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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11-03-12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예수 vs. 붓다 #3: 예수의 [탕자의 비유]는 {법화경}에서 차용된 것일까?
요약
예수의 [탕자의 비유]가 대승불교경전인 {법화경}의 [신해품 제3]에서 차용 혹은 표절되었다고 주장하는 불문학자이자 불교저술가인 민희식씨 등의 주장을, 산스크리트에서 번역된 {법화경} 영역본/한문본 및 {복음서} 전문과의 비교를 통해 그 타당성을 점검해 본다.
순서
© 최광민, Kwangmin Choi, 2011-03-12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예수 vs. 붓다 #3: 예수의 [탕자의 비유]는 {법화경}에서 차용된 것일까?
요약
예수의 [탕자의 비유]가 대승불교경전인 {법화경}의 [신해품 제3]에서 차용 혹은 표절되었다고 주장하는 불문학자이자 불교저술가인 민희식씨 등의 주장을, 산스크리트에서 번역된 {법화경} 영역본/한문본 및 {복음서} 전문과의 비교를 통해 그 타당성을 점검해 본다.
순서
- 어떤 주장: {법화경과 예수} (조병선,춘추각 1987)
- 예수, [탕자蕩子의 비유]
- {법화경 妙法蓮華經}, [장자長者/궁자窮子의 비유]
- 비교
- 맺음말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経), 12세기 일본
§ 어떤 주장: {법화경과 예수} (조병선)
오래 전 어떤 이의 추천으로 흥미롭게 읽었던 {법화경과 예수}(조병선, 춘추각, 1987)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가르침의 원류가 대승불경인 {법화경}에서 인용/표절/차용된 것이란 주장을 펼치는 책들 가운데 하나다.
{법화경과 신약성서} 등의 책을 통해 유사한 주장을 오랫동안 펼쳐온 불문학자 민희식씨와 (저자) 조병선씨는 책 속에서 아래와 같은 대담을 나눈다.
인용해본다.
(전략)조(병선) : 그런데, 예수님이 인도에 유학가셔서 불교수행을 하실 때 불경(佛經)은 어느 정도까지 읽으셨는지요?
민(희식) : 권대승경(權大乘經)을 통달하신 다음 실대승경(實大乘經)인 법화경(法華經)까지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법화경의 7가지 비유가 신약성서에 그대로 나오고 있습니다. 탕아 이야기라든가,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야기, .... 그래서 신약성서에 법화경을 인용한 부분은 너무나 많습니다.조(병선) : 예수님께서는 내증(內證)으로는 법화경을 숭배하며 인용까지 하면서, 외용(外用)으로는 마치 스스로 새로운 진실이라도 깨달은 양 그 명칭만을 달리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탄(悲嘆)한 일이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법문(法門)을 훔쳐다 자종(自宗)의 극리(極理)로 삼는다는 것은 비유컨대, 나그네가 주인행세를 하는 비유와 다를 바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후략) --- 조병선, {법화경과 예수}, p.21
혹은 불교계 금강신문이 2007년 {불교 知性의 대화}란 제호로 연재한 기획대담기사 가운데는 당시 한양대 불문과 석좌교수이던 민희식 교수와 서울대 종교학과의 불교학자 윤원철 교수의 대담이 등장하는데, 이때 윤원철 교수는 민희식씨의 {법화경과 신약성서}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기사링크: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35)
"최근에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면서 두 종교 사이의 관련성을 치밀하게 밝혀 낸 《법화경과 신약성서》 증보판을 내놓으셨습니다. 불문학을 전공하신 대학자이신데, 불교와 기독교를 공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 윤원철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민희식씨의 "연구"가 과연 학자의 눈으로 볼 때 "치밀"한가? 윤원철씨는 민희식씨 스스로 "(꽤) 완벽"하다고 자평하는 {법화경과 신약성서}의 중요한 축으로 등장하는 19/20세기 발 니콜라스 노토비치의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소위 {이사전})이나, 20세기 초 미국 중서부에서 입신상태의 채널링으로 작성된 {보병궁 복음서}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는 민희식씨가 펼치는 주장의 주요 근거가 되는 두 20세기 발 문서들을 진서로 간주하는 것일까?
아무튼 흥미로운 주장이다. 그러나 그다지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이런 류의 주장이 등장한 것은 약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9세기 중/후반 독일 라이프니찌 대학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Rudolf Seydel (1835 – 1892)이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선구자로 볼 수 있다. 그는 {복음서}와 {불경} 사이에 무려 50개나 되는 공통점이 있으며, {복음서}의 모티프가 {불경}에서 차용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20세기 초반,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대학의 신학자로서 예수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급진비평학파"를 주도했던 Gustaaf Adolf van den Bergh van Eysinga (1874 – 1957)는 자이델의 궤적을 따르기는 했지만, {복음서}와 {불경}의 공통모티프를 자이델의 50개에서 15개 (혹은 9개)로 축소했다. 판 덴 베르크에 이어 E.W. Hopkins는 5개로 리스트를 줄였는데 그나마도 개연성을 낮게 보았다. Richard Garbe는 직접 차용된 것은 4개 ('시메온', '광야에서의 시험' '물 위를 걸은 베드로', 오병이어 기적')라는 입장을 폈고, Jarl Carpentier는 1개, 심지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독립된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왜 공개된 텍스트를 두고서 50개에서 0개라는 큰 폭의 견해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그 이유는 위에 언급된 학자들의 주관성과 전문성에 있는 듯 하다. 자이델과 판 덴 베르크가 기본적으로 신학자로서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를, 즉 불교문서를 직접 해독할 능력이 없었던 반면, 뒤에 언급된 학자들은 산스크리트어 및 인도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있는 자료의 수준이 달랐다.
참고로, 위에 인용된 대담에 언급된 {법화경}의 일곱가지 비유 (=법화칠유(法華七喩)와 간략한 요약은 아래와 같다.
- [삼계화택(三界火宅)] (비유품 제2)
- 집에 불이 난 줄도 모르고 노는 철없는 아이들을 보고, 아버지가 양/사슴/소가 끄는 세 수레가 문 밖에 있다고 말해 방편을 써서 아이들을 구해내는 이야기. 그 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문 밖으로 나왔으나 세 수레 대신 대백우차(大白牛車)가 있었다.
- [장자궁자(長者窮者)] (신해품 제3)
- 이 글에서 다루겠음
- [삼초이목(三草二木)] (약초유품 제 5)
-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는 고루 넓게 사방의 어디에나 내리지만, 비를 맞는 숲 속의 초목의 성장패턴은 제각각이다.
- [화성보처(化城寶處)] (화성유품 제7)
- 먼길을 가느라 극도로 지친 대중들에게 한 도사가 노상에 있는 하나의 성을 변화시켜 사람들이 그 안에서 피로를 풀게 한 후, 다시 성을 없애고 진실을 설해 준다. 방편의 중요성
- [빈인계주(貧人繫珠)] (오백제자수기품 제8)
- 한 친구가 술에 떨어져 자고 있는 자신의 가난한 친구에게 구슬을 슬쩍 넣어 주었지만, 친구는 자신이 구슬을 지닌줄도 모르고 고생고생을 하다가, 나중에서야 구슬을 그동안 지니고 있음을 알게된다.
- [계중명주(契中明珠)] (안락행품 제14)
- 전륜성왕(轉輪王)은 부하가 전공을 세웠을 때 그 부하에게 땅이나 보물은 줄지언정 자신의 상투속에 있는 구슬은 주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구슬은 하나 뿐으로 오직 자기 후계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양의병자(良醫病子)] (여래수량품 제16)
- 의사인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 아이들이 독약을 잘못 마셨는데, 아버지가 집에 와서 해독약을 주었으나 아이들은 의사인 아버지만 믿고 그 약을 먹지 않았다. 아버지는 길을 떠나며 "아버지가 죽었다"란 거짓말이 아이들 귀에 들어가게 했고, 그제서야 아이들이 해독약을 먹어 병을 낫는다.
과연 이 {법화경}의 "7가지 비유"가 민희식씨의 말처럼 {신약성서}에 "그대로" 나올까? 내가 과문한 탓인지 전혀 그래보이지 않는다.
위에 언급된 학자들의 분분한 해석은 미뤄두고, 대신 직접 두 문서를 들여다 본 후 (조병선씨와 민희식씨가 주장처럼) 한 문서(의 모티프)가 다른 문서(의 모티프)를 "인용", 차용, 심지어 "훔친" 것인지 직접 확인해 보도록 하자.
{법화경}과 {복음서}의 전승 혹은 문서화 시점에 대한 분분한 가설들은 여기서 접어두겠다. 이런 류의 논증은 종종 "시간 상으로 뒤에 등장한 문서가 앞에 등장한 문서를 베낀 것이다"라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단정적인 결론으로 나아가기 쉽다. 시간적 선후관계에서 흔히 보이는 피상적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해석하려는 대표적인 "원인소급의 오류패턴" (post hoc ergo propter hoc)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AD 1-2세기에 {법화경}과 {복음서}가 각각 문서로서 공존하고 있었다고 일단 가정한 후, 두 문서의 의도/구성/전개의 유사도에 대해서만 비교해 보겠다.
조병선씨의 대담자인 불문학자이자 불교저술가 민희식씨는 1987년 불교 조계종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僧伽/승가}를 통해 발표한 {불교기록에 나타난 예수의 생애}에 (민희식씨가 예수에 관해 정확한 "불교계통 연대기"로 간주하는 니콜라스 노토비치의 {이사전}의 내용과 {법화경}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섞어서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물론 노토비치의 {이사전}에는 탕자의 비유나 {법화경}에 대한 진술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가 여러 해를 외국에 있다가 돌아왔을때 이스라엘 사람들과 자기 집안 친척 되는 사람들은 그에게 냉담했다. 그래서 예수는 법화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실감하고 탕아의 비유를 법화경의 내용보다 알기 쉽게 간추린다. 성경에 나오는 탕아의 비유는 그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 민희식, {불교기록에 나타난 예수의 생애}, 1987년
과연 그럴까?
§ 예수, [탕자蕩子의 비유]
우선, 내용이 짧은 {복음서}의 [탕자의 비유]를 읽어본다. 예수의 이 비유에서 중요한 키워드들을 붉은색으로 하이라이트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또 어떤 여자에게 은전 열 닢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닢을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져볼 것이다. 그러다가 돈을 찾게 되면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 공동번역, {루가 복음서} 15장
§. {법화경 妙法蓮華經 SADDHARMA-PUNDARÎKA}, [장자長者/궁자窮子의 비유]
산스크리트어서 번역된 한역본, 산스크리트어에서 번역된 영역본 (H. Kern (1884), Sacred Books of the East, Vol XXI.) 그리고 둘을 참조한 한국어 중역을 통해 읽어보자. [장자/궁자의 비유]는 네번째 장인 {신해품信解品/Disposition) 장에 등장한다.
참고로, [장자長者/궁자窮子의 비유]는 고타마 싯달타의 설법이 아니라, 붓다의 설법 후 그의 제자인 마하-카샤파 (이하, 한역명 마하가섭, Maha-Kasyapa)이 설한 게송이다. 독서의 편의를 위해, 장면별로 나누도록 하겠다.
http://www.archive.org/stream/saddharmapundar00cambuoft?ui=embed#page/n7/mode/2up
[장면 #1: 마하가섭의 게송 시작 - 필자 주]
- 爾時 摩訶迦葉 欲 重宣此義 而說偈言
- 그때 마하가섭은 다음의 게송을 읊었다.
- On that occasion the venerable Mahâ-Kâsyapa uttered the following stanzas:
[장면 #2: 고타마 싯달타의 가르침에 대한 마하가섭의 찬사 - 필자 주]
- 我等今日 聞佛音敎 歡喜踊躍 得未曾有 佛說聲聞 當得作佛 無上寶聚 不求自得
- 1. We are stricken with wonder, amazement, and rapture at hearing a Voice; it is the lovely voice, the leader's voice, that so unexpectedly we hear today. 2. In a short moment we have acquired a great heap of precious jewels such as we were not thinking of, nor requiring. All of us are astonished to hear it.
- 붓다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경이롭고 놀라운 큰 기쁨에 압도되었다. 잠깐 동안 붓다의 말씀을 듣고나서 예상치도 구하지도 않았던 최고의 보배를 잔뜩 얻게 된 것과 같다. 그 설법을 듣고 우리 모두 놀랐다.
[장면 #3: 가출한 외아들, 외아들을 찾아나선 아버지 (장자), 도시에 정착하는 아버지 - 필자 주]
- 譬如童子 幼稚無識 捨父逃逝 遠到他土 周流諸國 五十餘年 其父憂念 四方推求 求之旣疲 頓止一城 造立舍宅 五欲自娛
- 3. It is like (the history of) a young, person who, seduced by foolish people, went away from his father and wandered to another country far distant. 4. The father was sorry to perceive that his son had run away and in his sorrow roamed the country in all directions during no less than fifty years. 5. In search of his son he came to some great city, where he built a house and dwelt, blessed with all that can gratify the five senses.
- 비유하자면 이렇다. 한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생각이 얕고 무지하여 아버지 (=장자)에게서 도망쳐 50년 간 여러 지방을 떠돌아 다녔다. 자식을 걱정한 아비는 걱정이 되어 사방에 수소문하여 아들을 찾아 다니다가, 결국 포기하고 한 도시에 정착해 큰 집을 지어 놓고 오감에 만족스럽게 풍족하게 살았다.
[장면 #4: 도시에 정착해 부를 쌓은 아버지에 대한 묘사 - 필자 주]
- 其家巨富 多諸金銀 硨璖瑪瑙 眞珠琉璃 象馬牛羊 輦輿車乘 田業僮僕 人民衆多 出入息利 乃遍他國 商估賈人 無處不有 千萬億衆 圍繞恭敬 常爲王者 之所愛念 群臣豪族 皆共宗重 以諸緣故 往來者衆
- 6. He had plenty of bullion and gold, money and corn, conch shells, stones (?), and coral; elephants, horses, and footboys; cows, cattle, and sheep; 7. Interests, revenues, landed properties; male and female slaves and a great number of servants; was highly honoured by thousands of kolis and a constant favourite of the king's. 8. The citizens bow to him with joined hands, as well as the villagers in the rural districts; many merchants come to him, (and) persons charged with numerous affairs.
- 장자(=아버지) 큰 부자로서 금, 은, 자거, 마노,진주, 유리...등 보배가 한량없었고, 코끼리, 말, 소와 양, 수레, 논과 밭과 하인들과 찾는 방문객 역시 수없이 많았다. 거래하는 재산의 이자를 늘리는 일이 타국에까지 알려져 상인들과 거간꾼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공경하였으며, 왕족들도 그를 늘 좋아하고 사모하였다. 관리들과 명문 호족들이 모두 그를 존경해서, 이러한 인연으로 그 집을 오고가는 손님이 많았다
[장면 #5: 50년 전 가출한 유일한 상속자인 외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 - 필자 주]
- 豪富如是 有大力勢 而年朽邁 益憂念子 夙夜惟念 死時將至 癡子捨我 五十餘年 庫藏諸物 當如之何
- 9. In such way the man becomes wealthy, but he gets old, aged, advanced in years, and he passes days and nights always sorrowful in mind on account of his son. 10. 'It is fifty years since that foolish son has run away. I have got plenty of wealth and the hour of my death draws near.'
- 아비의 부유하고 귀함이 이와 같아 그는 비록 큰 세력을 가졌지만, 점점 늙어감에 따라 아들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죽을 때가 되었는데 어리석은 아들은 나를 버리고 떠나간 지 오십여 년이 지났구나. 창고마다 넘치는 이 많은 재산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하며 자나깨나 생각하였다.
[장면 #6: 거지가 되어 떠돌다 아버지가 사는 도시에 당도한 가난한 아들 (궁자) - 필자 주]
- 爾時窮子 求索衣食 從邑至邑 從國至國 或有所得 或無所得 飢餓羸瘦 體生瘡癬 漸次經歷 到父住城 傭賃展轉 遂至父舍
- 11. Meanwhile that foolish son is wandering from village to villave, poor and miserable, seeking food and clothing. 12. When begging, he at one time gets something, another time he does not. He grows lean in his travels, the unwise boy, while his body is vitiated with scabs and itch. 13. In course of time he in his rovings reaches the town where his father is living, and comes to his father's mansion to beg for food and raiment.
- 그 때에 빈궁한 아들이 옷과 밥을 구하려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이 지방 저 지방으로 다녔다. 혹 얻는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소득없이 굶주리고 야위어, 몸에는 옴과 버짐이 가득하였다. 이곳 저곳을 헤매다가 마침내는 우연히 아버지가 사는 도시에 와서 구걸하고 다니다 아버지가 사는 집에 구걸하러 들어섰다.
[장면 #7: 장자가 아버지인줄 모르고 그의 권세에 주눅들어 도시를 떠나려는 아들 - 필자 주]
- 爾時長者 於其門內 施大寶帳 處師子座 眷屬圍繞 諸人侍衛 或有計算 金銀寶物 出內財産 注記券疏 窮子見父 豪貴尊嚴 謂是國王 若國王等 驚怖自怪 何故至此 覆自念言 我若久住 或見逼迫 强驅使作 思惟是已 馳走而去 借問貧里 欲往傭作
- 14. And the wealthy, rich man happens to sit at the door on a throne under a canopy expanded in the sky and surrounded with many hundreds of living beings. 15. His trustees stand round him, some of them counting money and bullion, some writing bills, some lending money on interest. 16. The poor man, seeing the splendid mansion of the householder, thinks within himself: Where am I here? This man must be a king or a grandee. 17. Let me not incur some injury and be caught to do forced labour. With these reflections he hurried away inquiring after the road to the street of the poor.
- 그때 장자(=아버지)가 그의 집 안에서 보배로 된 큰 휘장을 둘러치고 사자보좌에 앉아 있었고, 권속들은 그를 둘러싸고 시중들이 그를 호휘하며, 어떤 이는 금은보화를 헤아리고 재산의 출납을 기록하고 있었다. 빈궁한 아들 (=궁자=아들)이 아버지의 부유함과 존엄함을 보고는, 장자를 국왕 혹은 왕족일 것이라고 여기고 놀랍고 두렵고 부끄러워하며 여기를 왜 왔던가라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또 만약 여기 오래 있다가는 저들에게 붙들려서 고초을 당하고 강제노역을 당하게 되리라 생각하였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얼른 도망하여 달아나서 가난한 마을로 찾아가 품팔이를 하려고 했다
[장면 #8: 멀리서 아들을 알아보고 아들을 데려올 것을 하인에게 명하는 아버지 - 필자 주]
- 長者是時 在師子座 遙見其子 默而識之 卽勅使者 追捉將來 窮子驚喚 迷悶躄地 是人執我 必當見殺 何用衣食 使我至此
- 18. The rich man on the throne is glad to see his own son, and despatches messengers with the order to fetch that poor man. 19. The messengers immediately seize the man, but he is no sooner caught than he faints away (as he thinks): These are certainly executioners who have approached me; what do I want clothing or food?
- 이때 사자의자에 앉아 있던 장자는, 멀리서 바라보고 그가 아들인 줄 알아차리고는 즉시 사람을 시켜서 궁자를 붙들어 오게 하였는데, 아들은 크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여 땅에 쓰려졌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나를 붙들어 나를 죽이겠구나. 옷이나 음식을 얻고자 왜 여기까지 왔던가!"라고 하였다.
[장면 #9: 아들의 비천함과 어리석음을 간파하고, 자신이 아버지임을 알리지않고 계책을 써서 아들을 데려온 아버지 - 필자 주]
- 長者知子 愚癡狹劣 不信我言 不信是父 卽以方便 更遣餘人 眇目좌陋 無威德者 汝可語之 云當相雇 除諸糞穢 倍與汝價 窮子聞之 歡喜隨來 爲諸糞穢 淨諸房舍
- 20. On seeing it, the rich, sagacious man (thinks): This ignorant and stupid person is of low disposition and will have no faith in my magnificence', nor believe that I am his father. 21. Under those circumstances he orders persons of low character, crooked, one-eyed, maimed, ill-clad, and blackish 1, to go and search that man who shall do menial work. 22. 'Enter my service and cleanse the putrid heap of dirt, replete with faeces and urine; I will give thee a double salary' (are the words of the message). 23. On hearing this call the poor man comes and cleanses the said spot; be takes up his abode there in a hovel near the mansion.
- 장자는 아들이 어리석고 천하여 자신의 말도, 또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도 믿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방편을 다시 써서 애꾸에 키가 작고 누추하고 못난이를 보내면서,& '가서 말하기를, 날품 팔 데가 있으니 거기서 거름이나 치워주면 다른 데보다 급료를 배로 받을 것'이라고 하라 명하였다. 빈궁한 아들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따라와서 거름치우고, 집안을 두루 청소하는 일을 하였다.
[장면 #10: 아버지임을 숨긴 채, 20년 간 당근과 채찍으로 상속인으로서의 아들의 자질을 키워가는 아버지 - 필자 주]
- 長者於牖 常見其子 念子愚劣 樂爲鄙事 於時長者 著弊垢衣 執除糞器 往到子所 方便附近 語令勤作 旣益汝價 幷塗足油 飮食充足 薦席厚煖 如是苦言 汝當勤作 又以軟語 若汝我子 長者有智 漸令入出 經二十年 執作家事 示其金銀 眞珠頗梨 諸物出入 皆使令知 猶處門外 止宿草蓭 自念貧事 我無此物
- 24. The rich man continually observes him through the windows (and thinks): There is my son engaged in a low occupation, cleansing the heap of dirt. 25. Then he descends, takes a basket, puts on dirty garments, and goes near the man. He chides him, saying: Thou dost not perform thy work. 26. 1 will give thee double salary and twice more ointment for the feet; I will give thee food with salt, potherbs, and, besides, a cloak. 27. So he chides him at the time, but afterwards he wisely conciliates him (by saying): Thou dost thy work very well, indeed; thou art my son, surely; there is no doubt of it. 28. Little by little he makes the man enter the house, and employs him in his service for fully twenty years, in the course of which time he succeeds in inspiring him with confidence. 29. At the same time he lays up in the house gold, pearls, and crystal, draws up the sum total, and is always occupied in his mind with all that property. 30. The ignorant man, who is living outside the mansion, alone in a hovel, cherishes no other ideas but of poverty, and thinks to himself: Mine are no such possessions!
- 장자가 문틈으로 항상 아들을 내다보며 생각하기를, '저 아들이 어리석고 천하여 미천한 일만 하기를 좋아하는구나' 하였다. 이때에 장자가 허름한 옷으로 바꿔입고 거름을 치는 삼태기를 들고 아들한테 가까이 가서 방편으로 말하기를, '부지런히 일을 잘하면 품삯도 올려 주고 손과 발에 바를 기름도 주고 먹을 것도 넉넉하고 이부자리도 따뜻하게 대우를 잘 하리라' 하며, '부지런히 일을 잘 하라' 고 꾸짖기도 하고, '너는 나의 아들과 같다' 고 부드럽고 은근하게 타이르기도 하였다. 장자는 지혜가 있어서 그가 점점 집의 안팎으로 드나들기를 이십 년을 지내도록 집안 일을 보게 하고 금과 은과 진주, 파리 등 있는 대로 보여주고 금전출납과 모든 살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문간방에 자리잡고 초막에 거처하며 가난한 나의 살림에는 이런 물건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장면 #11: 아들이 돌아온 지 20년이 지난 후, 비로소 자신이 궁자의 아버지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아들에게 전 재산의 상속을 선언하는 아버지 - 필자 주]
- 父知子心 漸以廣大 欲與財物 卽聚親族 國王大臣 刹利居士 於此大衆 說是我子 捨我他行 經五十歲 自見子來 已二十年 昔於某城 而失是子 周行求索 遂來至此 凡我所有 舍宅人民 悉以付之 恣其所用 子念昔貧 志意下劣 今於父所 大獲珍寶 幷及舍宅 一切財物 甚大歡喜 得未曾有
- 31. The rich man perceiving this of him (thinks): My son has arrived at the consciousness of being noble. He calls together a gathering of his friends and relatives (and says): I will give all my property to this man. 32. In the midst of the assembly where the king, burghers, citizens, and many merchantmen were present, he speaks thus: This is my son whom I lost a long time ago. 33. It is now fully fifty years-and twenty years more during which I have seen him-that he disappeared from such and such a place and that in his search I came to this place. 34. He is owner of all my property; to him I leave it all and entirely; let him do with it what he wants; I give him my whole family property. 35. And the (poor) man is struck with surprise; remembering his former poverty, his low disposition 1, and as he receives those good things of his father's and the family property, he thinks: Now am I a happy man.
- 아들의 마음이 점점 커지는 것을 아버지가 알아보고 마침내 재산을 상속하고자 친족들과 국왕과 대신들과 찰제리와 거사들을 모아놓고 말하길, '여러분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 사람은 제 아들로서 저를 떠나 멀리 다른 곳으로 가서 오십 년을 지냈는데, 다시 아들을 보게된 지도 어느 덧 이십 년이 다 되었습니다. 옛날에 어느 지방에서 이 아들을 잃고 나서 두루 돌아다니며 찾느라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제가 가진 집과 하인들을 모두 물려주어 마음대로 쓰게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들은 옛날에 가난하고 마음마저 용렬하였는데, 이제 아버지의 처소에 와서 진기한 보물과 큰 집과 많은 재산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장면 #12: 장자/궁자의 비유를 통해 고타마 싯달타의 깊은 의도를 설명하는 마하가섭 - 필자 주]
(후략)
- 佛亦如是 知我樂小 未曾說言 汝等作佛
- 36. In like manner has the leader, who knows our low disposition (or position), not declared to us: 'Ye shall become Buddhas,' but, 'Ye are, certainly, my disciples and sons.'
- 이처럼 인도자이신 붓다께서는 우리가 저급한 것이나 바라고 있음을 알고 계시므로, '너희들은 붓다가 될 것이다.' 또는 '그대들은 진정 내 제자와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 비교
§§ 비유의 의도
- [탕자의 비유]는 "잃어버린 1마리 양",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를 포함한 연속된 세가지 비유 중 마지막 비유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용서하고 반기는 신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를 담는다.
- [장자/궁자의 비유]는 소승불교에 대한 대승불교의 우월함, 그리고 붓다가 설한 여러 경전의 수준에 대한 암시를 담는다. 물론 {법화경}이 이 중 최고의 경전으로 간주된다. 대승불교의 회통사상 (천태종의 오시팔교)은 이를 다음과 같은 5단계로 설명한다. 모든 대승교단이 이 설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며, 다만 천태종 등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불교종단의 해석이 그렇다는 것이다. 가령, 화엄종의 소의경전은 {화엄경}이므로 위와 같은 '회통'식 해석은 불가능하다.
- 화엄경: 그 아들이 문전에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람을 시켜 데려오려니까 그 아들이 놀라서 기절한 것 / (궁자경악화엄시(窮子驚愕華嚴時)
- 아함경: 행색이 초췌한 두 사람을 시켜 아들을 데려와 그 집에 와서 거름치고 청소하는 막일을 시킨 것 / 제분정가아함시(除糞定價阿含時)
- 방등경: 장자가 몸소 그 아들에 접근하여 당근과 채찍으로 여러 가지 당부한 것 / 출입자재방등시(出入自在方等時)
- 반야경: 아들에게 재산관리를 맡긴 것 / 영지보물반야시(令知寶物般若時)
- 법화경: 재산상속의 선언 / 전부가업법화시(傳付家業法華時)
§§ 대비설정
- [탕자의 비유]를 비롯한 연속된 예수의 세 비유는 "잃어버린 양/동전/아들"와 "남아있는 양/동전/아들"을 대비시킨다. 특별히 [탕자의 비유]에는 두 아들이 등장하고, 둘 사이의 갈등관계가 서술된다. 전자는 "죄인", 후자는 "의인"을 각각 상징한다.
- [장자/궁자의 비유]의 경우 아들/궁자은 외아들이며, 아버지/장자의 유일한 상속인이다. 이 비유의 촛점은 아버지가 "본성이 어리석고 미천한" 아들을 재산상속인이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성장시키는데 있다.
§§ 가출과 그 결과
-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미리 상속받은 후, 공식적으로 아버지의 집 즉 "고향"을 떠나 분가한 것이다. 아버지는 다른 상속자인 큰 아들과 함께 계속 고향에 머문다.
- "궁자"는 무턱대고 집을 나갔고, "궁자"의 아버지 "장자"는 아들을 찾아 헤매다 한 도시에 정착하게 된다.
§§ 귀향
- "탕자"는 "아버지의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로 "스스로 결정"하고 "제발로" 아버지를 찾아가 회개한다. 아버지는 그를 즉시 용서하고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킨다. 그리고 착실했던 형의 불평이 간략하게 묘사된다.
- "궁자"는 이리저리 떠돌며 구걸하다 "우연히" 한 도시에 들어가게 된다. 즉, 그는 "고향" 혹은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것"이 아니며, 원래 그럴 의도도 없었다. 사실상 그럴 수도 없다. 궁자의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버지 밑에서 일한 20년 간, 궁자는 자기 아버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궁자는 회개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이 아니다.
과연 두 비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 가출해 고생하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 그나마,
- 기독교 {복음서} 속 둘째 아들 탕자: "회개하고"
- 대승불교의 {법화경}의 외아들 궁자: "얼떨결에"
정도?
이 두가지 모티프를 제외하고, 두 비유가 의도/설정/구조/전개의 관점에서 과연 얼마나 동등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문서비교의 관점에서 볼때, 과연 둘이 비슷하기는 한 걸까?
"...예수가 여러 해를 외국에 있다가 돌아왔을때 이스라엘 사람들과 자기 집안 친척 되는 사람들은 그에게 냉담했다. 그래서 예수는 법화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실감하고 탕아의 비유를 법화경의 내용보다 알기 쉽게 간추린다. 성경에 나오는 탕아의 비유는 그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 민희식, {불교기록에 나타난 예수의 생애}, 1987년
과연 예수는 {법화경}의 궁자의 비유를 "간추렸"는가?
§ 맺음말
다시 위에 언급된 대담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민(희식) : 권대승경(權大乘經)을 통달하신 다음 실대승경(實大乘經)인 법화경(法華經)까지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법화경의 7가지 비유가 신약성서에 그대로 나오고 있습니다. 탕아 이야기라든가,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야기, .... 그래서 신약성서에 법화경을 인용한 부분은 너무나 많습니다.
조(병선) : 예수님께서는 내증(內證)으로는 법화경을 숭배하며 인용까지 하면서, 외용(外用)으로는 마치 스스로 새로운 진실이라도 깨달은 양 그 명칭만을 달리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탄(悲嘆)한 일이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법문(法門)을 훔쳐다 자종(自宗)의 극리(極理)로 삼는다는 것은 비유컨대, 나그네가 주인행세를 하는 비유와 다를 바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선, 이미 살펴본 바대로 {법화경}의 [장자/궁자의 비유]가 {복음서}에 "그대로" 나오고 있다는 주장 자체가 상당히 무리한 주장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과연 {법화경}을 "숭배"하였는지는 일단 접어두고라도) {법화경} 안에 담긴 비유를 "인용"했다는 주장 역시 무리한 주장일 뿐더러, 예수가 짐짓 새로운 가르침인 척 불교의 "법문(法門)을 훔쳐다 자종(自宗)의 극리(極理)"로 삼았다며 "비탄해할 만한 일"도 아닌듯 싶다.
플로베르 소설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불문학자 민희식씨는 {법화경}과 {복음서}의 두 이야기의 서사구조가 다르단 점은 보지 못한단 말인가?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 하나를 인용하겠다.
두 대상의 "공통점"은 관찰자의 주관적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두 사람이 같다"는 진술은, "두 사람의 유전자가 같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두 사람 모두 두개의 눈을 가졌다"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비교기준에 대한 명료한 정의없이 행해지는 대상의 비교는 종종 엉뚱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의해야 한다. 이런 어리숙한 접근법은 학문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타당하지 않다.
참고로, 위에 언급된 19세기 말/20세기 초반의 학자들 가운데, Seydel과 Van den Burgh는 자신들의 리스트에 [장자/궁자의 비유]를 집어넣었지만, 위에 언급된 나머지 (산스크리트어/인도학) 학자들은 이 비유를 유사한 이야기 목록에서 삭제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일단 정리된 바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사실 이런 판단을 내리기 위해 굳이 이들 학자들의 "분분한" 견해에 기댈 필요까지도 없어 보인다.
그저 두 문서를 직접 읽고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 하나를 인용하겠다.
Cognitum. est in cognoscente secundum modum cognoscentis인식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상태에 달려있다.
두 대상의 "공통점"은 관찰자의 주관적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두 사람이 같다"는 진술은, "두 사람의 유전자가 같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두 사람 모두 두개의 눈을 가졌다"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비교기준에 대한 명료한 정의없이 행해지는 대상의 비교는 종종 엉뚱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의해야 한다. 이런 어리숙한 접근법은 학문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타당하지 않다.
참고로, 위에 언급된 19세기 말/20세기 초반의 학자들 가운데, Seydel과 Van den Burgh는 자신들의 리스트에 [장자/궁자의 비유]를 집어넣었지만, 위에 언급된 나머지 (산스크리트어/인도학) 학자들은 이 비유를 유사한 이야기 목록에서 삭제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일단 정리된 바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사실 이런 판단을 내리기 위해 굳이 이들 학자들의 "분분한" 견해에 기댈 필요까지도 없어 보인다.
그저 두 문서를 직접 읽고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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