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광민] {전도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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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종교|철학

[© 최광민] {전도서} 단상

草人! 2021. 9. 2. 12:24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5-01-10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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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단상

엄밀히 말하면 저자 미상이지만 '지혜의 대명사'로 불리는 솔로몬의 작품으로 전통적으로 여겨져 온 {전도서}는, 성서 전체에서도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문서이기도 하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장 1절의 그 유명한 "헛되다"라는 단어의 반복이 주는 강렬함 때문에 무척이나 염세적인 인상을 물씬 풍기는데, 아닌게 아니라 성서를 통틀어서 "헛되다"라는 단어는 거의 모두 이 {전도서}에 집중되어 있다. 이 책의 소위 '염세성'은 중세 전체를 통해 많은 은둔수도자들의 모델이 되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De contemptu mundi
세상을 경멸하며

- Bernard de Molay, Bernardus Morlanensis
- 클뤼니 수도사, 베르나르 드 몰레, 1140년

Est ubi gloria nunc Babylonia? Nunc ubi dirus
Nabugodonosor, et Darii vigor, illeque Cyrus?
Qualiter orbita viribus incita praeterierunt,
Fama relinquitur, illaque fugitur, hi putruerunt.
Nunc ubi curia, pompaque Julia? Caesar abisti!
Te truculentior, orbe potentior ipse fuisti.

바빌론아, 너의 영광은 어디에 있느냐?
그 무서운 네부카드네자르, 용맹한 다리우스, 고명한 키루스는?
땅이 큰 힘으로 움직여 그들이 사라져간 것처럼
이름은 남았으나 그 육체는 썩어갔구나.
호사스럽던 율리아여, 그대의 궁전은 어디있는가?
그대 온 세상보다도 거칠고 위대하던 카이사르여!

Nunc ubi Marius atque Fabricius inscius auri?
Mors ubi nobilis et memorabilis actio Pauli?
Diva philippica vox ubi coelica nunc Ciceronis?
Pax ubi civibus atque rebellibus ira Catonis?
Nunc ubi Regulus? Aut ubi Romulus, aut ubi Remus?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e nuda tenemus.

마리우스와 물욕을 모르던 피브리키우스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갔는가, 파울루스의 고귀한 행실과 기념할 만한 행적은?
마왕 필리피카의 불길한 소리? 키케로의 그 천상의 소리는?
시민을 위한 평화는 어디로? 반역자에 대한 카토의 분노는?
레글루스는 지금 어디에? 로물루스는, 또 레무스는 어디로?
어제의 장미는 이름 뿐, 그저 이름 만이 남았구나.

그런가하면 보다 적극적이고 치열한 삶의 원리를 강조했던 프로테스탄트 설교자들에게 이 문서는 상당한 당혹감을 선사했는데, 지금도 정열적인 프로테스탄트 설교자들은 {전도서}의 가치를 가급적 폄하하려고 하기도 한다. 즉, 향락과 정략결혼과 우상숭배로 수 십년 간의 타락을 이미 경험했던 솔로몬이 말년에 깨달은 지혜이기 때문에 이토록 염세적일 수 밖에 없다는 식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전도서}의 화자가 인생의 끝은 죽음이라는 새삼스런 발견을 토대로 이 문서의 분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꽤 염세적으로 구술해 나가고는 있지만, 바로 그런 인간의 한계 때문에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삶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점 또한 그는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솔로몬이 인생에서 깨달은 진리란, 행복은 '인생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인생을 관조적으로 즐기는데' 있다는 점이며, 따라서 그의 '헛되다'는 선언은 신의 섭리를 억지로 이해해보려는 인간의 노력을 향한 조소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상 {전도서}는 아주 묘한 방식으로 삶을 긍정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이 {전도서}를 초막절이라 불리는 '수꼿'축제가 시작하기 직전에 낭송한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그들이 즐거운 축제에 앞서서 "헛되다"고 외치는 이 솔로몬의 설교를 낭송하는 이유에 대해 한번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사실상 이는 이 문서가 단지 '염세적'인 메시지 하나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축제 전에 이 글을 낭독함으로써, 축제의 여흥 자체에 "너무 깊이" 빠지지 말 것과, 신을 기억하지 않는 기쁨은 무의미함을 경고한다. 그러나 여기서 "삶에서 누리는 기쁨"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전도서}의 '염세주의'는 은둔수도자들이 세상을 등지는 그런 형태의 '염세주의'가 아니며, 그래서인지 {전도서}는 성서 속의 다른 문서와는 뉘앙스가 꽤 다른 지혜를 가르치고 있다. 그 지혜란 냉정한 엄숙주의도 척박한 금욕주의도 천박한 향락주의도 아닌 바로 중용과 미소와 관조의 미학이다. 그래서 {전도서}에서 "헛되다"고 외치는 전도자의 목소리만 기억하는 사람은 사실은 {전도서}의 정수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인생의 허망함에 대한 교리로부터 출발하는 불교의 초기불경 {법구경}16장인 애호품(愛好品)의 한 게송은 이렇게 가르친다.

# 210 :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운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不當趣所愛 亦莫有不愛
愛之不見憂 不愛亦見憂

하지만  {전도서}의 화자는 사랑하는 자와 언젠가 이별하더라도 살아있는 동안은 그를 사랑하라고 말하리라. 미래의 이별 때문에 현재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 또한, 그가 보기에 "헛된 것"이다.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부르는 佛家의 견해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인생이 물론 유한한 것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상만 쓰고 살 필요는 없는 것. 비록 언젠가 즐거움은 끝나고 장차 고통과 쓸쓸함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때때로 인생에 주어지는 기쁨을 맘껏 누리고 즐기는 것이야 말로 신이 이 땅 위에 발딛고 사는 유한한 우리에게 내린 몫이다.

{전도서}는 말한다.

".... 그렇다.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

... 나는 덧없는 세월을 보내면서 세상만사를 다 겪어보았다. 착한 사람은 착하게 살다가 망하는데 나쁜 사람은 못되게 살면서도 고이 늙어가더구나. 그러니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아라. 왜 제 명도 다 못 채우고, 죽으려고 하는가?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잔치는 기뻐하려고 벌이는 것이다. 포도주는 인생을 즐겁게 하고, 돈은 만사를 해결한다.... 돈이 있으면, 무역에 투자하여라. 여러 날 뒤에 너는 이윤을 남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가 무슨 재난을 만날지 모르니, 투자할 때에는 일곱이나 여덟로 나누어 하여라...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흩어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찾아나설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 뿐.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빛을 보고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해를 보고 산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젊은이여, 젊을 때에, 젊은 날을 즐겨라. 네 마음과 눈이 원하는 길을 따라라. 다만, 네가 하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만은 알아라...



신은 "저 위"에 있고, 인간은 "이 아래"에 있다. (꿈꿀 수는 있지만) 쟁취할 수 없는 완전함과 무한함을 아쉬워하며 비탄하는 것은 유한한 피조물에게는 사실 무의미한 일이다.

찰나의 행복이 지난 후, 일상은 다시 권태로 뒤덮히고, 세상엔 여전히 헐벗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며, 고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범부들의 어깨 위론 인생의 피로가 히말라야 눈사태처럼 엄습하겠지만,

"지금", "여기서",
웃고 즐거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 찰나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야말로,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에게 허용된
우리 만의 몫이니까.

내가 {전도서}를 깊이 읽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였는데, 처음 읽었을 때의 당혹감만큼이나 그 매력은 지금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 사실 나는 삶을 긍정하는 관점에 있어 이 {전도서}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마치 신약성서의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믿음'과 '행위'에 대한 관점에서 서로 상보적이듯, {전도서}와 {요한계시록}은 '현세'와 '내세'에 대한 관점에서 서로 상보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는 인생은 필연적으로 표류한다.

그래서 나는 {전도서}의 핵심을 솔로몬의 다음 선언으로 요약한다.

מִי כְּהֶחָכָם וּמִי יוֹדֵעַ פֵּשֶׁר דָּבָר חָכְמַת אָדָם תָּאִיר פָּנָיו וְעֹז פָּנָיו יְשֻׁנֶּֽא׃

τίς οἶδεν σοφούς καὶ τίς οἶδεν λύσιν ῥήματος σοφία ἀνθρώπου φωτιεῖ πρόσωπον αὐτοῦ καὶ ἀναιδὴς προσώπῳ αὐτοῦ μισηθήσεται

Who is a wise person? Who knows the solution to a problem? A person’s wisdom brightens his appearance, and softens his harsh countenance. [NET]

어떤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인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지혜는 사람의 얼굴을 밝게 하고 굳은 표정을 바꾸어 준다. [새번역]

어떤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인가? 사리를 알아 제대로 풀이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찡그린 얼굴을 펴고 웃음을 짓는 사람, 그가 지혜 있는 사람이다....[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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