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광민] 인과율




역사|종교|철학

[© 최광민] 인과율

草人! 2021. 10. 28. 03:52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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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과율

순서
  1. 에뎃사, 바그다드, 코르도바, 파리
  2. 무타질라 학파와 아샤리 학파
  3. 동시성의 원리



Gesetz der Serie, Law of Seriality



메모 : 옆 집 사는 아부-알리 아저씨의 감수를 받아.




1. 에뎃사, 바그다드, 코르도바, 파리

서기 529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리스 아테네의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원 및 제국 영내의 다른 모든 철학학원을 폐쇄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 무렵, 그리스 철학은 이미 소아시아 및 지중해 일대의 비-그리스 문명권 (그러나 헬레니즘 문명권에 속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아테네의 학원이 폐쇄되기 전인 서기 363년, 메소포타미아의 에뎃사에 시리아 교회의 사제인 에프렘에 의해 설립한 기독교 신학교에서는 이 무렵, 그리스어 성서를 연구하기 위해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동시에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 의학을 함께 가르쳤다. 에뎃사는 중국과, 박트리아,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를 서방의 로마와 연결시켜주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그 지역에서 유행하던 마르키온파나 마니교 같은 그노시스 종교들의 확장에 대한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프렘의 후임자인 에데사 주교 라불라가 서기 411년 소위 테오토코스 논쟁의 중심에 서면서, 에뎃사의 신학교는 시리아에 지지층을 둔 양성론을 견지하던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를 기각하고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단성론을 지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에뎃사는 (고대) 카톨릭 교회를 지지하는 그룹과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두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아울러 이어지는 칼케돈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 양측을 모두 정죄한 결과, 489년 에뎃사의 신학교는 문을 닫고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교수진과 학생들은 페르시아로 이주하여 니비시스와 간디사포에 새로운 학원을 열었다. 반면, 시리아 지역에서는 리사이나와 키리스린이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들 시리아인들은 그리스의 철학, 의학,과학 문헌을 시리아어/아람어로 번역했다.

서기 622년 이슬람교가 시작되고, 서기 750년에는 아불 압바스가 압바스 왕조를 건립하여 시리아,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일대로 군사적 진출을 시작하면서 이들 시리아 학자들은 압바스 왕조에 봉사하게 되는데, 기독교도이거나 유대교 혹은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들 시리아인 학자들은 제 1세대 이슬람 학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슬람 철학의 개시는 {코란} 그 자체의 요청 때문이라기 보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였던 시리아와 가파도기아의 철학자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그리스철학과 {코란}과의 충돌을 풀기위한 시도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 철학자들이 "그 예언자"라고 불렀을때의 그 사람은 '무함마드'였지만, 존경심을 품고 "그 철학자"라고 불렀을 때의 그 사람은 그리스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의미했다.

사실 이슬람 철학자는 이슬람 신학자와 다른 부류의 인물들이었다. 신학자가 철학을 하던 중세유럽과는 달리, 이슬람철학자는 꼭 신학자일 필요가 없었고, 이 둘의 관계는 종종 대립관계로 나타났다. 이슬람 철학의 사고경향은 짧게 풀이한다면, "플로티노스로 채색된 아리스토텔레스"다. 이들이 AD 12세기 이후 서방에 전달한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플로티노스와 혼합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리스어에서 시리아어로, 그리고 시리아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되었던 그리스의 고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AD 12세기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유입됨에 따라, 유럽의 스콜라 신학자들은 더러는 아비체나 (아랍명, 이븐 시나)나 아베로에스(아랍명, 이븐 루슈드) 같은 이슬람 철학자들의 논리를 수용하거나, 혹은 그들을 비판적으로 뛰어넘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래서 12세기 이후의 중세 스콜라 철학은 아비체나, 아베로에스 등이 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흥미롭게도 이슬람 철학자는 이슬람 신학자들에게 배척되었으나, 반대로 기독교 신학자는 이슬람 철학자를 받아들였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따라서 중세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이슬람 철학자들의 사상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니까 그리스 아테네에서 유래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과학은, 먼저 기독교도인 시리아인들에게, 다음은 이슬람교도인 바그다드와 에스파니아 코르도바의 아랍철학자들에 의해서 보존, 계승, 발전된 후, 유럽인에게 재수입 된 셈이다. 그때까지 서유럽의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 원전 대신 초록집으로 고대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 원전과 주석서를 함께 가지게 된 것. 

아랍을 통해 서유럽에 재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의 경천동지할 쇼크였다. 서기 1210년, 프랑스 파리 교구는 파리대학에서 행해지던 아리스토텔레스 강좌 (사실은 아비체나와 아베로에스의 사상)를 폐지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을 금서조치했다. 그러나 결국 1366년이 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학박사를 받기 위해서 요구되는 필수과목으로 교회에 의해 선언된다.




2. 무타질라 학파와 아샤리 학파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에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예정 (아랍용어로 Taqdir)에 대한 논쟁은 결코 무시될 수도, 결코 끝이 날 수 있는 논쟁이 아니다. 이슬람에서도 같은 논쟁이 서기 8세기에 발생했다. 즉, 무타질라로 대표되는 무타질라 학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한때 무타질라 학파의 일원이었지만 나중에 학파의 교설에 반대해 분리해 나간 알-아샤리의 학파는 신 (알라)의 절대적 자유를 변호했다.

인간의 이성에 의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무타질라의 이성적 세계관에 알-아샤리는 강렬히 반대했던 것. 알-아샤리가 지키고 싶었던 관점은 신의 전능과 자유였다. 그래서 만물은 알라의 명령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의 권능에서 아무것도 독립될 수 없으며, 선은 물론 악 역시 오직 신의 의지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를 통해 아샤리 학파는 매우 흥미로운 세계관에 이르게 되었다. 일종의 "원자주의"라 불릴 만한 우주관이다.

즉, 세상은 시간의 '순간'들, 장소의 '점'들이라는 원자적 요소들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이 순간과 점들은 신의 의지에 의해 단순히 결합되어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둘의 결합관계는 신의 개입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될 수 있다. 이 원자적 요소들은 서로 간의 어떤 인과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각 결합의 계기들은 다른 계기들과 완전 독립적이다. 오직 신 만이 이 결합을 유지하고 해체할 수 있다. 알-아샤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인과론에 바탕을 두는 그리스 철학과 전혀 다른 비-그리스적 철학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신의 절대적 단일성과 자유와 권능을 변호하려는 사고경향은 기독교와 유대교에도 끊임없이 나타난 것이었다. 한편 서기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알-아샤리를 비판하게될 것이다.

- 무타질라 학파 (Mutazilite) : http://en.wikipedia.org/wiki/Mutazilite
- 아샤리 학파 (Asharite) : http://en.wikipedia.org/wiki/Asharite

무타질라 학파는 진리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으로 탄지(Tanzhi)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부정과 부정을 통해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방식이다. 여담이지만 이것은 왠지 한국어 '딴지'와 유사하지 않은가? '딴지'라는 단어는 고려시절 예성강 하구 벽란도에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수입된 아랍어였을까?

농담이다.



3. 동시성의 원리

헝가리 출신 저술가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의 {The Case of the Midwife Toad, 산파두꺼비의 사례}는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 파울 카메러의 전기이자 그의 연구에 대한 비평적 접근이다. 아서 쾨슬러는 환원주의에 상당한 거부감을 표현하던 저술가였기 때문에 이 책은 카메러의 접근방식에 다소간 우호적이다. 내가 비록 아서 쾨슬러의 인간성을 혐오하기는 하지만, 쾨슬러의 저술에는 빛나는 직관들이 번뜩인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현대 생물학계에서 파울 카메러가 차지하는 위치는 제로다. 그 이유는 그가 라마르크주의자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진화론자인 찰스 다윈 역시 아이러니 하게도 다소 간의 라마르크주의자이기는 했지만, 20세기의 생물학을 지배한 것은 소위 신-다윈주의라 불리는 환원주의적 유전학이었고, 이것이 정규과학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그리고 신-다윈주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생물학을 지배하고 있다. 신-다윈주의는 환원주의의 생물학적 구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카메러는 (소비에트 연방의 리센코와 함께) 라마르크주의 최후의 신봉자였다. 따라서 이제 현대의 어떤 생물학자도 그를 기념하거나 혹은 기억하지 않는다. 파울 카메러라는 이름은 과학철학과 인식론 논문에서 더 많이 인용된다.

서기 1919년 카메러는 {Gesetz der Serie, Law of Seriality}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사실 이 책은 생물학 저작물이라 할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카메러는 스스로 20년 동안 관찰해 온 자료들에 기초해서 자신의 발견을 보고한다. 카메러는 비엔나 광장에 우두커니 앉아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 일련의 사건들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관찰하고자 했다. 이20년의 관찰을 통해 , 파울 카메러는 훗날 심층심리학자 칼 융과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가) '동시성,synchronicity'라 부를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관찰된 동시성을 typology, morphology, power, parameter라는 4개의 용어를 세분화했다. typology란 관찰된 상황, 횟수, 이름 등의 타입을 말한다. morphology란 연속되는 동시발생 횟수, power는 병렬적인 동시발생 횟수, parameter란 동시발생하는 사건 간 공유되는 속성의 갯수를 뜻한다. 이를 바탕으로 카메러는 세계를 구성하는 두가지 수준의 질서를 발견했다. 첫번째 질서는 소위 "series of first order"라고 불리는 것으로 연속적이고 무미한 반복이거나 무작위적/확률적 발생을 뜻한다. 반면 "series of second order" 라는 것은 같은 타입에 속하는 동시발생적 사건이 매번 다른 횟수로 조합되는 경우다.

카메러는 후자로부터 통상적 확률법칙으로 유도할 수 없는 동시발생 사건들 간의 클러스터링을 보았고, 이 "a-causal"한 법칙이 우주 전체를 관통하여 모든 사건들을 묶어주고 있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생명체의) 형태와 기능, 시간과 공간 같은 대상들 역시 하나의 클러스터링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이를 {Law of Affinity}라 부른다.

(쾨슬러의 책에 인용된) 카메러 자신의 말을 빌면 :

"...Seriality is the umbilical cord that connects thought, feeling, science and artwith the womb of the Universe which gave birth to them...."

여기서 seriality라는 말은 심층심리학자 칼 융이 고안한 용어, '동시성, synchronicity'와 정확하게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우주를 일련의 연결된 동시적 사건의 매트릭스로 간주하는 일종의 통일장(unified field) 이론이다. 이것을 뜻하는 이런 적절한 라틴어 경구가 있다. “ Omnia nodis arcanis connexa, 만물은 신비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카메러가 당대에 이미 죽어가고 있던 라마르크주의 신봉자였다는 점은 그의 경력에 치명상을 가했고, (언론에 의해 떴다가 결국 언론에 의해 집중공격을 받고서) 그는 결국 절망 속에 자살했다. 그가 라마르크 주의자였다는 말은 신-다윈주의적 환원주의 생물학이 지배하는 20세기-21세기의 어떤 생물학자도 그의 연구를 진지하게 되돌아 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그의 동시발생에 대한 연구는 환원주의로 이해하기 힘든 생물학적 문제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적어도 나에게는) 믿어진다.

분자생물학, 즉 환원주의적 생물학은 생명체의 형태와 기능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함께 발생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힘들다. 생명체의 구조체와 그 기능은 절대로 개별적으로 분리시킬 수 없다. 어떤 생명체의 기관을 구성하는 세부구조들은 (가령, 세균의 편모를 생각해 보자.) 그 각각으로서는 아무런 기능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조립된 최후의 형태는 마치 어떤 제 3의 디자이너에 의해 만들어진 듯 특정 기능과 정확히 부합한다. 만약 신을 믿는다면 설명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만약 디자이너로서의 신의 개념을 거부한다면, 이 현상에 대한 어떤 합리적 설명이 필요하다. 바로 그 자리를 동시성이 채우는 것이다. 전자라면 동시발생 사건들을 묶어주는 것은 신의 섭리다. 그러나 후자라면 동시성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 속에 이미 짜여들어가 있는 하나의 자연현상이 된다.

사실 동시성의 원리에 대한 생각은 목적론, 그리고 인과율에 대한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이 주제는 최근 등장한 주제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진 문제다.서기 8세기 아랍의 철학자 알-아사리의 인과율에 대한 거부는 어떤 점에서는 매우 타당하다고도 여겨질 부분들이 충분히 있다. 특별히 인과율이라는 인식의 틀은 상식과는 달리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다분히 그리스적인 사고의 틀이 전 세계를 지배하면서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길어봐야 이천 년을 넘지 않는다. 다른 역사들과 다른 문명 속에서는 인과율이 하나의 가설인 적도 있었다는 뜻이다.인과율은 생각만큼 그렇게 당위적이고도 절대적 법칙이 아닐 수도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점을 {논리철학논고}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5.135
In no way can an inference be made from the existence of one state of affairs to the existence of another entirely different from it.

한 상황의 존립으로부터 전적으로 다른 상황의 존립을 추론할 수 없다.

5.136
There is no causal nexus which justifies such an inference.

그러한 추론을 정당화해줄 인과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5.1361
The events of the future cannot be inferred from those of the present. Superstition is the belief in the causal nexus.

현재의 사건으로부터 미래의 사건을 추론할 수 없다.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다.
...

6.32
The law of causality is not a law but the form of a law. *

인과율/인과법칙은 "법칙"이 아니라 "법칙의 형식"이다.

6.33
We do not believe a priori in a law of conservation, but we know a priori the possibility of a logical form.

우리는 (질량/에너지 등) 보존법칙을 선험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논리적 형식의 가능성을 "아는" 것이다.

6.34
All propositions, such as the law of causation, the law of continuity in nature, the law of least expenditure in nature, etc. etc., all these are a priori intuitions of possible forms of the propositions of science,

인과율....같은 법칙들은 모두, 과학의 명제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형식에 대한 선험적 통찰이다.

6.363. The process of induction is the process of assuming the simplest law that can be made to harmonize with our experience. This process, however, has no logical foundation but only a psychological one.

귀납의 과정은 우리의 경험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법칙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학적인 근거만 있을 뿐, 어떤 논리적 근거는 없다.

6.3631. It is clear that there are no grounds for believing that the simplest course of events will really happen.

이 가장 단순한 경우가 실제로 발생할 것이라 믿을 근거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6.36311. That the sun will rise to-morrow, is an hypothesis; and that means that we do not know whether it will rise.

내일도 태양이 떠오를 것이란 것은 가설이다. 즉, 우리는 태양이 내일도 떠오를 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6.37. A necessity for one thing to happen because another has happened does not exist. There is only logical necessity.

어떤 일이 발생했다고 해서, 다른 일이 따라서 발생해야 할 필연성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논리적 필연성 뿐이다.

6.371. At the basis of the whole modern view of the world lies the illusion that the so-called laws of nature are the explanations of natural phenomena.

근현대의 세계관 속에는 소위 자연법칙들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환상들이 깔려있다.

6.372. So people stop short at natural laws as something unassailable, as did the ancients at God and Fate. And they are both right and wrong. but the ancients were clearer, in so far as they recognized one clear terminus, whereas the modern system makes it appear as though everything were explained.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법칙들을 법접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기고 자연법칙들 앞에서 멈추어선다. 마치 고대인들이 신과 운명 앞에 멈추어섰던 것처럼. 그들 모두는 맞기도 하고 틀렸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모든 것은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 보이는데 반해, 고대인들은 분명한 한계를 인지했다는 점에서, 고대인들이 (현대인들 보다) 더 분명하(게 멈추어 섰)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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