진다. 또한 태양신 솔에게 바쳐지는 경기인 루디 솔리스/Ludi Solis (= 태양에게 헌정된 경기)는 10월 19-22일에 배정되고 36회의 전차경기가 치러진다. 역사가들은 10월 19-22일의 루디 솔리스가 AD 274년 아우렐리아누스가 솔 인빅투스 신전을 로마에 봉헌한 사건과 관련되어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이 달력은 이 "인빅투스"가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고있다. "인빅투스"는 태양신/솔/미트라스에게만 붙여진 "칭호"는 아니기 때문에 보다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가령, 로마제국 초반의 달력에는 로마의 전통신 유피테르나 마르스에게도 "유피테르 인빅투스"나 "마르스 인빅투스" 같은 호칭을 붙이고 있다. 그 뿐 아니라 헤라클레스, 아폴로, 실바누스 등의 신/영웅들에 대해서도 "인빅투스"란 호칭을 붙이고 있었다. 따라서 "인빅투스"는 엘-가발, 미트라스, 솔 같은 태양 계열의 신들에 대해서만 적용된 호칭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아우렐리아누스가 도입한 "솔 인빅투스"를 달력에서 말하는 "인빅투스"로 이해하도록 하겠다. 그 이유는 그날을 기념하기 위한 어떤 (전차)경기들이 (아마도 30번) 있는데, 로마교회가 예수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이런 식의 경기를 용인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몇 년 후,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진술을 참고한다면, 이 "인빅투스"는 "솔/헬리오스/미트라스"가 합쳐진 '솔 인빅투스'로 보는 것이 일단 타당하다.
그런데 AD 354년 달력은 또한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명시하고 있는 문서이기도 하다. 이 달력의 한 파트를 구성하는 AD 336년에 작성된 로마교회가 추모하는 순교자의 추모일 목록인 {Depositio Martyum}에 따르면 (링크), "VIII Kal. Jan"이란 날에 "natus Christus in Betleem Judaea", 즉 "유대아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했다"라는 설명이 등장하고 있다. 이 말은 즉, "1월 1일로부터 8일 전 (필자 주: 즉 12월 25일) 그리스도가 유대아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라는 뜻이다.
Fasti Antiates Maiores — Miniature black and white image of a 1 m high by 2.5 m wide fragmentary fresco of a pre-Julian Roman calendar (black and red letters on a white background) found in the ruins of Nero's villa at Antium (Anzio). The lengths of January to December are 29, 28, 31, 29, 31, 29, 31, 29, 29, 31, 29, 29 days each in years without the leap month Intercalaris. Now in the Palazzo Massimo. See Fasti Antiates. Adapted for legibility from a class handout. (Source: Wikimedia Commons)
Greswell, Edward, 1797-1869, {Origines kalendariæ italicæ, nundinal calendars of ancient Italy, nundinal calendar of Romulus, calendar of Numa Pompilius, calendar of the decemvirs, irregular Roman calendar, and Julian correction}
https://www.archive.org/stream/origineskalenda00gresgoog
아울러 이 달력의 또 다른 한 파트인 로마 콘술의 재임표에는 AD 354년 이전의 콘술들의 재임기가 나열되어 있는데, AD 1년의 로마 콘술로 카이사르와 파울루스를 언급하며, 역시 같은 주석이 달려있다.
라틴어로 다음과 같다.
Caesare et Paulo Sat. XIII
Hoc cons.domunux Iesus Chrustus natus est VIII kal. Ian. d. Ven. Luna xv.
이 사람들이 (필자 주: 카이사르와 파울루스) 로마 콘술이던 해의 1월로부터 8일 전, (필자 주: 12월 25일) 베누스의 날 (금요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다. --- 번역: 최광민
여기 등장하는 로마 콘술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자였던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뜻하며, 따라서 이 연표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일은 BC 1년 12월 25일이 된다. 따라서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최소한 AD 4세기 초/중반 무렵에는 12월 25일을 공식적인 크리스마스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의 날짜로 특정한 것은 AD 4세기가 처음은 아니다. 남아있는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AD 2-3세기에 활동한 라틴교부 히폴리투스의 진술이다. 그는 {다니엘서 주석}에서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특정했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 AD 362년 동지 무렵에 기념된 율리아누스의 태양신 "솔/헬리오스"의 축제?
AD 362년, 기독교를 버리고 그리스/로마마 전통종교를 고수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이기에 종종 "배교자" 황제라 불리는 율리아누스는 산문형식의 {헬리오스 찬가}를 헬리오스 축제를 위해 썼다.
율리아누스의 {헬리오스 찬가}에서 일부를 옮긴다. (IV: Hymn to King Helios.)
{The Works of the Emperor Julian}, https://archive.org/stream/worksofemperorj01juli
[155] Do you wish me to mention yet another proof of this, I mean the work of King Numa? In Rome maiden priestesses guard the undying flame of the sun at different hours in turn; they guard the fire that is produced on earth by the agency of the god. And I can tell you a still greater proof of the power of this god, which is the work of that most divine king himself. The months are reckoned from the moon by, one may say, all other peoples; but we and the Egyptians alone reckon the days of every year according to the movements of the sun. If after this I should say that we also worship Mithras, and celebrate games in honour of Helios every four years, I shall be speaking of customs that are somewhat recent. But perhaps it is better to cite a proof from the remote past. The beginning of the cycle of the year is placed at different times by different peoples. Some place it at the spring equinox, others at the height of summer, and many in the late autumn; but they each and all sing the praises of the most visible gifts of Helios. One nation celebrates the season best adapted for work in the fields, when the earth bursts into bloom and exults, when all the crops are just beginning to sprout, and the sea begins to be safe for sailing, and the disagreeable, gloomy winter puts on a more cheerful aspect; others again award the crown to the summer season, since at that time they can safely feel confidence about the yield of the fruits, when the grains have already been harvested and midsummer is now at its height, and the fruits on the trees are ripening. Others again, with still more subtlety, regard as the close of the year the time when all the fruits are in their perfect prime and decay has already set in. For this reason they celebrate the annual festival of the New Year in late autumn. But our forefathers, from the time of the most divine king Numa, paid still greater reverence to the god Helios. They ignored the question of mere utility, I think, because they were naturally religious and endowed with unusual intelligence; but they saw that he is the cause of all that is useful, [156] and so they ordered the observance of the New Year to correspond with the present season; that is to say when King Helios returns to us again, and leaving the region furthest south and, rounding Capricorn as though it were a goal-post, advances from the south to the north to give us our share of the blessings of the year. And that our forefathers, because they comprehended this correctly, thus established the beginning of the year, one may perceive from the following. For it was not, I think, the time when the god turns, but the time when he becomes visible to all men, as he travels from south to north, that they appointed for the festival. For still unknown to them was the nicety of those laws which the Chaldaeans and Egyptians discovered, and which Hipparchus[125] and Ptolemy[126] perfected: but they judged simply by sense-perception, and were limited to what they could actually see. But the truth of these facts was recognised, as I said, by a later generation.--- {The Works of the Emperor Julian} Loeb Classical Library, vol. 1, p.429.
이 부분에서 율리아누스는 로마인들이 1년의 시작과 끝을 어떻게 정하게 되었는지를 우선 논하면서, 로마인들이 전통적으로 얼마나 솔/헬리오스를 숭앙해 왔는지를 설명한다.
그 첫 파트를 정리해 본다.
- 로마의 성처녀 사제들은 (솔/헬리오스의 도움으로 채화된) 성스러운 불을 꺼뜨리지 않고 교대로 관리해 왔다.
- 다른 민족들은 1년의 주기를 달에 맞춰 정했지만, 이집트인들과 로마인들은 태양의 주기에 맞춰왔다.
- 로마인들은 또한 미트라스를 숭배하며, 매 4년마다 솔/헬리오스에게 바쳐지는 경기를 갖는다. 이 전통은 최근에 시작되었다.
- 하지만 로마인들의 태양숭배 전통은 보다 더 고대로 소급될 수 있다.
- (양력을 따르는 민족들은 - 필자 주) 더러 춘분을, 더러 한 여름을, 더러 늦가을을 새해의 시작으로 정하긴 하지만 모두 태양의 선물을 찬양해 왔다.
- 다른 민족과는 달리, 성스러운 누마왕 (전설적인 고대 로마의 제 2대 왕 - 필자 주) 시절로부터 로마인의 선조들은 솔/헬리오스를 극진히 공경해왔다.
- 로마인의 선조들은 새해의 시작을 현재의 방식으로 지켜지도록 정했는데, "솔/헬리오스가 인간들에게 다시 돌아오는 시점", 즉 태양이 동지무렵에 회귀선을 따라 가장 남쪽으로 (남회귀점) 내려가 머물다가 (약 2-3일 간 --- 필자 주) 다시 북쪽으로 올라오는 때를 새해의 시작으로 잡았다.
- 사람들은 솔/헬리오스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트는 실제시점이 (= 즉, 동지 직후 -- 필자 주) 아니라, 육안으로 그렇게 보이는 때를 축제일로 (= 즉, 동지로부터 약 이틀 후 -- 필자 주) 삼았다. 그들은 아직 칼데아인들과 이집트인들의 천문학적 관측과, 이를 보다 정교히 완성시킨 히파르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이론을 몰랐기 때문이다.
율리아누스는 다음 파트에서 "그가 살던 시절" 율리우스력 12월 말의 솔/헬리오스 축제날짜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리스어 원문을 함께 옮긴다.
Πρὸ τῆς νουμηνίας͵ εὐθέως μετὰ τὸν τελευταῖον τοῦ Κρόνου μῆνα͵ ποιοῦμεν Ἡλίῳ τὸν περιφανέστατον ἀγῶνα͵ τὴν ἑορτὴν Ἡλίῳ καταφημίσαντες ἀνικήτῳ͵ μεθ΄ ὃν οὐδὲν θέμις ὧν ὁ τελευ ταῖος μὴν ἔχει σκυθρωπῶν μέν͵ ἀναγκαίων δὲ ὅμως͵ ἐπιτελεσθῆναι θεαμάτων͵ ἀλλὰ τοῖς Κρονίοις οὖσι τελευ ταίοις εὐθὺς συνάπτει κατὰ τὸν κύκλον τὰ ῞Ηλια.
Before the beginning of the year, at the end of the month which is called after Kronos, we celebrate in honour of Helios the most splendid games, and we dedicate the festival to the Invincible Sun. And after this it is not lawful to perform any of the shows that belong to the last month, gloomy as they are, though necessary. But, in the cycle, immediately after the end of the Kronia follow the Heliaia.
--- # {The Works of the Emperor Julian} Loeb Classical Library, vol. 1, p.429.
율리아누스의 진술에 따르면, (율리우스력) 새해 직전의 달, 즉, 크로노스(그리스어)/사투르누스(라틴어)의 이름을 딴 한 해의 마지막 달에 로마인들은 (1) 솔/헬리오스를 기념하는 대규모 경기행사를 벌이고 (2) "불패의 태양"에게 축제를 헌정한다. 이후 새해까지는 어떤 행사도 가지지 않는데, 크로니아 축제의 바로 뒤에 태양축제 (Heliaia)가 이어진다.
율리아누스가 언급한 그리스어 "크로니아"는 원래 그리스 아테네의 신년기념 축제인데, 이 축제가 열린 헤카톰바이온 12일은 현재 그레고리우스력으론 7월 말-8월 초에 해당하는 한 여름이었다. 그리스 달력에서 한 해는 한 여름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축제의 성격과 내용은 그리스신 크로노스에 대응하는 로마의 신 사투르누스에게 헌정된 로마의 사투르날리아 축제와 크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BC 1세기의 로마작가 루키우스 아키우스 (Lucius Accius)는 이 크로노스 축제가 사투르누스 축제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기도 했다. 따라서 율리아누스가 지금 말하고 있는 "크로노스 축제 / 크로니아"는 로마의 "사투르날리아"를 뜻한다.
AD 354년의 달력에서 율리우스력 12월 17-23일이 사투르날리아/크로니아에 대응한다. AD 362년 율리아누스가 {솔/헬리오스 찬가}를 작성한 시점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율리아누스가 12월 25일을 특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말하는 태양축제 (Heliaia)는 율리아누스 당시 율리우스력 12월 25일에 열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율리아누스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연말에 솔/헬리오스에게 바쳐지는 이 경기들과 축제는 "최근에 시작"된 것이다. 이 "최근"이 언제를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서 진술한대로 의견이 분분하다.
율리아누스의 진술에 담긴 정보를 해석하기 위해 그럼 여기서 역법의 트릭을 한번 더 생각해 보자.
BC 1세기에 개정된 율리우스력의 오차로 인해, 원래 율리우스력 12월 25일에 세팅된 동지가 율리아누스 시대에는 율리우스력 12월 22일이 되어있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선, 율리아누스 당시의 역법으로 날짜를 고정시켜놓고 생각해 보자.
참고: http://kwangmin.blogspot.com/2012/01/vs-5.html
- 로마식 신년계산법의 기원에 관한 율리아누스의 설명이 맞다고 일단 가정하자.
- 율리우스력이 시작된 BC 25년, 실제 동지일은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이었다.
- 율리아누스의 시대인 AD 350년 경, 실제 동지일은 율리우스력 12월 22일이었다.
- (율리아누스의 주장대로라면) 로마의 신년계산법을 정한 고대 로마의 제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 (BC 753-673 ?)의 시절의 동지는 율리우스력으로 12월 30일 경이다.
- BC 700년 경에 태양이 남회귀점에 내려가 (동지) 머물다 다시 떠오르는 것으로 육안관측되는 때는 동지로부터 이틀 정도 지난 후이다. 즉, (굳이 환산한다면) 율리우스력으로 신년 (1월 1일)이다.
- (율리아누스에 따르면) 바로 이 날 (신년)이 로마 "태양축제"의 기원이었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그것은 즉, (1) 율리아누스가 말한 누마 폼필리우스 왕의 시대인 BC 8세기에 시작되었다는 태양축제일은 "실제 동지일"이 아니었다는 점 (사실은 신년), (2) 율리아누스의 시대인 AD 4세기 율리우스력 달력상 12월 25일 "그 날짜"가 원래부터 로마의 "태양축제"가 아니었다는 뜻도 된다. 즉, 역법의 오차로 인해 날이 계속 밀려온 셈이다. AD 1세기 로마 저술가 플리니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AD 1세기의 동지는 태양이 염소자리에 8도 진입한 날이었는데 이 날은 당대 율리우스력으로는 12월 25일이었다. AD 354년 달력을 보면 알겠지만, 태양이 염소자리에 진입한 날(SOL.CAPRICORNO)는 이 해의 12월 18일이다. 그래서 이 달력이 나오던 무렵의 실제 동지일은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이 아니라 22일로 변해 있었다.
각설하고, 그럼 율리아누스의 이 설명은 고고학적인 유물 및 고대 로마의 기록과 일치하는가?
유감스럽게도 그의 설명은 이미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율리우스력 이전의 공화정 시대 로마력에 등장하는 솔 (솔 인디게스)의 축제일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사실 율리아누스의 이 해설은 다소 견강부회적이다.
아무튼 "미트라스/솔 인빅투스의 탄생일은 12월 25일이다"라는 주장도 사실 이 문건(들)에서 "유도"된 것이다. 로마의 미트라스 신자들은 AD 2세기 무렵부터 미트라스를 "솔 도미누스 인빅투스" 즉 "무적의 주님 태양"이라고 불러왔다. 그들도 AD 354년 이전에 12월 25일을 "미트라스의 생일"로 여겼는가?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되기 직전에 벌어진 최후의 대규모 박해는 열정적인 솔 인빅투스 숭배자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일어났다. 그는 AD 307년에 솔 인빅투스 신전을 로마에 봉헌했다.
# 예수의 추정된 탄생일들과 관련된 역법
그럼 이번에는 고대사회에서 다양하게 추정되었던 예수의 탄생일들을 검토해
보자.
## 이집트의 크리스마스: 파촌 25일, 파르무티 25일, 투비
15/11일, , (율리우스력) 11월 17일
AD 200년 경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클레멘스 (혹은 클레멘트, c.150 – c. 215)는 당대에 전해지는 예수의 탄생일들을 언급한다.
우선 클레멘스는 로마의 역사를 계산하면서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코모두스 황제가 죽을 때까지 194년 + 1달 + 13일이 흘렀다는 자신의 계산을 언급한다.
From Julius Caesar, therefore, to the death of Commodus, are two hundred and thirty-six years, six months. And the whole from Romulus, who founded Rome, till the death of Commodus, amounts to nine hundred and fifty-three years, six months. And our Lord was born in the twenty- eighth year, when first the census was ordered to be taken in the reign of Augustus. And to prove that this is true, it is written in the Gospel by Luke as follows: "And in the fifteenth year, in the reign of Tiberius Caesar,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John, the son of Zacharias." And again in the same book: "And Jesus was coming to His baptism, being about thirty years old,"(2) and so on. And that it was necessary for Him to preach only a year, this also is written:(3) "He hath sent Me to proclaim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This both the prophet spake, and the Gospel. Accordingly, in fifteen years of Tiberius and fifteen years of Augustus; so were completed the thirty years till the time He suffered. And from the time that He suffered till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are forty-two years and three months; and from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to the death of Commodus, a hundred and twenty-eight years, ten months, and three days. From the birth of Christ, therefore, to the death of Commodus are, in all, a hundred and ninety-four years, one month, thirteen days.---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Miscellanies), Book 1, Chapter XXI)
그래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부터 코모두스의 죽음 사이에 236년 6개월이 있다. 로마의 창건자 로물루스부터 코모두스의 죽음까지는 953년 6개월이다. 우리 주님은 아우구스투스의 집권 28년 차에 실시된 첫 센서스가 선포된 해에 탄생했다.....[중략]...따라서 주님이 수난을 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티베리우스 황제 15년과 아우구스투스 황제 15년을 합한 총 30년이다. 그가 수난을 당하고 예루살렘이 멸망하기까지 42년 3개월이 흘렀고, 예루살렘 멸망부터 코모두스의 죽음까지 128년 10개월 3일이 흘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코모두스의 죽음까지는 총 194년 1달 13일이 흐른 것이다. / 번역: 최광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는 율리우스력으로 AD 192년 12월 31일에 살해당했다. 그럼 이 날부터 194년 1달 13일을 역셈해 보자. 율리우스력으로 11월 중반이 예수의 탄생일로 계산된다. 이것이 클레멘스의 계산이다.
그런데 당대에 예수의 탄생일로 계산되던 날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파촌(Pachon) 25일과 파르무티 (Pharmuthi) 25일이 그런 날들이다. 이집트 달력에서 파촌과 파르무트는 모두 봄철이며 부활절 무렵에 속한 두 달이다. 파르무티는 이집트 달력에서는 8번째에 해당하고, 파촌은 9번째 달로서 현재 3-4월에 해당한다. 참고로 이집트 달력의 한 해는 여름에 끝난다.
우선, 옥타비아우스 집권 28년의 파촌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보는 계산법에 대한 클레멘스의 기록을 읽어보자.
And there are those who have determined not only the year of our Lord’s birth, but also the day; and they say that it took place in the twenty-eighth year of Augustus, and in the twenty-fifth day of Pachon.” ---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Miscellanies), Book 1, Chapter XXI).
우리 주님이 탄생한 해 뿐 아니라 날짜까지 셈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주님이 아우구스투스 집권 28년 파촌 25일에 탄생했다고 말한다... / 번역: 최광민
그런데 클레멘스는 또 어떤 이들은 예수의 탄생일을 예수의 수난/부활절 무렵의 계절로 계산한다고 적는다. 즉, 이 셈법에 따르면, 예수의 수난은 티베리우스 황제 16년의 파메노스 (7번째 달) 25일, 혹은 파르무티 25일, 혹은 파르무티 19일에 있었던 것이 되고, 파르무티 25일은 예수의 탄생일이 된다. 이 무렵의 계절은 봄철이다. 카르타고의 교부 키프리아노스의 것이라 잘못 알려진 AD 243년의 다른 날짜 계산법 (De paschæ computus)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은 현재 달력으로 3월 28일이 된다.
...And treating of His passion, with very great accuracy, some say that it took place in the sixteenth year of Tiberius, on the twenty-fifth of Phamenoth; and others the twenty-fifth of Pharmuthi and others say that on the nineteenth of Pharmuthi the Saviour suffered. Further, others say that He was born on the twenty-fourth or twenty-fifth of Pharmuthi...---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Miscellanies), Book 1, Chapter XXI).
그리스도의 수난시점을 매우 정확하게 다루는 어떤 이들은 말하길, 티베리우스 황제 16년의 파메노스 25일에 주님이 수난을 당했다고 하는데, 또 다른 이들은 파르무티 25일이라고도 하며, 혹은 파르무티 19일이 그 날이라고도 한다. 더 나아가 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파르무티달 25일에 탄생했다고도 말한다. / 번역: 최광민
클레멘스는 또 다른 계산법도 전해주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상당한 교세를 떨쳤던 바실리데스파 이단자들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날을 기념하는 주현절을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 15년의 투비 (Tubi) 15일 혹은 투비 11일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동방의 교회력에서 1월 6일이 주현절로 기념되고 있다.
...And the followers of Basilides hold the day of his baptism as a festival, spending the night before in readings. And they say that it was the fifteenth year of Tiberius Caesar, the fifteenth day of the month Tubi; and some that it was the eleventh of the same month." ---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Book 1, Chapter 21)
바실리데스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가 세례받은 날을 축제일로 지키는데, 경전을 읽으면서 밤을 지새운다. 그들은 말하길, 티베리우스 황제 15년의 투비 15일이 그 날이라고 말하는데, 혹자는 투비 11일이 바로 그 날이라고도 말한다. / 번역: 최광민
도대체 왜 AD 200년 무렵 (바실리데스파 이단자를 포함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도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수의 탄생일을 계수하고 있었던 것일까? 무슨 대단한 음모라도 있었던 것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역법의 혼동을 고려해 보자. AD 200년 경, 이집트 일대에서 사용되던 적어도 세 종류의 달력/역법을 생각하면 아주 쉽게 풀릴 수도 있다.
- 이집트 공용력 :
- 이 달력은 적어도 BC 3000년 무렵부터 클레멘스시절까지 이집트에서 사옹되어 왔다. 이 역법 상에서 1년은 정확히 365일이다. 그러나 실제 태양력은 365 + 1/4일이기 때문에, 해마다 오차가 발생하게 된다. 이 달력에서 1주는 10일 - 한 달은 정확히 30일 - 1년은 12달이므로, 매년 약 5일이 비게 된다. 이 5일은 매 년의 마지막 달인 뒤에 붙는데 이 무렵은 대체로 한 여름이다.
- 이집트 민중력 :
- 이집트 공용력의 이런 문제로 인해 달과 계절이 일치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농경주기를 보정하기 위해 이집트인들은 이 태양력에 아울러 더 오래된 음력도 동시에 사용했다. 이 음력은 농경주기의 시작을 알리는 나일강 범람주기와 잘 일치하며 시리우스가 떠오르는 시점과도 일치한다. 이 역법은 이집트 평민들의 달력이었다. 로마의 작가 켄소리누스(Censorinus)에 따르면, 율리우스력 AD 139년의 경우엔 7월 20일이 이 민중력에 따르는 새해의 첫날이었다.
- 알렉산드리아력/율리우스력 :
- BC 238년, 이집트를 지배하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Ptolemaios III Euergetes는 BC 238년 Canopus 칙령에 의해 4년마다 366일을 한 해로 하는 개정역법을 선포하지만, 대부분이 농부였던 이집트인들은 이 개정안을 거부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25년에 이집트 공용달력을 개정해서 율리우스력을 만들었다. 이 개정으로 인해, 이집트력의 새해인 토트 1일은 비로소 계절에 일치하는 고정된 날짜가 되고, 율리우스력 8월 30일에 강제로 일치된다. 비록 이집트가 기원 직전에 로마 직할지가 되지만, 이집트 평민들의 삶에서 율리우스력이 가지는 영향력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꼽트력 :
- BC 25년부터 현대까지 이집트 꼽트교회가 사용하는 역법으로, 율리우스력과 이집트력을 보완한 것이다. 1년은 365일, 1달은 30일로 두고, 여벌의 5일을 맨 뒤에 배치한다. 여기까지는 이집트공용력이다. 그러나 매 4년 마다의 윤년에는 6일을 배치한다. 이는 율리우스력의 장점을 변형해 도입한 것이다. 물론 여전히 달과 계절이 완벽히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매 해는 대체로 여름 중반에 시작된다.
BC 25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강제로 일치시킨 이집트 공용력과 율리우스력의 달을 맞춰보면 아래와 같이 된다.
이집트력 = 율리우스력
1 Thot = 8월 29 (30)일 / 새해
1 Paophi = 9월 28 (29)일
1 Athyr = 10월 28 (29)일
1 Choiak = 11월 27 (28)일
1 Tybi = 12월 27 (28)일
1 Mechir = 1월 26 (27)일
1 Phamenoth = 2월 25 (26)일
1 Pharmuthi = 3월 27일
1 Pachon = 4월 26일
1 Payni = 5월 26일
1 Epiphi = 6월 25일
1 Mesori = 7월 25일
1 epag. = 8월 24일
다시 처음 계산으로 돌아가보자.
클레멘스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부터 코모두스까지를 222년으로 잡는데 ("In all, from Augustus to Commodus, are two hundred and twenty-two years;..."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Book 1, Chapter XXI)), 이것은 아마도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를 패배시키고 이집트에 진군한 BC 30년 무렵부터 계산된 듯 싶다.(192 + 30 = 222).
우선, 클레멘스는 예수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의 시대 (BC 30년)로부터 28년 후라고 적는다.
"And our Lord was born in the twenty-eighth year, when first the census was ordered to be taken in the reign of Augustus." --- #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Miscellanies)}, Book 1, Chapter XXI).
따라서 이것은 BC 2년이 된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라 (부분)월식 후에 있었던 헤롯대왕의 죽음이 BC 4년이었다고 보기 때문에 클레멘스가 계산 상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BC 4년, 2년, 1년) 여러 번의 월식이 있었고, 따라서 요세푸스가 "어떤 월식"인지를 밝히지 않은 한, 클레멘스의 계산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게 된다.
당시 정황을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7.6.4에서 인용한다.
"...But the people, on account of Herod's barbarous temper, and for fear he should be so cruel and to inflict punishment on them, said what was done was done without their approbation, and that it seemed to them that the actors might well be punished for what they had done. But as for Herod, he dealt more mildly with others [of the assembly] but he deprived Matthias of the high priesthood, as in part an occasion of this action, and made Joazar, who was Matthias's wife's brother, high priest in his stead. Now it happened, that during the time of the high priesthood of this Matthias, there was another person made high priest for a single day, that very day which the Jews observed as a fast. The occasion was this: This Matthias the high priest, on the night before that day when the fast was to be celebrated, seemed, in a dream, 1 to have conversation with his wife; and because he could not officiate himself on that account, Joseph, the son of Ellemus, his kinsman, assisted him in that sacred office. But Herod deprived this Matthias of the high priesthood, and burnt the other Matthias, who had raised the sedition, with his companions, alive. And that very night there was an eclipse of the moon..."
아무튼 BC 2년부터 코모두스의 사망까지를 계산하면, AD 194년이 나온다. 예수탄생 ~ 코모두스 죽음까지가 194년 1달 13일이란 기록에 따라 예수의 탄생일을 계산해 보자. 만약 클레멘스스가 율리우스력을 따랐다면, 예수의 탄생일은 BC 2년 11월 17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클레멘스가 4년마다 일년을 366일의 윤년으로 하는 형식의 로마 율리우스력을 따르지 않았다면?
만약 클레멘스가 1년을 365일로 고정한 이집트 공용력을 따랐다면, 그는 매년 6시간 씩을 잃게 되며 지난 200여 년간 총 49일을 잃게 된다. 이 경우, 그가 말하는 194년은 194 * 365 = 70,810일 + 1달/30일 + 13일 인 셈인데, 이를 다시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70,853/365.25 = 193.985 년이 된다. 이 계산에서 예수의 탄생일은 BC 1년 1월 5/6일이 된다.
AD 4세기 말/5세기 초반에 살았던 수도사 요하누스 캇시아누스는 AD 420년 경 당시 이집트 수도원들이 옛 관습에 따라 (mos iste antiqua traditione servatur) 예수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와 예수의 세례일인 주현절을 같은 날 함께 기념하고 있다고 {Collationes} (X, 2 in Patrologia Latina P.L., XLIX, 820, http://www.earlymedievalmonasticism.org/texts/Cassian-Collationes.html) 에 적고 있다.
IN the country of Egypt this custom is by ancient tradition observed that--when Epiphany is past, which the priests of that province regard as the time, both of our Lord's baptism and also of His birth in the flesh, and so celebrate the commemoration of either mystery not separately as in the Western provinces but on the single festival of this day,[578]--letters are sent from the Bishop of Alexandria through all the Churches of Egypt, by which the beginning of Lent, and the day of Easter are pointed out not only in all the cities but also in all the monasteries.[579] In accordance then with this custom, a very few days after the previous conference had been held with Abbot Isaac, there arrived the festal letters of Theophilus[580] the Bishop of the aforesaid city, in which together with the announcement of Easter he considered as well the foolish heresy of the Anthropomorphites[581] at great length, and abundantly refuted it. And this was received by almost all the body of monks residing in the whole province of Egypt with such bitterness owing to their simplicity and error, that the greater part of the Elders decreed that on the contrary the aforesaid Bishop ought to be abhorred by the whole body of the brethren as tainted with heresy of the worst kind, because he seemed to impugn the teaching of holy Scripture by the denial that Almighty God was formed in the fashion of a human figure, though Scripture teaches with perfect clearness that Adam was created in His image. Lastly this letter was rejected also by those who were living in the desert of Scete and who excelled all who were in the monasteries of Egypt, in perfection and in knowledge, so that except Abbot Paphnutius the presbyter of our congregation, not one of the other presbyters, who presided over the other three churches in the same desert, would suffer it to be even read or repeated at all in their meetings. --- Book X, Chapter II, Ramsey, Boniface, John Cassian: The Conferences, New York/Mahwah NJ 1997 (Ancient Christian Writers, vol. 57)
하지만 AD 430년대에 들어서는 이집트에서도 크리스마스와 주현절을 분리해서 기념하게 되었고, Khoiak 29이 크리스마스가 된다. 이날은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이다.
단성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예수의 탄생, 동방박사의 방문,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 의한 예수의 침례를 모두 같은 날인 (율리우스력) 1월 6일에 기념했다. 모든 정교회에서는 예수의 탄생과 동방박사의 방문을 (율리우스력) 12월 25일에, 예수의 침례를 1월 6일에 기념했다. 서방의 라틴교회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12월 25일에 기념하고, 동방박사의 방문을 1월 6일에 기념했다. 그리고 예수의 침례는 1월 6일 다음의 일요일에 기념하도록 정해졌다.
## 라틴교회의 율리우스력 12월 25일
동지일은 로마의 율리우스력에서 12월 25일이다. 율리우스력은 128년마다 하루를 잃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집전하에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325년까지 실제적으로 동지일은 율리우스력 12월 22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러다가 16세기 말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율리우스력을 그레고리우스력으로 개정할 무렵, 동지일은 율리우스력 12월 12일이 되었다.
이때 그레고리우스는 동지일을 예수 당시나 혹은 율리우스력이 생긴 때가 아닌 니케아 공의회 (AD 325년) 당시의 날짜 (22일)로 다시 세팅해 버렸는데,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새 달력에서 25일에 기념하도록 되었고 동지는 22일이 된 것이다. 따라서 율리우스력의 동지인 25일과 그레고리우스력에서의 크리스마스인 25일은 사실상은 서로 다른 천문학적 의미를 가진 날이다.
그럼 이제 다시 크리스마스를 보자.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이란 근거는 성서에는 전혀 없다.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 "축일"로 기념한 전통을 남긴 최초의 "기록물"은 로마교회의 기록으로 AD 336년의 일이다. 그러나 로마에서 AD 200년대 초반에 활동한 로마사제 히폴리투스는 비록 12월 25일을 교회가 "축일로 기념"하고 있는지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라고 바로 그날을 예수의 "탄생일"로 특정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현재 남은 기록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 이전부터 이런 전통이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아우렐리아우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솔 인빅투스를 로마의 공식 국가신으로 선포한 AD 3세기말 이전에 이미 일부
서방 교회들은 25일을 예수의 탄생기념일인 크리스마스로 기념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흥미롭게도 AD 2-3세기에 로마, 북 아프리카 및 소
아시아와 일부 그리스 지역교회들은 대체로 로마 율리우스력으로 3월 25일에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믿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 날이 또한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하고, 또 30년 후에 예수가 포교를 시작한 그 날이라고 믿는 전통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근거는 AD 2세기 말-3세기 초에 활동한 로마 사제이자 신학자 히폴리투스의 기록이다. 그는 구약성서 {다니엘}에 대한 주석에서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 해석이 순수한 신학적 해석인지, 아니면 사실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히폴리투스에 따르면, 예수는 BC 3/2년 수요일인 12월 25일에 태어났으며, 그때는 아우구스투스의 집권 42년이 되는 해였다. 한편, 예수가 수난 당한 날은 AD 29년 3월 25일 금요일이었고, 그때는 루벨리우스/Rubellius와 루푸스/Rufus가 콘술이었을 때의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루푸스는 Fufius의 오기로 보고 있다.
우선 계산이 보다 용이한 부활절 날짜의 산정부터 살펴보자.
사실 초기 교회에서 크리스마스는 전혀 중요한 축일이 아니었다. 대신 부활절이 최고의 축일이었고, 그 뒤를 잇는 것은 주현절이었다. 부활일은 태양태음력을 따르는 복잡한 유대종교력 대신 현지 역법에 더 친숙했던 기독교도들에 의해 새로 세팅되기 시작했는데, 그리스 지역에서는 십자가형이 있었던 해의 유월절인 유대력 니산 14일을 그리스 태양태음력 아르테미시온 14일로 세팅하고 그 유월절 날을 역시 부활절로 기념했다. 그 이유는 유대력 니산달과 그리스력 (마케도니아력) 아르테미시온달 모두 춘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AD 300년을 전후해 그리스력은 로마의 율리우스력으로 대체되는데 그때 이 아르테미시온 14일은 율리우스력 4월 6일이 되었다. 한편, 라틴교회는 테르툴리아누스가 활동하던 시기인 2-3세기 무렵 로마와 북아프리카의 라틴교회에서는 AD 29년 3월 25일 금요일을 유월절로 계산하고 이어지는 일요일을 부활절로 기념했다. (사실 29년이 아니라 30년이나 33년이 되어야 옳는 계산이긴 하다.)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와 라틴교회에서는 부활절을 또한 예수의 수태일로 여기는 전통이 있었다 (Chronographai, AD 221, Sextus Julius Africanus). 예수는 유월절, 즉 니산14일 직전에 처형당한다. 그런데 예수가 처형당한 것으로 여져지는 AD 30년경의 유월절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3월 25일에 걸치게 된다.
그런데 AD 221년에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연대기 {Chronographai}에 예수가 봄철의 첫날 (현재 그레고리우스력으론 3월 25일)에 수태되었다고 (즉, 가브리엘에 의해 수태고지 되었다고) 적는다. 아울러 이날이 천지창조가 있었던 날이라고도 주장한다. 참고로 3월 25일은 봄철의 첫날이다. 아프리카누스는 예수가 AD 30/31년에 처형당한 것으로 계산했는데, 그해 유월절은 율리우스력 3월 23일이고, 부활일은 3월 25일이다. 따라서 이 경우 예수의 수태와 부활절은 같은 날이 된다. 이런 설명은 AD 2세기 말 북 아프리카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에게서도 등장하는데, 그러므로 아프리카누스가 이 주장을 불쑥 꺼낸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미 AD 2세기 중반부터는 서방 라틴교회들에 이런 전통이 퍼져있었단 뜻이 될 것이다. 이 3월 25일 수태고지 기념일은 서방과 동방교회 모두에서 고정일이다. 결론적으로 양력 3월 25일은 천지가 창조되고, 예수가 수태되고, 부활한 날이란 설명일 것이다. 다소 작위적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것이 당시 교부 몇명의 저술에 등장하는 설명이다.
이 경우 크리스마스는 그리스 전통의 율리우스력 4월 6일 혹은 라틴 전통의 율리우스력 3월 25일에 9달을 더하면 산출된다. 전자는 1월 6일이고, 후자는 12월 25일이다. 1월 6일은 차츰 (예수의 세례와 포교의 개시를 기념하는) 주현절로 재조정되었다.
그럼 이런 계산의 원래 근거는 무엇인가?
그동안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세마야후 탈몬(Shemaryahu Talmon)이 1958년에 예수와 동시대에 존재한 에세네파의 아지트로 여겨지는 쿰란의 기록들을 조사한 후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보고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의 도래를 예고한 세례자 요한은 제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성직 수행기간을 전후해 임신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사장 가문은 돌아가면서 한 해에 두번 성직을 수행하는데, 쿰란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자카리아가 속한 아비야 가문의 성직수행 주간 (유대력으로 세번째 달의 8-14일 + 여덟번째 달의 24-30일) 중 한 주간이 대충 율리우스력으로 9월 3번째 주에서 마지막 주에 걸치게 된다. 초기 교회의 구전 전통은 세례자 요한이 9월 23일에 임신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예수는 그보다 6개월 후에 임신되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3월 25일경에 임신되서 12월 25일 경에 태어났다고도 볼 수 있게 된다.
즉,
그래서 솔 인빅투스의 축제일인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와 그 이전에 이미 초기 기독교의 일부 그룹에서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한 것은 두개의 다른 독자적 기원을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 정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심지어 여러가지 후보군들 중에서 굳이 12월 25일로의 단일화는 라틴교회 전통의 영향이다.
그렇다면 과연 크리스마스는 로마의 사투르날리아 축제, 혹은 미트라스 제전, 혹은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의 영향 아래 발생했거나, 혹은 그것을 기독교적으로 대체한 것인가? 초기 기독교도들은 기독교 박해와 늘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던 로마황제들이 신봉하던 솔 인빅투스-미트라스의 제전을 기독교의 축일과 관련시키고 싶어했을까?
아니면 독자적으로 발생했는데 (물론 다양한 후보들과 함께) 그중에 우연히 하나가 솔 인빅투스의 12월 25일과 일치되었고, 그게 기독교 공인과 더불어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를 대체한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일까?
현재 교회예전력으로 라틴교회의 그레고리우스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는 러시아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등의 일부 동방정교회에서는 그레고리우스력의 개정으로 발생한 날짜 차이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력으로 1월 7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한다. 물론 율리우스력으로는 12월 25일이다. 한편 그리스 정교회는 그레고리우스력에 맞춰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한다.
한편, 시리아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나중에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되는 크리소스토모스는 AD 386년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성탄 날짜가 동방에서 어떻게 조정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동방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관례가 원래는 없었고, 후대에 서방, 즉 로마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인 것이며, 또한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는 이 설교로부터 최소 10년 전까지는 성탄을 기념하는 관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고대로부터 교회가 기념해 오던 주현절, 유월절/부활절, 승천절, 오순절이란 교회력이 성탄절로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수의 탄생이 없다면 그의 활동도, 수난도, 부활도, 승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을 성탄의 날짜로 강하게 확신했고 이미 "트라키아에서 카데스/카디즈", 즉 소아시아에서 오늘날 에스파니아에 이르는 제국의 서방에서 12월 25일에 성탄을 기념하는 관례를 콘스탄티노플과 동방에 도입한 인물이다.
이 설교에서 크리소스토모스는 예수의 탄생 때 있었던 (복음서의) 퀴리니우스의 "첫번째" 등록 때 남은 예수의 출생기록이 로마로 옮겨져 보관되었고, 따라서 그 기록에 따라 로마인들이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오래 전부터 기념하고 전수해 왔기 때문에 신뢰할 만하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이 기독교 지역이던 이집트를 침공하기 시작하던 AD 7세기의 단성파 이집트 꼽트교회의 주교이던 니키우 (Nikiu)의 요한의 연대기에 따르면, 로마교회에서는 AD 337-352년에 로마주교였던 율리우스 1세가 예루살렘 주교 키릴로스의 요청을 받고, 제 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투스가 로마로 가지고 간 예수 탄생 당시 센서스 기록을 참조해 12월 25일을 성탄일로 확정했다고 적었다.
물론 원자료가 남아있지 않으므로 이 진술들을 사실로 확정할 수는 없다.
## 동방교회의 율리우스력 1월 6일
오늘날 (단/합성론파에 속하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만이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하고 있기는 하지만, 원래 크리스마스 날짜에 관한 동방교회들의 일반적인 합의는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이 아니라 1월 6일 이었다. 동방의 전통은 예수의 탄생일과 (동방박사가 방문한) 주현절을 같은 날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AD 361년 키프로스 살라미스의 주교였던 에피파니우스는 이단을 총 집대성한 그의 역작 {파나리온, Panarion}에서 동방의 전통을 기록하고 있다.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일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13번째 콘술이었고 또 실라누스가 콘술인 해, 1월 15일 (Ides)로부터 8일 전이자 동지 (12월 25일)로부터 13일이 되는 1월 6일이다. 이 해는 에피파니우스의 계산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가 집권한지 (정확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시작한 해부터) 42년 되는 해이자, 옥타비아누스가 유대아를 시리아에 병합시킨지 29년이 되는 해, 즉 BC 2년이다. 또한 헤롯 안티파트로스가 권좌에 오른 지 5년 차가 된다.
에피파니우스의 {파나리온}에서 인용한다.
예수의 탄생시간대는 율리우스력 1월 5일 저녁에서 1월 6일 자정무렵에 걸치는 것으로 진술한다. 이 날짜는 당대 이집트 달력에서는 티비 11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럼 왜 서방의 라틴교회 전통은 12월 25일이 예수의 탄생일인데, 동방의 전통에서는 1월 6일인가? 그 힌트는 고대의 역법 속에 등장한다.
로마의 히폴리투스의 기록을 다시 읽어보자.
정확히 말하자면, 이 기록에서 히폴리투스는 "동지"나 "12월 25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달력 1월의 첫날 (=칼렌드)로부터 "8일 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 에피파니우스는 역시 "8일 전"을 말하지만 "신년일로부터의 8일 전"이 아니라 "1월 이데스 (Ides, 15일)로부터 8일 전"을 말하고 있다.
고대의 인식에서 동지인 12월 25일과 1월 6일은 "해가 다시 길어지는 13일 간의 절기"의 첫날과 마지막 날이다. 당시의 역법에서 동지로부터 하루씩 1/13시간이 낮에 추가되기 때문에, 13일이 지나 다음 해 1월 6일이 되면 낮이 (동지 직전보다) 1시간 길어지는 것이다.
에피파니우스의 기록을 보자.
이어서 에피파니우스는 메소포타미아 에뎃사의 주교였던 에프렘 (AD 306-373)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다. 에프렘의 주석은 동방 기독교의 계산법 혹은 신학적 이해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결국, "무엇으로부터의 8일 전인가?", 즉 기준일 산정이 서방과 동방의 전통을 다르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 대표적인 근거는 AD 2세기 말-3세기 초에 활동한 로마 사제이자 신학자 히폴리투스의 기록이다. 그는 구약성서 {다니엘}에 대한 주석에서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 해석이 순수한 신학적 해석인지, 아니면 사실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For the first advent of our Lord in the flesh, when he was born in Bethlehem, eight days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December 25th], the 4th day of the week [Wednesday], while Augustus was in his forty-second year, [2 or 3BC] but from Adam five thousand and five hundred years. He suffered in the thirty third year, 8 days before the kalends of April [March 25th], the Day of Preparation, the fifteenth year of Tiberius Caesar [29 or 30 AD], while Rufus and Roubellion and Gaius Caesar, for the 4th time, and Gaius Cestius Saturninus were Consuls... --- (tr. Tom Schmidt) {the Commentary on Daniel} 4.23.3 / tr. Tom Schmidt
우리 주님이 육체를 입고 처음 오실 때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1월 칼렌드로부터 8일 전 (= 즉, 12월 25일), 그 주의 제 4일 (=즉, 수요일)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그 해는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42년 (=즉, BC 2/3년)이었다. 이 해는 아담으로부터 5500년이 지난 해였다. 그는 33세에 수난을 당하셨고, 이 날은 4월 칼렌드로부터 8일 전 (=즉, 3월 25일)인 유월절 준비일이었고,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15년 (=즉, AD 29/30년)이었으며, 루푸스, 루벨리온, 가이우스 카이사르 (4번째),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사투르니누스가 콘술이었던 때의 일이다 --- 로마의 히폴리투스, {다니엘서 주석} 4.23.3 / 번역: 최광민
히폴리투스에 따르면, 예수는 BC 3/2년 수요일인 12월 25일에 태어났으며, 그때는 아우구스투스의 집권 42년이 되는 해였다. 한편, 예수가 수난 당한 날은 AD 29년 3월 25일 금요일이었고, 그때는 루벨리우스/Rubellius와 루푸스/Rufus가 콘술이었을 때의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루푸스는 Fufius의 오기로 보고 있다.
우선 계산이 보다 용이한 부활절 날짜의 산정부터 살펴보자.
사실 초기 교회에서 크리스마스는 전혀 중요한 축일이 아니었다. 대신 부활절이 최고의 축일이었고, 그 뒤를 잇는 것은 주현절이었다. 부활일은 태양태음력을 따르는 복잡한 유대종교력 대신 현지 역법에 더 친숙했던 기독교도들에 의해 새로 세팅되기 시작했는데, 그리스 지역에서는 십자가형이 있었던 해의 유월절인 유대력 니산 14일을 그리스 태양태음력 아르테미시온 14일로 세팅하고 그 유월절 날을 역시 부활절로 기념했다. 그 이유는 유대력 니산달과 그리스력 (마케도니아력) 아르테미시온달 모두 춘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AD 300년을 전후해 그리스력은 로마의 율리우스력으로 대체되는데 그때 이 아르테미시온 14일은 율리우스력 4월 6일이 되었다. 한편, 라틴교회는 테르툴리아누스가 활동하던 시기인 2-3세기 무렵 로마와 북아프리카의 라틴교회에서는 AD 29년 3월 25일 금요일을 유월절로 계산하고 이어지는 일요일을 부활절로 기념했다. (사실 29년이 아니라 30년이나 33년이 되어야 옳는 계산이긴 하다.)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와 라틴교회에서는 부활절을 또한 예수의 수태일로 여기는 전통이 있었다 (Chronographai, AD 221, Sextus Julius Africanus). 예수는 유월절, 즉 니산14일 직전에 처형당한다. 그런데 예수가 처형당한 것으로 여져지는 AD 30년경의 유월절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3월 25일에 걸치게 된다.
그런데 AD 221년에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연대기 {Chronographai}에 예수가 봄철의 첫날 (현재 그레고리우스력으론 3월 25일)에 수태되었다고 (즉, 가브리엘에 의해 수태고지 되었다고) 적는다. 아울러 이날이 천지창조가 있었던 날이라고도 주장한다. 참고로 3월 25일은 봄철의 첫날이다. 아프리카누스는 예수가 AD 30/31년에 처형당한 것으로 계산했는데, 그해 유월절은 율리우스력 3월 23일이고, 부활일은 3월 25일이다. 따라서 이 경우 예수의 수태와 부활절은 같은 날이 된다. 이런 설명은 AD 2세기 말 북 아프리카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에게서도 등장하는데, 그러므로 아프리카누스가 이 주장을 불쑥 꺼낸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미 AD 2세기 중반부터는 서방 라틴교회들에 이런 전통이 퍼져있었단 뜻이 될 것이다. 이 3월 25일 수태고지 기념일은 서방과 동방교회 모두에서 고정일이다. 결론적으로 양력 3월 25일은 천지가 창조되고, 예수가 수태되고, 부활한 날이란 설명일 것이다. 다소 작위적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것이 당시 교부 몇명의 저술에 등장하는 설명이다.
이 경우 크리스마스는 그리스 전통의 율리우스력 4월 6일 혹은 라틴 전통의 율리우스력 3월 25일에 9달을 더하면 산출된다. 전자는 1월 6일이고, 후자는 12월 25일이다. 1월 6일은 차츰 (예수의 세례와 포교의 개시를 기념하는) 주현절로 재조정되었다.
그럼 이런 계산의 원래 근거는 무엇인가?
그동안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세마야후 탈몬(Shemaryahu Talmon)이 1958년에 예수와 동시대에 존재한 에세네파의 아지트로 여겨지는 쿰란의 기록들을 조사한 후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보고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의 도래를 예고한 세례자 요한은 제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성직 수행기간을 전후해 임신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사장 가문은 돌아가면서 한 해에 두번 성직을 수행하는데, 쿰란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자카리아가 속한 아비야 가문의 성직수행 주간 (유대력으로 세번째 달의 8-14일 + 여덟번째 달의 24-30일) 중 한 주간이 대충 율리우스력으로 9월 3번째 주에서 마지막 주에 걸치게 된다. 초기 교회의 구전 전통은 세례자 요한이 9월 23일에 임신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예수는 그보다 6개월 후에 임신되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3월 25일경에 임신되서 12월 25일 경에 태어났다고도 볼 수 있게 된다.
즉,
- 율리우스력 9월 23일에 세례요한 수태
- 6개월 후 3월 25일에 마리아에게 수태고지
- 그로부터 9개월 후인 12월 25일 예수 탄생
그래서 솔 인빅투스의 축제일인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와 그 이전에 이미 초기 기독교의 일부 그룹에서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한 것은 두개의 다른 독자적 기원을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 정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심지어 여러가지 후보군들 중에서 굳이 12월 25일로의 단일화는 라틴교회 전통의 영향이다.
그렇다면 과연 크리스마스는 로마의 사투르날리아 축제, 혹은 미트라스 제전, 혹은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의 영향 아래 발생했거나, 혹은 그것을 기독교적으로 대체한 것인가? 초기 기독교도들은 기독교 박해와 늘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던 로마황제들이 신봉하던 솔 인빅투스-미트라스의 제전을 기독교의 축일과 관련시키고 싶어했을까?
아니면 독자적으로 발생했는데 (물론 다양한 후보들과 함께) 그중에 우연히 하나가 솔 인빅투스의 12월 25일과 일치되었고, 그게 기독교 공인과 더불어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를 대체한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일까?
현재 교회예전력으로 라틴교회의 그레고리우스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는 러시아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등의 일부 동방정교회에서는 그레고리우스력의 개정으로 발생한 날짜 차이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력으로 1월 7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한다. 물론 율리우스력으로는 12월 25일이다. 한편 그리스 정교회는 그레고리우스력에 맞춰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한다.
한편, 시리아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나중에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되는 크리소스토모스는 AD 386년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성탄 날짜가 동방에서 어떻게 조정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동방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관례가 원래는 없었고, 후대에 서방, 즉 로마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인 것이며, 또한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는 이 설교로부터 최소 10년 전까지는 성탄을 기념하는 관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고대로부터 교회가 기념해 오던 주현절, 유월절/부활절, 승천절, 오순절이란 교회력이 성탄절로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수의 탄생이 없다면 그의 활동도, 수난도, 부활도, 승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을 성탄의 날짜로 강하게 확신했고 이미 "트라키아에서 카데스/카디즈", 즉 소아시아에서 오늘날 에스파니아에 이르는 제국의 서방에서 12월 25일에 성탄을 기념하는 관례를 콘스탄티노플과 동방에 도입한 인물이다.
2. And if someone fond of dispute would not bear with what has been said, it is possible also to state a second proof. Of exactly what nature is this proof? The one from the census, which is found in the Gospels. For it came to pass, says the Evangelist, "In those days a decree went out from Caesar Augustus, that all the inhabited world should be enrolled. This was the first census, when Quirinius was governor of Syria. And all went to be enrolled, each to his own city. And Joseph also went up to Galilee, from the city of Nazareth, to Judea, to the city of David, which is called Bethlehem, because he was of the house and family of David, to be enrolled with Mary, his betrothed, who was with child. And while they were there, the time came for her to bring forth. And she gave birth to her first-born son and wrapped him in swaddling clothes, and laid him in a manger, because there was no place for them at the inn. " It is clear from this that He was born during the first census. And it is possible for the one who desires to know exactly to read the original codices publicly stored at Rome and learn the time of the census. So what, someone says, is this to us-who are neither there nor present? But listen, and do not be unbelieving, because we have received the day from those who know these things accurately and who dwell in that city. For the ones living there, having observed it from the beginning and from ancient tradition, now have themselves transmitted the knowledge of it to us. Nor in fact did the Evangelist indicate this time randomly, but both to make the day clear and known to us, and to show the economy of God. ---- On the Day of the Birth of Our Savior Jesus Christ" by St. John Chrysostom . https://www.johnsanidopoulos.com/2014/12/on-day-of-birth-of-our-savior-jesus.html
이 설교에서 크리소스토모스는 예수의 탄생 때 있었던 (복음서의) 퀴리니우스의 "첫번째" 등록 때 남은 예수의 출생기록이 로마로 옮겨져 보관되었고, 따라서 그 기록에 따라 로마인들이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오래 전부터 기념하고 전수해 왔기 때문에 신뢰할 만하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이 기독교 지역이던 이집트를 침공하기 시작하던 AD 7세기의 단성파 이집트 꼽트교회의 주교이던 니키우 (Nikiu)의 요한의 연대기에 따르면, 로마교회에서는 AD 337-352년에 로마주교였던 율리우스 1세가 예루살렘 주교 키릴로스의 요청을 받고, 제 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투스가 로마로 가지고 간 예수 탄생 당시 센서스 기록을 참조해 12월 25일을 성탄일로 확정했다고 적었다.
물론 원자료가 남아있지 않으므로 이 진술들을 사실로 확정할 수는 없다.
## 동방교회의 율리우스력 1월 6일
오늘날 (단/합성론파에 속하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만이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하고 있기는 하지만, 원래 크리스마스 날짜에 관한 동방교회들의 일반적인 합의는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이 아니라 1월 6일 이었다. 동방의 전통은 예수의 탄생일과 (동방박사가 방문한) 주현절을 같은 날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AD 361년 키프로스 살라미스의 주교였던 에피파니우스는 이단을 총 집대성한 그의 역작 {파나리온, Panarion}에서 동방의 전통을 기록하고 있다.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일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13번째 콘술이었고 또 실라누스가 콘술인 해, 1월 15일 (Ides)로부터 8일 전이자 동지 (12월 25일)로부터 13일이 되는 1월 6일이다. 이 해는 에피파니우스의 계산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가 집권한지 (정확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시작한 해부터) 42년 되는 해이자, 옥타비아누스가 유대아를 시리아에 병합시킨지 29년이 되는 해, 즉 BC 2년이다. 또한 헤롯 안티파트로스가 권좌에 오른 지 5년 차가 된다.
에피파니우스의 {파나리온}에서 인용한다.
22.3 ....For these say as follows: "During their consulships," I mean Octavians's 13th and the consulship of Silanus, "Christ was born on the 8th before the Ides of January, 13 days after the winter solstice and the increase of the light and the day.". Greeks, I mean the idolatoers, celebrate this day on the eighth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which Romans call Saturnalia, Egyptian Cronia and Alexandrians, Cicellia. --- Panarion, IV.22.5-6;
이와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콘술로 재임할 때", 여기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실라누스와 콘술로 재임한 그의 통산 13번째 재임기를 말하는데, "그리스도는 1월 이데스의 8일 전, 즉 동지로부터 13일 후이자 낮의 길이가 길어지는 날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스 우상숭배자들은 1월 칼렌드로부터의 8일 전 (=12월 25일)에 축제를 가지는데. 이 날은 로마의 사투르날리아, 이집트의 크로니아, 알렉산드리아의 키켈리아에 해당한다. --- 에피파니우스, {파나리온} 4권 22:5-6 / 번역: 최광민
....As I have said before and am obliged to say over and over, this was the day in the thirteenth consulship of Octavius Augustus and the consulship of Silanus which fell on the eighth day before the Ides of January, thirteen days after the increase of the daylight. This lasts from the winter solstice, the eighth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until the actual day of Christ's birth and Manifestation, because of the type I spoke of -- the Savior himself and his disciples, making thirteen. [19] Thus the Savior was born in the 42 year of the Roman emperor augustus in the consulship I have mentioned, 29 years after Augustus' annexation of Judaea --- Epiphanius, Panarion, IV, Chapter 31 (51), 22, 18-19).
예수의 탄생시간대는 율리우스력 1월 5일 저녁에서 1월 6일 자정무렵에 걸치는 것으로 진술한다. 이 날짜는 당대 이집트 달력에서는 티비 11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For Christ was born in the month of January, that is, on the eighth before the Ides of January -- in the Roman calendar this is the evening of January fifth, at the beginning of January sixth. In the Egyptian calendar it is the eleventh of Tybi.” --- Epiphanius, {Panarion}, IV, Chapter 31 (51), 24,1).
그럼 왜 서방의 라틴교회 전통은 12월 25일이 예수의 탄생일인데, 동방의 전통에서는 1월 6일인가? 그 힌트는 고대의 역법 속에 등장한다.
로마의 히폴리투스의 기록을 다시 읽어보자.
...For the first advent of our Lord in the flesh, when he was born in Bethlehem, eight days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December 25th], the 4th day of the week [Wednesday], while Augustus was in his forty-second year, [2 or 3BC] but from Adam five thousand and five hundred years. He suffered in the thirty third year, 8 days before the kalends of April [March 25th], the Day of Preparation, the fifteenth year of Tiberius Caesar [29 or 30 AD], while Rufus and Roubellion and Gaius Caesar, for the 4th time, and Gaius Cestius Saturninus were Consuls... --- (tr. Tom Schmidt) {the Commentary on Daniel} 4.23.3 / tr. Tom Schmidt
우리 주님이 육체를 입고 처음 오실 때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1월 칼렌드로부터 8일 전 (= 즉, 12월 25일), 그 주의 제 4일 (=즉, 수요일)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그 해는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42년 (=즉, BC 2/3년)이었다. 이 해는 아담으로부터 5500년이 지난 해였다. 그는 33세에 수난을 당하셨고, 이 날은 4월 칼렌드로부터 8일 전 (=즉, 3월 25일)인 유월절 준비일이었고,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15년 (=즉, AD 29/30년)이었으며, 루푸스, 루벨리온, 가이우스 카이사르 (4번째),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사투르니누스가 콘술이었던 때의 일이다 --- 로마의 히폴리투스, {다니엘서 주석} 4.23.3 / 번역: 최광민
정확히 말하자면, 이 기록에서 히폴리투스는 "동지"나 "12월 25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달력 1월의 첫날 (=칼렌드)로부터 "8일 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 에피파니우스는 역시 "8일 전"을 말하지만 "신년일로부터의 8일 전"이 아니라 "1월 이데스 (Ides, 15일)로부터 8일 전"을 말하고 있다.
고대의 인식에서 동지인 12월 25일과 1월 6일은 "해가 다시 길어지는 13일 간의 절기"의 첫날과 마지막 날이다. 당시의 역법에서 동지로부터 하루씩 1/13시간이 낮에 추가되기 때문에, 13일이 지나 다음 해 1월 6일이 되면 낮이 (동지 직전보다) 1시간 길어지는 것이다.
에피파니우스의 기록을 보자.
......which is solstice, comes on the 8th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and the day begins to lengthen because the light is receiving its increase And it completes a period of 13 days until the 8th before the Ides of January, the day of Christ's birth, with a 13th of an hour added to each day. --- Ephiphanius, {Panarion} IV 22,3 --- Ephiphanius, {Panarion} IV 22,3
...1월 칼렌드 8일 전에 해당하는 동지 때부터 빛이 길어져 하루당 1/13시간씩 낮이 늘어나는데, 그리스도의 탄생일인 1월 이데스의 8일 전까지 13일 간의 절기가 이렇게 완성된다....--- 살라미스 주교 에피파니우스, {파나리온} 4권 22.3 / 번역: 최광민
이어서 에피파니우스는 메소포타미아 에뎃사의 주교였던 에프렘 (AD 306-373)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다. 에프렘의 주석은 동방 기독교의 계산법 혹은 신학적 이해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The Syrian sage Ephrem testified ......."Thus the advent of our Lord Jesus Christ, his birth in the flesh or perfect incarnation which is called the Epiphany, was revealed after a space of 13 days from the begining of the increase of the light...." --- Ephiphanius, {Panarion} IV 22,3
시리아 현자인 에프렘은 이 계산에 대해 그의 주석에서 말하길....."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탄생 혹은 완전한 성육신은 낯의 빛이 길어지기 시작한 후 13일 후에 있었다..." --- 살라미스 주교 에피파니우스, {파나리온} 4권 22.3 / 번역: 최광민
결국, "무엇으로부터의 8일 전인가?", 즉 기준일 산정이 서방과 동방의 전통을 다르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서방의 경우 이 "낮이 길어지는 13일 간의 절기"의 첫날인
동지일이, 동방의 경우는 그 마지막 날이 예수의 탄생일로 계산된 셈이다.
그래서 동지 일은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고, 이듬 해 1월 6일은 낮이
동지 직전보다 "한 시간 더 길어진" 날이다. 혹은 이 13일 중 어느 한 날에
예수가 탄생했으나, 그 날짜가 특정되지 않아서 대신 동서방이 그 절기의 첫날
혹은 마지막 날을 예수의 탄생일로 기념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원래 칼렌드와 이데스는 음력에서는 달의 기울고 차는 것을 기준으로 했지만, 율리우스력의 개정과 함께 31일을 한달로 하는 달에서는 이데스가 그 달의 제 15일이 되지만 다른 달에서는 날 수가 달라진다. 달이 처음뜨는 노네스부터 이데스까지는 정확히 8일이며, 칼렌드부터 노네스까지는 4일 혹은 6일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데스부터 다음 달이 떠오르는 날까지는 16-19일 사이에 걸치게 된다.
에피파니우스 같은 문서의 22:9-10에서 흥미로운 비교종교학적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는 이 1월 6일이 당시 최소한 세개의 고대종교에서 여신에게서 탄생한 신의 탄생일로 지켜지고 있었음을 보고한다. 하나는 코레/Core여신이 시간의 신 아이온/Aion을 낳은 것을 기념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축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페트라의 여신 차아무/Chaamu가 두사레스/Dusares/신의 외아들을 낳은 날이다. 이 축제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엘루사/Elusa에서도 열렸다.
참고로 원래 칼렌드와 이데스는 음력에서는 달의 기울고 차는 것을 기준으로 했지만, 율리우스력의 개정과 함께 31일을 한달로 하는 달에서는 이데스가 그 달의 제 15일이 되지만 다른 달에서는 날 수가 달라진다. 달이 처음뜨는 노네스부터 이데스까지는 정확히 8일이며, 칼렌드부터 노네스까지는 4일 혹은 6일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데스부터 다음 달이 떠오르는 날까지는 16-19일 사이에 걸치게 된다.
에피파니우스 같은 문서의 22:9-10에서 흥미로운 비교종교학적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는 이 1월 6일이 당시 최소한 세개의 고대종교에서 여신에게서 탄생한 신의 탄생일로 지켜지고 있었음을 보고한다. 하나는 코레/Core여신이 시간의 신 아이온/Aion을 낳은 것을 기념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축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페트라의 여신 차아무/Chaamu가 두사레스/Dusares/신의 외아들을 낳은 날이다. 이 축제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엘루사/Elusa에서도 열렸다.
이에 대해서는 독립적으로 다루겠다.
# 정리
고대기록에서 12월 25일이 태양신에게 바쳐진 로마(시)의 공공축제일로 지켜진
것으로 기록하는 첫 자료는 "(솔) 인빅투스의 탄생일로 바쳐지는 축제"로
기념된 AD 354년 달력이다. AD 4세기 중반 (AD 354년과 362년) 이전에 12월
25일 동지에 솔을 기리는 축제/경기가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없다.
사실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특정해 기록한 사람은 AD 3세기 초반 로마의
사제 히폴리투스인데, 따라서 기록 상으로만 보면 12월 25일을 "신의 탄생일"로
인지한 것은 기독교 측이 한 세기 이상 앞선다.
예수가 육체적으로 탄생한 날 보다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사역을 개시한 주현절을 그의 종교적 탄생일로 더 중요시 했던 고대의 교회들은
예수의 탄생시점을 동지인 12월 25일과 다음 해 1월 6일 사이로 잡고, 이 기간의
첫 날인 12월 25일을 그의 "육체적 탄생일"로, 마지막 날인 1월 6일을
"메시아로서의 탄생일"인 주현절로 차차 분리해 기념하게 되었다.
草人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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