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4-09-18, 2009-03-03
저작권(© 최광민) 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전쟁에 관한 기독교 초기교부들의 견해 (© 최광민)
순서
© 최광민, Kwangmin Choi, 2004-09-18, 200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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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쟁에 관한 기독교 초기교부들의 견해 (© 최광민)
순서
- 기억
- 살인금지 계명
- 밀라노 칙령 (AD 313) 이전
- 안티오키아 주교 이그나티오스 (AD 35-108)
- 사마리아의 유스티노스 (AD 100-165)
- 앗시리아인 타티아노스 (AD 120-180)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AD 150-215)
- 루그두눔 (=리옹) 주교 이레네우스 ( ? - AD 202)
- 로마의 히폴리투스 (?- AD 235)
-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AD 160 - 225)
-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 (AD 184/185 - 253/254)
-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 (AD 200-258)
- 아르노비우스 (? - AD 330)
- 락탄티우스 (AD 240-320)
- 팅기스의 마르켈루스 (? - AD 298)
- 유페미아
- 밀라노 칙령 이후
-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오스 (AD 296-373)
- 투르의 마르티누스 (AD 316-397)
- 카이사리아 주교 바실리오스 (AD 329-379)
- 닛사 주교 그레고리오스 (AD 330-395)
- 콘스탄티노플 주교 크리소스토모스 (AD 347-407)
- 기독교도 간의 전쟁행위 (옮기는 중)
- 정리
제 1차 예루살렘 십자군 원정, 1099년
전통적인 성직의 직제는 그리스어 ἐπίσκοπος (= bishop / 주교 / 감독) , πρεσβύτερος (priest = presbyter /elder / 사제 / 장로~목사), διάκονος (= deacon / 부제 / (안수)집사) 이다. 로마카톨릭+정교회+성공회에 대응하는 성직의 한국어 표기로는 주교/사제/부제를, 그외의 프로테스탄트 교단의 경우는 감독/장로~목사/집사를 사용한다. 역사적인 기독교를 다루는 이 글에서는 "주교", "사제", "부제"로 통일한다. 인명에 있어서는 라틴명과 그리스어명 가운데 가급적 해당 인물들의 주요 활동 지역의 언어에 따른 이름의 표준 표기법에 따르겠다.
§ 기억
국민학교 6학년 무렵에 교회 초등부의 성경퀴즈 대회에서 1등을 해서 책 한권을 부상으로 받게 되었다. '생명의 말씀사'에서 번역/출간된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제목의 작은 책자이었다. 이 책은 소개되는 인물의 선택에 있어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AD 2세기 기독교 교부인 순교자 유스티노스에서부터 시작해 현대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까지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전기를 담고 있다. 종교개혁 이전의 인물로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수도사가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몇 되지 않는 종교개혁 이전의 인물들 가운데 평화주의자, 혹은 비폭력주의자로 소개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 싶다. 특별히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비폭력 저항을 통한 순교가 신앙의 미덕으로 높이 평가되어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공식적인" 종교개혁을 출범시킨 독일의 마르틴 루터, 동 시대인으로서 영성체의 해석문제로 루터와 신학적 이견을 가진 탓에 루터와 결별하는 스위스의 율리히 쯔빙글리, 쯔빙글리 사후 스위스 개혁교회를 이끈 프랑스 출신의 쟝 칼뱅 등등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있어서 대들보와 같은 인물들이다. 이 삼인방은 신학적 관점에 따라 서로 으르렁거린 적은 있지만, 최소한 한가지 면에 있어서 만큼은 정확히 일치했다. 그것은 "필요한 경우 무력을 통한 정통신앙 수호"란 관점이었다.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AD 16세기 유럽에서 가히 준-세계대전이라고 불릴 만 했던 루터파/칼뱅파 대 로마카톨릭파 사이의 30년전쟁은 그 대표적 결과물이다. 참고로 로마카톨릭 사제 출신이던 율리히 쯔빙글리는 아예 로마카톨릭 측과의 전투 중 사망했다. 로마카톨릭과 정교회의 무력사용은 더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니 여기서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삼인방 바로 뒤에 소개되는 인물 두 명은, (1) AD 16세기 네덜란드의 로마카톨릭 사제 출신으로 재세례파의 한 일파인 오비파와 합류해 메노파 교회를 시작한 메노 시몬스와 (2) AD 17세기 퀘이커 운동을 시작한 영국의 조지 폭스였다. 후자의 두 인물은 앞서 소개된 종교개혁 "우파" 혹은 "주류" 삼인방과는 달리, 자신들의 신앙 혹은 신학적 관점을 수호하기 위한 무력사용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메노 시몬스 이전의 모든 재세례파가 평화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국민학교 6학년 어린이가 읽기에도 이 책은 좀 기이했다.
이 책에서는 "부패한" 로마카톨릭 교회에 맞서기 위해 용감히 "전쟁도 불사했던" 종교개혁 우파 삼인방의 불굴의 의지와 투철한 신앙을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로마카톨릭 뿐 아니라 심지어는 다른 교파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로부터도 탄압을 받았던 재세례파와 퀘이커를 이끈 메노 시몬스와 조지 폭스에 대해서도 같은 정도의 칭송을 바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책이 다양한 프로테스탄트가 공존하는 미국에서 씌여진 일반교양 수준의 책이기 때문에, 교단 간 안배를 고려한 편집을 해야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 그럼 누가 옳은가?
§ 살인금지 계명
종교학자들이 '아브라함계 유일신교'로 분류하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 종교의 경전과 율법은 모두 공식적으로는 "살인"을 금지한다.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갸우뚱할 수 밖에 없다. 유대교의 {히브리 성서, 이하, 타나크}와 이슬람교의 경전 {코란} 및 무함마드의 어록집 {하디스}에는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에 의해 수행된 수많은 전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는 기독교도들에 의해 수행된 폭력과 전쟁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표면적 모순은 아마도 이들 종교가 보는 '살인'의 정의와 성격을 살펴야 제대로 이해가 될 듯 하다. 모세율법, 곧 {토라}는 "개인적 복수를 위한 살인"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심지어 전쟁행위의 경우라 해도, 설령 그 전쟁이 신의 명령에 의한 "정의로운" 것이었다고 해도 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이 자동적으로 면죄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전투가 끝나면 정결의식을 거쳐야 했다. 피를 흘리는 일은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서}, 특별히 {모세오경, 토라}에 있어서 "죄"와 "부정"은 종종 같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여기서의 "부정"은 "윤리적 죄"라기 보다는 "제의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가령 {토라}의 4번째 책인 {민수기} 19장은 죽은 사체와 닿게 되면 이유불문하고 7일 간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며, 정결례를 치른 후에야 부정을 벗는 것으로 설명한다.
19:11 [주검에 닿은 경우] "어느 누구의 주검이든, 사람의 주검에 몸이 닿은 사람은 이레 동안 부정하다. 19:12 a그는 사흘째 되는 날과 이레째 되는 날, 붉은 암송아지를 불사른 재를 탄 물로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야 한다. 그러면 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흘째 되는 날과 이레째 되는 날에 자기의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그냥 부정하다.(a 히, '그가 사흘째 되는 날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면, 이레째 되는 날 그는 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흘째 되는 날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이레째 되는 날 그는 정하게 되지 못할 것이다') 19:13 누구든지 주검, 곧 죽은 사람의 몸에 닿고도 스스로 정결하게 하지 않은 사람은, 주의 성막을 더럽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반드시 이스라엘에서 끊어져야 한다.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 몸에 뿌리지 아니하여 자신의 부정을 씻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부정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19:14 다음은 장막에서 사람이 죽을 때에 지켜야 할 법이다. 그 장막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나 그 장막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이레 동안 부정하다. 19:15 어떤 그릇이든지, 그 위의 뚜껑을 열어 놓고 덮지 아니한 그릇들도 부정하게 된다. 19:16 들판에 있다가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이나, 그냥 죽은 사람이나, 그 죽은 사람의 뼈나, 아니면 그 무덤에라도 몸이 닿은 사람은, 누구나 이레 동안 부정하다. 19:17 그렇게 부정하게 되었을 때에는, 붉은 암송아지를 불사른 재를 그릇에 떠다가, 거기에 생수를 부어 죄를 씻는 물을 만든다. 19:18 그렇게 한 다음에, 정한 사람이 우슬초를 가져 와서, 그것으로 이 물을 찍어, 장막 위에와, 모든 기구 위에와, 거기에 있는 사람들 위에와, 뼈나 살해당한 자나 죽은 자나 무덤에 몸이 닿은 사람 위에 뿌린다. 19:19 정한 사람이 사흘째 되는 날과 이레째 되는 날에, 부정한 사람에게 이 잿물을 뿌려 준다. 그러면 이레째 되는 날, 부정을 탄 그 사람은 정하게 된다. 그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는다. 저녁때가 되면, 그는 정하게 된다. 19:20 그러나 부정을 탄 사람이, 그 부정을 씻어 내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총회에서 제명되어야 한다.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의 위에 뿌리지 아니하여 그 더러움을 씻지 못하면, 주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9:21 이것은 그들이 언제까지나 지켜야 할 율례이다.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린 사람도 자기의 옷을 빨아야 한다. 정결하게 하는 물에 몸이 닿아도, 그는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19:22 부정한 사람이 닿은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하며, 그것에 몸이 닿은 사람도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 한국어 {새번역} 19장
이슬람의 경우, 전쟁행위가 이슬람을 보호하고 악을 응징하기 위한 성스런 전쟁, 즉 "지하드"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이는 높이 칭송받을 행위로 간주된다. 단, 지하드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에 부합해야 한다.
기독교의 경우는? 기독교의 {신약성서}에는 박해자 혹은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전쟁 및 살상행위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약성서}에는 오히려 압제자들에 대한 비폭력/불복종을 통한 저항 만이 기록되어 있다. AD 300년 이전 교부들의 기록을 보더라도 기독교도들은 "신앙적인 압제"에 맞서 폭력을 거의 행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부적인 이단문제와 분란에서는 종종 폭력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009년 {뉴스앤조이}란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하, 한기총) 총무인 최희범 목사는 아래와 같은 놀라운 주장을 펼친다. 이 인터뷰는 소위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에 대한 한기총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Q: 그런 논리를 따르자면 예수님도 로마제국에 반기를 들고 혁명을 일으켜야 했던 거 아닌가.
A: 예수님이 무슨 힘이 있었나. 무기 들고 싸울 수 있는 군대를 조직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맛세다 전투에서 끝까지 로마군에 무력으로 저항하다 전멸했다. 예수님은 실제 정치 현장에서 군대를 조직할 힘이 없었다.
Q: 예수님도 유대인처럼 군대를 조직할 힘 있었다면 로마에 맞섰을 거란 말인가.
A: 나는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안 하고 지는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상에는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 {오마이뉴스} 기사 중 인용, 2009-02-09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6958
인용된 마지막 발언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예수는 힘이 없어서 지는 것처럼 잡혀 죽었지만, 우리는 힘이 있으니 칼로 적에게 맞서야 한다"라는 뜻일까? 이것이 "그를 따르는" 것일까? 같은 인터뷰 속의 다른 발언들의 논리도 상당히 일관적이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이 발언은 {복음서} 속에 등장하는 예수의 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 아닐까?
다음에 인용된 앞의 발언은 유대교 제사장 측에 의해 체포되는 순간, 뒤의 발언은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을 때의 예수의 발언이다.
그 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의 귀를 쳐서 잘라버렸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한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 한국어 공동번역, {마태오의 복음서} 26:51-54
예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 필자 주)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18:36
자신을 체포하고 취조하는 자들 앞에서 "원한다면 자신의 부하나 천사를 동원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예수가 과연 "힘이 없어" 잡혀 처형당했다 치고 (그럼 최희범 목사는 예수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일까?), 그럼 AD 1-4세기의 기독교 순교자들의 자발적 선택은 또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이런 논리라면, 저항하지 않고 체포되어 순교한 초기 기독교도들은 다만 "로마 당국에 힘으로 맞설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잡혀 죽은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럼 그들의 순교를 왜 칭송하는가? 오히려 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신과 교회의 번영을 위해 무력으로 신앙의 적들을 제압했어야 했다'라고 말하며 순교자들의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신앙을 힐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일단 힘을 가진 후부터는 핍박에 대해 당연히 칼로 맞설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질문과 답변은 이어진다.
Q: 예수님이 작업하신 성전정화를 폭력적이라고 볼 수 있나. 복음서 어디에도 폭력을 썼다는 표현이 없는 것 같은데.
A: 예수님의 행위를 봤을 때 장사꾼들 쫓아내면서 물리력을 행사했다. 그게 폭력이다. 평화주의자들이 칼을 들지 않기 위해 대체복무를 택하겠다면 나라는 누가 지키나.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총을 쏘고 칼을 들고 대들 때 "내 목을 따라"며 목을 내놓고 있겠다는 말인가. 평상시의 자기 소신과 특수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는 다른 이야기다. "나라는 네가 지켜라. 나는 대체복무 하겠다"라는 건가.
Q: 병역을 거부하면서 오는 불이익이 있지 않나.
A: 얌체다. 전쟁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넌 나가서 총 맞아 죽어라. 난 여기 있겠다"는 거 아닌가. 그게 어떻게 양심인가.
최희범 목사는 인터뷰의 마무리를 아래의 말로 정리한다.
Q: 마지막 질문이다. 국가가 먼저인가, 신앙이 먼저인가.
A: 국가 없이 신앙이 있나. 무신론자들이 쳐들어오면 신앙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순교밖에 없다. 적을 막기 싫으면 내 목숨을 내놓는 수밖에 없다. --- {오마이뉴스} 기사 중 인용, 2009-02-09
놀랍게도 그의 주장은 AD 2세기 당시 로마군에 복무하기를 거부하는 기독교도들을 향해 로마에 대한 애국심이 없는 얌체라고 힐난하던 그리스 철학자 켈수스의 주장과 흡사하기까지 하다.
오리게네스는 기독교를 예리하게 비난한 켈수스의 여러 비난들에 대해 답하면서 켈수스의 주장을 옮기고 이에 답했다. 그의 {켈수스를 반박하며} 73장을 읽어보자.
In the next place, Celsus urges us "to help the king with all our might, and to labour with him in the maintenance of justice, to fight for him; and if he requires it, to fight under him, or lead an army along with him."
이어 켈수스는 우리(=기독교도)에게 촉구하길, 온 힘을 다해 왕/황제를 돕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왕/황제와 함께 힘쓰며, 왕/황제를 위해 전쟁에서 싸우고, 만약 황제가 요구한다면 왕/황제 휘하에서 싸우거나 혹은 그와 함께 군대를 이끌라고 한다.
To this our answer is, that we do, when occasion requires, give help to kings, and that, so to say, a divine help, "putting on the whole armour of God."
켈수스에 대한 우리의 답은 이렇다: "우리는 진정 그리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 우리는 왕들을 돕는다. 다만 "신의 전신갑주를 입는" "거룩한 도움"일 뿐이다."
And this we do in obedience to the injunction of the apostle, "I exhort, therefore, that first of all, supplications, prayers, intercessions, and giving of thanks, be made for all men; for kings, and for all that are in authority;" and the more any one excels in piety, the more effective help does he render to kings, even more than is given by soldiers, who go forth to fight and slay as many of the enemy as they can.
[중략]
And to those enemies of our faith who require us to bear arms for the commonwealth, and to slay men, we can reply: "Do not those who are priests at certain shrines, and those who attend on certain gods, as you account them, keep their hands free from blood, that they may with hands unstained and free from human blood offer the appointed sacrifices to your gods; and even when war is upon you, you never enlist the priests in the army. If that, then, is a laudable custom, how much more so, that while others are engaged in battle, these too should engage as the priests and ministers of God, keeping their hands pure, and wrestling in prayers to God on behalf of those who are fighting in a righteous cause, and for the king who reigns righteously, that whatever is opposed to those who act righteously may be destroyed!"
공공선을 위해 무기를 들고 적을 죽이라고 우리에게 촉구하는 기독교의 적들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답한다: "신전의 신관들이나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그들의 손이 피에 젖지 않게 하며, 인간의 피로 더렵혀지지 않은 손으로 너희 신들에게 정해진 희생제물을 바치지 않는가? 심지어 전쟁 중이라도 너희들은 너의 신관들을 군대로 징집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이 칭송할 만한 너희의 관례라면, 하물며 다른 이들이 징집되어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안 정의를 위해 싸우는 자들과 정의롭게 통치하는 왕을 위해 그 손을 경결히 하고 신에게 열심히 기도를 바치는 사제들과 신의 일꾼들은 그보다 더 칭송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정의로운 이들에 반하는 것은 무엇이든 멸망받아야 할 것이다!"
And as we by our prayers vanquish all demons who stir up war, and lead to the violation of oaths, and disturb the peace, we in this way are much more helpful to the kings than those who go into the field to fight for them. And we do take our part in public affairs, when along with righteous prayers we join self-denying exercises and meditations, which teach us to despise pleasures, and not to be led away by them. And none fight better for the king than we do. We do not indeed fight under him, although he require it; but we fight on his behalf, forming a special army--an army of piety--by offering our prayers to God.
우리는 기도를 통해, 전쟁을 일으키고 서약을 위반하며 평화를 교란하는 모든 악마를 멸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왕들을 따라 전쟁터에서 싸우는 자들보다도 더 왕들에게 도움이 된다. 또한 우리는 기도에 더불어 환락을 경멸하게 하는 자기부정의 훈련과 묵상을 통해 공공의 임무에 참여하고 있으며, 결코 공공의 일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보다도 왕을 위해 싸우는 자들은 없다. 진실로 우리는 왕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 휘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지만, 그를 대신한 특별한 군대 - 경건의 군대를 조직해 신에게 기도를 바침으로써 싸움에 참가하는 것이다.--- 오리게네스, {켈수스 반박} 75장 / 번역: 최광민
게다가 최희범 목사의 말을 "죽기 싫다면 적을 살상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는다면, 이것은 "현대 근본주의"가 왜 계속해서 폭력적인 양상으로 나아가는지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내가 현재 가지고 누리고 있는 것 - 그것이 신앙이든 혹은 물질이든 -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신앙과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도 불사한다는 (현대 근본주의의) 자세는 초기 기독교도들이 가졌던 원래의 근본주의 정신에 정면을 대치되지 않던가? 초기 기독교도들은 이 세상에 특별한 미련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가 없이 신앙이 있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도 역시 초기 기독교도들은 단호하게 "그렇다"라고 답했을 듯 싶다.
전쟁행위에 대한 진술은 아니지만, 바울이 로마에 보낸 서신을 보면 분쟁이 발생했을 때 AD 1세기 중/후반에 살던 기독교도들이 취한, 혹은 취해야 했던 자세에 대해 알게 된다. 요약하자면, {구약성서}에서 야훼가 직접 말한 것과 같이 "복수는 나(신)의 것"이란 것이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 한국어 개역개정, {로마서} 12장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의 가르침과 동일하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어떤 듣기좋은 덕담을 한 것이 아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의 "계명", 즉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라. --- 한국어 개역개정 {누가복음서 6장 27-29}
그러므로 일단 "복수를 위한 전쟁행위"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사실상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셈이다.
다음으로 {신약성서}의 피날레를 차지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22장 15절을 옮긴다. 이 대목에서 (승천한) 예수는 요한을 통해 최후의 날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ἔξω οἱ κύνες καὶ οἱ φάρμακοι καὶ οἱ πόρνοι καὶ οἱ φονεῖς καὶ οἱ εἰδωλολάτραι καὶ πᾶς φιλῶν καὶ ποιῶν ψεῦδος. --- 그리스어 {Nestle-Aland e/26th/27th}
Foris canes, et venefici, et impudici, et homicidæ, et idolis servientes, et omnis qui amat et facit mendacium. --- 라틴어 {Vulgata}
개들과 마술쟁이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는 다 바깥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 {요한계시록} 22.15, 한국어 {표준새번역}
여기서 φονεύς란 단어는 성서에서 늘 어떤 "범죄적 살인" 행위를 뜻할 때 사용된다. 따라서 이 "범죄적 살인행위"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이해가 어떠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아마도 논의의 핵심이 될 것이다. 나중에 언급할 바실리오스가 따르는 교부 전통은 앞서 언급한 {히브리 성서}의 맥락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보편적인 인식이었는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교부들 간에도 의견이 갈리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보다 다각적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는데,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의 기독교도 (특별히) 지역과 주교들의 성향에 따른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초기 기독교는 후대의 서유럽 로마카톨릭 교회처럼 로마주교, 즉 교황의 절대적 지배 하에 있던 것이 아니라, 지역을 담당하는 주교들의 자율적 치리권 아래 있었다. 사실 지중해 동부의 정교회는 역사적으로 보아 로마주교는 물론이거니와 정교회의 상징적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나 비잔틴 황제의 절대적 지배권 아래 놓여본 적이 없다.
흔히 말하길, 완벽한 비폭력/평화주의를 고수하던 초기 기독교도들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는 로마정부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그간의 평화주의 노선을 버리고 군복무를 옹호하는 쪽으로 선회했다고 말하고는 한다. 이 해석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들지만, 사실은 근세에 와서 만들어진, 혹은 과장되어진 이른바 "콘스탄티누스 신화" 가운데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류의 이야기에서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 콘스탄티누스의 역할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강조하다보니 사료를 왜곡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가령,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로마군에 기독교도가 (어떤 식으로든) 복무하지 않았다는 것은 교부들의 기록을 볼 때 사실이 아니다. 대체로 초기 기독교인들은 평화주의자들이지만, (조건부로) 로마군에 복무하거나 국가권력에 대해 물리적 저항을 했던 기독교도들이 기록에 없었던 것도 아니다. AD 3세기의 라틴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독교의 박해자였던 마지막 5현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지휘하는 군단에 (아마도 아르메니아 출신) 기독교도들이 병사로 복무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다소 전설적인 면이 있지만) 기독교가 공인되기 10년 전인 AD 303년, 로마군단 내에서 유피테르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해 처형당한 세르기우스와 바쿠스는 시리아에 주둔한 로마군의 고위급 장교들이었다. AD 301년 아르메니아는 국가적으로 개종을 한 역사상 첫 국가가 되었다. AD 312년, 갈레리우스 황제가 선언한 311년의(종교)관용령을 뒤엎은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기독교 박해를 재개하자 아르메니아의 군주 트리다테스 3세가 이끈 아르메니아군은 로마군을 대패시켰다. 이미 이전에도 트리다테스 3세는 기독교로의 개종을 거부하고 조로아스터교를 고수한 아르메니아 귀족들과 내전을 치른 적이 있다.
초기 기독교도들이 로마군 복무를 거부한 이유는 (1) 살상행위와 (2) 우상숭배/이교숭배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견해를 함께 살펴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특별히 로마시대 군 복무조건 가운데 당시 기독교인들의 계명에 위배된 것이 있는지도 살펴야한다. 가령, 당시 기독교도들은 로마군의 이교숭배 및 황제숭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3) "맹세하지 않는" 계명을 철저하게 지켰다. 로마군의 의례는 다양한 신들에게 바쳐지는 많은 맹세행위들로 구성되며, 종종 황제나 로마제국 자체를 신으로 간주하는 종교적 의례가 치러지기도 했다. 희생제물을 바치거나 분향하는 행위가 포함된다. 이런 행위들은 맹세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는 동시에 또한 우상숭배 행위에 해당한다.
따라서 로마군 복무조건에서 이교의 신에 대한 종교행위 혹은 우상숭배 행위 등을 제거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살상행위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만 남을 것이다. "살상행위"는 현대의 군복무조건과 로마시대의 군 복무조건 가운데 남은 거의 유일한 공통점이다.이 글에서는 이 둘을 함께 살피도록 하겠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예수와 그 제자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이 개인적 복수를 위한 "살인"과 국가 간 전쟁행위를 통한 "살상"을 같은 것으로 보았는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부당한 침략행위와 방어행위 각각에 수반된 살상행위를 구별해야 하는지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복음서}에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와 사도들은 몇몇의 유대인 병사들과 로마군 장교들에게 포교했다. 이들이 개종 후 즉시 군 복무를 그만 두었는지는 {복음서}에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 않으니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문맥 상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아울러 성직자들이던 교부들이 "전쟁행위 중의 살상" 금지계명을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에게 동일적용했는지도 논의의 대상이다. 기본적으로 교부들은 콘스탄티누스 이전이든 이후이든 성직자들 (주교, 사제, 부제)이 전쟁에 동원되는 것에는 절대반대했다. 그럼 평신도들에 대해서는? 이 점은 다소 불분명하다. 그러나 "우상숭배"나 "살상행위에 가담하지 않"고 다만 "치안유지"에만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군 복무가 묵인되었든 듯 싶다.
당시에 기독교도들이 로마 영내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가령 로마의 동쪽인 파르티아 (그리고 나중의 사산조 페르시아)에도 상당수의 기독교도들이 거주했다. 로마는 메소포타미아에서의 패권들 두고 파르티아 및 사산조 페르시아와 수 세대 간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는 (전쟁보안 상의 이유로) 세금을 내면 기독교도들의 징병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일단 이 문제를 둘러싼 교부들의 입장을 인용하고 강조한다.
§ 밀라노 칙령 (AD 313) 이전
§§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 (AD 35/50 - 98/117)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안티오키아 주교 이그나티오스는 예수의 사도 요한의 제자였으며, 예수의 사도 베드로와 AD 67년에 사망 혹은 순교한 에보디오스에 이어 안티오키아의 세번째 주교/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이그나티오스는 요한의 또 다른 제자인 폴리카포스와 함께 사도들의 직계 1세대라는 점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트라야누스 치세 중인 AD 108년 로마로 압송되어 콜롯세움에서 사자밥이 되었다.
Let governors be obedient to Caesar; soldiers to those that command them; deacons to the presbyters, as to high-priests; the presbyters, and deacons, and the rest of the clergy, together with all the people, and the soldiers, and the governors, and Caesar [himself] to the bishop; the bishop to Christ, even as Christ to the Father. And thus unity is preserved throughout. --- Ignatius of Antioch, {Epistle to the Philadelphians}, Chapter 4
관리들이 카이사르에게 복종하게 하라. 병사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게 하라. 부제/집사들은 사제/장로들에게, 사제들은 고위사제들에게, 사제, 부제, 나머지 성직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 병사, 관리, 카이사르 들과 함께 주교들에게 복종하게 하라. 마치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그리하신 것처럼, 주교들은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라. 그리하여 모든 곳에 통일이 유지된다. --- 시리아 안티오키아 주교 이그나티오스, {필라델피아에 보내는 편지} 제 4장 / 번역: 최광민
상관의 명령에 대한 병사들의 복종에 대해 이그나티우스가 말할 때, 그는 이 "명령복종"에 전쟁/치안유지 중 살상행위도 포함시킨 것일까? 군인들과 (군대의 최종통솔권자인) 황제/카이사르를 주교에게 복종시킨다면, 그 "주교(들)"은 전쟁과 살상에 대해 카이사르에게 어떻게 지시할 것인가?
주교들에 대한 명령권자가 그리스도이므로, 따라서 이 질문은 이 문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달려있는 것이다.
§§ 유스티노스 (Justin the Martyr, AD 100-165)
팔레스티나 출신의 유스티노스는 예수의 산상수훈을 언급한다. 즉, 기본적으로 평화/비폭력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유스티노스는 기독교도들은 (1) 서로 죽이지도 않고, 또 (2) 적들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한때 본인이 플라톤주의 철학자였던 유스티노스는 이 변론서를 당시 로마황제인 안토니우스 피우스 및 그의 두 아들 (친아들과 양자)인 플라톤주의 철학자 베리시무스와 루키우스, 그리고 로마 원로원에 헌정했다. 유스티노스는 5현제의 마지막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 체포되어 참수형 당했다.
그의 헌정사를 인용한다.
To the Emperor Titus Ælius Adrianus Antoninus Pius Augustus Caesar, and to his son Verissimus the Philosopher, and to Lucius the Philosopher, the natural son of Caesar, and the adopted son of Pius, a lover of learning, and to the sacred Senate, with the whole People of the Romans, I, Justin, the son of Priscus and grandson of Bacchius, natives of Flavia Neapolis in Palestine, present this address and petition in behalf of those of all nations who are unjustly hated and wantonly abused, myself being one of them.
프리스쿠스의 아들이자 바키우스의 손자이자 팔레스티나의 플라비아 네아폴리스 태생인 유스티노스는, 온 세상에서 부당하게 미움받고 탄압받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 (기독교도 -- 필자 주)을 대신하여, 황제이신 티투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와, 학문을 애호하시는 황제의 친아들 철학자 베리시무스와 양자이신 철학자 루키우스, 성스런 원로원, 그리고 온 로마시민에게 본 논고와 청원을 제출하는 바이다. --- 유스티노스, {첫번째 변증} 서문 / 번역: 최광민
그럼 이 문제에 관한 유스티노스의 진술들을 검토해 보자.
[The demons] struggle to have you as their slaves and servants,and . . . they get hold of all who do not struggle to their utmost for their own salvation — as we do who, after being persuaded by the Word, renounced them and now follow the only unbegotten God through his Son.Those who once rejoiced in fornication now delight in self-control who once took most pleasure in the means of increasing our wealth and property now bring what we have into a common fund and share with everyone in need; we who hated and killed one another and would not associate with men of different tribes because of [their different] customs, now after the manifestation of Christ live together and pray for our enemies and try to persuade those who unjustly hate us, so that they, living according to the fair commands of Christ, may share with us the good hope of receiving the same things . . . The teachings of Christ were short and concise, for he was no philosopher, but his word was the power of God. --- St Justin Martyr: First Apology 14
....(전략)...우리는 예전에는 서로 죽이고 또 문화가 다르다하여 다른 민족과 상종하지 않던 사람들이었으나, 그리스도가 온 후로 이제 그들과 함께 살며, 적들을 위해 기도하며, 부당하게 우리를 증오하는 이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그리스도의 올바른 명령/계명에 따라 살면, 그들 역시 우리가 받은 것과 같은 것 (=구원)을 받으리라는 선한 소망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게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중략)...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짧고 간단하다. 그는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말씀은 곧 신의 권능이다....(후략) --- 유스티노스, {첫번째 변증} 14장 / 번역: 최광민
The devil is the author of all war. We, who used to kill one another, do not make war on our enemies. We refuse to tell lies or deceive our inquisitors; we prefer to die acknowledging Christ. As to loving all men, he has taught as follows: ‘If ye love only those who love you, what new thing do ye do? For even fornicators do this. But I say to you: Pray for your enemies and love those who hate you and bless those who curse you and pray for those who act spitefully towards you.’ … And as to putting up with evil and being service민able to all and without anger, this is what he says: ‘to him that smiteth thy cheek,offer the other cheek as well, and do not stop the man that takes away thy tunic or thy cloak. But whoever is angry is liable to the fire.Every one who impresses thee to go a mile, follow for two. Let your good works shine before men, that seeing them they may worship your Father in heaven. When the Spirit of prophecy speaks as predicting things that are to come to pass, He speaks in this way: ‘For out of Zion shall go forth the law,and the word of the Lord from Jerusalem. And He shall judge among the nations, and shall rebuke many people; and they shall beat their swords into plough shares, and their spears into pruning-hooks: nation shall not lift up sword against nation, neither shall they learn war anymore.’ And that it did so come to pass, we can convince you. For from Jerusalem there went out into the world, men, twelve in number, and these illiterate, of no ability in speaking: but by the power of God they proclaimed to every race of men that they were sent by Christ to teach to all the word of God; and we who formerly used to murder one another do not only now refrain from making war upon our enemies, but also, that we may not lie nor deceive our examiners, willingly die confessing Christ. For that saying, ‘The tongue has sworn but the mind is unsworn,’ might be imitated by us in this matter. But if the soldiers enrolled by you, and who have taken the military oath, prefer their allegiance to their own life, and parents, and country, and all kindred, though you can offer them nothing incorruptible, it were verily ridiculous if we, who earnestly long for incorruption, should not endure all things, in order to obtain what we desire from Him who is able to grant it. --- St Justin Martyr, First Apology, Chapter 39
....악마는 모든 전쟁의 배후에 있다. 한때 서로를 죽이는 일에 익숙하던 우리는 적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중략).....예전에 서로를 죽이던 우리는 적에 대한 전쟁을 벌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취조하는 자를 속이거나 거짓말 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써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다.....(후략) --- 유스티노스, {첫번째 변증} 39장 발췌 / 번역: 최광민
유스티노스는 {트리폰과의 대화}에서도 평화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명시한다.
We who were filled with war, and mutual slaughter, and every wickedness,have each throughout the whole earth changed our weapons of war — our swords into plough shares, and our spears into implements of tillage —and we cultivate piety, righteousness, philanthropy, faith, and hope,which we have from the Father Himself through Him who was crucified;and sitting each under his vine, i.e., each man possessing his own married wife. For you are aware that the prophetic word says, ‘And his wife shall be like a fruitful vine.’ Now it is evident that no one can terrify or subdue us who have believed in Jesus over all the world. --- St Justin Martyr, Dialogue, Chapter 110
전쟁을 일삼고 서로를 죽였으며 모든 악행이 가득했던 우리는, 온 세상에서 우리의 무기를 바꾸었고, 이제 우리의 칼은 쟁기가, 우리의 창은 농기구가 되었다. 우리는 경건과 정의와 박애와 믿음과 희망을 경작한다. 이것들은 십자가에 달린 분을 통해 성부로부터 온 것이다.....(후략). 유스티노스, {트리폰과의 대화}, 제 110장 / 번역: 최광민
유스티노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하인 AD 166년 사형당했다. 그 뿐 아니라 예수의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포스는 AD 167년에, 블란디나와 포티우스를 포함한 다수의 기독교도들이 AD 177년 루그드눔 (현, 리옹)에서 처형당했다. 아래 언급될 이레네우스는 당시 리옹에서 사제로 현장을 목격했다. 유스티노스가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첫번째 변증})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두번째 변증})을 주요 수신자로 한 그의 변증들을 작성한 것은 바로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있다.
이런 이유로 초기 기독교도들은 스토아 철학자이자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기독교의 주요박해자들인 네로, 도미티아누스, 데키우스 황제와 같은 반열에 올렸다. (그러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독실한 기독교도의 발언은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가 기독교를 대체로 묵인해 준 선임황제들과 왜 다른 위치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여러 설명들이 있다. 혹자는 그가 철학이면서 동시에 (사실상의) 고등종교를 표방하던 스토아 철학의 깊은 신봉자였음을 그 이유로 든다. 혹자는 그의 치세 무렵에 제국의 주요영토에 빈번했던 자연재해를 기독교와 연관시켰다고 본다. 선임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절부터, 소아시아 일대에는 잦은 지진이 발생했고, 로마에서는 티베르 강이 유래없이 범람해서 공용곡식저장고를 쓸어버렸다. 이어 대기근이 있었고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서 비롯된 전염병이 제국을 휩쓸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당대까지 이미 거의 최대치로 확장된 로마의 변방에서는 반란의 징후가 농후했고, 게르만족과 페르시아의 침략도 예측되었다.
이것이 유스티노스가 처형당한 AD 166년 (종종, "재난의 해 annus calamitosus"라 불린다) 무렵의 상황이었다.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져서 이런 모든 재해의 원인을 (이교의 신들을 모조리 거부하는) 기독교도들 때문에 로마의 신들이 노한 것이라 보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 분노는 간헐적으로 폭발하여 "기독교도를 사자에게 Christianos ad leones" 던져주는 식으로 폭발한다. 중죄인을 짐승의 밥이 되게 하는 이 사형법은 "담나티오 아드 베스티아스 (Damnatio ad bestias)"라 불리는 로마의 극형제도 중 하나였다.
아울러 기독교도들의 종말론은 로마인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령,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외부증거로서 초기 기독교도들 사이에 널리 유통/활용되던 위경문서 {시빌라의 신탁집} 등에는 그들이 목도하는 자연재해들이 임박한 종말의 표징으로 설명되고 있었다. (Tertull. ad Scap. c. 3). 재해들을 로마신들의 분노로 전혀 보지 않았던 기독교도들은 또한 그 신들에게 분향하거나 포도주를 부어 바치거나 혹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에 절대 참여하지 않았으니, 기독교도들에 대한 로마의 일반시민들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당시 (북) 아프리카의 프로콘술인 스카풀라 데르투룰스에게 기독교도를 변호하기 위해 작성한 글을 한번 살펴보자. 그는 당시 북 아프리카 일대의 자연재해, 인재들, 이상한 일식현상, 그리고 기독교를 탄압한 관리들의 불운들을 언급하면서, 이 모든 것이 신의 임박한 진노에 대한 표징이라고 말한다.
However, as we have already remarked, it cannot but distress us that no state shall bear unpunished the guilt of shedding Christian blood; as you see, indeed, in what took place during the presidency of Hilarian, for when there had been some agitation about places of sepulture for our dead, and the cry arose, “No areæ—no burial-grounds for the Christians,” it came that their own areæ,[1] their threshing-floors, were a-wanting, for they gathered in no harvests.
As to the rains of the bygone year, it is abundantly plain of what they were intended to remind men—of the deluge, no doubt, which in ancient times overtook human unbelief and wickedness; and as to the fires which lately hung all night over the walls of Carthage, they who saw them know what they threatened; and what the preceding thunders pealed, they who were hardened by them can tell.
All these things are signs of God’s impending wrath, which we must needs publish and proclaim in every possible way; and in the meanwhile we must pray it may be only local. Sure are they to experience it one day in its universal and final form, who interpret otherwise these samples of it. That sun, too, in the metropolis of Utica,[2] with light all but extinguished, was a portent which could not have occurred from an ordinary eclipse, situated as the lord of day was in his height and house. You have the astrologers, consult them about it.
We can point you also to the deaths of some provincial rulers, who in their last hours had painful memories of their sin in persecuting the followers of Christ.[3] Vigellius Saturninus, who first here used the sword against us, lost his eyesight. Claudius Lucius Herminianus in Cappadocia, enraged that his wife had become a Christian, had treated the Christians with great cruelty: well, left alone in his palace, suffering under a contagious malady, he boiled out in living worms, and was heard exclaiming, “Let nobody know of it, lest the Christians rejoice, and Christian wives take encouragement.” Afterwards he came to see his error in having tempted so many from their stedfastness by the tortures he inflicted, and died almost a Christian himself.
In that doom which overtook Byzantium,[4] Cæcilius Capella could not help crying out, “Christians, rejoice!” Yes, and the persecutors who seem to themselves to have acted with impunity shall not escape the day of judgment. For you we sincerely wish it may prove to have been a warning only, that, immediately after you had condemned Mavilus of Adrumetum to the wild beasts, you were overtaken by those troubles, and that even now for the same reason you are called to a blood-reckoning. But do not forget the future. --- Ante-Nicene Fathers Vol. III, Apologetic, To Scapula by Tertullian, translated by Sydney Thelwall, Chpater 3
기독교도에 대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태도는 그의 유명한 {명상록}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종교적 이유에서 순교를 받아들이는 기독교도들을 아래와 같이 조롱한다.
"...What a soul that is which is ready, if at any moment it must be separated from the body, and ready either to be extinguished or dispersed or continue to exist; but so that this readiness comes from a man's own judgement, not from mere obstinacy (παραταξις) , as with the Christians, but considerately and with dignity and in a way to persuade another, without tragic show...."
준비된 영혼은 육체를 떠나야만 하는 순간이 오면 당장이라도 사라지거나 혹은 흩어지고나 혹은 계속 존재할 태세가 되어 있다. 이런 준비된 태도는 신중하고 위엄을 갖추고, 비장한 연기 없이도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방식에서 오는 각 개인의 고유한 판단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기독교도들처럼 단순한 고집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 번역: 최광민
유스티노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헌정된 {두번째 변증}에서 아마도 아우렐리우스의 (혹은 당시 스토아 철학자들의) 표현을 비꼬는 듯한 진술을 한다.
For I myself, too, when I was delighting in the doctrines of Plato, and heard the Christians slandered, and saw them (fearless of death, and of all other-things which are counted fearful), perceived that it was impossible that they could be living in wickedness and pleasure. For what sensual or intemperate man, or who that counts it good to feast on human flesh, could welcome death that he might be deprived of his enjoyments, and would not rather continue always the present life, and attempt to escape the observation of the rulers; and much less would he denounce himself when the consequence would be death? This also the wicked demons have now caused to be done by evil men. For having put some to death on account of the accusations falsely brought against us, they also dragged to the torture our domestics, either children or weak women, and by dreadful torments forced them to admit those fabulous actions which they themselves openly perpetrate; about which we are the less concerned, because none of these actions are really ours, and we have the unbegotten and ineffable God as witness both of our thoughts and deeds. For why did we not even publicly profess that these were the things which we esteemed good, and prove that these are the divine philosophy, saying that the mysteries of Saturn are performed when we slay a man, and that when we drink our fill of blood, as it is said we do, we are doing what you do before that idol you honour, and on which you sprinkle the blood not only of irrational animals, but also of men, making a libation of the blood of the slain by the hand of the most illustrious and noble man among you? And imitating Jupiter and the other gods in sodomy and shameless intercourse with woman, might we not bring as our apology the writings of Epicurus and the poets? But because we persuade men to avoid such instruction, and all who practise them and imitate such examples, as now in this discourse we have striven to persuade you, we are assailed in every kind of way. But we are not concerned, since we know that God is a just observer of all. But would that even now some one would mount a lofty rostrum, and shout with a loud (tragic) voice; "Be ashamed, be ashamed, you who charge the guiltless with those deeds which yourselves openly could commit, and ascribe things which apply to yourselves and to your gods to those who have not even the slightest sympathy with them. Be converted; become wise." --- Junstin the Martyr, {The Second Apology}, Chapter 12, Source. Translated by Marcus Dods and George Reith. From Ante-Nicene Fathers, Vol. 1.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5.)
플라톤 철학의 교리를 믿던 시절, 기독교도들이 중상모략 당하는 것을 듣거나, 그들이 죽음과 죽음에 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것을 보았을 때, 기독교도들은 악하게 살거나 쾌락에 따라 살 수 없을 거라고 나 역시 깨달았다. ...(중략).... 거짓으로 우리를 기소해서 몇몇을 잡아죽일 때, 그들은 우리의 가족, 심지어 어린아이와 나약한 여자들까지 고문장으로 끌고가서는 우리가 하지도 않은 범죄를 공개적으로 저질렀다고 자백하게끔 끔직한 고문을 해댄다. 그러나 기원이 없으시고 변치않는 신은 우리의 마음과 행실에 대한 증인이시다... (중략)... 바로 이 논고에서 우리가 온갖 방법으로 부당하게 공격받고 있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리고자 한 것처럼, 우리는 (이교도의) 가르침과, 그것들을 따라 실행하는 자들과, 그런 것들을 모범삼는 자들을 피하라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다. 신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공정한 관찰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는 않지만, 다만 지금이라도 누군가 높은 연단에 올라가서, 비장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크게 외쳤으면 좋겠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부끄러운 줄 알아라. 너희들이 대놓고 저지르는 죄들을, 너희와 너희 신들이 저지르는 죄에 조금이라도 동조하지 않는 죄없는 자들에게 덮어씌우는 자들아. 회개하라! 깨달아라!" --- 유스티노스, {두번째 변증} 12장/ 번역: 최광민
§§ 앗시리아인 타티아노스 (Tatian, c.160 AD)
유스티노스의 제자였던 시리아인 타티아노스는 병역을 일언지하에 거부한다. 그의 자유의지로.
[CHAP. XI.--THE SIN OF MEN DUE NOT TO FATE, BUT TO FREE-WILL]: How, then, shall I admit this nativity according to Fate, when I see such managers of Fate? I do not wish to be a king; I am not anxious to be rich; I decline military command; I detest fornication; I am not impelled by an insatiable love of gain to go to sea; I do not contend for chaplets; I am free from a mad thirst for fame; I despise death; I am superior to every kind of disease; grief does not consume my soul. Am I a slave, I endure servitude. Am I free, I do not make a vaunt of my good birth. I see that the same sun is for all, and one death for all, whether they live in pleasure or destitution. The rich man sows, and the poor man partakes of the same sowing. The wealthiest die, and beggars have the same limits to their life. The rich lack many things, and are glorious only through the estimation they are held in; but the poor man and he who has very moderate desires, seeking as he does only the things suited to his lot, more easily obtains his purpose. How is it that you are fated to be sleepless through avarice? Why are you fated to grasp at things often, and often to die? Die to the world, repudiating the madness that is in it. Live to God, and by apprehending Him lay aside your old nature. We were not created to die, but we die by our own fault. Our free-will has destroyed us; we who were free have become slaves; we have been sold through sin. Nothing evil has been created by God; we Ourselves have manifested wickedness; but we, who have manifested it, are able again to reject it. ---TATIAN, {ADDRESS TO THE GREEKS}, Tr. J. E. RYLAND
[제 11장 -- 운명이 아닌 자유의지에 의한 죄] ...[전략]...나는 왕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나는 부자가 되고자 하지도 않는다. 나는 군령을 거부한다. 나는 간음을 혐오한다. 나는 ..[후략].... --- 타티아노스, {그리스인들에 대한 변론} / 번역: 최광민
타티아노스는 스승이 죽은 후에는 (비성서적인) 금욕을 강조하고 또 발렌티누스 계열의 그노시스 이단에 동조하여 교회로부터 파문당했기 때문에, 시리아 교회 발전에 대한 그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교부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클레멘트 (A.D. 150 - 211/216)
AD 2세기 말에 활동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파의 신학자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는 원래 고전 그리스 철학과 문학의 학도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로서, 플라톤 및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를 조화시키려는, 그러나 기독교를 완전한 계시로서 우위로 두는 시도를 여러 저작을 통해서 했다. 그의 문하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 등이 알려져 있다.
그의 견해를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This is the proclamation of righteousness: to those that obey, glad tidings; to those that disobey,judgement. The loud trumpet, when sounded, collects the soldiers, and proclaims war. And shall not Christ, breathing a strain of peace to the ends of the earth, gather together His own soldiers, the soldiers of peace? Well, by His blood, and by the word, He has gathered the bloodless host of peace, and assigned to them the kingdom of heaven. The trumpet of Christ is His Gospel. He hath blown it, and we have heard. ‘Let us array ourselves in the armour of peace, putting on the breastplate of righteousness, and taking the shield of faith, and binding our brows with the helmet, of salvation; and the sword of the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let us sharpen. So the apostle in the spirit of peace commands. These are our invulnerable weapons: armed with these, let us face the evil one; ‘the fiery darts of the evil one ’let us quench with the sword-points dipped in water, baptised by the Word, returning grateful thanks for the benefits we have received, and honouring God through the Divine Word. – Clement of Alexandria, Exhortations to the Heathens, 11
이것은 정의의 선포다. 복종하는 자에게는 기쁜 소식이요, 불복종하는 자에게는 심판이다. 큰 나팔소리가 울리면 병사들이 소집되고 전쟁이 선포된다. 세상 끝까지 평화의 힘을 내쉬시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군대, 평화의 병사들을 소집시키지 않으시겠는가? 그의 피와 말씀으로, 그리스도는 유혈이 없는 평화의 군대를 모으셨고, 그들에게 하늘의 왕국을 맡기셨다. 그리스도의 나팔은 그의 복음이다. 그가 나팔을 불 때, 그리는 그 소리를 들었다..... /번역: 최광민
Practice husbandry, we say, if you are a husbandman; but while you till the fields, know God. Sail the sea, you who are devoted to navigation, yet call the while on the heavenly pilot. Has (saving) knowledge taken hold of you while engaged in military service? Listen to the commander who orders what is right. (II:200). If a loud trumpet summons soldiers to war, shall not Christ with a strain of peace issued to the ends of the earth gather up his soldiers of peace? By his own blood and by his word he has assembled an army which sheds no blood in order to give them the Kingdom of Heaven. The trumpet of Christ is his Gospel. He has sounded it and we have heard it. Let us then put on the armour of peace. – Clement of Alexandria, Protrepticus XI, 116
우리는 말한다. 당신이 농부라면 농사일을 하라. 다만 들에서 일할 때 신을 기억하라. 당신이 배를 모는 일을 한다면, 뱃일을 하라. 다만 하늘의 안내를 간구하라. 군대와 관련된 지식이 있다면? 그렇다면 옳은 일을 명령하시는 지휘관 (그리스도)에게 귀를 기울이라. 전투를 소집하는 나팔 소리가 크게 울릴 때, 세상의 끝까지 선포된 평화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평화의 군대를 소집하지 않으시겠는가? 그리스도의 나팔은 그의 복음이다. 그가 나팔을 불 때, 우리는 그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평화의 갑옷을 입도록 하자 / 번역: 최광민
In peace, not in war, we are trained. – Clement of Alexandria, Paedogogus 1,12
If you enroll as one of God’s people, heaven is your country and God your lawgiver. And what are His laws? You shall not kill,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o him that strikes you on the one cheek,turn to him the other also..... --- Clement of Alexandria, Protrepticus, 10
그대가 신의 백성이 된다면, 천국이 당신의 나라요 신은 법을 주시는 분이다. 무엇이 신의 법인가?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네 한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쪽도 내어줘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프로트렙티쿠스}, 10장 / 번역: 최광민
클레멘스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 리옹의 이레네우스 (? - c. 202)
시리아 혹은 소아시아 출신의 이레네우스는 예수의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카포스를 친견했다.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레우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때 갈리아 루그두눔(Lugdunum, 현 프랑스 리옹) 사제였으며, 이후 주교가 되었다.
이레네우스는 그의 유명한 {이단을 반박하며}의 한 대목에서, {구약성서}의 신과 {신약성서}의 신과는 전혀 다른 열등한 존재이며 따라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예수를 보낸 신과는 다른 신에게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란 주장을 펼친 AD 1세기 말-2세기 초반의 초기 그노시스 이단자 마르키온과 그의 추종자들을 반박하면서 아래와 같이 적는다.
특별히 전쟁과 살상을 종종 명령하는 {구약성서}의 신과,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는 {신약성서}의 신이 다른 신이라고 주장한 마르키온의 추종자들에 대해, 이레네우스는 구약성서의 신과 신약성서의 신은 동일하며, 다만 예수의 도래 이후 새로운 율법이 시작되었을 따름이라고 설명한다. 그 새로운 율법이란 '평화'의 율법이다.
4. If any one, however, advocating the cause of the Jews, do maintain that this new covenant consisted in the rearing of that temple which was built under Zerubbabel after the emigration to Babylon, and in the departure of the people from thence after the lapse of seventy years, let him know that the temple constructed of stones was indeed then rebuilt (for as yet that law was observed which had been made upon tables of stone), yet no new covenant was given, but they used the Mosaic law until the coming of the Lord; but from the Lord's advent, the new covenant which brings back peace, and the law which gives life, has gone forth over the whole earth, as the prophets said: For out of Zion shall go forth the law, and the word of the Lord from Jerusalem; and He shall rebuke many people; and they shall break down their swords into ploughshares, and their spears into pruning-hooks, and they shall no longer learn to fight. Isaiah 2:3-4; Micah 4:2-3 If therefore another law and word, going forth from Jerusalem, brought in such a [reign of] peace among the Gentiles which received it (the word), and convinced, through them, many a nation of its folly, then [only] it appears that the prophets spoke of some other person. But if the law of liberty, that is, the word of God, preached by the apostles (who went forth from Jerusalem) throughout all the earth, caused such a change in the state of things, that these [nations] did form the swords and war-lances into ploughshares, and changed them into pruning-hooks for reaping the grain, [that is], into instruments used for peaceful purposes, and that they are now unaccustomed to fighting, but when smitten, offer also the other cheek, Matthew 5:39 then the prophets have not spoken these things of any other person, but of Him who effected them. This person is our Lord, and in Him is that declaration borne out; since it is He Himself who has made the plough, and introduced the pruning-hook, that is, the first semination of man, which was the creation exhibited in Adam, and the gathering in of the produce in the last times by the Word; and, for this reason, since He joined the beginning to the end, and is the Lord of both, He has finally displayed the plough, in that the wood has been joined on to the iron, and has thus cleansed His land; because the Word, having been firmly united to flesh, and in its mechanism fixed with pins, has reclaimed the savage earth. In the beginning, He figured forth the pruning-hook by means of Abel, pointing out that there should be a gathering in of a righteous race of men. He says, For behold how the just man perishes, and no man considers it; and righteous men are taken away, and no man lays it to heart. Isaiah 57:1 These things were acted beforehand in Abel, were also previously declared by the prophets, but were accomplished in the Lord'sperson; and the same [is still true] with regard to us, the body following the example of the Head. ---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4, Chapter 34
(전략).... 유대인들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모세율법을 고수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후로, 평화를 가져다줄 새로운 언약과 생명을 가져다줄 새 율법이 세상에 도래했다. 이것은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온다. 주님은 많은 민족을 견책하실 것이며, 그들의 칼을 쟁기로, 그들의 창을 낫으로 바꿀 것이며, 그들은 더이상 전쟁을 연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예언자의 말과 같다..... (중략)....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온) 사도들에 의해 온 세상에 퍼진 자유의 법, 즉 신의 말씀을 통해 칼과 창이 평화로운 목적으로 사용되는 쟁기가 되고 낫이 되는 일이 일어났고, 그들(= 기독교도)은 더이상 싸우는 법을 알지 못한다. 오히려 한 뺨을 맞으면 다른 쪽도 돌려댄다. 예언자들은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그 분 (=예수)이 아닌 어떤 다른 사람에 대해 예언한 바 없다.....(후략) --- 이레네우스, {이단을 반박하며}, 제 4권 34장 / 번역: 최광민
이 설명이 그의 {이단을 반박하며}에 실렸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 로마의 히폴리투스 (c.160-220 AD)
{사도적 전통} 혹은 {이집트 교회 법령}이란 문건은 초기 기독교 교회의 법령을 수록한 문건으로 AD 2-3세기 보편교회의 예전과 신학을 직접 엿볼 수 있는 자료다. 19세기에 재발견된 이 문건은 당시에는 {이집트 교회 법령집}으로 명명되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문건을 망실된 것으로 알려진 로마의 히폴리투스의 {사도적 전통}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합의다. 이레네우스의 제자로 알려진 히폴리투스가 이 문건의 저자 혹은 편집자라면, 이 문건은 AD 215년으로 소급될 수 있다
[16].....A soldier of the civil authority must be taught not to kill men and to refuse to do so if he is commanded, and to refuse to take an oath, if he is unwilling to comply, he must be rejected. A military commander or civic magistrate that wears the purple must resign or be rejected. If a catechumen or a believer seeks to become a soldier, they must be rejected, for they have despised God. ---- Hippolytus of Rome, {The Apostolic Tradition}, tr. Burton Scott Easton (1934)
...[전략]...치안을 담당하는 군인에게는, 누구도 죽여서는 안되며 그런 명령을 하달받았더라도 거부할 것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군대에서 맹세를 해서도 안된다. 이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는 교회에서 쫓겨날 것이다. (관할지의 / 필자 주) 주둔군 사령관이나 혹은 도시의 통치자가 자색옷을 입는 경우, 그가 그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교회에서 쫓겨날 것이다. (세례를 준비 중인 / 필자 주) 세례문답자나 신자가 군인이 되려고 한다면 그는 교회에서 쫓겨날 것이다. 이는 그가 신을 모독했기 때문이다.....[후략] --- 로마의 히폴리투스, {사도적 전통}, 제 16항 / 번역: 최광민
이 문건에 따르면 당시 교회의 정황을 엿볼 수 있다. 현역으로 군에 복무하고 있으면서 신자가 된 자는 아마도 조건부로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듯 하다. 이교숭배나 (가령, 군대 내 맹세)에 동참하지 않고, 또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경우가 그 조건인 듯 하다. 만약, 현역이 아닌 신자가 자발적으로 군인이라 되려고 한다면, 그는 신을 모독한 것으로 간주되어 파문 당하게 된다.
군대/행정상 책임권자의 경우, 히폴리투스는 로마고위장교와 관리가 입는 "자색옷"을 특정하고 있다. 이 옷은 금으로 장식한 자주빛 토가인 Toga picta 뜻하며, 이는 로마공화국에서는 승전한 장군이 신들의 전차를 타고 개선의식을 할 때 입던 의복이었다. 로마제국 시기에는 검투경기를 포함한 공공(종교)의식을 치를 때 담당관리가 입던 옷이었고, 아울러 황제나 콘술들도 입었다. 즉, 자색 토가는 이교숭배와 살상행위 모두를 상징한다.
§§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c.160-220 AD)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대표적인 라틴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다 (cf. Tertullian, Apol. 5, ad Scap. 4, de Orat. 29),
We, on the contrary, bring before you an emperor who was their protector. You will see this by examining the letters of Marcus Aurelius, that most serious of emperors. For, in his letters, he bears witness that the Germanic drought was removed by the rains obtained through the prayers of the Christians, who happened to be fighting under him. --- Tertullian, {Apology} (chapter 5)
.... 당신들은 이 사실을 지엄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편지들을 통해서 조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편지들 속에서, 황제는 그의 지휘 아래 싸우던 기독교도 (병사?)들의 기도 덕택에 게르마니아 지역의 가뭄이 해소되었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변증}, 제 5장 / 번역: 최광민
이 일화는 AD 4세기 초반에 활동한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조금 더 자세히 등장한다.
1. It is reported that Marcus Aurelius Cæsar, brother of Antoninus, being about to engage in battle with the Germans and Sarmatians, was in great trouble on account of his army suffering from thirst. But the soldiers of the so-called Melitene legion, through the faith which has given strength from that time to the present, when they were drawn up before the enemy, kneeled on the ground, as is our custom in prayer, and engaged in supplications to God. This was indeed a strange sight to the enemy, but it is reported that a stranger thing immediately followed. The lightning drove the enemy to flight and destruction, but a shower refreshed the army of those who had called on God, all of whom had been on the point of perishing with thirst. This story is related by non-Christian writers who have been pleased to treat the times referred to, and it has also been recorded by our own people. By those historians who were strangers to the faith, the marvel is mentioned, but it is not acknowledged as an answer to our prayers. But by our own people, as friends of the truth, the occurrence is related in a simple and artless manner.
안토니누스의 형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게르만인 및 사르마티아인들과 전투를 벌일 때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당시 물을 찾지못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현재까지도 널리 알려진 믿음에 따르면, 그때 멜리테 군단이라 불린 병사들이 적을 맞서게 되자 우리 기독교도들이 하는 관습대로 땅에 무릎을 꿇고 신을 도움을 기도하였다고 한다. 이 장면은 적들에게 기이하게 보였는데, 이상한 일이 바로 이어서 나타났다. 번개가 적진에 떨어져 피해를 준 반면, 신에게 도움을 청하던 아군의 진에는 비가 내려 갈증을 해소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교도 작가 뿐 아니라 기독교도들도 함께 전하고 있는데, 우리의 종교에 무지했던 이교도 역사가들은 이 기적을 언급하면서도 이를 기독교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진리의 친구들인 우리 기독교도들은 이 사건을 단순하고 꾸밈없이 사실대로 전하고 있다. / 번역: 최광민
Among these is Apolinarius, who says that from that time the legion through whose prayers the wonder took place received from the emperor a title appropriate to the event, being called in the language of the Romans the Thundering Legion. Tertullian is a trustworthy witness of these things. In the Apology for the Faith, which he addressed to the Roman Senate, and which work we have already mentioned, he confirms the history with greater and stronger proofs. He writes that there are still extant letters of the most intelligent Emperor Marcus in which he testifies that his army, being on the point of perishing with thirst in Germany, was saved by the prayers of the Christians. And he says also that this emperor threatened death to those who brought accusation against us. He adds further: “What kind of laws are those which impious, unjust, and cruel persons use against us alone? which Vespasian, though he had conquered the Jews, did not regard; which Trajan partially annulled, forbidding Christians to be sought after; which neither Adrian, though inquisitive in all matters, nor he who was called Pius sanctioned.” But let any one treat these things as he chooses; we must pass on to what followed. --- Historia Ecclesiastica, 5. 5. Eusebius relates how a miracle happened in response to the prayers of Christians in the Roman army.
사건을 정리하자면 이렇게 요약된다: AD 174년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게르만족의 일파인 콰디족을 진압하기 위한 마르코마니 전쟁의 일환으로 (현재 헝가리 지역으로) 친정에 나섰을 때의 일이다. 황제가 전투에 끌어들인 로마 제 12군단은 (아마도 기독교도들이 주축이 된) 동부 카파도기아~아르메니아 주둔병력 ( the Melitene) 에서 차출되었는데, 전쟁 지역에 모진 가뭄이 들었을때 이들의 기도로 그 지역에 폭풍이 몰아쳤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아마도 후대에 추가된 내용에 전설에 따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제 12군단에 "천둥군단(Legio XII Fulminata)"이란 칭호를 하사했고, 향후 기독교 박해를 중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원로원 앞으로 보냈다. 아마도 황제가 원로원에 이 사건에 대해 편지를 보낸 것은 사실일 듯하나, 정말로 이 시점부터 기독교 박해를 중단하길 결정한 것은 아닌 듯 하다. 기독교 박해가 잠정중지된 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인 코모두스가 황제가 된 다음이니까.
종교색을 걷어낸 이 일화 자체는 사실인 듯 하다.
물론 유세비우스도 언급했다시피, 로마 역사가들이 전하는 내용은 기독교들 사이에 전해져 온 내용과 약간 다르긴 하다. 로마인들도 이 사건을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기적'으로 간주하긴 했지만, 카시우스 디오의 {로마사} LXXI장 8절은 이 사건을 이집트 마술사 아르누피스 (Arnuphis)과 관련된 것으로 설명한다.
8 So Marcus subdued the Marcomani and the Iazyges after many hard struggles and dangers. A great war against the people called the Quadi also fell to his lot and it was his good fortune to win an unexpected victory, or rather it was vouchsafed him by Heaven. For when the Romans were in peril in the course of the battle, the divine power saved p29them in a most unexpected manner. The Quadi had surrounded them at a spot favourable for their purpose and the Romans were fighting valiantly with their shields locked together; then the barbarians ceased fighting, expecting to capture them easily as the result of the heat and their thirst. So they posted guards all about and hemmed them in to prevent their getting water anywhere; for the barbarians were far superior in numbers. The Romans, accordingly, were in a terrible plight from fatigue, wounds, the heat of the sun, and thirst, and so could neither fight nor retreat, but were standing and the line and at their several posts, scorched by the heat, when suddenly many clouds gathered and a mighty rain, not without divine interposition, burst upon them. Indeed, there is a story to the effect that Arnuphis, an Egyptian magician, who was a companion of Marcus, had invoked by means of enchantments various deities and in particular Mercury, the god of the air, and by this means attracted the rain. ---Cassius Dio, {Roman History}, Loeb Classical Library edition, 1927
...(전략)....따라서 로마군은 피로와 부상과 작열하는 태양과 갈증으로 인한 끔찍한 곤경에 놓여 있었고, 공격도 퇴각도 하지 못하고 전선과 초소에서 꼼짝도 못하고 땡볕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때 신(들)의 개입으로 구름들이 몰려들더니 폭풍이 그들에게 휘몰아 쳤다.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를 보좌한 이집트 마법사인 아르누피스가 여러 신들 - 특별히 대기의 신인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 를 부르는 주문을 써써 비를 불러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71장 8절 / 번역: 최광민
또 카피톨리누스는 (Vita Marc. Aurelii, 24장, and Vita Heliogabali, 9장) '비를 가져다주는 유피테르 Jupiter Pluvius'를 향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본인의 기도에 대한 유피테르의 응답으로 설명한다. 아폴로나리우스는 마르쿠스 황제가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동전에서 야만인들을 향해 천둥번개를 날리는 유피테르/제우스를 묘사한 것으로 설명했다. (그리스의 제우스는 원래 천둥번개의 신이다.) 이 장면은 로마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석주에도 새겨져 있다. 양 팔을 벌린 유피테르 플루비우스가 날개처럼 펼친 두 팔 아래로 비를 내리고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굳이 사건의 진상을 찾는다면 양측의 설명은 아마도 모두 사실일 듯 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끈 로마군단의 부대원들은 더러는 이교의 신에게, 더러는 기독교의 신에게 기도를 올렸을테니 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휘하에서" 싸운 이들 기독교도들이 전투원이었는지 혹은 비전투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음의 내용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독교도들이 요새 및 병영 등에서 다른 로마인들과 같은 삶을 영위한다고 썼다. 게다가 위에서 적은 바대로 아르메니아 주둔 로마군단을 염두에 둔 듯한 내용을 담는다.
그가 여기서 말한 기독교도, 즉 요새와 병영에 있다는 그 기독교도들은 전투원인가? 아니면 비전투원인가? 아마도 비전투요원을 말하는 듯 싶다. "
We[the Christians] started yesterday and already we have filled the world and everything that belongs to you — the cities, apartment houses, fortresses, towns, market places, the camps themselves, your tribes, town councils, the imperial palace, the Senate, the Forum. The only thing we have left to you are the temples. We can count your armies; there is a greater number of Christians in one province! What kind of war would we, who willingly submit to the sword, not be ready or eager for despite our inferior numbers if it were not for the fact that according to our doctrine it is more permissible to be killed than to kill. --- Tertullian, {Apology}, 37:4
우리 기독교는 얼마 전 시작되었지만, 우리는 이미 온 세계와 당신들 (로마인)이 속한 모든 곳 -- 도시, 공동주택, 집, 요새, 마을, 시장, 병영, 부족, 부락회의, 황궁, 원로원, 포룸 -- 에 있다. 우리가 없는 곳은 당신들의 신전들 뿐이다. 당신들의 군대는 어떤가. 한 지역 주둔군단에는 기독교도가 훨씬 더 많이 있지 않은가! 칼 앞에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는 우리가, 남을 죽이는 것보다 차라리 죽을 것을 말하는 우리의 교리만 아니라면 수가 적더라도 우리에게 준비되어 있지 않은 전쟁이 무엇이겠는가? --- 테르툴리아누스, {변증} 37:4 / 번역: 최광민
게다가 그에 따르면 기독교도들은 황제의 안녕과 "용감한 군대"를 위해 신에게 기도를 바친다. 그렇다면 여기서 테르툴리아누스가 언급하는 기독교도들은 용감한 로마군단병의 "전투/살상행위"에 대해서 (묵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긍정한 것인가?
인용한다.
Looking up to Him, we Christians with hands extended, because they are harmless, with head bare because we are not ashamed, without a prayer leader because we pray from the heart, constantly beseech Him on behalf of all Emperors. We ask for them long life, undisturbed power, security at home, brave armies, a faithful senate, an upright citizenry, a peaceful world and for everything that the emperor desires as a man and as a Caesar…--- Tertullian, {Apology}, 30:4
우리 기독교도들은 해를 끼치지 않기에 신을 우러러 맨손을 펼쳐 기도한다. 부끄러울 것이 없기에 머리를 가리지 않고 기도한다. 진심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인도자 없이 기도한다. 이렇게 우리는 황제들을 대신해 신에게 간구한다. 그들의 장수와 강고한 권력, 국내에서의 안전과 용감한 군대, 신뢰할만한 원로원과 견고한 시민들, 평화로운 세상과 모든 것 - 곧 그들 황제들이 일반인으로서나 혹은 황제의 직위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해 신께 간구한다. --- 테르툴리아누스, {변증} 30:4 / 번역: 최광민
테르툴리아누스는 생애의 중/후반기에 정통파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몬타누스 계열에 합류해 극도의 금욕주의를 내세웠다. 아마도 군복무에 대한 그의 입장은 이 무렵을 전후해 변경된 것 같다.
전술했다시피, 군복무에 대한 테르툴리아누스의 관점은 살상행위라는 문제 뿐 아니라 이교숭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로마군의 여러 종교의례 및 관습들과 함께 복잡하게 얽힌 문제다. 로마군 복무에 수반된 이교숭배 행위의 경우 테르툴리아누스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 교부들은 군복무가 기독교도들에게 적절치 않다고 아주 명백하게 선언한다. 여기에는 아무런 이견도 없다. 종교적 문제가 해소, 즉 기독교도 (병사)들에게 이교의 종교행위에 동참하라는 압박이 면제되는 것은 적어도 AD 313년의 밀라노 칙령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로마군이 이교숭배 행위를 기독교도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테르툴리아누스는 아래의 논고에서 "이교의 신에게 제물을 바칠 의무를 가지지 않는 군인"의 경우를 설명한다. 즉, '우상숭배'라는 행위에서 면제된 경우에 군복무가 허용될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다.
The question is now whether a member of the faithful can become a soldier and whether a soldier can be admitted to the Faith even if he is a member of the rank and file who are not required to offer sacrifice or decide capital cases. There can be no compatibility between an oath made to God and one made to man, between the standard of Christ and that of the devil,between the camp of light and the camp of darkness.The soul cannot be beholden to two masters, God and Caesar. Moses, to be sure, carried a rod; Aaron wore a military belt and had a breastplate. If one wants to play around with the topic, Jesus (Joshua), son of Nun led an army and the Jewish nation went to war. But how will a Christian do so? Indeed how will he serve in the army even during peace time without the sword that Jesus Christ has taken away? Even if soldiers came to John and got advice on how they ought to act, even if the centurion became a believer, the Lord, by taking away Peter’s sword, disarmed every soldier thereafter. We are not allowed to wear any uniform that symbolises a sinful act. – Tertullian, On Idolatry, 19:1-3
이제 질문은, 진실한 신자가 병사가 될 수 있는지, 혹은 설령 이교의 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거나 중대한 (살상행위를) 결정해야 할 필요가 없는 지위에 있는 군인이더라도 그를 신자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문제일 것이다.....(중략).... 모세는 확실히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아론은 전투용 허리띠를 맸고 가슴보호대를 했다. 누구든 이 문제를 더 살펴보려고 한다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군대를 이끌었고, 유대인들의 국가는 전쟁을 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기독교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설령 평화 시라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치워버리신 무기없이 군에 복무할 수 있는가? 세례자 요한에게 병사들이 와서 (군인으로서 -- 필자 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물었을때, 백부장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때, 베드로의 칼을 치워버린 주님은 모든 병사들을 그런 방식으로 무장해제 시키셨다. 우리는 죄악을 상징하는 어떤 제복도 입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 테르툴리아누스, {우상숭배에 관해} / 번역: 최광민
To begin with the real ground of the military crown, I think we must first inquire whether warfare is proper at all for Christians. What sense is there in discussing the merely accidental, when that on which it rests is to be condemned? Do we believe it lawful for a human oath to be superadded to one divine, for a man to come under promise to another master after Christ, and to abjure father, mother, and all nearest kinsfolk, whom even the law has commanded us to honour and love next to God Himself, to whom the gospel, too, holding them only of less account than Christ, has in like manner rendered honour? Shall it be held lawful to make an occupation of the sword, when the Lord proclaims that he who uses the sword shall perish by the sword? And shall the son of peace take part in the battle when it does not become him even to sue at law? And shall he apply the chain, and the prison, and the torture, and the punishment, who is not the avenger even of his own wrongs? Shall he, forsooth, either keep watch-service for others more than for Christ, or shall he do it on the Lord's day, when he does not even do it for Christ Himself? And shall he keep guard before the temples which he has renounced? And shall he take a meal where the apostle has forbidden him? 1 Corinthians 8:10 And shall he diligently protect by night those whom in the day-time he has put to flight by his exorcisms, leaning and resting on the spear the while with which Christ's side was pierced? Shall he carry a flag, too, hostile to Christ? And shall he ask a watchword from the emperor who has already received one from God? Shall he be disturbed in death by the trumpet of the trumpeter, who expects to be aroused by the angel's trump? And shall the Christian be burned according to camp rule, when he was not permitted to burn incense to an idol, when to him Christ remitted the punishment of fire? Then how many other offenses there are involved in the performances of camp offices, which we must hold to involve a transgression of God's law, you may see by a slight survey. The very carrying of the name over from the camp of light to the camp of darkness is a violation of it. Of course, if faith comes later, and finds any preoccupied with military service, their case is different, as in the instance of those whom John used to receive for baptism, and of those most faithful centurions, I mean the centurion whom Christ approves, and the centurion whom Peter instructs; yet, at the same time, when a man has become a believer, and faith has been sealed, there must be either an immediate abandonment of it, which has been the course with many; or all sorts of quibbling will have to be resorted to in order to avoid offending God, and that is not allowed even outside of military service; or, last of all, for God the fate must be endured which a citizen-faith has been no less ready to accept. Neither does military service hold out escape from punishment of sins, or exemption from martyrdom. Nowhere does the Christian change his character. There is one gospel, and the same Jesus, who will one day deny every one who denies, and acknowledge every one who acknowledges God—who will save, too, the life which has been lost for His sake; but, on the other hand, destroy that which for gain has been saved to His dishonour. With Him the faithful citizen is a soldier, just as the faithful soldier is a citizen. A state of faith admits no plea of necessity; they are under no necessity to sin, whose one necessity is, that they do not sin. For if one is pressed to the offering of sacrifice and the sheer denial of Christ by the necessity of torture or of punishment, yet discipline does not connive even at that necessity; because there is a higher necessity to dread denying and to undergo martyrdom, than to escape from suffering, and to render the homage required. In fact, an excuse of this sort overturns the entire essence of our sacrament, removing even the obstacle to voluntary sins; for it will be possible also to maintain that inclination is a necessity, as involving in it, forsooth, a sort of compulsion. I have, in fact, disposed of this very allegation of necessity with reference to the pleas by which crowns connected with official position are vindicated, in support of which it is in common use, since for this very reason offices must be either refused, that we may not fall into acts of sin, or martyrdoms endured that we may get quit of offices. Touching this primary aspect of the question, as to the unlawfulness even of a military life itself, I shall not add more, that the secondary question may be restored to its place. Indeed, if, putting my strength to the question, I banish from us the military life, I should now to no purpose issue a challenge on the matter of the military crown. Suppose, then, that the military service is lawful, as far as the plea for the crown is concerned. --- – Tertullian, De Corona [Concerning the Crown], 11
군대의 관/명예에 대해서는 우선 전쟁이란 것이 도대체 기독교도들에게 적절한 것인지를 먼저 논의해야 한다...(중략)....주님 이외의 사람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것은 옳은가? ....(중략)...주님께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써 망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는데, 군인의 직업을 가지는 것은 허용될 수 있는가?....(중략)... 우리가 비방하던 이교의 신전 앞에서 경비를 서는 것은 옳은가? 사도들에 의해 금지된 음식 (피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옳은가?...(중략)_...군에 복무함으로써 신이 금지한 얼마나 많은 죄악들에 연루되게 되는지는 조금만 살피면 알 수 있다....(중략).... 이 질문에 대해 단호히 말한다면, 진실로 우리는 군대를 멀리해야 하다...(후략) --- 테르툴리아누스, {관에 대하여} 11 / 번역: 최광민
§§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 (Origen, c.185 - c.254 AD)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주로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리아에서 주로 활동했던 오리게네스의 진술은 다소 양면적이다.
우선 오리게네스는 전쟁에 있어서의 기독교도들의 역할은 전쟁에 직접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왕을 위해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군복무를 기피함으로써 로마에 해를 끼친다며 기독교를 예리하게 반박했던 켈수스에 대한 반론이다.
{켈수스 반박}에서 인용한다.
If Celsus would have us to lead armies in defense of our country, let him know that we do this too, and that not for the purpose of being seen by men, or of vainglory. For ‘in secret,’ and in our own hearts, there are prayers which ascend as from priests in behalf of our fellow-citizens. And Christians are benefactors of their country more than others. For they train up citizens, and inculcate piety to the Supreme Being; and they promote those whose lives in the smallest cities have been good and worthy, to a divine and heavenly city, to whom it may be said, ‘Thou hast been faithful in the smallest city,come into a great one’ (Luke xix. 17). --- Origen, Against Celsus, Book 8, Chapter 74.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라는 켈수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가 남에게 보이는 보이기 위한 헛된 방식이 아니라 은밀히 나라를 지키고 있음을 켈수스가 깨닫게 하자. "은밀"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우리 시민들을 대신해 사제들에 의해 바쳐지는 기도들이 있다. 따라서 기독교도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욱 나라에 도움이 되는 존재들이다....(후략) --- 오리게네스, {켈수스 반박}, 8권 74장, 번역: 최광민
"In the next place, Celsus urges us "to help the king with all our might, and to labour with him in the maintenance of justice, to fight for him; and if he requires it, to fight under him, or lead an army along with him." To this our answer is, that we do, when occasion requires, give help to kings, and that, so to say, a divine help, "putting on the whole armour of God." And this we do in obedience to the injunction of the apostle, "I exhort, therefore, that first of all, supplications, prayers, intercessions, and giving of thanks, be made for all men; for kings, and for all that are in authority;" and the more any one excels in piety, the more effective help does he render to kings, even more than is given by soldiers, who go forth to fight and slay as many of the enemy as they can. And to those enemies of our faith who require us to bear arms for the commonwealth, and to slay men, we can reply: "Do not those who are priests at certain shrines, and those who attend on certain gods, as you account them, keep their hands free from blood, that they may with hands unstained and free from human blood offer the appointed sacrifices to your gods; and even when war is upon you, you never enlist the priests in the army. If that, then, is a laudable custom, how much more so, that while others are engaged in battle, these too should engage as the priests and ministers of God, keeping their hands pure, and wrestling in prayers to God on behalf of those who are fighting in a righteous cause, and for the king who reigns righteously, that whatever is opposed to those who act righteously may be destroyed!" And as we by our prayers vanquish all demons who stir up war, and lead to the violation of oaths, and disturb the peace, we in this way are much more helpful to the kings than those who go into the field to fight for them. And we do take our part in public affairs, when along with righteous prayers we join self-denying exercises and meditations, which teach us to despise pleasures, and not to be led away by them. And none fight better for the king than we do. We do not indeed fight under him, although he require it; but we fight on his behalf, forming a special army--an army of piety--by offering our prayers to God." --- Origen, Against Celsus, Book 8, Chapter 73
(전략)....어느 누구도 우리보다 더 왕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물론 지시에 따라 싸우라고 왕이 요구하긴 하지만 우리는 왕의 명령 하에 싸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특별한 군대, 즉 신심어린 군대를 조직하여 신에게 기도를 바침으로 왕을 대신해 싸운다 --- 오리게네스, {켈수스 반박} 8권 73장 / 번역: 최광민
오리게네스는 다음의 구절에서 전쟁 자체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필요한 경우, 그 전쟁은 반드시 정의롭고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제시한다. 이른 바 "정의로운 전쟁"의 근거가 되는 개념이다.
"But we ought to admire the divine nature, which extended even to irrational animals the capacity, as it were, of imitating rational beings, perhaps with a view of putting rational beings to shame; so that by looking upon ants, for instance, they might become more industrious and more thrifty in the management of their goods; while, by considering the bees, they might place themselves in subjection to their Ruler, and take their respective parts in those constitutional duties which are of use in ensuring the safety of cities. Perhaps also the so-called wars among the bees convey instruction as to the manner in which wars, if ever there arise a necessity for them, should be waged in a just and orderly way among men. --- Origen Contra Celsus- CHAP. LXXXI- LXXXII
그는 전쟁문제와 관련해 {구약성서}의 신과 {신약성서}의 신이 모순되지 않는다며 켈수스를 반박한다. 오리게네스는 보복법을 모세에게 준 동일한 신이 모세율법을 현실에서 실행할 유대인 국가가 존속되기를 더이상 원치 않고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시키고, 예수가 가르친 새로운 법으로 대체시켰다고 말한다.
Celsus then extracts from the Gospel the precept, "To him who strikes thee once, thou shalt offer thyself to be struck again," although without giving any passage from the Old Testament which he considers opposed to it. On the one hand, we know that "it was said to them in old time,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and on the other, we have read, "I say unto you, Whoever shall smite thee on theone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But as there is reason to believe that Celsus produces the objections which he has heard from those who wish to make a difference between the God of the Gospel and the God of the law, we must say in reply, that this precept, "Whosoever shall strike thee on the one cheek, turn to him the other," is not unknown in the older Scriptures. For thus, in the Lamentations ofJeremiah, it is said, "It is good for a man that he bear the yoke inhis youth: he sitteth alone, and keepeth silence, because he hath borneit upon him. He giveth his cheek to him that smiteth him; he is filled full with reproach."There is no discrepancy, then, between the God of the Gospel and the God of the law, even when we take literally the precept regarding the blow on the face. So, then, we infer that neither"Jesus nor Moses has taught falsely." The Father in sending Jesus didnot "forget the commands which He had given to Moses: "He did not"change His mind, condemn His own laws, and send by His messenger counter instructions." However, if we must refer briefly to the difference between the constitution which was given to the Jews of old by Moses, and that which the Christians, under the direction of Christ's teaching, wish now to establish, we would observe that it must be impossible for the legislation of Moses, taken literally, to harmonize with the calling of the Gentiles, and with their subjection to the Roman government; and on the other hand, it would be impossible for the Jews to preserve their civil economy unchanged, supposing that they should embrace the Gospel.
For Christians could not slay their enemies, or condemn to be burned or stoned, as Moses commands, those who had broken the law, and were therefore condemned as deserving of these punishments; since the Jews themselves, however desirous of carrying out their law, are not able to inflict these punishments. But in the case of the ancient Jews, who had a land and a form of government of their own, to take from them the right of making war upon their enemies, of fighting for their country,of putting to death or otherwise punishing adulterers, murderers, or others who were guilty of similar crimes, would be to subject them to sudden and utter destruction whenever the enemy fell upon them; for their very laws would in that case restrain them, and prevent them from resisting the enemy. And that same providence which of old gave the law, and has now given the Gospel of Jesus Christ, not wishing the Jewish state to continue longer, has destroyed their city and their temple: it has abolished the worship which was offered to God in that temple by the sacrifice of victims, and other ceremonies which He had prescribed. And as it has destroyed these things, not wishing that they should longer continue, in like manner it has extended day by day the Christian religion, so that it is now preached everywhere with boldness, and that in spite of the numerous obstacles which oppose the spread of Christ's teaching in the world. But since it was the purpose of God that the nations should receive the benefits of Christ's teaching, all the devices of men against Christians have been broughtto sought; for the more that kings, and rulers, and peoples have persecuted them everywhere, the more have they increased in number and grown in strength. --- Origen Contra Celsus Book 7:25-26
기독교도들은 모세율법에서처럼 율법을 어김으로써 응분의 벌을 받도록 정죄된 적을 살육하거나 태워죽이거나 돌로 쳐죽일 수 없다....(중략)....자신들의 나라와 정부를 가지고 있었던 고대의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의 적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거나, 자신의 나라를 위해 싸우거나, 간음한 자, 살인자, 혹은 유사한 중죄를 지은 자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었고, 적들이 도발할 때 신속하게 철저하게 괴멸시켰다....(중략)... 옛 율법을 주었던 동일한 신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었는데, 유대인 국가가 더이상 존속되길 원치 않고 그 도시와 성전을 파괴시켰다. 신은 그 자신이 제정했던 성전의 희생물 제사와 다른 모든 의식들을 폐지시켰다....(후략) --- 오리게네스, {켈수스 반박} 7권 26장 / 번역: 최광민
아래의 교부들은 보다 확고하게 전쟁 (혹은 살인) 그 자체에 반대했다.
§§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 (? - 258 AD)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는 라틴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있던 인물 가운데 하나로, 발렌스 황제 치하인 AD 258년 카르타고에서 처형당했다.
키프리아누스는 "개인적"인 살인과 "국가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살상행위를 동일하게 보는 유명한 발언을 한다. 이 살상행위에는 특별히 검투경기가 포함된다.
The world is soaked with mutual blood. When individuals commit homicide, it is a crime; it is called a virtue when it is done in the name of the state. Impunity is acquired for crimes not by reason of innocence but by the magnitude of the cruelty. – St Cyprian of Carthage, {To Donatus}, chapter 6
이 세상은 서로 간의 살육으로 인한 피로 물들어 있다. 개인이 살인을 저지르면 이는 '범죄'가 된다. 하지만 국가의 이름으로 살인하면 그것은 '미덕'이 된다....(후략) ---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 {도나투스에게}, 제 6장 / 번역: 최광민
....Man is killed for the pleasure of man, and to be able to kill is a skill, is an employment, is an art. Crime is not only committed but is taught. What can be called more inhuman, what more repulsive? It is a training that one may be able to kill, and that he kills is a glory. What is this, I ask you, of what nature is it, where those offer themselves towild beasts, whom no one has condemned, in the prime of life, of arather beautiful appearance, in costly garments? While still alive theyadorn themselves for a voluntary death, wretched they even glory intheir wicked deeds. They fight with beasts not because they areconvicts but because they are mad. Fathers look upon their own sons; abrother is in the arena and his sister near by, and, although the moreelaborate preparation of the exhibition increases the price of thespectacle, oh shame! the mother also pays this price that she may bepresent at her own sorrows. And at such impious and terrible spectaclesthey do not realise that with their eyes they are parricides. – St Cyprian of Carthage, To Donatus, chapter 7
사람이 다른 사람의 노리개로 죽어간다. 살인은 기술일 뿐 아니라, 직업이고 기예로 취급된다. 범죄는 이제 그냥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지고 있다. 이보다 더 비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 이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후략] ---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 {도나투스에게} 제 7장
키프리아누스는 아프리카 일대에서 일어나는 전쟁, 기근, 전염병 같은 일들의 원인을 기독교도들에게 돌리며 핍박하는 아프리카의 프로콘술 데메트리아누스 앞으로 쓴 논고에서, "복수는 신에게 속한" 것이며, 따라서 신은 장차 "기독교도들의 손"을 통해서가 아니라 "손수" 박해받는 신자들을 위해 복수할 것이라고 말한다.
No one of us fights back when he is apprehended, nor do our people avenge themselves against your unjust violence though numerous and plentiful.Our certainty of the vengeance which is to come makes us patient. The harmless give way to the harmful; the innocent acquiescein the punishments and tortures certain and confident that whatever we suffer will not remain unavenged, and that the greater is the injury of the persecution, the more just and serious will be the vengeance forthe persecution. Long ago divine Scripture laid down and said: ‘Vengeance is mine, I shall repay, says the Lord,’ and let the Holy Spirit again warn us saying: ‘Say not: I will avenge myself on my enemy, but wait in the Lord so that He may aid you.’ Thus it is clear and manifest that not through us but for us do all these things happen which come down from the anger of God. --- Cyprian of Carthage, {To Demetrian}, Chapter 17
....[전략]...그 옛날 성서는 이렇게 말했다. "복수는 나의 것. 내가 갚아주리라. 주님의 말이다". 또한 성령은 우리에게 "입을 다물어라. 나 스스로 나의 적들에게 복수하리라. 그러나 주 안에서 기다려라. 그가 너희를 도울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신의 진노가 내려와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다. ---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 {데메트리아누스에게} / 번역: 최광민
게다가 그는 상대가 설령 죄인이더라도 그를 죽이는 것은 기독교도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 The adversary had leapt forth to disturb the camp of Christ with violent terror; but, with the same impetuosity with which he had come, he was beaten back and conquered; and as much fear and terror as he had brought, so much bravery and strength he also found. He had thought that he could again overthrow the servants of God, and agitate them in his accustomed manner, as if they were novices and inexperienced—as if little prepared and little cautious. He attacked one first, as a wolf had tried to separate the sheep from the flock, as a hawk to separate the dove from the flying troop; for he who has not sufficient strength against all, seeks to gain advantage from the solitude of individuals. But when beaten back as well by the faith as by the vigour of the combined army, he perceived that the soldiers of Christ are now watching, and stand sober and armed for the battle; that they cannot be conquered, but that they can die; and that by this very fact they are invincible, that they do not fear death; that they do not in turn assail their assailants, since it is not lawful for the innocent even to kill the guilty; but that they readily deliver up both their lives and their blood; that since such malice and cruelty rages in the world, they may the more quickly withdraw from the evil and cruel. What a glorious spectacle was that under the eyes of God! What a joy of His Church in the sight of Christ, that not single soldiers, but the whole camp, at once went forth to the battle which the enemy had tried to begin!.... --- Cyprian of Carthage, {To Cornelius in Exile, Concerning His Confession}. Chapter 2
...[전략]...그리스도의 병사들은 정복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적은 깨달았다. 그들은 죽을 뿐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은 정복될 수 없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맞서서 적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의인에게는 상대가 설령 죄인이더라도 죽이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후략].... ---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 {추방 중인 코르넬리누스에게} / 번역: 최광민
14. But patience, beloved brethren, not only keeps watch over what is good, but it also repels what is evil. In harmony with the Holy Spirit, and associated with what is heavenly and divine, it struggles with the defence of its strength against the deeds of the flesh and the body, wherewith the soul is assaulted and taken. Let us look briefly into a few things out of many, that from a few the rest also may be understood. Adultery, fraud, manslaughter, are mortal crimes. Let patience be strong and stedfast in the heart; and neither is the sanctified body and temple of God polluted by adultery, nor is the innocence dedicated to righteousness stained with the contagion of fraud; nor, after the Eucharist carried in it, is the hand spotted with the sword and blood. ---- {On the Advantage of Patience} chapter 14
....깊이 인내하고 마음을 굳게 잡아라. 신이 거하는 성전인 거룩한 몸은 간음으로 더럽혀지지 않고, 의로움에 바쳐진 순결함은 거짓으로 오염되지 않는다. 성찬을 받은 후에는 그 손이 칼과 피로 더럽혀지지 않는다 .... ---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 {인내의 장점에 대하여} / 번역: 최광민
§§ 아르노비우스 (Arnobius, ? - c.330 AD)
기독교를 가장 박해한 로마황제 가운데 하나인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에 주로 활동했던 아프리카 누미디아 출신의 기독교 변증가 아르노비우스는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We, a numerous band of men as we are, have learned from His teaching and His laws that evil ought not to be requited with evil, that it is better to suffer wrong than to inflict it, that we should rather shed our own blood than stain our hands and our conscience with that of another. An ungrateful world is now for a long period enjoying a benefit from Christ, inasmuch as by His means the rage of savage ferocity has been softened, and has begun to withhold hostile hands from the blood of a fellow-creature. --– Arnobius, Against the Gentiles, Book 1, Chapter 6
.... 우리는 비록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계명을 통해, 악으로 악을 상대하지 말 것과, (악으로) 악을 누르느니 차라리 악을 감내하는게 나음과, 또한 다른 사람의 피로 우리의 손과 양심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우리 자신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을 배워왔다....(후략) --- 아르노비우스, {이교도를 반박하며}, 제 1권 제 6장 / 번역: 최광민
§§ 락탄티우스 (ca. 240 - ca. 320)
아르노비우스의 제자였던 락탄티우스는 원래는 기독교의 최대 박해자 가운데 하나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요청으로 니코메디아의 궁정의 공식 수사학 교수로 위촉되었으나,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본격적인 기독교 탄압을 전개하자 수사학 교수직을 사임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집권과 함께 복권되어 콘스탄티누스의 아들인 크리스푸스를 개인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성직자는 아니었다.
Whatare the interests of our country, but the inconveniences of anotherstate or nation? — that is, to extend the boundaries which areviolently taken from others, to increase the power of the state, toimprove the revenues, — all which things are not virtues, but theoverthrowing of virtues: for, in the first place, the union of humansociety is taken away, innocence is taken away, the abstaining from theproperty of another is taken away; lastly, justice itself is takenaway, which is unable to bear the tearing asunder of the human race,and wherever arms have glittered, must be banished and exterminatedfrom thence. Howcan a man be just who injures, hates, despoils and puts to death? Yetthey who strive to be serviceable to their country do all these things:for they are ignorant of what this being serviceable is, who thinknothing useful, nothing advantageous, but that which can be held by thehand; and this alone cannot be held, because it may be snatched away. --–Lactantius, the Divine Institutes, Book 6, Chapter 6 [Lactantius wasthe tutor of the son of St Constantine the Great. He livedapproximately from 260 to 339 AD.]
For when God forbids us to kill, He not only prohibits us from open violence, which is not even allowed by the public laws, but He warns us against the commission of those things which are esteemed lawful among men. Thus it will be neither lawful for a just man to engage in warfare, since his warfare is justice itself, nor to accuse any one of a capital charge, because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you put a man to death by word, or rather by the sword, since it is the act of putting to death itself which is prohibited. Therefore, with regard to this precept of God, there ought to be no exception at all; but that it is always unlawful to put to death a man, whom God willed to be a sacred animal. --– Lactantius, Divinae Institutiones, VI, xx
신께서 살인을 금하셨을때, 그는 심지어 인간의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는 공개적인 폭력 뿐 아니라 인간의 법으로 합법적이라 여겨지는 살인 역시 경고하신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전쟁에 참가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벌이기에 신의 법은 이를 의인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을 중범으로 기소하여 죽이는 것도 신의 법에 허락되지 않는다. 말(=판결)로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어짜피 사람을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 락탄티우스, {신성한 가르침}, 제 5권 20장 / 번역: 최광민
"This saying of Cicero is true: ‘But they who say that regard is to be had to citizens, but that it is not to be had to foreigners, these destroy the common society of the human race.’" --– Lactantius, the Divine Institutes, Book 6, Chapter 6
§§ 마르켈루스 (Marcellus of Tingis/Tangier, ? - c.298)
마르켈루스는 오늘날 북아프리카 모로코에 위치한 로마군단의 백부장이었으며, 당시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생일잔치에 동반된 (로마의 신에 대한) 분향의식을 거부하여 체포되어 칼로 처형당했다.
I threw down my arms for it was not seemly that a Christian man, who renders military service to the Lord Christ, should render it by earthly injuries. It is not lawful for a Christian to bear arms for any earthly consideration.
나는 내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인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사는 기독교도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며 속세의 흔적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속세의 일로 기독교도가 무기를 드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 번역: 최광민
§§ 유페미아 (? - c. 304/307 AD)
기독교에 대한 대규모 탄압을 벌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 (기독교도였던) 원로원 의원필로프로노스와 테오도시아 사이의 딸이던 19세 처녀 유페미아는 칼케돈에서 열리는 아레스신의 축제일에 분향하라는 칼케돈 시장 프리스쿠스의 포고를 거부하고 축제 당일 가정예배에 참석한 기독교도 42인과 함께 체포되어 고문 후 처형되었다.
유페미아는 병역에 대한 진술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권위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실제에 적용할 때 만약 그 "권위"가 신의 계명에 위배된다면 그 권위에는 복종하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고 진술한다. 사실 불의에 대한 무력을 통한 저항은 종종 종교개혁자들의 모토이기도 했다.
유페미아와 순교와 관련된 전설에서 인용한다.
Both the Emperor’s commands and yours [person in authority] must be obeyed if they are not contrary to the God of heaven. If they are, they must not only not be obeyed; they must be resisted.
황제와 당신(관리)들의 명령에 마땅히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 명령들이 하늘에 계신 신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면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항해야 할 것입니다. -- 유페미아 AD 303년 7월 11일 / 번역: 최광민
그러나 유페미아가 "저항"을 이야기할 때의 그 "저항"은 "비폭력적"인 거부와 저항을 뜻하며, 유페미아는 고문 후 경기장에서 야생곰의 앞에 나서는 것으로 자신의 "저항"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 밀라노 칙령 (AD 313년) 이후
서방의 아우구스투스인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아우구스투스인 리키니우스가 AD 313년 공동발표한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도 및 다른 종교인"들의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밀라노 칙령의 도입부를 인용한다.
When I, Constantine Augustus, as well as I, Licinius Augustus, fortunately met near Mediolanurn (Milan), and were considering everything that pertained to the public welfare and security, we thought, among other things which we saw would be for the good of many, those regulations pertaining to the reverence of the Divinity ought certainly to be made first, so that we might grant to the Christians and others full authority to observe that religion which each preferred;--- Lactantius, De Mort. Pers., ch. 48. opera, ed. 0. F. Fritzsche, II, p 288 sq. (Bibl Patr. Ecc. Lat. XI). Translated in University of Pennsylvania. Dept. of History: Translations and Reprints from the Original Sources of European history,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897?-1907?]), Vol 4:, 1, pp. 28-30. This text is in the public domain.
나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와, 나 리키니우스 아우구스투스는 다행히 메디오라눔 (현, 밀라노) 근방에서 함께 만나 공공의 복지와 안전에 관한 모든 사안을 논의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 가운데서도, 신(들)을 경외하는 문제에 관한 조치가 우선 분명히 처리되어야 하며, 그래서 기독교도들과 다른 종교인들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신앙을 지킬 완전한 권리를 부여하는게 좋겠다고 판단했다....(후략) --- 번역: 최광민
비록 이 칙령이 기독교도의 군복무에 대한 내용을 담지는 않지만, 신앙에 대한 "완전한 권위"를 각자에게 보장한 점을 든다면, 최소한 군대에서 강요된 이교숭배 행위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면책권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다.
§§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c.296 - 373 AD)
AD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파를 저지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교리로 지켜내는데 일조한 아타나시우스 (당시 부제/집사)는 점차 아리우스파로 기울던 콘스탄티누스 및 그 아들과 계속해서 마찰을 빚었다.
"Christ is not only preached through His own disciples, but also wrought so persuasively on men’s understanding that, laying aside their savage habits and forsaking the worship of their ancestral gods, they learnt to know Him and through Him to worship the Father. While they were yet idolaters, the Greeks and Barbarians were always at war with each other, and were even cruel to their own kith and kin. Nobody could travel by land or sea at all unless he was armed with swords, because of their irreconcilable quarrels with each other. Indeed, the whole course of their life was carried on with the weapons. But since they came over to the school of Christ, as men moved with real compunction they have laid aside their murderous cruelty and are war-minded no more. On the contrary, all is peace among them and nothing remains save desire for friendship. Who, then, is He Who has done these things and has united in peace those who hated each other, save the beloved Son of the Father, the common Saviour of all, Jesus Christ, Who by His own love underwent all things for our salvation? Even from the beginning, moreover, this peace that He was to administer was foretold, for Scripture says, ‘They shall beat their swords into ploughshares and their spears into sickles, and nation shall not take sword against nation, neither shall they learn any more to wage war.’ Nor is this by any means incredible. The barbarians of the present day are naturally savage in their habits, and as long as they sacrifice to their idols they rage furiously against each other and cannot bear to be a single hour without weapons. But when they hear the teaching of Christ, forthwith they turn from fighting to farming, and instead of arming themselves with swords extend their hands in prayer. In a word, instead of fighting each other, they take up arms against the devil and the demons, and overcome them by their self-command and integrity of soul." – St Athanasius the Great, On the Incarnation, Chapters 8, 51 and 52
...[전략] 오늘날 그 습속깊이 야만스러운 야만족들은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한, 끊임없이 서로 싸워대며, 한 시라도 무기없이는 견디질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 싸움을 그치고 농사를 지으며, 칼로 무장하는 대신 두 팔을 뻗어 기도한다. 서로 싸우는 대신 그들은 무기를 이제 악마와 악령들에게 겨누며, 자기절제와 통일된 영혼으로써 악마를 이겨낸다.....[후략] / 번역: 최광민
Where the Saviour is named, there every demon is driven out. Again, who has ever so rid men of their natural passions that fornicators become chaste and murderers no longer wield the sword and those who formerly were craven cowards boldly play the man? In a word, what persuaded the barbarians and heathen folk in every place to drop their madness and give heed to peace, save the faith of Christ and the sign of the cross? What other things have given men such certain faith in immortality as have the cross of Christ and the resurrection of His body? – St Athanasius the Great, On the Incarnation, Chapter 8, 50
The Saviour has taught men what they could never learn among the idols. It is also no small exposure of the weakness and nothingness of demons and idols, for it was because they knew their own weakness that the demons were always setting men to fight each other, fearing lest, if they ceased from mutual strife, they would turn to attack the demons themselves. For in truth the disciples of Christ, instead of fighting each other, stand arrayed against demons by their habits and virtuous actions, and chase them away and mock at their captain the devil. Even in youth they are chaste, they endure in times of testing and persevere in toils. When they are insulted, they are patient, when robbed they make light of it, and, marvellous to relate, they make light even ofdeath itself, and become martyrs of Christ. – St Athanasius the Great, On the Incarnation, Chapter 8, 52
§§ 大 바실리오스 (Basil the Great, 330-379 AD)
카파도기아 학파의 교부인 大 바실리오스는 전쟁 중의 살상과 평상 시의 살인을 구별하면서, 이전의 교부들이 전자를 살인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적는다. 다만 속죄를 위해 3년 간 성찬식 금지를 권고할 따름이다.
Nothing is so characteristically Christian as being a peacemaker. – St Basil the Great, Letter 114
I cannot persuade myself that without love to others, and without, as far as rests with me, peaceableness towards all, I can be called a worthy servant of Jesus Christ. – St Basil the Great, Letter 203,2
"Our fathers did not think that killing in war was murder; yet I think it advisable for such as have been guilty of it to forbear communion three years. --- Canon XIII - Basil the Great, Archbishop of Caesarea in Cappadocia to Amphilochius, Bishop of Iconium. The First Canonical Epistle
우리 교부들은 전쟁에서의 살육을 살인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3년 간의 성찬을 받지 못하는 죄로 간주하는게 좋다고 본다. --- 바실리오스, {카논 XIII}
I have learnt to know one who proves that even in a soldier’s life it is possible to preserve the perfection of love to God, and that we must mark a Christian not by the style of his dress, but by the disposition of his soul. – St Basil the Great, Letter 106 (to a soldier)
§§ 투르의 마르티누스 (A.D. 316 – 397)
마르티누스는 AD 4세기 초에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군 현역장교였다. 그는 AD 336년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전투를 거부한 일로 유명하다. 그는 순교하지는 않았고, 나중에 사제와 주교로 임명되었다.
AD 5세기 초 연대기 작가인 술피티우스 세베루스 (Sulpicius Severus, AD 363-425)가 남긴 마르티누스의 전기에서 발췌한다.
[CHAPTER II.] Military Service of St. Martin. MARTIN, then, was born at Sabaria[3] in Pannonia, but was brought up at Ticinum,[4] which is situated in Italy. His parents were, according to the judgment of the world, of no mean rank, but were heathens. His father was at first simply a soldier, but afterwards a military tribune. He himself in his youth following military pursuits was enrolled in the imperial guard, first under king Constantine, and then under Julian Cæsar. This, however, was not done of his own free will, for, almost from his earliest years, the holy infancy of the illustrious boy aspired rather to the service of God.[5] For, when he was of the age of ten years, he betook himself, against the wish of his parents, to the Church, and begged that he might become a catechumen. Soon afterwards, becoming in a wonderful manner completely devoted to the service of God, when he was twelve years old, he desired to enter on the life of a hermit; and he would have followed up that desire with the necessary vows, had not his as yet too youthful age prevented. His mind, however, being always engaged on matters pertaining to the monasteries or the Church, already meditated in his boyish years what he afterwards, as a professed servant of Christ, fulfilled. But when an edict was issued by the ruling powers[6] in the state, that the sons of veterans should be enrolled for military service, and he, on the information furnished by his father, (who looked with an evil eye on his blessed actions) having been seized and put in chains, when he was fifteen years old, was compelled to take the military oath, then showed himself content with only one servant as his attendant. And even to him, changing places as it were, he often acted as though, while really master, he had been inferior; to such a degree that, for the most part, he drew off his [servant's] boots and cleaned them with his own hand; while they took their meals together, the real master, however, generally acting the part of servant. During nearly three years before his baptism, he was engaged in the profession of arms, but he kept completely free from those vices in which that class of men become too frequently involved. He showed exceeding kindness towards his fellow-soldiers, and held them in wonderful affection; while his patience and humility surpassed what seemed possible to human nature. There is no need to praise the self-denial which he displayed: it was so great that, even at that date, he was regarded not so much as being a soldier as a monk. By all these qualities he had so endeared himself to the whole body of his comrades, that they esteemed him while they marvelously loved him. Although not yet made a new creature[7] in Christ, he, by his good works, acted the part of a candidate for baptism. This he did, for instance, by aiding those who were in trouble, by furnishing assistance to the wretched, by supporting the needy, by clothing the naked, while he reserved nothing for himself from his military pay except what was necessary for his daily sustenance. Even then, far from being a senseless hearer of the Gospel, he so far complied with its precepts as to take no thought about the morrow.
[CHAPTER III.] Christ appears to St. Martin. ACCORDINGLY, at a certain period, when he had nothing except his arms and his simple military dress, in the middle of winter, a winter which had shown itself more severe than ordinary, so that the extreme cold was proving fatal to many, he happened to meet at the gate of the city of Amiens[8] a poor man destitute of clothing. He was entreating those that passed by to have compassion upon him, but all passed the wretched man without notice, when Martin, that man full of God, recognized that a being to whom others showed no pity, was, in that respect, left to him. Yet, what should he do? He had nothing except the cloak in which he was clad, for he had already parted with the rest of his garments for similar purposes. Taking, therefore, his sword with which he was girt, he divided his cloak into two equal parts, and gave one part to the poor man, while he again clothed himself with the remainder. Upon this, some of the by-standers laughed, because he was now an unsightly object, and stood out as but partly dressed. Many, however, who were of sounder understanding, groaned deeply because they themselves had done nothing similar. They especially felt this, because, being possessed of more than Martin, they could have clothed the poor man without reducing themselves to nakedness. In the following night, when Martin had resigned himself to sleep, he had a vision of Christ arrayed in that part of his cloak with which he had clothed the poor man. He contemplated the Lord with the greatest attention, and was told to own as his the robe which he had given. Ere long, he heard Jesus saying with a clear voice to the multitude of angels standing round -- "Martin, who is still but a catechumen, clothed[9] me with this robe." The Lord, truly mindful of his own words (who had said when on earth -- "Inasmuch[10] as ye have done these things to one of the least of these, ye have done them unto me"), declared that he himself had been clothed in that poor man; and to confirm the testimony he bore to so good a deed, he condescended to show him himself in that very dress which the poor man had received. After this vision the sainted man was not puffed up with human glory, but, acknowledging the goodness of God in what had been done, and being now of the age of twenty years, he hastened to receive baptism. He did not, however, all at once, retire from military service, yielding to the entreaties of his tribune, whom he admitted to be his familiar tent-companion.[11] For the tribune promised that, after the period of his office had expired, he too would retire from the world. Martin, kept back by the expectation of this event, continued, although but in name, to act the part of a soldier, for nearly two years after he had received baptism. ---- SULPICIUS SEVERUS . 363 – c. 425, {ON THE LIFE OF ST. MARTIN.}, Translation and Notes by Alexander Roberts From: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Second Series, Volume 11 New York, 1894
이교도였던 상급장교의 아들인 그는, 상급장교의 아들들은 군복무를 해야한다는 포교령에 따라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황제의 친위대로 군생활을 시작했고, 배교자 황제인 율리아누스 때까지 군에 복무했다. 그는 10세 무렵에 교리문답자가 되었고, 이후 군복무 중 3년 간 세례준비자 신분으로 있었다. 20세에 마침내 세례를 받지만, 즉시 군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2년 가량 군에 더 남아 있었다.
그가 군대를 결정적으로 떠나는 계기는 그가 배교자 황제 율리아누스 휘하 병력의 일원으로 갈리아 지방에서 야만족과 대치하던 때였다. 이때 그는 이미 예편을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진격명령이 마르티누스의 부대에 떨어졌을 때 유혈이 세례자에게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 마르티누스는 율리아누스 황제에게 항명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CHAPTER IV.] Martin retires from Military Service. IN the meantime, as the barbarians were rushing within the two divisions of Gaul, Julian Cæsar,[12] bringing an army together at the city[13] of the Vaugiones, began to distribute a donative to the soldiers. As was the custom in such a case, they were called forward, one by one, until it came to the turn of Martin. Then, indeed, judging it a suitable opportunity for seeking his discharge--for he did not think it would be proper for him, if he were not to continue in the service, to receive a donative--he said to Cæsar, "Hitherto I have served you as a soldier: allow me now to become a soldier to God: let the man who is to serve thee receive thy donative: I am the soldier of Christ: it is not lawful for me to fight." Then truly the tyrant stormed on hearing such words, declaring that, from fear of the battle, which was to take place on the morrow, and not from any religious feeling, Martin withdrew from the service. But Martin, full of courage, yea all the more resolute from the danger that had been set before him, exclaims, "If this conduct of mine is ascribed to cowardice, and not to faith, I will take my stand unarmed before the line of battle tomorrow, and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protected by the sign of the cross, and not by shield or helmet, I will safely penetrate the ranks of the enemy." He is ordered, therefore, to be thrust back into prison, determined on proving his words true by exposing himself unarmed to the barbarians. But, on the following day, the enemy sent ambassadors to treat about peace and surrendered both themselves and all their possessions. In these circumstances who can doubt that this victory was due to the saintly man? It was granted him that he should not be sent unarmed to the fight. And although the good Lord could have preserved his own soldier, even amid the swords and darts of the enemy, yet that his blessed eyes might not be pained by witnessing the death of others, he removed all necessity for fighting. For Christ did not require to secure any other victory in behalf of his own soldier, than that, the enemy being subdued without bloodshed, no one should suffer death. ---SULPICIUS SEVERUS . 363 – c. 425, {ON THE LIFE OF ST. MARTIN.}, Translation and Notes by Alexander Roberts From: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Second Series, Volume 11 New York, 1894
....[전략]... 지금껏 저는 군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신의 병사가 되게 허락해 주십시오. 당신에게 봉사한 제게 이제 혜택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병사입니다. 싸우는 것은 제게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후략].... --- 술키피우스 세베루스, {마르티누스의 삶} / 번역: 최광민
이 발언의 종교적 동기를 믿지 않은 율리아누스는 그를 다음날 있을 전투를 회피하고자 하는 겁장이로 간주하지만, 마르티누스는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기 위해 다음날 전투에서 비무장으로 십자가만 들고 적진으로 들어가겠다고 선언한다. 야만족은 기적적으로 다음날 사절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항복했다.
마르티누스가 로마군에 복무하던 시절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A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의 일로, {밀라노 칙령}에 따라 기독교도들은 신앙생활에 있어 이교신에 대한 공공숭배 등으로 인한 불이익을 받지 않을 시점이다. 마르티누스의 이 발언은 따라서 세례자 신분으로서 "전쟁 상 살인" 그 자체에 대한 그의 입장이다.
§§ 닛사 주교 그레고리우스 (c.335 - c.394)
우선 성직자 임명과 관련된 관점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의도하지 않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조차차 부정한 것으로 간주해, 그런 자를 성직에서 배제시킨다.
Someone who has defiled himself with murder — be it involuntarily — is considered impure through his impure deeds and the canon considers such a person unworthy of the grace of priesthood. --– St Gregory of Nyssa, Canonical Epistle to St Letoius of Melitene.
설령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살인하여 자신을 더럽힌 자는 그 행위로 인해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며, 교회법은 살인한 자가 사제가 되는 은혜를 받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Canonical Epistle to St Letoius of Melitene}
하지만 "전쟁과 평화"의 관점을 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후기 교부들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Who are these? Those who imitate the Divine love of others, who show forth in their own life the characteristic of the Divine energy. The Lord and Giver of good things completely annihilates anything that is without affinity and foreign to goodness. This work He ordains also for you, namely to cast out hatred and abolish war, to exterminate envy and banish strife, to take away hypocrisy and extinguish from within resentment of injuries smoldering in the heart. Instead, you ought to introduce whatever is contrary to the things that have been removed. For as light follows the departure of darkness, thus also these evil things are replaced by the fruits of the Spirit: by charity, joy, peace, benignity, magnanimity, all the good things enumerated by the Apostle (Gal 5:22). How then should the dispenser of the Divine gifts not be blessed, since he imitates the gifts of God and models his own good deeds on the Divine generosity? But perhaps the beatitude does not only regard the good of others. I think that man is called a peacemaker par excellence who pacifies perfectly the discord between flesh and spirit in himself and the war that is inherent in nature, so that the law of the body no longer wars against the law of the mind but is subjected to the higher rule and becomes a servant of the Divine ordinance –-- St. Gregory of Nyssa / The Lord’s Prayer and the Beatitudes, Ancient Christian Writers series, Newman Press; with thanks to Fr. Anthony Coniaris of Light & Life Books for recommending this passage.
§§ 콘스탄티노플 주교 크리소스토모스 (c. 347–407 AD)
로마의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교회 밖"과 "안"을 구별하면서, 세속에서의 (정당한) 전쟁을 일단 인정한다.
- In the past the emperors were faithless persecutors; presently their piety reaches up to heaven. When passing the threshold of the church they lay off their crowns and sign their foreheads with the Cross of Christ. Outside are the weapons, inside the Mysteries; outside the shields, while in here the sacred acts are performed. – St John Chrysostom, Homily on the Pentecost, CPG 4343
- 과거에 황제들은 신앙없는 압제자들이었지만, 현재 그들의 신심은 하늘을 찌른다. 교회의 문턱을 넘을 때 그들은 관을 벗고 그리스도의 십자표지로 이마에 성호를 긋는다. 교회 밖에는 무기가, 교회 안에는 성사가 있다. 교회 밖에는 방패가 있지만, 안에는 거룩한 의식이 치러진다 / 번역: 최광민
또한 기독교도들이 지켜야할 가장 중요한 '평화'를 '내적평화'로 규정한다.
- For what advantage is it, that the world enjoys profound peace, if thou art at war with thyself? This then is the peace we should keep. If we have it, nothing from without will be able to harm us. And to this end the public peace contributes no little: whence it is said, ‘That we may lead a quiet and peaceable life.’ But if any one is disturbed when there is quiet, he is a miserable creature. Seest thou that He speaks of this peace which I call the third (inner, ed.) kind? Therefore when he has said, ‘that we may lead a quiet and peaceable life,’ he does not stop there, but adds ‘in all godliness and honesty.’ But we cannot livein godliness and honesty, unless that peace be established. For when curious reasonings disturb our faith, what peace is there? or when spirits of uncleanness, what peace is there? – St John Chrysostom, Homily 7 on 1 Tim 2:2-4
- There are three very grievous kinds of war. The one is public, when our soldiers are attacked by foreign armies: The second is, when even in time of peace, we are at war with one another: The third is, when the individual is at war with himself, which is the worst of all. From the third, we cannot escape without danger. For when the body is at variance with the soul, and raises up evil desires, and arms against it sensual pleasures, or the bad passions of anger, and envy; we cannot attain the promised blessings, till this war is brought to an end; whoever does not still this tumult, must fall pierced by wounds that will bring that death that is in hell. We have daily need therefore of care and great anxiety, that this war may not be stirred up within us, or that, if stirred up, it may not last, but be quelled and laid asleep. - 출전필요
- 세가지 형태의 전쟁이 있다. 하나는 공적인 것으로 우리 병사들이 외국군대의 공격을 받을 때이다. 두번째는 평화 중일때라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 벌이는 전쟁이다. 세번째 스스로와 전쟁을 벌일 때이며, 이것이 가장 심각한 형태의 전쟁이다....(후략)
또한 그는 적을 "공공의 적"과 "개인의 적"으로 나누고, "개인의 적"을 저주하는 행위는 최고의 죄로 간주한다. 이것은 즉, 개인의 적에 대한 복수를 금하는 모세율법과 같은 관점이다.
- If in order to put an end to public wars, and tumults, and battles,the Priest is exhorted to offer prayers for kings and governors, much more ought private individuals to do it. – St John Chrysostom, Homily 7 on 1 Tim 2:2-4
- Many, throwing themselves prostrate, and striking the ground with theirforehead, and pouring forth hot tears, and groaning bitterly from theheart and stretching out their hands, and displaying much earnestness,employ this warmth and forwardness against their own salvation. For itis not on behalf of their own sins that they beseech God; nor are theyasking forgiveness of the offences committed by them; but they areexerting this earnestness against their enemies, doing just the samething as if one, after whetting his sword, were not to use the weaponagainst his enemies, but to thrust it through his own throat. So thesealso use their prayers not for the remission of their own sins, butabout revenge on their enemies; which is to thrust the sword againstthemselves. – St John Chrysostom, Homily against Publishing the Errors of the Brethren
- Just as maniacs, who never enjoy tranquility, so also he who isresentful and retains an enemy will never have the enjoyment of anypeace; incessantly raging and daily increasing the tempest of histhoughts calling to mind his words and acts, and detesting the veryname of him who has aggrieved him. Do you but mention his enemy, hebecomes furious at once, and sustains much inward anguish; and shouldhe chance to get only a bare sight of him, he fears and trembles, as ifencountering the worst evils, Indeed, if he perceives any of hisrelations, if but his garment, or his dwelling, or street, he istormented by the sight of them. For as in the case of those who arebeloved, their faces, their garments, their sandals, their houses, orstreets, excite us, the instant we behold them; so also should weobserve a servant, or friend, or house, or street, or any thing elsebelonging to those We hate and hold our enemies, we are stung by allthese things; and the strokes we endure from the sight of each one ofthem are frequent and continual. What is the need then of sustainingsuch a siege, such torment and such punishment? For if hell did notthreaten the resentful, yet for the very torment resulting from thething itself we ought to forgive the offences of those who haveaggrieved us. But when deathless punishments remain behind, what can bemore senseless than the man, who both here and there brings punishmentupon himself, while he thinks to be revenged upon his enemy! – St John Chrysostom, Homily 20
- As it is not to be imagined that the fornicator and the blasphemer can partake of the sacred Table, so it is impossible that he who has an enemy, and bears malice, can enjoy the holy Communion.… I forewarn, and testify, and proclaim this with a voice that all may hear! ‘Let no one who hath an enemy draw near the sacred Table, or receive the Lord’sBody! Let no one who draws near have an enemy! Do you have an enemy?Draw not near! Do you wish to draw near? Be reconciled, and then draw near, and touch the Holy Thing!’ – St John Chrysostom, Homily 20
- We are commanded to have only one enemy, the devil. With him never be reconciled! But with a brother, never be at enmity in thy heart. – St John Chrysostom, Homily 20
- Praying against one’s personal enemies is a transgression of law. – St John Chrysostom, Homily against Publishing the Errors of the Brethren
- "개인의 적"을 저주하는 기도는 교회법을 어기는 최악의 죄악이다. / 번역: 최광민
- Prayer for our enemies is the very highest summit of self-control. – St John Chrysostom, Homily 18 on the Gospel of St Matthew
- 적들을 위하는 기도는 최고수준의 자기절제이다. / 번역: 최광민
§ 정리
누가 옳은가?
기독교도는 모든 종류의 살상에 참여할 수 없는가? 아니면 이것은 성직자에게만 적용되는 조항인가? 적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즉 정당방위를 위한 살상은, 혹은 방어전에서의 살상은 자동적으로 면죄되는 것일까? 그럼 침략, 혹은 부당한 전쟁에 동원된 병사에게는 그 어떤 변명도 불가능한 것일까?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종종 제시되는 "예방전쟁"은 침략인가 혹은 방어인가? 전쟁에서 적을 살상한 병사들은 다만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유를 불문하고 면죄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방어전과 침략전에서 서로 다르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한 기독교도가 다른 기독교도를 전쟁 중 살해하는 것은 살인에 속하는가 아닌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죽이는 자살에 대해 (1) "기독교도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며, 또한 (2) "성령이 거하는 몸에 대한 상해"로 해석하여 대죄로 간주하는 기독교의 경우, 다른 기독교도를 살상하는 것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전쟁 중에는 이 교리가 잠시 유예되는가?
기독교도의 군 복무가 대세로 받아들여진 후에도 교회법은 다른 기독교도를 살해하는 것을 한동안 금했다. 물론 이교도와 이단자들은 예외가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예외는 몇 세기가 지나면 더 확대되어, 정통을 자처하는 그룹끼리도 - 정교도들끼리, 로마카톨릭끼리, 또 프로테스탄트끼리도 - 거리낌없이 살육하게 되었다. 부득이한 방어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군주들의 노골적인 이권을 위한 전쟁이나, 정의롭지않은 침략전쟁에서도 조차.
케네스 브래너가 감독/주연한 영화 {Henry V} 속의 잉글랜드군은 전투가 승리로 끝난 후 신에게 영광을 돌리며 {시편} 속의 한 곡을 합창한다. 프랑스의 영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의 지극히 개인적 이익에 동원되어 프랑스까지 건너가 피 흘린 잉글랜드 병사들이 뜬금없이 왜 신의 영광을 찾는지 그저 아리송할 뿐이다.
Non nobis, non nobis, Domine,
Sed nomini tuo da gloriam.
오 주여, 우리가 아닌, 우리가 아닌,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교부들의 시대로부터 참 멀리도 온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누구의 책임인지를 말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PBS의 {Frontline}에서 방송한 {Memory of the Camps}란 다큐멘터리가 있다.( http://www.pbs.org/wgbh/pages/frontline/camp/)
히틀러의 의회연설 (출처: Wikimedia Commons)
나찌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1937 (출처: Wikimedia Commons)
제목이 암시하듯 아우슈비쯔 수용소를 비롯해 독일과 폴란드 일대에 산재하고 있었던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다루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종전 직후 이 지역으로 진주한 연합군측(미/영 정보부)이 찍은 기록영화를 편집하지 않고 무삭제로 보여주고 있으며, 말라 죽어서 반미라 상태가 된 상태로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시신들의 얼굴들도 여과없이 보여진다. 그 참혹함과 끔찍함에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다.
북부독일 Bergen-Belsen 수용소를 접수한 영국군은 독일군이 철군한 수용소에서 일하던 독일인 민간인과 폴란드인 부역자들에게 7일 동안 수용소 곳곳에서 죽은 시신들을 찾아내도록 하여 축구장 반 만한 엄청난 크기의 네모진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시신들을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그리고 이들 부역자들을 향해 수용소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뼈만 남은 유대인들은 소리치며 저주를 퍼붓는다.
이윽고 이 일이 끝나자 연합군은 수용소에서 일한 독일 민간인과 나찌에 부역한 폴란드인들 등 뒤에 총을 겨누고 그 구덩이 주위에 둘러세워 그 참혹한 현장 앞에 세운다. 부역한 자 가운데는 나찌소년단 정도로 보이는 청소년들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겁에 질려있고, 일부는 울고, 일부는 그 광경을 눈 앞에서 목도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일 아니란듯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그들 뒤에서는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싸늘하게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 머리 위 확성기에서 영국군 대령 Spottiswoode 독일어 연설이 울려퍼진다. 영어 및 한국어 번역을 옮긴다.
You (Sie), who represent the fathers and brothers of German youth, see before your eyes, some of the sons and daughters who bear the direct responsibility for this crime. They are a small portion only. Therefore, it is more than the human soul is able to bear. But who bears the real responsibility?
YOU, who allowed your leader to carry out this horrible madness;YOU, who couldn't do enough for this degenerate triumph.YOU, who were a part of this camp.너희들, 독일 청년들의 부모와 형제를 대표하는 너희들은, 이 범죄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자들의 아들과 딸들 몇명을 눈 앞에서 보고있다. 전체 가운데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다. 그렇다면 진짜 책임을 질 자들은 누구인가?
너희들, 지도자 (총통)에게 이 끔찍한 광기를 허락한, 바로 너희들이다.
너희들, 이 타락한 범죄를 충분히 막지 못한, 바로 너희들이다.
너희들, 이 수용소의 한 부분이었던, 바로 너희들이다. / 영어대본에서 중역: 최광민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Universal Soldier- Donovan- 번역: 최광민He's five foot-two, and he's six feet-four,He fights with missiles and with spears.He's all of thirty-one, and he's only seventeen,He's been a soldier for a thousand years.키가 작을 수도 혹은 클 수도,미사일로 혹은 창으로 싸울 수도,31살일 수도, 17살일 수도 있겠지.아무튼 그는 그렇게 천년 간 병사였어.He'a a Catholic, a Hindu, an Atheist, a Jain,A Buddhist and a Baptist and a Jew.And he knows he shouldn't kill,And he knows he always will,Kill you for me my friend and me for you.그는 천주교도, 힌두교도, 무신론자, 자이나교도,혹은 불교도, 침례교도, 혹은 유대인이기도 하지."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알고 있지만, 또나를 위해 너를 죽이거나, 너를 위해 나를 죽일 거란 것도 알고 있어.And he's fighting for Canada,He's fighting for France,He's fighting for the USA,And he's fighting for the Russians,And he's fighting for Japan,And he thinks we'll put an end to war this way.캐나다,프랑스,미국,러시아,혹 일본 편에 싸우며싸워야만 전쟁이 끝난다고 생각하네.And he's fighting for Democracy,He's fighting for the Reds,He says it's for the peace of all.He's the one who must decide,Who's to live and who's to die,And he never sees the writing on the wall.민주주의,혹은 공산주의 편에서 싸우며,이게 다 평화를 위해서라 말하지.그는 누굴 살릴지, 누굴 죽일지를결정하는 자.그러나 벽에 쓰인 말 ("살인하지 말라")는 보려고 하지 않네.But without him,How would Hitler have condemned him at Labau?Without him Caesar would have stood alone,He's the one who gives his bodyAs a weapon of the war,And without him all this killing can't go on.그가 없었다면, 무슨 수로히틀러가 살육을 벌이고,카이사르는 권좌에 올랐으리.자기 몸을전장의 무기로 바친 자.그 없이는 전쟁은 일어날 수가 없네.
He's the Universal Soldier and he really is to blame,His orders come from far away no more,They come from here and there and you and me,And brothers can't you see,This is not the way we put an end to war.유니버셜 솔저. 그가 바로 비난받을 자.명령은 멀리서 오는게 아니라바로 여기 당신과 나에게서 떨어지는 것.당신들은 보지 못하는가.전쟁은 이렇게 끝나지 않음을.
Just Don't Do It.
그러나,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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