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11-03-12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예수 vs. 붓다 #4: 강물 위를 걸은 붓다/불제자와 호수 위를 걸은 예수/베드로?
요약
팔리어 {자타카} 혹은 {본생경}에 등장하는 "강물 위를 걸어간 불제자" 이야기로부터 "예수(+베드로)"가 호수 위를 걸은 모티프가 차용되었다고 주장한 20세기 네덜란드 신학자 판 덴 베르크의 주장을, 팔리어 {자타카} 속 해당 전문과 {복음서} 해당 전문을 비교한다. 아울러 {자타카}와 밀접한 유사성을 보이는 {이솝우화} 간의 유사성을 논한 지난 세기의 학술적 논쟁에 사용된 기준을 이 문제에 적용할 때, 과연 판 덴 베르크의 주장이 정당하고 충분한 근거 위에 설 수 있는지를 살핀다. 또한 {증일아함경} 등장하는 '붓다가 강물 위를 걸은 이야기'가 왜 구성과 맥락면에서 {복음서}의 해당장면과 다른가를 설명한다.
순서
© 최광민, Kwangmin Choi, 2011-03-12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예수 vs. 붓다 #4: 강물 위를 걸은 붓다/불제자와 호수 위를 걸은 예수/베드로?
요약
팔리어 {자타카} 혹은 {본생경}에 등장하는 "강물 위를 걸어간 불제자" 이야기로부터 "예수(+베드로)"가 호수 위를 걸은 모티프가 차용되었다고 주장한 20세기 네덜란드 신학자 판 덴 베르크의 주장을, 팔리어 {자타카} 속 해당 전문과 {복음서} 해당 전문을 비교한다. 아울러 {자타카}와 밀접한 유사성을 보이는 {이솝우화} 간의 유사성을 논한 지난 세기의 학술적 논쟁에 사용된 기준을 이 문제에 적용할 때, 과연 판 덴 베르크의 주장이 정당하고 충분한 근거 위에 설 수 있는지를 살핀다. 또한 {증일아함경} 등장하는 '붓다가 강물 위를 걸은 이야기'가 왜 구성과 맥락면에서 {복음서}의 해당장면과 다른가를 설명한다.
순서
- 판 덴 베르크의 주장
- {복음서}: 호수 위를 걸은 예수(와 베드로)
- {자타카}: 강물 위를 걸은 불제자
- {증일아함경}: 강물 위를 걸은 붓다
- 비교: {이솝우화}의 경우
- 맺음말
§ 판 덴 베르크의 주장
기독교가 공인한 네 권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일화나 비유가 불교 측 문서에서 그 모티프를 따온 것이라는 류의 주장이 등장한 것은 약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9세기 중/후반 독일 라이프니찌 대학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Rudolf Seydel (1835 – 1892)이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선구자로 볼 수 있다.
그는 {복음서}와 {불경} 사이에 무려 50개나 되는 공통점이 있으며, {복음서}의 모티프가 {불경}에서 차용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20세기 초반,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대학의 신학자로서 예수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급진비평학파"를 주도했던 Gustaaf Adolf van den Bergh van Eysinga (1874 – 1957)는 자이델의 궤적을 따르기는 했지만, {복음서}와 {불경}의 공통모티프를 자이델의 50개에서 15개 (혹은 9개)로 축소했다. 판 덴 베르크에 이어 E.W. Hopkins는 5개로 리스트를 줄였는데 그나마도 개연성을 낮게 보았다. Richard Garbe는 직접 차용된 것은 4개라는 입장을 폈고, Jarl Carpentier는 1개, 심지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독립된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왜 공개된 텍스트를 두고서 50개에서 0개라는 큰 폭의 견해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그 이유는 위에 언급된 학자들의 주관성과 전문성에 있는 듯 하다. 자이델과 판 덴 베르크가 기본적으로 신학자로서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를, 즉 불교문서를 직접 해독할 능력이 없었던 반면, 뒤에 언급된 학자들은 산스크리트어/팔리어 및 인도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있는 자료의 수준이 달랐다.
"소승"불교는 "대승불교"측의 폄칭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소승" 대신 "테라바다/상좌부"를, "대승" 대신 "마하야나=대승"불교를 표준용어로 사용하도록 하겠다.
§ {복음서}: 호수 위를 걸은 예수(와 베드로)
기독교의 정경 {복음서}에 기록된 "물 위를 걸은" 기적장면은 {마태 복음서}와 {마르코/마가 복음서} 두 문서에 등장한다. 전체 윤곽은 동일하지만 세부묘사에서는 {마태 복음서} 속의 일화가 보다 자세하다. {요한복음서}의 일화는 더 간결하다.
{마태 복음서}에서 물 위를 걸은 것은 우선 예수이며, 그 다음은 베드로이다. 예수는 물에 빠진 베드로를 데리고 함께 배에 오른다.
23 καὶ ἀπολύσας τοὺς ὄχλους ἀνέβη εἰς τὸ ὄρος κατ᾽ ἰδίαν προσεύξασθαι. ὀψίας δὲ γενομένης μόνος ἦν ἐκεῖ. 24 τὸ δὲ πλοῖον ἤδη σταδίους πολλοὺς ἀπὸ τῆς γῆς ἀπεῖχεν, βασανιζόμενον ὑπὸ τῶν κυμάτων, ἦν γὰρ ἐναντίος ὁ ἄνεμος. 25 τετάρτῃ δὲ φυλακῇ τῆς νυκτὸς ἦλθεν πρὸς αὐτοὺς περιπατῶν ἐπὶ τὴν θάλασσαν. 26 οἱ δὲ μαθηταὶ ἰδόντες αὐτὸν ἐπὶ τῆς θαλάσσης περιπατοῦντα ἐταράχθησαν λέγοντες ὅτι φάντασμά ἐστιν, καὶ ἀπὸ τοῦ φόβου ἔκραξαν. 27 εὐθὺς δὲ ἐλάλησεν [ὁ ἰησοῦς] αὐτοῖς λέγων, θαρσεῖτε, ἐγώ εἰμι· μὴ φοβεῖσθε. 28 ἀποκριθεὶς δὲ αὐτῶ ὁ πέτρος εἶπεν, κύριε, εἰ σὺ εἶ, κέλευσόν με ἐλθεῖν πρὸς σὲ ἐπὶ τὰ ὕδατα· 29 ὁ δὲ εἶπεν, ἐλθέ. καὶ καταβὰς ἀπὸ τοῦ πλοίου [ὁ] πέτρος περιεπάτησεν ἐπὶ τὰ ὕδατα καὶ ἦλθεν πρὸς τὸν ἰησοῦν. 30 βλέπων δὲ τὸν ἄνεμον [ἰσχυρὸν] ἐφοβήθη, καὶ ἀρξάμενος καταποντίζεσθαι ἔκραξεν λέγων, κύριε, σῶσόν με. 31 εὐθέως δὲ ὁ ἰησοῦς ἐκτείνας τὴν χεῖρα ἐπελάβετο αὐτοῦ καὶ λέγει αὐτῶ, ὀλιγόπιστε, εἰς τί ἐδίστασας; 32 καὶ ἀναβάντων αὐτῶν εἰς τὸ πλοῖον ἐκόπασεν ὁ ἄνεμος. 33 οἱ δὲ ἐν τῶ πλοίῳ προσεκύνησαν αὐτῶ λέγοντες, ἀληθῶς θεοῦ υἱὸς εἶ.
[오병이어 기적 후 / 필자 주] 22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23.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24.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25.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26.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 하였다. 그들은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 27.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셨다. 28.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하니, 29. 예수께서 "오너라" 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30.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 하셨다. 32.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33.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어서 경배드리고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였다.--- 마태복음, {표준새번역 (개정)} 14장)
{마르코/마가 복음서}에서 물 위를 걸은 인물은 예수 만이 기록되어 있다.
46 καὶ ἀποταξάμενος αὐτοῖς ἀπῆλθεν εἰς τὸ ὄρος προσεύξασθαι. 47 καὶ ὀψίας γενομένης ἦν τὸ πλοῖον ἐν μέσῳ τῆς θαλάσσης, καὶ αὐτὸς μόνος ἐπὶ τῆς γῆς. 48 καὶ ἰδὼν αὐτοὺς βασανιζομένους ἐν τῶ ἐλαύνειν, ἦν γὰρ ὁ ἄνεμος ἐναντίος αὐτοῖς, περὶ τετάρτην φυλακὴν τῆς νυκτὸς ἔρχεται πρὸς αὐτοὺς περιπατῶν ἐπὶ τῆς θαλάσσης· καὶ ἤθελεν παρελθεῖν αὐτούς. 49 οἱ δὲ ἰδόντες αὐτὸν ἐπὶ τῆς θαλάσσης περιπατοῦντα ἔδοξαν ὅτι φάντασμά ἐστιν, καὶ ἀνέκραξαν· 50 πάντες γὰρ αὐτὸν εἶδον καὶ ἐταράχθησαν. ὁ δὲ εὐθὺς ἐλάλησεν μετ᾽ αὐτῶν, καὶ λέγει αὐτοῖς, θαρσεῖτε, ἐγώ εἰμι· μὴ φοβεῖσθε. 51 καὶ ἀνέβη πρὸς αὐτοὺς εἰς τὸ πλοῖον, καὶ ἐκόπασεν ὁ ἄνεμος. καὶ λίαν [ἐκ περισσοῦ] ἐν ἑαυτοῖς ἐξίσταντο, 52 οὐ γὰρ συνῆκαν ἐπὶ τοῖς ἄρτοις, ἀλλ᾽ ἦν αὐτῶν ἡ καρδία πεπωρωμένη.
[오병이어 기적 후 / 필자 주] 그들을 보내시고 나서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배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고 예수께서는 혼자 육지에 계셨다. 제자들은 마침 역풍을 만나 배를 젓느라고 몹시 애를 쓰고 있었다.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였다. 그것은 새벽 네시쯤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 그를 강보고 모두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하시며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마음이 무디어서 군중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도 아직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 공동번역 {마르코 복음서} 6장 46-52
{요한복음서}의 일화 역시 예수만 등장한다.
16 ὡς δὲ ὀψία ἐγένετο κατέβησαν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 ἐπὶ τὴν θάλασσαν, 17 καὶ ἐμβάντες εἰς πλοῖον ἤρχοντο πέραν τῆς θαλάσσης εἰς καφαρναούμ. καὶ σκοτία ἤδη ἐγεγόνει καὶ οὔπω ἐληλύθει πρὸς αὐτοὺς ὁ ἰησοῦς, 18 ἥ τε θάλασσα ἀνέμου μεγάλου πνέοντος διεγείρετο. 19 ἐληλακότες οὗν ὡς σταδίους εἴκοσι πέντε ἢ τριάκοντα θεωροῦσιν τὸν ἰησοῦν περιπατοῦντα ἐπὶ τῆς θαλάσσης καὶ ἐγγὺς τοῦ πλοίου γινόμενον, καὶ ἐφοβήθησαν. 20 ὁ δὲ λέγει αὐτοῖς, ἐγώ εἰμι, μὴ φοβεῖσθε. 21 ἤθελον οὗν λαβεῖν αὐτὸν εἰς τὸ πλοῖον, καὶ εὐθέως ἐγένετο τὸ πλοῖον ἐπὶ τῆς γῆς εἰς ἣν ὑπῆγον.
...[오병이어 기적 후 / 필자 주]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의 제자들은 바다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갔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께서는 아직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오시지 않았다. 그런데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졌다. 제자들이 배를 저어서, 십여 리쯤 갔을 때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예수를 배 안으로 모셔들였다.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 한국어 새번역, {요한복음} 6장 16-21절
§ 팔리어 {시라니삼사-자타카}: 강물 위를 걸은 불제자
판 덴 베르크는 테라바다 불교의 팔리어 문서군 가운데 하나인 {자타카}에 등장하는 아래 이야기로부터 {복음서}의 한 모티프가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타마 싯달타의 전생 이야기를 담은 해당 {자타카}는 팔리어로 결집된 {Sutta Pitaka}의 {Khuddaka Nikaya}에 수록된 547편의 {자타카} 중 하나인 {SĪLĀNISAṀSA-JĀTAKA}이다.
감상해 보자 (번역: 최광민)
{The Jataka; or, Stories of the Buddha's former births} (1895) --- Cowell, Edward B. (Edward Byles), 1826-1903; Chalmers, Robert, 1858-; Rouse, W. H. D. (William Henry Denham), 1863-1950; Francis, H. T. (Henry Thomas), 1837-1924; Neil, Robert Alexander, 1852-1901, https://archive.org/details/jatakaorstorieso02cowe
Book II. Dukanipāta - No. 190. SĪLĀNISAṀSA-JĀTAKA.제 190편: 시라니삼사-자타카팔리어에서 영역: W. H. D. Rouse
영어에서 한국어역: 최광민
"Behold the fruit of sacrifice," etc.--This story the Master told whilst staying in Jetavana, about a believing layman. This was a faithful, pious soul, an elect disciple. One evening, on his way to Jetavana, he came to the hank of the river Aciravatī, when the ferrymen had pulled up their boat on the shore in order to attend service; as no boat could be seen at the landing-stage, and our friend's mind being full of delightful thoughts of the Buddha, he walked into the river. His feet did not sink below the water. He got as far as mid-river walking as though he were on dry land; but there he noticed the waves. Then his ecstasy subsided, and his feet began to sink. Again he strung himself up to high tension, and walked on over the water. So he arrived at Jetavana, greeted the Master, and took a seat on one side.
보아라, 희생의 열매를! .....이 이야기는 스승 (=고타마 싯달타)께서 제타바나에 머무실때 한 재가신자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 사람은 신심 깊은 경건한 제자였다. 어느날 밤 제타바나로 가는 길에,그는 아키라바티 강변에 이르렀다. 선착장에는 배가 보이지 않았는데, 뱃사공들이 설법을 들으려고 다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 제자는 붓다를 생각할 때 환희가 넘쳐나 (자신도 모르는 새) 강으로 걸어들어갔는데 그의 발이 물 속에 가라않지 않았다. 그가 마른 땅인 양 물 위를 걸어 강의 절반 쯤 가서야 자신이 물 위에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그의 황홀경은 사라지고 물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다시 집중하고 다시 물 위를 걸을 수 있었고, 마침내 제타바나에 이르러 스승께 문안한 후 측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The Master entered into conversation with him pleasantly. "I hope, good layman," said he, "you had no mishap on your way." "Oh, Sir," he replied, "on my way I was so absorbed in thoughts of the Buddha that I set foot upon the river; but I walked over it as though it had been dry ground!" "Ah, friend layman," said the Master, "you are not the only one who has kept safe by remembering the virtues of the Buddha. In olden days pious laymen have been shipwrecked in mid-ocean, and saved themselves by remembering the Buddha's virtues." Then, at the man's request, he told an old-world tale.
스승께서는 그와 즐겁게 대화를 시작하셨다: "오는 길에 자네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었길 바라네". "오 스승님, 제가 여기 오는 길에 붓다를 너무 깊이 묵상하느라 물 위를 걷게 되었는데, 마치 물 위를 마른 땅인 양 걸었더랬습니다". "아, 자네는 붓다를 명상함으로 보호받은 유일한 사람은 아니네. 예전에 경건한 재가신자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파선하게 되었는데, 그들도 붓다의 덕을 묵상함으로써 구제를 받았다네". 스승께서는 이 재가신자의 요청을 받고 과거세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셨다
Once upon a time, in the days when Kassapa was Supreme Buddha, a disciple, who had entered on the Paths, took passage on board ship in company with a barber of some considerable property. The barber's wife had given him in charge of our friend, to look after him in better and in worse.
옛날 옛적에, 카싸파가 지고의 붓다로 있던 시절에 수행하던 한 재가신자한 명이 재력이 있는 한 이발사와 함께 배에 오른 일이 있었다 이발사의 처는 이 제자에게 남편을 여러모로 잘 보살펴줄 것을 당부했다.
A week later, the ship was wrecked in mid-ocean. These two persons clinging to one plank were cast up on an island. There the barber killed some birds, and cooked them, offering a share of his meal to the lay brother. "No, thank you," said he, "I have had enough." He was thinking to himself, "In this place there is no help for us except the Three Jewels 1," and so he pondered upon the blessings of the Three Jewels. As he pondered and pondered, a Serpent-king who had been born in that isle changed his own body to the shape of a great ship. The ship was filled with the seven kinds of precious things. A Spirit of the Sea was the helmsman. The three masts were made of sapphire, the anchor 2 of gold, the ropes of silver, and the planks were golden.
일 주일 후에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난파되었다. 두 사람은 나무판자를 잡고 떠다니다가 한 섬에 표류하게 되었다. 이 섬에서 이발사는 새들을 잡아 요리해서 자기도 먹고 함께 한 재가신자에게도 주었는데, 이 재가신자는 "고맙지만 나는 됐네"라며 거절했다. 제자는 묵상하기를 "도움을 바랄 수 없는 이런 곳에서는 삼보 (불/법/승) 외에는 도움이 없구나", 그래서 그는 삼보의 덕을 묵상하기 시작했다. 그가 묵상할 때, 그 무인도에서 태어난 뱀왕 (Serpent-King, 나가?)이 자신의 몸을 큰 배로 바꾸었다. 그 배는 7종류의 진기한 보물을 가득 실었는데, 바다정령 (용왕? -- 필자 주)이 조타수를 맡았다. 세개의 기둥은 사파이어로, 두 닻은 금으로, 밧줄은 은으로, 몸체는 금판으로 되어있었다.
The Sea-spirit stood on board, crying--"Any passengers for India?" The lay brother said, "Yes, that's where we are bound for." "In with you then--on board with you! "He went aboard, and wanted to call his friend the barber. "You may come," says the helmsman, "but not he." "Why not?" "He is not a man of holy life, that's why," said the other; "I brought this ship for you, not for him." "Very well:--the gifts I have given, the virtues I have practised, the powers I have developed--I give him the fruit of all of them!" "I thank you, master!" said the barber. "Now," said the Sea-spirit, "I can take you aboard." So he conveyed them both oversea, and sailed upstream to Benares. There, by his power, he created a store of wealth for both of them, and bespoke them thus.
바다정령 (조타수)이 선상에 서서 "여기 인도로 가는 사람 있소?"라고 외쳤다 이에 재가신자는 "여기 있습니다. 우리도 인도로 갑니다"라고 말하자, 바다정령은 "그럼 타시오"라고 답했다. 배에 오른 재가신자는 친구 이발사도 함께 태워주기를 청했다. 조타수는 "당신은 타도 좋지만, 그는 안되오"라고 말했다. "왜 안되나요?"라고 재가신자가 물었다. "나는 당신을 태우려고 배를 몰고 온거지 그 사람을 위해서 온게 아니오", 조타수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내가 받은 선물(성품? -- 필자 주)들, 내가 수행한 덕목들, 내가 키워온 능력들의 열매들을 다 그 (이발사)에게 넘겨줄테니 그를 태워주시오"라고 재가신자가 말했다. 이발사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했고, 조타수는 "그럼 당신은 타도 좋소"라고 말하며 이발사의 승선을 허용했다.
"Keep company with the wise and good. If this barber had not been in company with this pious layman, he would have perished in the midst of the deep." Then he uttered these verses in praise of good company:
"그러므로 지헤롭고 선한 사람과 벗을 삼도록 해라. 만약 이발사가 이 경건한 재가신자와 동행하지 않았다면, 그는 바다 한 가운데서 죽지 않았겠느냐?". 그리고나서 좋은 사귐을 칭송하며 다음의 게송을 읊었다.
"Behold the fruit of sacrifice, virtue, and piety:
A serpent in ship-shape conveys the good man o'er the sea.
"Make friendship only with the good, and keep good company;
Friends with the good, this Barber could his home in safety see."
보아라, 희생과 덕성과 경건의 열매를.
배로 변신한 뱀이 선한 이를 태워주었구나!
오직 선한 이와 벗 삼고 그와 잘 사귀어라.
선한 친구 덕에 이발사가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있었구나!
Thus did the Spirit of the Sea hold forth, poised in mid-air. Finally he went to his own abode, taking the Serpent-king along with him.The Master, after finishing this discourse, declared the Truths and identified the Birth:--at the conclusion of the Truths the pious layman entered on the Fruit of the Second Path:--"On that occasion the converted lay brother attained Nirvana; Sāriputta was the Serpent-king, and the Sea-spirit was I myself."
이렇게 바다정령이 공중에 떠올라 길게 말한 후, 뱀-왕과 함께 그의 처소로 돌아갔다. 스승 (고타마 싯달타 -- 필자 주)께서 이렇게 이야기를 마친 후, 결론으로 전생을 사실대로 가르쳐 주셨다. 이 제자는 두번째 수행의 열매를 얻었다. "그때 제자는 열반을 얻었지. 사리푸타(팔리어) (= 사리푸트라(산스크리트어)/사리불 --- 필자 주)은 이 뱀-왕이었고, 바다정령은 바로 나 (고타마 싯달타 ---필자 주) 였다네."
--- 번역: 최광민
해탈을 얻은 후 나가 (뱀-왕)에 의해 보호받는 고타마 싯달타, 캄보디아. (source: Wikimedia Commons)
§ {증일아함경}: 강물 위를 걸은 붓다
한편, 팔리어 5부 및 한역 4부 {아함경} 가운데 하나인 {Ekottara Āgama 증일아함경 增壹阿含經 K.649(18-313), T.125(2-549)} 제 15권 (고당품)에는 이와는 다른 문맥에서 등장하는 "강물 위를 걸은 붓다"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함경}은 원시불교의 가르침을 재구성하는데 중요한 문서군으로, 대승불교 측에서는 "소승"경전으로 그동안 폄하되어 왔으나, 근래에 다시 재조명을 받아왔다. 각각의 {아함경}들은 각각 다른 불교부파들이 전수해 온 경전들이다.
{증일아함경}은 산스크리트 {삼장 / 수트라 피타카}가 원본이지만, 현재는 한역본만 남아있다. 원래는 인도의 설일체유부나 대중부에서 전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대 불교학자들은 한역본이 대승불교가 융성하던 서북인도에서 온 사본에서 번역되었기 때문에, 보다 전형적인 테라바다 혹은 상좌부 (혹은 "소승") 불교적 모습을 보이는 다른 {아함경}과 달리 대승불교적 영향을 보이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 한역 {증일아함경}은 동진 달마난디의 AD 383년에 한역본과 고타마 삼가데바 (구담 승가제바)가 AD 398년 한역본이 있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후자의 한역본이다.
그럼 제 15권 제 24 고당품 高幢品 (#2)의 해당부분을 발췌번역해 보겠다. 우선 배경을 설명한다면, 이 장면 앞에서 붓다에게 완전히 귀의하기 전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던 500 문도를 이끌던 카시아파 (가섭, 가섭존자, 마하가섭)은 처음에는 붓다가 자신보다 높은 수준의 도를 깨달은 자임을 인정하지 않다가, 이어지는 붓다의 놀라운 신통력에 점차 고개를 숙이고, 그의 문도 500명과 함께 붓다의 제자로 들어간다. 한역본과 영역본을 함께 참고하겠다.
[전략]......是时。迦叶复作是念。此沙门瞿昙虽神。故不如我得道真。是时。世尊食已。还于彼宿。是时。夜半有大黑云起而作大雨。连若大河。极为瀑溢。是时。迦叶复作是念。此河瀑溢。沙门必当为水所漂。我今看之。是时。迦叶及五百弟子往至河所。 尔时世尊在水上行。脚不为水所渍。是时。迦叶遥见世尊在水上行。是时。迦叶便作是念。甚奇。甚特。沙门瞿昙乃能在水上行。我亦能在水上行。但不能使脚不污耳。此沙门虽神。故不如我得道真。是时。世尊语迦叶言。汝亦非阿罗汉。复不知阿罗汉道。汝尚不识阿罗汉名。况得道乎。汝是盲人。目无所覩。如来现尔许变化。故言。不如我得道真。汝方作是语。吾能在水上行。今正是时。可共在水上行耶。汝今可舍邪见之心。无令长夜受此苦恼。是时。迦叶闻世尊语已。便前头面礼足。我今悔过。深知非法。乃触如来。唯愿受悔。如是再三。世尊告曰。听汝改过。乃能自知触扰如来。是时.....[후략]。
[전략] ..."이 사문 고타마 (구담)에게 신통력이 있더라도, 내가 얻은 참다운 도에는 아직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이때 카시아파 (가섭)이 생각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공양을 마치고 돌아가 쉬고 있었는데, 밤중에 검은구름이 일더니 폭우가 쏟아져 빗물이 큰 강으로 흘러들어 넘실거렸다.
"이 강이 사납게 넘치고 있으니 사문은 저 강물에 분명히 떠내려갈 것이다. 이제 가서 구경하리라." 라고 가섭은 또 생각했다.
이에 카시아파와 그의 500 제자들은 모두 강 가에 이를 보러 나갔다. 그런데 세존께서 물 위로 걸어다니시는데 발이 물에 젖지 않으셨다 (= 尔时世尊在水上行。脚不为水所渍) 카시아파도 멀리서 세존이 물 위를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신기한 일이구나. 사문 구담이 저렇게 물 위를 걸어다니다니. 비록 발이 물에 젖긴 하겠지만 나 역시 물 위를 걸어다닐 수는 있다. (= 我亦能在水上行。但不能使脚不污耳) 설령 이 (고타마) 사문이 신통력이 있다한들, 내가 성취한 참 도에는 이르지 못하겠지.'라고 카시아파는 곧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때 세존께서 카시아파에게 말씀하였다.
"그대는 아직 아라한이 아니며, 또한 아라한의 도 역시 알지 못한다. 그대는 아라한이라는 이름조차 분별치 못하든 그대가 도를 얻었다 말할 수 있을까? 그대는 장님과 같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구나. 내가 이런 모습을 그대에게 보여주었으나, 그대는 '내가 성취한 참 도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나 역시 물 위를 걸어다닐 수 있다'라고 말하는구나. 지금 나와 함께 물 위로 걸어다닐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런 생각을 즉시 버리고, 그로 인해 오래 고통받지 않도록 하라 "
그 때 가섭은 세존의 말씀을 듣고, 곧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세존의 발에 예를 올리고 말하였다.
"참회합니다. 법 답지도 않은 것으로 함부로 여래에게 대들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부디 제 참회를 받아주소서"...." ....[후략]/ ---- {증일아함경} 제 15권 고당품 #2 / 번역: 최광민
이 이야기는 {복음서}의 이야기와 과연 얼마나 비슷한가?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가 될 때 예수와 능력을 겨루기라도 했던가? 베드로의 경우 본인은 그런 능력이 없고, 대신 예수에게 그 능력을 요청했을 뿐이다.
§ 비교: {이솝우화}의 경우
사실 {자타카}의 성립시기, 특별히 문서성립시기는 매우 논쟁적이다. {자타카}는 여러 전생담의 컬렉션이기 때문에 개개의 일화들의 하나의 문서군으로 들어온 시점들과 결집장소들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보여진다. 공식적으로 현재까지 35개의 {자타카}이야기가 부드가야, 바루트, 산치 스투파의 부조내용을 통해 서력기원 이전 (BC 2세기)에도 유통되던 것임이 확인되었다. 마하야나(대승) 불교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대중부 大眾部 Mahāsāṃghika의 분파인 제다부 制多部 Caitika의 경우 BC 3세기 아쇼카 왕 이후에 등장한 {자타카}들은 위경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초기불교의 제파마다 다른 {자타카} 리스트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 리스트는 알려져 있지 않다.)
"물 위를 걸은 제자" 이야기는 {마태 복음서}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판 덴 베르크는 "물 위를 걸은 기적" 이야기 가운데 {마태 복음서}의 모티프가 {자타카}에서 차용되어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두 내용의 (한 모티프에 등장하는) 표면적 "유사성"은 과연 두 문서 간의 "차용"을 논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가? {마태 복음서}와 {자타카} 속에 담긴 일화들의 유사성은 사실 (1) "제자가 물 위를 걸었다"와 (2) "당황하자 물에 빠졌다" 두가지다. 두 제자가 물 위를 걷게 된 동기, 과정, 물에 빠져들고 다시 걷게된 과정은 서로 다르다.
{시라니삼사-자타카}의 메시지는 삽입된 게송에 정리되어 있듯이 두가지로 압축된다. "희생의 덕을 쌓고" (2) "좋은 사람과 교제하라"라는 것이 그것이다. 반면 {마태/마르코 복음서}에 등장하는 일화의 메시지는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라"이다. 큰 맥락에서 두 이야기는 그 의도가 다르다.
{복음서}가 이 {자타카}를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서로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자타카}와 {이솝우화} 간의 차용관계에 관한 19/20세기 논쟁에서도 이보다 훨씬 더 큰 유사성을 보이는 근거가 요구되었다는 점을 쉽게 간과한다. 오늘날 {자타카}와 {이솝우화} 간의 차용관계를 확정적으로 대담하게 주장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단순히, 자료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잣대를 들이대면 {자타카}와 {복음서}의 차용관계는 많은 경우 거의 불분명하게 된다
아울러 물 위를 걸은 불제자의 일화가 담긴 부분은 {시라니삼사-자타카}의 서문 부분이다. 이 서문과 맺음말 부분은 고타마 싯달타가 자신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게 되는 배경설명을 담는다.
이 서문과 맺음말은 원래 고타마 싯달타의 전생 이야기와 원래부터 하나로 묶인 하나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일까, 아니면 원래의 전생담과는 별도로 액자의 틀 형식으로 후대에 추가된 것일까?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고타마 싯달타의 전생담을 담은 (본문)이 배경설명인 (서문/맺음말)보다 앞선 시기에 성립되었고, 후자가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물론 그 "후대"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결론내리기 힘든 끝없는 논쟁이 있다.
{증일아함경}의 경우는 향후 고타마 붓다의 수제자가 되는 마하카시아파 (마하가섭)이 붓다의 우월함을 의심하는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결정적으로 그가 붓다에게 승복하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귀의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여기서 카시아파는 베드로와는 달리, 자신의 힘으로도 능히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자부한다 (물론 발에 물이 닿기는 하지만). 따라서 붓다가 "강물 위로 걸었다"는 장면을 제외하면, {증일아함경}의 일화는 {복음서}의 그 내용과 의도에 있어 유사하지 않다.
그나저나, (1) "물 위를 걸었다"는 한 모티프가 "유사"하다는 점으로부터, (2) "차용"되었다라는 결론으로 막바로 나아갈 수 있을까? 설령 그렇다면, 왜 그 "차용자"는 하나의 모티프만 취하고 사실은 더 중요한 나머지 (가령,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배경, 일화의 주제/의도)는 버린 것일까? 게다가 '물 위를 걷는 신통력을 가진 도인'이야기는 많은 문명권의 설화에 등장한다. 따라서 설령 {복음서}가 소설이라 하더라도, 그 모티프를 반드시 {불경}에서 따올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최광민
{증일아함경}의 경우는 향후 고타마 붓다의 수제자가 되는 마하카시아파 (마하가섭)이 붓다의 우월함을 의심하는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결정적으로 그가 붓다에게 승복하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귀의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여기서 카시아파는 베드로와는 달리, 자신의 힘으로도 능히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자부한다 (물론 발에 물이 닿기는 하지만). 따라서 붓다가 "강물 위로 걸었다"는 장면을 제외하면, {증일아함경}의 일화는 {복음서}의 그 내용과 의도에 있어 유사하지 않다.
그나저나, (1) "물 위를 걸었다"는 한 모티프가 "유사"하다는 점으로부터, (2) "차용"되었다라는 결론으로 막바로 나아갈 수 있을까? 설령 그렇다면, 왜 그 "차용자"는 하나의 모티프만 취하고 사실은 더 중요한 나머지 (가령,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배경, 일화의 주제/의도)는 버린 것일까? 게다가 '물 위를 걷는 신통력을 가진 도인'이야기는 많은 문명권의 설화에 등장한다. 따라서 설령 {복음서}가 소설이라 하더라도, 그 모티프를 반드시 {불경}에서 따올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최광민
반응형
'역사|종교|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최광민] 예수 vs. 붓다 #7: [과부의 두 렙톤] 일화는 과연 대승불경 {대장엄론경}의 표절일까? (0) | 2021.08.09 |
---|---|
[© 최광민] 예수 vs. 붓다 #6: {복음서}의 [오병이어] 일화는 {불경}에서 표절되었을까? (0) | 2021.08.09 |
[© 최광민] 예수 vs. 붓다 #3: [탕자의 비유]는 대승불경 {법화경}에서 차용된 것일까? (0) | 2021.08.09 |
[© 최광민] 예수 vs. 붓다 #2: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는 산스크리트어, 티벳어, 혹은 마야어일까? (0) | 2021.08.09 |
[© 최광민] 예수 vs. 붓다 #1: 소위 "불교계통" 복음서들의 정체: {이사전}, {보병궁 복음서}, {유란시아書}, {임마누엘의 탈무드} (0) | 2021.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