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광민] 네루다와 나의, 옷에게 바치는 송가




일상

[© 최광민] 네루다와 나의, 옷에게 바치는 송가

草人! 2021. 11. 27. 10:28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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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광민] 네루다와 나의, 옷에게 바치는 송가


1. 색

형과 연년생인 나는 물론 아주 어렸을 때는 형의 옷을 자동적으로 물려 입었겠지만, 그 후로부터 나 스스로 옷을 사기 시작하기 시작하던 고등학교 3학년 이전까지는 형과 옷을 함께 입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께서 종종 형과 나에게 똑같은 옷을 사주시곤 하신 기억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내가 무척 좋아했던 모자달린 하늘색 코르덴 겨울재킷이 가장 기억이 많이 난다. (형과 함께 마당 연못가에서 찍은 사진 속에도 남아있다.) 그러다가 어느때 부터인가 형과 나 사이에는 (만약 그렇게 불릴 수 있다면) 패션의 차이가 생겼고, 그래서 어머니께서 두 사람에게 사주시는 옷에도 약간 변화가 생겼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아마도 색깔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형에게는 주로 원색, 특별히 푸른색 계통의 옷을 사주시고, 내게는 탁색 계열의 옷, 특별히 황토색 (어린시절 종종 “똥색”이라고 부르던) 의 옷을 사주시고는 했다.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께서 처음부터 그렇게 사준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가끔씩 시장에서 두 색깔의 옷을 사오시고는 우리더러 고르라고 하셨는데, 형은 늘 발랄한 색을 골랐고 나는 예의 그 칙칙한 색을 골랐다. 어머니는 내가 왜 그렇게 그 “똥색”을 좋아하는지 늘 의아해하시곤 하셨는데,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아예 그쪽 계열의 색만 주로 사오시곤 했다.

그럼 나는 과연 그 칙칙한 황토색 옷을 좋아했을까? 전혀 아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눈치를 못채셨을 것이지만, 사실 나는 그 색을 몹시 싫어했고, 그저 좋아하는 척 했을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어렸을 때 다소간 자학적이었다. 그것은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혹은 뛰어넘어서는 안된다는) 한계에서 온 자학같은 것이었다. 나는 형보다 똑똑하지도 못했고, 좀 느리고, 미련한데다가, 숫기도 없었다. 게다가 동네사람들은 형의 이름을 따서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지, 결코 내 이름을 넣어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형과 나는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거기서도 1년 전의 학부형인 어머니를 기억하는 선생님들은 어머니를 그런 식으로 부르곤 했다. 그러니까 나는 여러모로 형보다 늘 열등한 존재였다.(혹은 열등한 존재여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열등한 존재가 존재감을 확인받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월등한 존재를 초월함으로써 저항하는 방법, 두번째는 자신의 열등함을 공론화하여 그 안에서 스스로를 자학하는 방법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망설임없이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사실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나 형이 탁한 색보다는 밝고 화려한 원색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황토색, 특별히 “똥색”이라고 불리는 그 칙칙한 색을 내가 선택함으로써 나는 나의 열등함과 형의 월등함을 돋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게다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탁색을 좋아라 고르는 내 모습을 두고 어머니나 형이 재밌게 혹은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그 속에서 일종의 자학적 위안을 얻고 있었다. 형은 월등해야하고 나는 열등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당위였고, 옷의 색깔은 그 질서를 반영했다.



2. 패션

‘패션’이라는 말은 내게 무척 생소한 단어다. 그러니‘패션’이라는 단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 ‘명품’이란 말 또한 언제나 생소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인 1989년부터 스스로 옷을 사기 시작한 나는, 옷을 스스로 고르는데 사실 오랫동안 상당한 심리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패션에 관심이 거의 없다보니 내 앞에 진열된 옷 가운데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 잘 몰랐고, 나아가 내 선택에 대한 어머니의 고무적이지 못한 비평 때문에 옷을 고르는 자신감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래도 옷은 사입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나도 나름대로는 패션의 주류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까지 소위‘명품’을 사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대학때 친구들과 ‘첨단유행’을 따라잡겠다면서 쑥쓰러워하며 이대 앞의 옷가게를 쇼핑하러 다닌 적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흰색 목폴라가 유행일 때는 목폴라를 (89년), 사파리가 유행일 때는 사파리 재킷을 (90년), 가디건이 유행일 때는 가디건을 (90년), 7부바지가 유행일 때는 7부바지를 (91년), 흰 반팔 티셔츠에 받쳐 입는 여름 망사조끼가 유행일 때는 여름조끼를 (91년), 온 국민을 사로잡았던 검은 가죽점퍼가 유행일 때는 남들보다 한 두달 늦기는 했지만 입고 다녔다 (93년). 나는 이 가죽점퍼를 지금도 내 옷장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일까? 똑같은 옷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산 옷은 내 친구들이 입고 다니는 것보다 왠지 칙칙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의‘패션’을 포기하고, 대신 옷가게 직원의 안목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옷이 필요한 경우에는 길을 가다가 옷가게 마네킹에 코디된 옷 전부, 혹은 팸플렛에 나와있는 그대로 사입는 소위 ‘토털패션’을 지향하게 되었다. 편하기도 하고 신뢰도 가는 방법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걸어다니는 마네킹이 되면 그 뿐이었다.

그렇게 빼입고 학교를 다니던 어느날, 몇몇 친구들이 그날 점심시간에 내가 한번도 가서 밥을 먹어본 적없는 사회과학대학 뒤 청경관에서 나를 봤다고 주장했다. 무슨 소리? 그날 오후 한 교양수업에 지각해 내 좌석을 찾아 들어가던 중, 내 옆옆 자리에 앉은 사학과 학생과 눈이 마주쳤는데, 순간 내 친구들이 청경관에서 과연 누구를 보았던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사학과 학생은 얼굴과 머리 스타일과 안경테를 빼곤, 내가 입고 있던 마네킹 패션을 그대로 입고 있었던 것이다. 머쓱해진 우리는 말없이 희미한 미소와 목례를 교환했다.

94년도에 복학하니 샌들과 반바지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반바지를 입고 다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보이스카우트를 하던 국민학교 시절 이래로 반바지는 다리털이 복실복실한 한국 성인남성들에겐 깨기 힘든 타부였다. 심지어 보이스카우트에서조차 하얀 타이즈를 신고 그 위에 반바지를 입지 않았던가? 샌들도 마찬가지였다. 복학생들은 맨발로 샌들을 신는 것이 왠지 꺼림직해서 꼭 흰색 양말을 착용하곤 했다. (당시 한국인은 모두 흰양말을 줄기차게 신어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대담하게도 맨발에 샌들을 신고 반바지 차림으로 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다. (사실 이것은 나의 두번째 시도였다. 그 전날의 첫번째 시도는 집에서 나와서 15분 간 지하철 역까지 걸어 갔다가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처음 학교로 향하던 날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하철을 타러 역사에서 기다리는 동안, 역에서 학교로 걸어가던 그 20분 동안, 학교 정문에서 강의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나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도 아닌데 왠지 털이 북실한 내 다리에 자꾸만 신경이 갔다. 오죽하면 지하철에서도 구석에 서 있었을까? 당시 일부 남자들 사이에서는 반바지를 입기 위해 다리를 면도하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나의 털복숭이 다리는'야만' 그 차체였다고나 할까? (참고로 나는 발목에서 무릎까지만 털이 많은데, 나는 이를 두고“반바지형 다리”라고 부른다.). 

어쨌거나 이런 통과의례를 마친 후, 반바지와 샌들은 나에게 빼놓을 수 없는‘패션’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하여 1999년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부터의 내 여름패션은 (이곳에서는 한국인들과 일본인 빼고는 '패션'을 말하지 않으므로) 값싼 밝은 회색 면티와 반바지와 샌들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부터 꼭 한번 입고 싶었던 총천연색의 슈퍼맨 반팔셔츠를 2000년 슈퍼히어로스어팰럴 닷컴에서 30% 할인가로 구매해 입고 활보하고 다님으로써 나의  패션은 화룡정점을 찍었다. 

2000년 구매했던 제복 (상)과 2020년 새로 장만한 제복 (하)

이제 사람들은 나의 그런 패션을 일컬어 “후즐근”하다고 말한다.


3. 옷에게 바치는 송가

후즐근하면 어때서?

내가 내 옷들을 아끼는 이유는 그 상표 때문이 아니라, 이 옷들이 내 몸에 잘 길들여지고, 또 그동안 적당히 닳아서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며, 또 '자학'이 아닌 이제 당당한 나의‘선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일 아침마다 샤워를 마치고 그 전날 밤 벗어둔 옷을 집어 입을 때마다, 혹은 옷장에서 뽀송뽀송한 새옷을 꺼내 입을 때마다, 나는 네루다의 시에 애정을 듬뿍 담아 내 옷들에게 읊어주고만 싶어진다.

참으로“후즐근”하지만, 너무도 “사랑하는” 나의 옷들에게.

옷에게 바치는 송가 (頌歌)
- 파블로 네루다

아침마다 너는 기다린다.
옷이여, 의자 위에서
나의 허영과 나의 사랑과
나의 희망, 나의 육체로
너를 채워주길 기다린다.
꿈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물을 떠나
너의 소매 속으로 들어간다.
나의 발은 너의
발의 빈 구멍을 찾는다.
그렇게 해서
나는 너의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의 도움을 받아
목장의 풀을 밟으러 나온다.
나는 詩 속으로 들어가
창문으로
사람들을 바라본다.
남자들, 여자들
사실들과 싸움들이
나를 이루어 간다.
나와 맞서서
나의 손을 만들고 나의 눈을 뜨게 하고
나의 입이 닳도록 한다.
그렇게 해서 옷이여
나도 너를 이루어 간다.

너의 팔꿈치를 빼고
너의 실을 끊고
그렇게 해서 너의 일생은 나의 일생의 모습으로 성장해 간다.
바람에
나부끼고 소리를 낸다.
나의 영혼처럼.
불행한 순간에는 넌 나의 뼈에 붙는다. 밤이면 텅 비는 나의 뼈
어둠과 꿈이 도깨비 모습을 하고
너의 날개와 나의 날개를 가득 채운다.
나는 어느날
어느 적의
총알 하나가
네게 나의 핏자국을 남기지 않을까
걱정도 해본다.
또 어쩌면
일은 그렇게 극적으로 벌어지지 않고
그냥 단순하게
네가 차차 병이 들어 가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옷이여
너는 나와 함께
늙어 가며
나와 나의 몸과 함께
같이 살다가 같이 땅 속으로
들어가리라
.
그래서
날마다
나는 네게 인사를 한다.
정중하게. 그러면 또 너는
나를 껴안고 나는 너를 잊어도 좋다.
우리는 결국 하나니까.
밤이면 너와 나는
바람에 맞서는 동지일 것이고
거리에서나 싸움터에서나
어쩌면 어쩌면 언젠가 움직이지 않는
한 몸일테니까.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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