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21-09-10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 최광민] 오늘의 제보: 블루밍턴 뷰잉 신교회 "최광민 전도사"와 뉴욕의 황상하 목사
목차
© 최광민, Kwangmin Choi, 202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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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오늘의 제보: 블루밍턴 뷰잉 신교회 "최광민 전도사"와 뉴욕의 황상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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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극의 사칭자: 인디애나 블루밍턴 뷰잉 신교회 "최광민" 전도사
- 도용된 글: 황상하 목사
가끔 방문자들 가운데 나를 사칭하거나 혹은 내 블로그의 글을 표절 혹은
도용하고 있는 기사나 논문, 블로그-페이스북 글을 알려오시는 경우가
계신데, 향후 표절/도용의 정도가 심한 건들은 모두 이 페이지에 기록으로
남겨두도록 하겠다
# 궁극의 사칭자: 인디애나 블루밍턴 뷰잉 신교회 "최광민" 전도사
자세한 것은 여기에 따로 적었다.
- https://kwangmin.blogspot.com/2020/03/blog-post.html
- https://kwangmin.blogspot.com/2019/05/blog-post.html
저 양반은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이라 내가 조금은 무서워 해드려야 할 것 같긴한데, 웃음을 참느라 정말 고생했다고 전해 드리고 싶다.
# 도용된 글: 뉴욕 황상하 목사
2021-09-11
뉴욕 퀸즈제일교회의 황상하 목사란 분이 기독교 매체인 "아멘넷" 의 오피니언 칼럼란과 "리폼드튜데이"란 장로교단 매체에 2021년 2월 22일과 26일에 기고한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란 동일한 글이다.
도용된 부분은 윗글의 첫 절반이며 글 전체 분량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대개 내 글의 "--하다"체를 그냥 "--합니다"체로 바꾸었을 뿐이다. 도입부인 아날로그 시계의 "똑-딱"과 불면에 대한 묘사 부터 에붐을 다룬 중간 내용, 그리고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인용으로 단락이 끝나는 것도 내 글과 정확히 같다. 내가 따옴표로 강조한 단어 역시 따옴표 그대로 복사했다.
이 글의 전반부를 내가 1995년에 썼던 글인 아래 글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
내 글은 포스팅 머리에 이미 저작권을 명시해 두었고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한다"고 명시해 두었기에 심히 유감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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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넷:{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황상하, 2021)
- 리폼드투데이: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황상하, 2021)
도용된 부분은 윗글의 첫 절반이며 글 전체 분량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대개 내 글의 "--하다"체를 그냥 "--합니다"체로 바꾸었을 뿐이다. 도입부인 아날로그 시계의 "똑-딱"과 불면에 대한 묘사 부터 에붐을 다룬 중간 내용, 그리고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인용으로 단락이 끝나는 것도 내 글과 정확히 같다. 내가 따옴표로 강조한 단어 역시 따옴표 그대로 복사했다.
이 글의 전반부를 내가 1995년에 썼던 글인 아래 글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
- 에붐: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 (최광민, 1995)
우선 내 글을 읽어보자. 특별히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하이라이트 한 부분에
주목하자. 왜 그런지는 도용된 글을 제시할 때 설명하겠다.
시계는 묘한 긴장을 가지고 있다. 밤잠을 못이루게 하는 아날로그 시계의 똑딱거리는 초침소리를 생각해보면 분명하리라 생각된다. 똑딱거리는 시계바늘 소리에서 "똑"과 "딱" 사이에는 때때로 무한에 이를 것 같이 긴 정적이 있는가 하면, 부질없는 찰나도 역시 존재한다.
모름지기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시간"자체가 아니라 그저 시계바늘 소리일 뿐이라, 그나마 초침소리가 없다면 우리는 그 "똑"과 "딱"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게다가 이 똑딱소리는 얼마나 오묘한가. 잠이 오지않는 밤, 서둘러 잠을 청하면서도 귀에 흘러들어오는 "시간의 소리"를 우리도 모르게 속으로 읽게된다. 똑딱똑딱똑딱똑딱....그러다보면 "똑딱"은 어느새 "딱똑"이 되어있고, 신기하게도 분명 "똑"으로 시작되어 "딱"으로 끝나야하는 1초라는 한 쌍은, 어느덧 "딱"으로 시작되어 "똑"으로 끝나고 있다. 왠지 모르게 음산해지는 순간.
이 책은 종교서적이 아니라 문학비평이다. 그러나 문학비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5장 이후부터는 사실 너무 지루하고, 시간과 종말의 개념을 다루는 앞부분만을 정말 흥미있게 읽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시간에 관한 서구의 관념 중 세가지, 즉 크로노스, 카이로스, 그리고 에붐을 다룬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에 대해 두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 하나는 "크로노스/k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였다. 전자는 시작도 끝도 없는 (per omnia secula seculorum), 즉 영원에서 영원으로 끝없이 이어지며, 순환과 반복을 통해 영원의 개념을 반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이다. .
후자인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는 매우 다른 시간이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계기와 늘 관련되어 있는 시간, 혹은 "그 시각"이다. 이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의지의 개입 혹은 운명, 혹은 섭리와 관계를 맺은 시간을 의미하며 그래서 매 순간은 그 "의미"를 가진다. 유사하게 고대 히브리인은 오직 하나의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었다고들 한다. 그 시간은 어떤 하나의 순간에서 어떤 시점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이, 창조에서 종말을 향해 날아가는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이다. 그래서 카이로스는 히브리적 단선적 시간관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영원을 상정하는 유대-기독교의 시간개념으로 발전한다. 바로 그 이유로 영원한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13세기 유럽에 도입된 즉시 스콜라 철학 내부에 엄청난 논쟁을 몰고왔으며, 그 결과 중세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금서조치되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에 "에붐 aevuum"이라는 새로운 시간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은 신의 속성이자 천사가 사는 영역이고, 인간이 현재 인지할 수는 없으나 장차 참여하게 될 새로운 형태의 "그 무엇"이다. 에붐은 간단히 말하자면,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그 무엇이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옮겨 적는다.
{신학대전} 제10문 : 신의 영원성--- 최광민
http://www.ccel.org/a/aquinas/summa/FP.html
....[1]. 영원성이란 동시적이고 완전하며 시작도 마침도 없는 생명의 소유를 지칭한다. 시간(tempus)이란 '먼저'와 '나중'에 따른 운동의 척도이다. [2]. 불변하고 항상적인 신에게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될 구별점을 그의 존재 속에 설정할 수 없다. 따라서 신에겐 시간이 없고 영원하다. [3]. 그리고 이 영원성은 신의 존재 자체에 속하는 것이므로 신의 고유한 본질이다.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고유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직 신의 영원성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4]. 영원은 시간과 다르다. 왜냐하면 영원성은 모든 것이 동시에 함께 있음인데. 이것이 시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5]. '시간'은 '먼저'와 '나중'을 함축한다. '시대(aevum)'는 시작은 가지나 끝이 없다. 시대도 '먼저'와 '나중'을 지니긴 하지만. 새로워짐도 낡아짐도 가지지 않는다. 영원은 어떠한 '먼저'도 '나중'도 지니고 있지 않고, 결코 어떤 모양으로도 그것들과 무관하다....
이번엔 도용된 글을 읽어보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간에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언급 등을 삽입하긴 했지만
(1) 불면의 밤과 "똑-딱" (2) 카이로스 (2) 아리스토텔레스 (3) 토마스
아퀴나스의 에붐 (4) 그리고 {신학대전}의 인용을 끝나는 글의 진행순서가 정확히
똑같다. 심지어 내가 따옴표로 강조한 부분까지 그대로 도용했다.
문장을 "정확히 그대로 복사"한 부분을 붉은 색으로, 내 글을 베낀 후 약간 마사지 한 부분은 파란색으로 하이라이트 한 후, 나머지는 회색으로 처리하겠다.
잠이 잘 오지 않는 늦은 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적막 속에서 아날로그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는 이완되기를 바라는 의식을 더욱 예민하게 하여 더 잠 못 들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순간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빠지기라도 하면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는 알 수 없는 긴장과 헤어나기가 쉽지 않은 비현실적 논리와 상상과 유추의 뒤엉킴에 침전되어 허우적거리게 합니다. 영국의 문학평론가 프랭크 커모드(Frank Kermode)는 그의 책“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The Sense of an Ending)에서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에서 역사 이해의 의미를 발견하였습니다. “똑-딱”거리는 시간 속에 “똑”이라는 시작과 “딱”이라는 끝이 있고, 그리고 그 사이의 중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 똑”과 “딱” 사이는 의미 있는 지속으로 채워져 있다고 전제하고 역사의 모든 이야기의 줄거리와 사건들이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역사의 결말은 똑과 딱 사에에 채워져 있는 지속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역사의 결말을 허구라고 하였습니다. 똑 딱 사이의 간격은 하나의 의미 있는 때, 즉 시작과 종말 사이에 위치한 카이로스라는 것입니다. 카이로스는 과거를 변화시켜, 종말과 기원의 합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의 종말이 허구라는 것은 인간 이성과 사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궁여지책입니다. 카이로스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끝없이 이어지며, 순환과 반복을 통해 영원의 개념을 반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입니다. 이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의지의 개입 혹은 운명, 혹은 섭리와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매 순간은 그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도 이와 유사하게 오직 하나의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시간은 어떤 한순간에서 어떤 시점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이, 창조에서 종말을 향해 날아가는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입니다. 직선적 시간 개념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어거스틴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직선적 시간 개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스의 시간이나 동양적인 시간 개념은 모두 원적인데, 카이로스는 단선적 시간관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영원을 상정하는 기독교의 시간 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바로 그 이유로 영원한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13세기 유럽에 도입된 즉시 스콜라철학 내부에 엄청난 논쟁을 몰고 왔으며, 그 결과 중세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금서 조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에 에붐(aevum)이라는 새로운 시간 개념을 도입합니다. 그것은 신의 속성이자 천사가 사는 영역이고, 인간이 현재 인지할 수는 없으나 장차 참여하게 될 새로운 형태의 “그 무엇”입니다. 에붐은 간단히 말하자면,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그 무엇입니다. 시간은 “먼저”와 “나중”에 따른 운동의 척도지만 아퀴나스는 불변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될 구별 점을 그의 존재 속에 설정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고 영원하며 그리고 이 영원성은 하나님 존재 자체에 속하는 것이므로 신의 고유한 본질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존재자들에게 영원은 고유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직 신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영원은 시간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영원성은 모든 것이 동시에 함께 있음인데. 그것이 시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먼저”와 “나중”을 함축하지만 에붐(aevum)은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습니다. --- 황상하
나는 커머드의 이 책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혹시 나 스스로가 25년 전인
1995년에 커모드의 책을 "표절"한 것이 아닌가 싶어 저녁시간에 다시 책을
정독해 봤지만 내가 그 책의 문장을 표절한 것은 찾지 못했다. 따라서 황상하
목사의 이 문장은 내 글을 그냥 가져다 쓴 것이라 보는게 제일 정확할
것이다.
목사로서 문인으로도 활동하시던데, 솔직히 몹시 실망스럽다. 굳이 저 내용을 자신의 글에 쓸 필요도 없었을 텐데, 왜 저러셨는지 모르겠다.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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