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광민] 에큐메니칼 써핑 #7: 그리스도의 제자 (Disciples of Christ) 교단 방문 First Christian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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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종교|철학

[© 최광민] 에큐메니칼 써핑 #7: 그리스도의 제자 (Disciples of Christ) 교단 방문 First Christian Church

草人! 2021. 11. 22. 16:20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06-22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에큐메니칼 써핑 #7: 그리스도의 제자 (Disciples of Christ) 교단 방문 First Christian Church 

순서
  1. 방문 교회/교단
  2. 예전
  3. 총평



First 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 Bloomington, IN

1. 방문

교회력 : the 2nd Sunday after Pentecost 6/22/2003

2. 교회/교단

석조로 간결하지만 아름답게 지어진 교회다.

Kirkwood 가에 위치한 이 교회의 이름인 "First Christian Church"는 이 지역에 "처음(First)"생긴 "기독교 교회(Christian Church)라는 뜻이 아니라, 처음 생긴 "그리스도의 교회, Christian Church"라는 교단의 교회라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이 교단은 다른 이름으로 "Disciples of Christ"라고 한다. 이들이 다른교단과 달리 자기 자신들을 단순히 "Chirstian"이라고 부르고, 또 그들의 교단을 그저 "그리스도의 교회 Christian Church" 혹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Disciples of Christ (http://www.disciples.org/)"라고 부르게 된데는 다음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사실 이 교단이 "교단"이 된 것은 이들이 원래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이 교단의 역사는 19세기 초반 미국 동부에서 중부를 휩쓴 미국 최초의 '교단 통합운동' 에서 시작된다. 이 운동은 스톤-캠벨 운동 'Stone-Campbell movement'라고 하는데, 이 운동을 이끈 두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전자인 Bartin Stone이 이끈 그룹은 교단명을 거부하고 단순히 Christians라고 자신들의 무리를 호칭했고, Thomas/Alexander Campbell 부자가 이끈 그룹은 자신들을 'Disciples of Christ'라고 호칭했다.

예배 중 악기 사용과 교단운영에 대한 이견으로 말미암아 19세기 말부터 '그리스도의 교회 (무악기파, Churches of Christ)'와 '그리스도인 교회 (유악기파, Christian Churches)' 사이의 교제 단절이 있었고, 이후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그리스도인교회 (Christian Churches)와 진보적인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Disciples of Christ)'는 신학적인 이유로 1960년대 이후론 별개교단이 된다.

그러나 이 운동의 파장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그룹은 하나의 제도적 교단으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 매우 아이러니 하다. 캠벨의 그룹은 다시 몇개로 나뉘어졌다.

이 운동은 "1세기 교회로의 회복"을 목표로 삼았고, 교단들의 분열을 초래한 신조들을 배제한 교단의 통합을 지향했다. 따라서 AD 4세기에 보편교회가 공표한 일련의 신조들, 특별히 '니케아 신조', 즉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적극적인 긍정을 (그리고 적극적인 부정도) 표현하지 않는다.

이 운동을 시작한 장로교단 출신의 Barton W. Stone 과 침례교단 출신의 Alexander Campbell 은 명시적으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따른 삼위일체' 교리에 회의를 표명했는데, 가령 스톤은 켄터기-테네시-오하이오 지역의 교회에 보내는 {An Address to the Christian Churches in Kentucky, Tennessee & Ohio on Several Important Doctrines of Religion}란 문건에서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말한다.

“My own views of the Son of God, are, that he did not begin to exist 1820 years ago; nor did he exist from eternity; but was the first begotten of the Father before time or creation began. . . . He is not equal in essence, being or eternity; else he could never be subject to the Father – and such an equality would destroy the unity of God. . . . For our authority, we have already produced the scriptures. Let our brethren prove that the Son was eternal and independent; then we will acknowledge that he was eternally divine.”  -- {An Address to the Christian Churches in Kentucky, Tennessee & Ohio on Several Important Doctrines of Religion}

"....'신의 아들 / 성자'에 대한 내 관점은 이러하다: 성자는 1820년 전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시간 이전, 혹은 창조 이전에 성부에게서 독생하셨다.... 성자 (예수)는 본질과 존재 혹은 영원에 있어 (성부와) 같지 않다. 그러나 성부에게 종속된 것도 아니다. 그런 식의 동등성은 신의 단일성을 파괴한다. --- 바톤 W. 스톤,  {An Address to the Christian Churches in Kentucky, Tennessee & Ohio on Several Important Doctrines of Religion} / 번역: 최광민

스톤의 결론은 (1) 성자는 영원하며 (2) 또한 성부로부터 독립적이고 (3) 그러기에 성자의 영원한 신성을 인정하지만 (4) 성부와는 그 본질에 있어 다르다고 본다. 물론 스톤은 "아리우스주의" 혹은 삼위일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1위1체'만의 공식을 따르는 '유니테리안 (단일신론자)'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했지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따르면 스톤은 저 문장 하나만으로도 이미 '아리우스주의자'로 불릴 수 있다.



캠벨은 스톤이 {The Millennial Harbinger}를 통해 보낸 공개편지에서 스톤의 입장을 옹호하며 이렇게 답한다.

 . . . I have long taught that the Trinitarian, Arian, and Sabellian theories are wholly a corrupt speech – irrational and unscriptural speculations . . . I have sometimes seen a sense imposed upon them wholly modern, and which would ultimate in a doctrine as certainly unapostolic as either Arianism or Trinitarianism.”  -- The Millennial Harbinger:

저는 오랫동안 삼위일체론, 아리우스주의, 사벨라우스주의란 이론들이 전적으로 망가진 논설 - 즉 비이성적이고 비성서적인 추론에 불과하다고 오랫동안 가르쳐왔습니다. 저는 종종 전적으로 후대의 의미가 그 이론들에 가미되었다고 종종 여겨왔는데, 아리우스주의든 삼위일체주의든 확실히 사도적이지도 않은 교리로  정착된 것입니다. --- 알렉산더 캠벨, {The Millennial Harbinger} / 번역: 최광민

또 다른 곳에서는 티모시란 독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In the first place I object to the Calvinistic doctrine of the Trinity for the same reasons they object to the Arians and Socinians. They object to these, because their views derogate in their judgment from the eternal glory of the Founder of the Christian religion. They will not allow the Saviour to have been a creature, however exalted, because they conceive this character is unbecoming him, and contrary to the scriptural statements concerning him. They wish to give him more glory than they think the Arians are willing to do. Now I object to their making him and calling him an ‘Eternal Son’ because I think that if he were only the Son of God from all eternity, he is entitled to very little, if any more glory, than what the Arians give him.” --- Alexander Campbell, {The Christian Baptist}

우선, 나는 삼위일체에 관한 칼뱅주의 교리에 반대합니다. 그들이 (=칼뱅주의자) 아리우스주의나 소시니안주의를 반대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나도 (칼뱅주의의 삼위일체 교리)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들 (=칼뱅주의자)은 이들이 기독교 교조 (=예수)의 영원한 영광을 폄훼하는 것이라 판단하기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칼뱅주의자들은 구원자를 "드높여진 피조물"로 보는 생각을 용인할 수 없는데, 이럴 경우 성서에 그 분에 대한 진술된 내용과 달리 그분이 더이상 그분이 아니게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 생각에 아리우스주의자들이 그분께 기꺼이 바쳤던 것 이상의 영광을 그분께 바치길 원합니다. 이제 나는 그들이 그분을 "영원한 아들"로 만들고 그렇게 부르는데 반대합니다. 만약 그분이 영원으로부터 단지 '신의 아들'이었다면, 아리우스주의자들이 그분께 바쳤던 영광보다 오히려 그분을 격하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알렉산더 캠벨, {크리스천 침례교도} vol4, no10, 1827년 / 번역: 최광민



캠벨이 아리우스주의/소시니안주의에 더불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바탕한 칼뱅의 삼위일체 신학을 비판한 배경은 아래와 같다.

아리우스주의 일부 분파와 (후대에 단일신론인 유니테리안으로 발전하는) 소시니안주의에서는 제 2위인 '성자'를 (1) 성부와는 신의 '피조물' 혹은 일종의 최상위 천사로 보고 이 '피조된 성자'가 나중에 '인간 예수'로 성육신했고, 그의 모범과 죽음에 이르는 복종으로 '신의 아들'이란 '지위'를 '획득'했다고 여겼다. 즉, 이들에게 있어 '성자'는 성부 처럼 '영원'하지 않다.

캠벨이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세 신적 위격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세 위격 각각이 영원하다고 여겼다. 피조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 또 캠벨은 '신의 아들' 혹은 '성자'란 지위는 '획득'된 것이 아니라 '성육신'을 통해 신~로고스의 관계가 성부~성자의 관계로 재설정된 것이라 보았다.

"... 또한 한 분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신의 독생자, 세상 이전에 성부로부터 나신 자, 빛으로부터의 빛, 참 신으로부터의 참 신이며, (성부가) 낳으시되 피조되지 않으셨고,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다...." 라고 명시한 AD 5세기의 {니케아-콘스탄니노플 신조}를 계숭하는 칼뱅주의의 입장에서, 성부와 성자의 '본질'은 '동등'하기에 영원한 '성자'의 '탄생'은 피조세계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 가운데서의 탄생'이며, 따라서 성자는 성부의 '영원한 아들'이 된다고 본다. 여기서의 '탄생'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의 탄생이며, 동일한 성자가 인간 예수로 '성육신'한 그 탄생과는 무관하다.

캠벨은 비판한 지점은 특별히 이 부분이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자나 소시니안주의 (유니테리안)의 주장처럼 '성자'가 '피조물'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경우 이 피조되지 않은 영원한 제 2위를 성자' 즉 '신의 아들'이 아니라 '로고스 / 말씀'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엔 "아들" 즉 "성자"란 이 로고스/말씀이 성육신 한 후에나 신~말씀의 관계가 아버지~아들, 즉 성부~성자의 관계로 재차 설정된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The names Jesus, Christ, or Messiah, Only Begotten Son, Son of God, belong to the Founder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to none else. They express not a relation existing before the christian era, but relations which commenced at that time. To understand the relation betwixt the Saviour and his Father, which existed before time, and that relation which began in time, is impossible on either of these theories. There was no Jesus, no Messiah, no Christ, no Son of God, no Only Begotten, before the reign of Augustus Cesar. The relation that was before the christian era, was not that of a son and a father, terms which always imply disparity; but it was that expressed by John in the sentence under consideration. The relation was that of God, and the "word of God."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독생자, 신의 아들 (성자)와 같은 이름들은 오직 기독교의 교조에게만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명칭들은 기독교가 도래하기 전에는 어떤 관계를 표현하는데 사용된 적 없고, 기독교 출현 이후에 그런 관계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 두가지 이론들 (=아리우스, 칼뱅 / 필자 주) 가지고는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 존재한 구원자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와 시간 속에서의 시작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 시절 이전에는 예수도, 메시아도, 그리스도도, 신의 아들도, 독생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출현 이전의 관계는 항상 차이를 암시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며, 이것이 요한(복음)의 해당 문장에 표현된 것입니다. 그 관계란 신적인 관계를 말하며, (그는) "신의 말씀/ 로고스"인 것입니다.  / 번역: 최광민



아마도 아래 단락이 캠벨의 견해를 가장 잘 설명할 듯 싶다. 비유를 통한 캠벨의 논리전개는 문제가 좀 있지만, 그래도 그의 견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As a word is an exact image of an idea, so is "The Word" an exact image of the invisible God. As a word cannot exist without an idea, nor an idea without a word, so God never was without "The Word," nor "The Word" without God; or as a word is of equal age, or co-etaneous with its idea, so "The Word" and God are co-eternal. And as an idea does not create its word, nor a word its idea; so God did not create "The Word," nor the "Word" God.

말이 사고의 정확한 이미지이기에, "말씀"은 불가지한 신의 정확한 이미지입니다. 사고 없이는 말이 존재하지 못하고 사고가 말 없이 존재하지 못하듯, 신 역시 "말씀" 없이 존재하거나 "말씀"이 신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이 그 생각과 동일한 연원을 가진고 동등하듯, "말씀"과 신도 함께 영원합니다. 생각이 말을 창조하거나 말이 생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듯, 신도 "말씀"을 창조하셨거나, "말씀"이 신을 창조한 것도 아니. / 번역: 최광민

Such a view does the language used by John suggest. And to this do all the scriptures agree. For "The Word" was made flesh, and in consequence of becoming incarnate, he is styled the Son of God, the only Begotten of the Father. As from eternity God was manifest in and by "The Word," so now God is manifest in the flesh. As God was always with "The Word," so when "The Word" becomes flesh, he is Emanuel, God with us. 

이런 관점이 바로 요한의 언어가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서의 모든 구절이 이 관점과 일치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 즉 성육신의 결과로 그는 신의 '아들'과 성부의 '독생자'가 되신 것입니다. 영원으로부터 신이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듯,이제 신은 육체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신은 늘 "말씀"과 같이 계시며, 그러기에 이 "말씀"이 육체가 되었을 때 그는 "임마누엘", 즉 "신이 우리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 번역: 최광민



어느 지점에서 캠벨의 견해가 아리우스주의 및 단일신론인 소시니안/유니테리안과 다른지, 그리고 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칼뱅주의의 삼위일체와도 다른지 대략 이해될 것이다. 따라서 스톤이나 캠벨이 '삼위일체를 부정했다"란 말은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화 한 것이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공식에 따른 한 형식 (표준) 삼위일체'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그 핵심은 "성자의 영원한 탄생" 혹은 "성자의 영원한 아들됨"이란 개념을 어떻게 보는가이다.

캠벨은 자신은 이 개념을 누구에게서 배운 바 없는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 개념은 아리우스 논쟁의 여파로 온갖 개념들이 제시되었던 AD 4-5세기의 다양한 견해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성육신 전의 성자는 성자가 아닌 로고스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은 사모사타의 바울이나 마르켈루스의 견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캠벨의 견해는 이때 등장한 여러 주장들의 또 다른 변형이라고 보는게 정확하겠다.

19세기 미국의 환원주의 운동을 이끈 스톤과 캠벨의 이런 관점 (전통적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리우스주의도 아닌) 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교회' 제파들에서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따른 삼위일체'를 기독교의 핵심교리로 명시하지 않으며 대체로 침묵한다. 이 문제는 요새도 종종 이 교단들 내부에서 토론된다고 들었다.

3. 예전

"유악기파" 답게 찬송은 오르간으로 반주되었다. 예전의 순서는 교단과 상관없이 미국의 교회들이 일반적으로 따르고 있는 예전을 따랐으며, "1세기 교회를 지향한다"는 스톤-캠벨주의의 신조에 따라 어떤 형태의 역사적 신경도 복창되지 않았다. 다만 전통적인 송영 (Doxology)는 불려졌다.

사실 송영은 삼위일체, 즉 성부-성자-성령에게 영광을 바치는 노래인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시큰둥한 이 교단에서 불리는 독솔로지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물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공식을 따르지 않아도 성부-성자-성령에게 영광을 돌릴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사뭇 다를 것이다.

고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성찬식은 매주 집전되며, 회중이 앞으로 나가는 대신, 회중 가운데서 빵과 포도주가 나누어졌다.



4. 총평

이 교단의 역사와 신학적 관점에 대한 흥미를 제외한다면, 다른 교회에 비교했을때 이 교회만의 아주 특별한 점은 없었다. 다만 회중들의 연령이 고루 존재한다는 점과, 예전 내내 "회복"이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했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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