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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2018-03-01
제목
[© 최광민] 지미 카터, {구순기념회고록} 번역후기
1. 지미 카터, {구순기념회고록}
지난 여름 주중에는 퇴근한 후 1시간, 주말에는 2-5시간씩 2달 간 번역해 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에 넘긴, 미국 제 39대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지미 카터의 구순기념 회고록이 오늘 자로 서점에 나왔다. 2002년의 {슈거블루스} 이후 두번째 번역이다.
1999년에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20여년 사는 동안,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직을 거쳐갔거나 현재 수행하고 있지만, 사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근세의 미국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지미 카터,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이다.
원서: Jimmy Carter, {A Full Life}
한국어 번역 (최광민): 지미 카터, {구순 기념 회고록}
어린 시절, 내가 읽었던 위인전 속의 “위인”과 고등학생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동일인물의 전기나 평전 속의 묘사가 상당히 달랐던 것을 발견한 이래로 나는 전기물 독서에 꽤 시큰둥한 편이다. 가령, 내가 어린 시절엔 에이브러함 링컨과 존 F 케네디의 전기가 종종 합본으로 나와있는 아동용 위인전이 많았는데,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 어머니 따라간 미용실에서 여성잡지들을 들춰보다 우연히 존 F. 케네디의 엽색행각에 관해 읽고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그 이래로 나는 케네디나 그 일가에 대해서 역시 떨떠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찬양일색인 아동용 위인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비교적 객관적 비평을 시도하려는 평전들 역시 작가의 관점에 의해 윤색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점도 전기류에 대한 나의 시큰둥한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럼 역시 본인이 자신의 삶을 술회한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더 신뢰할 만할까?
사실 “자서전”이나 "회고록"에 대해선 더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 많은 자서전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출판되는 경우가 많고, 그 의도를 해칠 만한 내용들이 본인 선에서 교묘하게 걸러지는 경우가 많다. 쉬운 예로 국회의원 선거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쏟아져 나오는 정치인들의 자서전들이나 회고록들을 떠올려 보자. (나는 한국 정치인으로서는 노태우, 김종필, 김대중 회고록을 소장하고 있다)
위인들이나 유명인사들이 자서전을 남긴 경우는 역사상 그리 많지 않으며 그나마 많은 경우에 대필로 씌여졌으니, “본인의 손으로" 자신의 인생을 “직접 써 내려간” 정말 정의 그대로 자서전은 더욱 드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퇴임 후 성공적인 작가로도 활동해 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아흔 살을 맞아 최근 펴낸 {A Full Life} 는 자서전이나 회고록 본래의 정의에 보다 충실한 책으로 볼 수 있다. 아흔을 넘긴 카터가 이제와서 어떤 특별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회고록을 집필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혹 자신의 이전 과오에 대해 다소 변명을 할 수는 있겠지만.
카터는 자신의 어린시절과 해군 시절, 정치인 시절의 기억, 그리고 이후 자신이 설립한 카터센터의 활동과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이미 출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자서전/회고록은 조금 특별한데, 아흔 살 생일을 맞이하며 자신의 평생을 다시 가지런히 정리해 담으면서 그동안 여러가지 이유로 이전에 출판된 책 속에 담지 않았던 내용들과 특별히 개인적인 일화들을 이번에 많이 수록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민감한 주제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이 이제 대부분 고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책 말미에 피할 수 없는 불행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담담히 적은 것으로 보아, 이 책을 아마도 그의 마지막 책으로 기획한 듯하다. 책이 출판된 2015년 8월 지미 카터는 흑색종이 뇌와 간에 전이되어 항암치료를 받게 된다고 이례적으로 직접 발표하였다 (이듬 해 봄에 완치를 선언했다).
카터를 "순박한 땅콩농부"와 "사랑의 집짓기 운동 (해비태트 포 휴매니티)"란 두 키워드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되는데, 지미 카터가 살아온 아흔 살의 세월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미 카터에 대한 평가는 (찬사와 조소 두가지 뉘앙스 모두로 해석될 수 있는) “가장 성공한 전직 대통령”이란 말로 보통 압축되곤 한다. 많은 흑인들과 농장에서 살아온 어린 시절을 지나, 해군사관학교를 마치고 리코버 제독의 원자력함대의 촉망받는 핵기술장교로서의 경력을 뒤로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냥 땅콩농부가 아닌) 성공한 농자재공급사업가로서의 새로운 경력을 시작으로 1963년 조지아 주 민주당 상원의원으로서 정계에 진출한 후 주지사를 거쳐, 제럴드 포드를 누르고 제 39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1년 레이건과 겨룬 재선에 참패한 후 총 18년의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뒤로한 후, 카터는 현실 정치에 발을 담그지 않고 현재까지 36년 간을 평화와 인권을 화두로 활발한 민간활동을 벌여왔다. 자신의 재선 실패를 복기하는 카터의 평가는 꽤 균형잡혀 있다고 여겨진다.
캠프 데이비드에서 가진 이스라엘-이집트 간 중동평화협상, 덩샤오핑 체제의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 미국인들의 극렬한 반대 속에서도 자신의 원칙에 따라 결단한 역사적인 파나마 운하 반환 등 그가 현직에 있을 때 이끈 굵직한 국제사안 뿐 아니라, 퇴임 후 설립한 카터센터 통해 남미와 아프리카, 중국에서 자유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벌인 노력이라든지, 국제분쟁지에 개인자격으로 혹은 특사자격으로 파견되어 정열적으로 활동한 내용을 적어내려갔다.
물론 원칙을 강조하는 지미 카터의 철학과 활동은 정치인 시절과 민간활동가 시절 내내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 확산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일관되게 삼아 온 그에게 훗날 노벨평화상이 수여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제평화에 대한 그의 인식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추상적이며 심지어 유약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훗날 브레진스키의 고백에 따르면) CIA를 통해 아프카니스탄의 친-소련 정권 반대파들, 즉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인 무자헤딘에 대한 비밀지원을 1979년 7월에 승인하여 그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결과적으로 유인한 것이 바로 카터 행정부였다. 그때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카터가 지원했던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은 이후 테러조직으로 재편되었고 그 결과를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보고 있다.
카터는 임기 중 여권신장을 도모하고 많은 정부직에 여성을 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재임 중 많은 (보수적) 여성단체들이 카터의 여권신장 정책에 반발했다.
평생을 열정적인 민주당원으로 살아왔지만, 경쟁자이자 당내의 거물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과의 불화 때문에 카터는 종종 법안의 의회통과를 위해 종종 공화당 의원들 가운데서 우군을 찾아야했고, 또 재선으로 가는 과정도 순조롭지 않았다. 카터가 재선선거 때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자 상당수의 로버트 케네디 지지자들은 카터가 아닌 제 3자에게 표를 줘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골수 민주당 당원인 카터와 가장 좋은 관계를 가졌던 전직 대통령은 공화당의 제럴드 포드와 역시 공화당의 조지 H.W. 부시 (아버지) 대통령이었다. 어찌보면 카터는 케네디, 특별히 로버트 케네디와 애증관계를 가졌는데, 그래서인지 "넥스트 케네디"를 외치며 등장한 클린턴 (부부)와 오바마에 대해 꽤 탐탁지 않아하는 인상을 준다. (사실 나도 클린턴, 앨 고어, 오마바 선거 때마다 케네디 일가들이 민주당에 굵직굵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또 선거지원 연설마다 케네디를 말끝 마다 올리는 것이 매우 거북했다.)
현직에 있던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스라엘-이집트 간 중동평화에 기여한 그의 공로는 크지만, 그 지역의 평화는 그리 쉽게 오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구상안을 놓고 이에 반발하는 미국 유대인 유권자들의 표심을 두려워한 클린턴과 오바바 선거본부로부터 냉대를 받기도 했다.
헌신적인 기독교 복음주의자로서 기독교적 가치를 온건하게 현실에 구현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건과 벌인 1981년 재선에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은 카터에게 등을 돌리고 그동안 자신들과 공유점을 찾기 어려웠던 로널드 레이건을 전폭 지지하는 기이한 선택을 하기도 했다. 미국의 기독교 복음주의자들, 특별히 기독교 "우파"로 분류될 그룹은 이후 공화당과 깊은 밀월관계를 갖게 되었고,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이 그들과 종교적 접점을 찾기 힘든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면서 1981년의 이 일화가 다시 한번 재조명되기도 했다. 한편, 강고한 복음주의자였던 카터는 2009년에는 그가 속해있던 보수적인 남침례교단에서의 (여성목사 안수문제를 포함한) 여성의 지위 문제로 인해 그 교단을 떠나기로 결정했는가 하면, 또 2015년에는 허핑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낙태와 관련해서는 기존의 입장처럼 제한적 경우를 제외한 낙태반대를 재천명한 반면, 동성결혼 문제와 관련해서는 "예수는 만약 정직하고 신실하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어떤 사랑도 지지했을 것"라는 사견을 밝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카터는 음모론에도 종종 등장하는데, 빌더버그 클럽이나 2017년 타계한 카터 행정부의 안보보좌관이기도 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이 1973년 창립한 삼극위원회 (The Trilateral Commission)를 프리메이슨 류 그림자 정부의 조직이라고 믿는 (대개 미국의 기독교 우파들인) "세계그림자정부" 음모론자들은 주지사 시절 삼극위원회에 가입했던 무명의 카터가 그림자 정부의 비호를 받아 대통령으로 등극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음모론에서조차 카터의 종교성과 인품을 공격하긴 어렵기 때문인지, 음모세력에 "순진하게 이용당했"다는 식으로 풀이한다.).
또 그런가 하면 그가 1960년 말에 조지아에서 목격했던 UFO 이야기는 이후 사실관계가 크게 와전되어 "카터가 외계인을 만났다"는 주장으로 지금까지도 떠돌고 있다. 이 책에서 카터는 그 내막을 보다 자세하고 유쾌하게 적는다.
한국인들에겐 지미 카터가 남/북한과 가져온 관계가 가장 먼저 궁금할 것이다. 나는 "지미 카터"란 이름을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들었다. 1979년 6월 29일 (당시엔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잘 몰랐던) 미국의 카터 대통령 부부의 한국방문을 전하던 저녁시간 TV뉴스를 통해서였다. 당시 미군철수라는 카드를 쥐고 있던 카터는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한 국회연설에서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성토하였고, 박정희 대통령과 가진 개인회담의 분위기는 카터 본인이 밝혔다시피 매우 험악했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박정희 대통령 지지자들 가운데는 카터에 대해 치를 떠는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그를 "친북" 혹은 "종북"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친중"이기는 해도 북한정권에 아주 우호적인 인물이라고 보긴 힘들 것 같다. 어쩌면 그의 대북접근법은 그의 친중 성향을 바탕해서 이해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가하면 그로부터 3달 후 벌어진 박정희 대통령 피격사망과 12.12 쿠데타, 그리고 이듬 해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신군부의 정권장악을 사실상 방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반독재 진영 내에 퍼지면서 1980년대 내내 민주화 진영에 반미감정이 확산되는 계기를 초래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사실 주한미군철수나 박정희 이야기는 이 책에서 아주 작게 다뤄지고 있다. 엄밀히 말해 카터의 인권외교가 당시 주력했던 지역은 남한이 아니라 중남미와 아프리카였기 때문이고, 그 지역에서 사실 많은 성과를 얻어냈다. 카터가 여러 군사독재자들을 다뤘던 이야기가 특별히 흥미로운데, 이상하게도 지미 카터와 회담했던 독재자들은 오래가지 못해 이런저런 이유로 급사하곤 했다. 김일성도 예외는 아니다.
카터가 1980년 11월 재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참패하고 정계를 떠났으므로 한동안 한국 매체에서 그의 이름을 들을 일은 없었다. 군복무를 하던 시절이던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 (NPT)을 탈퇴하면서 소위 제 1차 북핵사태가 벌어졌고, 이듬해 복학을 하고난 직후에는 남북 특사교환 실무회담에서 나온 그 유명한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온 나라가 요동을 쳤다. 그때 15년 만에 지미 카터가 다시 등장했다. 1994년 6월 15일, 지미/로잘린 카터 부부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개인자격으로 방문해 다음날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북핵문제 해결안을 놓고 협상을 벌인 것이다. 비록 3주 후 김일성 주석이 돌연 사망하여 당시 합의된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해 가을 제네바 합의로 제 1차 북핵위기는 일단 마무리 되었다.
지미 카터는, 같은 해 12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반군 지도자인 라도반 카라지치와 극적인 담판을 이끌어 내며 한국뉴스에 다시 등장했다가, 이후엔 해비태트 포 휴매니티 활동과 관련된 기사에서나 가끔씩 그 이름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다시 2002년 그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후 그의 이름을 내가 다시 듣게 된 것은 2011년 4월에 전직 세계지도자들의 모임인 '디 엘더스(The Elders)' 회원들을 이끌고 한반도 평화와 식량지원문제를 논의하러 방북한 때였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의심할 나위없는 그의 진심과 열의에도 불구하고, 1994년 제1차 북핵위기 때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벌인 협상은 당시엔 표면적으로나마 성공이었으나, 김일성의 사망 이후 후계자들에 의한 북한의 핵개발 재개로 결과적으론 북한이 핵개발을 할 시간만 벌어준 셈이란 냉정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땅콩사업과 농자재사업으로 성공한 농부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카터는 미 해군에 원자력 함대를 창설한 리코버 제독 사단의 촉망받던 핵잠수함 전문기술장교였다. 그는 방사선 최대 피폭허용기준이 현재의 100배이던 1950년대 초반 캐나다 초크리버 중수로의 노심용해 사태 때 해군 기술팀을 이끌고 사고 원자로 내부로 들어가 해체 및 교체작업을 직접 진행했던 원자로 전문가이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중 카터는 핵확산방지의 핵심인 핵원료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하기 위해 미국 내에서 부산물로 플루토늄이 생산되는 증식로의 추가건설을 중단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전에 가장 악명이 높았던 미국 쓰리마일 원전사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카터는,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실제로 사고원전에서 일어났던 사태보다는 당시 미디어에 의한 과장된 보도행태를 더 우려하며, 또 원자력 기술 자체는 비교적 안전하고 통제가능하지만 인재를 피할 운영요원의 교육과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는 원전건설의 폭주에 제동을 걸었고 오일쇼크의 와중에 그 대안으로 신재생 에너지원의 중장기 개발계획을 수립했다.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2017년 한국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미 카터는 지금도 후임 대통령들에 대해 쓴소리를 해서 가끔씩 논란이 되곤 하는데, 그의 후임자들이 인권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자국인의 사생활 침해를 국가안보라는 명목으로 그동안 오랫동안, 특별히 9/11 이후 노골적으로 방조해왔다는 점을 우선 따끔하게 꼬집는다. 이 문제는 그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에 직격으로 위배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공화 할 것 없이 미국의 대선캠페인을 금권선거로 물들이고 있다는 지적은 이 책에서 꼽을 수 있는 가장 따끔한 지적이 아닐까 싶다. 납세자들이 1달러씩 기부하여 조성된 공적선거자금으로 대선을 치렀던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등과 달리 각각 10억 달러 이상의 선거자금을 주로 수퍼팩들을 통해 끌어들인 공화당 미트 롬니와 버락 오바마를 비판하면서, 카터는 "....이 금액은 주요 정당 하나의 전체 예산과 맞먹는 것이며, 선거 직전에 증액될 수도 있다. 민주당 후보들도 이런 기금에 대응하는 돈을 따내려 시도할 것이다..."라고 이 책에서 씁쓸한 논평을 했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2016년 7월 대선 후보경선을 공정하게 감독하는 민주당 전국위원장으로 취임해 대선캠페인을 지휘했던 도나 브라질은 민주당 경선이 시작하기 몇 달 전이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제치고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기 거의 1년 전인 2015년 8월, 힐러리 클린턴 선거본부가 오바마 시절 과도한 비용을 지출해 재정난에 빠진 민주당 전국위원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힐러리 측이 “운영의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폭로했다 (한편, 카터는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자서전/회고록을 포함한 전기물에 다소 시큰둥한 내가 지미 카터의 자서전을 번역하게 되어 나도 약간은 당혹스러웠지만, 푸근한 미소로 유명한 아흔살의 노인이 자신의 평생을 담담하게 술회하는 것을 읽는 한편 이 책 속 내용과 관련된 자료들, 특별히 그가 출연한 과거의 영상물들을 찾아보면서, 왜 지미 카터가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여전히 받고 있는 “가장 성공한 전직 대통령”일 수 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기회가 되면, 플레인즈에 한번 다녀오려고 한다.
草人 최광민
즐감하시길!
색인:
지난 여름 주중에는 퇴근한 후 1시간, 주말에는 2-5시간씩 2달 간 번역해 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에 넘긴, 미국 제 39대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지미 카터의 구순기념 회고록이 오늘 자로 서점에 나왔다. 2002년의 {슈거블루스} 이후 두번째 번역이다.
1999년에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20여년 사는 동안,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직을 거쳐갔거나 현재 수행하고 있지만, 사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근세의 미국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지미 카터,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이다.
원서: Jimmy Carter, {A Full Life}
한국어 번역 (최광민): 지미 카터, {구순 기념 회고록}
어린 시절, 내가 읽었던 위인전 속의 “위인”과 고등학생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동일인물의 전기나 평전 속의 묘사가 상당히 달랐던 것을 발견한 이래로 나는 전기물 독서에 꽤 시큰둥한 편이다. 가령, 내가 어린 시절엔 에이브러함 링컨과 존 F 케네디의 전기가 종종 합본으로 나와있는 아동용 위인전이 많았는데,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 어머니 따라간 미용실에서 여성잡지들을 들춰보다 우연히 존 F. 케네디의 엽색행각에 관해 읽고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그 이래로 나는 케네디나 그 일가에 대해서 역시 떨떠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찬양일색인 아동용 위인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비교적 객관적 비평을 시도하려는 평전들 역시 작가의 관점에 의해 윤색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점도 전기류에 대한 나의 시큰둥한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럼 역시 본인이 자신의 삶을 술회한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더 신뢰할 만할까?
사실 “자서전”이나 "회고록"에 대해선 더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 많은 자서전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출판되는 경우가 많고, 그 의도를 해칠 만한 내용들이 본인 선에서 교묘하게 걸러지는 경우가 많다. 쉬운 예로 국회의원 선거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쏟아져 나오는 정치인들의 자서전들이나 회고록들을 떠올려 보자. (나는 한국 정치인으로서는 노태우, 김종필, 김대중 회고록을 소장하고 있다)
위인들이나 유명인사들이 자서전을 남긴 경우는 역사상 그리 많지 않으며 그나마 많은 경우에 대필로 씌여졌으니, “본인의 손으로" 자신의 인생을 “직접 써 내려간” 정말 정의 그대로 자서전은 더욱 드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퇴임 후 성공적인 작가로도 활동해 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아흔 살을 맞아 최근 펴낸 {A Full Life} 는 자서전이나 회고록 본래의 정의에 보다 충실한 책으로 볼 수 있다. 아흔을 넘긴 카터가 이제와서 어떤 특별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회고록을 집필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혹 자신의 이전 과오에 대해 다소 변명을 할 수는 있겠지만.
카터는 자신의 어린시절과 해군 시절, 정치인 시절의 기억, 그리고 이후 자신이 설립한 카터센터의 활동과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이미 출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자서전/회고록은 조금 특별한데, 아흔 살 생일을 맞이하며 자신의 평생을 다시 가지런히 정리해 담으면서 그동안 여러가지 이유로 이전에 출판된 책 속에 담지 않았던 내용들과 특별히 개인적인 일화들을 이번에 많이 수록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민감한 주제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이 이제 대부분 고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책 말미에 피할 수 없는 불행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담담히 적은 것으로 보아, 이 책을 아마도 그의 마지막 책으로 기획한 듯하다. 책이 출판된 2015년 8월 지미 카터는 흑색종이 뇌와 간에 전이되어 항암치료를 받게 된다고 이례적으로 직접 발표하였다 (이듬 해 봄에 완치를 선언했다).
카터를 "순박한 땅콩농부"와 "사랑의 집짓기 운동 (해비태트 포 휴매니티)"란 두 키워드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되는데, 지미 카터가 살아온 아흔 살의 세월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미 카터에 대한 평가는 (찬사와 조소 두가지 뉘앙스 모두로 해석될 수 있는) “가장 성공한 전직 대통령”이란 말로 보통 압축되곤 한다. 많은 흑인들과 농장에서 살아온 어린 시절을 지나, 해군사관학교를 마치고 리코버 제독의 원자력함대의 촉망받는 핵기술장교로서의 경력을 뒤로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냥 땅콩농부가 아닌) 성공한 농자재공급사업가로서의 새로운 경력을 시작으로 1963년 조지아 주 민주당 상원의원으로서 정계에 진출한 후 주지사를 거쳐, 제럴드 포드를 누르고 제 39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1년 레이건과 겨룬 재선에 참패한 후 총 18년의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뒤로한 후, 카터는 현실 정치에 발을 담그지 않고 현재까지 36년 간을 평화와 인권을 화두로 활발한 민간활동을 벌여왔다. 자신의 재선 실패를 복기하는 카터의 평가는 꽤 균형잡혀 있다고 여겨진다.
캠프 데이비드에서 가진 이스라엘-이집트 간 중동평화협상, 덩샤오핑 체제의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 미국인들의 극렬한 반대 속에서도 자신의 원칙에 따라 결단한 역사적인 파나마 운하 반환 등 그가 현직에 있을 때 이끈 굵직한 국제사안 뿐 아니라, 퇴임 후 설립한 카터센터 통해 남미와 아프리카, 중국에서 자유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벌인 노력이라든지, 국제분쟁지에 개인자격으로 혹은 특사자격으로 파견되어 정열적으로 활동한 내용을 적어내려갔다.
물론 원칙을 강조하는 지미 카터의 철학과 활동은 정치인 시절과 민간활동가 시절 내내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 확산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일관되게 삼아 온 그에게 훗날 노벨평화상이 수여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제평화에 대한 그의 인식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추상적이며 심지어 유약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훗날 브레진스키의 고백에 따르면) CIA를 통해 아프카니스탄의 친-소련 정권 반대파들, 즉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인 무자헤딘에 대한 비밀지원을 1979년 7월에 승인하여 그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결과적으로 유인한 것이 바로 카터 행정부였다. 그때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카터가 지원했던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은 이후 테러조직으로 재편되었고 그 결과를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보고 있다.
카터는 임기 중 여권신장을 도모하고 많은 정부직에 여성을 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재임 중 많은 (보수적) 여성단체들이 카터의 여권신장 정책에 반발했다.
평생을 열정적인 민주당원으로 살아왔지만, 경쟁자이자 당내의 거물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과의 불화 때문에 카터는 종종 법안의 의회통과를 위해 종종 공화당 의원들 가운데서 우군을 찾아야했고, 또 재선으로 가는 과정도 순조롭지 않았다. 카터가 재선선거 때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자 상당수의 로버트 케네디 지지자들은 카터가 아닌 제 3자에게 표를 줘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골수 민주당 당원인 카터와 가장 좋은 관계를 가졌던 전직 대통령은 공화당의 제럴드 포드와 역시 공화당의 조지 H.W. 부시 (아버지) 대통령이었다. 어찌보면 카터는 케네디, 특별히 로버트 케네디와 애증관계를 가졌는데, 그래서인지 "넥스트 케네디"를 외치며 등장한 클린턴 (부부)와 오바마에 대해 꽤 탐탁지 않아하는 인상을 준다. (사실 나도 클린턴, 앨 고어, 오마바 선거 때마다 케네디 일가들이 민주당에 굵직굵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또 선거지원 연설마다 케네디를 말끝 마다 올리는 것이 매우 거북했다.)
현직에 있던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스라엘-이집트 간 중동평화에 기여한 그의 공로는 크지만, 그 지역의 평화는 그리 쉽게 오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구상안을 놓고 이에 반발하는 미국 유대인 유권자들의 표심을 두려워한 클린턴과 오바바 선거본부로부터 냉대를 받기도 했다.
헌신적인 기독교 복음주의자로서 기독교적 가치를 온건하게 현실에 구현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건과 벌인 1981년 재선에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은 카터에게 등을 돌리고 그동안 자신들과 공유점을 찾기 어려웠던 로널드 레이건을 전폭 지지하는 기이한 선택을 하기도 했다. 미국의 기독교 복음주의자들, 특별히 기독교 "우파"로 분류될 그룹은 이후 공화당과 깊은 밀월관계를 갖게 되었고,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이 그들과 종교적 접점을 찾기 힘든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면서 1981년의 이 일화가 다시 한번 재조명되기도 했다. 한편, 강고한 복음주의자였던 카터는 2009년에는 그가 속해있던 보수적인 남침례교단에서의 (여성목사 안수문제를 포함한) 여성의 지위 문제로 인해 그 교단을 떠나기로 결정했는가 하면, 또 2015년에는 허핑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낙태와 관련해서는 기존의 입장처럼 제한적 경우를 제외한 낙태반대를 재천명한 반면, 동성결혼 문제와 관련해서는 "예수는 만약 정직하고 신실하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어떤 사랑도 지지했을 것"라는 사견을 밝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카터는 음모론에도 종종 등장하는데, 빌더버그 클럽이나 2017년 타계한 카터 행정부의 안보보좌관이기도 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이 1973년 창립한 삼극위원회 (The Trilateral Commission)를 프리메이슨 류 그림자 정부의 조직이라고 믿는 (대개 미국의 기독교 우파들인) "세계그림자정부" 음모론자들은 주지사 시절 삼극위원회에 가입했던 무명의 카터가 그림자 정부의 비호를 받아 대통령으로 등극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음모론에서조차 카터의 종교성과 인품을 공격하긴 어렵기 때문인지, 음모세력에 "순진하게 이용당했"다는 식으로 풀이한다.).
또 그런가 하면 그가 1960년 말에 조지아에서 목격했던 UFO 이야기는 이후 사실관계가 크게 와전되어 "카터가 외계인을 만났다"는 주장으로 지금까지도 떠돌고 있다. 이 책에서 카터는 그 내막을 보다 자세하고 유쾌하게 적는다.
한국인들에겐 지미 카터가 남/북한과 가져온 관계가 가장 먼저 궁금할 것이다. 나는 "지미 카터"란 이름을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들었다. 1979년 6월 29일 (당시엔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잘 몰랐던) 미국의 카터 대통령 부부의 한국방문을 전하던 저녁시간 TV뉴스를 통해서였다. 당시 미군철수라는 카드를 쥐고 있던 카터는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한 국회연설에서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성토하였고, 박정희 대통령과 가진 개인회담의 분위기는 카터 본인이 밝혔다시피 매우 험악했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박정희 대통령 지지자들 가운데는 카터에 대해 치를 떠는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그를 "친북" 혹은 "종북"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친중"이기는 해도 북한정권에 아주 우호적인 인물이라고 보긴 힘들 것 같다. 어쩌면 그의 대북접근법은 그의 친중 성향을 바탕해서 이해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가하면 그로부터 3달 후 벌어진 박정희 대통령 피격사망과 12.12 쿠데타, 그리고 이듬 해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신군부의 정권장악을 사실상 방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반독재 진영 내에 퍼지면서 1980년대 내내 민주화 진영에 반미감정이 확산되는 계기를 초래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사실 주한미군철수나 박정희 이야기는 이 책에서 아주 작게 다뤄지고 있다. 엄밀히 말해 카터의 인권외교가 당시 주력했던 지역은 남한이 아니라 중남미와 아프리카였기 때문이고, 그 지역에서 사실 많은 성과를 얻어냈다. 카터가 여러 군사독재자들을 다뤘던 이야기가 특별히 흥미로운데, 이상하게도 지미 카터와 회담했던 독재자들은 오래가지 못해 이런저런 이유로 급사하곤 했다. 김일성도 예외는 아니다.
카터가 1980년 11월 재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참패하고 정계를 떠났으므로 한동안 한국 매체에서 그의 이름을 들을 일은 없었다. 군복무를 하던 시절이던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 (NPT)을 탈퇴하면서 소위 제 1차 북핵사태가 벌어졌고, 이듬해 복학을 하고난 직후에는 남북 특사교환 실무회담에서 나온 그 유명한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온 나라가 요동을 쳤다. 그때 15년 만에 지미 카터가 다시 등장했다. 1994년 6월 15일, 지미/로잘린 카터 부부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개인자격으로 방문해 다음날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북핵문제 해결안을 놓고 협상을 벌인 것이다. 비록 3주 후 김일성 주석이 돌연 사망하여 당시 합의된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해 가을 제네바 합의로 제 1차 북핵위기는 일단 마무리 되었다.
지미 카터는, 같은 해 12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반군 지도자인 라도반 카라지치와 극적인 담판을 이끌어 내며 한국뉴스에 다시 등장했다가, 이후엔 해비태트 포 휴매니티 활동과 관련된 기사에서나 가끔씩 그 이름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다시 2002년 그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후 그의 이름을 내가 다시 듣게 된 것은 2011년 4월에 전직 세계지도자들의 모임인 '디 엘더스(The Elders)' 회원들을 이끌고 한반도 평화와 식량지원문제를 논의하러 방북한 때였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의심할 나위없는 그의 진심과 열의에도 불구하고, 1994년 제1차 북핵위기 때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벌인 협상은 당시엔 표면적으로나마 성공이었으나, 김일성의 사망 이후 후계자들에 의한 북한의 핵개발 재개로 결과적으론 북한이 핵개발을 할 시간만 벌어준 셈이란 냉정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땅콩사업과 농자재사업으로 성공한 농부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카터는 미 해군에 원자력 함대를 창설한 리코버 제독 사단의 촉망받던 핵잠수함 전문기술장교였다. 그는 방사선 최대 피폭허용기준이 현재의 100배이던 1950년대 초반 캐나다 초크리버 중수로의 노심용해 사태 때 해군 기술팀을 이끌고 사고 원자로 내부로 들어가 해체 및 교체작업을 직접 진행했던 원자로 전문가이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중 카터는 핵확산방지의 핵심인 핵원료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하기 위해 미국 내에서 부산물로 플루토늄이 생산되는 증식로의 추가건설을 중단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전에 가장 악명이 높았던 미국 쓰리마일 원전사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카터는,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실제로 사고원전에서 일어났던 사태보다는 당시 미디어에 의한 과장된 보도행태를 더 우려하며, 또 원자력 기술 자체는 비교적 안전하고 통제가능하지만 인재를 피할 운영요원의 교육과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는 원전건설의 폭주에 제동을 걸었고 오일쇼크의 와중에 그 대안으로 신재생 에너지원의 중장기 개발계획을 수립했다.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2017년 한국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미 카터는 지금도 후임 대통령들에 대해 쓴소리를 해서 가끔씩 논란이 되곤 하는데, 그의 후임자들이 인권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자국인의 사생활 침해를 국가안보라는 명목으로 그동안 오랫동안, 특별히 9/11 이후 노골적으로 방조해왔다는 점을 우선 따끔하게 꼬집는다. 이 문제는 그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에 직격으로 위배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공화 할 것 없이 미국의 대선캠페인을 금권선거로 물들이고 있다는 지적은 이 책에서 꼽을 수 있는 가장 따끔한 지적이 아닐까 싶다. 납세자들이 1달러씩 기부하여 조성된 공적선거자금으로 대선을 치렀던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등과 달리 각각 10억 달러 이상의 선거자금을 주로 수퍼팩들을 통해 끌어들인 공화당 미트 롬니와 버락 오바마를 비판하면서, 카터는 "....이 금액은 주요 정당 하나의 전체 예산과 맞먹는 것이며, 선거 직전에 증액될 수도 있다. 민주당 후보들도 이런 기금에 대응하는 돈을 따내려 시도할 것이다..."라고 이 책에서 씁쓸한 논평을 했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2016년 7월 대선 후보경선을 공정하게 감독하는 민주당 전국위원장으로 취임해 대선캠페인을 지휘했던 도나 브라질은 민주당 경선이 시작하기 몇 달 전이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제치고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기 거의 1년 전인 2015년 8월, 힐러리 클린턴 선거본부가 오바마 시절 과도한 비용을 지출해 재정난에 빠진 민주당 전국위원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힐러리 측이 “운영의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폭로했다 (한편, 카터는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자서전/회고록을 포함한 전기물에 다소 시큰둥한 내가 지미 카터의 자서전을 번역하게 되어 나도 약간은 당혹스러웠지만, 푸근한 미소로 유명한 아흔살의 노인이 자신의 평생을 담담하게 술회하는 것을 읽는 한편 이 책 속 내용과 관련된 자료들, 특별히 그가 출연한 과거의 영상물들을 찾아보면서, 왜 지미 카터가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여전히 받고 있는 “가장 성공한 전직 대통령”일 수 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기회가 되면, 플레인즈에 한번 다녀오려고 한다.
草人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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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1
외전, 朕夷天子傳
외전, 朕夷天子傳
먼 훗날, 역사가 전설이 되면 아마도 이런 설화가 등장하지 않을까 싶어 한번 "전설"을 만들어 봤다.
혹시 나중에 카터 옹을 만나면 이를 번역해서 들려주면 어떨까 생각도 해봤으나, 아무래도 한국식 아재개그를 그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울 듯.
즐감하시길!
朕夷天子傳 지미천자전
--- 草人先生, {亞才錄 아재록}, [千兆天子列傳 천조천자 열전]
옛날 옛적 천축국 天竺國 인단야 印丹野에 천문과 풍수에 능한 아재란다 亞才蘭多스님이 살고 계셨어요.
어느날 스님은 천조 명의 불자 $子가 산다는 천조불국 千兆$國 쪽 천문을 지켜보시다가 그 나라를 다스릴 새 천자 天子가 탄생한 기운을 느끼셨어요. 당시 천하는 녹순천자 錄巡天子 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남만월국 南蠻月國에서 봉기한 홍건적 紅巾賊을 무리하게 정벌하느라 국력이 쇠진되고, 녹순 錄巡 치세 4년 차에 큰 제방의 수문 水門이 터져 많은 사람이 죽는 흉흉한 재앙으로 결국 민심을 잃고 천자가 쫓겨날 지경에 이르렀답니다.
새 천자를 찾아 나귀에 올라 천하를 헤맨지 어언 10년. 어느날 아침 스님은 남녘의 드넓은 조지야 朝地野 평원에 들어서게 되시었어요.
끝없이 땅콩밭이 펼쳐진 평촌 平村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밭일을 마친 먼지투성이 소년이 동구 밖 우물가에 큰 포대를 쌓아두고 씻고 있는 것을 보시고 갈증을 느낀 스님은 소년에게 물 한바가지를 청하셨어요. 소년은 스님이 물을 급히 마시다가 체할까 우려하여 물이 가득한 표주박 위에 땅콩껍질을 동동 띄워 스님께 건네주었답니다.
소년의 사려깊음에 감복한 스님은, "애야,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셨어요.
"수확한 땅콩을 씻고 있습니다. 스님", 소년이 공손히 답했어요.
"어린 나이에 참 대견하구나. 이름이 어찌되는고?", 스님이 다시 묻자 소년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또박또박 답했어요.朕(짐)
이
카
터
자신을 짐 朕이라 호칭하며 천자임을 스스로 밝힌 소년의 말에 깜짝 놀란 스님은, 나귀에서 뛰어내려 소년 앞에 크게 합장하시고 소년을 차기 천자로 수지하셨어요. 목적을 마치신 스님은 흥겹게 게송을 설하시며 천축 가는 배에 올라 친히 노를 저어 돌아가셨답니다.亞才亞才 아재아재
波羅亞才 팔아아재
冊波羅野才 책팔아야재
至匊棇 지국총
至匊棇 지국총
於思臥 앗싸아
이 소년이 자라 훗날 포두천자 包頭天子에 이어 제 39대 천자로 등극한 지미천자 朕夷天子 입니다.
색인:
- 天竺國 (천축국)
- 印丹野 (인단야, 혹은 Indiana)
- 亞才蘭多 (아재란다)
- 錄巡 (녹순, 혹은 Nixon)
- $子(불자 혹은 佛子)
- 千兆$國 (천조불국)
- 南蠻月國 (남만월국, 혹은 Vietnam)
- 紅巾賊 (홍건적, 혹은 빨갱이)
- 水門 (수문, 혹은 Watergate)
- 朝地野 (조지야, 혹은 Georgia)
- 平村(평촌, 혹은 Plains)
- 包頭 (포두, 혹은 Ford)
- 朕夷 (짐이, 혹은 Jim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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