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광민] 히틀러 vs 스탈린 : 학살규모와 종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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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종교|철학

[© 최광민] 히틀러 vs 스탈린 : 학살규모와 종교정책

草人! 2021. 8. 16. 11:27
작성

© 최광민 2018-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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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광민] 히틀러 vs 스탈린 : 학살규모와 종교정책

순서
  1. 공산주의의 종교억압은 무신론과는 상관없을까?
  2. 누가 민간인을 더 많이 학살했을까?
  3. 스탈린과 러시아 정교회의 밀월은 스탈린의 개심 탓인가?
  4. 히틀러는 무신론자였을까?
  5. 나찌와 히틀러의 종교관은 무엇이었을까?




방문자 포럼 질문에 대한 답변 (질문자: Primo de Rivera)




[질문] 공산주의 정권하에서의 종교나 신앙단체들에 대한 탄압은 무신론에 의거한 행동이었나요? 어떤 신무신론자들은 러시아 제국과 러시아 정교회의 관계의 사례처럼 공산화 이전 해당 국가의 기득권과 종교/신앙 세력의 관계가 공존관계에 있었고 공산주의 정권은 무신론과는 관련없이 해당 국가의 종교/신앙 세력을 단순히 정치적 기득권과 결탁한 세력으로 보고 숙청했던 단순한 정치적 범죄에 불과한 것이며, 더군다나 해당 공산주의 정권이 특정 지도자를 신격화하거나 교조주의적 모습을 보여주어 오히려 교조화된 종교와 유사성을 보여주었다며 공산주의 정권의 종교/신앙 탄압과 무신론의 관계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던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변]

공산주의에는 여러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기본인식은 같으며, 그것은 카알 마르크스의 생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카알 마르크스는 그의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종교에 대한 그 유명한 발언을 합니다.

Das Fundament der irreligiösen Kritik ist: Der Mensch macht die Religion, die Religion macht nicht den Menschen. Und zwar ist die Religion das Selbstbewusstsein und das Selbstgefühl des Menschen, der sich selbst entweder noch nicht erworben, oder schon wieder verloren hat. Aber der Mensch, das ist kein abstraktes, außer der Welt hockendes Wesen. Der Mensch, das ist die Welt des Menschen, Staat, Societät. Dieser Staat, diese Societät produzieren die Religion, ein verkehrtes Weltbewusstsein, weil sie eine verkehrte Welt sind. Die Religion ist die allgemeine Theorie dieser Welt, ihr encyklopädisches Compendium, ihre Logik in populärer Form, ihr spiritualistischer Point-d'honneur, ihr Enthusiasmus, ihre moralische Sanktion, ihre feierliche Ergänzung, ihr allgemeiner Trost- und Rechtfertigungsgrund. Sie ist die phantastische Verwirklichung des menschlichen Wesens, weil das menschliche Wesen keine wahre Wirklichkeit besitzt. Der Kampf gegen die Religion ist also mittelbar der Kampf gegen jene Welt, deren geistiges Aroma die Religion ist. Das religiöse Elend ist in einem der Ausdruck des wirklichen Elendes und in einem die Protestation gegen das wirkliche Elend. Die Religion ist der Seufzer der bedrängten Kreatur, das Gemüth einer herzlosen Welt, wie sie der Geist geistloser Zustände ist. Sie ist das Opium des Volks. Die Aufhebung der Religion als des illusorischen Glücks des Volkes ist die Forderung seines wirklichen Glücks. Die Forderung, die Illusionen über seinen Zustand aufzugeben, ist die Forderung, einen Zustand aufzugeben, der der Illusionen bedarf. Die Kritik der Religion ist also im Keim die Kritik des Jammerthales, dessen Heiligenschein die Religion ist. – Karl Marx: Einleitung zu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in: Deutsch-Französische Jahrbücher 1844, S. 71f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 이것이 바로 종교비판의 기반이다. 진실로 종교란, 자신을 극복해 본 적 없거나 혹은 다시 자아를 놓쳐버린 인간 자신의 자기인식이자 자기평가다. 하지만 인간은 세계 밖에 웅크린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란 인간들의 세계 - 국가, 사회 - 그 자체다. 이 국가와 이 사회는 종교를 만들어 내는데, 종교란 세계에 대한 뒤집힌 의식에 불과하다.  이것들이 바로 뒤집혀져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이 세상에 대한 일반이론이자, 백과사전적 요약이자,  인기있는 형식의 논리이자, 영적 원리이자, 열정이자, 윤리적 근거이자, 근엄한 보완제이자, 위안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보편적 기반이 된다. 종교란 인간의 진정한 현실을 찾아내지 못한 인간 존재가 이를 환상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기에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는 종교를 그 영적 향기로 삼는 세상에 대한 투쟁이기도 하다종교적인 고통은 그와 동시에 진짜 고통의 표현이자 진짜 고통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종교는 억압받는 존재의 한숨이며, 심장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없는 상태의 영혼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민의 아편이다.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인민들에게 거짓 행복을 주는 도구가 되는 종교를 폐기해야 한다.  인민들 더러 그들의 상태에 관한 환각을 버리라고 촉구하는 일은 곧, 그 환각들을 필요로하는 상태를 포기하라고 촉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종교비판이란 기본적으로 종교가 후광효과를 갖는 눈물의 골짜기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 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 / 번역: 최광민

블라디미르 레닌은 무신론이 마르크시즘, 즉 "과학적 사회주의"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며 따라서 마르크시즘과 무신론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당연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카알 마르크스가 주창한 것이 바로 "과학적 유물론"이기 때문입니다. 유물론과 종교가 같이가기는 그리 쉽지 않죠.

하지만 레닌과 초창기 볼셰비키들은 노동자/농민에게 압제적인,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의 편인 종교를 버리고 무신론으로 돌이키게 하려면 강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자발적 각성과 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레닌이 이런 입장을 취한 데는 정치적이고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물론 이념가들의 말은 이렇지만, 실무로 들어가면 종교를 통제, 혹은 억압할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많습니다.  가령, "신자 투옥", "교회 폐쇄" 같은 "하드"한 방법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성서배포 불허"나 "성서인쇄에 필요한 얇은 종이 공급제한" 같은 "소프트"한 방식도 가능합니다. 

그걸 마르크스-레닌 노선이든, 스탈린 노선이든, 마오쩌뚱 노선이든, 김일성주의든, 정권과 시대마다 완급을 조절하며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을 따름이죠. 그러나 이 다양한 노선들이 결국 그 근원을 "과학적 유물론" 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두고 있는 한, 위에 인용한 마르크스의 '말씀'은 불변입니다.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그 아류는 무신론에 근거하지만, 무신론자가 꼭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 최광민




# 스탈린 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들의 숫자가 어느정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나치 정권이 죽인 민간인의 수가 1100만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에게 학살당한 소련 민간인까지 포함해 추산한 수치인가요?제가 알기로는 나치 독일은 레벤스라움을 확보하기 위해서 소련 점령지 민간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대량 학살을 벌였고 그로 인하여 소련 민간인의 사망자는 무려 2000만에 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집권을 했던 시기에 소련에 의해 발표된 스탈린 정권에 의한 공인된 사망자 수치는 970만 정도라고 들었는데 이것이 사실인가요?

[답변] 최광민


제가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에서의 사망자 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5여 년 쯤 음모론을 전파하는 네오나찌 웹싸이트를 통해서였습니다.

혹시 아실지 모르지만 네오나찌들은 히틀러를 변호하고자 무던히 애를 쓰는데, 히틀러와 나찌정권의 학살 자체는 워낙 반박하기 힘들기 때문에 대신 우회적으로 히틀러/나찌에 의해 죽은 사망자"수"를 최소화하는데 집중합니다. (마치 일본우익들이 난징학살 사망자수가 과장되었다며, 난징학살사건의 희석시키려는 수법과 유사합니다.) 이들의 두번째 전략은 히틀러 무렵의 다른 독재자들을 비교시키는 방식입니다. 가령, 히틀러가 (무솔리니, 프랑코, 케말 파샤 보단 많이 죽였지만) "스탈린과는 비슷하다"는 식 입니다.

1941년 여름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개시합니다. 이때 펼친 작전이 소위 "바르바롯사 작전"이란 것으로 나찌는 공격대를 쪼개서 전방위로 전선을 넓혀가면서 모스크바 방면 뿐 아니라 석유가 많이 매장된 동남부 우랄산맥 쪽으로도 진군합니다. 그래서 전선이 유대인들이 집중 거주하던 폴란드, 에스토니아, 우크라이나 일대를 쓸고 지나가게 됩니다. 이 지역은 정통파 + 카발라계 유대교도들의 게토가 존재하기도 했고, 동시에 레닌 시절에 공산주의로 전향한 다수의 유대인들이 정규군이나 게릴라로 방어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물론 유대인이 아닌 현지인들도 저항에 나섰죠.

당시 독일군은 바르바롯사 작전을 수행하면서 투르크계, 집시, 유대인들 (공산주의자 + 유대교도)를 적극적으로 "박멸"하도록 지시받았습니다. 마치 월남전 때 베트콩, 주민 가릴 것 없이 쓸고 지나가던 방식 비슷합니다. 이때 전투로 사살되거나 포로가 된 후 아사한 사람의 수가 그 지역 인구의 거의 60%에 달했습니다. 집계로는 약 140만의 유대인이 이때 죽었다고 하는데, 물론 이 수에는 유대인 민간인 뿐 아니라 정규/비정규 전투요원도 포함되어 있고, 아마도 슬라브계, 투르크계, 집시계 비유대인도 상당수 유대인 사망자 수에 뒤섞여 집계되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이 논란이 됩니다. 인종청소가 일어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전투행위에 포함되기도 하니까요. 유고슬라비아 사태에서 보듯이, 세르비아-보스니아 전쟁도 인종청소와 전투행위가 동시에 뒤섞여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전쟁행위고 어디까지가 민간인 학살인지의 경계를 어떻게 잡는가가 집계에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20세기 말까지 국가 간 공동연구를 바탕으로 한 역사가들의 결론에 따르면 히틀러와 나찌가 죽인 비전투원/민간인 사망자 수는 1100만 입니다. 이 수치는 예일대 역사학자이자 홀로코스트 전문가인 티모시 스나이더의 책에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민간인"에 파르티잔/게릴라까지 포함되는 것인지 (파르티잔/게릴라는 전투원이지만 엄격한 정의상 민간인이라고 봐야합니다), 집계를 어떻게 했는지, 중복집계는 없는지도 봐야 할 것 같지만, 제게 스나이더가 사용한 원자료가 없어서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위에 올리신 '스탈린의 자국민 살해'란 질문에 대해 질문을 하나 한다면, "살해"란 여기서 어떤 의미로 사용된 것인지 우선 분명히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령, 독재자의 통치 중 국내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망사건은 몇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 독재자가 직접명령한 정적살해 / 숙청
  • 정권적 내전발생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
  • 독재정권의 정책실패로 인한 사망
  • 인종학살

나찌정권의 경우와 달리, 스탈린 정권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1990년대가 되어서야 제대로 자료가 공개되었고, 나찌독일과는 달리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란 강대국이 존재하기 때문에 (옐친 이후로 러시아가 이전 공산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쉽게 건드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냉전 때는 스탈린도 히틀러 만큼 죽였을거라고 생각하곤 했지만, 이후 2010년대까지 밝혀진 바로는 스탈린 치하 총 민간인 총 사망자 수는 나찌보다 적습니다. 700만 정도가 상한선입니다. 그럼 스탈린이 히틀러보단 비슷한 건가? 아니면 조금 나은가?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민간인 사망사건들의 성격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1922년부터 53년까지 집권했고, 초반에는 당내 정적을 숙청하는데 몰두했습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큰 사건을 하나 터트립니다. 스탈린 치하에 벌어진 대규모 민간인 사망사태로는 이 사건을 우선 손꼽아야 합니다.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벌어진 소위, "홀로도모르 (아사살해)" 불리는 일종의 인종청소 사건입니다. 25개국 공동연구 집계에 따르면 1932-33년 한 해에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굶어죽은 민간인만 300만에서 700만입니다 (유엔총회 문건: http://repository.un.org/bitstream/handle/11176/246001/A_C.3_58_9-EN.pdf).



마오쩌둥 치하 중국의 1958-1962년에 벌어진 중국 산업화 프로젝트인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굶어죽은 중국인이 무려 3천만 명인데 비해 훨씬 적은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는 있습니다만, 스탈린의 홀로도모르는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실패와는 결이 좀 다릅니다.

마우쩌둥이 3천만을 굶겨죽인 사건은 단순히 공산당 정부의 정책실패로 중국 전 지역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반면, 스탈린의 1930년대 사건은 우크라이나인을 겨냥했다는 의혹이 짙습니다. 물론 사건 초반부는 중국의 아사사태 처럼 소비에트의 정책실패가 중요요인이 됩니다. 당시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에서 집단농장화를 강력히 추진하던 소비에트는 소규모 자영농들의 심한 저항을 받고 있었는데, 1930년 곡물생산이 줄자 정부는 매우 소량의 곡물만을 해당지역에 남기고 타지역으로 모든 곡물을 공출해 버립니다. 이어서 해당지역을 봉쇄하고 외부로부터의 식량지원을 묵살하거나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항하던 우크라이나인들은 처형되거나 모든 소유물을 빼앗긴 채로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습니다 (시베리아로 추방되면 대개 거기서 생존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대흉년 때 영국정부가 이를 방관하여 (영국정부에 순순하게 따르지 않던) 아일랜드인들이 대량아사한 사건과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이건도 기획된 인종청소로 보는 견해가 강합니다.).

이 사건을 인종청소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아르메니아인들은 케말 파샤의 터키공화국이 아르메니아인들을 상대로 자행한 학살을 인종청소로 규정합니다. 역시 우크라이나인들도 위 사건을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인종청소로 간주합니다. 물론 터키나 러시아는 (아울러 이들 국가와 이해관계가 있는 대개의 서방국가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 홀로도모르 사건을 기획된 인종청소로 규정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스탈린의 민간인 학살자 수가 크게 달라질 수 있겠죠?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으므로 다소 과장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만약 (1) 홀로도모르가 인종청소였고, (2) 그 2-3년 사이에 죽은 우크라이나인이 "최대 7백만 - 천만"에 달한다는 국제공동조사를 결과를 (이 수치는 사망자 개개의 정보에 바탕한 신뢰할 만한 수치인 것으로 압니다) 받아들인다면 그의 집권기 민간인 사망자 수가 천만에 달한다는 수치에 도달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소련해체 이전에는 스탈린이 죽인 민간인 수가 나찌가 죽은 수와 비슷할 것으로 추산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흐루쇼프의 발표가 거의 그 수에 근접하겠죠. 하지만 앞에서 말한 슈나이더는 스탈린이 많이 죽이긴 했어도 히틀러보단 훨씬 적게 죽인 것으로 최근 (2000년대) 집계되었다는 식으로 진술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최광민




[질문] 소련의 독재자였던 스탈린이 독일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러시아 정교회를 다시 부흥시켰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공석이었던 모스크바 총대주교 직위를 다시 선출할 수있도록 허가해 주었으며, 감금되어 있던 사제들을 석방해 주는 등 정교회에 대한 유화 정책을 펼쳤다고 합니다. 실제로 스탈린은 정교회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생이었던 사람이었고, 또 그가 밝히기를 신으 명령을 받고 교회에 대한 제재를 해제했다는 발언도 하였다고 합니다.출처:Radzinsky 1996, p.472-3.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을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스탈린 입장에서도 레닌 시절에 망해가던 정교회를 다시 부흥시켜봐야 이득 될것도 없었을 텐데 이러한 정교회에 대한 유화정책은 스탈린이 적어도 후기에 정교회 신앙을 회복했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답변] 최광민

속내야 스탈린 본인만 알겠지만, 정황상 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레닌 시절에 망해가던 정교회를 다시 부흥시켜봐야 이득 될것도 없었을 텐데..."라고 쓰셨지만, 한때 정교회 신학생이었던 스탈린 (흔히 보제(부제)의 아들이거나, 좋은 학교입학을 위해 보제의 아들라며 그 어머니가 사칭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은 1930년대에 무신론 5개년 계획 등을 통해 교회박멸에 기염을 토했다가 막판 10여 년 동안 유화정책을 폈는데, 사실 여기엔 그와 그의 정권에 유리한 요건이 확실히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656년부터 시작된 근/현대 러시아 정교회의 대분열 (Raskol)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653년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인 모스크바 총주교 니콘은 짜르 알렉세이 로마노프의 지원 하에 역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던 러시아 정교회의 예전서, 성호방식, 이콘 등의 교회전통이 다른 정교회, 특별히 콘스탄티노플 정교회와 이질적이라는 점을 들어 이를 일치시키고자 과감한 개혁안을 발동합니다. 아울러 1472년 이반3세가 제 3의 로마를 주장한 이후로 서방의 로마카톨릭과 적대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 정교회의 입장에서 선호해 로마카톨릭과의 합작도 추진하고, 로마카톨릭 세력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 동유럽 지역에서의 세력확장을 꾀하기 위해 일부 라틴전례도 도입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러시아 정교회의 순혈성을 주장하는 "구전례파"가 모스크바 총대주교에 반기를 들고 1656년 분열해 나갑니다. 러시아 정교회 본부는 이들을 분열주의자 및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이어 러시아의 서구화를 추구한 짜르 알렉세이의 아들 표트르가 짜르가 되자 교회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1700년 총주교 사망 이후 총주교직을 공석으로 방치한 후 그러부터 20년 후엔 총주교좌를 격하시킨 후 아예 국가조직인 종무원으로 흡수해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러시아 정교회 (신전례파)는 완전히 국가에 종속된 조직이 되어 버립니다. 심지어 표트르 "대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새 수도로 건설한 후 모스크바에서 천도해 버립니다. 이 조치는 또한 구전례파 통제도 아울러 목표했는데, 짜르와 신전례파를 배교자로 간주하던 구전례파는 아예 모스코바 조차 등지고 러시아 동북부 혹은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로 종교적 망명을 자처하게 됩니다.

구전례파가 분리될 때 러시아 정교회 주교 1인 이외에는 다른 주교들이 분열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전례파는 이후 이전 주교로 부터 직접 성직을 받은 사제가 사라지게 됩니다. 대신 자체적으로 사제직을 전수/유지하거나 국가교회에서 서임되었으나 나중에 구전례파에 동조하게 된 성직자도 인정하는 재성직파와 ,성직을 중시하지 않고 신자들의 개인적/공동체적 영성을 중시하는 부재성직파로 다시 분열한 후 각각은 또 다른 분파들로 나뉘게 됩니다.



러-일전쟁이 한참이던 1905년 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내 모든 종교적 소수파를 허용하는 종교관용령을 발표합니다. 러시아 동부지대에서 일종의 무교회주의와 공동체주의를 결합한 긴밀한 종교/경제적 자치 네크워크를 구성하고 있던 구전례파는 비로소 공개적인 교회를 재건하고 두마 (국회)에 맞서는 민회(소비에트)를 가동시켰습니다. 그러니까 (볼셰비키의 사후정당화와는 달리) 러시아 혁명의 전위조직인 '소비에트'는 파리꼬뮨을 본딴 사회주의 조직이 아니라 원래 구전례파의 종교/경제적 조직에 기반한 것입니다.

볼셰비키 혁명 발발 당시, 마르크스 혁명을 주도할 프롤레타리아 노동자 계급은 러시아 총인구의 2%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제국의 서남부에 기반한 서구적이고 다수파 혁명조직인 멘셰비키에 반해, 볼셰비키 세력은 주로 구전례파의 분포지역과 겹치는 동북부가 근거지였습니다. 5천 명도 안되는 극소수파인 볼셰비키의 뒷배가 되어준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700만에 달하는 농민민병대였고, 여기 구전례파가 가세하면서 최대 3천 만에 달하는 지원층이 형성됩니다. 그런 이유로 레닌과 초기 볼셰비키파는 정교도, 특별히 구전례파에 대해서 크게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발발 1달 후인 12월 4일에는 표트르 대제가 폐지한 지 두세기 만에 모스크바 총주교로 티혼이 취임합니다. 정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된 것은 스탈린 집권 이후로 신/구전례파 모두 억압의 대상이 됩니다. 스탈린은 티혼 총주교가 1925년에 사망한 후로, 다음 총주교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1940년대에 들어 나찌와 소비에트 간에 독소전쟁이 시작되는데, 당시 로마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측의 지지를 이끌고자 히틀러는 무신론자 / 공산주의자 박멸에 대한 선동을 시작합니다. 스탈린의 입장에서 볼 때, 혁명 후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에게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력히 남아있는 상태에서 반-종교적 스탠스를 가지고서는 소련 동부의 국민들을 끌어들여 나찌와 싸우긴 곤란했을 겁니다. 볼세비키 혁명 때 정교회를 배후에 둔 백군과 혁명군인 적군들이 장기대치 했던 역사를 상기시켜 보더라도 스탈린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은 종교 (정확히는 정교회) 유화책일 수 밖에 없습니다 - 나찌와 싸우던 중 후방에서 반-공산당 봉기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고요.

스탈린은 독소전쟁 ("대조국전쟁")에서 "어머니 러시아"란 민족주의적 상징을 적극 활용하였고, 또 그의 "소비에트"는 사실상 러시아가 주도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스탈린은 러시아인이 아니라 조지아/그루지야인이죠). 러시아 민족주의에 정교회가 빠질 수는 없으니 스탈린이 러시아 민족주의를 고양시켜 (혹은 적극적 협조를 유도하여) 나찌와 싸우려면 어떻게든 러시아 정교회와의 관계를 완화시킬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전후의 국가재통합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죠. 사실 그가 모스크바 총주교 지위를 허용할 때, 그는 사실 사도헌장을 (아마도 의도적으로) 위배하고 직접 총주교를 임명했습니다 - 정교도라면, 혹은 (중퇴하긴 했지만) 정교회 신학교를 다녔던 사람이라면 절차적 문제점을 몰랐을 리가 없죠.

정리하자면, 스탈린은 당시 정교회를 다시 끌어들여와할 매우 충분한, 혹은 절실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호적인 종교(지도자)를 통해 인민의 지지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전략은 사실 스탈린 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거의 모든 독재자들이 애용한 방식이라고 보시면 틀리지 않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물론 속내야 본인만 알겠죠.

/ 최광민




[질문] 히틀러가 생전에 신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하는 등의 무신론적 발언을 한 기록이 있나요? 있다면 자료를 주시는 게 가능하신가요?

[답변] 최광민

히틀러는 확실히 유물론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히틀러는 볼셰비즘, 공산주의, "유대인적 (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등)" 유물론/철학 등을 모두 무신론의 범주에 넣고 같이 공격했습니다. 다만 무신론자는 아니더라도 정통적인 기독교의 신과 그 종교에 대해서는 꽤 냉소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 정의된 신"을 부정하는가 핵심 아닐까요?

http://kwangmin.blogspot.com/2011/12/blog-post_3523.html

가령, 훗날 기존의 기독교를 대체할 (유물론적이지는 않은) "긍정적 기독교"로 발전하게 될 개념을 구상하며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꽤 실용적 접근법이죠.

The political leader should not estimate the worth of a religion by taking some of its shortcomings into account, but he should ask himself whether there be any practical substitute in a view which is demonstrably better. Until such a substitute be available, only fools and criminals would think of abolishing existing religion.— Adolf Hitler, Mein Kampf

정치지도자는 한 종교의 결점을 가지고 그 종교의 가치를 평가해서는 안된다. 대신 보다 현저하게 다는 다른 실용적인 대안이 있지 않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런 대안이 가능하기 전에 현존하는 종교를 폐기할 생각을 품는 자는 오직 바보나 범죄자들 뿐이다. ---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 번역: 최광민

이것이 히틀러의 본심이었던 거죠. 그리고 권력을 잡자 이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것이 바로  "긍정적 기독교 Positives Christentum"입니다.

/ 최광민




# 나치는 향후에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했나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도노반 장군이 나치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던데 사실인가요? 히틀러의 종교관은 어떠했나요?

[답변] 최광민

혹시 프랑스 대혁명 때 기독교를 대체하고자 혁명파가 주도해서 만든 "무신론적" 신흥국가종교인 "이성의 종교" (Culte de la Raison)나 로베스피에르가 심혈을 기울인 "최고존재의 종교" (Culte de l'Être suprême) 같은 것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나찌의 선동이론가들과 지지자들은 19세기 초 독일통일과 제국화 시기에 광풍을 일으킨 게르만민족주의를 선전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관, 예수관, 인간관이 고대 게르만 신화의 영웅관과 어긋나는데 불만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피해자적 수난관이라든지 수동적 구원관 등이 그렇습니다. 즉, 나찌 동조자들은 전통적 기독교가 "루저"들의 종교라고 본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전통적 기독교가 오랜 세월동안 염세적이고 저급한 유대인의 사상에 오염되어 있다고 보고, 이런 "유대"적 요소를 "정화"하고자, 나찌 버전의 기독교인 "긍정적 기독교 Positives Christentum"를 기획하고 전력 홍보했습니다. 이를 통해, 게르만적 영웅으로서의 예수를 채색하고, 게르만 제국주의를 가장 이상적인 (긍정적) 기독교가 구현된 한 형태로 홍보한 것이죠. 나찌 선전국의 설명에 따르면, 이 "긍정적 기독교"는 기독교의 일반 서사구조는 유지하되 전통적인 교리와 신조와는 별개인, 새로운 형태의 유사기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긍정적 기독교"는 당시 전통적 성서관을 공격한 고등비평 등으로 명망을 날리던 독일의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들의 지원을 받습니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시대정신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죠. (이는 독일 뿐 아니라 당시 친-나찌 행태를 보였던 서방의 자유주의 개신교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습니다. 독일에 디트리히 본회퍼만 있었던게 아닙니다).

이들은 (너무나 전통적이라 교정이 불가능해 보이는) 로마카톨릭은 억압하고, (긍정적 기독교의 이념으로 변모 가능하리라 여긴) 프로테스탄트는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해 이 나찌 버전의 이념으로 변모시킨다는 장기목표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긍정적 기독교"의 이론화와 홍보에는 히믈러와 괴벨스 등 히틀러의 최측근들이 전격 개입해 있었고, 히틀러 역시 마찬가집니다. 로마카톨릭이 대세인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또 로마카톨릭이 대세인 남독일에 기반한 나찌당의 지도자로서의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마치 자신이 친-기독교적인 듯 포장하지만, 실제로 히틀러 본인, 그의 측근들 모두는 "전통적 기독교"를 이런 식으로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기존의 썩은 "전통 기독교"를 신선한 (그러나 반쯤은 기독교적인) "이성의 종교"로 대체한다며 프랑스 대혁명 때 자코뱅들이 추구했던 목표를, 나찌는 "긍정적 기독교"로 이루려고 했던 것이죠.


/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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