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11-02-21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예수 vs 붓다 #6:{복음서}의 "오병이어" 일화는 {불경}에서 표절되었을까?
요약
{복음서}의 '오병이어' 일화가 {불경}에서 표절되었다는 주장들이 제시하는 원자료를 직접 비교해 보면서, 이 주장이 왜 설득력이 없는지를 설명한다.
순서
© 최광민, Kwangmin Choi, 2011-02-21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예수 vs 붓다 #6:{복음서}의 "오병이어" 일화는 {불경}에서 표절되었을까?
요약
{복음서}의 '오병이어' 일화가 {불경}에서 표절되었다는 주장들이 제시하는 원자료를 직접 비교해 보면서, 이 주장이 왜 설득력이 없는지를 설명한다.
순서
- 속설, 속설들
- {복음서} 네 권의 진술
- 소승/대승불경, {증일아함경} 제 20권 [声闻品] 第二十八
- 대승불경 {유마경}, [향적불품]
- 비교
- 정리: 구약성서 {열왕기하}의 엘리사의 기적담
15세기 아르메니아 복음서, - {우랑크의 다니엘 복음서} 삽화
# 속설, 속설들
기독교가 공인한 네 권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일화나 비유가 불교 측 문서에서 그 모티프를 따온 것이라는 류의 주장이 등장한 것은 약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9세기 중/후반 독일 라이프니찌 대학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Rudolf Seydel (1835 – 1892)이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선구자로 볼 수 있다.
그는 {복음서}와 {불경} 사이에 무려 50개나 되는 공통점이 있으며, {복음서}의 모티프가 {불경}에서 차용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20세기 초반,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대학의 신학자로서 예수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급진비평학파"를 주도했던 Gustaaf Adolf van den Bergh van Eysinga (1874 – 1957)는 자이델의 궤적을 따르기는 했지만, {복음서}와 {불경}의 공통모티프를 자이델의 50개에서 15개 (혹은 9개)로 축소했다. 판 덴 베르크에 이어 E.W. Hopkins는 5개로 리스트를 줄였는데 그나마도 개연성을 낮게 보았다. Richard Garbe는 직접 차용된 것은 4개라는 입장을 폈고, Jarl Carpentier는 1개, 심지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독립된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왜 공개된 텍스트를 두고서 50개에서 0개라는 큰 폭의 견해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그 이유는 위에 언급된 학자들의 주관성과 전문성에 있는 듯 하다. 자이델과 판 덴 베르크가 기본적으로 신학자로서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를, 즉 불교문서를 직접 해독할 능력이 없었던 반면, 뒤에 언급된 학자들은 산스크리트어/팔리어 및 인도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있는 자료의 수준이 달랐다.
민희식씨의 {법화경과 신약성서} 같은 류의 주장처럼, 과연 {복음서}의 '오병이어' 이야기는 {불경}에서 차용, 심지어는 표절된 것일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떤 두 텍스트를 비교할 때 텍스트 원문을 직접 읽어보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으며 사실 이 작업은 모든 분석의 가장 우선순위를 차지해야 한다. 그런데 이 속설을 열정적으로 유포하는 이들은 정작 텍스트 원문은 자세히 읽어본 적 없는 듯 싶다.
그럼 한번 직접 읽어보자.
# {복음서} 네 권의 진술
우선 두번째 복음서인 {마르코/마가 복음서}부터 읽어보도록 하자.
그 뒤 소식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의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를 지냈다.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 하고 말씀하셨다.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일행은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고는 여러 동네에서 모두 달려나와 육로로 해서 그들을 앞질러 그 곳에 갔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주셨다. 저녁 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 먹도록 농가나 근처 마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자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 어치나 사다가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나 되는가 가서 알아보아라." 하셨다. 그들이 알아보고 돌아와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을 풀밭에 떼지어 앉게 하라고 이르셨다. 군중은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모여 앉았다.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으며 먹은 사람은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그 뒤에 곧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 베싸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혼자서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르코의 복음서} 6장 29-45절
{마태 복음서}에는 '5병2어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 기적'과 소위 '7병2어' 기적이 등장한다. 우선, 예수가 빵 다섯과 물고기 둘로 5천 명 이상을 먹이고 나서도 남은 음식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찼다는 '5병2어'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세례자 요한의)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 지내고 나서, 예수께 가서 알려드렸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이 소문이 퍼지니, 무리가 여러 동네에서 몰려 나와서, 걸어서 예수를 따라왔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 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외에, 어른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서,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 한국어 새번역, {마태복음} 14장 12-22절
다음은 '오병이어' 기적 후의 사건으로 진술되는 소위 '7병2어'의 기적이다. 이 사건에서는 빵 일곱과 몇 개의 물고기로 4천 명 이상을 먹였고 남은 음식이 일곱 바구니에 가득찼다. 사실 이 사건에서는 물고기의 수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7병2어'는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절름발이와 소경과 곰배팔이와 벙어리와 그 밖의 많은 병자를 예수의 발 앞에 데려다 놓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고쳐주셨다. 그리하여 벙어리가 말을 하고 곰배팔이가 성해지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걷고 소경이 눈을 뜬 것을 군중이 보고 크게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 많은 사람들이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나와 함께 지내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참 보기에 안 되었구나.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 보내서야 되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이런 외딴 곳에서 이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떻게 구하겠습니까?" 하자 예수께서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뿐입니다." 하니까,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땅에 앉게 하시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주워모으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사천 명이나 되었다. 예수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배를 타고 마가단 지방으로 가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태오의 복음서} 15장 29-39절
다음으로는 세번째 복음서인 {루가/누가 복음서}의 진술을 보자.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모든 일을 예수께 이야기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따로 벳새다라고 하는 고을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무리가 그것을 알고서, 그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또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그런데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열두 제자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씀드렸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이 모든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을 것을 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거기에는 남자만도 약 오천 명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한 오십 명씩 떼를 지어서 앉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대로 하여, 모두 다 앉게 하였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무리 앞에 놓게 하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 한국어 새번역, {누가복음} 9장 10-17절
마지막으로 네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 16장을 보자. 이 {요한복음}은 사건의 묘사에 촛점이 맞춰진 앞의 세 복음서와는 조금 달리, '오병이어'란 기적을 통해 예수가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했는지 그의 의도가 자세히 기술된다. {요한복음}의 진술에 따르면, 이 기적은 예수 본인이 유월절/과월절에 기념되는 "생명의 빵"임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의도된 기적이었다. 즉, 예수 자신이 바로 신의 기적이란 것이다.
우선 6장 전체의 전반부를 읽어보자
그 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예수를 따라갔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기적을 보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등성이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자리잡고 앉으셨다. 유다인들의 명절인 과월절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예수께서는 큰 군중이 자기에게 몰려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것은 단지 필립보의 속을 떠보려고 하신 말씀이었고 예수께서는 하실 일을 이미 마음속에 작정하고 계셨던 것이다. 필립보는 "이 사람들에게 빵을 조금씩이라도 먹이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온다 해도 모자라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제자 중의 하나이며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아는 "여기 웬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사람들을 모두 앉혀라." 하고 분부하셨다. 마침 그 곳에는 풀이 많았는데 거기에 앉은 사람은 남자만 약 오천 명이나 되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손에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달라는 대로 나누어주시고 다시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하여 나누어주셨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난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조금도 버리지 말고 남은 조각을 다 모아들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래서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제자들이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하고 저마다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6장 1-15절
두번째 장면은 이 날 저녁 제자들은 배를 저어 가파르나움으로 이동하고, 예수는 호수 물 위를 걸어 제자들 쪽으로 온 사건이다. 이야기는 호수 건너 가파르나움에서 예수와 제자들을 쫓아온 군중들을 상대로 이어진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가서야 예수를 찾아내고 "선생님,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에게 그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들은 다시 "무슨 기적을 보여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겠습니까?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그들을 먹이셨다.'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너희를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그렇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
이 때 유다인들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이 되는가?"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내게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살릴 것이다. 예언서에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나에게로 온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이밖에는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유다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하신 말씀이다.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군거렸다. --- 한국어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6장 25-60절
자, 이것이 기독교 {복음서} 4권이 전하고 있는 '오병이어' 기적의 전말과 그 의미이다.
보통 자유주의 기독교 쪽에서는이 기적을 설명할 때 흔히 "도시락 공유 사건"이란 식의 해석을 제시한다. 이에 대한 로마카톨릭교회의 정진적 추기경의 "도시락 공유 사건"은 이렇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대표자인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서울 명동성당의 정진석 추기경은 2008년 12월 29일 서울 명동성당 집무실에서 가진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 그것은 예수님의 기도를 듣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이 열려서 저마다 품 안에 숨겨 두었던 도시락을 꺼냈고 낯선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보도되었다. “성경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 세 마리로 불어났다는 기록은 없어요.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얘기도 없어요. 그럼 예수님이 보이신 진정한 기적은 뭘까요. 다름 아닌 꼭꼭 닫혔던 사람들의 마음을 여신 거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과 도시락을 나누게 하신 거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죠.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필요한 겁니다.” --- [백성호, “나누세요. 넉넉해집니다. 그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중앙일보, 2009. 1. 2.]
판단은 각자의 몫.
그럼 이 일화가 과연 {불경}의 일화와 얼마나 유사한지, 그래서 심지어 '차용'되거나 나아가 '표절'이라도 된 것인지, 속설들이 주장하는 근거자료를 찾아 원문을 직접 확인해 보자.
# 소승/대승불경, {증일아함경} 제 20권 [聲聞品 / 声闻品] 第二十八
팔리어 경전에서 4부로 구성된 {아함경} 문서 네 권 가운데 가장 대승불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여겨지는 {증일아함경}은, 원래는 인도 설일체유부나 대중부를 통해 전승되었다고 여겨지지만 현재는 AD 4세기의 한역본만 남아있다.
{복음서}의 '오병이어' 기적담이 {증일아함경}에 등장하는 한 에피소드의 표절이라고 주장하는 속설들이 그 근거로 제시하는 해당본문을, 한역 {증일아함경}과 그 영역본을 토대로 번역해 보겠다. 인명과 지명은 한국에서 사용되는 한역명을 사용하겠다.
이 내용은 {증일아함경} 제 20권 [성문품]에 등장하는 일화로, 그 첫부분에는 해당 일화의 의도, 즉, 불법승 삼보에게 보시하고 공양하는 것을 장려하자는 취지가 기술된다. 그들은 우선 발제 장자를 계도하고, 그 다음에 욕심쟁이 난타 노파를 계도한다.
우선, 성에 사는 인색한 발제 노인을 신통력으로 계도한 성문들은, 이번에는 발제 노인의 누이인 난타 노파를 한번 계도해 보라고 빈두로 존자에게 권한다
자, 다음 장면부터가 소위 "{복음서}가 표절했다는 {불경}의 내용"이다. 한번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자.
이에 빈두로는 노파에게 붓다를 만나볼 것을 권하고, 난타 노파는 문제의 이 떡을 들고 붓다를 만나러 간다.
이 이야기는 "떡이 계속 줄지 않고 늘어났다"는 모티프를 제외하면, {복음서}의 '오병이어' 이야기와 설정, 인물, 전개, 의도 면에서 얼마나 유사한가?
# 대승불경 {유마(힐소설)경}, [香積佛品]
산스크리트어 원전은 소실되었고, 대신 티벳어 및 한역이 남아있는 {유마힐소설경 維摩詰所說經}은, 출가자가 아닌 재가신자 유마힐 (비말라키르티)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승불교 경전이다. 이 경전에서는 출가승 (비구+비구니) 중심의 '소승'불교를 비난하기 위한 의도로 재가신자 유마힐이 그 가르침이나 능력에서 오히려 출가승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화들이 여럿 소개된다.
{유마경}의 [향적불품 香積佛品第十]에는 이 주인공 유마힐 거사가 밥 시간을 걱정하는 사리불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스스로 삼매 가운데 들어 자신의 신통력으로 구현한 화신보살을 멀리 떨어진 불국토 중향국에 보내, 그곳의 붓다인 향적여래에게서 바루에 향기로운 밥을 가득 담아오게 한다.
한역본에서 번역된 영역본을 참고해 해당부분을 발췌번역하겠다.
유마는 화신보살을 중향국으로 보내어, 그곳에서 향적여래 및 보살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향적여래가 먹는 밥을 받아오게 된다. 이때 인간세계와 석가모니불과 유마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중향국의 보살들도 함께 지상에 오게 된다. 그리고 유마힐의 집에서 보살들과 바이살리의 8만 4천 명이 함께 향적여래의 밥을 나눠 먹게 된다.
이 이야기는 (1) "밥이 줄지 않았다"와 (2) "대중들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란 모티프를 제외하면, {복음서}의 '오병이어' 이야기와 설정, 인물, 전개, 의도 면에서 얼마나 유사한가?
# 비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처음에 인용한 네 권의 {복음서}들 속의 "오병이어" 일화를 읽어보자.
자, {증일아함경}에 등장하는 이 욕심쟁이 난타 노파의 이야기는 "음식이 줄지 않았다"란 점을 제외하면, {복음서}의 '오병이어' 기적담과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유사한가? {복음서}의 이야기는 {증일아함경}에서처럼 신자들에게 (1) 욕심을 버리고 예수와 그 제자들을 (2) '공양'하고 '보시'할 것을 권하고 있는가? 그 내용에 어떤 욕심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펼쳐나가는가? 그렇게 읽긴 힘들다.
{유마경}에 등장하는 향적여래가 먹던 중향국의 밥 이야기는 {복음서} 이야기와 내용, 구성, 등장인물, 전개, 의도에서 또 얼마나 유사한가? {유마경}의 교훈은 {복음서}의 교훈과 동일하거나 유사한가?
속설에서처럼, 과연 두 이야기는 너무나 똑같아서 {복음서}의 저자가 {증일아함경}이나 {유마경}을 표절한 것이 너무도 자명한가? 혹은, 예수가 인도에가서 {증일아함경}이나 {유마경}을 연구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까?
# 정리: 구약성서 {열왕기하}의 엘리사의 기적담
상기 주장을 펼치는 민희식씨 등의 작가들이 모르는 듯 한데, 사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모티프 및 플롯과 유사한 내용은 다양한 {불경}들이 아니라 {구약성서} 가운데 역사서로 분류되는 {열왕기서}의 하편 4장에 등장하는 예언자 엘리사의 기적담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내용은 {복음서}의 그 기적담과 거의 동일하다. 단, {구약성서}의 엘리사가 "음식이 먹고도 남을 것"이란 '신의 말'을 전한 것이라면, 예수의 경우는 신(의 아들)인 그 자신이 기적의 주체다.
그럼 도대체 {열왕기}란 문서는 언제 작성된 것인가? 학자들은 이 문서가 BC 7세기 무렵에 초벌이 나와 BC 6세기에 최종본이 나왔을 것으로 보는데 보편적으로 동의한다.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의 입멸 연도를 BC 483년으로 보고, 그의 입멸 직후 불경의 1차결집이 있었고 초기 경전인 {아함경}이 이때 결집되었다 치더라도 {열왕기}의 작성시점 보다 늦다. 초기 대승불경인 {유마경}의 경우 성립시기를 BC 1-2세기로 보니 비교하기에도 너무 늦다. 그렇다고 {불경}의 이 모티프는 "유대교를 공부한 불교도에 의해 {열왕기}에서 표절되었다"고 주장할 셈인가?
{복음서}의 이 일화가 '차용' 혹은 '표절'되었다 치더라도, (민희식씨 주장처럼) 예수 혹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서북인도까지 가서 열심히 불경을 연구하여, 그나마도 {열왕기하}의 엘리사 이야기보다도 비슷하지 않은 불경의 이야기를 베껴올 이유는 없는 것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그럼 이 일화가 과연 {불경}의 일화와 얼마나 유사한지, 그래서 심지어 '차용'되거나 나아가 '표절'이라도 된 것인지, 속설들이 주장하는 근거자료를 찾아 원문을 직접 확인해 보자.
# 소승/대승불경, {증일아함경} 제 20권 [聲聞品 / 声闻品] 第二十八
팔리어 경전에서 4부로 구성된 {아함경} 문서 네 권 가운데 가장 대승불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여겨지는 {증일아함경}은, 원래는 인도 설일체유부나 대중부를 통해 전승되었다고 여겨지지만 현재는 AD 4세기의 한역본만 남아있다.
{복음서}의 '오병이어' 기적담이 {증일아함경}에 등장하는 한 에피소드의 표절이라고 주장하는 속설들이 그 근거로 제시하는 해당본문을, 한역 {증일아함경}과 그 영역본을 토대로 번역해 보겠다. 인명과 지명은 한국에서 사용되는 한역명을 사용하겠다.
이 내용은 {증일아함경} 제 20권 [성문품]에 등장하는 일화로, 그 첫부분에는 해당 일화의 의도, 즉, 불법승 삼보에게 보시하고 공양하는 것을 장려하자는 취지가 기술된다. 그들은 우선 발제 장자를 계도하고, 그 다음에 욕심쟁이 난타 노파를 계도한다.
(一) 闻如是。一时。佛在罗阅城迦兰陀竹园所。与大比丘众五百人俱。是时。四大声闻集在一处。而作是说。我 等共观此罗阅城中。谁有不供奉佛.法.众作功德者。由来无信者。当劝令信如来.法.僧。尊者大目揵连.尊者迦叶.尊者阿那律.尊者宾头卢。尔时。有长者名 跋提。饶财多宝。不可称计。金.银.珍宝.砗磲.玛瑙.真珠.虎魄.象马.车乘.奴婢.仆从。皆悉备具。又复悭贪不肯布施。于佛.法.众无有毫厘之善。无 有笃信。故福已尽。更不造新。恒怀邪见。无施.无福.亦无受者。亦无今世.后世.善恶之报。亦无父母及得阿罗汉者。亦复无有而取证者。彼长者有七重门。门 门有守人。不得使乞者诣门。复以铁笼络覆中庭中。恐有飞鸟来至庭中。长者有姊名难陀。亦复悭贪不肯惠施。不种功德之本。故者已灭。更不造新。亦怀邪见。无 施.无福.亦无受者。亦无今世.后世.善恶之报。亦无父母.得阿罗汉。亦复无有而取证者。难陀门户亦有七重。亦有守门人。不令有来乞者。亦复以铁笼覆上。 不使飞鸟来入家中。我等今日可使难陀母笃信佛.法.众。尔时。拔提长者清旦食饼。是时。尊者阿那律到时。着衣持鉢。便从长者舍地中踊出。舒鉢向长者。是 时。长者极怀愁忧。即授少许饼与阿那律。是时。阿那律得饼已。还诣所在。是时。长者便兴瞋恚。语守门人言。我有教敕。无令有人入门内。何故使人来入。时。 守门者报曰。门閤牢固。不知此道士为从何来。
이 같이 들었다: 한번은 붓다께서 나열성 (羅閱城) 가란다죽원 (迦蘭陀竹園)에서 500인의 큰 스님들과 함께 계신 적이 있었다. 이때 네 성문들이 모여 이야기 했다: "이 나열성에서 누가 붓다-불법-승가를 받들고 공양하지 않아 공덕을 쌓지 못하고 있는지 살펴보세.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는 자에게 권유하여 그가 불-법-승가 (삼보)와 대목건련 존자와 가섭 존자, 아나율 존자, 빈두로 존자를 따르게 하세" [중략]....
우선, 성에 사는 인색한 발제 노인을 신통력으로 계도한 성문들은, 이번에는 발제 노인의 누이인 난타 노파를 한번 계도해 보라고 빈두로 존자에게 권한다
余大声闻尊者大迦叶.尊者阿那律。语尊者宾头卢言。我等已度跋提长者。汝今可往降彼老母难陀。宾头卢报曰。此事大 佳。尔时。
"우리들이 발제 노인을 제도하였소. 이제는 그대가 난다 노파에게 가 보시오."라고 대가섭 (마하카이아파) 존자와 아나율 존자가 빈두로 존자에게 말했다. 이에 " 좋습니다."라고 빈두로 존자가 대답하였다.
老母难陀躬作酥饼。尔时。尊者宾头卢到时。着衣持鉢。入罗阅城乞食。渐渐至老母难陀舍。从地中踊出。舒手持鉢。从老母难陀乞食。是 时。老母见宾 头卢已。极怀瞋恚。并作是恶言。比丘当知。设汝眼脱者。我终不乞汝食也。是时。宾头卢即入三昧。使双眼脱出。是时。母难陀倍复瞋恚。复作恶言。正使沙门空 中倒悬者。终不与汝食。是时。尊者宾头卢复以三昧力。在空中倒悬。时。母难陀倍复瞋恚而作恶言。正使沙门举身烟出者。我终不与汝食是时。宾头卢复以三昧力 举身出烟。是时。老母见已。倍复恚怒。而作是语。正使沙门举身燃者。我终不与汝食也。是时。宾头卢即以三昧。使身体尽燃。老母见已。复作是语。正使沙门举 身出水者。我终不与汝食也。时。宾头卢复以三昧力。便举身皆出水。老母见已。复作是语。正使沙门在我前死者。我终不与汝食也。是时。尊者宾头卢即入灭尽三 昧。无出入息。在老母前死。时。老母以不见出入息。即怀恐怖。衣毛皆竖。而作是语。此沙门释种子。多所识知。国王所敬。设闻在我家死者。必遭官事。恐不免 济。并作是语。沙门还活者。我当与沙门食。是时。宾头卢即从三昧起。
그 때 난타 노파는 떡을 만들고 있었는데, 빈두로 존자는 가사를 입고 발우를 챙기고 성에 들어가 걸식하며 난타의 집으로 가서는 땅에서 솟아나와 발우를 내밀어 밥을 달라고 했다.
노파는 빈두로 존자에게 벌컥 화내어 욕하면서, "스님 눈알이 빠지더라도 밥 안줄테니 그리 아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빈두로 존재는 삼매 상태에서 두 눈을 뽑아버렸다.
노파는 더 화가 나서, "당신이 허공에 떠올라 매달린데도 밥을 안줄테요"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로자 빈두로 존자는 삼매상태에서 허공에 매달렸다.
노파는 더 화가나서, "당신 몸에 연기가 나도 밥은 안 줄 테요"라고 했다. 그러자 빈두로 존자는 삼매 가운데 온 몸에 연기를 내었다.
노파는 더 화가 나서, "당신 몸이 다 불타 재가 되더라도 밥은 주지 않을 테요"라고 했다. 그러자 빈두로 존자는 삼매 가운데서 온 몸을 불살랐다.
그것을 본 노파는 다시, "스님 몸에서 물이 나오더라도, 결코 밥을 주지 않을테요."라고 했다. 그저라 빈두로 존자는 다시 삼매 가운데 온 몸에서 물을 뿜어냈다.
노파는 이를 보고는, "당신이 내 앞에서 죽더라도, 결코 밥을 주지 않을테요"라고 했다. 그 때 존자 빈두로는 곧 깊은 삼매 (滅盡三昧)에 들어가더니 숨이 멈추고 그 자리에서 죽은 상태가 되었다.
숨이 끊어진 것을 본 노파는 두려움에 떨며 "많은 사람들이 석가 집안 사람인 이 스님을 알고, 왕도 존경하는 승려인데, 그가 우리 집에서 죽었다고 알려지면, 관헌에게 붙들려 죄를 추궁당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스님이 살아난데면 밥을 줄 수도 있는데"라고 말했다. 그러자 빈두로 존자가 즉시 삼매에서 깨어났다.
자, 다음 장면부터가 소위 "{복음서}가 표절했다는 {불경}의 내용"이다. 한번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자.
时。母难陀复作是念。此饼极大。当更作小者与之。时。老母取少许面作饼。饼遂长大。老 母见已。复作是念。此饼极大。当更作小者。然饼遂大。当取先前作者持与之。便前取之。然复诸饼皆共相连。时。母难陀语宾头卢曰。比丘。须食者便自取。何故 相娆乃尔。宾头卢报曰。
이때 난타 노파는 "이 떡은 좀 크니, 작은 걸로 만들어 줘야겠다"하고 생각하며, 밀가루 반죽에서 조금만 떼어내서 작은 떡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작은 떡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 떡이 너무 크니 다시 작은 걸 만들어야겠다"라고 노파는 생각했지만, 떡은 더 커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까 만든 걸 다시 가져다 줘야지"라고 생각하며 지난번 떡을 집었는데, 이번엔 모든 떡이 한데 다 붙어있는 것이었다.노파는, "스님, 떡을 먹고 싶으면 알아서 집어먹을 일이지, 왜 날 이렇게 귀찮게 하시오"라고 빈두로 존자에게 말했다. / 번역: 최광민
이에 빈두로는 노파에게 붓다를 만나볼 것을 권하고, 난타 노파는 문제의 이 떡을 들고 붓다를 만나러 간다.
尔时。宾头卢白世尊曰。此母难陀是跋提 长者姊。悭贪独食不肯施人。唯愿世尊为说笃信之法。使得开解。
빈두로 존자는 세존께 "이 난다 노파는 발제 노인의 누이입니다.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 혼자서만 먹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길 싫어합니다. 세존께서는 이 분을 위해 독실히 믿는 법을 가르쳐 깨닫게 해주소서"라고 청했다.
尔时。世尊告母难陀。汝今持饼施与如来及与比丘僧。是时。母难陀即以奉上如来及余比丘僧。故有遗余饼在。母 难陀白世尊言。故有残饼。世尊曰。更饭佛.比丘僧。母难陀受佛教令。复持此饼饭佛及比丘僧。然后复故有饼在。是时。世尊告母难陀。汝今当持此饼与比丘尼 众.优婆塞.优婆夷众。然故有饼在。世尊告曰。可持此饼施与诸贫穷者。然故有饼在。世尊告曰。可持此饼弃于净地。若着极清净水中。所以然者。我终不见沙 门.婆罗门.天及人民能消此饼。除如来.至真.等正觉。对曰。如是。世尊。是时。母难陀即以此饼。舍着净水中。即时火焰起。母难陀见已。寻怀恐惧。往至世 尊所。头面礼足。在一面坐。是时。世尊渐与说法。所谓论者。施论.戒论.生天之论。欲不净想。漏为秽污。出家为要。尔时。世尊以见母难陀心意开解。诸佛世 尊常所说法。苦.习.尽.道。尔时世尊尽与母难陀说之。
세존이 노파에게 "그대는 지금 이 떡을 여래와 비구들에게 공양하라."고 명하자, 난타 노파는 떡을 여래와 승려들에게 공양했다. 그래도 떡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아직 떡이 남습니다"라고 노파가 말하자, 세존은 "붓다와 승려들에게 공양하라"라고 했다. 명에 따라 붓다와 비구에게 공양한 후에도 떡이 남자, 세존은 다시 "그대는 다시 이 떡을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에도 공양하라"라고 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떡은 남았다. 세존은 다시, "이제 이 떡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고 했다. 그럼에도 떡은 여전히 남았다.
이에 세존은, "이 떡을 깨끗한 땅이나 물에 버려라. 여래, 지진, 등정각 이외에는 어떤 승려나 바라문, 하늘과 사람 가운데 이 떡을 능히 소화할 자를 나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난타 노파가 이 떡을 청정한 물에 버리자 불꽃이 일었다. 이를 보고 두려워진 노파는 세존께 고개를 숙이고 발에 예를 올린 후 한쪽에 가서 앉았다.
세존은 이제 노파를 위해 설법하며, 보시와 계와 천상에서 탄생함에 관해 가르쳤으며, 또 욕심의 더러움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이 행복임을 가르쳤다. 이제 노파가 이해하기 시작한 것을 보고, 세존은 모든 붓다가 늘 가르친 고집멸도의 법을 난타 노파에게 펼치셨다. / 번역: 최광민
이 이야기는 "떡이 계속 줄지 않고 늘어났다"는 모티프를 제외하면, {복음서}의 '오병이어' 이야기와 설정, 인물, 전개, 의도 면에서 얼마나 유사한가?
# 대승불경 {유마(힐소설)경}, [香積佛品]
산스크리트어 원전은 소실되었고, 대신 티벳어 및 한역이 남아있는 {유마힐소설경 維摩詰所說經}은, 출가자가 아닌 재가신자 유마힐 (비말라키르티)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승불교 경전이다. 이 경전에서는 출가승 (비구+비구니) 중심의 '소승'불교를 비난하기 위한 의도로 재가신자 유마힐이 그 가르침이나 능력에서 오히려 출가승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화들이 여럿 소개된다.
{유마경}의 [향적불품 香積佛品第十]에는 이 주인공 유마힐 거사가 밥 시간을 걱정하는 사리불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스스로 삼매 가운데 들어 자신의 신통력으로 구현한 화신보살을 멀리 떨어진 불국토 중향국에 보내, 그곳의 붓다인 향적여래에게서 바루에 향기로운 밥을 가득 담아오게 한다.
한역본에서 번역된 영역본을 참고해 해당부분을 발췌번역하겠다.
於是舍利弗心念:日時欲至,此諸菩薩當於何食?時維摩詰,知其意而語言:「佛說八解脫,仁者受行,豈雜欲食而聞法乎?若欲食者,且待須臾,當令汝得未曾有食。」
이때 사리불은 ‘대중들이 공양할 때가 되가는데 어디서 밥을 가져다 이 많은 보살들을 먹일 것인가?’ 라고 생각했다., 유마힐이 그의 생각을 읽고 말하길, "붓다께서 여덟 해탈을 말씀하신 것을 스님이 받들거늘, 어찌하여 식사하는 일에 마음을 뺏기십니까. 잠시 기다리시면 처음 보는 음식을 드시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時維摩詰即入三昧,以神通力,示諸大 眾,上方界分過四十二恆河沙佛土,有國名眾香,佛號香積,今現在,其國香氣,比於十方諸佛世界人天之香,最為第一。彼土無有聲聞辟支佛名,唯有清淨大菩薩 眾,佛為說法,其界一切,皆以香作樓閣,經行香地,苑園皆香,其食香氣,周流十方無量世界。時彼佛與諸菩薩,方共坐食,有諸天子皆號香嚴,悉發阿耨多羅三 藐三菩提心,供養彼佛及諸菩薩,此諸大眾莫不目見。
유마힐이 곧 삼매에 들어 그의 신통력으로 다음을 여러 대중들에게 보여 주었다: 위로 42항하사 정도 많은 불국토를 지나면 중향국(衆香國)이란 나라가 있는데, 향적(香積)란 붓다가 그곳에 거주하며 그 나라의 향기는 시방 여러 세계에 있는 천계와 인간계의 그 어느 향기보다 뛰어나다. 그 세계에는 성문이나 벽지불이 따로 없고 청정보살 대중만 있어 붓다는 그들에게 법문을 가르친다. 온갖 것이 향으로 되어 사방이 온통 향기로우며, 누각도 향이요, 땅도 향이며, 동산과 땅이 모두 향기요, 음식의 향기는 어디나 퍼져나간다....마침 향적붓다가 보살들과 함께 식사하던 중이었고 향엄이라 불리는 천인들이 아뇩다라삼먁삽보리심을 내어 붓다와 보살들을 공양하는 것을 지상에 있던 대중들이 다 볼 수 있었다.
時維摩詰問眾菩薩言:「諸仁者!誰能致彼佛飯?」以文殊師利威神力故,咸皆默然。
유마힐이 여러 보살들에게, “누가 저 붓다의 밥을 얻어오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문수사리의 위신력 때문에 감히 한 보살도 대답하지 못했다. ...[중략]...
유마는 화신보살을 중향국으로 보내어, 그곳에서 향적여래 및 보살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향적여래가 먹는 밥을 받아오게 된다. 이때 인간세계와 석가모니불과 유마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중향국의 보살들도 함께 지상에 오게 된다. 그리고 유마힐의 집에서 보살들과 바이살리의 8만 4천 명이 함께 향적여래의 밥을 나눠 먹게 된다.
於是香積如來,以眾香缽,盛滿香飯,與 化菩薩。
향적여래가 중향국의 발우에 향기나는 밥을 가득 담아 화신보살에게 주었다.
時彼九百萬菩薩俱發聲言:「我欲詣娑婆世界供養釋迦牟尼佛,并欲見維摩詰等諸菩薩眾。」
그때 중향국 9백만 보살들이 동시에, “우리도 사바세계에 가서 석가모니 붓다께 공양하고, 유마힐 및 여러 보살을 만나고자 합니다"라고 청하였다.
[중략]
時化菩薩既受缽飯,與彼九百萬菩薩俱,承佛威神,及維摩詰力,於彼世界,忽然不現,須臾之間,至維摩詰舍。時維摩詰即化作九百萬師子之座,嚴好如前,諸菩薩皆坐其上。
그 때 화신보살이 발우에 담은 밥을 받아 들고, 9백만 보살과 함께 붓다의 위력과 유마힐의 신통력으로 저 세계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잠시 후 유마힐의 집에 이르렀다.
時化菩薩 以滿缽香飯與維摩詰,飯香普薰毗耶離城,及三千大千世界。
화신보살이 발우에 가득 담은 향기로운 밥을 유마힐에게 주니 향기가 바이샬리성과 삼천대천세계에 널리 퍼졌다.
時毗耶離婆羅門、居士等,聞是香氣,身意快然,歎未曾有!於是長者主月蓋,從八萬四千人。來入維摩詰舍,見其室中菩薩甚多,諸師子座,高廣嚴好,皆大歡喜,禮眾菩薩及大弟子,卻住一面。諸地神虛空神及欲色界諸天,聞此香氣,亦皆來入維摩詰舍。
그 때 바이샬리의 바라문과 거사들은 그 향기에 몸과 마음이 상쾌해져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감탄하였다.이에 장자의 대표인 월개가 8만 4천인과 함께 유마힐 집에 오니, 그 방에 있던 많은 보살들과 크고 장엄한 사자좌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보살들과 큰 스님들에게 예배하고 자리를 잡았고, 모든 땅과 하늘의 신들과 욕계, 색계의 모든 천인들이 이 향기를 맡고 모두 유마힐의 집에 들어 왔다.
時維摩詰,語舍利弗等諸大聲聞:「仁者可食,如來甘露味飯,大悲所熏,無以限意食之,使不銷也。有異聲聞念是飯少,而此大眾人人當食?」
유마힐은 사리불과 여러 성문들에게, “여러분, 지금 식사하십시오. 이것은 여래의 감로반이며, 대자비로 익힌 것으로 천하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먹으면 소화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眾中有人質疑:「這麼一點飯,怎麼夠這許多人吃呢?」 化菩薩曰:「勿以 聲聞小德小智,稱量如來無量福慧!四海有竭,此飯無盡!使一切人食,摶若須彌,乃至一劫,猶不能盡,所以者何?無盡戒、定、智慧、解脫、解脫知見,功德具 足者,所食之餘,終不可盡,」。
사람들이 속으로 ‘이 많은 사람들이 밥 한 그릇으로 어떻게 먹으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니, 화신보살이 이렇게 말하였다.“여러분의 작은 덕과 작은 지혜로 여래의 무량한 복덕, 지혜를 측량하지 마시지요. 바다는 마르더라도, 이 밥은 끝이 없습니다. 설사 이 모든 사람들이 이 밥을 수미산처럼 뭉쳐 일겁 동안을 먹더라도 이 밥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밥은 끝없는 계, 정, 지혜, 해탈, 해탈지견의 공덕이 구족한 이가 먹고 남은 밥은 영원히 다하지 않습니다.”
於是缽飯悉飽眾會,猶故不儩。其諸菩薩聲聞天人,食此飯者,身安快樂,譬如一切樂莊嚴國諸菩薩也,又諸毛孔皆出妙香,亦如眾 香國土諸樹之香
발우의 밥이 모든 대중들의 배를 부르게 하고도 다하지 아니하니, 여러 보살, 성문, 천인들도 이 밥을 먹은 이의 몸은 일체락장엄국에 있는 보살들과 같이 쾌적했고, 또 모공에서 스며나오는 향기는 중향국 나무에서 나는 향기 같았다
이 이야기는 (1) "밥이 줄지 않았다"와 (2) "대중들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란 모티프를 제외하면, {복음서}의 '오병이어' 이야기와 설정, 인물, 전개, 의도 면에서 얼마나 유사한가?
# 비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처음에 인용한 네 권의 {복음서}들 속의 "오병이어" 일화를 읽어보자.
자, {증일아함경}에 등장하는 이 욕심쟁이 난타 노파의 이야기는 "음식이 줄지 않았다"란 점을 제외하면, {복음서}의 '오병이어' 기적담과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유사한가? {복음서}의 이야기는 {증일아함경}에서처럼 신자들에게 (1) 욕심을 버리고 예수와 그 제자들을 (2) '공양'하고 '보시'할 것을 권하고 있는가? 그 내용에 어떤 욕심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펼쳐나가는가? 그렇게 읽긴 힘들다.
{유마경}에 등장하는 향적여래가 먹던 중향국의 밥 이야기는 {복음서} 이야기와 내용, 구성, 등장인물, 전개, 의도에서 또 얼마나 유사한가? {유마경}의 교훈은 {복음서}의 교훈과 동일하거나 유사한가?
속설에서처럼, 과연 두 이야기는 너무나 똑같아서 {복음서}의 저자가 {증일아함경}이나 {유마경}을 표절한 것이 너무도 자명한가? 혹은, 예수가 인도에가서 {증일아함경}이나 {유마경}을 연구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까?
# 정리: 구약성서 {열왕기하}의 엘리사의 기적담
상기 주장을 펼치는 민희식씨 등의 작가들이 모르는 듯 한데, 사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모티프 및 플롯과 유사한 내용은 다양한 {불경}들이 아니라 {구약성서} 가운데 역사서로 분류되는 {열왕기서}의 하편 4장에 등장하는 예언자 엘리사의 기적담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내용은 {복음서}의 그 기적담과 거의 동일하다. 단, {구약성서}의 엘리사가 "음식이 먹고도 남을 것"이란 '신의 말'을 전한 것이라면, 예수의 경우는 신(의 아들)인 그 자신이 기적의 주체다.
....엘리사가 길갈로 돌아왔다. 그 곳은 엘리사가 예언자 수련생들을 데리고 사는 곳이었다. 마침 그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엘리사가 한 종에게, 큰 솥을 걸어 놓고 예언자 수련생들이 먹을 국을 끓이라고 하였다. 한 사람이 나물을 캐려고 들에 나갔다가 들포도덩굴을 발견하고서, 그 덩굴을 뜯어, 옷에 가득 담아 가지고 돌아와서,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채로 국솥에 썰어 넣었다. 그들이 각자 국을 떠다 먹으려고 맛을 보다가, 깜짝 놀라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며, 그 솥에 사람을 죽게 하는 독이 들어 있다고 외쳤다. 그래서 그들이 그 국을 먹지 못하고 있는데, 엘리사가 밀가루를 가져 오라고 하여, 그 밀가루를 솥에 뿌린 뒤에, 이제는 먹어도 되니 사람들에게 떠다 주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니 정말로 솥 안에는 독이 전혀 없었다.
어떤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 왔다. 그런데 맨 먼저 거둔 보리로 만든 보리빵 스무 덩이와, 자루에 가득 담은 햇곡식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지고 왔다. 엘리사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라고 하였더니, 그의 시종은 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그것을 어떻게 내놓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엘리사가 말하였다.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그것을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으니, 주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 --- 한국어 새번역, {열왕기하} 4장
그럼 도대체 {열왕기}란 문서는 언제 작성된 것인가? 학자들은 이 문서가 BC 7세기 무렵에 초벌이 나와 BC 6세기에 최종본이 나왔을 것으로 보는데 보편적으로 동의한다.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의 입멸 연도를 BC 483년으로 보고, 그의 입멸 직후 불경의 1차결집이 있었고 초기 경전인 {아함경}이 이때 결집되었다 치더라도 {열왕기}의 작성시점 보다 늦다. 초기 대승불경인 {유마경}의 경우 성립시기를 BC 1-2세기로 보니 비교하기에도 너무 늦다. 그렇다고 {불경}의 이 모티프는 "유대교를 공부한 불교도에 의해 {열왕기}에서 표절되었다"고 주장할 셈인가?
{복음서}의 이 일화가 '차용' 혹은 '표절'되었다 치더라도, (민희식씨 주장처럼) 예수 혹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서북인도까지 가서 열심히 불경을 연구하여, 그나마도 {열왕기하}의 엘리사 이야기보다도 비슷하지 않은 불경의 이야기를 베껴올 이유는 없는 것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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