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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2021-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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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광민] 야고보 vs. 야고보: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도대체 누구일까?
순서
- 예수의 최측근 3인방과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3인방은 동일하며, 그 야고보는 예수의 사도인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일 수 밖에 없다?
- 복음서에서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에게 우호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니 그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 예수의 친족들의 초대교회에 미친 영향력은 미미했다?
- 바울은 야고보를 "예수의 (친)형제"로 간주하지 않았고, 그의 권위를 비웃었다?
- {갈라디아서} 1-2장은 가필/위조 되었을까?
- 그노시스 {위경}들에 바탕한 추론들은 신뢰할만 할까?
- 위경 {도마 복음서}와 "의인 야고보"
- 위경 {히브리 복음서}와 "의인 야고보"
- 위경 {야고보 비밀서}와 "의인 야고보"
- 위경 {제 1/2 야고보 묵시록}과 "의인 야고보"
- "튜다스"
- 맺음말
# 방문자 포럼 질문에 대한 답변
"의인 야고보"의 이콘 / Wikimedia Commons
# 예수의 최측근 3인방과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3인방은 동일하며, 그 야고보는 예수의 사도인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일 수 밖에 없다?
혹자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측근 3인방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바울이 언급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3인방인 "야고보, 베드로, 요한"은 동일인들이며,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의 1대 주교/감독으로 불리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 혹은 교회 전승이 말하는 "의인 야고보"는 사실은 요한의 형제이자 제베대오 (세베데)의 아들인 "사도 야고보"이지, 예수의 (친/이복)형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형제"란 포괄적 의미의 형제이지, 혈연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 주장은 여기서 더 나아가, 따라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나 예루살렘 교회와 관련된 {사도행전}의 내용은 바울 서신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후대에 창작된 것에 불과하다는 과감한 결론으로 나아간다. (사실 이런 주장이 정말 원하는 것은, 성서의 모든 내용이 거의 다 창작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과연 {복음서}나 {사도행전} 및 {바울서신}들에 등장하는 정보들이 얼마나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곁으로 제쳐두고, 과연 이들 기독교 {정경}들에 등장하는 내용들이 이런 주장에서 말하는 것 처럼 논리적으로 불일치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의 전제는 이들 기독교 {정경}문서들이나 AD 1-2세기 기독교 교부들의 기록이 "최소한의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자료부터 정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이보다도 역사적 내용이 훨씬 더 부실한 그노시스 {위경} 문서들에서 "증거"를 찾겠다고 시도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일이다. 게다가 {정경} 문서들이 의도를 가지고 편집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어떻게 {위경}들의 내용은 신뢰한단 말인가? 보통 그노시스 {위경}은 특정 종파의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때문에, 왜곡이 일어난다면 {위경} 쪽이 더 심각하다는 점을 일단 염두하자.
그럼 예수의 최측근 3인방과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3인방들이 동일인인지 아닌지 부터 따져보기로 하자.
보통 위의 주장을 펼치는 이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의 {갈라디아서}의 해당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문건을 제대로 이해하는 핵심단서는 자료들이 언급하고 있는 "연대기적 시점"이다.
우선, AD 33년 예수의 체포 직전 게세마니에 기도하러 가서, 그 중 최측근 3명만 추려 기도장소로 데려가는 {복음서}의 장면을 보자. 이 장면에서 보듯, 수제자 베드로, 그리고 제베대오의 두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의 최측근 3인방으로 보아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들은 게쎄마니라는 곳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앉아 있어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조금 앞으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할 수만 있으면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하시며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말씀하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르코의 복음서}
다음으론 바울이 AD 34년 경 스테파노스의 처형이 있은 얼마 후 겪은 자신의 회심 및 개종 이후 자신과 예루살렘 교회가 가졌던 관계에 대해 직접 서술해서 갈라티아의 기독교도들에게 보낸 편지를 먼저 자세히 읽어 보자. 1장 후반에서 2장 전반에 나오는 내용이다.
내가 전에 유다교 신자였을 때의 소행은 여러분이 다 들었을 터이지만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습니다. 아니, 아주 없애버리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나는 그 때 내 동족 중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누구보다도 유다교를 신봉하는 데 앞장섰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훨씬 더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고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시려고 기꺼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 때 나는 어떤 사람과도 상의하지 않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ἔπειτα μετὰ ἔτη τρία ἀνῆλθο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ἱστορῆσαι κηφᾶν, καὶ ἐπέμεινα πρὸς αὐτὸν ἡμέρας δεκαπέντε· ἕτερον δὲ τῶν ἀποστόλων οὐκ εἶδον, εἰ μὴ ἰάκωβον τὸν ἀδελφὸν τοῦ κυρίου.
deinde post annos tres veni Jerosolymam videre Petrum, et mansi apud eum diebus quindecim: alium autem Apostolorum vidi neminem, nisi Jacobum fratrem Domini.
그리고 삼 년 후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그 때 주님의 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나를 직접 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전에 자기네를 박해하고 그 교를 없애버리려고 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 교를 전파하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하는 일을 두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사 년 뒤에 나는 디도를 데리고 바르나바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올라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는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과 따로 만나 내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해놓은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동행했던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었는데도 그들은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짜 신도들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몰래 들어와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실상 디도가 할례를 강요당할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를 보존하려고 우리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보지 않으시므로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었든 간에 나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들도 나에게 어떤 새로운 제언을 한 일은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마치 베드로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할례받은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같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직을 나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둥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도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은총을 인정하고,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친교의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고 그들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한 가지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전부터 열심히 해오던 일이었습니다...." --- 한국어 공동번역 {갈라디아인에게 보내는 편지} 1-2장
왜 "연대기적" 관점이 중요한가?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측근 3인방인 "베드로-야고보-요한"이 언급된
시점은 예수의 수난 직전인 AD 33년 초반 시점이고, {갈라디아서} 2:6에서 바울이
"교회의 기둥"으로 "야고보-베드로-요한"을 언급한 시점은 AD 48-50년 경이기
때문. 이 길다면 길다할 수 있는 18-20년의 시간에 문제를 이해할 열쇠가 있다.
우선, 기독교 정경 문서들 (복음서와 서신)과 AD 2세기 중반까지의 교부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바울의 연대표를 재구성해보자.
{갈라디아서} 1-2장에 따르면, 바울은 AD 34년 경 스테파노스 처형에 가담한 후 기독교도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극적인 회심을 하는데, 이때 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3년 간 아라비아와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머물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오직 게파 (베드로)와 "주님의 형제" 야고보 만을 만난다. 이후 예루살렘을 떠난 바울을 다시 시리아와 킬리키아에서 14년을 보낸 후 할례문제 등과 관련된 이방인 선교문제를 논하고자 유대인 동역자인 바르나바 및 그리스인 동역자인 티토스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그가 "교회의 기둥"으로 인정한 야고보-베드로-요한을 만나 회동을 갖고 자신의 사도권을 공개적으로 인정받았다고 적는다. 따라서 바울이 스테파노스 (스데반)의 처형에 연루된 것이 AD 34년 경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가 예루살렘에서 "교회의 기둥" 3인방인 "야고보-베드로-요한"을 만난 때로 언급한 시점은 AD 48-50년 무렵이다.
예수의 최측근 3인방과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3인방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이 동일인이란 점이 논란거리가 된 적은 내가 알기론 없다. 문제는 "야고보"다. 특별히 바울이 AD 37년 예루살렘에서 만난 "야고보"를 "주님의 형제 야고보"라고 명시했기 때문에 생겨난 의문이다. (바울의 이 진술이 "후대의 삽입/조작"이란 설은 일단은 배제하겠다). 그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AD 37년 경에 만난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AD 48년 무렵에 만난 "교회의 기둥 야고보"는 동일인인가? 도대체 "주님의 형제"란 여기서 무슨 뜻일까? .
우선, 기독교 정경 문서들 (복음서와 서신)과 AD 2세기 중반까지의 교부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바울의 연대표를 재구성해보자.
{갈라디아서} 1-2장에 따르면, 바울은 AD 34년 경 스테파노스 처형에 가담한 후 기독교도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극적인 회심을 하는데, 이때 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3년 간 아라비아와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머물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오직 게파 (베드로)와 "주님의 형제" 야고보 만을 만난다. 이후 예루살렘을 떠난 바울을 다시 시리아와 킬리키아에서 14년을 보낸 후 할례문제 등과 관련된 이방인 선교문제를 논하고자 유대인 동역자인 바르나바 및 그리스인 동역자인 티토스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그가 "교회의 기둥"으로 인정한 야고보-베드로-요한을 만나 회동을 갖고 자신의 사도권을 공개적으로 인정받았다고 적는다. 따라서 바울이 스테파노스 (스데반)의 처형에 연루된 것이 AD 34년 경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가 예루살렘에서 "교회의 기둥" 3인방인 "야고보-베드로-요한"을 만난 때로 언급한 시점은 AD 48-50년 무렵이다.
예수의 최측근 3인방과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3인방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이 동일인이란 점이 논란거리가 된 적은 내가 알기론 없다. 문제는 "야고보"다. 특별히 바울이 AD 37년 예루살렘에서 만난 "야고보"를 "주님의 형제 야고보"라고 명시했기 때문에 생겨난 의문이다. (바울의 이 진술이 "후대의 삽입/조작"이란 설은 일단은 배제하겠다). 그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AD 37년 경에 만난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AD 48년 무렵에 만난 "교회의 기둥 야고보"는 동일인인가? 도대체 "주님의 형제"란 여기서 무슨 뜻일까? .
{복음서}로 들어가 보자.
우선 "예수의 사도이자 제베대오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부터 살펴보자. "예수의 사도이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잠깐 등장하는
"작은 야고보"는 따로 다루겠다
최후의 만찬 후 겟세마니로 기도하려 제자들을 데려가면서 예수는 다시 세 명의 최측근을 추려 기도장소까지 데려가고 나머지는 대기시킨다. 이 최측근 3인방을 {마르코의 복음서}에서는 "베드로-야고보-요한" 순서로,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는 "베드로 및 제베대오의 두 아들"로 명시한다. 여기 등장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이미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형제지간으로 설명되어 있고, 그들의 어머니까지 등장하여 예수의 왕국이 도래할 때 자기 아들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게 해달라고 직접 청탁한데서도 보듯, 사도 내에서도 이 야고보와 요한의 지위는 이미 3인방을 차지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찌보면 예수와 꽤 긴밀한 개인적 특수관계에 있던 사람들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는 헤롯 아그리파에 의해 AD 44년에 칼로 처형당했다. 그러므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기록한 대로 AD 48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바르나바와 함께 "오른 손을 내밀어 교제의 악수"를 나눴던 교회의 기둥 "야고보-베드로-요한" 가운데의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사도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일 수가 없다. 그는 그때 이미 순교한 다음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사도행전}의 해당진술이 위조라는 주장은 일단 배제하겠다) AD 48년의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 혹은 다른 야고보들 가운데 한 명일 수 밖에 없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은 AD 37년 경에 예루살렘에 갔을 때는 우선 베드로를 만나고, 이어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다고 적었다. 바울은 이때 베드로를 제외한 다른 사도 (가령, 예수의 최측근 3인방 중 하나인 요한)를 만나지 않았는데, 바울이 사용한 원문의 문장구조를 보면, "베드로와 보름 간 머물렀다. 다른 사도들은 보지 않았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난 것을) 빼면"이다. 이 문장에서 바울이 본 "사도"는 "베드로와 야고보" 2인인가? 아니면 "12사도" 가운데는 베드로만 만났고 아울러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다는 뜻일까? (참고로, "사도"란 표현 자체는 "(신의 / 그리스도의) 사절" 혹은 "파송된 자"란 뜻으로 사용될 때 보다 범용될 수 있다. 가령, 서방교회에서 "사도"는 거의 늘 "예수의 12사도"에 적용되지만, 동방교회에서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12사도 이외의 72인의 "제자들"을 "70인의 사도"로도 호칭해 왔다. 즉, "12사도"는 늘 "사도"지만, "사도"가 꼭 "12사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최후의 만찬 후 겟세마니로 기도하려 제자들을 데려가면서 예수는 다시 세 명의 최측근을 추려 기도장소까지 데려가고 나머지는 대기시킨다. 이 최측근 3인방을 {마르코의 복음서}에서는 "베드로-야고보-요한" 순서로,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는 "베드로 및 제베대오의 두 아들"로 명시한다. 여기 등장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이미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형제지간으로 설명되어 있고, 그들의 어머니까지 등장하여 예수의 왕국이 도래할 때 자기 아들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게 해달라고 직접 청탁한데서도 보듯, 사도 내에서도 이 야고보와 요한의 지위는 이미 3인방을 차지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찌보면 예수와 꽤 긴밀한 개인적 특수관계에 있던 사람들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는 헤롯 아그리파에 의해 AD 44년에 칼로 처형당했다. 그러므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기록한 대로 AD 48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바르나바와 함께 "오른 손을 내밀어 교제의 악수"를 나눴던 교회의 기둥 "야고보-베드로-요한" 가운데의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사도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일 수가 없다. 그는 그때 이미 순교한 다음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사도행전}의 해당진술이 위조라는 주장은 일단 배제하겠다) AD 48년의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 혹은 다른 야고보들 가운데 한 명일 수 밖에 없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은 AD 37년 경에 예루살렘에 갔을 때는 우선 베드로를 만나고, 이어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다고 적었다. 바울은 이때 베드로를 제외한 다른 사도 (가령, 예수의 최측근 3인방 중 하나인 요한)를 만나지 않았는데, 바울이 사용한 원문의 문장구조를 보면, "베드로와 보름 간 머물렀다. 다른 사도들은 보지 않았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난 것을) 빼면"이다. 이 문장에서 바울이 본 "사도"는 "베드로와 야고보" 2인인가? 아니면 "12사도" 가운데는 베드로만 만났고 아울러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다는 뜻일까? (참고로, "사도"란 표현 자체는 "(신의 / 그리스도의) 사절" 혹은 "파송된 자"란 뜻으로 사용될 때 보다 범용될 수 있다. 가령, 서방교회에서 "사도"는 거의 늘 "예수의 12사도"에 적용되지만, 동방교회에서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12사도 이외의 72인의 "제자들"을 "70인의 사도"로도 호칭해 왔다. 즉, "12사도"는 늘 "사도"지만, "사도"가 꼭 "12사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때 "사도의 대표"로서는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 대표"로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다고 보는게 가장 자연스럽다.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사도인 야고보"를 "주님의 형제 야고보"로 보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말이다.
바울이 12사도의 대표인 베드로 (케파)와 제자들의 대표인 야고보를 구분해 표현하는 방식은 그가 코린토스의 교회에 보면 첫째 편지에도 나타나 있는데, 이때 부활한 예수가 그를 따르던 자에게 나타난 순서를 케파 (베드로) > 12사도 > 500인 > 야고보 > 모든 사도 (apostles) > 바울의 순서로 묘사한다. 후자의 "모든 사도"란 12사도가 아닌 (혹은 포함한), 예수의 "70제자"를 포함하는 "제자" 그룹을 의미한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읽어보자
15:3 παρέδωκα γὰρ ὑμῖν ἐν πρώτοις ὃ καὶ παρέλαβον ὅτι Χριστὸς ἀπέθανεν ὑπὲρ τῶν ἁμαρτιῶν ἡμῶν κατὰ τὰς γραφάς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15:4 καὶ ὅτι ἐτάφη καὶ ὅτι ἐγήγερται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κατὰ τὰς γραφάς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15:5 καὶ ὅτι ὤφθη Κηφᾷ εἶτα τοῖς δώδεκα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15:6 ἔπειτα ὤφθη ἐπάνω πεντακοσίοις ἀδελφοῖς ἐφάπαξ ἐξ ὧν οἱ πλείονες μένουσιν ἕως ἄρτι τινὲς δὲ ἐκοιμήθησαν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15:7 ἔπειτα ὤφθη Ἰακώβῳ εἶτα τοῖς ἀποστόλοις πᾶσιν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5:8 ἔσχατον δὲ πάντων ὡσπερεὶ τῷ ἐκτρώματι ὤφθη κἀμοί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 한국어 {새번역}
물론 이때 바울이 만난 "주님의 형제 야고보"란 표현에 등장하는 "형제"를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란 포괄적 의미로 이해해서 이 "주님의 형제"를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요한의 친형제인 사도 야고보"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바울은 AD 37년 경의 예루살렘 방문에서 예수의 최측근 3인방
중에서 1인자와 2인자인 사도 베드로와 사도 야고보를 만난 셈이 된다.
가령, 예수는 한번은 이렇게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 앞에서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나의 (μου) 형제 (ἀδελφὸς), 자매 (ἀδελφὴ), 어머니 (μήτηρ)"
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적이 있다.
그런데 "주님의 형제"란 표현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을까?
46 ἔτι αὐτοῦ λαλοῦντος τοῖς ὄχλοις ἰδοὺ ἡ μήτηρ καὶ οἱ ἀδελφοὶ αὐτοῦ εἱστήκεισαν ἔξω ζητοῦντες αὐτῶ λαλῆσαι. 47 [εἶπεν δέ τις αὐτῶ, ἰδοὺ ἡ μήτηρ σου καὶ οἱ ἀδελφοί σου ἔξω ἑστήκασιν ζητοῦντές σοι λαλῆσαι. 48 ὁ δὲ ἀποκριθεὶς εἶπεν τῶ λέγοντι αὐτῶ, τίς ἐστιν ἡ μήτηρ μου, καὶ τίνες εἰσὶν οἱ ἀδελφοί μου; 49 καὶ ἐκτείνας τὴν χεῖρα αὐτοῦ ἐπὶ τοὺς μαθητὰς αὐτοῦ εἶπεν, ἰδοὺ ἡ μήτηρ μου καὶ οἱ ἀδελφοί μου· 50 ὅστις γὰρ ἂν ποιήσῃ τὸ θέλημα τοῦ πατρός μου τοῦ ἐν οὐρανοῖς αὐτός μου ἀδελφὸς καὶ ἀδελφὴ καὶ μήτηρ ἐστίν.
46 Adhuc eo loquente ad turbas, ecce mater ejus et fratres stabant foris, quærentes loqui ei. 47 Dixit autem ei quidam: Ecce mater tua, et fratres tui foris stant quærentes te. 48 At ipse respondens dicenti sibi, ait: Quæ est mater mea, et qui sunt fratres mei? 49 Et extendens manum in discipulos suos, dixit: Ecce mater mea, et fratres mei. 50 Quicumque enim fecerit voluntatem Patris mei, qui in cælis est, ipse meus frater, et soror, et mater est.
예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와 말씀을 나눌 기회를 찾고 있었다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시겠다고 밖에 서서 찾고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예수께서는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태오의 복음서} 12장
17 λέγει αὐτῇ ἰησοῦς, μή μου ἅπτου, οὔπω γὰρ ἀναβέβηκα πρὸς τὸν πατέρα· πορεύου δὲ πρὸς τοὺς ἀδελφούς μου καὶ εἰπὲ αὐτοῖς, ἀναβαίνω πρὸς τὸν πατέρα μου καὶ πατέρα ὑμῶν καὶ θεόν μου καὶ θεὸν ὑμῶν.
17 Dicit ei Jesus: Noli me tangere, nondum enim ascendi ad Patrem meum: vade autem ad fratres meos, et dic eis: Ascendo ad Patrem meum, et Patrem vestrum, Deum meum, et Deum vestrum.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하고 일러주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17장
그럼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나의 형제들"은 누구인가?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이 한 "아버지"를 두고 따르는 "신의 아들들 υἱοὶ θεοῦ' 이자 따라서 "형제"라면,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은 신 앞에서 "동급의 자녀"인가?
{신약성서}의 문서를 볼 때 초기 기독교도들이 그렇게 믿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요한의 복음서}와 {바울서신}들의 표현대로라면 성자인 예수는 성부의 "독생한
아들"이고 기독교도들은 성자를 통해 성부의 "양자"자격을 얻은 사람들 이므로
친자/양자라는 사실상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 바울은 로마에 보낸 편지인
{로마서}에서 어떻게 기독교도들이 신을 "아바, 아버지, αββα ὁ πατήρ""라 부를
수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를 신의 아들 예수를 통해 양자가 된
기독교도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특권으로 묘사한다. 즉, 예수/성자는 "자신의
권리"로 성부의 아들이지만, 기독교도들은 그들을 "양자로 삼는 영" - 즉,
성령/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만 신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다.
또한 {히브리서}는 예수가 "일시적"으로 "천사들보다 낮"아진 "인간"이 되어
고난을 당해 죽음으로써 악마와 죽음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그들을 "신의
아들들"로 만들었고, 그러기에 "한 아버지에게 속하게 된" 그들을 예수는 이제
"형제라 부르길 부끄러워 아니했다"라고 적었다. 즉, 기독교도들은 "예수에
의해" 이런 방식으로 "형제"라 "불릴 수" 있으나 결코 예수와 그들이 "동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명시하듯, 예수는
"(신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인 반면, 기독교도들은 그저 "(예수에 의해)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9 ὑμεῖς δὲ οὐκ ἐστὲ ἐν σαρκὶ ἀλλὰ ἐν πνεύματι, εἴπερ πνεῦμα θεοῦ οἰκεῖ ἐν ὑμῖν. εἰ δέ τις πνεῦμα χριστοῦ οὐκ ἔχει, οὖτος οὐκ ἔστιν αὐτοῦ. 10 εἰ δὲ χριστὸς ἐν ὑμῖν, τὸ μὲν σῶμα νεκρὸν διὰ ἁμαρτίαν, τὸ δὲ πνεῦμα ζωὴ διὰ δικαιοσύνην. 11 εἰ δὲ τὸ πνεῦμα τοῦ ἐγείραντος τὸν ἰησοῦν ἐκ νεκρῶν οἰκεῖ ἐν ὑμῖν, ὁ ἐγείρας χριστὸν ἐκ νεκρῶν ζῳοποιήσει καὶ τὰ θνητὰ σώματα ὑμῶν διὰ τοῦ ἐνοικοῦντος αὐτοῦ πνεύματος ἐν ὑμῖν. 12 ἄρα οὗν, ἀδελφοί, ὀφειλέται ἐσμέν, οὐ τῇ σαρκὶ τοῦ κατὰ σάρκα ζῆν· 13 εἰ γὰρ κατὰ σάρκα ζῆτε μέλλετε ἀποθνῄσκειν, εἰ δὲ πνεύματι τὰς πράξεις τοῦ σώματος θανατοῦτε ζήσεσθε. 14 ὅσοι γὰρ πνεύματι θεοῦ ἄγονται, οὖτοι υἱοὶ θεοῦ εἰσιν. 15 οὐ γὰρ ἐλάβετε πνεῦμα δουλείας πάλιν εἰς φόβον, ἀλλὰ ἐλάβετε πνεῦμα υἱοθεσίας, ἐν ᾧ κράζομεν, αββα ὁ πατήρ·
9 Vos autem in carne non estis, sed in spiritu: si tamen Spiritus Dei habitat in vobis. Si quis autem Spiritum Christi non habet, hic non est ejus. 10 Si autem Christus in vobis est, corpus quidem mortuum est propter peccatum, spiritus vero vivit propter justificationem. 11 Quod si Spiritus ejus, qui suscitavit Jesum a mortuis, habitat in vobis: qui suscitavit Jesum Christum a mortuis, vivificabit et mortalia corpora vestra, propter inhabitantem Spiritum ejus in vobis. 12 Ergo fratres, debitores sumus non carni, ut secundum carnem vivamus. 13 Si enim secundum carnem vixeritis, moriemini: si autem spiritu facta carnis mortificaveritis, vivetis. 14 Quicumque enim Spiritu Dei aguntur, ii sunt filii Dei.15 Non enim accepistis spiritum servitutis iterum in timore, sed accepistis spiritum adoptionis filiorum, in quo clamamus: Abba (Pater).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육신에 빚을 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 (원문: 아들들)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 (원문: 아들)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 한국어 새번역, {로마서} 8장
6 διεμαρτύρατο δέ πού τις λέγων, τί ἐστιν ἄνθρωπος ὅτι μιμνῄσκῃ αὐτοῦ, ἢ υἱὸς ἀνθρώπου ὅτι ἐπισκέπτῃ αὐτόν; 7 ἠλάττωσας αὐτὸν βραχύ τι παρ᾽ ἀγγέλους, δόξῃ καὶ τιμῇ ἐστεφάνωσας αὐτόν, 8 πάντα ὑπέταξας ὑποκάτω τῶν ποδῶν αὐτοῦ. ἐν τῶ γὰρ ὑποτάξαι [αὐτῶ] τὰ πάντα οὐδὲν ἀφῆκεν αὐτῶ ἀνυπότακτον. νῦν δὲ οὔπω ὁρῶμεν αὐτῶ τὰ πάντα ὑποτεταγμένα· 9 τὸν δὲ βραχύ τι παρ᾽ ἀγγέλους ἠλαττωμένον βλέπομεν ἰησοῦν διὰ τὸ πάθημα τοῦ θανάτου δόξῃ καὶ τιμῇ ἐστεφανωμένον, ὅπως χάριτι θεοῦ ὑπὲρ παντὸς γεύσηται θανάτου. 10 ἔπρεπεν γὰρ αὐτῶ, δι᾽ ὃν τὰ πάντα καὶ δι᾽ οὖ τὰ πάντα, πολλοὺς υἱοὺς εἰς δόξαν ἀγαγόντα τὸν ἀρχηγὸν τῆς σωτηρίας αὐτῶν διὰ παθημάτων τελειῶσαι. 11 ὁ τε γὰρ ἁγιάζων καὶ οἱ ἁγιαζόμενοι ἐξ ἑνὸς πάντες· δι᾽ ἣν αἰτίαν οὐκ ἐπαισχύνεται ἀδελφοὺς αὐτοὺς καλεῖν, 12 λέγων, ἀπαγγελῶ τὸ ὄνομά σου τοῖς ἀδελφοῖς μου, ἐν μέσῳ ἐκκλησίας ὑμνήσω σε· 13 καὶ πάλιν, ἐγὼ ἔσομαι πεποιθὼς ἐπ᾽ αὐτῶ· καὶ πάλιν, ἰδοὺ ἐγὼ καὶ τὰ παιδία ἅ μοι ἔδωκεν ὁ θεός. 14 ἐπεὶ οὗν τὰ παιδία κεκοινώνηκεν αἵματος καὶ σαρκός, καὶ αὐτὸς παραπλησίως μετέσχεν τῶν αὐτῶν, ἵνα διὰ τοῦ θανάτου καταργήσῃ τὸν τὸ κράτος ἔχοντα τοῦ θανάτου, τοῦτ᾽ ἔστιν τὸν διάβολον, 15 καὶ ἀπαλλάξῃ τούτους, ὅσοι φόβῳ θανάτου διὰ παντὸς τοῦ ζῆν ἔνοχοι ἦσαν δουλείας.
6 Testatus est autem in quodam loco quis, dicens: Quid est homo quod memor es ejus, aut filius hominis quoniam visitas eum? 7 Minuisti eum paulo minus ab angelis: gloria et honore coronasti eum: et constituisti eum super opera manuum tuarum. 8 Omnia subjecisti sub pedibus ejus. In eo enim quod omnia ei subjecit, nihil dimisit non subjectum ei. Nunc autem necdum videmus omnia subjecta ei. 9 Eum autem, qui modico quam angeli minoratus est, videmus Jesum propter passionem mortis, gloria et honore coronatum: ut, gratia Dei, pro omnibus gustaret mortem. 10 Decebat enim eum, propter quem omnia, et per quem omnia, qui multos filios in gloriam adduxerat, auctorem salutis eorum per passionem consummare. 11 Qui enim sanctificat, et qui sanctificantur, ex uno omnes. Propter quam causam non confunditur fratres eos vocare, dicens: 12 Nuntiabo nomen tuum fratribus meis: in medio ecclesiæ laudabo te. 13 Et iterum: Ego ero fidens in eum. Et iterum: Ecce ego, et pueri mei, quos dedit mihi Deus. 14 Quia ergo pueri communicaverunt carni, et sanguini, et ipse similiter participavit eisdem: ut per mortem destrueret eum qui habebat mortis imperium, id est, diabolum: 15 et liberaret eos qui timore mortis per totam vitam obnoxii erant servituti.
어떤 이가 성경 어딘가에서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기억하여 주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셨으나,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그에게 씌워 주셨으며,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사람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기로는, 아직도 만물이 다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쓰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께 속합니다. 그러하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내가 주님의 이름을 내 형제자매들 (원문: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주님을 찬미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또 "나는 그를 신뢰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보십시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 한국어 새번역, {히브리서} 2장
따라서 예수의 사도들이나 제자들, 바울, 혹은 다른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구세주"인 예수가 자신들을 "형제"로 불러준 사실에 "감격"할 지언정,
자신들을 대놓고 "예수의 형제" 혹은 "그리스도의 형제" 혹은 "주님의
형제"란 식으로 자칭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애용한 표현은
"그리스도의 종/하인/노예"였다.
보통 기독교도들이 서로를 호칭할 때 사용된 "형제"란 용어의 용례는,
바울이 콜로사이에 있는 기독교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소개문에 사용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ἀδελφοῖς ἐν χριστῶ)"다. 그리스도를
통해 신/성부를 "아버지" (=아바 Abba) 라 함께 부를 수 있게 된 "상호
간의 형제"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런 맥락에서 {갈라디아서}를 포함한
서신들에서 "형제"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등장한 "야고보"를 그냥 "형제"가 아닌 "주님의 형제"라
불렀다면 "주님의 형제"란 아주 특별하게 적용된 용어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혹자의 주장대로 "신의 뜻을 따르는 자"를 모두 "형제", 더 나아가
"주님의 형제"라 부를 수 있고 따라서 바울이 AD 37년에 만난 그
"야고보"도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라면, 그 야고보
바로 앞에 언급된데다 예수의 최측근 중 공히 1인자였던 베드로는 왜
"주님의 형제"가 아니라 그냥 "게파/베드로"인가? 베드로는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주님의 형제"로 불린 적이 없다.
ἔπειτα μετὰ ἔτη τρία ἀνῆλθο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ἱστορῆσαι κηφᾶν, καὶ ἐπέμεινα πρὸς αὐτὸν ἡμέρας δεκαπέντε· ἕτερον δὲ τῶν ἀποστόλων οὐκ εἶδον, εἰ μὴ ἰάκωβον τὸν ἀδελφὸν τοῦ κυρίου.
deinde post annos tres veni Jerosolymam videre Petrum, et mansi apud eum diebus quindecim: alium autem Apostolorum vidi neminem, nisi Jacobum fratrem Domini.
그리고 삼 년 후에 나는 게파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그 때 주님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여기의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사도
야고보"로 봐야 한다면 바로 그 사도 야고보의 "친형제"이자 최측근 3인방
가운데 하나인 요한은 왜 {신약성서}에서 "주님의 형제"로 불린 적이
한번도 없을까?
{사도행전} 기록에도 등장하지만, 당시 예수의 12사도들은 자신들의 사명이 교회의 치리/운영이 아닌 선교에 있다는 점을 들어 교회의 실무자들로 일곱 명의 '집사/부제'를 임명했다. 아울러 예루살렘 교회에 베드로와 요한이란 대들보 같은 사도들이 AD 48년까지도 건재했음에도 초기 교부들의 모든 기록은 사도들이 아닌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예루살렘의 1대 주교/감독으로 적는다. 게다가 AD 2세기 중반의 교회사가인 헤게시포스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었다고 적었다. 이 야고보가 "12사도"의 일원이었다면 굳이 그를 "주님의 형제"로 언급한 후 다시 "사도들과 함께"란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
제베대오의 아들인 사도 야고보가 AD 37년 경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첫 방문했을 때까지 베드로의 사도적 권위를 넘어섰다는 {신약성서}나 초기 교부들의 기록에 전무하다면, AD 33년 예수의 최측근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이고, 이 야고보가 AD 44년 순교한 4년 후인 AD 48년 경 상황의 예루살렘 교회의 3기둥으로 가장 먼저 언급된 그 "야고보"는 바울이 앞서 말한 "주님의 형제 야고보"라고 보는게 제일 합리적인 설명이다.
한편, 클레멘스는 예수의 부활 후 "의인 야고보", 요한, 베드로에게 지식을 우선 전수했다고 기록했는데, 문맥 상 그가 말하는 3인방은 예수의 최측근 3인방인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어야 한다. 클레멘스 혹은 필사자가 여기서 오류를 일으킨 것으로 보통 여겨진다.
# 복음서에서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에게 우호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니 그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일단 이 주장은 전제부터 틀렸다.
{신약성서}에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예수의 사역 가장 마지막
6개월 사이, 특별히 마지막 주간에 예수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나와있지 않다. 게다가 {복음서}의 일화에는 "야고보"가 특정된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의 형제들"이 단체로 등장할 뿐이며, 또한 그 시기도
예수의 처형 6개월 전의 일화다. 따라서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의 사역
마지막까지, 혹은 기독교의 시작 이후까지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주장은 틀린 전제에 바탕한 주장인 동시에 "허수아비 논증"이다.
한편, "튜다(스) Θευδᾶς"란 이름의 뜻은 "물이 흘러가는"이란 뜻인데,
"알페오스 Ἀλφαῖος" 란 이름이 그리스어로 "변화", "흐름", "강의
신"이란 뜻을 가진다. 그래서 '튜다'가 '알페오스'고, 따라서 이
문서의 '의인 야고보'는 '알페오스의 아들 야고보', 즉 {복음서}에
등장하는 '작은 야고보'가 아닐까 하는 추론도 있다. 앞서 설명한
파피아스의 기록에 다르면, 이 알페오스의 아내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자매인 (또 다른) 마리아다. 그럼 {제 2 야고보 묵시록}의
예수는 이모의 젖을 이종사촌인 '의인 야고보'와 함께 먹고 자랐기
때문에, 이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이종사촌인 '의인 야고보'를
'형제'라 부르고 있는 셈이 된다.
아니면 이 문서(들)의 저자가 그냥 예수와 야고보의 가족관계를 혼동한 것일까? 혹시 이런 혼동은 이들 그노시스 문서들이 작성되고 서로서로 인용되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만 유통되던 "지역전승"은 아니었을까?
# 맺음말
위에 언급한 주장에서처럼 과연 "예루살렘 교회의 1대 주교/감독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도
이복형제도 사촌형제도 아니"란 주장이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증거"를 가지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없"을까?
정경문서를 통해서든, 혹은 그노시스 위경문서를 통해서든 증거가 그리도 "압도적"이라면, 왜 학자들은 이 문제를 AD 2세기 부터 AD 21세기인 지금까지 여러가지 가설을 통해 해명하려고 할까?
판단은 각자의 몫.
최광민
{사도행전} 기록에도 등장하지만, 당시 예수의 12사도들은 자신들의 사명이 교회의 치리/운영이 아닌 선교에 있다는 점을 들어 교회의 실무자들로 일곱 명의 '집사/부제'를 임명했다. 아울러 예루살렘 교회에 베드로와 요한이란 대들보 같은 사도들이 AD 48년까지도 건재했음에도 초기 교부들의 모든 기록은 사도들이 아닌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예루살렘의 1대 주교/감독으로 적는다. 게다가 AD 2세기 중반의 교회사가인 헤게시포스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었다고 적었다. 이 야고보가 "12사도"의 일원이었다면 굳이 그를 "주님의 형제"로 언급한 후 다시 "사도들과 함께"란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
내가 보기엔 AD 33년 당시 "예수의 최측근" 3인방과 AD 48년의
"교회의 기둥" 3인방이 거명된 이름의 순서에도 어떤 단서가 있을 것
같다.
마르코와 마태오의 복음서는 예수의 최측근 3인방을 거명할 때 "베드로-야고보-요한"의 순서로 베드로를 야고보 앞에 놓았는데,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예수의 활동시기나 그 이후에도 12사도 내 위계질서에서 베드로는 단연 1인자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AD 48년 경에 바울과 바르나바가 만났던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3인방을 거명할 때, 바울은 이와 달리 "야고보-베드로-요한" 순으로 야고보를 베드로 보다 먼저 언급한다. 여기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 나는 그렇게 본다.
마르코와 마태오의 복음서는 예수의 최측근 3인방을 거명할 때 "베드로-야고보-요한"의 순서로 베드로를 야고보 앞에 놓았는데,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예수의 활동시기나 그 이후에도 12사도 내 위계질서에서 베드로는 단연 1인자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AD 48년 경에 바울과 바르나바가 만났던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3인방을 거명할 때, 바울은 이와 달리 "야고보-베드로-요한" 순으로 야고보를 베드로 보다 먼저 언급한다. 여기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 나는 그렇게 본다.
제베대오의 아들인 사도 야고보가 AD 37년 경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첫 방문했을 때까지 베드로의 사도적 권위를 넘어섰다는 {신약성서}나 초기 교부들의 기록에 전무하다면, AD 33년 예수의 최측근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이고, 이 야고보가 AD 44년 순교한 4년 후인 AD 48년 경 상황의 예루살렘 교회의 3기둥으로 가장 먼저 언급된 그 "야고보"는 바울이 앞서 말한 "주님의 형제 야고보"라고 보는게 제일 합리적인 설명이다.
바울의 경우, 해당 안건이 예루살렘 교회와의 오해와 갈등을 푸는
것이었고, 또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실제
치리권자 (주교/감독)이었기 때문에 3명의 기둥 가운데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바울 측과 예루살렘 측이 가진 회동인
소위 "예루살렘 회의"를 대표주재하고 결론을 내린 인물도 베드로가
아닌 바로 "야고보"라는 점을 기억하길 바란다. 강조하건데, 단지
연대기적 모순만 고려하더라도, 이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 야고보"일 수 없다.
AD 2세기 말 알렉산드리아 교부 클레멘스는 같은 시절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처럼 마리아가 예수 이후에도 계속 자식을 낳았을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예수의 형제"로 간주되던 {유다서}의 저자 유다를 (그리고 야고보를) 예수의 형제로 간주했다.
이 야고보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의인'이자 '예루살렘의 1대 주교', 즉 "주님의 형제" 야고보에 대해서는, 예수의 사도인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의인 야고보'를 구별해서 진술했다.
AD 2세기 말 알렉산드리아 교부 클레멘스는 같은 시절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처럼 마리아가 예수 이후에도 계속 자식을 낳았을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예수의 형제"로 간주되던 {유다서}의 저자 유다를 (그리고 야고보를) 예수의 형제로 간주했다.
Jude, who wrote the Catholic Epistle, the brother of the sons of Joseph, and very religious, while knowing the near relationship of the Lord, yet did not say that he himself was His brother. But what said he? Jude, a servant of Jesus Christ,— of Him as Lord; but the brother of James. For this is true; he was His brother, (the son) of Joseph.
공동서신 (={유다서})를 쓴 유다는 요셉의 아들들의 형제이며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 주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지만 본인을 주님의 형제로 부르진 않았다. 그럼 뭐라고 했던가? "유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즉 그분을 주인으로 부른다. 그러나 또 "야고보의 형제"라고 했다. 그가 그 (=주님)의 형제이자 요셉의 아들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 번역: 최광민
이 야고보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This James, whom the people of old called the Just because of his outstanding virtue, was the first, as the record tells us, to be elected to the episcopal throne of the Jerusalem church." Other epithets are "James the brother of the Lord, surnamed the Just," and "James the Righteous".
이 야고보는 옛 사람들이 그의 덕성을 기려 "의인"이라 불렀던 사람으로, 기록이 말하는 바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첫번째 주교로 뽑혔던 사람이었다. 다른 호칭으론 "의인이라 불린 주님의 형제 야고보" 혹은 "공의로운 야고보"가 있다. / 번역: 최광민
'의인'이자 '예루살렘의 1대 주교', 즉 "주님의 형제" 야고보에 대해서는, 예수의 사도인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의인 야고보'를 구별해서 진술했다.
Peter and James and John, after the Saviour's ascension, though pre-eminently honoured by the Lord, did not contend for glory, but made James the Just, bishop of Jerusalem. --- sixth book of the Hypotyposes,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BOOK VI. ii. X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특별히 높이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세주의 승천 후에 명예를 놓고 다투지 않았고, 의인 야고보를 예루살렘의 주교/감독으로 삼았다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 번역: 최광민
한편, 클레멘스는 예수의 부활 후 "의인 야고보", 요한, 베드로에게 지식을 우선 전수했다고 기록했는데, 문맥 상 그가 말하는 3인방은 예수의 최측근 3인방인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어야 한다. 클레멘스 혹은 필사자가 여기서 오류를 일으킨 것으로 보통 여겨진다.
To James the Just, and John and Peter, the Lord after His resurrection imparted knowledge (τὴν γνῶσιν.) These imparted it to the rest of the apostles, and the rest of the apostles to the Seventy, of whom Barnabas was one.
주님은 부활하신 후, 의인 야고보, 요한, 베드로에게 지식을 전수하셨다. 이 지식은 나머지 사도들에게 전수되었고, 다시 70인의 제자들에게 전수되었는데 바르나바는 그 중 한명이었다. /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 번역: 최광민
# 복음서에서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에게 우호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니 그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일단 이 주장은 전제부터 틀렸다.
"예수를 믿지 않았던 예수의 형제들"에 대한 해당 내용은 {요한의
복음서} 제 7장에 등장하며, 문맥상 이 일화는 예수의 처형이 있던 AD
33년에서 약 6개월 전인 AD 32년 9월의 장막절/초막절 무렵의
이야기다. 또한 예수가 자신의 형제들에게 답하는 내용을 고려한다면,
이 일화가 사실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예수의 "사역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읽어보자.
그때 예수가 탄 어린 나귀의 앞/뒤에서 그를 따라가던 군중들은 {시편} 128편에서 '구원'을 외치는 히브리어 "호샤나 הושיעה־נא )) 혹은 아람어 "오샤나 ܐܘܿܫܲܥܢܵܐ " 를 외치면서 역시 이를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와 연결시켰다. 예수의 묵인 하에 "예수는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 메시아"라는 것을 군중들이 대신 선언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복음서}나 {신약성서}에 어떤 사람이 그 이름으로 등장하는 경우, 고대의 기록들은 이들이 초기교회의 주요인물들 혹은 그들과 가까운 친족이었던 것으로 전하는데, 이런 전황은 상당히 수긍할만 하다.
{복음서}는 예수에게 다수의 형제와 누이가 있었다고 언급한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평생동정설"을 따르는 로마카톨릭, 정교회,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측 루터교단, 성공회 일부에서는 이들을 마리아의 자식들이 아니라 예수의 사촌 혹은 요셉이 전처 사이에서 낳은 이복형제로 보는데, 이복형제라면 예수는 요셉의 (명목상) 장자가 아니라 오히려 막내가 된다. AD 2세기 중반 이후 시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유통된 위경들인 {야고보 원복음서}나 {야고보의 유년기 복음서} 같이 예수의 유년기를 다룬 위경문서들에서는 이들 예수의 형제를 요셉의 전처 소생들로 묘사했다.
내 글에서는 일단 그냥 "형제"와 "누이"로만 이들을 부르겠다.
사실 {마태오의 복음서} 13:55는 예수의 형제들을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언급한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이 4명이 그들이며. 여기서 야고보와 유다는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신약성서}서신들인 {야고보서}와 {유다서}의 저자로 추정되기도 한다. 예수의 누이들에 대해서는 복수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몇 명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형제들이 최소한 예수의 활동 초/중반기에 예수에게 보인 반응은 꽤 시큰둥하거나 냉소적이다.
이런 냉소적인 예수의 형제들이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을 리가 없으니, 따라서 예루살렘 1대 주교로 간주되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라 불리는 인물 역시 위에 예수의 형제 4명 가운데
한명인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동일인인 것은 불가능할까?
그게 또 그렇지 않다. 또한 "신약성서에 근거했다"는 이런 식의 주장은 정작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중요단서 몇가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우선, {복음서}에는 예수의 처형이 있던 무렵 직전에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에게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술이 전혀 없다.
또한 예수의 처형과 부활, 승천, 그리고 오순절에 이르는 약 50일 간의 기간의 상황을 '기적담을 모두 제거하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재구성해 보면,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형제들"에게 일어난 심리적 / 위상적 변화는 상당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설령 이들이 그동안 예수에게 회의적이었다 하더라도, 이 기간 동안 그들이 어떤 이유로 예수의 부활을 사실로 믿게 되었다면 이들에게 그 의미는 엄청났을 것이다. 혹시 예수 당시와 그 이후 유대인들의 주장 처럼 이들이 사도들과 함께 예수의 시체를 은닉하고 사기극을 벌였다면, 이 대형사기극의 비밀을 공유하는 "공범"으로 예수의 친족들은 사도들과 거의 대등한 위치로 승격되었을 것이다.
그럼 예수의 처형이 있은 유월절 주간 부터 성령강림과 함께 기독교의 공식적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오순절까지의 50일 동안, 예수의 사도들과 예수의 친족들은 어떤 관계를 가졌던 것일까? 일단은 너무 멀리 (가령, 사기극 이론) 가지말고, 기록에 남은 내용 만을 중심으로 재구성해 보자.
우선, 예수의 체포가 있기 직전인 최후의 만찬 장소로 가보자. 이 장소는 아마도 예수의 측근이 준비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 큰 "이층방 혹은 다락방" (ἀνάγαιον) 이다. 이 장소는 앞으로 50일 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공간은 13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골방이 아니라 큰 공간이다.
예수의 처형이 발생한 유월절 주간, 모친 마리아와 형제들을 포함하는 예수의 가족들은 평소처럼 유월절 명절을 지내기 위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함께 내려왔다. 예수의 처형장면을 보면, 예수의 직계가족 뿐 아니라 이모를 포함한 외가 쪽 방계가족들도 함께 예루살렘으로 내려왔거나 타 지역에서 상경해 현지에서 합류한 것으로 여겨진다. 혹은 이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친족일 수도 있다.
사도들이나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려져 잘 부각되지는 않지만, 이들 친족들은 예수의 처형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의 나레이션에서 꽤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예수의 죽음 직전의 장면에는 (1)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2) 이모와 (3) 클로파스 (혹은 클레오파스)의 아내 마리아가 등장한다. AD 2세기 중반의 교회사가 헤게시포스는 클레오파를 예수의 양부 요셉의 형제라고 기록했는데, 그럼 "클레오파의 아내 마리아"는 예수의 숙모가 된다. 이미 여기에 예수의 친족들이 여럿 등장한다.
{마르코의 복음서}에서는 (1) "작은 야고보 Ιακώβου του μικρού"
및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2) 살로메가 등장한다. {마태오의
복음서}에는 (1) "야고보" 및 요셉의 어머니 어머니, (2)
제베대오의 아들들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여기서 "살로메"는 제베데오의 아들들이자 예수의 최측근 3인방 중 두명인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그럼 처음 등장하는 (아마도 예수의 친족인)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는 도대체 누군가?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이 "야고보와 요셉의 모친 마리아"는 바로 "예수의 모친 마리아"일 가능성이 있다. 왜? 예수의 형제 4명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가운데 첫 두명이 바로 야고보와 요셉이다. 마르코와 마태오가 네 명 중 두 명만 언급했을 수도 있고, 정말로 그 장소에 두 명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셉)과 있었을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마태오가 "작은 야고보"라 부른 바로 그 사람이 된다. 여기서 "작다 μικρού"는 뜻의 그리스어는 "체구가 작다"는 뜻일 수도 있고 "어린"이란 뜻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작은 야고보"는 동일 문장에 등장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사도) 야고보"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적용된 용어로 보이며. 아마도 내부에서 통용되던 별명이었을 수 있다.
물론 이 마리아가 제 3자, 가령 "예수의 이모" 일 수도 있다. 가령, AD 1/2세기 히에라폴리스 주교 파피아스는 아래와 같이 복수의 마리아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젊은 시절 예수를 친견했던 1세대 기독교도들로부터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애석하게도 그의 자료는 유세비우스 등이 발췌해서 전하는 내용만 남아 있다. 이 진술의 사실여부와는 별도로 그의 자료는 초대교회의 지도부에 대한 굉장히 흥미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또 AD 2세기의 헤게시포스는 위에 언급된 시몬/시메온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먼저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이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 중 하나인 "클레오파 Κλεόπας"와 예수의 십자가 아래 있었던 마리아의 남편 "클로파스 Κλωπᾶς"가 동일인인가 하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동서방 교회는 이들을 동일인으로 보았고 또 동일인일 확률이 매우 높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확정하기도 곤란하다. 한편, 아람어 클로파스에서 K 발음이 탈락하면서 음운변화로 클로파스/클레오파가 "알페오스 Ἀλφαῖος"로 변형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이 경우, 클로파스 = 클레오파스 = 알페오스 는 모두 동일인이 된다.
두번째로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가족이 은신하던 장소가 "어떤 집"인가를 생각해 보자.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는 부활 후 지상에 40일 동안 머물다 승천하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강림을 기다릴 것을 명하는데, 이때 11명의 사도들은 자신들이 그간 에루살렘에서 머물던 다락방에 다시 모인다. 그런데 거기엔 이미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 다 같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할 때까지 같은 공간에서 함께 기도하며 지냈다.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여기 언급된 "예수의 형제들" 중에 야고보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아주 타당한 추론이다.
그럼 그 방 안으로 들어가 보자.
예수의 사도, 제자, 예수의 모친과 형제, 친족이 함께 모여있던
예루살렘의 그 2층방 (=다락방)은 그들이 그동안 묵고 있던
방이었다. 이 은신처는 아마도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그
장소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큰 방"이란 점, "이층방"이란 점,
그리고 내부인사만 알던 "은신처"란 점 세가지 면에서 접점이
있다.
바로 이 장소에서, 예수의 사도, 핵심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모친, 형제, 친족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는 경험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의 공동 창립멤버들이 된다.
예수의 형제들이나 사촌들이 예수의 활동 초/중반에 회의적이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최소한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따르면), 설령 그렇다해도 그들이 AD 33년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이런 집중된 상황에서 완전히 새로운 위상을 가진 인물들로 재탄생할 정황은 이미 {신약성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 바울은 야고보를 "예수의 (친)형제"로 간주하지 않았고, 그의 권위를 비웃었다?
바울이 갈라티아에 보낸 편지 제 1장 부터 정독해서 다시 읽어보자.
여기서 "야고보가 보낸"이란 뜻이 "야고보가 이방인에게 할례나
모세율법의 정결례를 요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당시 예루살렘에서 당시 안티오키아를 방문
중이던 베드로도 야고보와 뜻을 같이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모세율법의 정결례를 따르지 않고,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은 여전히 할례를 포함한 유대인의 종교적 관례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베드로의 기반은 여전히 예루살렘이었으므로 거기서 온 사람들의 시선을 고려하긴 해야했겠지만, 베드로가 일전의 회동에서 바울의 관점을 지지했고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지도자들의 공동명의로 시리아 일대의 교회에 결의내용 까지 인편으로 전해놓고 나서, 이제 와서 유대인의 관례를 준수하는 예루살렘 측 사람들을 눈치보며 우물쭈물하는 행태를 보인 점에 바울은 정당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바울의 입장에서 볼때 이는 사도의 권위를 베드로 스스로 훼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장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걸두고, 바울은 "오히려 야고보가 자신에게 가르칠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비웃었다"고 해석해야 할까?
# {갈라디아서} 1-2장은 후대에 가필/위조 되었을까?
마르키온의 {갈라디아서}에는 AD 37년 제 1차 예루살렘 방문 일화가 없다는 식의 주장은 아돌프 하르낙의 주장을 받아서 크리스토퍼 에반스가 재차 주장했는데, 이 설명은 정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가설이다. 게다가 이들의 주장은 "마르키온이 {갈라디아서}에서 해당 부분을 삭제했을 것이다"란 취지이지, {갈라디아서}에 원래 그 부분이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또, "이레네우스가 마르키온을 비판하면서 인용했던 라틴어 사본에는
갈라디아서 2장 1절 "14년 후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구절에서 "다시"가 빠져 있"으니 {갈라디아서} 제 1장의 예루살렘
방문은 허구이고, 제 2장의 방문이 바울의 첫번째 방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어디선가 읽었다.
사실 {신약성서}에는 "의인 야고보"란 표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AD 1/2세기 요세푸스의 기록, 헤게시포스의 기록,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기록, 그리고 몇몇 그노시스 문서에 등장하며, 이들 기록을 통해 "의인 야고보"를 "예수의 형제이자 예루살렘 주교 야고보"와 연결짓는 전승이 내려올 뿐이다.
## {히브리 복음서}와 "의인 야고보"
AD 4세기 히에로니무스가 재인용한 해당 {히브리 복음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여기의 "의인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일까? (물론 여기서의 "형제"가 꼭 혈육의 동기를 뜻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의인 야고보"가 "예수의 (친/이복)형제 야고보" 해도, 예수의 최후의 만찬 무렵 그가 얼마나 예수를 따르고 있었는지는 {정경}에 등장하지 않아서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그가 예수를 철저히 부정했다고 볼 이유 역시 전혀 없다.
최후의 만찬의 참석인원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처럼 꼭 12명의 사도와 예수 본인 총 13인만 참석했을 것이라 볼 이유 역시 전혀 없기 때문에,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히브리 복음서}에서 처럼 만찬에 참석했다고 보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다만 기독교 {정경} 문서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뿐이다.
확실히 이 문서의 화자인 "나"는 예수의 오리지널 12사도 가운데 한 명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는 이 은밀한 교리를 "야고보"와 "베드로"에게만 직접 전수했다. 그럼 {야고보 비밀서}가 설정하는 화자는?
이 경우는 예수의 사도인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 문서 안에는 "의인 야고보"가 등장하지 않으며, 또 야고보가 예루살렘의 주교/감독이란 암시도 없다.
## 위경 {제1 야고보 묵시록}과 {제 2 야고보 묵시록}과 "의인 야고보"
AD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반을 작성시점으로 보는 {제 1 야고보 묵시록}는 예수와 "의인 야고보"가 나누는 일종의 가현설적인 그노시스 담화다. 가령, 예수는 야고보에게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상해도 입히지 못한다고 말하며, 또 핍박자들을 멸망당해야 할 일종의 아르콘 (저급영)으로서 행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문서의 "의인 야고보" 이야기엔 역사적 맥락이 배제되어 있다.
위경 {제 2 야고보 묵시록}은 AD 2세기 초/중반이 작성시점으로 여겨진다. 이 문서는 예루살렘의 제사장인 마레임이 "의인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했다는 말을 기록해서 "의인 야고보"의 아버지인 "튜다"란 인물에게 전해주는 설정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은 예수와 '의인 야고보'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각각 "요셉"과 "튜다"로 서로 다르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들 {야고보 묵시록}의 바탕이 되는 가현설이 암시하듯, 예수의
아버지는 "영적" 아버지 (=성부)고, 의인 야고보의 아버지는 "육적"
아버지 (=튜다)란 뜻일까?
그나저나 도대체 이 수수께끼 인물인 "튜다"는 누구일까?
요세푸스가 {유대고대사}에 기록한 "튜다스"는 AD 44-46년의 반-로마 반란을 이끌다 죽었으므로 {사도행전}의 그 "튜다스"로 보긴 곤란하다. 이것이 요세푸스 혹은 {사도행전}의 저자, 혹은 {사도행전} 속 화자인 바리사이파의 지도자 가말리엘의 착오인지, 아니면 두 명의 다른 튜다스에 대한 것인지는 해결되지 않은 논란이 있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으므로 유다 지방으로는 다니고 싶지 않아서 갈릴래아 지방을 찾아다니셨다. 그런데 유다인들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지자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께 "이 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당신이 행하시는 그 훌륭한 일들을 제자들에게 보이십시오. 널리 알려지려면 숨어서 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훌륭한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권하였다. 이렇듯 예수의 형제들조차도 그분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아무 때나 상관없지만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할 수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있다. 세상이 하는 짓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너희는 어서 올라가서 명절을 지내라. 아직 나의 때가 되지 않았으니 나는 이번 명절에는 올라가지 않겠다." 예수께서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속하여 갈릴래아에 머무르셨다. 형제들이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께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올라가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7장
아마도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표적"을 보이길 원했던 듯 하다. 이런 노출은 예수가
그때까지 주의깊게 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예수가 AD 33년
3월 그의 체포와 처형이 있던 주간의 월요일 (=유월절 양이 성별되는
니산 10일) 메시아의 도래와 긴밀히 연관된 히브리 성서 {즈카리아}
9장 9절의 묘사대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해당 {히브리 성서}의 구절은 아래와 같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내 (=야훼)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 한국어 새번역, {스가랴} 9:9-10
그때 예수가 탄 어린 나귀의 앞/뒤에서 그를 따라가던 군중들은 {시편} 128편에서 '구원'을 외치는 히브리어 "호샤나 הושיעה־נא )) 혹은 아람어 "오샤나 ܐܘܿܫܲܥܢܵܐ " 를 외치면서 역시 이를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와 연결시켰다. 예수의 묵인 하에 "예수는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 메시아"라는 것을 군중들이 대신 선언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러, 올리브 산이 있는 벳바게 마을에 들어섰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가서 보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러면 곧 내줄 것이다." 이것은,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어다가, 그 위에 겉옷을 얹으니, 예수께서 올라 타셨다.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르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온 도시가 들떠서 "이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사람들은 그가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라고 말하였다.... --- {마태복음} 21장, 표준새번역
바로 이 주간에 예수의 형제들을 포함한 친족들 역시 예루살렘에
있었다. 예수는 6개월 전에 그에게 회의적이던 그의 형제들이
요구했던 바로 그 일을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군중들 앞에서 시행한
것이다. 이때 예수의 형제들과 친족들의 심리가 어떠했을지 한번
생각해 보자. 그들은 "전율"하지 않았을까?
{복음서}나 {신약성서}에 어떤 사람이 그 이름으로 등장하는 경우, 고대의 기록들은 이들이 초기교회의 주요인물들 혹은 그들과 가까운 친족이었던 것으로 전하는데, 이런 전황은 상당히 수긍할만 하다.
예수의 친족들이 예수의 사역 마지막과 초기 기독교의 시대에 가진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가족구성"에 대해서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꽤 혼란스러워서 아주 고대로부터 역시 아주
다양한 가설들이 제시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당시에 아주 흔한 이름들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 문서에 나온 이름들은 하나씩 대조해서 인물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추적해 보아야 한다.
{복음서}는 예수에게 다수의 형제와 누이가 있었다고 언급한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평생동정설"을 따르는 로마카톨릭, 정교회,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측 루터교단, 성공회 일부에서는 이들을 마리아의 자식들이 아니라 예수의 사촌 혹은 요셉이 전처 사이에서 낳은 이복형제로 보는데, 이복형제라면 예수는 요셉의 (명목상) 장자가 아니라 오히려 막내가 된다. AD 2세기 중반 이후 시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유통된 위경들인 {야고보 원복음서}나 {야고보의 유년기 복음서} 같이 예수의 유년기를 다룬 위경문서들에서는 이들 예수의 형제를 요셉의 전처 소생들로 묘사했다.
사실 히브리/아람어에서는 "형제"의 뜻이 보다 포괄적이지만,
{신약성서}의 언어인 그리스어에서는 형제 (ἀδελφός) 와 사촌
(ἀνεψιὸς)은 늘 구별되어 사용된다. 나는 대체로 이들을 예수의
'형제', 즉 요셉/마리아의 자식들로 보긴 하지만, 이복형제일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내 글에서는 일단 그냥 "형제"와 "누이"로만 이들을 부르겠다.
사실 {마태오의 복음서} 13:55는 예수의 형제들을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언급한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이 4명이 그들이며. 여기서 야고보와 유다는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신약성서}서신들인 {야고보서}와 {유다서}의 저자로 추정되기도 한다. 예수의 누이들에 대해서는 복수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몇 명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예수께서) 고향으로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놀라며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 하면서 예수를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태오의 복음서} 13:54-57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형제들이 최소한 예수의 활동 초/중반기에 예수에게 보인 반응은 꽤 시큰둥하거나 냉소적이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으므로 유다 지방으로는 다니고 싶지 않아서 갈릴래아 지방을 찾아다니셨다. 그런데 유다인들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지자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께 "이 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당신이 행하시는 그 훌륭한 일들을 제자들에게 보이십시오. 널리 알려지려면 숨어서 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훌륭한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권하였다. 이렇듯 예수의 형제들조차도 그분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 --- 한국어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7장
그게 또 그렇지 않다. 또한 "신약성서에 근거했다"는 이런 식의 주장은 정작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중요단서 몇가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우선, {복음서}에는 예수의 처형이 있던 무렵 직전에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에게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술이 전혀 없다.
또한 예수의 처형과 부활, 승천, 그리고 오순절에 이르는 약 50일 간의 기간의 상황을 '기적담을 모두 제거하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재구성해 보면,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형제들"에게 일어난 심리적 / 위상적 변화는 상당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설령 이들이 그동안 예수에게 회의적이었다 하더라도, 이 기간 동안 그들이 어떤 이유로 예수의 부활을 사실로 믿게 되었다면 이들에게 그 의미는 엄청났을 것이다. 혹시 예수 당시와 그 이후 유대인들의 주장 처럼 이들이 사도들과 함께 예수의 시체를 은닉하고 사기극을 벌였다면, 이 대형사기극의 비밀을 공유하는 "공범"으로 예수의 친족들은 사도들과 거의 대등한 위치로 승격되었을 것이다.
그럼 예수의 처형이 있은 유월절 주간 부터 성령강림과 함께 기독교의 공식적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오순절까지의 50일 동안, 예수의 사도들과 예수의 친족들은 어떤 관계를 가졌던 것일까? 일단은 너무 멀리 (가령, 사기극 이론) 가지말고, 기록에 남은 내용 만을 중심으로 재구성해 보자.
우선, 예수의 체포가 있기 직전인 최후의 만찬 장소로 가보자. 이 장소는 아마도 예수의 측근이 준비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 큰 "이층방 혹은 다락방" (ἀνάγαιον) 이다. 이 장소는 앞으로 50일 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공간은 13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골방이 아니라 큰 공간이다.
무교절 첫 날에는 과월절 양을 잡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 날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께서 드실 과월절 음식을 저희가 어디 가서 차렸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며 "성안에 들어가면 물동이에 물을 길어가는 사람을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그리고 그 사람이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우리 선생님이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음식을 나눌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러면 그가 이미 자리가 다 마련된 큰 이층 방을 보여줄 터이니 거기에다 준비해 놓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르코의 복음서} 14장드디어 무교절의 첫 날이 왔다. 이 날은 과월절에 쓰는 어린 양을 잡는 날이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서 우리가 먹을 과월절 음식을 준비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어디에다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지시하셨다. "너희가 성안에 들어가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 사람이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을 보고 내가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음식을 먹을 방이 어디 있느냐고 묻더라고 하여라. 그러면 그 집 주인이 이층의 큰 방 하나를 보여줄 것이다. 그 방에 자리가 다 마련되어 있을 터이니 거기에다가 준비를 하여라."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가보니 과연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다. 그들은 거기에다 과월절 음식을 차렸다. -- 한국어 공동번역, {루가의 복음서} 22장
예수의 처형이 발생한 유월절 주간, 모친 마리아와 형제들을 포함하는 예수의 가족들은 평소처럼 유월절 명절을 지내기 위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함께 내려왔다. 예수의 처형장면을 보면, 예수의 직계가족 뿐 아니라 이모를 포함한 외가 쪽 방계가족들도 함께 예루살렘으로 내려왔거나 타 지역에서 상경해 현지에서 합류한 것으로 여겨진다. 혹은 이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친족일 수도 있다.
사도들이나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려져 잘 부각되지는 않지만, 이들 친족들은 예수의 처형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의 나레이션에서 꽤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예수의 죽음 직전의 장면에는 (1)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2) 이모와 (3) 클로파스 (혹은 클레오파스)의 아내 마리아가 등장한다. AD 2세기 중반의 교회사가 헤게시포스는 클레오파를 예수의 양부 요셉의 형제라고 기록했는데, 그럼 "클레오파의 아내 마리아"는 예수의 숙모가 된다. 이미 여기에 예수의 친족들이 여럿 등장한다.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 (Κλωπά)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그런데 그리스어 원문에서 보면, 이때 십자가 아래 있던 사람이
(1) 모친 마리아 (2) 이모 (3)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
(4) 막달라 마리아 네 명인지, (1) 모친 마리아 (2) 이모이자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 (3) 막달라 마리아 세 명인지
불분명하다. 원문에 등장하는 "~이고 and"에 해당하는
카이 (καὶ)가 사용된 횟수 때문이다.
일단 그리스어 원문을 보자.
ἰησοῦ ἡ μήτηρ αὐτοῦ (예수의 모친) καὶ (카이) ἡ ἀδελφὴ τῆς μητρὸς αὐτοῦ (그의 모친의 자매), μαρία ἡ τοῦ κλωπᾶ (클로파의 마리아) καὶ (카이) μαρία ἡ μαγδαληνή (막달라 마리아)
원문에는 카이 (καὶ)가 2번만 등장한다. 즉, 원문
상으로는 "이모"와 "클로파스의 마리아" 사이에 "카이"가
없어서, 이 경우 예수의 "이모"와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를
동일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물론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를 예수의 이모로 볼 경우, 왜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그 "자매인 마리아"의 이름이 같은가가 문제가 되기에 보통은
둘은 나눠서 보지만, 어찌 보던 간에 이 단락은 예수의 친족관계
재구성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AD 2세기의 교회사가
헤게시포스는 위에 등장하는 클레오파스/클로파스를 예수의 양부
요셉의 형제로 보았다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를
제외하면 최소한 2명 혹은 3명에 해당하는 예수의 여성
친족이 십자가 처형장소에 있었다. 잠시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다음으로는 죽음 직후 예수의 처형 장면을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보던 여인들에 대한 장면을 보자.
또 여자들도 먼 데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 작은 야고보 (Ιακώβου του μικρού)와 요셉 (Ιωσή)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따라다니며 예수께 시중을 들던 여자들이다. 그 밖에도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이 거기에 많이 있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르코의 복음서} 15장
또 거기에는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께 시중들며 따라온 여자들이었다. 그 중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있었고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태오의 복음서} 27장예수의 친지들과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니던 여자들도 모두 멀리 서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루가의 복음서} 23장
여기서 "살로메"는 제베데오의 아들들이자 예수의 최측근 3인방 중 두명인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그럼 처음 등장하는 (아마도 예수의 친족인)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는 도대체 누군가?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이 "야고보와 요셉의 모친 마리아"는 바로 "예수의 모친 마리아"일 가능성이 있다. 왜? 예수의 형제 4명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가운데 첫 두명이 바로 야고보와 요셉이다. 마르코와 마태오가 네 명 중 두 명만 언급했을 수도 있고, 정말로 그 장소에 두 명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셉)과 있었을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마태오가 "작은 야고보"라 부른 바로 그 사람이 된다. 여기서 "작다 μικρού"는 뜻의 그리스어는 "체구가 작다"는 뜻일 수도 있고 "어린"이란 뜻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작은 야고보"는 동일 문장에 등장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사도) 야고보"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적용된 용어로 보이며. 아마도 내부에서 통용되던 별명이었을 수 있다.
물론 이 마리아가 제 3자, 가령 "예수의 이모" 일 수도 있다. 가령, AD 1/2세기 히에라폴리스 주교 파피아스는 아래와 같이 복수의 마리아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젊은 시절 예수를 친견했던 1세대 기독교도들로부터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애석하게도 그의 자료는 유세비우스 등이 발췌해서 전하는 내용만 남아 있다. 이 진술의 사실여부와는 별도로 그의 자료는 초대교회의 지도부에 대한 굉장히 흥미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1.) Mary the mother of the Lord; (2.) Mary the wife of Cleophas or Alphæus, who was the mother of James the bishop and apostle, and of Simon and Thaddeus, and of one Joseph; (3.) Mary Salome, wife of Zebedee, mother of John the evangelist and James; (4.) Mary Magdalene. These four are found in the Gospel. James and Judas and Joseph were sons of an aunt (2) of the Lord's. James also and John were sons of another aunt (3) of the Lord's. Mary (2), mother of James the Less and Joseph, wife of Alphæus was the sister of Mary the mother of the Lord, whom John names of Cleophas, either from her father or from the family of the clan, or for some other reason. Mary Salome (3) is called Salome either from her husband or her village. Some affirm that she is the same as Mary of Cleophas, because she had two husbands. -- Papias of Hierapolis, {Fragment X}
(1) 주님의 모친 마리아, (2) 클레오파스 또는 알페오스의 아내이며 주교이자 사도인 야고보와 시몬(시메온), 타데오스, 그리고 요셉의 모친인 마리아, (3) 제베대오의 아내로 복음서를 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 살로메, (4) 막달라 마리아. 이 네 명의 마리아가 복음서에 등장한다. 야고보, 유다, 요셉은 주님의 숙모 (=클레오파/알패오스의 아내인 마리아)의 아들들이다. (사도) 야고보와 (사도) 요한은 주님의 또 다른 숙모 (=마리아 살로메)의 아들들이다.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모친이자 알페오스의 아내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와는 자매지간으로, 요한은 '클레오파스'란 이름을 그녀의 아버지 혹은 그 씨족의 가문명에서 따왔거나, 어떤 다른 이유로 그 단어를 썼다. "마리아 살로메"는 남편이 부를 때나 혹은 마을에서 불릴 때 그냥 "살로메"라고 불렸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남편이 둘 이었기 때문에 "클레오파스의 마리아"와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 히에라폴리스 주교 파피아스, 자료 10 / 번역: 최광민
After the martyrdom of James, it was unanimously decided that Simeon, son of Clopas, was worthy to occupy the see of Jerusalem. He was, it is said, a cousin of the Saviour.
야고보의 순교 후, 만장일치로 클로파스의 아들인 시메온이 예루살렘을 치리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결정되었다. 그는 구세주의 사촌으로 알려져 있다. --- 헤게시포스 {교회사 주석} / 번역: 최광민
즉, 파피아스의 설명대로라면, 예루살렘의 2대 주교인 시메온은
클레오파스/클로파스와 마리아 사이의 자식이다. 헤게시포스의
진술대로 클레오파가 예수의 양부 요셉의 형제라면, 예루살렘의
1-2대 주교는 바로 예수의 (명목상) 고종사촌들이다. 파피아스가
이 시메온의 형제로 언급한 "주교이자 사도"인 "야고보"
"예루살렘 주교"라면, 예수의 고종사촌들이 예루살렘의 1-2대
주교로서 활동했다는 뜻이 된다. 또한 예수의 사도인
"알페오스의 아들 야고보" 혹은 "작은 야고보"는 예수의 이모의
아들로 이종사촌 지간이다. 제베대오와 마리아 살로메의 두
아들이자 예수의 최측근 3인방 가운데 두명인 사도 야고보와
사도 요한은 역시 그의 사촌이다.
파피아스의 자료에 따르자면 예수의 활동기에도 그 주변에는
그의 친족들이 포진해 있었다는 뜻이 된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빼더라도 이들은 적어도 예수의 "제자" 그룹에는 속해
있었다. 가령, 사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는
"제자"로 명시되어 있다.
자, 그럼 앞의 자료들을 예수의 부활/승천 이야기와 연결해 보자. 예수의 처형부터 부활 전후까지 예수의 사도들을 포함한 그의 핵심 측근들은 예루살렘의 어떤 집에 숨어 있었다. 예수의 처형이란 심각한 상황 가운데 그 장소는 오직 최측근들 만 공유하는 비밀장소였을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부활을 최초로 보고한 막달라 마리아는 확실히 그 은신처가 어딘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 혹은 방에는 예수의 12사도들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기타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친족들이 은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장소는 작은 공간이 아니다. 참고로 여기 또 다른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등장한다. 이 마리아는 제베대오의 아내이자 야고보/요한의 모친으로 보긴 힘들다. (그는 살로메다). 이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거의 확실히 "(작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로 보인다. (역시, 문맥 상 이 인물은 "예수의 모친 마리아"일 수도 있고, 그의 "이모"일 수도 있다.)
자, 그럼 앞의 자료들을 예수의 부활/승천 이야기와 연결해 보자. 예수의 처형부터 부활 전후까지 예수의 사도들을 포함한 그의 핵심 측근들은 예루살렘의 어떤 집에 숨어 있었다. 예수의 처형이란 심각한 상황 가운데 그 장소는 오직 최측근들 만 공유하는 비밀장소였을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부활을 최초로 보고한 막달라 마리아는 확실히 그 은신처가 어딘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 혹은 방에는 예수의 12사도들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기타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친족들이 은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장소는 작은 공간이 아니다. 참고로 여기 또 다른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등장한다. 이 마리아는 제베대오의 아내이자 야고보/요한의 모친으로 보긴 힘들다. (그는 살로메다). 이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거의 확실히 "(작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로 보인다. (역시, 문맥 상 이 인물은 "예수의 모친 마리아"일 수도 있고, 그의 "이모"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 이레의 첫날 새벽에 살아나신 뒤에, 맨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이다.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것과, 마리아가 예수를 목격했다는 말을 듣고서도, 믿지 않았다. 그 뒤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내려가는데, 예수께서는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되돌아가서 알렸으나,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그 뒤에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믿음이 없고 마음이 무딘 것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한국어 새번역, {마가복음} 16장
이 말을 듣고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무덤에서 발길을 돌려 열한 제자와 그 밖의 여러 사람들에게 와서 이 모든 일을 알려주었다. 그 여자들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안나와 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다른 여자들도 그들과 함께 이 모든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려니 하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벌떡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몸을 굽혀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수의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는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 날 거기 모였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로 걸어가면서 이 즈음에 일어난 모든 사건에 대하여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나란히 걸어가셨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길을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인 채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글레오파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 한국어 공동번역, {루가의 복음서} 24장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달음질을 하여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알려주었다....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 요한복음 20장
먼저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이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 중 하나인 "클레오파 Κλεόπας"와 예수의 십자가 아래 있었던 마리아의 남편 "클로파스 Κλωπᾶς"가 동일인인가 하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동서방 교회는 이들을 동일인으로 보았고 또 동일인일 확률이 매우 높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확정하기도 곤란하다. 한편, 아람어 클로파스에서 K 발음이 탈락하면서 음운변화로 클로파스/클레오파가 "알페오스 Ἀλφαῖος"로 변형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이 경우, 클로파스 = 클레오파스 = 알페오스 는 모두 동일인이 된다.
두번째로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가족이 은신하던 장소가 "어떤 집"인가를 생각해 보자.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는 부활 후 지상에 40일 동안 머물다 승천하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강림을 기다릴 것을 명하는데, 이때 11명의 사도들은 자신들이 그간 에루살렘에서 머물던 다락방에 다시 모인다. 그런데 거기엔 이미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 다 같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할 때까지 같은 공간에서 함께 기도하며 지냈다.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여기 언급된 "예수의 형제들" 중에 야고보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아주 타당한 추론이다.
그럼 그 방 안으로 들어가 보자.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는데 마침내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셨다....[중략]....그 뒤 사도들은 그 올리브라고 하는 산을 떠나 안식일에 걸어도 괜찮을 거리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성안에 들어온 사도들은 자기네가 묵고 있던 이층 방으로 올라갔는데 그 일행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아, 필립보, 토마,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혁명당원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들이었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여자들과 예수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썼다. 그 무렵 어느 날 교우가 백이십 명 가량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 베드로가 일어나 이렇게 말하였다. ...[중략] ...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 한국어 공동번역 {사도행전} 1:8-15, 2:1-3
바로 이 장소에서, 예수의 사도, 핵심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모친, 형제, 친족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는 경험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의 공동 창립멤버들이 된다.
예수의 형제들이나 사촌들이 예수의 활동 초/중반에 회의적이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최소한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따르면), 설령 그렇다해도 그들이 AD 33년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이런 집중된 상황에서 완전히 새로운 위상을 가진 인물들로 재탄생할 정황은 이미 {신약성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 예수의 친족들이 초대교회에 미친 영향력은
미미했다?
헤게시포스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의 형제들과 친족들은
그들이 (1) 그리스도의 증인들이고 (2) 주님의 친족이었다는
이유로 초기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적시하고 있다. 즉,
예수의 친족이란 사실은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우선 "주님의 형제 야고보"에 관한 헤게시포스의 기록을 읽어보자. 이 내용은 AD 4세기 초반,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발췌/재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사도들과 함께" 교회를 다스렸다는 기록이다. 이는 즉,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의 12사도는 아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음으론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예수의 형제 유다"의 자손들이 겪은 고초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서 유세비우스는 AD 2세기 작가들인 헤게시포스와 테르툴리아누스를 인용한다.
도미티아누스에 이어 황제가 되는 트라야누스 시절에 순교한 시메온은 또 어떤가?
앞서 언급한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한 후 이어 예루살렘 교회의 제 2대 주교가 된 시메온은 "주님의 형제 야고보"에 이어 예루살렘 교회를 치리했고, 로마-유대아 간 전쟁이 발발하기 전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들을 펠라로 이주시키기도 했고 100세가 넘어 순교했다.
시메온은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현장을 목도했던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의 아들로서, 헤게시포스는 이 클로파스가 예수의 양부 요셉의 형제라고 기록했다. 앞서 말한 대로 시메온은 예수와는 (명목상) 고종사촌 간이 된다.
우선 "주님의 형제 야고보"에 관한 헤게시포스의 기록을 읽어보자. 이 내용은 AD 4세기 초반,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발췌/재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사도들과 함께" 교회를 다스렸다는 기록이다. 이는 즉,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의 12사도는 아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JAMES, the Lord's brother, succeeds to the government of the Church, in conjunction with the apostles. He has been universally called the Just, from the days of the Lord down to the present time. For many bore the name of James; but this one was holy from his mother's womb. He drank no wine or other intoxicating liquor, nor did he eat flesh; no razor came upon his head; he did not anoint himself with oil, nor make use of the bath. He alone was permitted to enter the holy place: for he did not wear any woollen garment, but fine linen only. He alone, I say, was wont to go into the temple: and he used to be found kneeling on his knees, begging forgiveness for the people—so that the skin of his knees became horny like that of a camel's, by reason of his constantly bending the knee in adoration to God, and begging forgiveness for the people. Therefore, in consequence of his pre-eminent justice, he was called the Just, and Oblias, which signifies in Greek Defence of the People, and Justice, in accordance with what the prophets declare concerning him. --- Hegesippus, Commentaries on the Acts of the Church.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는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치리를 계승했다. 그는 주님의 시절부터 현재까지 늘 "의인"이라 불리고 있다. 많은 사람이 "야고보"란 이름을 가졌지만, 이 야고보는 모친의 태중에서 부터 거룩한 사람이었다. 그는 포도주나 어떤 독주도 마시지 않하고 육식을 삼갔다. 머리를 깍지도, 자신을 기름으로 치장하지도 않았으며 목욕도 하지 않았다. 그 홀로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그는 양모로 된 옷이 아닌 아마로 곱게 짠 옷만 입었다. 사람들은 그가 홀로 성전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며 기도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는데, 그의 무릎은 낙타무릎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이런 의로움 때문에 그는 '의인'이라 불렸고, 그리스어로 '사람들의 변호인'이란 뜻인 '오블리아스 Ωβλιας'라 불렸으며, 그에 대해 선지자들이 선언한 바와 같이 '공의'라고도 불렸다. --- 헤게시포스, {교회사 주석} / 번역: 최광민
다음으론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예수의 형제 유다"의 자손들이 겪은 고초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서 유세비우스는 AD 2세기 작가들인 헤게시포스와 테르툴리아누스를 인용한다.
But when this same Domitian had commanded that the descendants of David should be slain, an ancient tradition says that some of the heretics brought accusation against the descendants of Jude (said to have been a brother of the Saviour according to the flesh), on the ground that they were of the lineage of David and were related to Christ himself. Hegesippus relates these facts in the following words. --- Eusebius of Caesarea, {Church History}, Translated by Arthur Cushman McGiffert.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CH.19
이 도미티아누스가 다윗의 후손들을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고, 고대 자료에 따르면 이때 어떤 이단들들이 육체적으로는 우리 구세주의 형제인 유다의 후손들을 다윗의 자손이자 그리스도 본인과 친인척으로 고발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에 관해 (AD 2세기의 / 필자 주) 헤게시포스는 이렇게 말한다: ---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 {교회사} 제 3권 19장 / 번역: 최광민
1. Of the family of the Lord there were still living the grandchildren of Jude, who is said to have been the Lord's brother according to the flesh. 2. Information was given that they belonged to the family of David, and they were brought to the Emperor Domitian by the Evocatus. For Domitian feared the coming of Christ as Herod also had feared it. And he asked them if they were descendants of David, and they confessed that they were. Then he asked them how much property they had, or how much money they owned. And both of them answered that they had only nine thousand denarii, half of which belonged to each of them. 4. And this property did not consist of silver, but of a piece of land which contained only thirty-nine acres, and from which they raised their taxes and supported themselves by their own labor. 5. Then they showed their hands, exhibiting the hardness of their bodies and the callousness produced upon their hands by continuous toil as evidence of their own labor. 6. And when they were asked concerning Christ and his kingdom, of what sort it was and where and when it was to appear, they answered that it was not a temporal nor an earthly kingdom, but a heavenly and angelic one, which would appear at the end of the world, when he should come in glory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and to give unto every one according to his works. 7. Upon hearing this, Domitian did not pass judgment against them, but, despising them as of no account, he let them go, and by a decree put a stop to the persecution of the Church. 8. But when they were released they ruled the churches because they were witnesses and were also relatives of the Lord. And peace being established, they lived until the time of Trajan. These things are related by Hegesippus. 9. Tertullian also has mentioned Domitian in the following words: Domitian also, who possessed a share of Nero's cruelty, attempted once to do the same thing that the latter did. But because he had, I suppose, some intelligence, he very soon ceased, and even recalled those whom he had banished. 10. But after Domitian had reigned fifteen years, and Nerva had succeeded to the empire, the Roman Senate, according to the writers that record the history of those days, voted that Domitian's honors should be cancelled, and that those who had been unjustly banished should return to their homes and have their property restored to them. 11. It was at this time that the apostle John returned from his banishment in the island and took up his abode at Ephesus, according to an ancient Christian tradition. --- Eusebius of Caesarea, {Church History}, Translated by Arthur Cushman McGiffert.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CH.20
"[헤게시포스의 기록] 우리 주님의 가족으로는 육체로는 우리 주님의 형제인 유다의 손자들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들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정보가 전해지자, 그들은 에보카투스에 의해 도미티아누스 황제 앞으로 끌려갔다. 도미티아누스는 헤롯 만큼이나 그리스도의 도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그들이 다윗의 후손인지를 물었고, 그들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들 재산이 얼마이며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물었을때, 그 둘은 고작 9천 데나리온을 각각 나눠가지고 있다고 답했다....[중략]....그들은 그들이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란 증거로 단단한 근육과 손에 잡힌 굳은 살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과 그 왕국의 성격과 언제 어디서 그 왕국이 출현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들은 그 왕국은 일시적인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상의 영적인 왕국이라고 답하면서, 왕국은 세상의 마지막에 도래할 것과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재림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그가 한 일에 따라 심판하게 되리라고 답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이것을 듣고나서 그들을 하찮은 사람들이라 경멸하며 처형하지 않고 풀어주었고, 이후 교회에 대한 탄압을 중단할 것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신앙을 증거했고 또 주님의 친척이기에 풀려난 후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들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집권 때까지 살았다." 이것은 헤게시포스가 기록한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도 도미티아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기록] 네로의 잔학성을 가진 도미티아누스 역시 네로가 했던 것과 같은 시도를 한때 한 적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는 정신은 어느 정도 온전했기 때문에 탄압을 곧 중단했으며, 그가 처벌한 사람들을 복권해주기도 했다." ...[후략] ---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 {교회사} 제 3권 20장에서 재인용 / 번역: 최광민
도미티아누스에 이어 황제가 되는 트라야누스 시절에 순교한 시메온은 또 어떤가?
앞서 언급한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한 후 이어 예루살렘 교회의 제 2대 주교가 된 시메온은 "주님의 형제 야고보"에 이어 예루살렘 교회를 치리했고, 로마-유대아 간 전쟁이 발발하기 전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들을 펠라로 이주시키기도 했고 100세가 넘어 순교했다.
시메온은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현장을 목도했던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의 아들로서, 헤게시포스는 이 클로파스가 예수의 양부 요셉의 형제라고 기록했다. 앞서 말한 대로 시메온은 예수와는 (명목상) 고종사촌 간이 된다.
They came, then, and took the presidency of every church, as witnesses for Christ, and as being of the kindred of the Lord. And, after profound peace had been established in every church, they remained down to the reign of Trojan Caesar: that is, until the time when he who was sprung from an uncle of the Lord, the aforementioned Symeon son of Clopas, was informed against by the various heresies, and subjected to an accusation like the rest, and for the same cause, before the legate Atticus; and, while suffering outrage during many days, he bore testimony for Christ: so that all, including the legate himself, were astonished above measure that a man 120 years old should have been able to endure such torments. He was finally condemned to be crucified. -- Hegesippus, {Commentaries on the Acts of the Church}
그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이자 주님의 친족이었기에 모든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각 교회가 꽤 안정된 후 (시메온의 순교 때까지는)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까지도 지도자로 생존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삼촌인 클로파스의 아들 시메온이 다양한 이단들에 의해 같은 내용 (=다윗의 후손이라는)으로 아티쿠스 총독 앞으로 기소되었을 때, 수일 간의 고통을 참아내면서도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했다. 그리하여 총독 본인조차도 120세나 된 노인이 그런 고문을 참아내는데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시메온은 결국 십자가형을 받았다. --- 헤게시포스, {교회사 주석} / 번역: 최광민
헤게시포스의 기록에 명시되었다시피, 기독교 성립 후
예수의 가까운 친족그룹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이자
"예수의 친족"이란 이유로, "사도들과 함께" 교회를
지도하며 AD 2세기 초반까지 유대아 일대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따라서 그들의 영향력이 미미했다는 주장은
기록과 정황을 볼때 사실이 아니다.
# 바울은 야고보를 "예수의 (친)형제"로 간주하지 않았고, 그의 권위를 비웃었다?
바울이 갈라티아에 보낸 편지 제 1장 부터 정독해서 다시 읽어보자.
내가 전에 유다교 신자였을 때의 소행은 여러분이 다 들었을 터이지만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습니다. 아니, 아주 없애버리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나는 그 때 내 동족 중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누구보다도 유다교를 신봉하는 데 앞장섰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훨씬 더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고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시려고 기꺼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 때 나는 어떤 사람과도 상의하지 않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ἔπειτα μετὰ ἔτη τρία ἀνῆλθο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ἱστορῆσαι κηφᾶν, καὶ ἐπέμεινα πρὸς αὐτὸν ἡμέρας δεκαπέντε· ἕτερον δὲ τῶν ἀποστόλων οὐκ εἶδον, εἰ μὴ ἰάκωβον τὸν ἀδελφὸν τοῦ κυρίου.
deinde post annos tres veni Jerosolymam videre Petrum, et mansi apud eum diebus quindecim: alium autem Apostolorum vidi neminem, nisi Jacobum fratrem Domini.
그리고 삼 년 후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그 때 주님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나를 직접 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전에 자기네를 박해하고 그 교를 없애버리려고 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 교를 전파하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하는 일을 두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AD 34년 경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지도자였던
집사/부제 스테파노스의 처형에 가담한 것을 필두로 시리아 일대
기독교 공동체를 파괴할 목적으로 다마스쿠스 가던 중 극적으로
회심한 후 3년이 지나서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오직 사도
베드로와 "주님의 형제 야고보" 만을 만난 후 다시 시리아와
킬리키아로 돌아온 일화를 전하고 있다. 왜 그는 예루살렘의 다른
사도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지 않고 급히 돌아온 것일까?
혹시 바울은 "자신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비웃었기 때문인 것일까?
그렇게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생각해 보자. 스테파노스는 예루살렘에서 기독교가 AD 33년 출범한
이후 사도에 의해 직접 임명된 예루살렘 교회의 고위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다. 바로 그 스테파노스를 죽이는데 바울은
능동적으로 가담했다. 따라서 그 바울이 얼마 후에 시리아에서
극적으로 회심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에 있던 기독교도들에겐
뒤섞인 반응을 일으켰을 것으로 볼 정황은 충분하다. 아마
대부분은 그의 소위 '회심'을 위장전략으로 보고 경계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환영한 일부 기독교도들도 실제로는 인간적 앙금
때문에 그를 용서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용서라는게 그렇게
쉬운게 아니니까.
회심으로부터 3년 후,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비밀리에 대표자
2인인 베드로와 "주님의 형제 야고보" 만을 만나고 온 것은 이런
배경에서 보면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정황은 아니다. 그와
예루살렘 교회와의 접촉은 바울을 이미 받아들인 시리아 일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선했을 것이니, 예루살렘 측이 이런 "문제적
인간" 바울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경우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다만 최고 지도자들인 베드로와 "주님의
형제 야고보" 만 바울을 만나 그의 회심을 확인하는 선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가령, {사도행전} 9장은 다마스쿠스에서의 바울(사울)의 회심 이후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일화를 적고 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등장하는 그의 회심 후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 일화에 대응한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거기에 있는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사울이 제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맞아들여, 사도들에게로 데려가서,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본 일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예루살렘을 자유로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하였고,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과 말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꾀하였다. 신도들이 이 일을 알고,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다. --- 한국어 새번역 {사도행전} 9장
{갈라디아서} 제 2장에 등장하는 두번째 일화는, AD 48년 경
바울이 유대인 동역자 바르나바 및 그리스인 개종자 티토스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소위 "예루살렘 공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일인데, 그 회동이 열리게 된 사연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회동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인
야고보, 게파/베드로, 요한은 기독교도가 되는 조건으로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으며 최소의 계율만 지킬 것을
결의해서 시리아 일대의 교회에 예루살렘 측의 결의사항을 인편과
편지로 알리고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사도권도 인준해 주었다.
여기서 바울이 "소위 지도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 다소
폄하하는 표현을 쓰는데, 바울은 지금 언급한 "소위 지도자들"에
베드로 (게파)나 야고보까지 포함해서 언급한 것일까? 문맥상
그렇게 보긴 힘들다. 바울의 앞뒤 문맥에서 볼때, 이 "소위
지도자들"은 할례를 포함한 유대교의 종교적 관례를 이방인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측의 인사를 말한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그들은 이 회동 이후에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예루살렘 회동에서는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관례를 계속 따를 수
있다" 것에 대해 이미 합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회동의 결과가 시리아 일대에 회람된 이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바울의 편지는 이어진다.
"......그 무렵 유다에서 몇몇 사람이 안티오키아에 내려와 교우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와 그들 사이에 격렬한 의견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는 바울로와 바르나바와 몇몇 신도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다른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떠나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가면서 이방인들이 개종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하여 그 곳 모든 교우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들은 사도들과 원로들을 비롯한 온 교회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도와 이루어주신 일들을 모두 보고하였다. 그런데 바리사이파에 속했다가 신도가 된 사람 몇이 나서서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일러주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도들과 원로들은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회의를 열었다. 오랜 토론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내 입을 빌려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믿게 하시려고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뽑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그들에게도 내리셔서 우리와 똑같이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의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하지 못했던 멍에를 그 신도들의 목에 메워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간섭하려 드는 것입니까? 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주 예수의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온 회중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바르나바와 바울로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하신 여러 가지 기적과 놀라운 일들에 대하여 보고하는 것을 들었다.
두 사도가 말을 마치자 야고보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을 돌보시어 그들 가운데서 처음에 당신의 백성을 뽑아주시게 된 경위를 시몬이 말해 주었습니다. 이 사실은 예언자들의 말과도 일치합니다. 예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내가 다시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집을 다시 지으리니 허물어진 곳을 다시 고치고 그것을 바로 세우리라. 그리하여 살아 남은 백성들이 다 주를 찾고 내 백성이 된 모든 이방인들까지도 모두 주를 찾게 되리라. 오래 전부터 이것을 알게 해주시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 의견은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힐 것이 아니라 다만 우상에게 바쳐서 더러워진 것을 먹지 말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고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고 편지를 띄웠으면 합니다. 예로부터 어느 도시에나 모세의 율법을 풀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율법을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읽어왔습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원로들은 교회의 모든 신도들과 의논하여 대표들을 뽑아 바울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거기에서 뽑힌 사람들은 교우들 가운데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바르사빠라는 유다와 실라였다. 그들이 이 사람들 편에 부친 편지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과 한 형제가 된 우리 사도와 원로들은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을 드립니다. 우리 신도 중 몇몇이 여러분에게 가서 엉뚱한 말로 여러분을 괴롭히고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시킨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표 몇을 뽑아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울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르나바와 바울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 대표로 가는 유다와 실라가 이 편지의 사연을 직접 말로도 전해 드릴 것입니다마는 다음 몇 가지 긴요한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더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 여러분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지 말고 피나 목 졸라 죽인 짐승도 먹지 마시오. 그리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마시오. 여러분이 이런 몇 가지만 삼가면 다 잘될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들 일행은 길을 떠나 안티오키아로 내려가서 회중을 다 모아놓고 그 편지를 전해 주었다. 회중은 그 편지를 읽고 격려를 받았으며 또한 기뻐하였다. 예언자인 유다와 실라도 교우들을 여러 말로 격려하며 힘을 북돋아주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얼마 동안 지내다가 평안을 비는 교우들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그 곳을 떠나 자기들을 파견한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계속해서 안티오키아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였다. ---- 한국어 공동번역, {사도행전} 15장
다음으론 바울이 이 회동과 관련해 갈라티아 사람들에게 쓴
편지를 보자. 우선 첫번째 단락이다.
".....그리고 십사 년 뒤에 나는 디도를 데리고 바르나바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올라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는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과 따로 만나 내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해놓은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동행했던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었는데도 그들은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짜 신도들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몰래 들어와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실상 디도가 할례를 강요당할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를 보존하려고 우리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보지 않으시므로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었든 간에 나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들도 나에게 어떤 새로운 제언을 한 일은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마치 베드로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할례받은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같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직을 나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둥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도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은총을 인정하고,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친교의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고 그들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한 가지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전부터 열심히 해오던 일이었습니다...." --- 한국어 공동번역 {갈라디아인에게 보내는 편지} 2장
그런데 예루살렘 회동의 결과가 시리아 일대에 회람된 이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바울의 편지는 이어진다.
".그러나 게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책망받을 일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의 책망받을 일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게파가 이방인 교우들과 한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들어오자 그는 할례를 주장하는 그 사람들이 두려워서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물러나갔습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안 먹은 체하며 게파와 함께 물러나갔고 심지어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휩쓸려서 가식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행동이 복음의 진리에 맞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게파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유다인이면서 유다인같이 살지 않고 이방인같이 사는 당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 한국어 공동번역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은 여전히 할례를 포함한 유대인의 종교적 관례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베드로의 기반은 여전히 예루살렘이었으므로 거기서 온 사람들의 시선을 고려하긴 해야했겠지만, 베드로가 일전의 회동에서 바울의 관점을 지지했고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지도자들의 공동명의로 시리아 일대의 교회에 결의내용 까지 인편으로 전해놓고 나서, 이제 와서 유대인의 관례를 준수하는 예루살렘 측 사람들을 눈치보며 우물쭈물하는 행태를 보인 점에 바울은 정당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바울의 입장에서 볼때 이는 사도의 권위를 베드로 스스로 훼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장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걸두고, 바울은 "오히려 야고보가 자신에게 가르칠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비웃었다"고 해석해야 할까?
# {갈라디아서} 1-2장은 후대에 가필/위조 되었을까?
혹자는 소아시아에서 그노시스적 이단을 창시한 AD 2세기 초반
시노페의 마르키온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바울서신인
{갈라디아서}에는 제 1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제 1차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가 발견되지 않으며 (따라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 역시),
또 제 2장에 등장하는 AD 48년의 예루살렘 방문이 "두번째"
방문이란 언급이 없으니, 제 1차 방문 일화는 사실이 아니며 해당
부분은 후대의 가필/조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설명에 앞서, 이단자 마르키온파가 사용한 {신약성서} 텍스트를
이런 주장들의 "증거"로 내세우기 전에 마르키온파의 그노시스적
교리를 우선 이해해야 한다. 그는 고대로부터 성서의 텍스트
원문을 그의 교리에 따라 과감하게 "삭제"해 편집한 것으로
일관적으로 알려졌다.
마르키온은 영/육 이원론의 그노시스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독교로부터 유대교적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했다.
따라서 예수의 아버지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저급한
물질적 우주"의 창조자일 수가 없었다. 그가 한 작업은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은 전혀 다른 신이며, 기독교는
유대교의 연속선 상에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유대교의 전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고 본
예수의 사도들을 배제하고, 오직 바울 만이 "진리"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보았다. 유대교적 요소가 많은 {마태오 복음서}나
{마르코 복음서}는 통으로 배제되고, 대신 바울의 오랜
동역자였던 루가가 이방인을 주요 독자로 쓴 {루가의
복음서}를 편집한 소위 {마르키온 복음서}와 표준정경에는
포함되지 않은 {라오디게아서}를 포함한 10편의 바울의 서신들
만을 정경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마르키온은 자신의
교리와 상충되는 부분은 과감히 삭제했다. 특별히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권위"는 신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지 예수의 사도들이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고 있는 {갈라디아서}는
마르키온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신학적 주장을 뒷받침할 최고의
변증서로 여겨졌다.
이레네우스의 {이단반박} 1권 27장에서 인용한다.
2. Marcion of Pontus succeeded him, and developed his doctrine. In so doing, he advanced the most daring blasphemy against Him who is proclaimed as God by the law and the prophets, declaring Him to be the author of evils, to take delight in war, to be infirm of purpose, and even to be contrary to Himself....
폰투스의 마르키온은 그 (=케르도)를 계승해서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마르키온은 모세율법과 예언자들이 신으로 선포한 분을 대적하는 가장 가공할 만한 신성모독으로 나아갔는데, 그는 그 분을 모든 악의 원인이자 전쟁을 즐기고 의지가 박약하며, 심지어 스스로에게 모순되는 존재라고 선언한 것이다.....
.....Besides this, he mutilates the Gospel which is according to Luke, removing all that is written respecting the generation of the Lord, and setting aside a great deal of the teaching of the Lord, in which the Lord is recorded as most dearly confessing that the Maker of this universe is His Father. He likewise persuaded his disciples that he himself was more worthy of credit than are those apostles who have handed down the Gospel to us, furnishing them not with the Gospel, but merely a fragment of it.
[중략[.... 이외에도 그는 {루가의 복음서}를 난도질했는데, 주님의 족보와 관련된 부분을 삭제하고 우주의 창조자가 그의 아버지라고 진실로 고백하는 내용을 담은 주님의 가르침 상당부분을 삭제했다.
In like manner, too, he dismembered the Epistles of Paul, removing all that is said by the apostle respecting that God who made the world, to the effect that He is the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also those passages from the prophetical writings which the apostle quotes, in order to teach us that they announced beforehand the coming of the Lord.
[중략]... 이런 식으로 마르키온은 바울의 서신서도 난도질했는데,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설명한 부분, 따라서 그가 우리 주님의 아버지라고 쓴 부분, 그리고 우리 주님의 도래가 예언되어 있다고 그 사도 (=바울)이 인용한 (구약의) 예언서 구절들을 삭제했다....... ----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제 1권 27장 / 번역: 최광민
마르키온의 {갈라디아서}에는 AD 37년 제 1차 예루살렘 방문 일화가 없다는 식의 주장은 아돌프 하르낙의 주장을 받아서 크리스토퍼 에반스가 재차 주장했는데, 이 설명은 정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가설이다. 게다가 이들의 주장은 "마르키온이 {갈라디아서}에서 해당 부분을 삭제했을 것이다"란 취지이지, {갈라디아서}에 원래 그 부분이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다양한 기독교 이단들의 교리를 정리하고 반박한 AD 2세기 말의
루그두눔 (리옹) 주교 이레네우스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그리고 AD 4세기의 살라미스 주교 에피파니우스는
마르키온파가 "변조"한 {신약성서} 문건들을 그들의 책에 인용의
형식으로 옮기고 있다. 이들의 목적은 "마르키온파가 그들의
교리에 맞춰 성서를 어떻게 변조 (주로 삭제) 했는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는데 있었다.
그런데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 그리고 에피파니우스는
바울의 제 1차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에 해당하는 {갈라디아서}
1:18-24절에 대해 그들의 책들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 이
"침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 (1) 하르낙/에반스의 생각처럼 "마르키온파의 {갈라디아서}엔 이 부분이 없다" 혹은 "마르키온파가 해당 부분을 삭제했다"라고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 (2) "보편교회의 {갈라디아서}와 마르키온파의 {갈라디아서}의 해당부분이 다르지 않기에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에피파니우스가 해당 단락을 언급하지 않았다"라고 이해해야 할까?
내용이 같으니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는게 훨씬 타당한
해석이다.
상당히 엉뚱한 주장이다.
우선, 이레네우스의 5권짜리 {이단반박}은 원래 AD 180년 경에
그리스어로 씌여진 것이지만, 이후 라틴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등으로도 번역되었다는 점.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리스어로 된 사본은
파편적으로만 남아있고, 현재 가장 온전한 형식을 취하는 것은
라틴어 번역본이란 점을 먼제 명시해 두겠다. 즉, 현재 라틴어 본은
'번역'이란 점을 기억해 두자.
{갈라디아서} 제 1장을 고려해 볼때, 제 2장의 예루살렘 방문은
"첫번째 방문"에 이어 "14년 후"의 "두번째 방문"이라고
이해하는게 훨씬 타당하다. 따라서 그 앞장에 AD 37년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나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난 이야기가
마르키온의 {갈라디아서}에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추정가능하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이단반박} 제 3권 13장에서 이레네우스
본인이 인용한 {갈라디아서} 2장을 라틴어 사본에서 직접 인용해
보겠다. 이 단락에서 이레네우스는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대립한 듯한 "마르키온 버전의 바울"을 반박하면서, 사도들과
바울이 같은 신과 같은 복음을 전파했다는 보편교회의 설명을
뒷받침 하려고 했다.
Quoniam autem his qui ad apostolos uocauerunt eum de quaestione acquieuit Paulus et ascendit ad eos cum Barnaba in Hierosolymam, non sine cause sed ut et ab ipsis libertas | gentilium confirmaretur, ipse ait in ea quae est ad Galatas epistola: Deinde post XIIII annos ascendi Hierosolymam cum Barnaba, adsumens et Titum.
그러나 바울은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사도들을 만날 것을 요청받은데 동의하고 예루살렘에서 바르나바와 함께 사도들을 만났는데, 이것은 이방인들의 자유를 그들에게 승인 받기 위한 이유 때문이었다. 본인이 {갈리디아서}에 "14년 후,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티토스를 데리고 올라갔습니다"라고 썼다.
"다시"가 여기 없을까? 해당 라틴어를 번역해 보자.
Deinde post XIIII annos ascendi Hierosolymam cum Barnaba, adsumens et Titum.
Deinde (그 다음) post (후) XIIII (십사) annos (년) ascendi (올라갔다) Hierosolymam (예루살렘으로) cum (함께) Barnaba (바르나바), adsumens (데리고) et (그리고) Titum (티토스)
다음으로 아래는 이에 대응하는 {갈라디아서}의 표준 그리스어
원문과 라틴어 {불가타} 원문이다. 이 라틴어 번역은 이레네우스
당시에서 2세기 후의 번역이라 단어와 문장구조가 약간 다르다.
ἔπειτα διὰ δεκατεσσάρων ἐτῶν πάλιν ἀνέβη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μετὰ βαρναβᾶ, συμπαραλαβὼν καὶ τίτον·
Deinde post annos quatuordecim, iterum ascendi Jerosolymam cum Barnaba, assumpto et Tito.
바로 여기 쓰인 그리스어 ἔπειτα, 라틴어 deinde는 "~그후",
"그 다음" 이란 뜻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그 다음
14년 후"라고 바울이 말하는 것일까?
# 그노시스 {위경}들에 바탕한 추론들은 신뢰할 만한
것일까?
흔히들 기독교 {정경} 와 그노시스 {위경}들 간에 내용이 불일치
한다는 이유로, {정경}에 등장하는 자료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더 나아가서 아예 예수나 야고보란 사람은 창작된 것이란 주장을
하는데, 이는 기독교 {정경} 및 초기교부들의 기록과 그노시스
{위경}들의 자료량이 비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무시한
것이다.
가령, 그노시스 {위경}들은 어느 경우에도 역사나 배경이 설명되는 법이 없고, 보통은 그저 한 줄 혹은 한 문단 정도의 진술 뿐이다.
따라서 {위경}에서 추출된 정보를 "증거"로 삼기 전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 걸 잊지말자: "{정경}의 내용을 믿지 못한다면, {위경}의 정보는 어떻게 믿지? 라고.
{정경}이 "의도"를 가지고 창작된 것이라 믿는 사람은, 똑같은 관점을 {위경}에도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솔직히 "증거"자료로 {위경}의 짧막한 정보를 제시한 방식으론 사안의 복잡성만 증가할 뿐 문제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령, 그노시스 {위경}들은 어느 경우에도 역사나 배경이 설명되는 법이 없고, 보통은 그저 한 줄 혹은 한 문단 정도의 진술 뿐이다.
따라서 {위경}에서 추출된 정보를 "증거"로 삼기 전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 걸 잊지말자: "{정경}의 내용을 믿지 못한다면, {위경}의 정보는 어떻게 믿지? 라고.
{정경}이 "의도"를 가지고 창작된 것이라 믿는 사람은, 똑같은 관점을 {위경}에도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솔직히 "증거"자료로 {위경}의 짧막한 정보를 제시한 방식으론 사안의 복잡성만 증가할 뿐 문제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위경 {도마 복음서}과 "의인 야고보
우선 {도마 복음서}의 어록 #12를 읽어보자.
12. The disciples said to Jesus, "We know that you are going to leave us. Who will be our leader? Jesus said to them, "No matter where you are you are to go to James the Just, for whose sake heaven and earth came into being."
제자들이 "당신이 저희를 떠나갈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 누가 지도자가 되겠습니까?"라고 예수에게 물었다. 예수는 "어디에 있든지 의인 야고보에게 가거라. 천지가 그를 위해 만들어졌다."라고 답했다. / 번역: 최광민
사실 {신약성서}에는 "의인 야고보"란 표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AD 1/2세기 요세푸스의 기록, 헤게시포스의 기록,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기록, 그리고 몇몇 그노시스 문서에 등장하며, 이들 기록을 통해 "의인 야고보"를 "예수의 형제이자 예루살렘 주교 야고보"와 연결짓는 전승이 내려올 뿐이다.
{도마 복음서}의 이 진술을,
"의인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아니라는
"증거"로 사용할 것인가?
(YES / NO)
## {히브리 복음서}와 "의인 야고보"
AD 4세기 히에로니무스가 재인용한 해당 {히브리 복음서} 내용은 아래와 같다.
The Gospel called according to the Hebrews which was recently translated by me into Greek and Latin, which Origen frequently uses, records after the resurrection of the Savior:
And when the Lord had given the linen cloth to the servant of the priest, he went to James and appeared to him. For James had sworn that he would not eat bread from that hour in which he had drunk the cup of the Lord until he should see him risen from among them that sleep. And shortly thereafter the Lord said: Bring a table and bread! And immediately it added: he took the bread, blessed it and brake it and gave it to James the Just and said to him: My brother, eat thy bread, for the Son of man is risen from among them that sleep. ---- (Jerome, De viris inlustribus 2)
오리게네스가 종종 사용했던 {히브리 복음서}를 내가 최근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번역했는데, 구세주의 부활 이후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주님은 아마포를 제사장의 종에게 건네주고 야고보에게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야고보는 주님의 잔을 마신 때부터 주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까지 빵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식탁과 빵을 가져오라"라고 하셨고,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쪼개신 후 의인 야고보에게 그걸 주신 후 "내 형제여, 내 빵을 먹어라. 사람의 아들이 잠든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였다" ---- {히브리 복음서} 히에로니무스 {De viris inlustribus}에서 재인용 / 번역: 최광민
여기의 "의인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일까? (물론 여기서의 "형제"가 꼭 혈육의 동기를 뜻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의인 야고보"가 "예수의 (친/이복)형제 야고보" 해도, 예수의 최후의 만찬 무렵 그가 얼마나 예수를 따르고 있었는지는 {정경}에 등장하지 않아서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그가 예수를 철저히 부정했다고 볼 이유 역시 전혀 없다.
최후의 만찬의 참석인원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처럼 꼭 12명의 사도와 예수 본인 총 13인만 참석했을 것이라 볼 이유 역시 전혀 없기 때문에,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히브리 복음서}에서 처럼 만찬에 참석했다고 보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다만 기독교 {정경} 문서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뿐이다.
{히브리 복음서}의 이 진술을
"의인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아니라는
"증거"로 사용할 것인가?
(YES / NO)
## 위경 {야고보의 비밀서}와 "의인 야고보"
Since you asked that I send you a secret book which was revealed to me and Peter by the Lord, I could not turn you away or gainsay (?) you; but I have written it in the Hebrew alphabet and sent it to you, and you alone. But since you are a minister of the salvation of the saints, endeavor earnestly and take care not to rehearse this text to many - this that the Savior did not wish to tell to all of us, his twelve disciples. But blessed will they be who will be saved through the faith of this discourse ---- {The Secret Book of James}
주님께서 나와 베드로에게 계시해 주신 비밀의 책을 보내달라는 당신의 요청을 받고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대놓고 허락한다고 말해 줄 수도 없었습니다. 히브리 문자로 이것을 써서 당신께만 보내드립니다. 그러나 당신이 성도들의 구원을 맡고 있으므로, 이 내용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주길 바랍니다. 구세주께서는 우리 12사도 모두에게 이야기하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대화내용을 믿어 구원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 {야고보의 비밀서} / 번역: 최광민
확실히 이 문서의 화자인 "나"는 예수의 오리지널 12사도 가운데 한 명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는 이 은밀한 교리를 "야고보"와 "베드로"에게만 직접 전수했다. 그럼 {야고보 비밀서}가 설정하는 화자는?
이 경우는 예수의 사도인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 문서 안에는 "의인 야고보"가 등장하지 않으며, 또 야고보가 예루살렘의 주교/감독이란 암시도 없다.
위경 {야고보 비밀서}의 이 진술을
"의인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아니라는
"증거"로 사용할 것인가?
(YES / NO)
## 위경 {제1 야고보 묵시록}과 {제 2 야고보 묵시록}과 "의인 야고보"
AD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반을 작성시점으로 보는 {제 1 야고보 묵시록}는 예수와 "의인 야고보"가 나누는 일종의 가현설적인 그노시스 담화다. 가령, 예수는 야고보에게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상해도 입히지 못한다고 말하며, 또 핍박자들을 멸망당해야 할 일종의 아르콘 (저급영)으로서 행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문서의 "의인 야고보" 이야기엔 역사적 맥락이 배제되어 있다.
It is the Lord who spoke with me: "See now the completion of my redemption. I have given you a sign of these things, James, my brother. For not without reason have I called you my brother, although you are not my brother materially. And I am not ignorant concerning you; so that when I give you a sign - know and hear."The Lord said, "James, do not be concerned for me or for this people. I am he who was within me. Never have I suffered in any way, nor have I been distressed. And this people has done me no harm. But this (people) existed as a type of the archons, and it deserved to be destroyed through them. But [...] the archons, [...] who has [...] but since it [...] angry with [...] The just [...] is his servant. Therefore your name is "James the Just". You see how you will become sober when you see me. And you stopped this prayer. Now since you are a just man of God, you have embraced me and kissed me. Truly I say to you that you have stirred up great anger and wrath against yourself. But (this has happened) so that these others might come to be."
주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내 구원의 완성을 보아라. 내 형제 야고보야, 나는 이 일들의 표적을 네게 주었다. 비록 네가 물질적으론 내 형제가 아니지만, 내가 너를 형제라 부른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으니, 내가 네게 주는 표적을 알고 들어라.....[중략]......그래서 너의 이름은 "의인 야고보"다....[후략] / 번역; 최광민
위경 {제 2 야고보 묵시록}은 AD 2세기 초/중반이 작성시점으로 여겨진다. 이 문서는 예루살렘의 제사장인 마레임이 "의인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했다는 말을 기록해서 "의인 야고보"의 아버지인 "튜다"란 인물에게 전해주는 설정으로 되어 있다.
This is the discourse that James the Just spoke in Jerusalem, which Mareim, one of the priests, wrote. He had told it to Theuda, the father of the Just One, since he was a relative of his. He said, "Hasten! Come with Mary, your wife, and your relatives [...] therefore [...] of this [...] to him, he will understand. For behold, a multitude are disturbed over his [...], and they are greatly angry at him. [...] and they pray [...]. For he would often say these words and others also."
이것은 의인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한 말을 제사장 가운데 한 명인 마레임이 기록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의인의 아버지 튜다에게 말로 전해 주었는데, 그가 의인의 친족이기 때문이다..... / 번역: 최광민
이어지는 진술을 보면, 예수와 "의인 야고보"는 아버지가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다.
Once when I was sitting deliberating, he (Jesus) opened the door. That one whom you hated and persecuted came in to me. He said to me, "Hail, my brother; my brother, hail." As I raised my face to stare at him, (my) mother said to me, "Do not be frightened, my son, because he said 'My brother' to you. For you were nourished with this same milk. Because of this he calls me "My mother". For he is not a stranger to us. He is your step-brother [...].
그는 내게 말했다: "안녕, 내 형제여, 내 형제여 안녕".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을 때,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내 아들아, 그가 "내 형제여"라고 말할 때 두려워 말아라. 왜냐하면 그와 너는 같은 젖을 먹고 컸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내 어머니"라 부르는건 그런 이유다. 그는 우리에게 낯선 자가 아니다. 그는 씨 다른 네 형제란다.
<You are> the one to whom I say: Hear and understand - for a multitude, when they hear, will be slow witted. But you, understand as I shall be able to tell you. Your father is not my father. But my father has become a father to you.
내가 말을 건네는 너는 듣고 이해하라. 군중들은 들어도 이해가 느리지만, 너는 네게 말할 때 이해하라. 너의 아버지는 내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네 아버지가 되었다. / 번역: 최광민
그나저나 도대체 이 수수께끼 인물인 "튜다"는 누구일까?
신약성서 {사도행전}과 요세푸스의 에는 AD 44-46 년 경에 반-로마
선동을 주도한 인물로 "튜다"를 언급하고 있기는 하다.
가령, {사도행전} 5장 37절에서는 힐렐의 손자이자 바울의
스승이기도 했던 산헤드린의 지도자인 가말리엘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36 πρὸ γὰρ τούτων τῶν ἡμερῶν ἀνέστη θευδᾶς, λέγων εἶναί τινα ἑαυτόν, ᾧ προσεκλίθη ἀνδρῶν ἀριθμὸς ὡς τετρακοσίων· ὃς ἀνῃρέθη, καὶ πάντες ὅσοι ἐπείθοντο αὐτῶ διελύθησαν καὶ ἐγένοντο εἰς οὐδέν. 37 μετὰ τοῦτον ἀνέστη ἰούδας ὁ γαλιλαῖος ἐν ταῖς ἡμέραις τῆς ἀπογραφῆς καὶ ἀπέστησεν λαὸν ὀπίσω αὐτοῦ· κἀκεῖνος ἀπώλετο, καὶ πάντες ὅσοι ἐπείθοντο αὐτῶ διεσκορπίσθησαν.
... 이전에 튜다가 나타나 자기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하자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니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자취도 없이 다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뒤 호구 조사 (ἀπογραφή / 등록)를 하던 때에도 갈릴래아 사람 유다 (혹은 가말라의 유다)가 나타나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한 일이 있었지만 그가 죽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 {사도행전} 5:37 (공동번역)
요세푸스가 {유대고대사}에 기록한 "튜다스"는 AD 44-46년의 반-로마 반란을 이끌다 죽었으므로 {사도행전}의 그 "튜다스"로 보긴 곤란하다. 이것이 요세푸스 혹은 {사도행전}의 저자, 혹은 {사도행전} 속 화자인 바리사이파의 지도자 가말리엘의 착오인지, 아니면 두 명의 다른 튜다스에 대한 것인지는 해결되지 않은 논란이 있다.
1. NOW it came to pass, while Fadus was procurator of Judea, that a certain magician, whose name was Theudas, persuaded a great part of the people to take their effects with them, and follow him to the river Jordan; for he told them he was a prophet, and that he would, by his own command, divide the river, and afford them an easy passage over it; and many were deluded by his words. However, Fadus did not permit them to make any advantage of his wild attempt, but sent a troop of horsemen out against them; who, falling upon them unexpectedly, slew many of them, and took many of them alive. They also took Theudas alive, and cut off his head, and carried it to Jerusalem. This was what befell the Jews in the time of Cuspius Fadus's government. --- Flavius Jesephus {Jewish Antiquities}, 20.97-99 (5.1)
그후 파두스가 유대아의 총독이던 시절, "튜다스"란 이름의 어떤 마법사가 많은 사람들이 그를 효과적으로 추종하게 만들어 그들을 요르단강 근방에 모았다. 거기서 그는 그가 선지자이며, 그가 명령하면 강물이 갈라져 그들이 그리로 강을 건널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의 그의 말에 현혹되었다. 그러나 파두스는 사람들이 튜다스의 과감한 시도에 휩쓸리는 것을 좌시하지 않고 기병대를 보내 그들을 급습했고 많은 사람을 죽이고 또 많은 사람을 생포했다. 그들은 또한 튜다스를 생포한 후 그의 목을 참수해서 그 목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갔다. 이것은 쿠스피우스 파두스의 통치 기간에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20장 97-99절 / 번역: 최광민
한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중심으로 상당한 세력을 과시했던
AD 2세기 초/중반의 그노시스 일파인 발렌티누스파의 창시자
발렌티누스는 바울의 제자인 "튜다스"로부터 비밀교리를 전수받아
그의 그노시스 일파를 개창했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스의 {스트로마타} 제 7권 17장에서 발췌한다.
For the teaching of our Lord at His advent, beginning with Augustus and Tiberius, was completed in the middle of the times of Tiberius. And that of the apostles, embracing the ministry of Paul, ends with Nero.
우리 주님의 가르침은 그가 오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시작해서 티베리우스 (황제) 의 통치 중반기에 완결되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바울의 사역을 포함해 네로 (황제) 시절까지 였다.
It was later, in the times of Adrian the king, that those who invented the heresies arose; and they extended to the age of Antoninus the elder, as, for instance, Basilides, though he claims (as they boast) for his master, Glaucias, the interpreter of Peter.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에 이단을 창시한 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제위 때까지 이어졌는데, 가령 바실리데스는 (그 추종자들이 자랑하듯) 그의 스승인 글라키아스가 베드로의 통역이었다고 주장했다.
Likewise they allege that Valentinus was a hearer of Theudas. And he was the pupil of Paul.
마찬가지로 그들 (이단자)들은 또 발렌티누스가 튜다스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 (=튜다스)는 또 바울의 제자였다고 주장했다.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스트로마타} 제 7권 17장 / 번역: 최광민
이 "튜다스"는 발렌티누스의 활동지역이나 활동시기를 고려해
본다면, {사도행전}이나 요세푸스가 언급한 그 "튜다스" 혹은
"튜다스"들로 보기엔 곤란하다. 하지만 발렌티누스의
스승 "튜다스"가 그노시스적인 가르침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야고보 묵시록} 또한 그노시스 문서란 점을
기억하자.
아니면 이 문서(들)의 저자가 그냥 예수와 야고보의 가족관계를 혼동한 것일까? 혹시 이런 혼동은 이들 그노시스 문서들이 작성되고 서로서로 인용되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만 유통되던 "지역전승"은 아니었을까?
위경 {1/2 야고보 묵시록}의 이 진술들을
"의인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아니라는
"증거"로 사용할 것인가?
(YES / NO)
# 맺음말
정경문서를 통해서든, 혹은 그노시스 위경문서를 통해서든 증거가 그리도 "압도적"이라면, 왜 학자들은 이 문제를 AD 2세기 부터 AD 21세기인 지금까지 여러가지 가설을 통해 해명하려고 할까?
"압도적"이란 주장은, 그저 자신들의 '전제'에서나 그렇다는 말일
뿐.
사람들은 늘 어떤 짧고 명쾌한
사람들은 늘 어떤 짧고 명쾌한
한 줄짜리 진실을 원하지만,
종종 명쾌하지 않은 흐릿함이
오히려 진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진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판단은 각자의 몫.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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