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광민] 예수 vs. 예수 #11: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동방박사의 별 (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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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종교|철학

[© 최광민] 예수 vs. 예수 #11: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동방박사의 별 (합본)

草人! 2021. 8. 4. 06:23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12-30 / 2005-12-22 / 201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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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광민] 예수 vs. 예수 #11: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동방박사의 별 (합본)

요약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연도 및 날짜의 산출근거를 고대 사료를 바탕으로 정리하고,  BC 4년이라는 현대의 표준가설과 비교한다.

순서

    1. 역법과 천문학
      1. 개요
      2. 동지=사투르날리아=솔 인빅투스 탄생축일?
        1. 오시리스의 탄생일?
        2. 디오니소스의 탄생일? 
        3. 태양신 아도니스의 탄생일?
        4. 솔, 헬리오스, 엘-게발, 미트라스의탄생일?
          1. 엘라가발루스와 "엘-게발"
          2. 아우렐리아누스와 "솔"
          3. AD 354년 달력과 "인빅투스"
          4. AD 362년 율리아누스의 "헬리오스/솔/미트라스"
      3. 이집트 꼽트교회의 파촌 25일, 파르무티 25일, 투비 15/11일, (율리우스력) 11월 17일
      4. 라틴교회의 율리우스력 12월 25일
      5. 동방교회의 1월 6일 
      6. 동방박사의 별
        1. 마태/마태오의 기록
        2.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εἴδομεν γὰρ αὐτοῦ τὸν ἀστέρα ἐν τῇ ἀνατολῇ)
        3. 마고스, 마기, 동방박사
        4. 삼합 (triple conjunction)
        5. 베들레헴의 별
        6. 믹달 에데르
      7.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서력원년 계산법
        1.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
        2. 서력기원, Anni Domini Nostri Jesu Christi
      8. 문제는?
    2. 아우구스투스의 포고령
      1.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
      2.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충성맹세: BC 3/2년
      3. 정리
    3. 헤롯대왕의 사망연도
      1. 표준연표: BC 4년
        1. 헤롯의 통치기간
        2. 월식
        3. 헤롯의 아들들의 집권기간
      2. BC 4년설의 문제점
        1. 헤롯대왕의 통치기간에 대한 요세푸스의 다른 기록방식
        2. 아우구스투스의 포고령
        3. 월식부터 사망까지의 기간
        4. 다른 월식들의 문제
        5. BC 6/5년의 시리아 행정관: 바루스? 사투르니누스?
        6.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행적 문제
        7. 율리아 문제
        8. 헤롯의 아들들의 집권연대
          1. 헤롯 아켈라오스
          2. 헤롯 안티파스의 실제 집권연도
          3. 헤롯 필립포스의 집권 20년? 22년?
        9. 헤롯의 영아살해
      3. 정리

      0. 참고

      본문에 사용되는 한국어 {성서}는 대체로 한국의 프로테스탄트와 로마카톨릭이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을 따르나, 필요에 따라 다른 번역도 참조한다.


      Basilica of Sant'Apollinare Nuovo in Ravenna, Italy: The Three Wise Men" (named Balthasar, Melchior, and Gaspar). Detail from: "Mary and Child, surrounded by angels", mosaic of a Ravennate italian-byzantine workshop, completed within 526 AD by the so-called "Master of Sant'Apollinare" (source: Wikimedia Commons)




      1부: 역법과 천문학

      1.1. 개요

      비교신화학과 문화인류학이 기성종교를 해부하고 해설하는 방식은 참 독특하고 매력적인데, 그 방식이란 것은 대상들의 공통요소를 뽑아내고, 거기서부터 다시 역사적 실체들을 재구성해나가는 방식이다. 이 관점에서 볼때, 어떤 두 대상이 공통요소를 가진다는 것은 이 둘이 공통된 역사적 기원을 가졌거나 또는 직접적으로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비교신화학이나 문화인류학은 어떤 종교적 모티프의 독자적 발생 혹은 우연의 일치란 개념을 잘 믿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적 선후관계, 혹은 지리적 교류 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으면, 표면적 "상관"관계를 "인과"관계 혹은 "차용"관계로 잘못 해석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가령, 아래 인용된 것은 한 백과사전이 설명하는 크리스마스의 기원이다.

      "(전략)...이때를 기하여 태양이 하루하루 북으로 올라와 낮이 길어지기 때문에 옛날에는 동지를 중요한 축제일로 삼았으며, 특히 태양신을 숭배하던 페르시아의 미드라교에서는 12월 25일을 ‘태양탄생일’로 정하여 축하하였다. 이 미드라교의 동지제가 로마로 넘어가 크게 유행하였고, 4세기경부터 현재 기독교의 크리스마스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마스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이교도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던 봄의 광명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동지(冬至)의 축일, 다시 말하면 태양숭배의 습속을 이용하여 그리스도 탄생을 기념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농경사회의 로마에서는 ‘사투르날리아’라는 농경신 새턴의 제일(祭日)이 12월 21~31일(혹은 17~24일까지, 또는 1월 1일)까지 계속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이 신은 본래 그리스에서 왔다고 전해지는 고대 이탈리아의 신으로서, 크로노스와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다...(중략)...이 크로노스 신(로마에서는 사투르누스신)을 제사하는 ‘사투르날리아’ 기간에는 노예도 자유롭게 주인의 연회에 참석할 수가 있으며, 혹은 주인이 거꾸로 노예에게 봉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연령 /성별 /계급의 구별 없이 연회 /경기 /행렬 따위가 벌어졌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도 서로 선물을 교환하였다. 이 기간 중에서 12월 25일은 동지가 지난 다음으로 태양이 소생하는 날이라고 하여 특히 기념되었다. 또 ‘미트라의 축일’도 이 날이었다. 미트라는 본래 페르시아인의 신으로서 태양과 동일시된 인도-유럽 민족의 옛 신성(神性)이었다. 이것이 로마 사람들, 특히 군인/병사 사이에서 숭배되어 유럽 각지에 전파되었다. 이것은 태양신, 불패의 태양으로서 숭경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켈트 민족의 제사(祭司)계급이었던 드뤼도들도 그들의 높은 성소(聖所)에서 이 기쁜 날을 축하하고, 또한 게르만인도 이 날을 유쾌하게 축하하였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농경력(農耕曆)상의 성대한 제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을 결합시킨 것이 크리스마스이다.  --- 출처 : 두산 대백과사전.

      그런데 나는 이 입장을 때때로 수긍할 수 없다.

      검토해 보자. 기존의 "대중적"인 문화인류학 서적만을 읽은 사람들은 아마도 다음의 1차사료 (=원전)들을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없을 것이다.





      1.2. 동지=사투르날리아=솔 인빅투스 탄생축일?

      로마의 전통적 농경축제(사투르날리아), 혹은 소아시아에서 유래해 로마에 도입된 미트라스교의 미트라스 탄생축일(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이 크리스마스의 기원이라는 주장을 처음 펼친 사람은, 17세기 말의 독일 프로테스탄트 학자인 야브론스키(Paul Ernst Jablonski)와 로마카톨릭 수도사인 아르둥 (Dom Jean Hardouin)이었다.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가 이교적 기원을 가졌다고 주장한 점에서는 일치했으나, 그 해석에 대해서는 정반대였다. 전자는 로마 카톨릭이 이교의 축제를 흡수함으로써 타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주장을 펼쳤고, 후자는 반대로 로마 카톨릭이 교리의 손상없이 이교의 축제를 기독교적으로 순화시켰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주장을 펼쳤다. 

      참고로, 학식높던 예수회 수도사 아루둥은 1696년 발표한 저작에서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키케로, 플리니우스, 베르길리우스 등 몇몇 그리스/로마 작가들의 몇몇 작품을 제외한 모두 고대의 기록물들이 AD 13세기 경에 로마교황과 맞선 신성로마제국을 지지할 불순한 목적을 가진 세베루스 아르콘티우스 (Severus Archontius)가 이끈 일군의 수도사들에 의해 모두 위조된 것이며, 신약성서도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로 원래부터 작성된 것이었으며, 반-종교개혁 공회의인 로마카톨릭 측의 트렌트 회의 이전의 모든 주교회의도 공상에 불과하단 주장을 펼친 다소 괴짜였다. 현대에는 러시아 수학자 아나톨리 포멘코 (Anatoly Timofeevich Fomenko, 1945 -)가 유사한 궤적의 주장을 펼치는 인물이다.

      한편, 크리스마스에 대한 견해는 16-17세기 종교개혁기에도 프로테스탄트 교단마다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였다. 가령, 유럽의 루터교단, 영국국교회, 네덜란드 칼뱅파 개혁교회 등은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주요성일로 간주한 반면, 영국/미국의 장로교단, 회중교회, 재세례파, 퀘이커 등은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축일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했다.

      스위스 개혁교회, 네덜란드 개혁교회, 영국 청교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등의 뿌리가 되는 프랑스 출신의 스위스 종교개혁가 장 칼뱅이 크리스마스에 대해 가진 견해는 복합적인데, 후대 영미계 퓨리턴들의 주장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그가 1555년 크리스마스에 구약성서 {미가}의 내용을 두고 한 설교를 읽어보자. 그는 크리스마스, 그 종교적 의미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정말로 우려했던 것은 하루를 특별히 간주해 성일로 지키는 것이 "날들에 대한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동일한 경고를 "주일성수"에 대해서도 한 바 있다.

      Now, I see here today more people that I am accustomed to having at the sermon. Why is that? It is Christmas day. And who told you this? You poor beasts. That is a fitting euphemism for all of you who have come here today to honor Noel. Did you think you would be honoring God? Consider what sort of obedience to God your coming displays. In your mind, you are celebrating a holiday for God, or turning today into one but so much for that. In truth, as you have often been admonished, it is good to set aside one day out of the year in which we are reminded of all the good that has occurred because of Christ’s birth in the world, and in which we hear the story of his birth retold, which will be done Sunday. But if you think that Jesus Christ was born today, you are as crazed as wild beasts. For when you elevate one day alone for the purpose of worshiping God, you have just turned it into an idol. True, you insist that you have done so for the honor of God, but it is more for the honor of the devil.

      오늘 설교시간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을 봅니다. 이유가 뭘까요? 오늘은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 날이 크리스마스라고 여러분들께 알려줘나요? 이 불쌍한 사람들이여, 여러분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오늘 여기에 왔다고 말하는 것은 미사여구일 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 필자 주)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기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여러분이 여기 나온 것이 어떤 의미로 신께 복종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 생각에 하나님을 위해 축일을 기념하는 것이며, 오늘은 특별히 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여러분들이 그동안 종종 충고받아온 바대로, 일년에 하루를 정해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생긴 모든 좋은 일들을 되새기고, 일요일에 듣게 되겠으나 그 분의 탄생 이야기를 계속 되풀이해 듣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늘 태어나셨다고 여러분이 믿는다면 (= 즉, 그러기에 오늘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해야만 한다고 믿는다면 / 필자 주), 여러분들은 무지한 들짐승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신께 경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루를 특별한 날로 받들 때, 여러분들은 바로 그때 이 날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기리기 위해 이런 일을 한다고 주장하겠죠? 그러나 사실 이런 일은 오히려 보다 악마를 기리는 것입니다. / 번역: 최광민

      야Let us consider what our Lord has to say on the matter. Was it not Saul’s intention to worship God when he spared Agag, the king of the Amalekites, along with the best spoils and cattle? He says as much: ‘I want to worship God.’ Saul’s tongue was full of devotion and good intention. but what was the response he received? ‘You soothsayer! You heretic! You apostate! You claim to be honoring God, but God rejects you and disavows all that you have done.’ Consequently, the same is true of our actions. For no day is superior to another. It matters not whether we recall our Lord’s nativity on a Wednesday, Thursday, or some other day. But when we insist on establishing a service of worship based on our whim, we blaspheme God, and create an idol, though we have done it all in the name of God. And when you worship God in the idleness of a holiday spirit, that is a heavy sin to bear, and one which attracts others about it, until we reach the height of iniquity.

      우리 주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나 생각해 봅시다. 아말렉인들의 왕 아각과 최고의 전리품과 가축들을 따로 떼어놓았을 때 사울은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의도가 있던 것이죠? 사울은 "나는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에는 신심이 가득하고 좋은 의도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답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 점쟁이, 이단자, 배교자 같은 자여, 너는 신을 기린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너를 버리시고 너에게 하신 모든 일은 철회하신다'였습니다. 결과적으론 이것은 여러분이 하는 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떤 날도 다른 날보다 더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의 탄생을 수요일, 목요일, 혹은 또 다른 어떤 날에 기념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욕망에 따라 어떤 날을 특정해 예배의식을 강제할 때, 우리는 신을 모독하는 것이며, 또 비록 우리가 이 일을 신의 이름으로 한다하더라도 결국 우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축제 분위기의 나른한 마음으로 신께 예배하는 것 자체는 견딜 수 없는 큰 죄이며, 우리가 죄를 높이 쌓아갈 때까지 다른 죄들을 그 주위로 끌어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 번역: 최광민

      Therefore, let us pay attention to what Micah is saying here, that God must not only strip away things that are bad in themselves, but must also eliminate anything that might foster superstition. Once we have understood that, we will no longer find it strange that Noel is not being observed today, but that on Sunday we will celebrate the Lord’s Supper and recite the story of the nativity of our Lord Jesus Christ. But all those who barely know Jesus Christ, or that we must be subject to him, and that God removes all those impediments that prevent us from coming to him, these folk, I say, will at best grit their teeth. They came here in anticipation of celebrating a wrong intention, but will leave with it wholly unfulfilled. —From Calvin’s sermon preached on Christmas day 1551 in John Calvin, Sermons on the Book of Micah, trans. Benjamin Wirt Farley (Phillipsburg: P&R Publishing, 2003), 302–04

      그러기에 미가 (선지자)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용에 주의를 기울여 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나쁜 것들만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미신을 퍼트릴 수 있는 것 역시 제거하신다는 점입니다. 일단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축일로서 / 필자 주) 오늘 크리스마스를 준수하지 않는 것과, 일요일에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를 듣는 일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여기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에게 우리가 복종함, 그에게 다가가는데 방해가 되는 이런 모든 장애물을 신께서 제거하신다는 점을 거의 모르고 있는 이런 사람들은 기껏해야 이를 갈게 되겠죠. 그런 사람들은 잘못된 것을 기린다는 생각에 여기 온 것이나,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 장 칼뱅, 1551년 크리스마스 설교 / 번역: 최광민

      특별히 영국의 급진 칼뱅파인 퓨리턴 (청교도)들의 반발이 주목할 만한데, 그들은 영국국교회가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주요 축일로 삼는 것에 대해 교황파, 즉 로마카톨릭교회의 잔재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정교회,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루터교단,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성공회의 입장이라 할 수 있는 "Quod Scriptura non vetat, permittit = 성서가 금하지 않았다면, 허용한다"에 맞서는 퓨리턴들의 성서관을 특징짓는 표어이기도 한 "Quod Scriptura non jubet, vetat = 성서가 명령하지 않았다면, 금한다"에 따라 퓨리턴들은 크리스마스를 "축일"로 기리는 일을 주로 세가지 입장에서 반대했다.

      즉 그들의 논거는, (1) 성서는 안식일 (= 주일/일요일의 퓨리턴식 표현) 이외의 어떤 축일도 명시적으로 성별하고 있지 않으며, (2) 성탄절을 축일 (즉, 공공축제일)로 삼을 경우 술파티 등 종교적으로 불건전한 행태가 만연하게 된다는 점, (3) 그리고 12월 25일이란 날짜는 초기 교회가 이교의 축제일을 기독교화 한 것이므로 결국 이교의 관습을 따르게 되어 성탄의 의미를 오염시키게 된다는 것이었다. 제 3항이 얼마나 타당한 근거인지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이들 영국 퓨리턴들의 입장은 이후 이들이 주로 이주한 미국 동부의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거의 200년 간 그 위력을 발휘했다. 우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온 "필그림"들을 이끈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1621년 12월 25일에도 숲에서 작업지시를 내렸는데, 이때 비-필그림 출신으로 정착에 합류하게 된 이민자들이 이에 저항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들이 크리스마스에 놀이를 포함한 파티를 벌이자 브래드포드 총독은 이를 몰수하고, 굳이 크리스마스를 "축제일"로 지키겠다면 집 안에서 하라는 경고를 내렸다. 이후 영국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한 청교도로 장악된 영국의회는 1647년 크리스마스를 축일로서 기념하는 관습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때 부활절 및 오순절 축일도 "축제일"로서 기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어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도 "축제일"로서의 크리스마스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존 녹스 이래로 칼뱅파 장로교회가 국교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스코틀랜드에서는 1640년과 1690년 두차례에 걸쳐 "축제일"로서의 크리스마스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포고령을 의회가 통과시켰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954년이 되어서야 크리스마스가 법정공휴일이 되었다.  그 결과 노동을 강조한 (그리고 거의 모든 종류의 위락과 오락행위를 증오한) 퓨리턴들의 달력에는 (유럽 문화에서 종종 종교적 축제와 겹치는)  거의 휴일이 없었는데 거의 300일이 노동하는 날로 지정되어 있었다. 반면 고대로마로 부터 근세 유럽과 미국의 경우는 대략 240일이 노동하는 날이었다.



      각설하고,

      현행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이교적"이란 설명은 17세기에 등장해 19/20세기에 반-로마카톨릭 진영과 반-기독교 진영을 통해 널리 퍼지고 이제는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 가설이 여전히 확정된 답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 "정설"에 대치되는 고대 사료들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백과사전이 늘 확정된 사실만 기술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로마의 전통적인 사투르날리아 축제와 미트라스 (정확히는 솔 인빅투스) 제전의 성격을 분명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사투르날리아 축전은 BC 217년에 로마에 도입되었고 원래는 로마달력 1월 1일의 14일 전인 날 하루동안 기념되었다 (XVI Kal. Jan.).

      이후 점차 축제기간이 늘어나 키케로가 살던 BC 1세기 중반까지는 일 주일 간의 축제로 늘어나 있었다. BC 46년 율리우스력의 개정 결과 12월에 이틀이 추가되면서, 사투르날리아의 개시일은 1월 1일로부터 16일 전인 12월 17일이 되었고, 12월 15일의 콘수알리아 (consualia) 축제와 12월 19일의 오팔리아 (Opalia 혹은 Opiconsivia) 축제 사이에 끼어 있었다. 콘수알리아 축제는 추수와 곡식저장을 신격화한 신 콘수스를 기리는 축제로 8월 21일과 12월 15일 두차례 개최되었다. 오팔리아 축제는 농업을 관장하는 여신 오프스 혹은 오피스 여신을 기리는 축제로 8월 25일에 개최되지만, 추수의 끝과 저장을 기념하면서 12월 19일에도 열렸다. 오프스는 사투르누스의 배우자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투르날리아 제전은 17-23일 (율리우스력으로는 12월 25일이 동지일)에 걸치게 된다. 축제기간의 법무행정 상의 공백을 막기위해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가 기간을 3일로 조정하는 시도를 했고, 칼리귤라는 5일로 축제기간을 조정하려고 했다 (Suetonius, XVII; Cassius Dio, LIX.6).

      AD 2/3세기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이다.

      XVII. He held the consulship four times; the first, from the calends [the first] of July for two months: the second, from the calends of January for thirty days; the third, until the ides [the 13th] of January; and the fourth [411], until the seventh of the same ides [7th January]. Of these, the two last he held successively. The third he assumed by his sole authority at Lyons; not, as some are of opinion, from arrogance or neglect of rules; but because, at that distance, it was impossible for him to know that his colleague had died a little before the beginning of the new year. He twice distributed to the people a bounty of three hundred sesterces a man, and as often gave a splendid feast to the senate and the equestrian order, with their wives and children. In the latter, he presented to the men forensic garments, and to the women and children purple scarfs. To make a perpetual addition to the public joy for ever, he added to the Saturnalia one day, which he called Juvenalis [the juvenile feast] --- Suetonius {De Vita Caesarum--Divus Augustus} XVII

      ....[전략]...대중들에게 영구적인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헤, 아우구스투스는 사투르날리아에 하루를 추가하고 이를 유베날리아로 명명했다 --- 수에토니우스, {황제들의 생애 - 디부스 아우구스투스 편} 17장 / 번역: 최광민

      아래는 로마 역사가 캇시우스 디오의 기록이다.

      "....And he increased their hopes still further by ordering that the celebration of the Saturnalia should extend over five days, as well as by accepting from each of those who received the dole of grain only an as instead of the denarius that they were wont to give the emperor for the manufacture of images...." --- {Roman History}, Cassius Dio,LIX.6, Vol. VII of the Loeb Classical Library

      ...그는 대중들의 기대를 뛰어넘어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5일 이상 지속되어야 한다는 포고를 내렸다......[후략] --- 캇시우스 디오, {로마사} LIX 6 / 번역: 최광민

      한편,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한동안 폐지되었던 5일제 사투르날리아를 재개시켰다 (Dio, LX.25). 정확히 말하면, 그가 회복시킨 날은 칼리귤라가 도입한 제 5일째의 추가일이다.

      캇시우스 디오의 기록이다.

      ...In the case of the Saturnalia he restored the fifth day, which had been designated by Gaius but later abolished... --- {Roman History}, Cassius Dio,LX.25, Vol. VII of the Loeb Classical Library

      사투르날리아의 경우,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제 5일째 축제일을 부활시켰는데, 이는 가이우스에 의해 제정되었다가 나중에 폐지되었던 것이다. --- 캇시우스 디오, {로마사} LX 25 / 번역: 최광민

      AD 4/5세기 로마 작가 마크로비우스의 기록을 다시 보자.

      ...I think that we have now given abundant proof that the festival of the Saturnalia used to be celebrated on only one day, the fourteenth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but that it was afterward prolonged to last three days: first, in consequence of the days which Caesar added to the month of December, and then in pursuance of an edict of Augustus which prescribed a series of three rest days for the Saturnalia. The festival therefore begins on the sixteenth day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and ends on the fourteenth, which used to be the only day of its celebration.5 [24] However, the addition of the feast of the Sigillaria has extended the time of general excitement and religious rejoicing to seven days.... --- Macrobius, {Saturnalia} Book 1.10.1-23, tr. Davies (1969).

      이제 사투르날리아가 원래는 1월 칼렌드로부터 14일 전 하루동안 즐기는 것이었다가 나중에 3일 간의 축제로 발전된 사실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제시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래의 하루에 이어 우선 카이사르가 일련의 날들을 12월에 추가했고, 아우구스투스의 포고령에 의해 사투르날리아는 3일의 축제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그 축제는 1월 칼렌드로부터 16일 전에 시작되어 14일 전에 마치게 되었고, 이 기간 동안만이 사투르날리아가 지켜지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즐거움과 종교적 이유로 시길라리아 축제가 추가되어 7일 간의 축제로 늘어났다.  --- 마크로비우스 {사투르날리아}  1권 10장 / 번역: 최광민

      눈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왜 사투르날리아 제전과 크리스마스를 나란히 놓는 것이 무리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래의 가정들을 당연한 사실인 듯 너무 굳게 믿다보니 마크로비우스 등 고대인의 원저작을 치밀하게 보려고 하지 않는다.



      널리 퍼진 "대중적인 가정"들을 다시 살펴보자.

      • 사투르날리아는 사투르누스/크로노스를 기리는 축제다.
      • 그 축제의 끝자락 무렵에 동지가 있다.
      • 동지는 고대 로마에서 중요한 날이었다.
      • 동지일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은 사투르누스를 기리는 날이다.
      • 고대 말에 크리스마스는 율리우스력으로 12월 25일로 세팅되었다.
      • 따라서 크리스마스는 사투르날리아의 변형이다.

      위에 인용한 마크로비우스의 {사투르날리아}에 따라 날짜들을 정확히 되짚어 가면 이 주장의 문제가 무엇인지 인지하게 될 것이다.

      1월 1일부터 날짜를 뒤로 적어놓고 계수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 원래 사투르날리아는 율리우스력이 나오기 전 로마 달력 1월 1일부터 (Kanlend)의 계수해 14일 전의 날 하루였다. 따라서 사투르날리아가 사투르누스의 제일을 포함하려면 바로 이 날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날은 동지일이 아니다. 동지일은 로마달력의 신년으로부터 8번째의 전날로 계수된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BC 46년에 로마달력을 개정할 때 더해진 12월의 날들로 인해, 사투르날리아는 로마 새해로부터 16일 전에 시작되게 된다. 역시 동지를 포함하지 않는다.
      •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3일, 칼리귤라와 클라우디우스는 5일의 사투르날리아를 공인했다. 이것은 개시일로부터 3일과 5일을 말한다. 사투르날리아 축제의 개시일은 고정되어있다. 그런데 동지일은 7일로 최고로 연장된 사투르날리아 축제의 마지막이다. 만약 사투르날리아에 사투르누스의 제일이 포함된다면, 따라서 반드시 축제의 첫날, 혹은 첫날로부터 3일 안, 혹은 5일 안 쪽에 들어있어야 한다. 역시 사투르누스는 동지와 상관이 없다.

      사투르날리아가 7일이라는 계산은, 연장된 사투르날리아 (3-5일)의 뒷부분에 Sigillaria 축제의 3일을 합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 (토기나 밀납인형을 선물로 주고받던 풍속이 알려져 있는) 로마 Sigillaria 축제와 태양신, 동지 등과의 관련은? 모호하다. 참고로 연말에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은 여러 문명권에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의 경우도 연말에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그리스의 새해는 지역에 따라 달랐다. 아테네와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에서는 하지 후 첫 달이 뜰 때가 신년이었다. 도리아 지방에서는 추분이 새해 시작이었다. 반면, 그리스 중부지방인 보에티아에서는 동지가 신년의 시작이었다.

      한편 동지일인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은 사실 전통적인 로마의 태양신 솔의 축일과도 상관없는 날이었다. 사실 AD 2세기 로마에는 태양신에게 헌정된 두 개의 신전이 있었다. 하나는 훗날 동방에서 미트라스교를 변형/수입해 AD 274년에 국가종교를 선포하게 되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집안이 관리하는 신전으로 이 곳에서는 율리우스력으로 8월 9일이 태양신에게 바쳐지는 축일이었다. 다른 솔의 신전에서는 8월 28일을 태양신에게 바쳐지는 축제일로 지켰다. 어느 경우든지, 춘분-추분-동지-하지 등 태양과 관련된 날이 전통적인 로마의 태양신 축제일로 여겨진 경우는 없다



      그런데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By the way, December 25 is also the birthday of Osiris, Adonis, and Dionysus. -- Dan Brown, {The Da Vinci Code}, Chapter55

      어쨋거나, 12월 25일은 또한 오시리스, 아도니스, 디오니소스의 탄생일이기도 하지. --- 댄 브라운, {다빈치 코드} 제 55장

      도대체 언제부터?


      오시리스의 탄생일?

      오시리스의 생일은 고대 이집트의 공용달력에서 1년의 마지막 5일의 첫날에 기념되었다. 이것은 현재달력인 그레고리우스력에서는 한 여름에 해당한다. 12월 25일 혹은 동지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AD 2세기 초반의 아폴론 신관이자 작가인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에서 인용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집트 신들을 그리스 신들의 이름으로 대치시키고 있으니 주의해서 읽어보자. AD 1세기 바로 이집트에서 유통되던 신들의 족보는 아래와 같이 복잡하다.

      They tell that the sun having discovered Rhea secretly copulating with Saturn, laid a curse upon her, that she should not bring forth a child in either month or year: that Hermes being in love with the goddess copulated with her; and afterwards playing at counters with the Moon and winning from her the seventieth part of each one of her lights, out of the whole composed five days, the which he added to the three hundred and sixty, which days now the Egyptians call 'additional,' and keep as the birthdays of the gods; that on the first of these was born Osiris, and that, a voice issued forth with him in the birth, that 'the Lord of all is entering into light.'” ...[중략]...On the second was born Aroeris, whom some call Apollo, some the elder Horus. On the third Typhon, neither in due time, nor in the right place, but breaking through with a blow, he leaped out through his mother’s side. On the fourth was Isis born, in very wet places. On the fifth was Nephthys, the same as the “End,” and “Venus,” whom some call Victory. They say that Osiris was begotten by the Sun, as also Aroeris, by Hermes Isis, by Saturn Typhon and Nephthys; that Osiris and Isis fell in love with each other and copulated under the cloak of darkness in the womb; some say that in this manner was Aroeris begotten, and therefore is called by Egyptians, the elder Horus, by the Greeks, Apollo.    --- Plutarch, {Isis and Osiris}, Chapter XII

      그들 (=이집트인/ 필자 주)들은 말하길, 크로노스 (= 이집트의 겝/셉 / 필자 주)와 은밀하게 성관계를 하고 있던 레아 (=이집트 여신 누트)를 발견한 (남편 / 필자 주) 헬리오스 (=이집트의 라 / 필자 주)가 레아에게 몇달 혹은 몇년 간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란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레아를 흠모하던 헤르메스 (= 이집트의 토트? / 필자 주)는 여신 레아와 성관계를 갖고난 후 달(의 여신)과 내기에 이겨 달빛의 1/7을 빼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총 5일 치의 분량에 해당했다. 헤르메스는 이 날들을 360일에 더했고, 이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이 5일을 "추가일"이라 부르며 신들의 생일들로 경축하고 있다. 이 5일의 첫째날에는 오시리스가 태어났으며, 그가 태어날 때 "만물의 주인이 빛 속으로 들어간다!"라는 소리가 선포되었다...[중략]...두번째로 태어난 것은 아로에리스 (=헤르-우르 혹은 하르-웨르 ~ 호루스)인데 이를 아폴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연장자 호루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세번째로 태어난 것은 티폰 (=이집트의 세트 / 필자 주)으로 그는 제때에 맞춰 제곳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머니 옆구리를 뚫고 한방에 뛰쳐나왔다. 네번째 태어난 것은 이시스로 매우 습한 곳에서 태어났다. 다섯번째는 네프티스이며 죽음의 여신 혹은 아프로디테와 동일시되거나 혹은 혹자는 (승리의 여신) 니케라고 하기도 한다. 그들은 또한 오시리스와 아로에리스가 헬리오스/라에 의해서 태어났고, 이시스는 헤르메스/토트에 의해서 태어났고, 티폰과 네프티스는 사투르누스/크로노스/겝에 의해서 태어났다고도 말한다. 오시리스와 이시스는 사랑에 빠져 자궁 속 어둠 속에서 성교를 했다. 혹자는 말하길 이런 방식으로 아로에리스가 태어났다고도 하는데, 이집트인들이 "연장자 호루스"라고 부르는 신을 그리스인들은 아폴론이라고 한다.--- 플루타르코스,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편}, 제12장 / 번역: 최광민

      플루타르코스는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52장 속에서 이집트인들 중에 "오시리스는 해, 이시스는 달" 이란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하는 이집트인들이 AD 1세기 중후반에도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There are some who without reservation assert that Osiris is the Sun and is called the Dog-star (Sirius) by the Greeks even if among the Egyptians the addition of the article has created some ambiguity in regard to the name; and there are those who declare that Isis is none other than the Moon for this reason it is said that the statues of Isis that bear horns are imitations of the crescent moon, and in her dark garments are shown the concealments and the obscurations in which she in her yearning pursues the Sun...

      이집트인들 중 일부는 오시리스(=Ὄσιρις)는 태양이라고 망설임없이 말한다, 이 (별)개-별/시리우스은 그리스어로 '세이리오스 / Σείριος'라고 불리는데, 이집트인들조차 이 이름과 관련된 혼란 (= 즉, 오시리스 vs 세이리오스)을 피하기 위해 관사의 사용 (=ὁ Σείριος / 필자 주)이 고안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시스는 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두개의 뿔을 가진 이시스 신상의 모습은 초승달의 모습을 베낀 것이며.....[후략]  --- 플루타르코스,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제 52장 / 번역: 최광민

      그럼 오시리스는 태양신인가? 그런데 플루타르코스는 또 다른 부류의 이집트인들이 같은 시절에 "오시리스는 달, 티폰/세트는 해" 라고 주장하고 있었음을 {모랄리아} 제 41장에 적고있다. 따라서 최소한 AD 1세기 후반 - 2세기 초반까지도 오시리스의 속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립된 이론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다시 플루타르코스를 인용해보자.

      41 But the Egyptians, by combining with these physical explanations some of the scientific results derived from astronomy, think that by Typhon is meant the solar world, and by Osiris the lunar world; they reason that the moon, because it has a light that is generative and productive of moisture, is kindly towards the young of animals and the burgeoning plants, whereas the sun, by its untempered and pitiless heat, makes all growing and flourishing vegetation hot and parched, and, through its blazing light, renders a large part of the earth uninhabitable, and in many a region overpowers the moon. For this reason the Egyptians regularly call Typhon "Seth," which, being interpreted, means "overmastering and compelling." They have a legend that Heracles, making his dwelling in the sun, is a companion for it in its revolutions, as is the case also with Hermes and the moon. In fact, the actions of the moon are like actions of reason and perfect wisdom, whereas those of the sun are like beatings administered through violence and brute strength. The Stoics assert that the sun is kindled 트and fed from the sea, but that for the moon the moving waters from the springs and lakes send up a sweet and mild exhalation.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천문학에서 가져온 과학적 결과를 곁들인 물리적 설명을 취합하여 생각하길, 티폰은 태양의 영역을 뜻하고, 오시리스는 달의 영역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후략]... --- 플루타르코스,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제 4장, / 번역: 최광민




      디오니소스의 탄생일?

      한편, 디오니소스는 탄생일은 최소한 두가지다: 한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의 실체를 본 세멜레가 불타버릴 때 태아상태로 구출된 디오니소는 제우스 허벅지에 꿰매져 있다가 태어난다. 이 탄생축제는 포도수확이 있던 9월에 기념되었다. 두번째 탄생축제는 지중해 일대에서 '레나이아' 축제로 불리던 것으로, 9월 무렵에 담근 포도주가 출하되는 1월에 있었다. 이 뿐 아니라 고대사회의 모든 디오니소스 축제는 태양이라기보다는 포도의 재배주기 및 포도주의 출하시기와 연관되어 있다. 물론 농사주기가 태양의 주기를 따르긴 하지만, 태양의 천문학적인 의미와는 연결짓는 건 무리다.

      오시리스와 디오니소스의 탄생일이 동지와 연관된 12월 25일 이었다는 고대 원기록은 없다. 사실은 그런 기록이 있을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들이 원래부터 "태양신"의 신격을 가졌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AD 5세기의 로마 문법학자이자 신-플라톤주의자였던 이교도 마크로비우스는 자신의 저서 {사투르날리아}에서 지중해 여러 신격들이 어떤 방식으로 태양신으로서의 속성을 획득하게 되었는 지를 간략하게 적는다. 그의 주장은 현대 신화학자들의 무리한 해석들과 유사하다.




      아도니스?

      소아시아/앗시리아 지역에서 신봉되던 아도니스의 예를 들어보자.

      "That Adonis too is the sun will be clear beyond all doubt if we examine the religious practices of the Assyrians...In the story which they tell of Adonis killed by a boar the animal is intended to represent winter, for the boar is an unkempt and rude creature delighting in damp, muddy, and frost-covered places and feeding on the acorn, which is especially a winter fruit. And so winter, as it were, inflicts a wound on the sun, for in winter we find the sun's light and heat ebbing, and it is an ebbing of light and heat that befalls all living creatures at death." --- Macrobius, The Saturnalia, Book I, Chapter 21:1-4).

      이 진술 속에서 마크로비우스가 아도니스를 태양에 연관짓는 논리를 정리해보자.

      1. 아도니스는 멧돼지에 의해 죽었다.
      2. 멧돼지는 축축한 곳을 좋아하고 진흙에 뒹굴기를 좋아하고 도토리를 즐겨먹는 동물이다.
      3. 근데 이 지역 (소아시아, 앗시리아)의 겨울은 습하고 땅은 질며 게다가 도토리는 겨울열매가 아닌가!!!
      4. 그러므로 이 멧돼지는 바로 겨울을 상징한다.
      5. 따라서 아도니스가 멧돼지에게 죽은 것은, 곧 그가 겨울에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상징이 된다.
      6. 겨울에 죽는 것은 곧 태양이니 이는 곧, 그 무렵에 죽은 아도니스는 "태양신"이다.
      7. 아하!

      이런 논리전개 방식은 전형적인 현대 신화학자의 즐겨 사용하는 논리(적 비약)과 유사하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조셉 캠벨이 주로 농경주기와 관련된 신들과 태양신을 연결했던 것과는 달리, 마크로비우스는 거의 모든 남신을 태양신으로 간주하고, 모든 여신들 땅의 여신으로 간주했다. 이들 태양신들에는 마르스, 유피테르, 사투르누스, 헤라클레스 등을 망라한다.

      계속해서 마크로비우스의 진술을 읽어보자.

      "That the discourse may not wander too far afield, by mentioning all the gods by name, let me tell you what the Assyrians believe about the sovereignty of the sun. To the god whom they revere as highest and greatest of the gods they have given the name of Adad, a name which, being interpreted, means 'One One.' Him, then, they worship as the most powerful god, but they associate with him a goddess called Adargatis, and to these two deities, by whom they understand the sun and the earth, they ascribe full power over all things." --- Macrobius, The Saturnalia, Book I, Chapter 23:17-18).

      ...[전략]...(앗시리아)인들이 가장 최고의 신으로 섬기는 신을 그들은 '아다드'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유일자'란 뜻이다. 그들은 그 신을 최고로 강한 신으로 섬기지만, 또한 그를 아달가티스라 불리는 여신과 연관짓고 있으며, 그들은 이 두 신들을 각각 태양과 땅으로 이해하며 만물 위에 군림하는 신들로 여긴다.  --- 마크로비우스, {사투르날리아} 제 1권 23장 12-18 / 번역: 최광민

      그럼 "태양신"은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최고의 신격이었는가? 꼭 그렇지도 않다. 사람들의 상식과 달리, 사실 태양신은 이 지역의 판테온에서 상당히 왜소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태양신으로 "폭넓게 간주된" 신들 말고, 태양신으로 "정확히 특정된" 신들이 누구였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스와 로마의 12주신 중 하나인 아폴론/아폴로가 먼저 떠오를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에게 태양신은 대체로 티탄 (거신족) 헬리오스나 휘페리온, 로마인에게는 솔을 의미했다.




      솔, 헬리오스, 엘-게발, 미트라스?

      그럼 관심을 솔, 헬리오스, 엘-게발, 미트라스 등 "진짜" 태양신들의 제전으로 옮겨보자.

      원래 미트라스교는 로마인에게 이질적인 종교였다. 굳이 말한다면 그 "원형"이 고대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이 남성적인 종교는 아마도 BC 1세기 말 혹은 AD 1세기 중/후반에 로마제국 동부 혹은 로마에서 새로운 비의종교로 새롭게 창시되어, 로마제국의 정복사업을 따라 급속도로 널리 퍼져나갔다. 페르시아 본토의 미트라교와 로마제국 동부변방에서 수입된 로마 미트라스교를 같은 종교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매우 많다. 교리와 상징면에서 유사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AD 1세기 말에는 로마제국의 다른 쪽 끝인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영국)에 이미 미트라스를 위한 예배소 (Mithraeum)가 세워졌다. 이 형태의 미트라스교는 비밀종교/미스테리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나중에 국가종교의 형태로 변용되는 솔 인빅투스와는 다소 간 차이가 있다. 밀교 형태의 미트라스교에서 미트라스와 태양인 솔/헬리오스는 늘 분리되어 등장하고 묘사되기 때문이다. 미트라스와 그의 확장인 솔 인빅투스는 군인황제가 난립하던 무렵에 기존의 로마 종교와 경합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태양신"이 그 자체로서 주신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다. 로마제국에서는 AD 3세기가 지나 엘라가발루스나 아우렐리아누스 등 군인황제의 비호 아래 소아시아에서 유입된 태양신 엘-가발(엘라가발)이나 미트라스의 형태로 국가종교 형태로 소개된 후에야 비로소 태양신은 이제 최고신의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로마에 태양신이 유피테르를 정점으로 하는 로마종교 판테온을 압도하게 되는 과정은 AD 3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엘라가발루스의 "엘-게발"?

      AD 193년에서 211년 동안 로마황제였던 세베루스는 40세가 되기 전에 자식 없는 홀아비가 되었다. 새로이 결혼하기 위해 세베루스는 별점을 쳤는데, {Historia Augusta}에 따르면 이 무렵 자신이 "왕"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율리아 돔나라는 아랍 혹은 아르메니아계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와 재혼하게 된다. 이 율리아 돔나의 아버지인 율리우스 바시아누스는 시리아 관할권에 있던 에메사의 왕/신관을 겸임한 인물로서, 이 에메사에서는 검은 바위로 표상되는 "산신"이라는 뜻의 신 엘-게발을 태양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이 에메사의 태양신 엘-게발은 세베루스의 치하에 로마 전역에 퍼져나간다.


      우라니우스 안토니우스의 초상과 에메사의 엘-가발 신전에 봉안된 검은 돌, AD 253년 경. (출처: Wikimedia Commons)

      한편, 돔나의 언니인 율리아 메사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 엘라가발루스/헬리오가발루스 (재위 AD 218-222)의 할머니가 된다. 에메사의 피를 잇는 엘라가발루스는 재위에 오르기 전 엘-게발의 신관이었다. 그는 AD 218년 로마황제가 되자마자 자신의 신 엘-게발을 데우스 솔 인빅투스로 개명해 로마에 도입하고, 로마전통의 최고신 유피테르보다 높은 지위에 둔다. 아울러 아스타롯, 미네르바, 우라니아 등의 그리스/로마 여신들을 엘-가발/데우스 솔 인빅투스의 아내로 설정했고, 엘-가발의 신관이었던 그 자신의 집례로 로마인들에게 이 새로운 태양신을 강요한다. 이 엘-가발 버전의 솔 인빅투스의 축일은 동지일이 아니라 한 여름이었다고 AD 2-3세기의 역사가인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헤로디아노스는 {로마사} 5권 6장에 적는다.

      In the suburbs of Rome the emperor built a very large and magnificent temple to which every year in midsummer he brought his god. He staged lavish shows and built race tracks and theaters, believing that chariot races, shows, and countless recitals would please the people, who held night-long feasts and celebrations. He placed the sun god in a chariot adorned with gold and jewels and brought him out from the city to the suburbs --- Edward C. Echols {Herodian of Antioch's History of the Roman Empire}

      엘라가발루스의 암살 후, 엘라가발루스 버전의 이 '솔 인빅투스'는 잊혀져 간다. 로마황제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년)가 재도입한 버전의 '솔 인빅투스'는 엘라가발루스의 엘-가발/솔 인빅투스보다 로마의 전통 태양신 솔에 가까운 기원을 가지고 있다.엘라가발루스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솔 인빅투스 도입이 의도한 것은 명백하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태양신의 신격을 정점으로 하고, 그 신 아래 여러 다양한 신격을 모아들이려 했다. 즉, 제국 내 여러 신들을 태양신으로의 통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기독교를 포함한 당대의 종교들이 태양신을 서로 베낀게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국가종교인 솔 인빅투스/미트라스교가 제국 내 다른 종교들을 "의도적으로" 끌어와 종합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AD 3세기 초반에 집권한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경우, 당시의 지중해 일대에서 유행하던 종교들인 오시리스교, 디오니소스교, 아도니스교 뿐 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물을 강탈해 그가 로마에 도입한 태양신 헬리오가발루스의 신전으로 보냈고, 또한 여러 종교의식을 헬리오가발루스의 의식에 접목시킨 후, 오직 헬리오가발루스만 숭배할 것을 지시했다. 이것은 태양신 헬리오가발루스와 다른 종교의 주신들을 강제로 일치시키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일반인에게 퍼진 오시리스와 디오니소스 및 아도니스에게 공식적으로 태양신의 속성이 부여된 것은, "아주 고대의 일"이 아니라 AD 3세기 이후의 일이 된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Historia Augusta}에서 인용한다.  .

      4 Sed ubi primum ingressus est urbem, omissis quae in provincia gerebantur, Heliogabalum in Palatino monte iuxta aedes imperatorias consecravit eique templum fecit, studens et Matris typum et Vestae ignem et Palladium et ancilia et omnia Romanis veneranda in illud transferre templum et id agens, ne quis Romae deus nisi Heliogabalus coleretur. 5 dicebat praeterea Iudaeorum et Samaritanorum religiones et Christianam devotionem illuc transferendam, ut omnium culturarum secretum Heliogabali sacerdotium teneret.

      "But when he [Elagabalus] first entered the city -- to leave out what was done in the provinces -- he enshrined Heliogabalus [the sun god] on the Palatine Hill next to the temple of the emperors, and built a temple for him, being eager to transfer to that temple both the emblem of the Mother Goddess and the fire of Vesta, the Palladium, the sacred shields and all the objects sacred to the Romans, so that no god should be worshipped at Rome except Heliogabalus. He used to say, furthermore, that the religion of the Jews and Samaritans and the rites of the Christians ought to be transferred there, so that the priesthood of Heliogabalus might include the mysteries of every cult." --- Lives of the Later Caesar (Augustan History), Penguin edition, p. 292.)

      ....[전략]...엘라가발루스는 로마에서 헬리오가발루스를 제외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하게 했다. 더 나아가 엘라가발루스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종교 및 기독교도들의 종교가  헬리오가발루스의 종교로  통합되어야 하며, 따라서 헬리오가발루스의 사제들이 모든 종교의 의식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번역: 최광민




      아우렐리아누스와 "솔" ?

      {Historia Augusta}에 따르면, 태양신 솔의 확장인 솔 인빅투스를 도입한 아우렐리아누스의 집안은 대대로 로마의 전통 태양신인 솔의 신전에 봉직했고, 그의 어머니는 태양신 솔의 여사제였다. 여기서 로마의 태양신 솔에 대해 조금 더 덧붙이기로 하자.

      로마 측 사료에 따르면 (August. de Civ. Dei, iv. 23) 솔은 BC 8세기에 로마인들의 이웃인 사비안 족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에 의해 로마인의 종교로 도입되었다. 솔의 신전은 라티움 평원을 가로지르는 누미키우스강의 강변에 있었다. AD 1세기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로마 공화정 시대에 솔의 옛 신전은 로마의 전차경주장이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에 위치해 있었다. 솔의 이 옛 신전은 솔 인빅투스라는 새로운 종교로 치환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또 다른 솔의 신전은 로마 7개의 언덕 가운데 하나인 콜리스 퀴리날리스 (Collis Quirinalis)에 있던 것으로 로마력 8월 9일에 초기 형태의 로마 태양신인 솔 인디게스 (Sol Indiges) 에게 제물을 바치던 곳이었다. 로마의 종교제례일을 기록한 유물인 BC 84-55년 경의 파스티(Fasti)에 따르면, 솔 인디게스를 기리는 축제는 로마력 12월 11일에, 또 솔(태양)과 루나(달)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일은 로마력 8월 28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로마의 태양신 솔의 제례일인 8월 9일과 28일, 그리고 12월 11일은 그가 태양신임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춘/추분, 동/하지 등의 태양주기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

      "아우렐리아누스가 AD 274년 새로운 솔 인빅투스의 신전을 봉헌하면서부터 12월 25일 (동지)가 태양신의 탄생일로 지켜졌다" 혹은 "아울렐리아누스는 태양신의 탄생일인 12월 25일에 새로운 솔 인빅투스 신전을 AD 274년에 봉헌했다"는 속설은, 사실은 사료에 기반하지 않은 역사학자들의 순수추론이란 것을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른다.

      보통 로마의 신을 기리는 제례는 해당 신에게 바쳐지는 축제와 운동경기의 개최와 긴밀히 연결된다. 로마 축제 중에 많은 것들이 그리스의 축제를 도입/변형한 것인데, 아우렐리아누스가 솔에게 헌정한 축제/경기가 바로 '아곤'이라는 형식의 축제로 원래 그리스에서는 다양한 그룹 (가령, 예술가) 일종의 경쟁으로 자웅을 가리는 축제들이었고, 아우렐리아누스 시대 전에도 이 형식의 축제가 로마에 도입된 적 있다. 이 형식의 축제는 4년 마다 개최되었다. (직접 연관은 없지만 역시 4년 마다 열리던 그리스의 올림피아드를 생각해 보자.)

      특별히 아우렐리아누스가 새로 도입한 축제의 이름은 '아곤 솔리스' 즉, '태양에게 바치는 경기'란 뜻이다. 이에 대해 두가지 고대기록을 확인해 보자.

      우선 (뒤에 자세히 설명할) AD 354년의 연감이다.

      Aurelianus imp(eravit) ann(os) V m(enses) IIII d(ies) XX. Hic muro Urbem cinxit, templum Solis et castra in campo Agripp(a)e dedicavit, genium populi Romani aureum in rostra posuit. Porticus ter 20 marum Antoniniarum arserimt et fabricatum est Pa neni oleum et sale populo iussit dari gratuite ... Agonem Solis instituit (Aurelianus). ---- [Chronographia anni 354], {Chronica Minora I}, ed. T. Mommsen, Berlin 1892, p. 148; = Frick p.120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5년 4개월 20일 동안 다스렸다. 그는 로마 주위에 성벽을 쌓고, 태양에게 바치는 신전을 봉헌했으며, 아그리파의 캄푸스에 요새를 건립했다......(중략) 그는 "아곤 솔리스"를 제정했다.  ---- [Chronographia anni 354], {Chronica Minora I}, ed. T. Mommsen, Berlin 1892, p. 148; = Frick p.120/ 번역: 최광민

      두번째로 살펴볼 자료는 라틴어 {불가타} 성서의 번역자로도 유명한 히에로니무스의 {크로니콘}이다. 이 연대기는 히에로니무스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그리스어로 작성한 연대기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시리아어 발췌 번역본도 남아있다.) 유세비우스의 원작 그리스어 판은 망실되었다. 이 연대기에서 2291 AA (=275 AD, 1년의 오차가 있음)에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에 태양신전을 세우고 태양에게 바쳐진 첫 경기가 있었다고 전한다.

      305 b. (2291 AA, 275 AD) Primus agon Solis ab Aureliano constitutus.

      아곤 솔리스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제정되었다. --- Hieronymus (347-420 AD). Chronicon./ 번역: 최광민

      그러나 AD 354년과 362년 이전에 12월 25일 동지에 솔을 기리는 축제/경기가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없다.


      AD 354년 달력과 "인빅투스"

      현존하는 고문서 중 "인빅투스의 탄생일/축제"를 12월 25일로 기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AD 354년의 달력이다. 이것이 12월 25일과 솔 인빅투스 제전을 연결하고 있는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의 날짜로 특정하고 있는 라틴교회의 기록은 뒤에서 설명할 AD 3세기 초반의 라틴교부 히폴리투스의 기록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기록상으로만 본다면 기독교 측의 증거가 한 세기 이상 앞선다.

      이 고대 달력/연감은 기독교가 공인된 당시 로마의 부유한 기독교도였던 발렌티누스에 의해 발행된 것으로, 기존 로마의 연대표 뿐 아니라 기독교 축일에 대한 내용도 함께 담고 있다. 일단 이 연대기의 일부인 달력 (The Philocalian Calendar) 부터 살펴보자.


      Chronography of 354 (출처:Wikimedia Commons)


      {Chronography of 354}, 12월 편 (출처: tertulian.org http://www.tertullian.org/fathers/chronography_of_354_06_calendar.htm)

      이 AD 354년 12월의 달력에서 사투르날리아는 율리우스력 12월 17-23일에 해당하며, "인빅투스 탄생일(N=Natalis)/ N-INVICTI"은 12월 25일로 기록되어 있다. "CM-XXX"은 CM/Circenses missus (=games ordered) 30 이란 뜻으로 축일과 관련된 (전차) 경기가 30번의 (전차)경기가 치러졌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로마의 축제에서 전차경기는 평균적으로 24회 치러지는데, AD 354년의 달력에 따르면 그 해의 8월 28일이 로마의 태양신 솔과 달의 신 루나에 배정되어 있고 24회의 전차경기가 치러진다. 또한 태양신 솔에게 바쳐지는 경기인 루디 솔리스/Ludi Solis (= 태양에게 헌정된 경기)는 10월 19-22일에 배정되고 36회의 전차경기가 치러진다.  역사가들은 10월 19-22일의 루디 솔리스가 AD 274년 아우렐리아누스가 솔 인빅투스 신전을 로마에 봉헌한 사건과 관련되어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이 달력은 이 "인빅투스"가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고있다. "인빅투스"는 태양신/솔/미트라스에게만 붙여진 "칭호"는 아니기 때문에 보다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가령, 로마제국 초반의 달력에는 로마의 전통신 유피테르나 마르스에게도 "유피테르 인빅투스"나 "마르스 인빅투스" 같은 호칭을 붙이고 있다. 그 뿐 아니라 헤라클레스, 아폴로, 실바누스 등의 신/영웅들에 대해서도 "인빅투스"란 호칭을 붙이고 있었다. 따라서 "인빅투스"는 엘-가발, 미트라스, 솔 같은 태양 계열의 신들에 대해서만 적용된 호칭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아우렐리아누스가 도입한 "솔 인빅투스"를 달력에서 말하는 "인빅투스"로 이해하도록 하겠다. 그 이유는 그날을 기념하기 위한 어떤 (전차)경기들이 (아마도 30번) 있는데, 로마교회가 예수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이런 식의 경기를 용인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몇 년 후,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진술을 참고한다면, 이 "인빅투스"는 "솔/헬리오스/미트라스"가 합쳐진 '솔 인빅투스'로 보는 것이 일단 타당하다.

      그런데 AD 354년 달력은 또한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명시하고 있는 문서이기도 하다. 이 달력의 한 파트를 구성하는 AD 336년에 작성된 로마교회가 추모하는 순교자의 추모일 목록인 {Depositio Martyum}에 따르면 (링크), "VIII Kal. Jan"이란 날에 "natus Christus in Betleem Judaea", 즉 "유대아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했다"라는 설명이 등장하고 있다. 이 말은 즉, "1월 1일로부터 8일 전 (필자 주: 즉 12월 25일) 그리스도가 유대아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라는 뜻이다.


      Fasti Antiates Maiores — Miniature black and white image of a 1 m high by 2.5 m wide fragmentary fresco of a pre-Julian Roman calendar (black and red letters on a white background) found in the ruins of Nero's villa at Antium (Anzio). The lengths of January to December are 29, 28, 31, 29, 31, 29, 31, 29, 29, 31, 29, 29 days each in years without the leap month Intercalaris. Now in the Palazzo Massimo. See Fasti Antiates. Adapted for legibility from a class handout. (Source: Wikimedia Commons)


      Greswell, Edward, 1797-1869, {Origines kalendariæ italicæ, nundinal calendars of ancient Italy, nundinal calendar of Romulus, calendar of Numa Pompilius, calendar of the decemvirs, irregular Roman calendar, and Julian correction}
      https://www.archive.org/stream/origineskalenda00gresgoog

      아울러 이 달력의 또 다른 한 파트인 로마 콘술의 재임표에는 AD 354년 이전의 콘술들의 재임기가 나열되어 있는데, AD 1년의 로마 콘술로 카이사르와 파울루스를 언급하며, 역시 같은 주석이 달려있다.

      라틴어로 다음과 같다.

      Caesare et Paulo Sat. XIII
      Hoc cons.domunux Iesus Chrustus natus est VIII kal. Ian. d. Ven. Luna xv.

      이 사람들이 (필자 주: 카이사르와 파울루스) 로마 콘술이던 해의 1월로부터 8일 전, (필자 주: 12월 25일) 베누스의 날 (금요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다. --- 번역: 최광민

      여기 등장하는 로마 콘술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자였던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뜻하며, 따라서 이 연표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일은 BC 1년 12월 25일이 된다. 따라서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최소한 AD 4세기 초/중반 무렵에는 12월 25일을 공식적인 크리스마스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의 날짜로 특정한 것은 AD 4세기가 처음은 아니다. 남아있는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AD 2-3세기에 활동한 라틴교부 히폴리투스의 진술이다. 그는 {다니엘서 주석}에서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특정했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율리아누스와 "솔/헬리오스", AD 362년

      AD 362년, 기독교를 버리고 그리스/로마마 전통종교를 고수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이기에 종종 "배교자" 황제라 불리는 율리아누스는 산문형식의 {헬리오스 찬가}를 헬리오스 축제를 위해 썼다.

      율리아누스의 {헬리오스 찬가}에서 일부를 옮긴다. (IV: Hymn to King Helios.)


      {The Works of the Emperor Julian}, https://archive.org/stream/worksofemperorj01juli

      [155] Do you wish me to mention yet another proof of this, I mean the work of King Numa? In Rome maiden priestesses guard the undying flame of the sun at different hours in turn; they guard the fire that is produced on earth by the agency of the god. And I can tell you a still greater proof of the power of this god, which is the work of that most divine king himself. The months are reckoned from the moon by, one may say, all other peoples; but we and the Egyptians alone reckon the days of every year according to the movements of the sun. If after this I should say that we also worship Mithras, and celebrate games in honour of Helios every four years, I shall be speaking of customs that are somewhat recent. But perhaps it is better to cite a proof from the remote past. The beginning of the cycle of the year is placed at different times by different peoples. Some place it at the spring equinox, others at the height of summer, and many in the late autumn; but they each and all sing the praises of the most visible gifts of Helios. One nation celebrates the season best adapted for work in the fields, when the earth bursts into bloom and exults, when all the crops are just beginning to sprout, and the sea begins to be safe for sailing, and the disagreeable, gloomy winter puts on a more cheerful aspect; others again award the crown to the summer season, since at that time they can safely feel confidence about the yield of the fruits, when the grains have already been harvested and midsummer is now at its height, and the fruits on the trees are ripening. Others again, with still more subtlety, regard as the close of the year the time when all the fruits are in their perfect prime and decay has already set in. For this reason they celebrate the annual festival of the New Year in late autumn. But our forefathers, from the time of the most divine king Numa, paid still greater reverence to the god Helios. They ignored the question of mere utility, I think, because they were naturally religious and endowed with unusual intelligence; but they saw that he is the cause of all that is useful, [156] and so they ordered the observance of the New Year to correspond with the present season; that is to say when King Helios returns to us again, and leaving the region furthest south and, rounding Capricorn as though it were a goal-post, advances from the south to the north to give us our share of the blessings of the year. And that our forefathers, because they comprehended this correctly, thus established the beginning of the year, one may perceive from the following. For it was not, I think, the time when the god turns, but the time when he becomes visible to all men, as he travels from south to north, that they appointed for the festival. For still unknown to them was the nicety of those laws which the Chaldaeans and Egyptians discovered, and which Hipparchus[125] and Ptolemy[126] perfected: but they judged simply by sense-perception, and were limited to what they could actually see. But the truth of these facts was recognised, as I said, by a later generation.--- {The Works of the Emperor Julian} Loeb Classical Library, vol. 1, p.429.

      이 부분에서 율리아누스는 로마인들이 1년의 시작과 끝을 어떻게 정하게 되었는지를 우선 논하면서, 로마인들이 전통적으로 얼마나 솔/헬리오스를 숭앙해 왔는지를 설명한다.

      그 첫 파트를 정리해 본다.

      • 로마의 성처녀 사제들은 (솔/헬리오스의 도움으로 채화된) 성스러운 불을 꺼뜨리지 않고 교대로 관리해 왔다.
      • 다른 민족들은 1년의 주기를 달에 맞춰 정했지만, 이집트인들과 로마인들은 태양의 주기에 맞춰왔다.
      • 로마인들은 또한 미트라스를 숭배하며, 매 4년마다 솔/헬리오스에게 바쳐지는 경기를 갖는다. 이 전통은 최근에 시작되었다.
      • 하지만 로마인들의 태양숭배 전통은 보다 더 고대로 소급될 수 있다.
        • (양력을 따르는 민족들은 - 필자 주) 더러 춘분을, 더러 한 여름을, 더러 늦가을을 새해의 시작으로 정하긴 하지만 모두 태양의 선물을 찬양해 왔다.
        • 다른 민족과는 달리, 성스러운 누마왕 (전설적인 고대 로마의 제 2대 왕 - 필자 주) 시절로부터 로마인의 선조들은 솔/헬리오스를 극진히 공경해왔다.
        • 로마인의 선조들은 새해의 시작을 현재의 방식으로 지켜지도록 정했는데, "솔/헬리오스가 인간들에게 다시 돌아오는 시점", 즉 태양이 동지무렵에 회귀선을 따라 가장 남쪽으로 (남회귀점) 내려가  머물다가 (약 2-3일 간 --- 필자 주) 다시 북쪽으로 올라오는 때를 새해의 시작으로 잡았다. 
        • 사람들은 솔/헬리오스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트는 실제시점이 (= 즉, 동지 직후 -- 필자 주) 아니라, 육안으로 그렇게 보이는 때를 축제일로 (= 즉, 동지로부터 약 이틀 후 -- 필자 주) 삼았다. 그들은 아직 칼데아인들과 이집트인들의 천문학적 관측과, 이를 보다 정교히 완성시킨 히파르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이론을 몰랐기 때문이다.

      율리아누스는 다음 파트에서 "그가 살던 시절" 율리우스력 12월 말의 솔/헬리오스 축제날짜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리스어 원문을 함께 옮긴다.

      Πρὸ τῆς νουμηνίας͵ εὐθέως μετὰ τὸν τελευταῖον τοῦ Κρόνου μῆνα͵ ποιοῦμεν Ἡλίῳ τὸν περιφανέστατον ἀγῶνα͵ τὴν ἑορτὴν Ἡλίῳ καταφημίσαντες ἀνικήτῳ͵ μεθ΄ ὃν οὐδὲν θέμις ὧν ὁ τελευ ταῖος μὴν ἔχει σκυθρωπῶν μέν͵ ἀναγκαίων δὲ ὅμως͵ ἐπιτελεσθῆναι θεαμάτων͵ ἀλλὰ τοῖς Κρονίοις οὖσι τελευ ταίοις εὐθὺς συνάπτει κατὰ τὸν κύκλον τὰ ῞Ηλια. 

      Before the beginning of the year, at the end of the month which is called after Kronos, we celebrate in honour of Helios the most splendid games, and we dedicate the festival to the Invincible Sun. And after this it is not lawful to perform any of the shows that belong to the last month, gloomy as they are, though necessary. But, in the cycle, immediately after the end of the Kronia follow the Heliaia.

      --- # {The Works of the Emperor Julian} Loeb Classical Library, vol. 1, p.429.

      율리아누스의 진술에 따르면, (율리우스력) 새해 직전의 달, 즉, 크로노스(그리스어)/사투르누스(라틴어)의 이름을 딴 한 해의 마지막 달에 로마인들은 (1) 솔/헬리오스를 기념하는 대규모 경기행사를 벌이고 (2) "불패의 태양"에게 축제를 헌정한다. 이후 새해까지는 어떤 행사도 가지지 않는데, 크로니아 축제의 바로 뒤에 태양축제 (Heliaia)가 이어진다.

      율리아누스가 언급한 그리스어 "크로니아"는 원래 그리스 아테네의 신년기념 축제인데, 이 축제가 열린 헤카톰바이온 12일은 현재 그레고리우스력으론 7월 말-8월 초에 해당하는 한 여름이었다. 그리스 달력에서 한 해는 한 여름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축제의 성격과 내용은 그리스신 크로노스에 대응하는 로마의 신 사투르누스에게 헌정된 로마의 사투르날리아 축제와 크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BC 1세기의 로마작가 루키우스 아키우스 (Lucius Accius)는 이 크로노스 축제가 사투르누스 축제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기도 했다. 따라서 율리아누스가 지금 말하고 있는 "크로노스 축제 / 크로니아"는 로마의 "사투르날리아"를 뜻한다.

      AD 354년의 달력에서 율리우스력 12월 17-23일이 사투르날리아/크로니아에 대응한다. AD 362년 율리아누스가 {솔/헬리오스 찬가}를 작성한 시점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율리아누스가 12월 25일을 특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말하는 태양축제 (Heliaia)는 율리아누스 당시 율리우스력 12월 25일에 열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율리아누스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연말에 솔/헬리오스에게 바쳐지는 이 경기들과 축제는 "최근에 시작"된 것이다. 이 "최근"이 언제를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서 진술한대로 의견이 분분하다.

      율리아누스의 진술에 담긴 정보를 해석하기 위해 그럼 여기서 역법의 트릭을 한번 더 생각해 보자.

      BC 1세기에 개정된 율리우스력의 오차로 인해, 원래 율리우스력 12월 25일에 세팅된 동지가 율리아누스 시대에는 율리우스력 12월 22일이 되어있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선, 율리아누스 당시의 역법으로 날짜를 고정시켜놓고 생각해 보자.

      참고: http://kwangmin.blogspot.com/2012/01/vs-5.html

      • 로마식 신년계산법의 기원에 관한 율리아누스의 설명이 맞다고 일단 가정하자.
      • 율리우스력이 시작된 BC 25년, 실제 동지일은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이었다.
      • 율리아누스의 시대인 AD 350년 경, 실제 동지일은 율리우스력 12월 22일이었다.
      • (율리아누스의 주장대로라면) 로마의 신년계산법을 정한 고대 로마의 제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 (BC 753-673 ?)의 시절의 동지는 율리우스력으로 12월 30일 경이다. 
      • BC 700년 경에 태양이 남회귀점에 내려가 (동지) 머물다 다시 떠오르는 것으로 육안관측되는 때는 동지로부터 이틀 정도 지난 후이다. 즉, (굳이 환산한다면) 율리우스력으로 신년 (1월 1일)이다.
      • (율리아누스에 따르면) 바로 이 날 (신년)이 로마 "태양축제"의 기원이었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그것은 즉, (1) 율리아누스가 말한 누마 폼필리우스 왕의 시대인 BC 8세기에 시작되었다는 태양축제일은 "실제 동지일"이 아니었다는 점 (사실은 신년), (2) 율리아누스의 시대인 AD 4세기 율리우스력 달력상 12월 25일 "그 날짜"가 원래부터 로마의 "태양축제"가 아니었다는 뜻도 된다. 즉, 역법의 오차로 인해 날이 계속 밀려온 셈이다.  AD 1세기 로마 저술가 플리니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AD 1세기의 동지는 태양이 염소자리에 8도 진입한 날이었는데 이 날은 당대 율리우스력으로는 12월 25일이었다. AD 354년 달력을 보면 알겠지만, 태양이 염소자리에 진입한 날(SOL.CAPRICORNO)는 이 해의 12월 18일이다. 그래서 이 달력이 나오던 무렵의 실제 동지일은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이 아니라 22일로 변해 있었다.

      각설하고, 그럼 율리아누스의 이 설명은 고고학적인 유물 및 고대 로마의 기록과 일치하는가?

      유감스럽게도 그의 설명은 이미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율리우스력 이전의 공화정 시대 로마력에 등장하는 솔 (솔 인디게스)의 축제일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사실 율리아누스의 이 해설은 다소 견강부회적이다.

      아무튼 "미트라스/솔 인빅투스의 탄생일은 12월 25일이다"라는 주장도 사실 이 문건(들)에서 "유도"된 것이다. 로마의 미트라스 신자들은 AD 2세기 무렵부터 미트라스를 "솔 도미누스 인빅투스" 즉 "무적의 주님 태양"이라고 불러왔다. 그들도 AD 354년 이전에 12월 25일을 "미트라스의 생일"로 여겼는가?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되기 직전에 벌어진 최후의 대규모 박해는 열정적인 솔 인빅투스 숭배자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일어났다. 그는 AD 307년에 솔 인빅투스 신전을 로마에 봉헌했다.




      1.3. 이집트의 크리스마스: 파촌 25일, 파르무티 25일, (율리우스력) 11월 17일, 투비 15/11일

      AD 200년 경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클레멘스 (혹은 클레멘트, c.150 – c. 215)는 당대에 전해지는 예수의 탄생일들을 언급한다.

      우선 클레멘스는 로마의 역사를 계산하면서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코모두스 황제가 죽을 때까지 194년 + 1달 + 13일이 흘렀다는 자신의 계산을 언급한다.

      From Julius Caesar, therefore, to the death of Commodus, are two hundred and thirty-six years, six months. And the whole from Romulus, who founded Rome, till the death of Commodus, amounts to nine hundred and fifty-three years, six months. And our Lord was born in the twenty- eighth year, when first the census was ordered to be taken in the reign of Augustus. And to prove that this is true, it is written in the Gospel by Luke as follows: "And in the fifteenth year, in the reign of Tiberius Caesar,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John, the son of Zacharias." And again in the same book: "And Jesus was coming to His baptism, being about thirty years old,"(2) and so on. And that it was necessary for Him to preach only a year, this also is written:(3) "He hath sent Me to proclaim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This both the prophet spake, and the Gospel. Accordingly, in fifteen years of Tiberius and fifteen years of Augustus; so were completed the thirty years till the time He suffered. And from the time that He suffered till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are forty-two years and three months; and from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to the death of Commodus, a hundred and twenty-eight years, ten months, and three days. From the birth of Christ, therefore, to the death of Commodus are, in all, a hundred and ninety-four years, one month, thirteen days.---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Miscellanies), Book 1, Chapter XXI)

      그래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부터 코모두스의 죽음 사이에 236년 6개월이 있다. 로마의 창건자 로물루스부터 코모두스의 죽음까지는 953년 6개월이다. 우리 주님은 아우구스투스의 집권 28년 차에 실시된 첫 센서스가 선포된 해에 탄생했다.....[중략]...따라서 주님이 수난을 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티베리우스 황제 15년과 아우구스투스 황제 15년을 합한 총 30년이다.  그가 수난을 당하고 예루살렘이 멸망하기까지 42년 3개월이 흘렀고, 예루살렘 멸망부터 코모두스의 죽음까지 128년 10개월 3일이 흘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코모두스의 죽음까지는 총 194년 1달 13일이 흐른 것이다.   / 번역: 최광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는 율리우스력으로 AD 192년 12월 31일에 살해당했다. 그럼 이 날부터 194년 1달 13일을 역셈해 보자. 율리우스력으로 11월 중반이 예수의 탄생일로 계산된다. 이것이 클레멘스의 계산이다.

      그런데 당대에 예수의 탄생일로 계산되던 날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파촌(Pachon) 25일과 파르무티 (Pharmuthi) 25일이 그런 날들이다. 이집트 달력에서 파촌과 파르무트는 모두 봄철이며 부활절 무렵에 속한 두 달이다. 파르무티는 이집트 달력에서는 8번째에 해당하고, 파촌은 9번째 달로서 현재 3-4월에 해당한다. 참고로 이집트 달력의 한 해는 여름에 끝난다.

      당대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달력을 소개한다. 율리우스력에 대응하는 근사일은 플루타르코스(c. 46 – 120 AD)의 기록에 바탕해 AD 1-2세기 경에 맞추겠다.


      율리우스력 계절 고대이집트어 / Kemetic 꼽트어 그리스어 주요 축제 기념되는 신(들)
      새해 시작


      8/9월 경
      1 Akhet
      범람기 #1

      중왕조:
      Tekhi
      신왕조:
      DHhwty
      Tout Thoth 1st Akhet:
      새해,
      Wag 축제 (오시리스),
      Abydos의 오시리스 축제,
      Djehuty 축제,
      Hathor 축제 (Festival of Intoxication)
      Djehuty
      (Thoth)

      2nd Akhet
      범람기 #2

      중왕조:
      Menkhet
      ('Clothing')
      신왕조:
      pa-en-ipet
      ('The one of Karnak')
      Paopi Phaôphi 2nd Akhet:
      Festival of Ptah South of His Wall
      (MenNefer)
      Opet Festival
      (Waset)
      Ptah

      3rd Akhet
      범람기 #3
      중왕조:
      Khenet Het-Hert ('Voyage of Het-Hert')
      신왕조:
      Hwt-Hr(w)
      ('Het-Hert')
      Athor Athyr

      3rd Akhet:
      Festival of Hathor
      (Dendera & Edfu)
      HetHert
      (Hathor)

      4th Akhet
      범람기 #4
      중왕조:
      Nekheb-Kau
      ('Apportioner of 'ka´s')
      신왕조:
      kA-Hr-kA
      ('Ka upon Ka')
      Khoiak Khoiak 4th Akhet:Festival of Wesir at Abedjou
      Festival of Sokar at MenNefer
      Festival of Sekhmet
      Sekhmet

      1st Peret
      경작기 #1
      중왕조: Shef-bedet ('Swelling of Emmer-wheat')
      신왕조:Ta-ahbet
      ('The Offerings of Mut')
      Tobe Tybi 1st Peret:
      Festival of Nehebkau
      Festival of the Coronation of the
      Sacred Falcon
      (Edfu) - 에드푸에서 기념된 매로 표상된 호루스 축일
      Festival of Min
      Festival of the Departure of Mut
      Mut, Min

      2nd Peret
      경작기 #2

      중왕조:
      Rekeh-Aa
      ('Big Burning')
      신왕조:
      Pa-en-pa-mekhru
      ('The one of the censor')
      Mechir Mekheir 2nd Peret:
      Festival of Victory (Edfu)
      Great Brand Festival
      Aset
      (Isis)

      3rd Peret
      경작기 #3
      중왕조:
      Rekeh-nedjes
      ('Little Burning')
      신왕조:
      Pa-en-Amen-hotep
      ('The one of Amenhotep')
      Parmhotp Phamenôth 3rd Peret:
      Small Brand Festival
      Festival of Amenhotep
      Amun,
      Amenhotep I

      4th Peret
      경작기 #4

      중왕조:
      Renen-wetet
      (Harvest deity)
      PaenRenenutet
      ('The one of Renenutet')
      Parmoute Pharmouthi 4th Peret:
      Renenutet 축제
      Renenutet

      1st Shomu
      추수기 #1

      중왕조:
      Khonsu
      (Moon deity)
      신왕조:
      Pa-en-Khonsu
      ('The one of Khonsu')
      Pakhons Pachôn 1st Shomu:
      Khonsu 축제,
      Festival of the Departure of Min
      Khonsu

      2nd Shomu
      추수기#2

      중왕조:
      Khenet-KhetyPerti
      ('Khentekhtai-perti') A deity.
      신왕조:
      Pa-en-inet
      ('The one on the wadi')
      Paone Payni 2nd Shomu:
      Beautiful Feast of the Valley (Waset)
      Heru
      (호루스)

      3rd Shomu
      추수기 #3

      중왕조:
      Ipet Hemet
      ('She whose incarnation is select')
      신왕조:
      Ipi-ipi
      (derived from Ipet hemet?)
      Epep Epiphi 3rd Shomu:
      Festival of the Beautiful Reunion;
      (Dendera & Edfu 지역에서의 하토르 및 호루스 축제)
      Wadjet

      4th Shomu
      추수기 #4

      중왕조:
      Wepet Ronpet
      ('Opening of the year')
      신왕조:
      Mesut-Ra
      ('Birth of Ra')
      Mesori Mesore 4th Shomu:
      Re-Horakhty 축제;
      새해기념 축제 (Wep Renpet)
      Ra-Horakti


      (라와 융합된 호루스)
      5일 간의 잔여일 (Epagomenal Days) 제 1일: 오시리스 탄생일 제 2일: 호루스 탄생일 제 3일: 세트 탄생일 제 4일: 이시스 탄생일 제 5일: 네프티스의 탄생일 1/4일의 차이로, 어떤 해는 제 6일 차가 삽입.




      우선, 옥타비아우스 집권 28년의 파촌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보는 계산법에 대한 클레멘스의 기록을 읽어보자.

      And there are those who have determined not only the year of our Lord’s birth, but also the day; and they say that it took place in the twenty-eighth year of Augustus, and in the twenty-fifth day of Pachon.---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Miscellanies), Book 1, Chapter XXI).

      우리 주님이 탄생한 해 뿐 아니라 날짜까지 셈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주님이 아우구스투스 집권 28년 파촌 25일에 탄생했다고 말한다... / 번역: 최광민

      그런데 클레멘스는 또 어떤 이들은 예수의 탄생일을 예수의 수난/부활절 무렵의 계절로 계산한다고 적는다. 즉, 이 셈법에 따르면, 예수의 수난은 티베리우스 황제 16년의 파메노스 (7번째 달) 25일, 혹은 파르무티 25일, 혹은 파르무티 19일에 있었던 것이 되고, 파르무티 25일은 예수의 탄생일이 된다. 이 무렵의 계절은 봄철이다. 카르타고의 교부 키프리아노스의 것이라 잘못 알려진 AD 243년의 다른 날짜 계산법 (De paschæ computus)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은 현재 달력으로 3월 28일이 된다.

      ...And treating of His passion, with very great accuracy, some say that it took place in the sixteenth year of Tiberius, on the twenty-fifth of Phamenoth; and others the twenty-fifth of Pharmuthi and others say that on the nineteenth of Pharmuthi the Saviour suffered. Further, others say that He was born on the twenty-fourth or twenty-fifth of Pharmuthi...---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Miscellanies), Book 1, Chapter XXI).

      그리스도의 수난시점을 매우 정확하게 다루는 어떤 이들은 말하길, 티베리우스 황제 16년의 파메노스 25일에 주님이 수난을 당했다고 하는데, 또 다른 이들은 파르무티 25일이라고도 하며, 혹은 파르무티 19일이 그 날이라고도 한다. 더 나아가 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파르무티달 25일에 탄생했다고도 말한다. / 번역: 최광민

      그런데 클레멘스는 또 다른 계산법도 전해주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상당한 교세를 떨쳤던 바실리데스파 이단자들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날을 기념하는 주현절을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 15년의 투비 (Tubi) 15일 혹은 투비 11일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동방의 교회력에서 1월 6일이 주현절로 기념되고 있다.

      ...And the followers of Basilides hold the day of his baptism as a festival, spending the night before in readings. And they say that it was the fifteenth year of Tiberius Caesar, the fifteenth day of the month Tubi; and some that it was the eleventh of the same month." ---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Book 1, Chapter 21)

      바실리데스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가 세례받은 날을 축제일로 지키는데, 경전을 읽으면서 밤을 지새운다. 그들은 말하길, 티베리우스 황제 15년의 투비 15일이 그 날이라고 말하는데, 혹자는 투비 11일이 바로 그 날이라고도 말한다. / 번역: 최광민

      도대체 왜 AD 200년 무렵 (바실리데스파 이단자를 포함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도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수의 탄생일을 계수하고 있었던 것일까? 무슨 대단한 음모라도 있었던 것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역법의 혼동을 고려해 보자. AD 200년 경, 이집트 일대에서 사용되던 적어도 세 종류의 달력/역법을 생각하면 아주 쉽게 풀릴 수도 있다.

      • 이집트 공용력 : 
        • 이 달력은 적어도 BC 3000년 무렵부터 클레멘스시절까지 이집트에서 사옹되어 왔다. 이 역법 상에서 1년은 정확히 365일이다. 그러나 실제 태양력은 365 + 1/4일이기 때문에, 해마다 오차가 발생하게 된다. 이 달력에서 1주는 10일 - 한 달은 정확히 30일 - 1년은 12달이므로, 매년 약 5일이 비게 된다. 이 5일은 매 년의 마지막 달인 뒤에 붙는데 이 무렵은 대체로 한 여름이다.
      •  이집트 민중력 : 
        • 이집트 공용력의 이런 문제로 인해 달과 계절이 일치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농경주기를 보정하기 위해 이집트인들은 이 태양력에 아울러 더 오래된 음력도 동시에 사용했다. 이 음력은 농경주기의 시작을 알리는 나일강 범람주기와 잘 일치하며 시리우스가 떠오르는 시점과도 일치한다. 이 역법은 이집트 평민들의 달력이었다. 로마의 작가 켄소리누스(Censorinus)에 따르면, 율리우스력 AD 139년의 경우엔 7월 20일이 이 민중력에 따르는 새해의 첫날이었다. 
      • 알렉산드리아력/율리우스력 : 
        • BC 238년, 이집트를 지배하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Ptolemaios III Euergetes는 BC 238년 Canopus 칙령에 의해 4년마다 366일을 한 해로 하는 개정역법을 선포하지만, 대부분이 농부였던 이집트인들은 이 개정안을 거부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25년에 이집트 공용달력을 개정해서 율리우스력을 만들었다. 이 개정으로 인해, 이집트력의 새해인 토트 1일은 비로소 계절에 일치하는 고정된 날짜가 되고, 율리우스력 8월 30일에 강제로 일치된다. 비록 이집트가 기원 직전에 로마 직할지가 되지만, 이집트 평민들의 삶에서 율리우스력이 가지는 영향력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꼽트력 : 
        • BC 25년부터 현대까지 이집트 꼽트교회가 사용하는 역법으로, 율리우스력과 이집트력을 보완한 것이다. 1년은 365일, 1달은 30일로 두고, 여벌의 5일을 맨 뒤에 배치한다. 여기까지는 이집트공용력이다. 그러나 매 4년 마다의 윤년에는 6일을 배치한다. 이는 율리우스력의 장점을 변형해 도입한 것이다. 물론 여전히 달과 계절이 완벽히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매 해는 대체로 여름 중반에 시작된다.

      BC 25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강제로 일치시킨 이집트 공용력과 율리우스력의 달을 맞춰보면 아래와 같이 된다.

      이집트력 = 율리우스력    

      1 Thot  =  8월 29 (30)일  / 새해
      1 Paophi  =  9월 28 (29)일
      1 Athyr  =  10월 28 (29)일
      1 Choiak  = 11월 27 (28)일 

      1 Tybi  =  12월 27 (28)일 
      1 Mechir =  1월 26 (27)일
      1 Phamenoth =    2월 25 (26)일
      1 Pharmuthi  =  3월 27일
      1 Pachon  =  4월 26일
      1 Payni  =  5월 26일
      1 Epiphi  =  6월 25일
      1 Mesori =   7월 25일
      1 epag. =  8월 24일

      다시 처음 계산으로 돌아가보자.



      클레멘스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부터 코모두스까지를 222년으로 잡는데 ("In all, from Augustus to Commodus, are two hundred and twenty-two years;..."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Book 1, Chapter XXI)), 이것은 아마도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를 패배시키고 이집트에 진군한 BC 30년 무렵부터 계산된 듯 싶다.(192 + 30 = 222).

      우선, 클레멘스는 예수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의 시대 (BC 30년)로부터 28년 후라고 적는다.

      "And our Lord was born in the twenty-eighth year, when first the census was ordered to be taken in the reign of Augustus." --- #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Miscellanies)}, Book 1, Chapter XXI).

      따라서 이것은 BC 2년이 된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라 (부분)월식 후에 있었던 헤롯대왕의 죽음이 BC 4년이었다고 보기 때문에 클레멘스가 계산 상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BC 4년, 2년, 1년) 여러 번의 월식이 있었고, 따라서 요세푸스가 "어떤 월식"인지를 밝히지 않은 한, 클레멘스의 계산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게 된다.

      당시 정황을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7.6.4에서 인용한다.

      "...But the people, on account of Herod's barbarous temper, and for fear he should be so cruel and to inflict punishment on them, said what was done was done without their approbation, and that it seemed to them that the actors might well be punished for what they had done. But as for Herod, he dealt more mildly with others [of the assembly] but he deprived Matthias of the high priesthood, as in part an occasion of this action, and made Joazar, who was Matthias's wife's brother, high priest in his stead. Now it happened, that during the time of the high priesthood of this Matthias, there was another person made high priest for a single day, that very day which the Jews observed as a fast. The occasion was this: This Matthias the high priest, on the night before that day when the fast was to be celebrated, seemed, in a dream, 1 to have conversation with his wife; and because he could not officiate himself on that account, Joseph, the son of Ellemus, his kinsman, assisted him in that sacred office. But Herod deprived this Matthias of the high priesthood, and burnt the other Matthias, who had raised the sedition, with his companions, alive. And that very night there was an eclipse of the moon..."

      아무튼 BC 2년부터 코모두스의 사망까지를 계산하면, AD 194년이 나온다. 예수탄생 ~ 코모두스 죽음까지가 194년 1달 13일이란 기록에 따라 예수의 탄생일을 계산해 보자. 만약 클레멘스스가 율리우스력을 따랐다면, 예수의 탄생일은 BC 2년 11월 17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클레멘스가 4년마다 일년을 366일의 윤년으로 하는 형식의 로마 율리우스력을 따르지 않았다면?

      만약 클레멘스가 1년을 365일로 고정한 이집트 공용력을 따랐다면, 그는 매년 6시간 씩을 잃게 되며 지난 200여 년간 총 49일을 잃게 된다. 이 경우, 그가 말하는 194년은 194 * 365 = 70,810일 + 1달/30일 + 13일 인 셈인데, 이를 다시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70,853/365.25 = 193.985 년이 된다. 이 계산에서 예수의 탄생일은 BC 1년 1월 5/6일이 된다.

      AD 4세기 말/5세기 초반에 살았던 수도사 요하누스 캇시아누스는 AD 420년 경 당시 이집트 수도원들이 옛 관습에 따라 (mos iste antiqua traditione servatur) 예수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와 예수의 세례일인 주현절을 같은 날 함께 기념하고 있다고 {Collationes} (X, 2 in Patrologia Latina P.L., XLIX, 820, http://www.earlymedievalmonasticism.org/texts/Cassian-Collationes.html) 에 적고 있다.

      IN the country of Egypt this custom is by ancient tradition observed that--when Epiphany is past, which the priests of that province regard as the time, both of our Lord's baptism and also of His birth in the flesh, and so celebrate the commemoration of either mystery not separately as in the Western provinces but on the single festival of this day,[578]--letters are sent from the Bishop of Alexandria through all the Churches of Egypt, by which the beginning of Lent, and the day of Easter are pointed out not only in all the cities but also in all the monasteries.[579] In accordance then with this custom, a very few days after the previous conference had been held with Abbot Isaac, there arrived the festal letters of Theophilus[580] the Bishop of the aforesaid city, in which together with the announcement of Easter he considered as well the foolish heresy of the Anthropomorphites[581] at great length, and abundantly refuted it. And this was received by almost all the body of monks residing in the whole province of Egypt with such bitterness owing to their simplicity and error, that the greater part of the Elders decreed that on the contrary the aforesaid Bishop ought to be abhorred by the whole body of the brethren as tainted with heresy of the worst kind, because he seemed to impugn the teaching of holy Scripture by the denial that Almighty God was formed in the fashion of a human figure, though Scripture teaches with perfect clearness that Adam was created in His image. Lastly this letter was rejected also by those who were living in the desert of Scete and who excelled all who were in the monasteries of Egypt, in perfection and in knowledge, so that except Abbot Paphnutius the presbyter of our congregation, not one of the other presbyters, who presided over the other three churches in the same desert, would suffer it to be even read or repeated at all in their meetings. --- Book X, Chapter II, Ramsey, Boniface, John Cassian: The Conferences, New York/Mahwah NJ 1997 (Ancient Christian Writers, vol. 57)

      하지만 AD 430년대에 들어서는 이집트에서도 크리스마스와 주현절을 분리해서 기념하게 되었고, Khoiak 29이 크리스마스가 된다. 이날은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이다.

      단성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예수의 탄생, 동방박사의 방문,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 의한 예수의 침례를 모두 같은 날인 (율리우스력) 1월 6일에 기념했다. 모든 정교회에서는 예수의 탄생과 동방박사의 방문을 (율리우스력) 12월 25일에, 예수의 침례를 1월 6일에 기념했다. 서방의 라틴교회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12월 25일에 기념하고, 동방박사의 방문을 1월 6일에 기념했다. 그리고 예수의 침례는 1월 6일 다음의 일요일에 기념하도록 정해졌다.

      어떤 역법을 따른 것인가? 여러 그룹 간에 서로 다른 역법을 사용해 생긴 날짜의 편차가 있었고 세대가 지나면서 서로 다른 날로 고정된 것은 아닐까?




      1.4. 라틴교회의 율리우스력 12월 25일

      동지일은 로마의 율리우스력에서 12월 25일이다. 율리우스력은 128년마다 하루를 잃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집전하에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325년까지 실제적으로 동지일은 율리우스력 12월 22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러다가 16세기 말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율리우스력을 그레고리우스력으로 개정할 무렵, 동지일은 율리우스력 12월 12일이 되었다.

      이때 그레고리우스는 동지일을 예수 당시나 혹은 율리우스력이 생긴 때가 아닌 니케아 공의회 (AD 325년) 당시의 날짜 (22일)로 다시 세팅해 버렸는데,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새 달력에서 25일에 기념하도록 되었고 동지는 22일이 된 것이다. 따라서 율리우스력의 동지인 25일과 그레고리우스력에서의 크리스마스인 25일은 사실상은 서로 다른 천문학적 의미를 가진 날이다.

      그럼 이제 다시 크리스마스를 보자.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이란 근거는 성서에는 전혀 없다.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 "축일"로 기념한 전통을 남긴 최초의 "기록물"은 로마교회의 기록으로 AD 336년의 일이다.  그러나 로마에서 AD 200년대 초반에 활동한 로마사제 히폴리투스는 비록 12월 25일을 교회가 "축일로 기념"하고 있는지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라고 바로 그날을 예수의 "탄생일"로 특정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현재 남은 기록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 이전부터 이런 전통이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아우렐리아우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솔 인빅투스를 로마의 공식 국가신으로 선포한 AD 3세기말 이전에 이미 일부 서방 교회들은 25일을 예수의 탄생기념일인 크리스마스로 기념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흥미롭게도 AD 2-3세기에 로마, 북 아프리카 및 소 아시아와 일부 그리스 지역교회들은 대체로 로마 율리우스력으로 3월 25일에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믿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 날이 또한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하고, 또 30년 후에 예수가 포교를 시작한 그 날이라고 믿는 전통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근거는 AD 2세기 말-3세기 초에 활동한 로마 사제이자 신학자 히폴리투스의 기록이다. 그는 구약성서 {다니엘}에 대한 주석에서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 해석이 순수한 신학적 해석인지, 아니면 사실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For the first advent of our Lord in the flesh, when he was born in Bethlehem, eight days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December 25th], the 4th day of the week [Wednesday], while Augustus was in his forty-second year, [2 or 3BC] but from Adam five thousand and five hundred years. He suffered in the thirty third year, 8 days before the kalends of April [March 25th], the Day of Preparation, the fifteenth year of Tiberius Caesar [29 or 30 AD], while Rufus and Roubellion and Gaius Caesar, for the 4th time, and Gaius Cestius Saturninus were Consuls... --- (tr. Tom Schmidt) {the Commentary on Daniel} 4.23.3 / tr. Tom Schmidt

      우리 주님이 육체를 입고 처음 오실 때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1월 칼렌드로부터 8일 전 (= 즉, 12월 25일), 그 주의 제 4일 (=즉, 수요일)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그 해는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42년 (=즉, BC 2/3년)이었다. 이 해는 아담으로부터 5500년이 지난 해였다. 그는 33세에 수난을 당하셨고, 이 날은 4월 칼렌드로부터 8일 전 (=즉, 3월 25일)인 유월절 준비일이었고,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15년 (=즉, AD 29/30년)이었으며, 루푸스, 루벨리온, 가이우스 카이사르 (4번째),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사투르니누스가 콘술이었던 때의 일이다 --- 로마의 히폴리투스, {다니엘서 주석} 4.23.3 / 번역: 최광민

      히폴리투스에 따르면, 예수는 BC 3/2년 수요일인 12월 25일에 태어났으며, 그때는 아우구스투스의 집권 42년이 되는 해였다. 한편, 예수가 수난 당한 날은 AD 29년 3월 25일 금요일이었고, 그때는 루벨리우스/Rubellius와 루푸스/Rufus가 콘술이었을 때의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루푸스는 Fufius의 오기로 보고 있다.



      우선 계산이 보다 용이한 부활절 날짜의 산정부터 살펴보자.

      사실 초기 교회에서 크리스마스는 전혀 중요한 축일이 아니었다. 대신 부활절이 최고의 축일이었고, 그 뒤를 잇는 것은 주현절이었다. 부활일은 태양태음력을 따르는 복잡한 유대종교력 대신 현지 역법에 더 친숙했던 기독교도들에 의해 새로 세팅되기 시작했는데, 그리스 지역에서는 십자가형이 있었던 해의 유월절인 유대력 니산 14일을 그리스 태양태음력 아르테미시온 14일로 세팅하고 그 유월절 날을 역시 부활절로 기념했다. 그 이유는 유대력 니산달과 그리스력 (마케도니아력) 아르테미시온달 모두 춘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AD 300년을 전후해 그리스력은 로마의 율리우스력으로 대체되는데 그때 이 아르테미시온 14일은 율리우스력 4월 6일이 되었다. 한편, 라틴교회는 테르툴리아누스가 활동하던 시기인 2-3세기 무렵 로마와 북아프리카의 라틴교회에서는 AD 29년 3월 25일 금요일을 유월절로 계산하고 이어지는 일요일을 부활절로 기념했다. (사실 29년이 아니라 30년이나 33년이 되어야 옳는 계산이긴 하다.)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와 라틴교회에서는 부활절을 또한 예수의 수태일로 여기는 전통이 있었다 (Chronographai, AD 221, Sextus Julius Africanus). 예수는 유월절, 즉 니산14일 직전에 처형당한다. 그런데 예수가 처형당한 것으로 여져지는 AD 30년경의 유월절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3월 25일에 걸치게 된다.

      그런데 AD 221년에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연대기 {Chronographai}에 예수가 봄철의 첫날 (현재 그레고리우스력으론 3월 25일)에 수태되었다고 (즉, 가브리엘에 의해 수태고지 되었다고) 적는다. 아울러 이날이 천지창조가 있었던 날이라고도 주장한다. 참고로 3월 25일은 봄철의 첫날이다. 아프리카누스는 예수가 AD 30/31년에 처형당한 것으로 계산했는데, 그해 유월절은 율리우스력 3월 23일이고, 부활일은 3월 25일이다. 따라서 이 경우 예수의 수태와 부활절은 같은 날이 된다. 이런 설명은 AD 2세기 말 북 아프리카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에게서도 등장하는데, 그러므로 아프리카누스가 이 주장을 불쑥 꺼낸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미 AD 2세기 중반부터는 서방 라틴교회들에 이런 전통이 퍼져있었단 뜻이 될 것이다. 이 3월 25일 수태고지 기념일은 서방과 동방교회 모두에서 고정일이다. 결론적으로 양력 3월 25일은 천지가 창조되고, 예수가 수태되고, 부활한 날이란 설명일 것이다. 다소 작위적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것이 당시 교부 몇명의 저술에 등장하는 설명이다.

      이 경우 크리스마스는 그리스 전통의 율리우스력 4월 6일 혹은 라틴 전통의 율리우스력 3월 25일에 9달을 더하면 산출된다. 전자는 1월 6일이고, 후자는 12월 25일이다. 1월 6일은 차츰 (예수의 세례와 포교의 개시를 기념하는) 주현절로 재조정되었다.

      그럼 이런 계산의 원래 근거는 무엇인가?

      그동안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세마야후 탈몬(Shemaryahu Talmon)이 1958년에 예수와 동시대에 존재한 에세네파의 아지트로 여겨지는 쿰란의 기록들을 조사한 후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보고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의 도래를 예고한 세례자 요한은 제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성직 수행기간을 전후해 임신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사장 가문은 돌아가면서 한 해에 두번 성직을 수행하는데, 쿰란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자카리아가 속한 아비야 가문의 성직수행 주간 (유대력으로 세번째 달의 8-14일 + 여덟번째 달의 24-30일) 중 한 주간이 대충 율리우스력으로 9월 3번째 주에서 마지막 주에 걸치게 된다. 초기 교회의 구전 전통은 세례자 요한이 9월 23일에 임신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예수는 그보다 6개월 후에 임신되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3월 25일경에 임신되서 12월 25일 경에 태어났다고도 볼 수 있게 된다.

      즉,

      1. 율리우스력 9월 23일에 세례요한 수태
      2. 6개월 후 3월 25일에 마리아에게 수태고지
      3. 그로부터 9개월 후인 12월 25일 예수 탄생

      그래서 솔 인빅투스의 축제일인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와 그 이전에 이미 초기 기독교의 일부 그룹에서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한 것은 두개의 다른 독자적 기원을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 정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심지어 여러가지 후보군들 중에서 굳이 12월 25일로의 단일화는 라틴교회 전통의 영향이다.



      그렇다면 과연 크리스마스는 로마의 사투르날리아 축제, 혹은 미트라스 제전, 혹은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의 영향 아래 발생했거나, 혹은 그것을 기독교적으로 대체한 것인가? 초기 기독교도들은 기독교 박해와 늘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던 로마황제들이 신봉하던 솔 인빅투스-미트라스의 제전을 기독교의 축일과 관련시키고 싶어했을까?

      아니면 독자적으로 발생했는데 (물론 다양한 후보들과 함께) 그중에 우연히 하나가 솔 인빅투스의 12월 25일과 일치되었고, 그게 기독교 공인과 더불어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를 대체한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일까?

      현재 교회예전력으로 라틴교회의 그레고리우스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는 러시아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등의 일부 동방정교회에서는 그레고리우스력의 개정으로 발생한 날짜 차이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력으로 1월 7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한다. 물론 율리우스력으로는 12월 25일이다. 한편 그리스 정교회는 그레고리우스력에 맞춰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한다.

      한편, 시리아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나중에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되는 크리소스토모스는 AD 386년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성탄 날짜가 동방에서 어떻게 조정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동방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관례가 원래는 없었고, 후대에 서방, 즉 로마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인 것이며, 또한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는 이 설교로부터 최소 10년 전까지는 성탄을 기념하는 관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고대로부터 교회가 기념해 오던 주현절, 유월절/부활절, 승천절, 오순절이란 교회력이 성탄절로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수의 탄생이 없다면 그의 활동도, 수난도, 부활도, 승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율리우스력 12월 25일을 성탄의 날짜로 강하게 확신했고 이미 "트라키아에서 카데스/카디즈", 즉 소아시아에서 오늘날 에스파니아에 이르는 제국의 서방에서 12월 25일에 성탄을 기념하는 관례를 콘스탄티노플과 동방에 도입한 인물이다.

      2. And if someone fond of dispute would not bear with what has been said, it is possible also to state a second proof. Of exactly what nature is this proof? The one from the census, which is found in the Gospels. For it came to pass, says the Evangelist, "In those days a decree went out from Caesar Augustus, that all the inhabited world should be enrolled. This was the first census, when Quirinius was governor of Syria. And all went to be enrolled, each to his own city. And Joseph also went up to Galilee, from the city of Nazareth, to Judea, to the city of David, which is called Bethlehem, because he was of the house and family of David, to be enrolled with Mary, his betrothed, who was with child. And while they were there, the time came for her to bring forth. And she gave birth to her first-born son and wrapped him in swaddling clothes, and laid him in a manger, because there was no place for them at the inn. " It is clear from this that He was born during the first census. And it is possible for the one who desires to know exactly to read the original codices publicly stored at Rome and learn the time of the census. So what, someone says, is this to us-who are neither there nor present? But listen, and do not be unbelieving, because we have received the day from those who know these things accurately and who dwell in that city. For the ones living there, having observed it from the beginning and from ancient tradition, now have themselves transmitted the knowledge of it to us. Nor in fact did the Evangelist indicate this time randomly, but both to make the day clear and known to us, and to show the economy of God. ---- On the Day of the Birth of Our Savior Jesus Christ" by St. John Chrysostom . https://www.johnsanidopoulos.com/2014/12/on-day-of-birth-of-our-savior-jesus.html

      이 설교에서 크리소스토모스는 예수의 탄생 때 있었던 (복음서의) 퀴리니우스의 "첫번째" 등록 때 남은 예수의 출생기록이 로마로 옮겨져 보관되었고, 따라서 그 기록에 따라 로마인들이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오래 전부터 기념하고 전수해 왔기 때문에 신뢰할 만하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이 기독교 지역이던 이집트를 침공하기 시작하던 AD 7세기의 단성파 이집트 꼽트교회의 주교이던 니키우 (Nikiu)의 요한의 연대기에 따르면, 로마교회에서는 AD 337-352년에 로마주교였던 율리우스 1세가 예루살렘 주교 키릴로스의 요청을 받고, 제 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투스가 로마로 가지고 간 예수 탄생 당시 센서스 기록을 참조해 12월 25일을 성탄일로 확정했다고 적었다.

      물론 원자료가 남아있지 않으므로 이 진술들을 사실로 확정할 수는 없다.




      1.5. 동방교회의 율리우스력 1월 6일

      오늘날 (단/합성론파에 속하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만이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하고 있기는 하지만, 원래 크리스마스 날짜에 관한 동방교회들의 일반적인 합의는 12월 25일이 아니라 1월 6일 이었다. 동방의 전통은 예수의 탄생일과 (동방박사가 방문한) 주현절을 같은 날로 계산했다.

      AD 361년 키프로스 살라미스의 주교였던 에피파니우스는 이단을 총 집대성한 그의 역작 {파나리온, Panarion}에서 동방의 전통을 기록하고 있다.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일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13번째 콘술이었고 또 실라누스가 콘술인 해, 1월 15일 (Ides)로부터 8일 전이자 동지 (12월 25일)로부터 13일이 되는 1월 6일이다. 이 해는 에피파니우스의 계산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가 집권한지 (정확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시작한 해부터) 42년 되는 해이자, 옥타비아누스가 유대아를 시리아에 병합시킨지 29년이 되는 해, 즉 BC 2년이다. 또한 헤롯 안티파트로스가 권좌에 오른 지 5년 차가 된다.

      에피파니우스의 {파나리온}에서 인용한다.

      22.3 ....For these say as follows: "During their consulships," I mean Octavians's 13th and the consulship of Silanus, "Christ was born on the 8th before the Ides of January, 13 days after the winter solstice and the increase of the light and the day.". Greeks, I mean the idolatoers, celebrate this day on the eighth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which Romans call Saturnalia, Egyptian Cronia and Alexandrians, Cicellia--- Panarion, IV.22.5-6;

      이와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콘술로 재임할 때", 여기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실라누스와 콘술로 재임한 그의 통산 13번째 재임기를 말하는데,  "그리스도는 1월 이데스의 8일 전, 즉 동지로부터 13일 후이자 낮의 길이가 길어지는 날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스 우상숭배자들은 1월 칼렌드로부터의 8일 전 (=12월 25일)에 축제를 가지는데. 이 날은 로마의 사투르날리아, 이집트의 크로니아, 알렉산드리아의 키켈리아에 해당한다. --- 에피파니우스, {파나리온} 4권 22:5-6  / 번역: 최광민

       ....As I have said before and am obliged to say over and over, this was the day in the thirteenth consulship of Octavius Augustus and the consulship of Silanus which fell on the eighth day before the Ides of January, thirteen days after the increase of the daylight. This lasts from the winter solstice, the eighth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until the actual day of Christ's birth and Manifestation, because of the type I spoke of -- the Savior himself and his disciples, making thirteen. [19] Thus the Savior was born in the 42 year of the Roman emperor augustus in the consulship I have mentioned, 29 years after Augustus' annexation of Judaea --- Epiphanius, Panarion, IV, Chapter 31 (51), 22, 18-19).

      예수의 탄생시간대는 율리우스력 1월 5일 저녁에서 1월 6일 자정무렵에 걸치는 것으로 진술한다. 이 날짜는 당대 이집트 달력에서는 티비 11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For Christ was born in the month of January, that is, on the eighth before the Ides of January -- in the Roman calendar this is the evening of January fifth, at the beginning of January sixth. In the Egyptian calendar it is the eleventh of Tybi.” --- Epiphanius, {Panarion}, IV, Chapter 31 (51), 24,1). 

      그럼 왜 서방의 라틴교회 전통은 12월 25일이 예수의 탄생일인데, 동방의 전통에서는 1월 6일인가? 그 힌트는 고대의 역법 속에 등장한다.



      로마의 히폴리투스의 기록을 다시 읽어보자.

      ...For the first advent of our Lord in the flesh, when he was born in Bethlehem, eight days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December 25th], the 4th day of the week [Wednesday], while Augustus was in his forty-second year, [2 or 3BC] but from Adam five thousand and five hundred years. He suffered in the thirty third year, 8 days before the kalends of April [March 25th], the Day of Preparation, the fifteenth year of Tiberius Caesar [29 or 30 AD], while Rufus and Roubellion and Gaius Caesar, for the 4th time, and Gaius Cestius Saturninus were Consuls... --- (tr. Tom Schmidt) {the Commentary on Daniel} 4.23.3 / tr. Tom Schmidt

      우리 주님이 육체를 입고 처음 오실 때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1월 칼렌드로부터 8일 전 (= 즉, 12월 25일), 그 주의 제 4일 (=즉, 수요일)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그 해는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42년 (=즉, BC 2/3년)이었다. 이 해는 아담으로부터 5500년이 지난 해였다. 그는 33세에 수난을 당하셨고, 이 날은 4월 칼렌드로부터 8일 전 (=즉, 3월 25일)인 유월절 준비일이었고,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15년 (=즉, AD 29/30년)이었으며, 루푸스, 루벨리온, 가이우스 카이사르 (4번째),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사투르니누스가 콘술이었던 때의 일이다 --- 로마의 히폴리투스, {다니엘서 주석} 4.23.3 / 번역: 최광민

      정확히 말하자면, 이 기록에서 히폴리투스는 "동지"나 "12월 25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달력 1월의 첫날 (=칼렌드)로부터 "8일 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 에피파니우스는 역시 "8일 전"을 말하지만 "신년일로부터의 8일 전"이 아니라 "1월 이데스 (Ides, 15일)로부터 8일 전"을 말하고 있다.

      고대의 인식에서 동지인 12월 25일과 1월 6일은 "해가 다시 길어지는 13일 간의 절기"의 첫날과 마지막 날이다.  당시의 역법에서 동지로부터 하루씩 1/13시간이 낮에 추가되기 때문에, 13일이 지나 다음 해 1월 6일이 되면 낮이 (동지 직전보다) 1시간 길어지는 것이다.

      에피파니우스의 기록을 보자.

      ......which is solstice, comes on the 8th before the Kalends of January, and the day begins to lengthen because the light is receiving its increase And it completes a period of 13 days until the 8th before the Ides of January, the day of Christ's birth, with a 13th of an hour added to each day. --- Ephiphanius, {Panarion} IV 22,3  --- Ephiphanius, {Panarion} IV 22,3

      ...1월 칼렌드 8일 전에 해당하는 동지 때부터 빛이 길어져 하루당 1/13시간씩 낮이 늘어나는데, 그리스도의 탄생일인 1월 이데스의 8일 전까지 13일 간의 절기가 이렇게 완성된다....--- 살라미스 주교 에피파니우스, {파나리온} 4권 22.3  / 번역: 최광민

      이어서 에피파니우스는 메소포타미아 에뎃사의 주교였던 에프렘 (AD 306-373)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다. 에프렘의 주석은 동방 기독교의 계산법 혹은 신학적 이해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The Syrian sage Ephrem testified ......."Thus the advent of our Lord Jesus Christ, his birth in the flesh or perfect incarnation which is called the Epiphany, was revealed after a space of 13 days from the begining of the increase of the light...."  --- Ephiphanius, {Panarion} IV 22,3

      시리아 현자인 에프렘은 이 계산에 대해 그의 주석에서 말하길....."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탄생 혹은 완전한 성육신은 낯의 빛이 길어지기 시작한 후 13일 후에 있었다..."  --- 살라미스 주교 에피파니우스, {파나리온} 4권 22.3  / 번역: 최광민
       
      결국, "무엇으로부터의 8일 전"이냐, 즉 기준일 산정이 서방과 동방의 전통을 다르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서방의 경우 이 "낮이 길어지는 13일 간의 절기"의 첫날인 동지일이, 동방의 경우는 그 마지막 날이 예수의 탄생일로 계산된 셈이다. 그래서 동지 일은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고, 이듬 해 1월 6일은 낮이 동지 직전보다 "한 시간 더 길어진" 날이다. 혹은 이 13일 중 어느 한 날에 예수가 탄생했으나, 그 날짜가 특정되지 않아서 대신 동서방이 그 절기의 첫날 혹은 마지막 날을 예수의 탄생일로 기념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원래 칼렌드와 이데스는 음력에서는 달의 기울고 차는 것을 기준으로 했지만, 율리우스력의 개정과 함께 31일을 한달로 하는 달에서는 이데스가 그 달의 제 15일이 되지만 다른 달에서는 날 수가 달라진다. 달이 처음뜨는 노네스부터 이데스까지는 정확히 8일이며, 칼렌드부터 노네스까지는 4일 혹은 6일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데스부터 다음 달이 떠오르는 날까지는 16-19일 사이에 걸치게 된다.

      에피파니우스 같은 문서의 22:9-10에서 흥미로운 비교종교학적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는 이 1월 6일이 당시 최소한 세개의 고대종교에서 여신에게서 탄생한 신의 탄생일로 지켜지고 있었음을 보고한다. 하나는 코레/Core여신이 시간의 신 아이온/Aion을 낳은 것을 기념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축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페트라의 여신 차아무/Chaamu가 두사레스/Dusares/신의 외아들을 낳은 날이다. 이 축제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엘루사/Elusa에서도 열렸다. 이에 대해서는 독립적으로 다루겠다.




      1.6. 동방박사의 별

      만약 현재 12월 25일에 기념되는 크리스마스가 사투르날리아 혹은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일이 실제로 벌어졌던 것일까? 동지를 언급하지 않고도 12월 25일 무렵을 크리스마스의 날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를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제부터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 독자들은 다만 신약성서에서 오직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에만 등장하는 동방박사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기초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만 긍정적으로 수긍해주면 된다.

      많은 문헌비평가들은 {마태복음서}의 이 동방박사 일화가 문화인류학과 신화학에 등장하는 영웅탄생 설화의 전형이며 상당히 후대에 삽입되었을 것이란 주장을 펼치지만, 나는 이 글에서 일단 동방박사와 그 들이 본 별에 대한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 후, 그렇다면 동방박사가 본 그 별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써내려가 보려고 한다. 물론 여기 전개할 이야기는 나의 독창적 창작물은 아니며, 대신 이 별의 정체에 대한 많은 주장들에서 가장 타당하다고 믿겨지는 두 서너개의 이론을 취합한 것이다. 여기서는 천문현상인 "삼합/triple conjunction"을 사용한 해법을 정리해 보겠다

      크리스마스의 시기와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다른 가설들이 경합하고 있다. 시점은 BC 8년에서 BC 2년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기간 중에는 BC 7/6년과 BC 3/2년에 점성학적으로 유의미한 3합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후자의 3합 시점은 12월 25일 무렵이다. 따라서 미트라/솔 인빅투스 탄생축일인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의 날짜를 상기해 볼때 재밌는 비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아래 제시할 이론이 사실이라면, 기독교의 크리스마스의 날짜(12월 25일)이 미트라/솔 인빅투스 축일과 겹치는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기독교의 크리스마스가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에서 차용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 될 수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크리스마스의 별 혹은 베들레헴의 별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동쪽에 위치한" 동방박사가 보기에 "서쪽" 방향의 평원/사막 위에 높이 떠서 밝게 빛나며 동방박사를 유대아로 인도하는 그런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별이 동방박사가 출발한 곳에서 베들레헴까지 이동하면서 동방박사를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까지 이끌어 갔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크리스마스 카드에 그려진 바로 그 이미지다. 그러나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이 이미지는 어딘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


      1.5.1. 마태/마태오의 기록: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εἴδομεν γὰρ αὐτοῦ τὸν ἀστέρα ἐν τῇ ἀνατολῇ..."

      우선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의 정황을 정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전문을 인용해 보자.

      1 τοῦ δὲ ἰησοῦ γεννηθέντος ἐν βηθλέεμ τῆς ἰουδαίας ἐν ἡμέραις ἡρῴδου τοῦ βασιλέως, ἰδοὺ μάγοι ἀπὸ ἀνατολῶν παρεγένοντο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2 λέγοντες, ποῦ ἐστιν ὁ τεχθεὶς βασιλεὺς τῶν ἰουδαίων; εἴδομεν γὰρ αὐτοῦ τὸν ἀστέρα ἐν τῇ ἀνατολῇ καὶ ἤλθομεν προσκυνῆσαι αὐτῶ. 3 ἀκούσας δὲ ὁ βασιλεὺς ἡρῴδης ἐταράχθη καὶ πᾶσα ἱεροσόλυμα μετ᾽ αὐτοῦ, 4 καὶ συναγαγὼν πάντας τοὺς ἀρχιερεῖς καὶ γραμματεῖς τοῦ λαοῦ ἐπυνθάνετο παρ᾽ αὐτῶν ποῦ ὁ χριστὸς γεννᾶται. 5 οἱ δὲ εἶπαν αὐτῶ, ἐν βηθλέεμ τῆς ἰουδαίας· οὕτως γὰρ γέγραπται διὰ τοῦ προφήτου·6 καὶ σύ, βηθλέεμ γῆ ἰούδα, οὐδαμῶς ἐλαχίστη εἶ ἐν τοῖς ἡγεμόσιν ἰούδα· ἐκ σοῦ γὰρ ἐξελεύσεται ἡγούμενος, ὅστις ποιμανεῖ τὸν λαόν μου τὸν ἰσραήλ. 7 τότε ἡρῴδης λάθρᾳ καλέσας τοὺς μάγους ἠκρίβωσεν παρ᾽ αὐτῶν τὸν χρόνον τοῦ φαινομένου ἀστέρος, 8 καὶ πέμψας αὐτοὺς εἰς βηθλέεμ εἶπεν, πορευθέντες ἐξετάσατε ἀκριβῶς περὶ τοῦ παιδίου· ἐπὰν δὲ εὕρητε ἀπαγγείλατέ μοι, ὅπως κἀγὼ ἐλθὼν προσκυνήσω αὐτῶ. 9 οἱ δὲ ἀκούσαντες τοῦ βασιλέως ἐπορεύθησαν, καὶ ἰδοὺ ὁ ἀστὴρ ὃν εἶδον ἐν τῇ ἀνατολῇ προῆγεν αὐτοὺς ἕως ἐλθὼν ἐστάθη ἐπάνω οὖ ἦν τὸ παιδίον. 10 ἰδόντες δὲ τὸν ἀστέρα ἐχάρησαν χαρὰν μεγάλην σφόδρα. 11 καὶ ἐλθόντες εἰς τὴν οἰκίαν εἶδον τὸ παιδίον μετὰ μαρίας τῆς μητρὸς αὐτοῦ, καὶ πεσόντες προσεκύνησαν αὐτῶ, καὶ ἀνοίξαντες τοὺς θησαυροὺς αὐτῶν προσήνεγκαν αὐτῶ δῶρα, χρυσὸν καὶ λίβανον καὶ σμύρναν. 12 καὶ χρηματισθέντες κατ᾽ ὄναρ μὴ ἀνακάμψαι πρὸς ἡρῴδην, δι᾽ ἄλλης ὁδοῦ ἀνεχώρησαν εἰς τὴν χώραν αὐτῶν.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ἀνατολῇ) 그의 별(=ἀστέρα)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 한국어 개역개정, {마태복음} 2장

      풀어 설명하면 이렇다.

      "… (BC 7년에서 2년 사이), 유대아가 아닌 지역의 일단의 점성가(들)이 하늘에서 특이한 천문현상을 보았다. 그 현상은 유대아에 새로운 왕이 등장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관례대로) 그 새로운 왕의 탄생을 축하하는 사절들을 황금,유향, 몰약과 함께 보냈다. 그들은 천체가 지시하는 대로 유대아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가서 당시 유대의 왕이던 헤롯대왕이라면 뭔지알까 싶어서 물었더니, 헤롯 측에서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했다...."

      그 다음 장면을 풀어 설명하면 이렇다.

      "... 그 말을 듣고 나와보니 문득 길을 안내하던 별이 다시 나타나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이끌었는데, 거기서 그 별이 멈추었고, 거기서 그들은 예수와 그 부모를 만나 예물을 봉헌했다…"

      그런데 이 정황을 읽어보면 크리스마스 카드에 그려진 그 그림들이 다소 복음서의 정황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금새 알게 될 것이다. 동방박사들의 진술 어디에도 (크리스마스 카드나 캐럴 등에 묘사되는 식으로) 그 "별"이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움직이면서 그들을 인도했다는 내용은 없다. 아울러 그 "별"은 관측 후 사라졌다가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 홀연히 다시 출현했다.

      {마태복음서}에 기록된 정황에 따르자면 그 별은 다음의 조건에 부합해야 한다.

      1. 별의 출현은 공공연한게 아니라 이 동방박사들만 볼 수 있었거나 해석할 수 있었다.
      2. 그 별은 탄생을 암시한다.
      3. 그 별은 왕을 의미한다.
      4. 그 별은 유대라는 어떤 특정지역을 의미한다.
      5. 그 별은 처음에는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그 다음 베들레헴으로 이끌 어떤 단서를 준다. 
      6. 동방박사들이 별을 관측한 후 아마도 그 별은 어느 시점에서 사라졌다.
      7. 동박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그 별은 돌연 다시 관측되어고 그들을 인도했다.
      8. 그 별은 베들레헴에서 멈춘다.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천체는 무엇인가? 이 천문현상은 과연 역사적으로 언제 일어났는가?




      1.5.2. 마고스, 마기, 동방박사

      {마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를 찾아온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마기/Magi 라고 불리던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마기는 주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페르시아 혹은 인도까지 걸치는 지역에 퍼져있던 조로아스터교의 종교그룹의 하나인 '마고스' 혹은 '마구스'의 복수형이다. 이들은 점성술을 통해 국가의 운명을 파악하고 농업을 통제하고 병자를 치유하는 등 학문과 의료의 영역을 담당했다. 사실 이 마기들이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는 모른다. 다만 조로아스터교를 숭상하는 나라 (당시의 파르티아)가 유대아의 동쪽이었으므로 '동방박사'라고 후대의 사람들이 불렀을 뿐이다.

      성서가 예수의 탄생을 다루면서 왜 굳이 이들을 개입시켰는가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나는 일이다. 다만 흔히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하늘의 징조를 읽는 것" 자체가 금지된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 금지된 것은 천체를 숭배하는 것과 (유대교/기독교의) 신을 배제하고 신탁을 구하는 일이었고, 오히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일부에서는 메시아의 도래 시 천체에 어떤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과 암시가 풍부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소선지서 {요엘}에서 야훼는 "나는 하늘과 땅에서 징조를 보이리라. 피가 흐르고 불길이 일고 연기가 기둥처럼 솟고 해는 빛을 잃고 달은 피같이 붉어지리라." 라고 말하며, 예수는 {복음서}에서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라고 말하고 또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 역시 위의 {요엘}을 인용한다.

      즉, 성서는 "천체의 징조를 읽는 것" 자체를 금지했다기 보다는 (1) 천체를 신으로 섬기거나 (2) 하늘의 "징조"를 "히브리인들의 신 야훼" 이외의 신들이 보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봐야 한다. 가령, 모세는 {신명기} 4장에서 "눈을 하늘로 향하여 해와 달과 별 등 하늘에 있는 모든 천체를 보고 그 앞에 엎드려 예배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서도 안 된다. 그런 것들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만천하 다른 민족들에게(나) 주어 섬기게 하신 것들이다."라고 경고했다. 천체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인의 종교적 사고 속에서 신이 천체를 "창조"한 목적 {창세기} 1장의 제 4일 차 창조 이야기에 따르자면, 야훼는 하늘에 "빛들/천체들"을 두어 낮과 밤을 나누면서, (1) "징조" (אוֹת) 및 (2) 계절과 날과 해들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천체현상은 신이 인간들에게 어떤 "메시지" 혹은 "징조"를 주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징조"는 매우 드믈게 일어나는 "신의 개입"에 해당하는데, 반면, 바빌로니아 등의 고대점성술에서는 "주기적인 천체현상"에도 신화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종교적으로 해석했다. 이런 식의 "징조"는 히브리인의 종교적 사고로 본다면 "징조" 자체가 아니다.

      게다가 이들 마기들이 원래부터 조로아스터 교도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마기는 원래 메데의 종교 엘리트 계급이었고, BC 페르시아, 즉 아케메네스 왕조 때에는 키루스, 다리우스 등에게 무력항쟁을 벌인 결과 그 힘이 약화되어 있다가, 기원 후 3세기에 재건된 사산왕조의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에 흡수되어 다시 힘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음서}는 예수를 찾아온 마기들의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인 단서도 주지 않는다.

      마기는 현자나 마법사라는 의미로도 범용될 수 있다. 구약성서 {다니엘}에서는 바빌로니아를 통일한 네부카드네자드/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을 바빌로니아의 통치범위 안에 있는 모든 술사/현자 (chakkiym) 들의 대표 (rab cegan) 으로 임명했다고 되어 있다. 학자들은 이 지위가 오리엔트 전역에서 '마기들의 대표'란 의미로 범칭되는 랍-마그 (rab-mag)와 실제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점성술 및 천문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혹자는 {마태복음서}의 “..우리가 동방에서 그(메시아)의 별을 보고...”라는 문구를 들어 그들이 유대아의 동쪽에서 왔다고 말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오역이며, 일부 영어성서도 똑같이 실수를 범하고 있는 "동방에서(in the east)"는 그리스의 천문용어 "엔 테 아나톨레(en te anatole)"를 몰랐던 번역자들이 잘못 번역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단어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동방에서"가 아니라 "동쪽 지평선에서 별이 떠오르는 순간"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부분의 정확한 표기는 "우리(마기)가 어느날 동쪽 지평선에서 그 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천체는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진다. 이 방식이 바로 고대의 점성술이 천문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마기들이 본 그 천체는 크리스마스 카드에서처럼 마기들의 길 앞에 높이 떠서 그들을 인도하는 별 일 수 없다. 그 별이 떠오르는 순간, 그 별이 유대아라는 지역에서 탄생할 어떤 왕에 대한 정보를 그들에게 주고 있다는 걸 해석한 것이다. 오직 마기들만이 그것을 해석했다. 마태의 진술에 따르면, 예루살렘에 있던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유대인 학자조차 그런 별이 있다는 걸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별은 누구나 볼 수 있는 혜성이나 초신성 같은 것일 수 없다. 대신 마기들이 가진 어떤 해석체계로만 풀 수 있는 일종의 암호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앞서 말한 '엔 아나톨레'와 같은 전문단어는 {마태복음서}의 저자가 이 현상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처음부터 베들레헴으로 가지않고, 오히려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것은 그 별이 그들에 앞서서 그들을 안내한 것이 아니라, 마기들이 가진 목적지 정보란 오직 "유대아"라는 키워드였기 때문에, 당연히 유대아-이두메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향했을 뿐이란 걸 암시한다. 여기까지를 수긍할 수 있다면, 다음 파트는 좀더 자잘한 실례들에 불과하다.

      그럼 서방의 제국 로마와 동방의 제국 파르티아 사이에 끼어있는 유대아라는 지역은 과연 마기들의 관심을 끌만한 지역이었을까? 흔히들 예수는 제국의 초라한 변방에서 비천하게 태어났다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아는 당대의 두 제국 (로마와파르티아) 사이에 위치한 예속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세계에서 정치적으로 비상한 관심이 집중되어있던 지역이었다.

      AD 2세기의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와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아에서 등장할 한 왕이 제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예언이 동방에 파다했다는 점과, 로마황제 네로와 나중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로마황제가 되는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예언을 잘 인지했으며 또한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네로에 관한 로마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읽어보자. 네로를 둘러싼 점성술사들은 네로가 동방, 특별히 예루살렘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아첨을 떨었다.

      "...The world, after tolerating such an emperor for little less than fourteen years, at length forsook him; the Gauls, headed by Julius Vindex, who at that time governed the province as pro-praetor, being the first to revolt. Nero had been formerly told by astrologers, that it would be his fortune to be at last deserted by all the world; and this occasioned that celebrated saying of his, "An artist can live in any country;" by which he meant to offer as an excuse for his practice of music, that it was not only his amusement as a prince, but might be his support when reduced to a private station. Yet some of the astrologers promised him, in his forlorn state, the rule of the East, and some in express words the kingdom of Jerusalem. But the greater part of them flattered him with assurances of his being restored to his former fortune. And being most inclined to believe the latter prediction, upon losing Britain and Armenia, he imagined he had run through all the misfortunes which the fates had decreed him. But when, upon consulting the oracle of Apollo at Delphi, he was advised to beware of the seventy-third year, as if he were not to die till then, never thinking of Galba's age, he conceived such hopes, not only of living to advanced years, but of constant and singular good fortune, that having lost some things of great value by shipwreck, he scrupled not to say amongst his friends, that (371) "the fishes would bring them back to him." At Naples he heard of the insurrection in Gaul, on the anniversary of the day on which he killed his mother, and bore it with so much unconcern, as to excite a suspicion that he was really glad of it, since he had now a fair opportunity of plundering those wealthy provinces by the right of war. Immediately going to the gymnasium, he witnessed the exercise of the wrestlers with the greatest delight. Being interrupted at supper with letters which brought yet worse news, he expressed no greater resentment, than only to threaten the rebels. For eight days together, he never attempted to answer any letters, nor give any orders, but buried the whole affair in profound silence...." [Suetonius, Nero, 40]

      또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관한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보면, AD 1세기 중반에는 유대아에서 출현한 인물이 제국을 평정하게 되리라는 소문이 동방에 무성했음을 보고한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예언이 로마황제 (즉, 베스파시아누스)에 관한 것이었지만, 이 소문에 흥분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적는다. 요세푸스는 이 소문을 십분활용해 목숨을 구했고, 결국 이 반란을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로마황제가 되었다.

      "...[IV]....A firm persuasion had long prevailed through all the East [735], that it was fated for the empire of the world, at that time, to devolve on some who should go forth from Judaea. This prediction referred to a Roman emperor, as the event shewed; but the Jews, applying it to themselves, broke out into rebellion, and having defeated and slain their governor [736], routed the lieutenant of Syria [737], a man of consular rank, who was advancing to his assistance, and took an eagle, the standard, of one of his legions. As the suppression of this revolt appeared to require a stronger force and an active general, who might be safely trusted in an affair of so much importance, Vespasian was chosen in preference to all others, both for his known activity, and on account of the obscurity of his origin and name, being a person of whom (446) there could be not the least jealousy. Two legions, therefore, eight squadrons of horse, and ten cohorts, being added to the former troops in Judaea, and, taking with him his eldest son as lieutenant, as soon as he arrived in his province, he turned the eyes of the neighbouring provinces upon him, by reforming immediately the discipline of the camp, and engaging the enemy once or twice with such resolution, that, in the attack of a castle [738], he had his knee hurt by the stroke of a stone, and received several arrows in his shield.." [Suetonius, Vespasian, 4].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유대아로부터 나올 지배자"가 세계를 얻는다는 이 예언의 출처로 유대교의 고대 예언을 들었다. 로마인들은 지중해의 고대종교들의 신탁들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Prodigies had occurred, which this nation, prone to superstition, but hating all religious rites, did not deem it lawful to expiate by offering and sacrifice. There had been seen hosts joining battle in the skies, the fiery gleam of arms, the temple illuminated by a sudden radiance from the clouds. The doors of the inner shrine were suddenly thrown open, and a voice of more than mortal tone was heard to cry that the Gods were departing. At the same instant there was a mighty stir as of departure. Some few put a fearful meaning on these events, but in most there was a firm persuasion, that in the ancient records of their priests was contained a prediction of how at this very time the East was to grow powerful, and rulers, coming from Judaea, were to acquire universal empire. These mysterious prophecies had pointed to Vespasian and Titus, but the common people, with the usual blindness of ambition, had interpreted these mighty destinies of themselves, and could not be brought even by disasters to believe the truth. I have heard that the total number of the besieged, of every age and both sexes, amounted to six hundred thousand. All who were able bore arms, and a number, more than proportionate to the population, had the courage to do so. Men and women showed equal resolution, and life seemed more terrible than death, if they were to be forced to leave their country. Such was this city and nation; and Titus Caesar, seeing that the position forbad an assault or any of the more rapid operations of war, determined to proceed by earthworks and covered approaches. The legions had their respective duties assigned to them, and there was a cessation from fighting, till all the inventions, used in ancient warfare, or devised by modern ingenuity for the reduction of cities, were constructed. ..." [Tacitus, History, Book 5, v13].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항복한 갈릴리 사령관이자 제사장 요세푸스, 수에토니우스, 타키투스는 이 예언을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에 대한 것으로 여겼다. 기독교도들은 이 예언을 메시아 예수에 대한 것으로 해석한다.




      1.5.3. 삼합 (triple conjunction) 

      고대 점성학 어떤 자료에 왕/탄생/유대아라는 3가지 정보를 하나의 별이 가지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바빌로니아를 포함한 오리엔트 문명의 점성학에서는 어떤 천체의 천궁도에서의 위치를 통해 천문현상의 의미가 해석되어진다. 다시 말해서 어떤 별이, 어떤 시각에, 12성좌의 어디에서 떠오르는가/놓이는가 하는 것을 통해 마기들은 앞서의 정보를 해독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그 별과, 시각, 성좌의 이름에 대해서는 사실 몇가지 경합하는 가설들이 있다. 나는 여기서 그 중의 하나만을 취합하겠으며, 시기는 BC 3년이 넘어가는 시점, 그 별은 목성, 목성이 함께 떠오른 성좌는 사자자리다. 이 가설은 다른 많은 가설들 중에서 매우 설득력이 있다.

      BC 3년 9월은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라 부르는 유대인의 신년이었다. 목성은 모든 나라의 점성문헌에서 행성들의 왕을 상징한다. 그리고 사자는 유대아 왕국의 상징이었다. 사실상 이런 단서들을 따로따로 떼어놓으면 큰 중요성을 가지지 않지만, 이 세가지 정보가 한데 뭉치면 갑자기 유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이 시기에 같은 위치에서 합(conjunction)이라는 천문현상이 덧붙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 제공된 천문도는 천문 프로그램 CyberSky(버전 3.3.1)으로 직접 시뮬레이션 해 본 결과물이다. 녹색선은 천궁도를 따라 태양이 움직이고 있는 황도이며, 행성들은 대체로 이 황도대를 따라 움직여 나가게 된다. 별자리와 별이 동쪽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무렵의 모습이며, 관측지점은 임의로 이라크 바그다드로 잡았다.


      (그림 1) BC 3년 8월 15일 오전 5시 경, 처녀자리(Virgo)와 사자자리(Leo). 목성은 노랑, 금성은 핑크, 레굴루스는 파랑.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면, BC 3년 9월, 목성은 레굴루스라는 항성과 아주 가까이 놓여서 약간 거리는 있지만 육안으로는 하나의 별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을 천문용어로 합(conjunction)이라고 한다.

      문제의 이 레굴루스 (= 알파 레오니스)라는 이 천체는 바빌로니아 점성학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지구로부터 77.5 광년 떨어진 이 항성은 사자자리의 가장 밝은 항성이자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천체 가운데 하나로, 두개씩 짝지어진 4개의 별로 구성되는 다중성이다. (레굴루스 A/?, 레굴루스 B/C). 레굴루스 A와 짝지어진 항성은 직접 관측되지는 않는다.

      '레굴루스'란 이름은 16세기 폴란드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붙여진 이름으로, 비슷한 시기 덴마크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작은 왕'이란 뜻의 '바실리스쿠스 (Basiliscus)'로 호칭했다. 중세 유럽에서의 원래 이름은 '왕'을 뜻하는 라틴어 '렉스(Rex)'였다. 그보다 앞선 AD 2세기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작은 왕' 뜻하는 그리스어 '바실리스코스(Basiliskos)'로 이 천체를 불렀는데, 이 천체가 하늘의 일을 주관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빌론 지역에서는 그보다 적어도 1000년 앞서 이 천체를 '샤루(Sharru)' 즉 '왕'으로 불렀고, 이는 바빌로니아 천문학의 15번째 별자리로 등장한다. 인도에서는 '권능자'를 뜻하는 '마가(Magha)'로, 페르시아/소그디니아에서는 '위대한 자'를 뜻하는 '마그(Magh)로, 두란에서는 '영웅'을 뜻하는 '마수(Masu)'로, 아카디아에서는 대홍수 이전의 5번째 천상의 왕 '큰 자'란 의미로 '아밀-갈-우르 (그리스어, 아메갈라로스)'로 불렸다. 그리스에서는 '바실리코스 아스테르' (Basilikois aster, 로마에서는 '바실리카 스텔라 (Basilica Stella)' 혹은 레기아 (Regia, 플리니우스 (AD 23-79)), 아라비아에서는 '말리키 (Malikiyy)'였다. 모두 '왕'을 의미한다.페르시아에서 레굴루스는 왕권과 하늘의 방위를 상징하는 네개 별 (Hastorang/Fomalhaut (남), Venant/Regulus(북), Tascheter/Aldebaran(동), Satevis/Antares(서))에서도 으뜸가는 별이었다. 사자자리의 가슴 부위에 있기 때문에 '사자의 심장'으로도 고대로부터 잘 알려졌는데, 가령 그리스에서는 'Kardia Leontos', 로마에서는 'Cor Leonis' , 아랍세계에서는 'Al Kalb al Asad'로 불렸다.

      목성과 레굴루스는 함께 한 지점에서 떠올라 며칠 후 점차 멀어져 간다. 사실 목성과 레굴루스는 12년마다 스쳐지나가기는 하지만, 한 지점에서 만나는 것은 드믈다. 아래 그림은 제 1합을 보여준다.


      (그림 3) 목성-레굴루스 제 1합 : BC 3년 9월 12일 오전 5시 경

      아래의 천체 위치는 위의 목성과 레굴루스가 제 1합이 일어나는 BC 3년 9월 11일 아침 동이 트는 시간에 정동 방향에 떠오르는 처녀자리(Virgo)에 나타나는 천체들의 배치를 보여준다. 아래의 주황선 선은 지평선이다. 혹자는 이 현상이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구절을 설명한다고 믿고 있다.


      (그림 4) 목성-레굴루스 제 1합 중 , 일출 무렵 처녀자리에서의 태양과 달의 위치 : BC 3년 9월 11일경

      …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서서 별이 열 두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 그 여자는 뱃 속에 아이를 가졌으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요한의 계시록} 제 12장

      사실 일합은 그다지 중요한 현상은 아니다. 그런데 BC 3세기 9월부터 다음해 6월 사이에 아주 드물고 천문학적으로 드믈고 불규칙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벌어진다. 바로 삼합(triple conjunction)이다. 천문도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항성을 배경으로 행성들이 계속 움직여가게 된다. 그런데 지구보다 바깥궤도에 위치하는 화성, 목성, 토성 등의 외행성들은 지구와 그 행성 간의 위치에 따라 어느 순간 한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돌연 멈춰서 반대방향으로 하늘을 가로질러가는 역전현상을 보여준다.

      BC 2-3년 상황이 그랬다. 제 1합이 관찰되고서 목성은 레굴루스와 한동안 만나지 않다가 목성의 위치가 반대로 바뀌면서 BC 2년 2월 말 경에 제 2합이 일어났다.


      (그림 6) 목성 역전시작  :BC 3년 11월 20일 밤 자정 무렵


      (그림 7) 목성-레굴루스 제 2합 : BC 2년 2월 20일 일몰 후

      2합이 있은 후 3달 정도가 지난 BC 2년 5월에는 목성이 궤도를 바꿔 다시 한번 더 레굴루스와 만나는 3합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점성학에서는 유의미한 메시지다.


      (그림 8) 목성 역전 시작 (좌에서 우) : BC 2년 3월 23일 일몰 후


      (그림 9) 목성-레굴루스 제 3합 : BC 2년 5월 5일 일몰 후

      바로 유대인의 달력상 신년이 시작되는 시점에 행성들의 왕과 항성들의 왕을 아우르는 존재가 유대아라는 지방에 태어난다는 3중의 메시지로 해석가능하다.

      이런 천체현상이 BC 3년에서 BC 2년까지 지속되는데,BC 2년 해 6월에는 또 하나의 유의미한 현상이 관측된다. 목성과 금성이 육안으로 식별불가능하게 근접해 하나의 밝은 별로 보이는 현상이다. 금성은 행성들의 어머니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수태 혹은 왕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림 10) 목성(Jupiter)와 금성(Venus)의 합 : BC 2년 6월 15일 – 17일밤 9시경

      이 이론에서는 동방박사(몇 명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는 BC 5월의 삼합현상까지 관찰한 후, 다시 이 금성과 목성의 합이 있은 BC 2년 6월에 여행을 시작한 것으로 설명한다.


      1.5.4. 베들레헴의 별

      카라반들의 일반적인 무역 루트를 따랐다면 바빌로니아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석 달 여행이다. 그럼 12월 중반에 도착했다고 치자. 예루살렘에서 동방박사들이 하늘에서 보았을 목성의 위치는 아래와 같다. 목성은 정동방향에서 처녀자리와 함께 떠오른다.


      (그림 11) BC 2년, 12월 25일 경, 일몰 후 지평선에 처녀자리와 함께 떠오르는 목성

      BC 2년 12월의 상황은 좀 특이하다. 그해 12월 23-25일 경, 사자의 머리쪽에서 몸쪽으로 내려오던 이 목성은 이 무렵부터 1월 초까지 그 위치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사자의 머리 쪽으로 이동해 간다. 따라서 이 무렵 실제로 목성이 천구에서 멈추어 선 것처럼 관측된다.

      목성-레굴루스의 삽합으로 '크리스마스의 별'을 설명하는 가설의 가장 큰 약점은 아마도 {마태복음서}에서 그 목성-레굴루스의 합에 대해 사용된 단어가 복수 (별들)가 아닌 단수(=별)란 점일 것이다. 물론 두 천체가 합쳐진 것을 하나의 '별'로 간주했을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또 하나의 약점은 아울러 {마태 복음서} 상에서 보면, 예루살렘에서 재출현한 그 "별"은 예루살렘~베들레헴까지는 동방박사를 "앞서 인도한 것 προάγω"으로 진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시점에 동방박사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들이 예루살렘에 출발한 지점이 헤롯의 궁전이 있던 예루살렘 서부의 현재 아르메니아인 구역이라면, 여기서 베들레헴의 방향은 목성과 처녀자리가 같이 떠오르는 동남쪽이 아니라 보다 서남쪽이기 때문이다.




      1.6. 믹달 에데르 מִגְדַּל־עֵדֶר

      예수가 동지 무렵의 겨울에 태어났을 수 없다는 비판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태어난 직후 그를 방문한 양치기들 이야기를 다루는 {루가의 복음서} 2장 내용을 그 근거로 한다.

      우선 원문을 읽어보자.

      8 καὶ ποιμένες ἦσαν ἐν τῇ χώρᾳ τῇ αὐτῇ ἀγραυλοῦντες καὶ φυλάσσοντες φυλακὰς τῆς νυκτὸς ἐπὶ τὴν ποίμνην αὐτῶν. 9 καὶ ἄγγελος κυρίου ἐπέστη αὐτοῖς καὶ δόξα κυρίου περιέλαμψεν αὐτούς, καὶ ἐφοβήθησαν φόβον μέγαν. 10 καὶ εἶπεν αὐτοῖς ὁ ἄγγελος, μὴ φοβεῖσθε, ἰδοὺ γὰρ εὐαγγελίζομαι ὑμῖν χαρὰν μεγάλην ἥτις ἔσται παντὶ τῶ λαῶ, 11 ὅτι ἐτέχθη ὑμῖν σήμερον σωτὴρ ὅς ἐστιν χριστὸς κύριος ἐν πόλει δαυίδ· 12 καὶ τοῦτο ὑμῖν τὸ σημεῖον, εὑρήσετε βρέφος ἐσπαργανωμένον καὶ κείμενον ἐν φάτνῃ. 13 καὶ ἐξαίφνης ἐγένετο σὺν τῶ ἀγγέλῳ πλῆθος στρατιᾶς οὐρανίου αἰνούντων τὸν θεὸν καὶ λεγόντων, 14 δόξα ἐν ὑψίστοις θεῶ καὶ ἐπὶ γῆς εἰρήνη ἐν ἀνθρώποις εὐδοκίας. 15 καὶ ἐγένετο ὡς ἀπῆλθον ἀπ᾽ αὐτῶν εἰς τὸν οὐρανὸν οἱ ἄγγελοι, οἱ ποιμένες ἐλάλουν πρὸς ἀλλήλους, διέλθωμεν δὴ ἕως βηθλέεμ καὶ ἴδωμεν τὸ ῥῆμα τοῦτο τὸ γεγονὸς ὃ ὁ κύριος ἐγνώρισεν ἡμῖν. 16 καὶ ἦλθαν σπεύσαντες καὶ ἀνεῦραν τήν τε μαριὰμ καὶ τὸν ἰωσὴφ καὶ τὸ βρέφος κείμενον ἐν τῇ φάτνῃ· 17 ἰδόντες δὲ ἐγνώρισαν περὶ τοῦ ῥήματος τοῦ λαληθέντος αὐτοῖς περὶ τοῦ παιδίου τούτου. 18 καὶ πάντες οἱ ἀκούσαντες ἐθαύμασαν περὶ τῶν λαληθέντων ὑπὸ τῶν ποιμένων πρὸς αὐτούς· 19 ἡ δὲ μαριὰμ πάντα συνετήρει τὰ ῥήματα ταῦτα συμβάλλουσα ἐν τῇ καρδίᾳ αὐτῆς. 20 καὶ ὑπέστρεψαν οἱ ποιμένες δοξάζοντες καὶ αἰνοῦντες τὸν θεὸν ἐπὶ πᾶσιν οἷς ἤκουσαν καὶ εἶδον καθὼς ἐλαλήθη πρὸς αὐτούς.

      그 근방 들에는 목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두루 비치면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다. 목자들이 겁에 질려 떠는 것을 보고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 때에 갑자기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그 천사와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천사들이 목자들을 떠나 하늘로 돌아간 뒤에 목자들은 서로 "어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 사실을 보자." 하면서 곧 달려가 보았더니 마리아와 요셉이 있었고 과연 그 아기는 구유에 누워 있었다. 아기를 본 목자들이 사람들에게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이야기하였더니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 일을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보고 한 것이 천사들에게 들은 바와 같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 한국어 공동번역 {루가 복음서} 2장 8-20절

      예수의 탄생장면에 등장하는 이 양치기들은 베들레헴 근방에서 양을 지키던 사람이었다. 비판의 논리는 유대아의 기후조건 상 동지 무렵에는 추위로 "들에서 양을 돌보는 것"은 힘들고, 따라서 (1) {루가 복음서}의 저자가 유대아의 기후조건에 무지한 자로서 이는 이 복음서가 조작된 것이란 방증이거나, 혹은 (2) 예수의 탄생이 동지 무렵이 아니란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이 이 비판의 골자다.

      예수의 탄생이 동지 무렵이란 진술과 {루가 복음서}의 기록은 과연 정말로 결정적으로 충돌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 베들레헴의 12월은 그렇게 춥지 않다. 비록 현대의 관측기록이긴 하지만 1948년부터 약 2002년까지의 기후자료를 보면 베들레헴의 12월의 기온은 최저 섭씨 6도, 최고 18도 사이를 기록했다. 이 지역에서는 11월에서 1월 사이에 비가 가장 많이 내리는데, 12월의 평균 강우량은 46.5mm로 7-10일 정도 비가 내렸다. 비록 BC/AD를 전후하는 시기의 정확한 12월 날씨를 알 수는 없겠지만, 현대와 아주 판이하게 날씨가 달랐다고 볼 이유는 없다. 따라서 서유럽이나 미국, 한국 등에서 생각하는 12월의 날씨로 베들레헴 지역의 날씨를 추정하는 것은 매우 무모한 일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점은 이 지역 낙농업에서 12월이 가지는 의미다. 복음서에는 목자들이 "밤을 새워 양떼를 지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래 인용한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의 축산학과 엡슈타인 교수의 글에도 지적되어 있듯이, 서남아시아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토종 양이면서, 현재도 이스라엘 지역에서 많이 키우는 양의 품종인 아와시 (Awassi)  양이 새끼를 낳는 시기는 (1) 이라크 지역에서는 11월이고, (2)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 지역에서는 12월에서 1월 사이다.  이 자료는 유엔농업식량기구의 웹싸이트에 올라와 있는 공식자료이다. (http://www.fao.org/docrep/010/p8550e/P8550E01.htm)가

      In an experimental flock in Leba­non, oestrus reached its peak with regular cycles in August and Septem­ber but was still maintained on a fairly high level until December; from January to April the heats markedly decreased in number, and from May to July they ceased altogether. The length of the oestrus cycle varied between 15 and 20 days, with an average of 18 days. The duration of heats ranged from 16 to 59 hours, with 29 hours on average. Nine per­cent of the heats were silent, as manifested by the occurrence of mul­tiple cycles, accompanied by the ab­sence of mating response (Barr, 1968). The Awassi ewe displays few outward signs of oestrus. Pro-oestrus is short and rather indefinite and the onset of oestrus abrupt, while the cessation is gradual. In Iraq, the principal lamb­ing season of Awassi ewes is in No­vember, and in Lebanon, the Syrian Arab Republic and Israel in Decem­ber-January.  --- H. Epstein, http://www.fao.org/docrep/010/p8550e/P8550E01.htm

      양들이 해마다 새끼를 낳을 때 양들을 우리 안에 넣어둘 수 없다. 새로 태어나는 새끼양들로 인해 우리가 비좁고 또 자칫하면 새끼양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목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켜야 하는 시점은 바로 양들의 번식기일 확률이 매우 높다. 따라서 목자들이 벌거벗고 있었거나 혹은 모닥불을 피울 줄도, 비를 피할 간이움막도 만들 줄 몰랐다면야 몰라도, 베들레헴의 12월이 춥고 비가 많이 와서 들에서 양을 절대 칠 수 없다는 생각은 현지 기후조건을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런 주장을 처음에 펼친 사람들이 (추워서 12월에 가축을 들에서 칠 수 없는) 중/고위도 서유럽인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설령 12월 성탄이 후대의 상상이라해도,  신의 "어린 양"이 태어났다는 상징적 의미는 아마도 12월-1월에 넘어가는 시기에 가장 잘 맞아 떨어질 지도 모른다.

      어쩌면 논쟁의 핵심은 여기 등장하는 목자들의 정체에 있을 수도 있다. 베들레헴 인근에는 이런 일반적인 부류의 목자들 말고 특별한 목자들이 상주하면서 성전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들을 사육하고 있었다. 이 동물들은 유대교 정결법에 따라 실내에서 키우지 못했다. 이 양치기들은 유대교의 제사장을 배출하는 레위 부족원으로 유월절/과월절에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제물로 바쳐지게 선택될 양들을 키우고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이들은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מגדּלה מגדּל  믹달 에데르 / 양떼의 망루'이란 건물에서 이 일을 수행했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유대교 희생제물의 준비과정에 대한 {미쉬나} 내용을 {바빌로니아 탈무드} Shekalim 7:4절을  통해 살펴보자.

      Babylonian Talmud, Book 2: Tracts Erubin, Shekalim, Rosh Hashana, tr. by Michael L. Rodkinson, [1918]

      CHAPTER VII.

      MISHNA: (a) If money is found between the chest marked "Shekalim" and that marked "voluntary offerings," it belongs to the chest marked "Shekalim" if it lies nearer to the same, and to the one marked "voluntary offerings" if it be nearer that. So also does it belong to the voluntary offerings if it be found midway between the two chests. Money found lying between the chests marked "wood" and "incense" belongs, if it be nearer the former, to the former; if nearer the latter to the latter, and also to the latter if found midway between the two. Money found lying between the chest marked "bird-offerings" and the one marked "doves" for whole-offerings belongs to the former if it be nearer the former; and if nearer the latter to the latter, and also to the latter if midway between the two. Money found between ordinary moneys and the moneys of the second tithes belongs, if nearer the former to the former; if nearer the latter to the latter, and also to the latter if found midway between the two. a1 The rule is: One must be guided by the proximity, even in the case of the less important; but in the event of equidistance, (one must be guided) by the greater importance (of the moneys).

      (b) Money found (in Jerusalem) on the place of the cattle-dealers is regarded as second tithe. b1 Money found on the Temple-mount  is ordinary. b2 Other money found in Jerusalem generally, during the festivals, is regarded as second tithe; at other times of the year as ordinary. b3

      (c) Meat found in the outer court (of the Temple) is considered whole-offering if in complete joints; if cut in pieces it is sin-offering. c1 Meat found in the city is considered peace-offering. c2 All such meat must be laid aside for putrefaction, and then be burned in the crematory. Meat found anywhere else in the land is prohibited (to be used) as carrion, if found in whole joints; if found cut in pieces, it may be eaten; and during the festivals, when a great deal of meat is on hand, even whole joints may be eaten. c3

      (d) Cattle found all the way from Jerusalem to Migdal Eder, and in the same vicinity in all directions, are considered, if male, as whole-offerings, and if female as peace-offerings. R. Jehudah says: "If they are fit for Passover-offerings they may be used for such purpose, providing Passover is not more than thirty days off." d1


      (d) (제물에 쓰일 / 필자 주) 동물은 예루살렘과 믹달 에데르 사이에 있는 지역에서 구해져야 한다. 수컷인 경우 번제로, 암컷의 경우 화목제로 드린다. 예후다 랍비는 말하길, "이 동물들이 유월절 제물로 드리기에 적절한 경우, 유월절로부터 30일 이내라면 이 동물들을 제물로 드릴 수 있다."라고 말한다.  / 번역: 최광민    

      (e) In former days, the finder of such cattle was pledged until he brought the drink-offerings belonging to such sacrifices; every finder, however, letting such cattle stand and going on his way, the high court decreed, that the costs of the drink-offerings belonging thereto be defrayed out of the public money.

      (f) R. Simeon says: Seven decrees were promulgated by that court, and the latter was one of them. Further: If a non-Israelite send whole-offerings with the necessary drink-offerings from over the sea, they are offered up; but if sent without the necessary drink-offerings, the costs of the latter are defrayed from public money. If, again, a proselyte died and left offerings, the drink-offerings, if also left by him, are offered up with the others; if not left, the costs of same are defrayed out of public money. It was also a decree of the court, that in the event of a high priest dying, the necessary meat-offering [Leviticus vi. 13] should be paid for out of the public treasury. R. Jehudah, however, declared, that this should be done at the expense of the heirs. In both cases a tenth of an ephah should be offered.

      (g) Further, that the priests may (at the sacrificial meals) make use of the salt and the wood (from the sanctuary); that the priests do not commit a breach of trust when misusing the ashes of the red heifer g1; lastly, that the public treasury reimburse for paid bird-offerings that had become unfit. g2 R. Jose, however, says: "He who contracts for the furnishing of the bird-offerings must reimburse for the spoilt."   --- Babylonian Talmud, Book 2: Tracts Erubin, Shekalim, Rosh Hashana, tr. by Michael L. Rodkinson, [1918]

      베들레헴 근방의 이 지명은 {창세기}에서 야곱이 두번째 아내 라헬의 장례를 지내는 이야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라헬이 죽으니, 사람들은 그를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가에다가 묻었다. 야곱이 라헬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오늘날까지도 이 묘비가 라헬의 무덤을 가리키고 있다.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서, 에델 망대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장막을 쳤다.  --- 한국어 새번역, {창세기} 35:19-21

      이 망루는 메시아의 도래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가령 구약성서 {미가}는 이 '믹달 에데르'와 예루살렘/베들레헴을 긴밀히 연결하고 있다.

      8 ‏וְאַתָּ֣ה מִגְדַּל־עֵ֗דֶר עֹ֛פֶל בַּת־צִיּ֖וֹן עָדֶ֣יךָ תֵּאתֶ֑ה וּבָאָ֗ה הַמֶּמְשָׁלָה֙ הָרִ֣אשֹׁנָ֔ה מַמְלֶ֖כֶת לְבַ֥ת־יְרוּשָׁלִָֽם׃

      8 καὶ σύ πύργος ποιμνίου αὐχμώδης θύγατερ Σιων ἐπὶ σὲ ἥξει καὶ εἰσελεύσεται ἡ ἀρχὴ ἡ πρώτη βασιλεία ἐκ Βαβυλῶνος τῇ θυγατρὶ Ιερουσαλημ

      8 Et tu, turris gregis nebulosa filiæ Sion, usque ad te veniet,et veniet potestas prima,regnum filiæ Jerusalem.

      양떼를 지키던 망대 (=믹달 에데르), 언덕에 자리잡은 수도 시온(=예루살렘), 네가 잃었던 주권을 도로 찾으리라. 수도 예루살렘의 국권을 되찾으리라.  --- 한국어 공동번역, {미가} 4:8

      καὶ σύ Βηθλεεμ οἶκος τοῦ Εφραθα ὀλιγοστὸς εἶ τοῦ εἶναι ἐν χιλιάσιν Ιουδα ἐκ σοῦ μοι ἐξελεύσεται τοῦ εἶναι εἰς ἄρχοντα ἐν τῷ Ισραηλ καὶ αἱ ἔξοδοι αὐτοῦ ἀπ᾽ ἀρχῆς ἐξ ἡμερῶν αἰῶνος. 2 διὰ τοῦτο δώσει αὐτοὺς ἕως καιροῦ τικτούσης τέξεται καὶ οἱ ἐπίλοιποι τῶν ἀδελφῶν αὐτῶν ἐπιστρέψουσιν ἐπὶ τοὺς υἱοὺς Ισραηλ

      [Et tu, Bethlehem Ephrata,parvulus es in millibus Juda; ex te mihi egredietur qui sit dominator in Israël, et egressus ejus ab initio, a diebus æternitatis. 3 Propter hoc dabit eos usque ad tempus in quo parturiens pariet, et reliquiæ fratrum ejus convertentur ad filios Israël.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것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두시리라. 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면, 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야훼의 힘을 입고 그 하느님 야훼의 드높은 이름으로 목자 노릇을 하리니, 그의 힘이 땅 끝까지 미쳐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 --- 한국어 공동번역, {미가} 5:2-3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에서 고향에 돌아온 무렵의 내용을 담은 구약성서 {느헤미아}의 3장에 보면, BC 586년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드 (=느브갓네살)이 파괴한 예루살렘 성벽의 성문들을 재건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때 총독으로 부임된 느헤미아가 대제사장 엘리아쉽에게 재건을 맡긴 첫번째 문이 '양문(=the sheep gate)였다.



      왜 '양문'인가?

      이 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장 가까운 성문이었고, 따라서 제사장들과 레위부족이 종교적 의례를 행할 때 주로 사용한 문이었다. 특별히 니산달 10일에 대제사장이 이 양문을 통해 베들레헴에 있는 믹달 에데르에 가서 유월절 희생제물로 쓸 흠없는 양을 골라오게 된다. 양을 골라서 대제사장이 예루살렘 성안으로 되돌아오는 문도 역시 양문이다. 이때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4일 후 희생될 이 특별한 양을 축제 분위기로 맞이하는데, 대제사장을 따르면서 "주님(=야훼)의 이름으로 오는 분에게 축복을!"이란 특별한 시편을 부른다.

      예수의 처형이 집행된 그 마지막 주간, {요한 복음서} 12:12에 따르면 바로 그 니산월 10일에 예수 역시 당나귀를 타고 양문을 통과해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그를 따르던 자들은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 찬미받으소서!" 라고 외쳤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 장면이 '유월절 희생제물로 온 어린 양 예수'에 대한 예언의 성취였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정말 예언의 성취였을까? 아니면 예수의 자작극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복음서 기록자의 조작일까? 아무튼 예수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티프는 이 점에서 상당한 일관성을 보인다. 그는 (어린) 양으로 태어나 (유월절 희생제물로) 사람들을 대신해 죽은 것이다.


      Alfred Edersheim, {The 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
      https://www.archive.org/stream/lifeandtimesjes02edergoog

      ...But as we pass from the sacred gloom of the cave [i.e., he was just talking about the birth of Jesus in a cave] out into the night, its sky all aglow with starry brightness, its loneliness is peopled, and its silence made vocal from heaven. There is nothing now to conceal, but much to reveal, though the manner of it would seem strangely incongruous to Jewish thinking. And yet Jewish tradition may here prove both illustrative and helpful. That the Messiah was to be born in Bethlehem, was a settled conviction. Equally so was the belief, that He was to be revealed from Migdal Eder, “the tower of the flock.” This Migdal Eder was not the watchtower for the ordinary flocks which pastured on the barren sheep ground beyond Bethlehem, but lay close to the town, on the road to Jerusalem. A passage in the Mishnah leads to the conclusion, that the flocks, which pastured there, were destined for Temple-sacrifices, and, accordingly, that the shepherds, who watched over them, were not ordinary shepherds. The latter were under the ban of Rabbinism, on account of their necessary isolation from religious ordinances, and their manner of life, which rendered strict legal observance unlikely, if not absolutely impossible. The same Mishnaic passage also leads us to infer, that these flocks lay out all the year round, since they are spoken of as in the fields thirty days before the Passover—that is, in the month of February, when in Palestine the average rainfall is nearly greatest. Thus, Jewish tradition in some dim manner apprehended the first revelation of the Messiah from that Migdal Eder, where shepherds watched the Temple-flocks all the year round. Of the deep symbolic significance of such a coincidence, it is needless to speak.... --—Alfred Edersheim, The 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 pp. 186-87

      [전략]...이 '믹달 에데르'는 베들레헴 너머에서 방목하는 일반적인 양떼를 치기 위해 사용되는 감시탑 같은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에 인접해 있으며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에 있었다. {미쉬나}의 구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거기서 방목되는 양들은 성전제사용으로 길러지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 양을 치는 목자들  역시 일반적인 목자들은 아니었다....[중략]....{미쉬나}에 따라 추론해본다면, 이 양때는 일년 내내 밖에서 키운 것으로 보이는데, 규정에 따르면 유월전 전 30일은 들판에서 키워져야 했다. 다시 말해서 2월을 말한다. 이때 팔레스타인의 평균 강우량은 연중 최고이다..... 알프레드 에델샤임, {메시아 예수의 삶과 시대} / 번역: 최광민 

      아울러, 만약 {복음서} 속의 목자들이 바로 이 믹달 에데르와 연관된 자들이라면, 이들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 (낮고 비천한)는 아마도 다소 수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한 자료부족으로 이들 목자들의 정체를 확정할 방법은 없다.




      1.7.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서력기원 계산법 

      1.7.1.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

      소 -스키티아 (오늘날의 루마니아-불가리아 지역) 출신의 수도사이자 학자인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 (AD 470-544)는 AD 500년 무렵에 로마에 와서 로마교회를 위해 일하게 되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숙한 그는 그리스어로 된 교회법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 특별히 지난 세기에 있었던 니케아 회의, 칼케돈, 사르디스 회의 결의문 및 사도헌장들을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수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수학에 관련된 소논문들을 몇 편 남겼는데, 당시 로마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수도사로 불렸다.

      종종 그가 "크리스마스의 날짜를 12월 25일로 정했다"는 식의 오해를 접하게 되는데, 사실 그는 크리스마스의 날짜를 언급한 적이 없다. 그의 목표는 연대를 계산하는 것이지 날짜를 특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진 두번째 오해는, 그의 목적이 예수의 탄생연도를 계산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일차적 목표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한 일은 당시에 사용되고 있던 부활절 산정방식 중 (로마식, 알렉산드리아식), 더 정확하다고 판단된 알렉산드리아 방식을 이용해서 앞으로의 부활절 날짜를 산출하는 일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조금 후에 설명하겠다.

      흔히들 서력기원 (Anno Domini)을 처음 제안한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AD 원년의 연대를 계산할 때 실수를 해서 적어도 4년이 빠졌으며, 따라서 예수의 실제 탄생은 BC 4년 이전 (아마도 BC 6-8년)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이것은 현재 역사학계의 "정설"이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이 정설이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 진다. 정말로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계산의 착오를 범했다면, 도대체 그는 어디서 잘못을 범했던 것일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의 "정설"이 무슨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학자들 역시 도대체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어디서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가 참조한 자료에 문제가 있었던 건지 혹은 그가 단순히 계산을 잘못한 것인 지에 대해 모른다는 뜻이다. 저 정설은 사실은 추론이다.

      그럼 어디서 그가 4년(혹은 그 이상)을 빼먹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일까?

      결국 이것은 제 3부에 쓸 것 처럼 헤롯대왕의 사망연도를 어떻게 정하는가에 달린 문제다. 즉, 이 논리는 (1)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AD 원년이 통상적인 표준연표 속의 헤롯의 사망연도보다 4년 후이기 때문에 (2)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서력기원 계산법이 틀렸다는 말과 동일하다.

      물론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사용한 자료가 부정확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사실 그의 시스템에 따른 서력기원 원년 (AD 1년)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에 일반적으로 제안하던 BC 3/2년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시스템에서 AD 1년은 예수가 탄생한 해일 수도 있고, 예수가 태어난 바로 직후의 해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시스템에서의 1월 1일은 예수의 탄생일에 맞춘 것이 아니라, 로마달력 (율리우스력)의 신년 1월 1일에 맞춘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AD 1년의 바로 전 해를 BC 1년으로 하는 방식은 (즉, 0년이 없는), AD 8세기 영국의 수도사/역사가 베데/Bede가 도입했다. 현대 천문학자들은 이것 대신 0년 개념을 도입해서, AD 1년은 +1로, BC 1년은 0으로, 그리고 BC 2년은 -1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 시스템은 18세기의 천문학자 카시니가 1740년에 도입한 것이다. 천문학에서 사용되는 또 다른 방식은 1583년 Joseph Justus Scaliger가 제안한 방법이다. 그 당시에는 이미 서력기원이 있었음에도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군주의 집권일을 기준으로 하는 연호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 결과 역사를 기록하다보면 이 방식에 따른 연표가 모자이크처럼 되어 곤란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는 과거의 어떤 절대시점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연대표기법을 도입했다. 그는 28년주기, 19년주기, 그리고 15년주기를 함께 사용했다. 28년주기는 태양주기로 율리우스력에서 요일과 날짜가 정확하게 반복되는 주기이고, 19년주기는 달의 삭망패턴이 달력의 날짜에 (거의 정확히) 맞춰지는 주기이며, 마지막으로 15년주기는 로마의 징세주기였다. 이 시스템에서 어떤 한 해는 (S, G, I)의 조합으로 표기할 수 있다 (S=1~28, G=1~19, I=1~15). 이 세 주기가 겹치는 것은 28*19*15 = 7980년이 되는데, 바로 이 주기가 율리우스 주기/Julian Period가 되며, 이 시스템에 따른 원년은 (1,1,1)로 표기된다. 이 해는 BC 4713년 혹은 -4712년이다.




      1.7.2. 서력기원, Anni Domini Nostri Jesu Christi

      그럼,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제시한 서력기원 원년 계산법을 정리해 보자.

      그는 AD 457년 아퀴텡의 빅토리우스 (Victorius of Aquitaine)가 작성한 로마식의 부활절 산정표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방식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작성되고 서방교회에도 잘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방식의 부활절 산정표를 기준으로 정확한 부활절 날짜를 계산해 나갔다. AD 311년 무렵부터 이집트 꼽트 교회가 사용하던 이 방식은, 라틴교회에서는 부활절을 계산하는데 사용되지 않았지만, 꼽트교회와 동방교회에서는 계속 사용되고 있었다.

      로마에 알려진 라틴어 버전의 이 알렉산드리아식 산정표는 AD 444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의 비서였던 테오필로스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연표에 맞춰진 5번의 19년주기 (95년)가 기록되어 있다. 그 첫 연도는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ANNI DIOCLETIANI) 285년 후인 해이다. 그는 이 산정표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228-247년 간의 19년 주기를 이용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즉위연도에 맞춘 이 방식은 계산하기에 편리했는데, 연도들을 19로 나누게 될때 생기는 나머지값이 19년주기의 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이 부활절 산정표가 기독교를 가장 박해했던 로마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집권 (ANNI DIOCLETIANI)을 기준해서 표기되는 것이 영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ANNI DIOCLETIANI" 248년이 되던 해부터의 부활절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ANNI DOMINI NOSTRI JESU CHRISTI" 532년으로 표기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가 생각한 예수 탄생의 시점을 "간접적으로" 소급해볼 수 있다.

      라틴어/영어 원문과 자세한 주석은 아래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ccel.org/ccel/pearse/morefathers/files/dionysius_exiguus_easter_01.htm




      1.7.3. 문제는?

      사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계산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부활절 계산에서 오류를 범했다고 볼 이유는 거의 없다. 진짜 주목해야 할 문제는 그가 제시한 디오클레티아누스/예수의 비교연표에 있다. 그의 방식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229년"이 "예수로부터 513년"이 되는데, "예수로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까지의 이 기간을 어떻게 산출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그가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집권기간을 살펴보면 왜 이 문제가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는 AD 284년 11월 20일에 집권했고 AD 286년 4월 1일까지는 단독집권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AD 305년 5월 1일까지는 동서로 분할한 제국 가운데 동부를 맡아 아우구스투스로 다스렸다. (서부는 막시미니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서 지배했다.)

      여기서 우선 몇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예수로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까지의 기간을 무엇을 (즉, 문헌, 역법) 근거로 계산했는가?
      •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어떤 집권일"을 기준으로 당시의 부활절을 계산했는가?
      • 예수의 "무엇을" 계산의 기준점으로 삼았는가?

      제 3부에서 다룰 표준연표에 따른 헤롯대왕의 사망연도를 기준으로 하는 불일치는 별도로 하고, 왜 그의 방식은 다른 기독교 교부들의 일반적으로 계산해 오던 예수탄생의 연도와도 2-3년의 오차를 보일까? 이 오차는 그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두가지 집권연도를 혼동한 결과일까? 아니면 그가 사용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의 다른 연표에 오차가 있었던 걸까?

      아무튼 그는 자신이 편지를 기록한 AD 525년과 로마의 연표를 아래와 같이 일치시킨다.

      "...The nineteen year cycle begins, which the Greek call Enneakaidekaeterida (nineteen yearly), established by the holy [Church] Fathers, in which you shall find fourteen paschal[ moon]s each time without error; you shall just bear in mind, in each of the years, which cycle of the moon and which nineteen year [cycle] prevails. In the present [year], in the consulship of Probus Junior, it is the thirteenth of the nineteen year cycle, and the tenth lunar one..."






      2부: 아우구스투스의 포고령

      전편에서는 크리스마스의 날짜를 정하게 된 종교적/역사적 기원과, BC 3/2년 무렵에 일어난 특별한 천체현상인 3합에 대해 다뤘다. 이번에는 BC 3/2년이 로마제국에서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다루겠다.

      이 문제는 예수의 탄생년도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는 헤롯대왕의 사망시점을 정하는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사실 기독교 교부들의 기록들은 BC 3/2년을 예수의 탄생시점으로 설명하는 반면, 헤롯대왕의 사망을 기원년 4년으로 잡는 표준연표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BC 4년 이전으로 잡아야 한다.

      헤롯대왕의 사망연도는 아직도 여전히 논쟁거리며, 이에 대해서는 3부에서 다루겠다. 이 글에서는 전편에 이어 BC 3/2년을 예수가 탄생한 유력한 시점으로 잡겠다. 사실 BC 10년 - AD 1년 가운데 여러가지 가장 극적인 장면이 벌어지는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

      정통파 교회가 인준한 네 권의 {복음서} 가운데서 예수의 탄생 전후의 일화를 가장 자세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은 {누가/루가의 복음서}다. 전통적으로 바울의 제자이자 의사였던 안티오키아 출신의 시리아인 누가/루가가 기록한 것이라고 여겨져온 이 {복음서}의 저자는, 이 기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면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임을 이 문서의 첫 머리에서 강조한다. 이 {누가/루가복음서}는 테오필로스에게 헌정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첫 대목을 읽어보자 ( 한국어 {공동번역}).

      존경하는 데오필로님,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그 일들을 글로 엮는 데 손을 댄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이 쓴 것은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사실 그대로입니다.  저 역시 이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 둔 바 있으므로 그것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각하께 써서 보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하오니 이 글을 보시고 이미 듣고 배우신 것들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 한국어 {루가의 복음서, 공동번역}

      이 점을 우선 염두에 두고 자료들을 검토해 보자.


      Augustus of Prima Porta, statue of the emperor Augustus in Museo Chiaramonti, Vatican, Rome. (source: Wikimedia Commons)



      2.1.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

      {누가/루가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의 일대기에 대해 자신 이전의 여러 사람들이 정리를 시도했었고, 자신 역시 자세히 조사해서 복음서를 엮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 그가 기록해 남긴 내용은 얼마나 정확할까?

      1 ἐγένετο δὲ ἐν ταῖς ἡμέραις ἐκείναις ἐξῆλθεν δόγμα παρὰ καίσαρος αὐγούστου ἀπογράφεσθαι πᾶσαν τὴν οἰκουμένην. 2 αὕτη ἀπογραφὴ πρώτη ἐγένετο ἡγεμονεύοντος τῆς συρίας κυρηνίου. 3 καὶ ἐπορεύοντο πάντες ἀπογράφεσθαι, ἕκαστος εἰς τὴν ἑαυτοῦ πόλιν. 4 ἀνέβη δὲ καὶ ἰωσὴφ ἀπὸ τῆς γαλιλαίας ἐκ πόλεως ναζαρὲθ εἰς τὴν ἰουδαίαν εἰς πόλιν δαυὶδ ἥτις καλεῖται βηθλέεμ, διὰ τὸ εἶναι αὐτὸν ἐξ οἴκου καὶ πατριᾶς δαυίδ, 5 ἀπογράψασθαι σὺν μαριὰμ τῇ ἐμνηστευμένῃ αὐτῶ, οὔσῃ ἐγκύῳ. 

      그 무렵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다. 이 첫번째 호구 조사를 하던 때 시리아에는 퀴리노라는 사람이 총독으로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등록을 하러 저마다 본고장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갔다. 베들레헴은 다윗 왕이 난 고을이며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 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루가의 복음서} 2장

      이 진술에는 세가지 "역사적인 단서"들이 등장한다. (1) "아우구스투스" 때 전 제국에서 시행된 "호구조사령", (2) "첫번째" 호구조사령을 관할한 "시리아 총독 퀴리노 (퀴리니우스), 그리고 (3) "호구조사령" 혹은 "등록"이 그것들이다.

      예수를 허구적인 인물로 간주하지 않는 한, 예수가 태어난 무렵이 로마의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시절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그 무렵 "온 로마제국"에서 시행했다는 "호구조사령" 혹은 "등록"의 정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그런데 아마도 위에 인용된 4절 가운데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제 2절에 등장하는 퀴리니우스의 당시 행적과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루가 복음서}는 그가 당시에 "시리아 총독"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비슷한 무렵에 씌여진 보다 공식적인 역사기록인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는 "징세를 목적으로 한"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의 센서스는 AD 6년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탄생을 BC 2/3년으로 보는 전통적인 교부들의 연표와 BC 4년으로 보는 현대의 표준연표에 따르더라도 8-10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혹자는 {복음서}의 '퀴리니우스'는 '퀸틸리우스 (바루스)'의 오기라고 보기도 한다.)

      요세푸스를 인용한다.

      Κυρίνιος δὲ τῶν εἰς τὴν βουλὴν συναγομένων ἀνὴρ τάς τε ἄλλας ἀρχὰς ἐπιτετελεκὼς καὶ διὰ πασῶν ὁδεύσας ὕπατος γενέσθαι τά τε ἄλλα ἀξιώματι μέγας σὺν ὀλίγοις ἐπὶ Συρίας παρῆν, ὑπὸ Καίσαρος δικαιοδότης τοῦ ἔθνους ἀπεσταλμένος καὶ τιμητὴς τῶν οὐσιῶν γενησόμενος, [2] Κωπώνιός τε αὐτῷ συγκαταπέμπεται τάγματος τῶν ἱππέων, ἡγησόμενος Ἰουδαίων τῇ ἐπὶ πᾶσιν ἐξουσίᾳ. παρῆν δὲ καὶ Κυρίνιος εἰς τὴν Ἰουδαίαν προσθήκην τῆς Συρίας γενομένην ἀποτιμησόμενός τε αὐτῶν τὰς οὐσίας καὶ ἀποδωσόμενος τὰ Ἀρχελάου χρήματα. [3] οἱ δὲ καίπερ τὸ κατ᾽ ἀρχὰς ἐν δεινῷ φέροντες τὴν ἐπὶ ταῖς ἀπογραφαῖς ἀκρόασιν ὑποκατέβησαν τοῦ μὴ εἰς πλέον ἐναντιοῦσθαι πείσαντος αὐτοὺς τοῦ ἀρχιερέως Ἰωαζάρου, Βοηθοῦ δὲ οὗτος υἱὸς ἦν. καὶ οἱ μὲν ἡττηθέντες τοῦ Ἰωαζάρου τῶν λόγων ἀπετίμων τὰ χρήματα μηδὲν ἐνδοιάσαντες: --- {Antiquities} 18.1.1

      Now Cyrenius, a Roman senator, and one who had gone through other magistracies, and had passed through them till he had been consul, and one who, on other accounts, was of great dignity, came at this time into Syria, with a few others, being sent by Caesar to be a judge of that nation, and to take an account of their substance. Coponius also, a man of the equestrian order, was sent together with him, to have the supreme power over the Jews. Moreover, Cyrenius came himself into Judea, which was now added to the province of Syria, to take an account of their substance, and to dispose of Archelaus's money;  --- Josephus, Antiquities, Flavius Josephus. The Works of Flavius Josephus. Translated by. William Whiston, A.M. Auburn and Buffalo. John E. Beardsley. 1895. 18.1.1

      로마 원로원 의원인 퀴리니우스는 나중에 콘술이 될때까지 여러가지 다른 공직을 거쳤고, 다른 자료에 따르면 매우 위엄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카이사르에 의해 그 곳 (시리아)의 제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법관으로 발령받아 몇몇 사람들과 함께 시리아에 부임했다. 기사계급의 코포니우스가 함께 발령받았는데, 그는 유대아 일대를 치리하는 전권을 부여받은 관리가 되었다. 퀴리니우스는 당시 시리아에 병합된 유대아의 제반문제를 처리하고, 헤롯 아켈라오스의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 직접 유대아로 내려왔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8.1.1 / 번역: 최광민

      루가를 요세푸스보다 더 공식적인 역사가로 볼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 역시 루가는 자료를 수집/정리할 때 연대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물론 그의 {복음서}를 그저 일반문서라고 본다면 기독교도들이 그다지 이 문제에 대해 민감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를 "영감받은 문서"로 간주하게 될 경우, 이 문제는 매우 껄끄러운 문제가 되어버린다. 만약 루가가 공식적인 역사기록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저질렀다면, 나머지 기록은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를 언급하는 제 2절을 필사오류 혹은 필사자에 의한 첨삭이라고 보는 설은 일단은 배제하도록 하겠다.

      우선 코이네 그리스어로 작성된 {복음서}에 등장하는 로마관리의 표기는 로마식 호칭과 1:1 대응이 되지않는다는 점부터 먼저 설명해보자.

      가령, 우리말로는 "총독"에 대응하는 라틴어는 '프로큐라토르' 혹 '프리펙투스' (빌라도의 경우)이거나 혹은 레가투스 (시리아 총독)이다. 이들 행정관에 대한 우리말 번역은 로마관리의 위계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 {복음서} 역시 "통치자/governor"란 일반적 단어인 그리스어 ἡγεμών를 사용해 "상급관리"를 모두 표현한다. 뒤에 등장할 퀴리니우스는 {복음서}에서는 ἡγεμονεύοντος τῆς συρίας hegemoneuontos tes Surias로 표현된다. "시리아 총괄지휘관"에 해당한다. 요세푸스의 경우, 유대아에 파견되는 로마관리들은 ἐπίτροπος 혹은, 특별히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경우 ἡγεμών ("Ant." xviii. 3, § 1)을 사용하며, 폰티우스 필라투스 이전의 유대아 군사담당관들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용어를 적용시킨다. 아켈라오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δικαιοδότης (=법관)으로 임명받은 퀴리니우스와 함께 유대아에 파견된 기사계급의 코포니우스의 역할은 "ἡγησόμενος Ἰουδαίων τῇ ἐπὶ πᾶσιν ἐξουσίᾳ" (=유대아 지역 전권대사)로 표현된다.

      [55] Πιλᾶτος δὲ ὁ τῆς Ἰουδαίας ἡγεμὼν στρατιὰν ἐκ Καισαρείας ἀγαγὼν καὶ μεθιδρύσας χειμαδιοῦσαν ἐν Ἱεροσολύμοις ἐπὶ καταλύσει τῶν νομίμων τῶν Ἰουδαϊκῶν ἐφρόνησε, προτομὰς Καίσαρος, αἳ ταῖς σημαίαις προσῆσαν, εἰσαγόμενος εἰς τὴν πόλιν, εἰκόνων ποίησιν ἀπαγορεύοντος ἡμῖν τοῦ νόμου. [56] καὶ διὰ τοῦτο οἱ πρότερον ἡγεμόνες ταῖς μὴ μετὰ τοιῶνδε κόσμων σημαίαις ἐποιοῦντο εἴσοδον τῇ πόλει. πρῶτος δὲ Πιλᾶτος ἀγνοίᾳ τῶν ἀνθρώπων διὰ τὸ νύκτωρ γενέσθαι τὴν εἴσοδον ἱδρύεται τὰς εἰκόνας φέρων εἰς τὰ Ἱεροσόλυμα.....

      [55] BUT now Pilate, the procurator of Judea, removed the army from Cesarea to Jerusalem, to take their winter quarters there, in order to abolish the Jewish laws. So he introduced Caesar's effigies, which were upon the ensigns, and brought them into the city; whereas our law forbids us the very making of images; on which account the former procurators were wont to make their entry into the city with such ensigns as had not those ornaments..... --- Flavius Josephus. The Works of Flavius Josephus. Translated by. William Whiston, A.M. Auburn and Buffalo. John E. Beardsley. 1895. 18.3.1

      유대아 총독 필라투스가 겨울철 주둔지로 삼고 또 유대인들의 율법을 철폐하기 위해 카이사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는 황제의 초상을 군단기장에 설치되어있던 황제의 초상들을 예루살렘 안으로 들여왔는데, 우리의 율법은 사람을 그림/조상으로 묘사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던 바였다. 그래서 전임 총독들은 그런 형상이 설치된 기장을 들고 도시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었다....[후략]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3.1 / 번역: 최광민

      아래는 BC 10년에서 AD 4년까지의 "표준"연표에 따르는 시리아 총독/레가투스의 재임기간이다. 이 글에서 관심이 되는 BC 4-1년 간의 총독이 누구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표준연표에 대해서는 제 3부에서 다루겠다.)

      1. Marcus Titius (BC 13/12년 - BC 10/9)
      2. Gaius Sentius Saturninus (BC 10/9 - BC 7/6)
      3. Publius Quinctilius Varus (BC 7/6 -BC 4년)
      4. 불분명 (BC 4년 - BC 1년)  Lucius Calpurnius Piso?????
      5. Gaius Julius Caesar Vipsanianus (BC 1년 - AD 4년)
      6. Lucius Volusius Saturninus (AD 4-5년)

      우선, 퀴리니우스의 "센서스"가 AD 6/7년에 있었다는 요세푸스의 기록 (http://www.sacred-texts.com/jud/josephus/ant-18.htm)을 확인해 보자. 요세푸스는 이 시점을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를 패배시킨 해로부터 37년 후라고 진술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표준연표에 따르면 AD 6/7년이 된다.

      인용한다.

      "... WHEN Cyrenius had now disposed of Archelaus's money, and when the taxings were come to a conclusion, which were made in the thirty-seventh year of Caesar's victory over Antony at Actium, he deprived Joazar of the high priesthood, which dignity had been conferred on him by the multitude, and he appointed Ananus, the son of Seth, to be high priest; while Herod and Philip had each of them received their own tetrarchy, and settled the affairs thereof. Herod also built a wall about Sepphoris, (which is the security of all Galilee,) and made it the metropolis of the country. He also built a wall round Betharamphtha, which was itself a city also, and called it Julias, from the name of the emperor's wife. When Philip also had built Paneas, a city at the fountains of Jordan, he named it Cesarea. He also advanced the village Bethsaids, situate at the lake of Gennesareth, unto the dignity of a city, both by the number of inhabitants it contained, and its other grandeur, and called it by the name of Julias, the same name with Caesar's daughter...." --- {Antiquities} 18.2.1

      Κυρίνιος δὲ τῶν εἰς τὴν βουλὴν συναγομένων ἀνὴρ τάς τε ἄλλας ἀρχὰς ἐπιτετελεκὼς καὶ διὰ πασῶν ὁδεύσας ὕπατος γενέσθαι τά τε ἄλλα ἀξιώματι μέγας σὺν ὀλίγοις ἐπὶ Συρίας παρῆν, ὑπὸ Καίσαρος δικαιοδότης τοῦ ἔθνους ἀπεσταλμένος καὶ τιμητὴς τῶν οὐσιῶν γενησόμενος, [2] Κωπώνιός τε αὐτῷ συγκαταπέμπεται τάγματος τῶν ἱππέων, ἡγησόμενος Ἰουδαίων τῇ ἐπὶ πᾶσιν ἐξουσίᾳ. παρῆν δὲ καὶ Κυρίνιος εἰς τὴν Ἰουδαίαν προσθήκην τῆς Συρίας γενομένην ἀποτιμησόμενός τε αὐτῶν τὰς οὐσίας καὶ ἀποδωσόμενος τὰ Ἀρχελάου χρήματα. [3] οἱ δὲ καίπερ τὸ κατ᾽ ἀρχὰς ἐν δεινῷ φέροντες τὴν ἐπὶ ταῖς ἀπογραφαῖς ἀκρόασιν ὑποκατέβησαν τοῦ μὴ εἰς πλέον ἐναντιοῦσθαι πείσαντος αὐτοὺς τοῦ ἀρχιερέως Ἰωαζάρου, Βοηθοῦ δὲ οὗτος υἱὸς ἦν. καὶ οἱ μὲν ἡττηθέντες τοῦ Ἰωαζάρου τῶν λόγων ἀπετίμων τὰ χρήματα μηδὲν ἐνδοιάσαντες: --- {Antiquities} 18.1.1

      "...NOW Cyrenius, a Roman senator, and one who had gone through other magistracies, and had passed through them till he had been consul, and one who, on other accounts, was of great dignity, came at this time into Syria, with a few others, being sent by Caesar to he a judge of that nation, and to take an account of their substance. Coponius also, a man of the equestrian order, was sent together with him, to have the supreme power over the Jews. Moreover, Cyrenius came himself into Judea, which was now added to the province of Syria, to take an account of their substance, and to dispose of Archelaus's money; but the Jews, although at the beginning they took the report of a taxation heinously, yet did they leave off any further opposition to it, by the persuasion of Joazar, who was the son of Beethus, and high priest; so they, being over-pesuaded by Joazar's words, gave an account of their estates, without any dispute about it. Yet was there one Judas, a Gaulonite, (1) of a city whose name was Gamala, who, taking with him Sadduc, (2) a Pharisee, became zealous to draw them to a revolt, who both said that this taxation was no better than an introduction to slavery, and exhorted the nation to assert their liberty; as if they could procure them happiness and security for what they possessed, and an assured enjoyment of a still greater good, which was that of the honor and glory they would thereby acquire for magnanimity ..." --- {Antiquities} 18.1.1

      요세푸스에 따르면 시리아 총독 / 레가투스 퀴리니우스는 AD 6/7년 사이에 징세용 센서스/등록 (역시 ἀπογραφαῖς)를 했다. 이것은 {루가/누가 복음서}에 이어지는 누가/루가의 또 다른 기록인 {사도행전} 5장 37절에 등장하는 호구조사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36 πρὸ γὰρ τούτων τῶν ἡμερῶν ἀνέστη θευδᾶς, λέγων εἶναί τινα ἑαυτόν, ᾧ προσεκλίθη ἀνδρῶν ἀριθμὸς ὡς τετρακοσίων· ὃς ἀνῃρέθη, καὶ πάντες ὅσοι ἐπείθοντο αὐτῶ διελύθησαν καὶ ἐγένοντο εἰς οὐδέν. 37 μετὰ τοῦτον ἀνέστη ἰούδας ὁ γαλιλαῖος ἐν ταῖς ἡμέραις τῆς ἀπογραφῆς καὶ ἀπέστησεν λαὸν ὀπίσω αὐτοῦ· κἀκεῖνος ἀπώλετο, καὶ πάντες ὅσοι ἐπείθοντο αὐτῶ διεσκορπίσθησαν.

      ... 이전에 튜다가 나타나 자기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하자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니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자취도 없이 다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뒤 호구 조사 (ἀπογραφή / 등록)를 하던 때에도 갈릴래아 사람 유다 (혹은 가말라의 유다)가 나타나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한 일이 있었지만 그가 죽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 {사도행전} 5:37 (공동번역)



      이에 대해서는 요세푸스도 유사한 기록을 남겼다.

      우선 튜다에 대한 진술이다. 요세푸스가 기록하는 이 인물은 AD 46년에 죽었으므로 {사도행전}의 그 "튜다"일 수 없다. 이것이 요세푸스 혹은 {사도행전}의 저자, 혹은 {사도행전} 속 화자인 바리사이파의 지도자 가말리엘의 착오인지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논란이 있다.

      1. NOW it came to pass, while Fadus was procurator of Judea, that a certain magician, whose name was Theudas, persuaded a great part of the people to take their effects with them, and follow him to the river Jordan; for he told them he was a prophet, and that he would, by his own command, divide the river, and afford them an easy passage over it; and many were deluded by his words. However, Fadus did not permit them to make any advantage of his wild attempt, but sent a troop of horsemen out against them; who, falling upon them unexpectedly, slew many of them, and took many of them alive.They also took Theudas alive, and cut off his head, and carried it to Jerusalem. This was what befell the Jews in the time of Cuspius Fadus's government. --- Flavius Jesephus {Jewish Antiquities}, 20.97-99 (5.1)

      AD 6년의 폭동과 관련된 가말라의 유다와 관련된 요세푸스의 진술은 {사도행전}과 일치한다.

      There was one Judas, a Galilean, of a city whose name was Gamala, who, taking with him Zadok, a Pharisee, became zealous to draw them to a revolt. Both said that this taxation was no better than an introduction to slavery, and exhorted the nation to assert their liberty; as if they could procure them happiness and security for what they possessed, and an assured enjoyment of a still greater good, which was that of the honor and glory they would thereby acquire for magnanimity. They also said that God would not otherwise be assisting to them, than upon their joining with one another in such councils as might be successful, and for their own advantage; and this especially, if they would set about great exploits, and not grow weary in executing the same. So men received what they said with pleasure, and this bold attempt proceeded to a great height. --- Flavius Josephus, {Jewish Antiquities} 18.4-6]

      갈릴리인으로 가말라 출신의 유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리새인 자독을 끌어들여 반란을 선동했다. 그들은 이 징세는 노예가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면서,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유대인들에게 설파했다...[후략]...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4-6 / 번역: 최광민

      Judas the Galilean was the author of the fourth branch of Jewish philosophy. These men agree in all other things with the Pharisaic notions; but they have an inviolable attachment to liberty, and say that God is to be their only Ruler and Lord. They also do not value dying any kinds of death, nor indeed do they heed the deaths of their relations and friends, nor can any such fear make them call any man lord. --- Flavius Josephus, {Jewish Antiquities} 18.23]

      갈릴리인 유다는 유대교 사상의 네번째 분파를 시작한 인물이다. 이 사람들은 바리사이파의 주장과 모든 점에서 일치했지만. (외세로부터의 / 필자 주) 해방에 대한 철저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 만이 그들의 유일한 지배자이며 주님이라고 말했다....[후략]...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23 / 번역: 최광민

      그런데 복음서는 예수가 태어난 무렵의 센서스가 퀴리니우스의 "첫번째" 센서스였다고 진술한다. 만약 두 진술이 모두 맞다면 위에 언급된 퀴리니우스의 센서스는 그 후의 센서스일 가능성도 있다. 만약 퀴리니우스에 의한 여러 차례의 센서스가 없었다면, 왜 굳이 복음서의 저자는 "첫번째"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그런데 사실 {루가/누가 복음서} 제 2장은 퀴리니우스가 시행한 첫번째 / πρώτη "센서스"에 대해 그저 "등록/ ἀπογράφεσθαι / apographesthai"이라고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울러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ἡγεμονεύοντος 에 대응하는 아래 한국어 "총독"이란 용어는 적절한 용어사용이 아니다.

      2 αὕτη ἀπογραφὴ πρώτη ἐγένετο ἡγεμονεύοντος τῆς συρίας κυρηνίου. 3 καὶ ἐπορεύοντο πάντες ἀπογράφεσθαι, ἕκαστος εἰς τὴν ἑαυτοῦ πόλιν. 4 ἀνέβη δὲ καὶ ἰωσὴφ ἀπὸ τῆς γαλιλαίας ἐκ πόλεως ναζαρὲθ εἰς τὴν ἰουδαίαν εἰς πόλιν δαυὶδ ἥτις καλεῖται βηθλέεμ, διὰ τὸ εἶναι αὐτὸν ἐξ οἴκου καὶ πατριᾶς δαυίδ, 5 ἀπογράψασθαι σὺν μαριὰμ τῇ ἐμνηστευμένῃ αὐτῶ, οὔσῃ ἐγκύῳ.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다. 이 첫번째 호구 조사를 하던 때 시리아에는 퀴리노라는 사람이 총독으로 있었다.래서 사람들은 등록을 하러 저마다 본고장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갔다. 베들레헴은 다윗 왕이 난 고을이며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 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한편, 법률가 출신의 북-아프리카의 라틴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의 공식사료를 근거로 예수의 탄생 무렵에 여러 번의 센서스가 유대아 지역에서 시행되었으며, 특별히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사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시행한 센서스가 예수의 탄생 때 있었다고 한다. 복음서에 해박했던 테르툴리아누스는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투르니누스가 어떤 직위에서 센서스를 지시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제 1권 29장은 표준연표로 BC 6/5년 무렵 헤롯과 문제를 빚은 아라비아인 실레우스가 사투르니누스의 취조를 받은 후 로마로 보내지는 장면을 기술한다. 그런데 이때 요세푸스는 이 사투르니누스 (Σατορνίνῳ) 에 대해 "총독"이라는 직위명으로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로마가 시리아를 지휘/관리하기 파견한 관리 τῷδιέποντι τὴν Συρίαν ἀνεπέμφθησαν εἰς Ῥώμην" 로 부르고 있고, {유대고대사} 제 17권 1.1에서는 "시리아 에피멜레테스 τὸν τῆς Συρίας ἐπιμελητήν"라고 부르고 있다.

      표준연표에 따르면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는 BC 10/9년부터 7/6년 사이에 "시리아 레가투스"였고,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는 AD 4/5년에 각각 "시리아 레가투스"였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언급한 사투르니누스는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다. 그의 라틴어 기록을 읽어보자.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문서보관소에 남아있는 센서스 기록이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이 아니냐며 반문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시대에 예수 탄생 무렵의 센서스/등록 기록이 (더 정확히는 요셉/마리아/예수의 센서스 기록이) 로마의 문서보관소에 남겨져 있었는지에 대해서 확인할 방법은 없다.

      Et tamen quomodo in synagogam potuit admitti tam repentinus, tam ignotus, cuius nemo adhuc certus de tribu, de populo, de domo, de censu denique Augusti, quem testem fidelissimum dominicae nativitatis Romana archiva custodiunt?

      .... And again how could he have been admitted into the synagogue, appearing so suddenly, so unknown, of whom no one till then was certain of his tribe, of his people, of his house, or even of census of Augustus, which the Roman archives keep in custody as a most faithful witness to the dominical nativity? -- Tertullian, {Against Marcion} 4.7.7a:


      Sed et census constat actos sub Augusto nunc in Iudaea per Sentium Saturninum, apud quos genus eius inquirere potuissent..

      ..But it is established also that censuses had now been enacted under Augustus in Judea through Sentius Saturninus, about which they could have inquired of his race. -- Tertullian, {Against Marcion} 4.19.10:

      앞서 제시한 시리아 총독의 표준연표를 보면, 사투르니누스의 재임기간은 BC 9-6년이다. 그리고 BC 4-1년의 시리아 담당총독은 분명치 않다. 혹시 사투르니누스는 그 기간 동안 재임명 되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BC 2/3년 무렵 시리아에는 로마로부터 파견된 복수의 행정관들이 존재했던 것일까?



      우선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자.

      요세푸스는 시리아 총독 사투르니누스의 재임기간 중 다수의 행정관들이 실제로 있었음을 보여준다 (Josephus, Antiquities XVI.280, 285, 357, 361). 요세푸스가 명시하는 바에 따르면, 적어도 두 명의 군사지휘관 (사투르니누스와 볼룸니우스/Volumnius)이 동시에 재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이 처리안 사안을 언급할 때 사투르니누와 볼룸니우스를 늘 함께 묶어서 언급한다.

      가령, 요세푸스는 사투르니누스 (Σατορνίνου)와 볼룸니우스 (Οὐολομνίου)을 묶어서 "시리아 지휘관/총독 τῶν Συρίας ἐπιστατούντων)으로 복수로 명시한다. 물론 둘이 같은 직위에 있은 것은 아니고 볼룸니우스가 레가투스인 사투르니누스의 직속인 트리부누스 밀리툼 (군사호민관)으로 켄투리온 (백부장)들의 상관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든 사안이 사트루니누스와 볼룸니누스 두 사람 모두의 승인을 얻어야 한 것으로 기술된다.

      그럼 퀴리니우스도 사투르니누스와 함께 시리아에 파견된 이런 복수의 행정관 중 한 명이었을까? 사료상 분명치 않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통해 알려진 대로라면, 퀴리니우스가 "총독/레가투스라는 직위로 시리아에 부임한 것은 AD 6년의 일이다. 그때 퀴리니우스의 공식직함은 Legatus Augusti Pro praetore 였다. 황제/아우구스투스의 특사로서 원로원이 아닌 황제가 직속상관이란 뜻이다. 이 직책은 이전에 콘술이나 Praetor 를 맡은 경험이 있는 레벨의 원로원 의원에게 부여되었는데, 유대아 지역처럼 군단이 주둔하지 않는 속주는 로마의 기사계급 (eques)에서 임명된 praefecti (후대의 procuratores)이 담당했다. 징세와 재정에 대한 업무는 독자적인 프로큐라토르들이 담당해서 황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런데 퀴리니우스는 AD 6년 이전부터 시리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시리아통이었다. AD 1-4년,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20대의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시리아 안티오키아를 총괄할 때 그를 보좌하게 되었던 퀴리니우스는 당시의 명각에 따르면 안티오키아-피시디아에서 명예시장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퀴리니우스는 가이우스를 보좌해 안티오키아 일대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타키투스는 퀴리니우스가 사업감각에 뛰어났던 것으로 (Tacitus, Annals, III.48.) 묘사했고, 소아시아에서 벌인 군사작전에서의 그의 역할을 (아우구스투스의) "특사(special command)"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그에 대한 아우구스투스의 각별한 신임을 뜻할 수 있다 AD 6/7년에 시리아에 부임했을때, 요세푸스(Antiquities, 18.1.1)는 특이하게도 그를 그리스어로 δικαιοδότης / dikaiodotes (법관)으로 표기했다. 이 직위는 오직 요세푸스와 리키아에서 발굴된 명문에서만 발견된다.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총독의 사법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

      테르툴리아누스보다 한두 세대 전 AD 2세기 중반에 살았던 유스티노스는, 로마의 사료에 따라 (전통적인 예수 탄생 연도인 BC 2/3년 무렵) 사투르니누스 당시에 퀴리니우스가 유대아를 담당한 (첫번째)  "총독" (그리스어 에피프로포스)이었다고 말한다 (Apology, I.34). 이것은 복음서의 기록에 보다 가까운 형태의 기록이다.

      유스티노스가 기독교 교부라는 이유로 이 진술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그의 대표저술 {변호/Apology}는 로마황제에게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한 저작이기 때문이다. 유스티노스는 이 저작을 로마황제 피우스와 그의 아들들인 철학자 베리시무스 및 루키우스에게 헌정했다. 따라서 이런 의도의 저작 속에서 유스티노스가 로마의 사료를 조작하는 자충수를 둘 확률은 그다지 높지않다. (피우스, 베리시무스, 루키우스가 이 저작을 정말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헌정사를 인용한다.

      To the Emperor Titus Ælius Adrianus Antoninus Pius Augustus Caesar, and to his son Verissimus the Philosopher, and to Lucius the Philosopher, the natural son of Caesar, and the adopted son of Pius, a lover of learning, and to the sacred Senate, with the whole People of the Romans, I, Justin, the son of Priscus and grandson of Bacchius, natives of Flavia Neapolis in Palestine, present this address and petition in behalf of those of all nations who are unjustly hated and wantonly abused, myself being one of them.

      프리스쿠스의 아들이자 바키우스의 손자이자 팔레스티나의 플라비아 네아폴리스 태생인 나 유스티노스는, 온 세상에서 불공정하게 미움을 받고 탄압받고 있는 저를 포함한 사람들 (기독교도 -- 필자 주)을 대신하여,  황제이신 티투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 카에사르와, 학문을 애호하시는 황제의 친아들 철학자 베리시무스와 양자이신 철학자 루키우스, 성스런 원로원, 그리고 온 로마시민에게 본 논고와 청원을 제출합니다./ 번역: 최광민

      유스티노스의 {첫번째 변증} 1.34.2 를 원문에서 인용한다.

      Κωμη δε τις εστιν εν τη χωρα Ιουδαιων απεχουσα σταδιους τριακοντα πεντε Ιεροσολυμων, εν η εγεννηθη Ιησους Χριστος, ως και μαθειν δυνασθε εκ των απογραφων των γενομενων επι Κυρηνιου, του υμετερου εν Ιουδαια πρωτου γενομενου επιτροπου.

      예루살렘에서 35 스타디아 떨어진 유대인들의 지역에 한 마을이 있는데,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습니다.  당신들은 이 사실을 퀴리니우스가 유대아 땅의 첫번째 담당관/지휘관/총독/επιτροπου이 되었을때의 센서스/등록(?) / απογραφων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번역: 최광민

      유스티노스는 퀴리니우스의 직위를 그리스어로  ἐπίτροπος 로 언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요세푸스 역시 로마의 해당 직위를 그리스어  ἐπίτροπος (Josephus, "Ant." xviii. 1, § 1; idem, "B. J." ii. 8, § 1)로 옮겼다.

      특별히 {유대 고대사}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 적용시킨 그리스어 용어는 "ὁ τῆς Ἰουδαίας ἡγεμὼν (= 유대아 담당 (군사)지휘관)이다. 이것은 로마 직위 "프리펙투스"에 거의 근접한 정의다. 또한 폰티우스 필라투스 이전의 유대아 담당관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용어를 적용시킨다.

      [55] Πιλᾶτος δὲ ὁ τῆς Ἰουδαίας ἡγεμὼν στρατιὰν ἐκ Καισαρείας ἀγαγὼν καὶ μεθιδρύσας χειμαδιοῦσαν ἐν Ἱεροσολύμοις ἐπὶ καταλύσει τῶν νομίμων τῶν Ἰουδαϊκῶν ἐφρόνησε, προτομὰς Καίσαρος, αἳ ταῖς σημαίαις προσῆσαν, εἰσαγόμενος εἰς τὴν πόλιν, εἰκόνων ποίησιν ἀπαγορεύοντος ἡμῖν τοῦ νόμου. [56] καὶ διὰ τοῦτο οἱ πρότερον ἡγεμόνες ταῖς μὴ μετὰ τοιῶνδε κόσμων σημαίαις ἐποιοῦντο εἴσοδον τῇ πόλει. πρῶτος δὲ Πιλᾶτος ἀγνοίᾳ τῶν ἀνθρώπων διὰ τὸ νύκτωρ γενέσθαι τὴν εἴσοδον ἱδρύεται τὰς εἰκόνας φέρων εἰς τὰ Ἱεροσόλυμα.....

      [55] BUT now Pilate, the procurator of Judea, removed the army from Cesarea to Jerusalem, to take their winter quarters there, in order to abolish the Jewish laws. So he introduced Caesar's effigies, which were upon the ensigns, and brought them into the city; whereas our law forbids us the very making of images; on which account the former procurators were wont to make their entry into the city with such ensigns as had not those ornaments..... --- Flavius Josephus. The Works of Flavius Josephus. Translated by. William Whiston, A.M. Auburn and Buffalo. John E. Beardsley. 1895. 18.3.1

      유대아 담당 지휘관 필라투스가 겨울철 주둔지로 삼고 또 유대인들의 율법을 철폐하기 위해 카이사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는 군단기장에 설치되어있던 황제의 초상들을 예루살렘 안으로 들여왔는데, 우리의 율법은 사람을 그림/조상으로 묘사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던 바였다. 그래서 전직 지휘관들은 그런 형상이 설치된 기장을 들고 도시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었다....[후략]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3.1 / 번역: 최광민

      이 '에피트로포스'가 일반적으로 총독/legatus과 반-독립적으로 활동하는 황제 직속의 직책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당시 시리아 총독 사투르니누스와 별개로 시리아 관할권인 유대아에서 직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루가/누가복음서} 역시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legatus"라고 말한 적은 없고 다만 그리스어로 ἡγεμονεύοντος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BC 6-4년 당시 퀸틸리우스 바루스 당시의 시리아 군사/행정관은 단수로 표기하지만, 시리아 레가투스인 바루스와 대립적인 인물로 유대아에 내려와 독립적인 행동을 취한 사비누스란 인물도 등장한다. 이 인물은 황제가 직접 파견한 인물로서,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제 2권 2장에서는 이 사비누스 (Σαβῖνος)를 "시리아 에피트로포스 (ὁ τῆς Συρίας ἐπίτροπος)" 부르고 있고, {유대고대사} 17.221 에서는 '시리아 사안으로 파견된 황제특파 에피트로포스 (Καίσαρος ἐπίτροπος τῶν ἐν Συρίᾳ πραγμάτων) 로 불리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2.2.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충성맹세

      위의 정황에 따라, (아마도) BC 3/2년 무렵에 (시리아 관할의 유대아를 담당한 행정관으로 활동한 퀴리니우스(?)에 의해) 시행된 센서스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보자.

      몇가지 난점이 있다.

      • 이 센서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직접포고에 따른 것이며, 로마 전역에서 거의 동시에 실시된 듯 하다.
      • 당시 유대인은 헤롯에게 세금을 직접 납부하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의 행정관이 "징세"를 목적으로 직접 센서스를 할 이유는 특별히 없다.
      • {루가/누가 복음서} 원문은 이 센서스가 "등록"이라고 쓰고 있다.
      • "무엇"을 "등록"했는가?
      • 왜 모든 사람들이 고향, 정확히는 "씨족/clan의 등록지"로 돌아가야 했는가?
      • 호적이 목적이라면, 왜 요셉은 만삭의 마리아까지 동행시켜야 했는가?

        우선, BC 3/2년이 로마제국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시기였는지를 설명하겠다.

        BC 3/2년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60세가 되던 무렵이다. 예수보다 약 1세기 이후에 태어난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는 예수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권좌에 오른 후 41년째 되는 해라고 적었다. 옥타비아누스는 BC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및 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시작했다.

        BC 2년 1월 5일,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파테르 파트리에/Pater Patrie/국부'라는 호칭을 수여했다. 원로원이 그에게 '파테르 파트리에'를 수여한 이 날은 "화합"을 신격화한 콘코르디아 여신의 축제일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고도로 계산된 날짜다.

        아우구스투스 본인이 76세때 직접 쓴 {Res Gestae}에 따르면, 통상적인 형태인 원로원과 군대의 충성맹세 뿐 아니라 모든 로마인의 이름으로 '파테르 파트리에'가 부여된 것이다.

        "...35: In my thirteenth consulship [2 BC] the senate, the equestrian order and the whole people of Rome gave me the title of Father of my Country, and resolved that this should be inscribed in the porch of my house and in the Curia Julia and in the Forum Augustum below the chariot which had been set there in my honor by decree of the senate. 2 At the time of writing I am in my seventy-sixth year.....”  --- {Res Gestae Divi Augusti/The Achievements of the Divine Augustus}[trans. P. A. Brunt and J. M. Moore], VI.35.

        ...내가 13번째 콘술을 맡을때 [BC2년], 원로원과 기사계급과 로마의 온 시민들이 나에게 국부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주었고, 원로원의 포고에 의해 나의 집 정문, 큐리아 율리아, 그리고 포룸 아우구스툼에 나를 기리기 위해 설치된 전차 아래 이 칭호가 새겨졌다. 내 나이 76세에 이것을 기록한다.... --- 번역: 최광민

        이 '파테르 파트리에'는 아우구스투스 이전(과 이후)에도 키케로나 율리우스 카에사르 같은 몇몇 영웅들에게 수여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경우는 특별했다. BC 2년은 로마건국 75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고, 아우구스투스의 집권 25년을 기념하는 해 (silver jubilee)였다.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BC 27년에 이어) 직접 충성을 서약했을 뿐 아니라, 로마 전역의 거주민들이 아우구스투스에게 직접 충성서약을 해야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춘 대규모 축제들이 정부관리 하에 계획/집행되었다.

        충성서약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된 제단에서 했다. 이 충성서약에 대해 남아있는 대표적인 유물은 북부 소아시아의 팔랑고니아/ Paphlagonia (현, 파지몬/Phazimon)에서 발굴된 기념비다. BC 3년 3월 6일의 충성서약 내용을 담고 있다.


        Robert Kenneth Sherk, {The Roman Empire: Augustus to Hadrian} 

        ἀπὸ Αὐτοκράτορος Καίσ[αρος] | θεοῦ υἱοῦ Σεβαστοῦ ὑπατεύ[σαντος τὸ] | δωδέκατον ἔτους τρίτου, π[ροτέραι] | νωνῶν Μαρτίων ἐν Γάνγροις ἐν [κ]ά[στροις(?), ὅρ]||κος ὁ τελεσθ[εὶς ὑ]πὸ τῶ[ν] κατοικ[ούντων Πα]|φλαγονία[ν καὶ τῶν πραγ]ματευομ[ένων πα]|ρ’ αὐτοῖς Ῥ[ωμαίων]. | ὀμνύω Δία Γῆν Ἥλιον θεοὺς πάντα[ς καὶ πά]|σας καὶ αὐτὸν τὸν Σεβασ[τ]ὸν εὐνοή[σειν Καί]||σαρι Σεβαστῶι καὶ τοῖς τ[έκ]νοις ἐγγό[νοις τε] | αὐτοῦ πάν[τ]α τ[ὸ]ν τοῦ [βίου] χρόνον κ[αὶ λό]|γωι [κ]αὶ ἔργωι καὶ γνώμη[ι, φί]λους ἡγού[μενος] | οὓς ἂν ἐκεῖνοι ἡγῶντα[ι] ἐκχθρούς {ἐχθρούς} τε ν[ομίζων] | οὓς ἂν αὐτοὶ κρίνωσιν· ὑπέρ τε τῶν τ[ούτοις] || διαφερόντων μήτε σώματος φείσεσ[θαι μή]|τε ψυχῆς μήτε βίου μήτε τέκνων, ἀλ[λὰ παν]|τὶ τρόπωι ὑπὲρ τῶ[ν] ἐκείνοις ἀνηκό[ντων] | πάντα κίνδυνον ὑπομενεῖν· ὅ τί τε ἂ[ν αἴσ]|θωμαι ἢ ἀκούσω ὑπεναντίον τούτ[οις λε]||γόμενον ἢ βουλευόμενον ἢ πρασσό[μενον], | τοῦτο ἐγμηνύσειν τε καὶ ἐχθρὸν ἔσ[εσθαι τῶι] | λέγοντι ἢ βουλευομένωι ἢ πράσσο[ντί τι τού]|των· οὕς τε ἂν ἐκχθροὺς {ἐχθροὺς} αὐτοὶ κρίν[ωσιν, τού]|τους κατὰ γῆν καὶ θάλασσαν ὅπλο[ις τε] || καὶ σιδήρωι διώξειν καὶ ἀμυνεῖσ[θαι]. | ἐὰν δέ τι ὑπεναντίον τούτωι τ[ῶι ὅρκωι] | ποήσω ἢ μὴ στοιχούντως καθὼ[ς ὤμο]|σα, ἐπαρῶμαι αὐτός τε κατ’ ἐμοῦ καὶ σ[ώμα]|τος τοῦ ἐμαυτοῦ καὶ ψυχῆς καὶ βίου κα[ὶ τέ]||κνων καὶ παντὸς τοῦ ἐμαυτοῦ γέν[ους] | καὶ συνφέροντος ἐξώλειαν καὶ παν[ώλει]|αν μέχρι πάσης διαδοχῆς τῆς ἐ[μῆς καὶ] | τῶν ἐξ ἐμοῦ πάντων, καὶ μήτε σ[ώματα τὰ] | τῶν ἐμῶν ἢ ἐξ ἐμοῦ μήτε γῆ μ[ήτε θάλασ]||σα δέξαιτο μηδὲ καρποὺς ἐνέγ[κοι αὐτοῖς]. | κατὰ τὰ αὐτὰ ὤμοσαν καὶ οἱ ἐ[ν τῆι χώραι] | πάντες ἐν τοῖς κατὰ τὰς ὑ[παρχίας(?) Σε]|βαστήοις παρὰ τοῖς βωμοῖ[ς τοῦ Σεβαστοῦ]. | ὁμοίως τε Φαζιμωνεῖται οἱ [τὴν νῦν Νεάπο]||λιν λεγομένην κατοικοῦν[τες ὤμοσαν σύμ]|παντες ἐν Σεβαστήωι παρὰ τ[ῶι βωμῶι τοῦ] | Σεβαστοῦ.

        In the third year from the twelfth consulship of the Emperor Caesar Augustus, son of a god, March 6, in the … at Gangra, the following oath was taken by the inhabitants of Paphlagonia and the Roman businessmen (pragmateuomenoi) dwelling among them: “I swear by Jupiter, Earth, Sun, by all the gods and goddesses, and by Augustus himself, that I will be loyal to Caesar Augustus and to his children and descendants all my life in word, in deed, and in thought, regarding as friends whomever they so regard, and considering as enemies whomever they so adjudge; that in defense of their interests I will spare neither body, soul, life, not children, but will in every way undergo every danger in defense of their interests; that whenever I perceive or hear anything being said or planned or done against them I will lodge information about this and will be an enemy to whoever says or plans or does any such thing; and that whomever they adjudge to be enemies I will by land and sea, with weapons and sword, pursue and punish. But if I do anything contrary to this oath, or not in conformity with what I swore, I myself call down upon myself, my body, my soul, my life, my children, and all my family and property, utter ruin and utter destruction unto all my issue and all my descendants, and may neither earth nor sea receive the bodies of my family or my descendants, or yield fruits to them.”

        신의 아들이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독재관 (임페라토르)의 12번째 콘술 임기 3년 차 3월 6일에.....강그라에서 파피라고니아의 거주민 및 그들과 함께 거주하는 로마인 사업가들은 다음의 맹세를 바쳤다: 제우스와 땅과 해와 모든 신들과 여신들 앞에, 나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자녀와 후손들에게 내 평생 말로나 행위로나 마음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는 그들이 친구로 여기는 이들을 친구로 대할 것이며, 그들이 적으로 여기는 자들을 적으로 간주할 것이며, 황제와 그의 자녀와 후손들을 위해 내 몸과 영혼과 생명과 자식들을 아끼지 않을 뿐더러, 모든 위험을 감수할 것입니다. 이에 반하는 것들에 관해 알거나, 듣거나, 계획되거나, 실행되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이를 보고할 것이며 그들에 맞설 것입니다. 황제와 그의 집안이 적으로 간주하는 자들에 맞서 나는 창검을 들고 뭍과 바다에서 그들과 싸울 것입니다.  만약 내가 이 서약을 위반하거나 맹세를 어길 경우, 내 몸과 영혼과 생명과 자식들과 온 가족과 내 모든 소유가 멸망되는 저주가 내릴 것이며, 땅과 바다가 내 가족들의 몸을 받아주지도 않을 것이며, 그들을 위해 열매를 맺지도 않을 것입니다.   / 번역: 최광민

        --- tr. N. Lewis and M. Reinhold, Roman Civilization, Sourcebook II: The Empire (New York 1966) 34-35.

        로마의 변방이자 파르티아와의 접경지대로 로마와는 밀접한 동맹관계를 유지한 속국 아르메니아에서는, 로마에서 보내진 아우구스투스의 초상화가 모든 신전마다 배치되었고, 아마도 거기서 충성맹세를 해야 했던 듯 싶다. 아르메니아의 왕 압가르의 재위 2년 (BC 3년)의 일을 기록한 아르메니아 역사가 코레네의 모세의 기록이다.

        "...to Armenia, bringing the image of Augustus Caesar, which they set up in every temple..."--- Moses of Khorene’s {History of the Armenians}, II.26.

        ...아르메니아에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초상이 보내져 모든 신전마다에 설치되었다 --- 코레네의 모세, {아르메니아 역사}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AD 5세기의 역사가이자 신학자인 오로시우스 역시 유사한 기록을 남겼다.

        "...Augustus] ordered that a census be taken of each province everywhere and that all men be enrolled. ... This is the earliest and most famous public acknowledgment which marked Caesar as the first of all men and the Romans as lords of the world, a published list of all men entered individually .... This first and greatest census was taken, since in this one name of Caesar all the peoples of the great nations took oath, and at the same time, through the participation in the census, were made apart of one society..."--- Orosius, VI.22 and VII.2.



        그럼 유대아에서의 상황은 어땠는지 요세푸스의 기록으로 돌아가 보자. 요세푸스는 해당되는 충성맹세에 대해 {유대고대사}에 이렇게 적었다.

        ...These are those that are called the sect of the Pharisees, who were in a capacity of greatly opposing kings. A cunning sect they were, and soon elevated to a pitch of open fighting and doing mischief. Accordingly, when all the people of the Jews gave assurance of their good-will to Caesar, and to the king's government, these very men did not swear, being above six thousand; and when the king imposed a fine upon them, Pheroras's wife paid their fine for them. In order to requite which kindness of hers, since they were believed to have the foreknowledge of things to come by Divine inspiration, they foretold how God had decreed that Herod's government should cease, and his posterity should be deprived of it; but that the kingdom should come to her and Pheroras, and to their children.... --- Flavius Joshepus, {Antiquities} 17.2.4

        바리새파라 불리는 종파가 있었는데, 그들은 헤롯대왕에 대해 극렬히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중략)....그런 이런 이유로, 모든 유대인들이 황제와 헤롯에게 충성서약을 해야 했을때, 약 6000명에 달하는 바리새파는 맹세하지 않았고, 헤롯이 그들에게 벌금을 부과했을때 페로라스의 처가 그들을 대신해서 벌금을 내주었다....(후략)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7.2.4 / 번역: 최광민

        요세푸스는 헤롯대왕이 죽기 전 12-15개월 전에 유대아에도 충성서약을 요구하는 아우구스투스의 포고령이 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헤롯대왕의 죽음은 BC 4년이 될 수 없다. 헤롯의 사망년도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3부에서 다루겠다) 모든 사람들이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충성을 서약해야 했다. 아마도 이 충성서약에 수반된 행정절차가 {누가의 복음서}가 말하는 "등록"을 뜻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종교적으로 배타적인 유대아 일대에서 유대인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에서 충성맹세를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유대아 일대에서 치러진 충성맹세의 자세한 형식에 대해서는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그럼 왜 요셉과 마리아는 동행했을까? 분명하지 않다. 가령, 충성맹세처럼 마리아 본인에 관련되어 있을 수 있고, 혹은 그저 산달이 임박했기 때문에 예수를 호적에 등록시키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복음서}를 제외한 현재까지 알려진 두개의 고대 사료는 로마의 등록/센서스 당시 등록 대상자들이 모두 본인들의 호적지로 돌아가야 했던 것으로 기록한다.

        우선 AD 48년 이집트의 센서스와 관련된 파피루스 기록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세인 AD 48년 당시 65세였던 테르모우타리온(Thermoutharion)이란 자유인 여성이 센서스를 위해 귀향한 내용을 담는다. 이집트에서는 그리스계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도 센서스가 시행되기는 했지만, 징세 및 (아마도) 징병 목적으로 가족구성원 전원을 센서스 대상으로 하게 된 것은 로마지배 하에 들어간 후 BC 10년 경 무렵인 것으로 역사가들은 여긴다. 


        Selections from the Greek Papyri. Ed. and Trans. George Millig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0
        https://archive.org/stream/selectionsfromg00milluoft




        To Dorian strategus and…royal scribe and Didymus and … topogrammateis and komogrammateis from Thermoutharion the daughter of Thoonis with her guardian Apollionius the son of Sotades. There are living in the house which belongs to me in the South Lane…Thermoutharion, a freedwoman of the above-mentioned Sotades, about 65 years of age, of medium height, dark-complexioned, long-visaged, a scar on the right knee. Total—three persons. "I the above-mentioned Thermoutharion along with my guardian the said Apollonius swear by 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Emperor that assuredly the preceding document makes a sound and true return of those living with me, and that there is no one else living with me, neither a stranger, nor an Alexandrian citizen, nor a freedman, nor a Roman citizen, nor an Egyptian, in addition to the aforesaid. If I am swearing truly, may it be well with me, but if falsely, the reverse." In the ninth year of 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Emperor, Phaophi…. -- From: Selections from the Greek Papyri. Ed. and Trans. George Millig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0. (파피루스 .Oxyrhynchus. 255) (48 CE)

        AD 104년 로마령 이집트의 프리펙투스였던 가이우스 비비우스 막시무스는 센서스/등록을 위해 본적지를 떠나 도시에 와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향령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귀향령의 목적은 포고령에 명시되어 있듯이 대체로 두가지인데  (1) (아마도 징세와 병역을 위한) 관례적 등록 (customary business of registration) + (2) 귀향한 자들을 농사일에 동원 (apply themselves to the cultivation)하기 위한 목적이다. 도시에 남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사전등록 할 것을 예외조항으로 두었다.


        A. S. Hunt and C. C. Edgar. {Non-literary papyri with an English translation}, Published 1900 by Harvard University Press in Cambridge, Mass .
        https://archive.org/stream/nonliterarypapyr02hunt



        #220. EDICT OF VIBIUS MAXIMUS (A.D. 104)

        Proclamation of Gains Vibius Maximus, praefect of Egypt:

        이집트 프리렉투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막시무스의 포고령:


        Της κατ οικιαν απογραφης ενεστωσης αναγκαιον εστιν πασιν τοις καθ ηντινα δηποτε αιτιαν αποδημουσιν απο των νομων προσαγγελλεσθαι επανελθειν εις τα εαυτων εφεστια ινα και την συνηθη οικονομιαν της απογραφης πληρωσωσιν και τη προσηκουση αυτοις γεωργιαι προσκαρτερησωσιν. ειδως μεντοι οτι ενιων των απο της χωρας η πολις ημων εχει χρειαν, βουλομαι παντας τους ευλογον δοκουντας εχειν του ενθαδε επιμενιν αιτιαν απογραφεσθαι παρα Βουλ....

        The house-to-house census having started, it is essential that all persons who for any reason whatsoever are absent from their nomes be summoned to return to their own hearths, in order that they may perform the customary business of registration and apply themselves to the cultivation which concerns them. Knowing, however, that some of the people from the country are needed by our city, I desire all those who think they have a satisfactory reason for remaining here * to register themselves before

        가구별 센서스가 시작되었으므로, 어떤 사유이든 출신지를 떠나있는 모든 사람들은 관례적인 등록 및 농사일을 돕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경우, 본인들이 도시에 남아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그 전에 등록하도록 하라.....  / 번역: 최광민


        Φηστω επαρχωι ειλης, ον επι τουτω εταξα, ου και τας υπογραφας οι αποδειξαντες αναγκαιαν αυτων την παρουσιαν λημψονται κατα τουτο το παραγγελμα εντος της τριακαδος του ενεστωτος μηνος Ε....

        ...Festus, praefectus alae, whom I have appointed for this purpose, from whom those who have shown their presence to be necessary shall receive signed permits in accordance with this edict up to the 30th of the present month Epeiph. . . . "

        {복음서}에 따라 둘이 모두 다윗의 계보를 잇고 있기 때문에 메시아의 지위를 주장할 수 있는 다윗의 가문들 모두를 특별관리하기 위한 차원에서 둘이 모두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을 베들레헴에 모으는 것 자체가 이미 특별관리에 들어간다. 만약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베들레헴에서 등록해야 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베들레헴에 모인 유다부족원의 상당수는 다윗의 자손/즉 미래의 메시아를 자칭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분자로 간주될 수 있다. 혹은 아우구스투스의 포고령이 말 그대로 모든 신민들의 충성서약을 요구한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대아에서의 충성서약은 유대인 가운데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반발을 샀는데, 약 6천 명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충성서약을 거부했고, 이에 헤롯대왕은 이들에게 상당한 벌금을 물렸다. 바리새파들은 이 모든 상황을 헤롯왕가가 종식되고 새로운 왕가 혹은 메시아가 도래할 때가 임박한 징조로 해석했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되자 헤롯은 바리새파의 지도급 인사들과 궁정의 몇몇 인사,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을 모조리 처형하려고 시도한다.



        요세푸스를 다시 인용한다.

        "...There was moreover a certain sect of Jews who valued themselves highly for their exact knowledge of the law; and talking much of their contact with God, were greatly in favor with the women of Herod’s court. They are called Pharisees. They are men who had it in their power to control kings; extremely subtle, and ready to attempt any thing against those whom they did not like. When therefore the whole Jewish nation took an OATH to be faithful to Caesar, and [to] the interests of the king, these men, to the number of above six thousand, refused to swear. The king having laid a fine upon them, Pheroras’ wife [Herod’s sister-in-law] paid the money for them. They, in requital for her kindness (for they were supposed, by their great intimacy with God, to have attained to the gift of prophecy), prophesied that God having decreed to put an end to the government of Herod and his race, the kingdom would be transferred to her and Pheroras and their children. Salome [Herod’s sister], who was aware of all that was being said, came and told the king of them. She also told him that many of the court [of Herod] were corrupted by them.Then the king put to death the most guilty of the Pharisees, and Bagoas the eunuch, and one Carus, the most beautiful young man about the court, and the great instrument in the king’s unlawful pleasures. He [Herod] likewise slew every one in his own family, who adhered to those things which were said by the Pharisee. But Bagoas had been elevated by them and was told that he should some day be called father and benefactor of the [new] king, who was to be appointed according to their prediction, for this king would have all things in his power, and that he [the king] would give him [Bagoas] the capacity of marriage, and of having children of his own.” --- Josephus, Antiquities XVII.41–45

        [전략]... 유대교 종파 가운데는 율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알고, 또 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에 자긍심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는데, 헤롯의 궁정의 여인들은 이들은 매우 좋아했다. 이들은 바리사이파 (= 바리새인)이라 불렸다. 이 힘을 통해 왕들을 견제해온 이들은 매우 예민한 사람들로 자신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온 유대아 왕국이 카이사르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할 때가 오자, 이 종파의 약 6천 명의 사람들은 맹세하기를 거부했다. 헤롯은 그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는데, 페로라스의 아내 [=헤롯의 제수]가 그들을 대신해서 벌금을 대납해 주었다..... [후략]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7장 발췌 / 번역: 최광민

        관련된 사료는 Nepthali Lewis and Meyer Reinhold, eds. {Roman Civilization}, 2 vols. (NY: Harper Torchbooks), 2:34-35 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길 권한다.


        Nepthali Lewis and Meyer Reinhold, eds. {Roman Civilization}




        2.3. 정리

        {복음서}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과 역사적 사실관계를 떠나 현대의 비교종교학자와 신학자들이 흔히 취하는 입장에서 {복음서}를 초기 기독교의 프로파겐다용 저작으로 해석하는 경우라면, 예수의 탄생을 다룬 마태/마태오와 누가/루가는 BC 10년에서 AD 1년 가운데 어떤 해를 예수의 탄생으로 정하는 것이 가장 극적이고 효과적이었을까?

        표준연대표가 말하는 BC 4년 이전은 (아마도 BC 7-4년)은 메시아가 탄생하기에는 사실 대단히 무미건조한 시점이다. 그러나 BC 3/2년은 역사적으로나 천문학적으로 대단히 유의미한 시점에 해당한다. 심지어 세속권력을 상징하는 아우구스투스 및 로마의 새출발과 (신의 아들인) 예수의 탄생을 대조시킬 수 있는 절호의 모티프가 발견되기도 한다. 종교적으로 보더라도 유의미할 뿐 아니라, 심지어 {복음서}가 순수한 창작이었다고 보는 경우에도 BC 3/2년이 프로파겐다를 위해서는 가장 매력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럼 왜 표준연대표는 BC 4년 이전을 예수의 탄생시점으로 보는 것일까? 현대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표준연대표의 근거는 요세푸스의 (다소 모순되는) 진술과 발견된 헤롯대왕의 아들들이 발행한 동전들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표준연대표이며, 헤롯대왕의 사망시점에 대한 역사학자들 간의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제 3부에서는 이에 대해 다루겠다.






        3부: 헤롯대왕의 사망연대

        제 2부에서 다룬 바대로, 기독교 초기 교부들은 복음서와 로마의 사료를 바탕으로 BC 3/2년을 예수의 탄생연도로 보았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을 다루는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 속의 기록의 역사적 신빙성은 결국 헤롯대왕의 사망연도를 어떻게 정하는가에 달려있다. 그 이유는 간략하게 말해 다음과 같다.

        • 첫째, 헤롯이 BC 4년에 사망했다면, 예수의 탄생일은 BC 8-4년 무렵이 될 것이고, 이 경우는 BC 3/2년에 있었던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충성서약 관련 센서스 혹은 AD 6년에 있었던 퀴리니우스의 징세 센서스 어느 것도 {누가/루가복음서}의 진술과 일치할 수 없다.
        • 둘째, 헤롯이 BC 4년에 사망했다면, {마태/마태오복음서}에 등장하는 동방박사가 개입할 만한 천문현상이 예수와 무관해 진다.

        서로 다른 연대체계 (가령, 서력기원과 중국의 연호)를 비교해서 하나의 통일된 연대체계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두 문화권의 역사 중 서로 겹치는 부분을 기준으로 (신뢰도가 더 높은 쪽의 연표에 따라) 재배열하면 된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은 상대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절대적인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자연현상에 기준하는 방법이다. 가령, 일식이나 월식의 출현일을 바탕으로 절대적인 기준점을 산정하는 것이 그런 방법에 속한다.

        우선 현대 역사학자들이 예수의 탄생연도와 헤롯의 사망연도를 어떻게 추정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BC 12년?
        • "Places the Crucifixion of Jesus in 36." p. 162. "It follows that Jesus was born in 12 BC." p. 163. --- Nikos Kokkinos,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9
        • "Prevailing view is that Jesus was born between 8 and 2 BC and that he died around AD 30-33." p. 56. "my judgment that Jesus was born in late 12 BC and that he was crucified around AD 21." p. 56. --- Ephraim Jerry Vardaman,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9

        BC 7년 -BC 4년 사이?

        • "Jesus was born somewhere between 4 and 6 B.C.",  --- Ben Witherington III, {Primary Sources} Christian History, August 1998 p12(1).
        • "About the date of Jesus' birth there are equally perplexing problems. The belief that he was born in AD 1 only came into existence in the sixth century AD when a monk... His birth-date should be reassigned to 6 or 5 or 4 BC, though some prefer 11 or 7 . , --- Michael Grant, {Jesus: An Historian's Review of the Gospels}, Scribner's, 1977, p. 71
        • "Jesus is linked with the reign of king Herod teh Great (37-4 B.C.E.), during whose incumbency Jesus was allegedly born. We also have the name of Herod Antipas, tetrarch from 4 B.C.E. to 39 C.E., who ruled Galilee during Jesus' life and beheaded John the Baptist; and the name of Pntius Pilate, the Roman procurator (26-36 C.E.) under whom Jesus was crucified. Jesus therefore lived in a period bounded by a date prior to the death of Herod on the one side and by the end of Pilate's tenure in 36 C.E. on the other." --- Robert W. Funk and the Jesus Seminar, The Acts of Jesu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Deeds of Jesus, HarperSanFrancisco, 1998, p. 528 
        • "All things considered, then, we can only estimate that Jesus must have been born sometime during 6-4 B.C." -- D. A. Carson, Douglas J. Moo and Leon Morris.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2. 
        • "During the reign of King Herod the Great (and if Matthew is to be believed, toward the end of his reign, therefore somewhere between 7-4 B.C.), a Jew named Yeshia (=Jesus) was born, perhaps in Bethlehem of Judea but more likely in Nazareth of Galilee-at any rate, in a small town somewhere within the confines of Herod's kingdom." --- John P. Meier, A Marginal Jew, Doubleday, 1991-, vol. 1:407, p. 229
        • "...yields 5 BC, the most likely date for the Nativity." p. 119 -- Paul L. Maier,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9

        BC 6년?
        • The first enrolment (ἀπογραφὴ πρώτη). A definite allusion by Luke to a series of censuses instituted by Augustus, the second of which is mentioned by him in Ac 5:37. This second one is described by Josephus and it was supposed by some that Luke confused the two. But Ramsay [q.v., Luke the Physician] has shown that a periodical fourteen-year census in Egypt is given in dated papyri back to A.D. 20. The one in Ac 5:37 would then be A.D. 6. This is in the time of Augustus. The first would then be B.C. 8 in Egypt. If it was delayed a couple of years in Palestine by Herod the Great for obvious reasons, that would make the birth of Christ about B.C. 6 which agrees with the other known data. When Quirinius (Κυρηνίου). Genitive absolute. Here again Luke has been attacked on the ground that Quirinius was only governor of Syria once and that was A.D. 6 as shown by Josephus (Ant. XVIII. I.I). But Ramsay has proven by inscriptions that Quirinius was twice in Syria and that Luke is correct here also.. -- A. T. Robertson's Word Pictures of the New Testament (Broadman & Holman, 1970), on Luke 2:2:

        BC 6년 이전?

        • "Both Matthew and Luke assign Jesus' birth to "the days when Herod was king of Judea" -consequently before 3 B.C. Luke, however, describes Jesus as "about thirty years old" when John bptized him "in the fifteenth year of Tiberius" -i.e., A.D. 28-29; this would place Christ's birth in the year 2-1 B.C. Luke adds that "in thjose days there went out a decree of Caesar Agustus that all the world should be taxed . . . when Quirinius was governonr of Syria." Quirinius is known to have been legate in Syria between A.D. 6 and 12; Josephus notes a census by him in Judea, but ascribes it to A.D. 6-7; we have no futher mention of this census. Tertullian records a census of Judea by Saturninus, governon of Syria 8-7 B.C.; if this is the census that Luke had in mind, the bith of Christ would have to be palced before 6 B.C." -- Will Durant, Caesar and Christ, Simon and Schuster, 1994, p. 557-558

        BC 3/2년 ?
        • "If we remember the prevailing tradition represented by the majority of the early Christian scholars dated the birth of Jesus in 3/2 B.C., and if we accept the time of Herod's death as between the [lunar] eclipse of Jan 9/10 and the Passover of April 8 in the year 1 B.C., then we will probably date the nativity of Jesus in 3/2 B.C., perhaps in mid-January in 2 B.C." p. 319, §549. Jack Finegan, Handbook of Biblical Chronology, rev. ed. (1998)
        • "I believe that there are seven historical and biblical factors that show the reasonableness of a 3 or 2 BC birth for Jesus." p. 86. -- Ernest L. Martin,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9

        여기서는 헤롯대왕의 사망에 관한 현대의 표준이론인 BC 4년설과 전통적인 BC 1년 설 두가지를 다루도록 하겠다.


        3.1. 표준연표 : 헤롯의 사망연도 = BC 4년?

        헤롯의 사망연도를 BC 4년으로 설명한 첫 시도는 1605년 폴란드의 역사가 Laurentius Suslyga에 의한 것이다. 그는 (1) 요세푸스의 기록 중 헤롯대왕의 연대기 (2) 헤롯 필립포스의 연대기 (3) 아우구스투의 딸 율리아의 유배시기 등을 바탕으로 BC 4년을 헤롯대왕의 사망일로 추정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이 주장을 발전시켜서 BC 4년 3월 14일의 월식을 요세푸스가 헤롯대왕의 죽음 얼마 전에 있었다는 그 월식으로 해석했다.

        현재 BC 4년은 헤롯대왕의 사망연도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연도이며, Emil Schürer의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Time of Jesus Christ} 이후 학계의 표준이론이 되었다.


        Emil Schürer,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Time of Jesus Christ}
        https://archive.org/stream/historyofjewishp01sch



        우선, 쉴러와 그 지지자들의 논증근거를 정리해 보자.


        3.1.1. 헤롯의 통치기간

        요세푸스는 다른 저작에서 조금 다른 헤롯의 통치기간을 언급하는데 (Antiquities XVII, 190; War, I, 665), 헤롯의 통치기간은 예루살렘을 폼페이누스와 공략할때 안티고누스 왕의 죽음 (BC 37년 혹은 36년) 으로부터 계수해서 34년이고, 로마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은 BC 40년으로부터 계수해서 37년이다.그렇게 되면 대략 BC 4-2년 사이가 헤롯대왕의 사망연도가 된다. (BC 3년에는 월식이 없다.)

        1. AND now Herod altered his testament upon the alteration of his mind; for he appointed Antipas, to whom he had before left the kingdom, to be tetrarch of Galilee and Perea, and granted the kingdom to Archclaus. He also gave Gaulonitis, and Trachonitis, and Paneas to Philip, who was his son, but own brother to Archclaus (10) by the name of a tetrarchy; and bequeathed Jarnnia, and Ashdod, and Phasaelis to Salome his sister, with five hundred thousand [drachmae] of silver that was coined. He also made provision for all the rest of his kindred, by giving them sums of money and annual revenues, and so left them all in a wealthy condition. He bequeathed also to Caesar ten millions [of drachmae] of coined money, besides both vessels of gold and silver, and garments exceeding costly, to Julia, Caesar's wife; and to certain others, five millions. When he had done these things, he died, the fifth day after he had caused Antipater to be slain; having reigned, since he had procured Antigonus to be slain, thirty-four years; but since he had been declared king by the Romans, thirty-seven. (11) A man he was of great barbarity towards all men equally, and a slave to his passion; but above the consideration of what was right; yet was he favored by fortune as much as any man ever was, for from a private man he became a king; and though he were encompassed with ten thousand dangers, he got clear of them all, and continued his life till a very old age. But then, as to the affairs of his family and children, in which indeed, according to his own opinion, he was also very fortunate, because he was able to conquer his enemies, yet, in my opinion, he was herein very unfortunate. ---{유대고대사} 17.8.1

        8. So Herod, having survived the slaughter of his son five days, died, having reigned thirty-four years since he had caused Antigonus to be slain, and obtained his kingdom; but thirty-seven years since he had been made king by the Romans. --- {유대전쟁사} 1.33.8

        또한 헤롯의 통치 7년 차는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를 패배시킨 해였고 유래없는 대지진이 유대아 일대에 있었다 (Antiquities 15.5.2). 악티움 해전은 BC 31년 9월 31일에 있었으므로, 이렇게 되면, 헤롯의 통치는 BC 37년이 된다. 이것은 안티고누스의 죽음으로부터 계수된 것과 같다.

        At this time it was that the fight happened at Actium, between Octavius Caesar and Antony, in the seventh year of the reign of Herod (8) and then it was also that there was an earthquake in Judea, such a one as had not happened at any other time, and which earthquake brought a great destruction upon the cattle in that country. About ten thousand men also perished by the fall of houses; but the army, which lodged in the field, received no damage by this sad accident. When the Arabians were informed of this, and when those that hated the Jews, and pleased themselves with aggravating the reports, told them of it, they raised their spirits, as if their enemy's country was quite overthrown, and the men were utterly destroyed, and thought there now remained nothing that could oppose them. --- {유대고대사} 15.5.2




        3.1.2. 월식

        요세푸스는 헤롯대왕의 죽음 얼마 전에 월식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BC 4년"설에서는 BC 4년 3월 13일의 월식이 요세푸스가 말한 그 월식인 것으로 이해한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7.6.4에서 인용한다.

        "...But the people, on account of Herod's barbarous temper, and for fear he should be so cruel and to inflict punishment on them, said what was done was done without their approbation, and that it seemed to them that the actors might well be punished for what they had done. But as for Herod, he dealt more mildly with others [of the assembly] but he deprived Matthias of the high priesthood, as in part an occasion of this action, and made Joazar, who was Matthias's wife's brother, high priest in his stead. Now it happened, that during the time of the high priesthood of this Matthias, there was another person made high priest for a single day, that very day which the Jews observed as a fast. The occasion was this: This Matthias the high priest, on the night before that day when the fast was to be celebrated, seemed, in a dream, 1 to have conversation with his wife; and because he could not officiate himself on that account, Joseph, the son of Ellemus, his kinsman, assisted him in that sacred office. But Herod deprived this Matthias of the high priesthood, and burnt the other Matthias, who had raised the sedition, with his companions, alive. And that very night there was an eclipse of the moon..." --- {유대고대사} 17.6.4




        3.1.3. 헤롯의 아들들의 집권기간 

        로마 역사가 캇시우스 디오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스가 권좌에 오른 후 로마 콘술 Aemalius Lepidus와 L. Arruntuis 의 임기에 실각했다고 기록한다. 그해는 그렇다면 AD 6년이 된다.

        캇시우스 디오를 인용한다.

        "...25 After this, in the consulship of Aemilius Lepidus and Lucius Arruntius, when no revenues for the military fund were being discovered that suited anybody, but absolutely everybody was vexed because such an attempt was even being made..." --- Dio Cassius 55.24.9.25

        "...6 These were the events in the city that year. In Achaia the governor died in the middle of his term and instructions were given to his quaestor and to his assessor (whom, as I have stated, we call envoy) for the former to administer the province as far as the Isthmus and the other the remainder. Herod of Palestine, who was accused by his brothers of some wrongdoing or other, was banished beyond the Alps and a portion of the domain was confiscated to the state..." --- Dio Cassius, 55.27.6.

        헤롯을 이어 유대아 일대의 통치자가 되는 그의 아들들이 주조한 주화들을 보면, 대체로 BC 4년부터 그의 통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 헤롯을 이은 세 아들들 (아켈라오스, 안티파스, 필립포스)이 발행한 주화들의 발행연도를 살펴보자. 세 명의 재위기간은 일단 표준연표에 따르겠다

        우선 헤롯 아켈라오스 (BC 4년 - AD 6년)가 발행한 주화들은 연대가 불분명하다. 한편, 갈릴리의 분봉왕(tetrarch)인 헤롯 안티파스 (BC 4년 - AD 39년)가 발행한 주화들은 연대가 확정되어 있다. 주화는 그가 새 수도인 티베리아스로 옮긴 후부터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주화 중 가장 이른 것의 제작연도는 재위 24년 (AD 19/20년)이다. 그는 AD 39년에 칼리귤라 황제에 의해 축출당했고, 그해가 그의 집권 43년 임을 입증하는 주화가 남아있다.

        파니아스에 도읍을 정한 헤롯 필립포스 1세(BC 4년 - AD 34년)가 지배하던 지역은 유대인 지역이 아니었다. 그의 주화에는 로마황제라거나 헤롯대왕이 파니아스 건립한 이교신전 등이 등장하며 가장 이른 것은 재위 5년부터 시작한다.




        3.2. "BC 4년"설의 문제점

        1960년대 중반부터 몇몇 역사학자들이 쉴러가 계산한 헤롯대왕의 재위시기에 대해 이견을 내어놓았다. Jack Finegan은 1964년에 {Handbook of Biblical Chronology} (284-291)에서 쉴러의 이론을 버리고 예수의 탄생을 BC 3/2년에, 헤롯대왕의 죽음을 BC 1년에 위치시키는 새로운 연표를 발표했다.

        이 주장을 따르는 대표적인 논문들과 책들 가운데 내가 참조한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 W.E. Filmer, {Chronology of the Reign of Herod the Great,}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ns 17 (1966) 283–298
        • Ormond Edwards, {Herodian Chronology}, Palestine Exploration Quarterly 114 (1982) 29–42
        • Jerry Vardaman (Author), Edwin M. Yamauchi (Editor) ,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1989
        • Paul Keresztes, {Imperial Rome and the Christians: From Herod the Great to About 200 A.D.} (Lanham, M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9) 1–43

        가장 최근 논문으로는 Andrew E. Steinmann의 논문 {When Did Herod the Great Reign?} (Novum Testamentum 51 (2009) pp 1-29)를 참조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쉴러의 표준연표가 가지는 문제점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3.2.1. 헤롯대왕의 통치기간에 대한 요세푸스의 다른 기록방식

        위에 언급한 대로, 요세푸스의 계산에 따르면 헤롯의 사망시점은 BC 4년에서 2년에 겹친다. 요세푸스는 대체로 헤롯의 즉위로부터 로마의 연표에 맞춘 연대기를 기술해 나갔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부분은 그런 연대기 표기방식이 예수의 탄생 얼마 전인 헤롯의 재위 28년에 끝난다는 것이다. 요세푸스가 다시 로마의 연표를 이용해서 서술하기 시작하는 때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의 재임 10년 차인 AD 6년이며, 이때부터 유대전쟁이 벌어지는 AD 66-73년까지는 다시 로마연표를 참조한 연대기를 작성한다.

        결과적으로 요세푸스가 이 무렵 유대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남긴 사건들의 상대적 전후관계만 의존해서 연대기를 재구성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당시의 사건 (가령, 아우구스투스/퀴리니우스의 등록령, 월식, 유월절)을 무엇으로 맞추느냐에 따라 헤롯의 사망연도는 들쭉날쭉하게 된다.

        헤롯 재위 28년부터 아켈라오스 재임 10년에 걸치는 약 10여 년의 (추정)기간은 유대인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 벌어진 시점이었다. 가령, 헤롯의 처 가운데 하나인 마리암네의 자식들이 처형당했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맹세를 거부한 6000여 명의 바리새인들의 서약거부 사건이 있었고, 헤롯과 공동으로 국정을 수행하던 장남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을 시해하려는 음모로 기소되어 로마로 보내졌고, 헤롯의 형제인 페로라스가 죽었고, 안티파트로스에 대한 헤롯의 친국이 이어졌고, 로마의 황금독수리상이 부숴지는 사태가 발생했고, 두 명의 랍비가 본보기로 처형되었고,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의 손에 처형당했다. 이 사건 어느 것도 요세푸스가 이 전에 사용한 벤치마크 연도 (즉 올림피아드나 악티움 해전)에 참조되어 기술되지 않았다.




        3.2.2. 아우구스투스의 포고령

        제 2부에서 설명했다시피, 로마 전역에서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은 BC 3/2년 무렵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요세푸스는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한 6000여 명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헤롯의 처벌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즉 헤롯이 BC 3/2년에도 살아있었다는 뜻이 된다.

        3.2.3. 월식부터 사망까지의 기간

        요세푸스는 헤롯대왕이 월식이 있은 후부터 이어지는 유월절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지만 연도를 특정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월식을 BC 4년 3월 13일에 발생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 그 해의 유월절은 30일 후에 오게 된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이 한 달 남짓의 기간에 발생한 너무나 많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대체로 한 달 안에 일어나기에는 빠듯한 사건들의 배열이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출처: Ant. XVII.vi.5-ix.3; Wars I.xxxiii.5-9).

        1. 월식 전날 헤롯은 그가 성전 동쪽 문에 설치한 로마의 금독수리를 파괴한 혐의로 저명한 바리사리/바리새파 랍비 두 명을 산 채로 화형시켰다.
        2. 훨식 다음날, 헤롯의 병이 위중해져서 여러 부위가 곪고 벌레가 생겼다
        3. 에리코/여리고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사해 동편의 온천에서 휴양을 했으나 차도가 없어 왕궁으로 돌아왔다
        4. 헤롯의 아들 안티파트로스가 처형당했고, 헤롯은 그로부터 5일 후 죽는다 (자신의 즉위 34년 하루 후).
        5. 화려한 국장이 치러졌다.
        6. 장례일로부터 7일 간의 애도기간 (shiva)이 시작되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3.9.5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장례 애도기간 (Sheloshim) 이것은 (장례일로부터) 30일이었다)
        7. 월식이 있은 밤 전날 헤롯에 의해 처형당했던 유대인들을 애도하는 또 다른 애도가 이어졌다.
        8. 이어지는 유월절




        3.2.3. 다른 월식들의 문제

        요세푸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연도와 날짜가 불분명한) 단 한 건의 월식만을 기록한다. 그러나 사실 그 무렵에는 여러 건의 월식이 있었다. 천문학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 BC 4년 : 3/13 (1차, 부분월식/35%), 9/2 (2차)
        • BC 3년 : 없음
        • BC 2년 : 1/16 (1차), 7/17 (2차, 부분월식/81%)
        • BC 1년 : 1/9-10 (완전월식), 12/29 (부분)
        • AD 1년 : 없음
        • AD 2년 : 11/4

        헤롯의 사망은 이 월식 중 하나와 인접한 유월절 (니산 14일) 사이에 있었다. 그럼 그 무렵의 유월절을 살펴보자.

        • BC 4년 : 4/10
        • BC 3년 : 3/29
        • BC 2년 : 3/18
        • BC 1년 : 4/6
        • AD 1년 : 3/27
        • AD 2년 : 4/14

        유대아 일대에서 월식은 거의 매 년 (종종 일년에도 여러 차례) 관측된다. 만약 (요세푸스가 암시하는 대로) 처형이 늦은 오후에 있었고, 그래서 월식이 초저녁 무렵에 관측된 것이라면, BC 10-AD 1년 사이에 있었던 여러 건의 월식 가운데, (1) BC 4년 3월 13일, (2) BC 1년 1월 10일의 월식은 다소 부적절하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그 이유는 이 두 건의 월식은 일몰 후 6시간 후인 자정무렵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BC 5년 9월 15일에 있었던 월식은 일몰 후 3시간 뒤에 발생했다.

        이 기준에 가장 잘 부합하는 월식은 BC 1년 12월 29일에 있었던 월식이다. 달은 (처형이 집행된 여리고에서) 관측 가능한 고도(동쪽 3도)에 있었고, 월식은 일몰 후 20분 후에 시작되었다. 만약 이 월식이 요세푸스가 말한 그 월식이라면, 헤롯의 사망일은 BC 4년이 아니라 AD 1년이 된다.

        한편, BC 1월 9일의 월식 역시 유력한 후보이다. 유대인의 기념일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는 문서 {Megillat Ta'anit }에 따르면, 헤롯의 죽음은 세밧(Shebat)월 2일로 되어있다.이 경우 가장 가능성 높은 헤롯의 사망일은 BC 1월 9일의 월식부터 유월절 사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문제의 월식부터 유월절까지는 92일이 된다. 이 정도의 기간이라면 위에 언급된 헤롯이 죽기 전과 그 후의 시간표가 설명되기 충분하다.




        3.2.5. BC 6/5년의 시리아 총독: 바루스? 사투르니누스?

        요세푸스는 헤롯이 죽었을 때, 바루스가 시리아 총독이었다고 진술했다. 동전에 따르면 바루스는 확실히 BC 4년 직전까지 시리아 총독이었다. 문제는 로마측 사료에 따르면 바루스는 BC 6/5년에도 시리아 총독이지만,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의 사망 2/3년 전 시리아를 관할한 총독은 사투르니누스가 된다. 따라서 로마의 사료가 틀렸거나 요세푸스의 진술이 틀린 것이 된다

        만약 로마측 사료와 요세푸스가 모두 맞다면, 이것은 헤롯의 사망을 BC 4년으로 보는 관점이 틀린 것이라는 결론이 된다. 즉, 누가 시리아의 총독이었는지가 불분명한 BC 4-AD 1년 사이에 바루스가 총독으로 재임명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추론이다.


        3.2.6.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행적 문제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이 죽은 무렵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체제의 제 2인자로서 헤롯 아켈라오스의 송사에 개입해 있었다.

        ...4. Sabinus did also afford these his assistance to the same purpose by letters he sent, wherein he accused Archelaus before Caesar, and highly commended Antipas. Salome also, and those with her, put the crimes which they accused Archelaus of in order, and put them into Caesar's hands; and after they had done that, Archelaus wrote down the reasons of his claim, and, by Ptolemy, sent in his father's ring, and his father's accounts. And when Caesar had maturely weighed by himself what both had to allege for themselves, as also had considered of the great burden of the kingdom, and largeness of the revenues, and withal the number of the children Herod had left behind him, and had moreover read the letters he had received from Varus and Sabinus on this occasion, he assembled the principal persons among the Romans together, (in which assembly Caius, the son of Agrippa, and his daughter Julias, but by himself adopted for his own son, sat in the first seat,) and gave the pleaders leave to speak. --- {유대전쟁사} 2.2.4

        ....5. Now when Archelaus had sent in his papers to Caesar, wherein he pleaded his right to. the kingdom, and his father's testament, with the accounts of Herod's money, and with Ptolemy, who brought Herod's seal, he so expected the event; but when Caesar had read these papers, and Varus's and Sabinus's letters, with the accounts of the money, and what were the annual incomes of the kingdom, and understood that Antipas had also sent letters to lay claim to the kingdom, he summoned his friends together, to know their opinions, and with them Caius, the son of Agrippa, and of Julia his daughter, whom he had adopted, and took him, and made him sit first of all, and desired such as pleased to speak their minds about the affairs now before them. Now Antipater, Salome's son, a very subtle orator, and a bitter enemy to Archelaus, spake first to this purpose:.. --- {유대고대사} 17.9.5

        로마 측 사료에 따르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BC 1년에 파르티아 변방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방에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있었다. 헤롯이 BC 4년에 죽었다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BC 4년에서 BC 1년 사이에 로마에 머물렀어야 한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이 무렵 행적을 알려주는 사료는 충분치 않지만 꽤 타당한 추정이다.

        헤롯의 죽음을 이른 AD 1년 (그리고 아마도 이른 BC 1년?)으로 보는 경우도 약간의 가정을 더 필요로 하지만 무리한 정황은 아니다. 콘술의 업무를 반드시 로마에서 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율리우스력) AD 1년 1월 1일부터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두 명의 콘술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본인은 BC 5년과 2년에 콘술이었고,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콘술직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서의 경력을 쌓게하기 위한 배려였다.) 로마 역사가 디오 캇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AD 1년 초에 파르티아의 왕인 프라타케스(Prataces)와 잠정적 휴전에 동의했는데 그 무렵 가이우스는 "시리아에 주둔하면서" 콘술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Cassius Dio Cocceianus, {Dio's Roman history, tr. Cary, Earnest, 1879-; Foster, Herbert Baldwin, 1874-1906
        https://archive.org/stream/diosromanhistory06cassuoft

        When the barbarians heard of Gaius' expedition, Phrataces sent men to Augustus to explain what had occurred and to demand the return of his brothers on condition of his accepting peace. The emperor [AD 1년 -- 필자 주] sent him a letter in reply, addressed simply to " Phrataces," without the appellation of " king," in which he directed him to lay aside the royal name and to withdraw from Armenia. Thereupon the Parthian, so far from being cowed, wrote back in a generally haughty tone, styling himself " King of Kings " and addressing Augustus simply as " Caesar." Tigranes did not at once send any envoys, but when Artabazus somewhat later fell ill and died, he sent gifts to Augustus, in view of the fact that his rival had been removed, and though he a,d. i did not mention the name " king " in his letter, he really did petition Augustus for the kingship. Influenced by these considerations and at the same time fearing the war with the Parthians, the emperor accepted the gifts and bade him go with good hopes to Gaius in Syria.

        .... others who marched against them from Egypt, and did not yield until a tribune from the pretorian guard was sent against them. This man in the course of time checked their incursions, with the result that for a long period no senator governed the cities in this region. Coincident with these events^ there was an outbreak on the part of the Germans. Somewhat earlier Domitius, while still governing the districts along the Ister, had intercepted the Hermunduri, a tribe which for some reason or other had left their own land and were wandering about in quest of another, and he had settled them in a part of the Marcomannian territory ; then he had crossed the Albis, meeting with no opposition, had made a friendly alliance with the barbarians on the further side, and had set up an altar to Augustus on the bank of the river. Just now he had transferred his headquarters to the Rhine, and in his desire to secure the return of certain Cheruscan exiles through the efforts of other persons had met with a reverse and had caused the other barbarians likewise to conceive a contempt for the Romans. This was the extent, however, of his operations that year ; for in view of the Parthian war which was impending no attention was paid to the Germans at this time.

        Nevertheless, war did not break out with the [AD 1년 -- 필자 주] Parthians, either. For Phrataces, hearing that Gaius was in Syria, acting as consul, and, furthermore, having suspicions regarding his own people, wlio had even before this been inclined to be disloyal to him, forestalled action on their part by coming to terms with the Romans, on condition that he himself should renounce Armenia and that his brothers should remain beyond the sea. The Armenians, however, in spite of the fact that Tigranes had perished in a war with barbarians and Erato had resigned her sovereignty, nevertheless went to war with the Romans because they were being handedover to a Mede, Ariobarzanes, who had once come to the Romans along with Tiridates. This was in the [AD 2년 -- 필자 주] following year, when Publius Vinicius and Publius Varus were consuls. And though they accomplished nothing worthy of note, a certain Addon, who was [AD 3년 -- 필자 주] holding Artagira, induced Gaius to come up close to the wall, retending that he would reveal to him some of the Parthian king's secrets, and then wounded him, whereupon he was besieged. He held out for a long time ; but when he was at last captured, not only Augustus but Gaius also assumed the title of imperator, and Armenia was given by Augustus and the senate first to Ariobarzanes and then upon his death a little later to his son Artabazus. Gaius became ill from his wound, and since he was not robust to begin with and the condition of his health had impaired his mind, this illness blunted his faculties still more. At last he begged leave to retire to private life, and it was his desire to remain somewhere in Syria. ugustus, accordingly, grieved at heart, communicated his wish to the senate, and.... --- Dio lv.10.4, from Cary, E., {Dio's Roman History}

        분명치는 않지만, AD 1년의 휴전으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 일시적으로나마 머무르면서 로마에서 콘술의 업무를 볼 여유가 생겼을 듯 싶다. 하지만 디오는 가이우스가 이 기간 동안 시리아에 계속 주둔했는지 혹은 로마를 방문했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다. AD 2년 아르메니아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데, 참전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부상을 입고 AD 4년에 사망한다.




        3.2.7. 율리아(Julia) 문제

        요세푸스 Wars I.xxxi.1
        Suetonius, Augustus LXIII-LXV; Tiberius IV,3.

        헤롯대왕의 아들 중 하나로 분봉왕 중 하나인 헤롯 안티파스는 베트람프타 (=베트-하란)을 성곽을 갖춘 도시로 승격시키면서 그 이름을 "율리아스" (혹은 "리비아스')로 개명했는데, 요세푸스는 이 이름이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기록한다.

        한편, 헤롯 필리포스는 소규모 마을이던 벳사이다 (Bethsaida, 벳세다) 를 도시 (polis)로 승격해 이를 '율리아스'라고 명명했는데,  요세푸스는 이번에는 이 "율리아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방탕한) 딸인 율리아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1. WHEN Cyrenius had now disposed of Archelaus's money, and when the taxings were come to a conclusion, which were made in the thirty-seventh year of Caesar's victory over Antony at Actium, he deprived Joazar of the high priesthood, which dignity had been conferred on him by the multitude, and he appointed Ananus, the son of Seth, to be high priest; while Herod and Philip had each of them received their own tetrarchy, and settled the affairs thereof. Herod also built a wall about Sepphoris, (which is the security of all Galilee,) and made it the metropolis of the country. He also built a wall round Betharamphtha, which was itself a city also, and called it Julias, from the name of the emperor's wife. When Philip also had built Paneas, a city at the fountains of Jordan, he named it Cesarea. He also advanced the village Bethsaids, situate at the lake of Gennesareth, unto the dignity of a city, both by the number of inhabitants it contained, and its other grandeur, and called it by the name of Julias, the same name with Caesar's daughter. --- {Antiquities, 18.2.1, --- William Whiston William Whiston 번역 (1737)

        이 진술에 따라 BC 4년설을 지지하는 역사학자들은 이 도시는 BC 2년 이전에 건설되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즉, 필립포스가 BC 2년 이전에 집권했었어야 한다는 뜻일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아를 BC 2년에 유배시켰기 때문에, 처벌당한 아우구스투스의 "딸의 이름을 딴 도시를 세운다는 것은 비상식적이지 않겠는가? ---- 라는 것이 BC 4년설 지지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요세푸스 (혹은 필사자)의 착오라고 볼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선 로마제국 전역에는 '콜로니아 율리아' (줄여서 '율리아스')라 명명된 로마 식민도시들이 있었다. 가령, BC 45년에 현재 프랑스 남프랑스 일대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운 Colonia Iulia Paterna Arelatensis Sextanorum나 Colonia Iulia Paterna Claudius Narbo Martius Decumanorum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헤롯대왕에 의해 BC 14년 현재 레바논 베이루트에 건립된 요새도시 Colonia Iulia Augusta Felix Berytus 역시 그런 경우다. 이 경우 '율리아'는 아우구스투스의 딸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니라,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계승하는 이른바 '율리우스 황가'를 뜻하는 것이다. 남성이름이 도시의 이름에 붙여질때 여성화되는 다른 한 예로는, 헤롯이 자신이 한때 지지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헌정한 요새도시 '안토니아'가 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28.2.3 에 따르면, 티베리우스 황제와 가까왔던 헤롯 안티파스의 경우 게네사렛 호수를 낀 도시 티베리아스 Τιβεριάς를 건설해 티베리우스에게 헌정했는데, 이는 "티베리우스"의 여성형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AD 130년에 폐허화 된 예루살렘에 건립한 신도시 아엘리아 카피톨리아 (Aelia Capitolia) 역시 그의 가문명 Aelius을 여성화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처 리비아의 본명은 리비아 드루실라 (BC 58 - AD 29)로, 남편인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AD 14년에 그의 유언에 따라 재산의 1/3을 상속받는 한편 율리우스 가문에 공식으로 입양되어 "율리아"를 가문명 (gens)으로 받고 "아우구스타"란 호칭을 받게 된다.

        타키투스의 기록이다.


        Cornelius Tacitus, {The Annals}
        https://archive.org/stream/annalsbooksivi00tacigoog

        Tiberius and Livia were his [Augustus Caesar's] heirs, and Livia was adopted into the Julian family with the name 'Augusta.'" --- Tacitus, {Annals} 1.8

        티베리우스와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상속인이 되었고, 리비아는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되어 '아우구스타'란 이름을 받았다  --- 타키투스, {연감} 1.8 / 번역: 최광민

        이후 리비아는 "율리아 아우구스타"라는 공식 이름으로 로마인들에게 불렸다. 나중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리비아를 신격화하여 "디바 아우구스타"란 호칭으로 리비아에게 디바/여신의 지위를 부여했다.

        헤롯 필립포스는 8세에서 18세까지 로마에서 교육받았으며, 거의 확실히 아우구스투스의 처인 리비아와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필립포스의 숙모가 리비아와 가까운 친구였고, 또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들인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와 라틴어 수업을 같이 들었기 때문이다. 1966년의 벳사이다 발굴조사 중 로마신전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리비아 율리아 (즉, 아우구스투스의 처)"의 상과 필립포스와 리비아의 이름이 적힌 동전들이 발굴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처 리비아는 AD 29년에 사망했으므로, 이 신전은 그녀에게 헌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 벳사이다는 AD 30/31년 경, '율리아스'로 개명되면서 '폴리스'급으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이 벳사이다가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의 이름을 딴 것"이란 요세푸스의 진술은 틀린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2.8. 헤롯의 아들들의 집권연대

        이 문제는 헤롯대왕의 죽음을 BC 1년으로 잡는 가설의 가장 걸림돌 가운데 하나다. 일단 헤롯대왕의 아들 안티파트로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JUDAEA, Herodian Kings. Herod IV Philip, with Tiberius. 4 BCE-34 CE. Æ 17mm (5.51 gm, 12h). Paneas (Banias) mint. Dated RY 34 (30/1 CE). Bare head of Tiberius right; laurel branch to right / Tetrastyle temple (Augusteum) with pellet in pediment; date between columns. Meshorer 106; RPC I 4948; Hendin 538. Good VF, desert patina. Nice example of these usually poorly struck coins. (Source: wikimedia commons)

        요세푸스는 자신의 역사저술에서 매 권을 선대왕의 죽음 (즉, 새 정권의 시작)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유대고대사} 제 14권에서 요세푸스는 왕자들의 죽음으로부터 해당 권을 시작한다.

        헤롯은 물론 죽을 때까지 통치를 했지만, 집권 중에 아들 안티파트로스를 국정에 참여시켜서 사실상 양두체제를 구성했다. 이 체제는 상당히 의외의 것이었는지 요세푸스는 선례가 없는 것이라고 적었다. 심지어 안티파트로스는 헤롯과 같이 왕을 암시하는 자주빛의 의복을 입었다.

        "...However, he governed the nation jointly with his father, being indeed no other than a king already; and he was for that very reason trusted, and the more firmly depended on, for the which he ought himself to have been put to death, as appearing to have betrayed his brethren out of his concern for the preservation of Herod, and not rather out of his ill-will to them, and, before them, to his father himself: and this was the accursed state he was in....2. Now Quintilius Varus was at this time at Jerusalem, being sent to succeed Saturninus as president of Syria, and was come as an assessor to Herod, who had desired his advice in his present affairs; and as they were sitting together, Antipater came upon them, without knowing any thing of the matter; so he came into the palace clothed in purple..." --- {유대고대사} 17.1.1-2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에서 반역죄로 기소된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에게 한 변론을 옮기고 있는데, 안티파트로스는 자신이 이미 아버지와 공동으로 (실질적인) 왕위에 있었으므로 반역 따위를 자기가 꾀할 필요가 없었다고 항변한다.

        3. Upon Herod's saying this, he was interrupted by the confusion he was in; but ordered Nicolaus, one of his friends, to produce the evidence against Antipater. But in the mean time Antipater lifted up his head, (for he lay on the ground before his father's feet,) and cried out aloud, "Thou, O father, hast made my apology for me; for how can I be a parricide, whom thou thyself confessest to have always had for thy guardian? Thou callest my filial affection prodigious lies and hypocrisy! how then could it be that I, who was so subtle in other matters, should here be so mad as not to understand that it was not easy that he who committed so horrid a crime should be concealed from men, but impossible that he should be concealed from the Judge of heaven, who sees all things, and is present every where? or did not I know what end my brethren came to, on whom God inflicted so great a punishment for their evil designs against thee? And indeed what was there that could possibly provoke me against thee? Could the hope of being king do it? I was a king already. Could I suspect hatred from thee? No. Was not I beloved by thee? And what other fear could I have? Nay, by preserving thee safe, I was a terror to others. Did I want money? No; for who was able to expend so much as myself? Indeed, father, had I been the most execrable of all mankind, and had I had the soul of the most cruel wild beast, must I not have been overcome with the benefits thou hadst bestowed upon me? whom, as thou thyself sayest, thou broughtest [into the palace]; whom thou didst prefer before so many of thy sons; whom thou madest a king in thine own lifetime, and, by the vast magnitude of the other advantages thou bestowedst on me, thou madest me an object of envy.

        ...(전략) 도대체 제가 아버지께 반역을 꾀할 이유가 뭡니까? 제가 왕이라도 되고 싶어서 그랬습니까? 저는 이미 왕이었습니다! 혹시 아버지의 미움을 받고있다고 제가 의심했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지 않았습니까? ...(후략)  ---
        {The Wars Of The Jews} Book1, Ch.32.3 / 번역: 최광민

        헤롯이 처음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원하다가 대세에 따라 장차 아우구스투스가 될 옥타비아누스로 배를 갈아탄 후부터 헤롯과 옥타비아누스는 오랜 기간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사투르니누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직후, 헤롯은 자신의 군대를 아라비아에 파병해 사막에 은신한 강도단을 척결하고 자기에게 부채가 있는 아라비아의 토호들에게서 돈을 걷어들였다. 비록 헤롯의 파병이 시리아 총독의 허락 하에 군사행동을 취한 것이긴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아라비아인인 실레우스/Syliaeus의 말만 듣고 분노하여 헤롯에게 부여된 "황제의 친구 / Amici Caesaris"의 지위를 박탈했다. 이로써 헤롯의 지위는 황제의 '예속민'으로 강등당하게 된다.

        요세푸스는 적는다.

        "...Caesar was provoked when this was said, and asked no more than this one question, both of Herod's friends that were there, and of his own friends, who were come from Syria, Whether Herod had led an army thither? And when they were forced to confess so much, Caesar, without staying to hear for what reason he did it, and how it was done, grew very angry, and wrote to Herod sharply. The sum of his epistle was this, that whereas of old he had used him as his friend, he should now use him as his subject....” --- {유대고대사} 16.9.3

        헤롯이 안티파트로스를 국정파트너로 삼은 사건에는 이런 정치적 사정이 있는 듯 하다. 원래 헤롯대왕과 첫 아내 도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였던 안티파트로스는, 헤롯이 도리스와 이혼하고 하스모니안 왕가의 계승자인 마리암네와 결혼을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유배를 당했던 과거가 있다.

        표준연표에 따르면, 안티파트로스는 마리암네의 권력이 몰락하던 BC 13년 무렵 다시 권력을 잡아 헤롯의 계승순위 1위가 되었다. 이후 헤롯과 마리암네 사이에서 태어난 (하스모니안 왕가의 정통계승자인)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스토불로스 역시 왕위 계승권에 들어오자 안티파트로스는 두 형제를 살해했다.

        이어 헤롯대왕이 사망하기 2년 조금 더 전에는 헤롯대왕의 막내동생이자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이던 삼촌 페로라스를 살해했다. 안티파트로스의 계획들이 밝혀진 후 안티파트로스 대신 아켈라오스가 헤롯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로마에 있던 안티파트로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혐의를 받아 시리아 총독이었던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의 소환령을 받고 유죄가 선고되었고, 유대아로 돌아온 직후 아버지 헤롯에 의해 직접 사형당했다.




        헤롯 아켈라오스

        헤롯대왕은 사망하기 얼마 전 후계자를 아켈라오스에서 안티파스로 변경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그는 최후 유언장에서는 다시 아켈라오스를 유대-이두매 왕국의 계승자로 정했다 (Ant. XVII.i.1, XVII.ii.4, Wars I.xxiii.5. ).

        아켈라오스의 경우 자신의 형제 안티파트로스의 지위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자신의 집권시점을 안티파트로스가 헤롯과 함께 국정보조를 시작한 시점에 맞추는 것은 타당한 조치로 여겨진다. 아켈라오스가 안티파트로스를 대신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것은 헤롯대왕이 죽기 2년 전이다. 중간에 헤롯대왕이 계승자를 한차례 안티파스로 변경하긴 했지만 또 다시 아켈라오스가 계승자로 지명되었다면, 헤롯대왕이 죽기 2년 전부터 아켈라오스는 안티파트로스와 유사한 형태로 국정에 개입했을 수 있다. 만약 헤롯이 BC 1년에 사망한 것이라면, 아켈라오스는 자신의 집권을 안티파트로스가 실각한 시점 (이 경우 BC 4년 하반기)에 맞출 충분한 근거가 된다. 안티파트로스 및 세 형제가 같은 시기에 헤롯의 국정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사료가 충분하지 않아 사실여부를 알 수 없다.

        집권시점에 대한 소급적용은 고대세계에서 꽤 관용적이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왕들의 재위연도에서도 그런 사례가 발견된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재위의 시작은 종종 실제 대관일이 아니라 왕권의 정당성을 얻은 시점으로 소급되었다. 가령, BC 2세기의 폰투스 왕가는 자신들의 조상인 미트리다테스 1세가 키우스(Cius)의 총독을 몰아낸 시점을 BC 336년으로 잡았는데, 사실 폰투스 왕가는 미트리다테스 3세 이전까지는 "왕"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로마의 사례 중에는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같은 군인황제들을 들 수 있는데, 로마 역사가 캇시우스 디오는 그들이 적용한 소급시점은 그들이 황제의 권좌에 근접할 만한 권력을 잡은 시점이라고 기록한다.

        캇시우스 디오를 인용한다

        "...For they did not succeed one another legitimately, but each of them, even while his rival was alive and still ruling, believed himself to be emperor from the moment that he even got a glimpse of the throne.." --- Dio, {Roman History}, 66.17.5

        ...그들은 합법적으로 [아우구스투스 직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수가 아직 살아서 통치하고 있는 동안에도 권좌에 오를 수 있을 낌새가 비쳐진 순간부터 그들 스스로를 황제라고 여겼다.....캇시우스 디오, {로마사} 66.17.5 / 번역: 최광민

        근세에는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 2세가 대표적인 예로, 실제 대관일은 1660년 5월 29일이었지만, 정치적인 이유에서 자신의 즉위일을 그보다 10여 년 앞선 1649년 1월 30일로 소급적용했다.

        물론 헤롯의 아들 셋이 자신들의 집권연대를 소급적용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더 분명한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헤롯 안티파스의 실제 집권연도

        갈릴리의 분봉왕을 맡게된 안티파스가 집권시점을 앞당겨 공표했을 여지 역시 충분하다. 안티파스는 삼촌 페로라스가 죽고 곧 갈릴리를 맡았다. 따라서 갈릴리의 지배자로서의 안티파스의 실질적인 집권시점은 헤롯대왕이 죽기 전 2년 전이 되는 것이다. 헤롯이 BC 1년에 죽었다면 그의 집권시점은 BC 4년 하반기가 된다.


        헤롯 필립포스의 집권 20년? 22년?

        헤롯의 다른 아들 필립포스의 경우를 보자. 표준 그리스어판 요세푸스 (Ant. XVIII.iv.6)에 따르면, 그는 티베리우스 20년 (AD 33/34년)까지 총 37년을 분봉왕으로 집권했다.

        6. About this time it was that Philip, Herod's ' brother, departed this life, in the twentieth year of the reign of Tiberius, (14) after he had been tetrarch of Trachonitis and Gaulanitis, and of the nation of the Bataneans also, thirty-seven years. He had showed himself a person of moderation and quietness in the conduct of his life and government; he constantly lived in that country which was subject to him; he used to make his progress with a few chosen friends; his tribunal also, on which he sat in judgment, followed him in his progress; and when any one met him who wanted his assistance, he made no delay, but had his tribunal set down immediately, wheresoever he happened to be, and sat down upon it, and heard his complaint: he there ordered the guilty that were convicted to be punished, and absolved those that had been accused unjustly. He died at Julias; and when he was carried to that monument which he had already erected for himself beforehand, he was buried with great pomp. His principality Tiberius took, (for he left no sons behind him,) and added it to the province of Syria, but gave order that the tributes which arose from it should be collected, and laid up in his tetrachy.

        결과적으로 그의 집권시점은 BC 4년이 된다.

        그런데 1966년 W. E. Filmer는 요세푸스 저작 사본에 등장하는 "티베리우스 20년"은 "티베리우스 22년"의 오기 임을 논증하면서, 19세기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인 Molkenbuhr가 1517년 파리 본과 1841년 바티칸 본에서는 "티베리우스 22년"임을 보고했음을 제시한다. 이 경우, 헤롯 필립포스의 집권시점은 BC 4년이 아닌 BC 2년 경이 된다.

        한편, 1995년 David W. Beyer는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요세푸스 {유대고대사}의 그리스어 에디션들 가운데 AD 1544년 이전에 나온 에디션 가운데 세 점을 제외한 전부가 "티베리우스 22년"으로 표기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이어서 미국 국회도서관에 보존된 5점 역시 "티베리우스 22년"임을 확인했다. 가장 오래된 AD 4-6세기의 사본 역시 "22년"으로 기록한다. 그렇다면 현재 유통되는 그리스어 에디션은 16세기부터 출판상 식자오류를 지닌 에디션에 바탕해 계속해 출판되어 왔다는 뜻이 될 것이다.


        David W. Beyer, {Jesephus Reexamined: Unraveling the 22 Years of Tiberius} in {Chronos, Kairos, Christos II}

        Steinmann:
        http://historiantigua.cl/wp-content/uploads/2011/08/When_Did_Herod_the_Great_Reign.pdf

        만약 요세푸스의 진술처럼 "티베리우스 22년 (즉, AD 36년)"이 "헤롯 필립포스의 총 집권 37년"이었다면, 헤롯이 사망한 시점은 BC 1년이 되며, 필립포스는 헤롯대왕의 사후 분봉왕으로서 집권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 내용은 1995년 [The Society of Bibllical Literature] 연례학회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도 헛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베이어가 조사한 1544년 이전의 그리스어 판본은 대영박물관과 미국국회도서관 장서들이다. 그가 조사한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AD 12세기의 필사본이다. 그런데 이것들보다 더 오래된 요세푸스의 사본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Codex Ambrosianae F 128 사본이며 AD 11세기에 필사되었다. 그리고 가장 신뢰할만한 필사본으로 여겨지는 Codex Vaticanus Graecus 984은 AD 1354년에 필사되었다.  그리고 이 두 필사본은 "티베리우스 2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해당 숫자들의 필사 정확도가 의심되는 라틴어 필사본은 일단 제외하도록 한다.)




        3.2.9. 헤롯의 영아살해

        {마태 복음서}를 제외하고 헤롯의 영아살해를 언급한 외부문헌으로는 (1) BC 1세기/AD 1세기 초반의 유대교 위경인 {모세의 승천}과 (2) 고대 말기의 지식을 백과사전식으로 집대성한 AD 5세기의 문법학자이자 신플라톤주의자 마크로비우스의 {사투르날리아} 제 2권 4장 11절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흔히 헤롯에 대해 일반적으로 적대적이었던 바리사이파이기도 했던 요세푸스가 이 사건을 기록하지 않은 점이 이 사건의 비-역사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저작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당대 중요했던 사건들도 여럿 있다. 따라서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베들레헴은 도시라기 보다는 마을 수준의 인구를 가진 곳으로, {마태/마태오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2살 이하의 남아가 살해되었더라도 그 수는 후대 중세시기에 '대학살' 식으로 과장된 숫자와는 달리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 학자는 베들레헴 추정인구를 바탕으로 "2세 이하 남아"를  20명 미만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요세푸스가 특별히 주목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일 수 있다. 물론 자료가 없어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을 확정하기 힘들다.

        위경 {모세의 승천}은 예언의 형식을 빌어 헤롯대왕의 폭정을 고발하고 있는데, 헤롯은 특별히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을 죽였던 것처럼" 유대인들을 죽일 것이라고 적는다. 학자들은 이 언급을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의 태어난 남자아기들을 죽인" 이야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언급되는 인물들과 사건들의 연대로 보아 이 문서의 작성시기를 헤롯대왕이 사망한 직후인 AD 1세기 초반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AD 70년 무렵까지로 본다면, 이 문서는 {마태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헤롯의 영아살해를 다룬 가장 오래된 문건이다. 현재 이 문건은 원래 히브리어로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리스어로 번역된 후 여기서 다시 라틴어로 번역된 라틴어 사본으로 남아있다.

        라틴어 원문과 R. H. Charles의 영어 번역을 옮긴 후 해당부분을 한국어로 번역하겠다.


        The Assumption of Moses : translated from the Latin sixth century ms., the unemended text of which is published herewith, together with the text in its restored and critically emended form. by Charles, R. H. (Robert Henry), 1855-1931
        https://archive.org/stream/assumptionofmose00unknuoft

        VI. quisquae volet tune 
        exurgent illis re
        ges imperantes et
        in sacerdotes sum
        mi dei vocabuntur
        facient facientes
        impietatem ab sancto

        2 sanctitatis* et succedit illis
        rex petulans qui
        non erit de genere
        sacerdotunr homo
        temerarius et im
        probus et judicabit
        illis quomodo dig

        3 ni erunt 1 qui elidit
        principales eorum
        gladkr et locis igno
        tis singuli et corpo
        ra illorum ut ne
        mo sciat ubi sint

        4 occidit majores
        natu et juvenes

        5 et non parcet* tune
        timor erit illius a
        cervus in eis in ter

        6 ram eorum et faci
        et in eis judicia quo
        modo fecerunt in
        illis aegypti per *xxx
        et *iiii* annos et pu

        7 niunt eos et . . rodu
        cit natos . . . eceden
        tes sibi breviora tern

        8 pora donarent in
        pares eorum mor
        tis venient et occi
        dentes rex potens
        quia expugnabit eos

        9 et ducent captives
        et partem aedis ipso
        rum igni incendit
        aliquos crucifigit
        circa coloniam eorum

        6 Then there shall be raised up unto them kings bearing rule, and they shall call themselves priests of the Most High God: they shall assuredly work iniquity in the holy of holies. And an insolent king shall succeed them, who will not be of the race of the priests, a man bold and shameless, and he shall judge them as they shall deserve. And he shall cut off their chief men with the sword, and shall destroy them in secret places, so that no one may know where their bodies are. He shall slay the old and the young, and he shall not spare. Then the fear of him shall be bitter unto them in their land. And he shall execute judgments on them as the Egyptians executed upon them, during thirty and four years, and he shall punish them. And he shall beget children, (who) succeeding him shall rule for shorter periods. Into their parts cohorts and a powerful king of the west shall come, who shall conquer them: and he shall take them captive, and burn a part of their temple with fire, (and) shall crucify some around their colony.  --- {Assumption of Moses} 6장

        ....[전략]....그 (=헤롯)는 늙은이와 젊은이들을 죽이는데 가차없을 것이다. 그 땅에 사는 이들 (=유대인들)이 그에 대한 공포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의 조상들 / 필자 주)에게 했듯, 34년 간 통치하며 그들을 죽이고 처벌할 것이다.  그의 자식들은 그보다 짧은 기간동안 통치할 것이며, 서방의 강력한 군주가 쳐들어와 그 땅을 정복할 것이며, 사람들을 사로잡고, 성전을 불태우고, 점령지에서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다....[후략].....  저자 미상, {모세의 승천} 6장 / 번역: 최광민



        한편, {사투르날리아} 제 2권에서 마크로비우스는 주로 키케로와 아우구스투스의 일화와 어록을 정리해 옮기고 있는데, 이 제 2권 4장은 아우구스투스의 유머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 4장 11절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우구스투스의 이 어록에는 "두 살 이하의 남아"와 헤롯의 아들 (안티파트로스?)의 사형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일로 함께 기술되어 있다. 참고로 아우구스투스 당시, 행정구역 상 유대아는 시리아의 일부로 여겨졌다



        "...Cum audisset inter pueros quos in Syria Herodes rex Iudaeorum intra bimatum iussit interfici filium quoque eius occisum, ait: Melius est Herodis porcum esse quam filium, --- Macrobius, {Saturnalia}

        ...유대인의 왕 헤롯이 시리아에서 두 살 이하의 남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과 자기 아들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말했다: "헤롯의 아들(=huios / υἱός)이 되느니 차라리 헤롯의 돼지(=hus / ὕς)가 되는게 낫겠군"...." -- 마크로비우스, {사투르날리아} / 번역 : 최광민

        아우구스투스의 발언은 그리스어로 아들/huios과 돼지/hus의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을 이용한 일종의 언어유희다. 유감스럽게도 마크로비우스가 어떤 소스에서 아우구스투스의 발언을 가져온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마크로비우스가 기독교도가 아니었고, 또 그때까지의 어느 기독교 교부들도 아우구스투스의 이 발언을 저작 속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볼때, 원 출처가 기독교 측이었다고 볼 이유는 특별히 없다.




        4. 정리

        예수로 부터 한 세대 정도 뒤의 인물이자 바리새/바리사이파 계열의 유대교 제사장 출신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생일"에 관한 당시 유대교의 율법규정에 대해 {아피온 반박} 제 2권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26. Nay, indeed, the law does not permit us to make festivals at the births of our children, and thereby afford occasion of drinking to excess; but it ordains that the very beginning of our education should be immediately directed to sobriety. It also commands us to bring those children up in learning, and to exercise them in the laws, and make them acquainted with the acts of their predecessors, in order to their imitation of them, and that they might be nourished up in the laws from their infancy, and might neither transgress them, nor have any pretense for their ignorance of them.

        (전략)....진실로 우리의 율법은 자녀의 생일을 경축하는 일을 금하고 있다.....(후략) --- 요세푸스, {아피온 반박} 제 2권 / 번역: 최광민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교는 개인의 생일을 경축하지 않았을 뿐더러 율법으로 금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도서} 7장의 내용을 반영한 것이다.

        좋은 이름 (=명예 / 필자 주)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 한국어 개역개정, {전도서} 7:2-7

        따라서 예수의 생일을 경축하는 일은 아마도 유대교를 믿는 예수 당시 대부분의 (혹은 최소한 바리새파) 유대인들의 문화 속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주로 팔레스티나에서 활동했던 오리게네스 (AD 184/185 – 253/254)에 따르자면 AD 3세기의 기독교도들 역시 개인의 생일을 축하하지 않았던 듯 싶다. 오리게네스의 {레위기 강론}은 이를 명시한다.

        Not one from all the saints is found to have celebrated a festive day or a great feast on the day of his birth. No one is found to have had joy on the day of the birth of his son or daughter. Only sinners rejoice over this kind of birthday....the saints not only do not celebrate a festival on their birth days, but, filled with the Holy Spirit, they curse the day. --- Origen, {Homilies on Leviticus} (VIII.3.2)

        성자들의 생일에 맞춰 교회의 축일의 정해진 경우는 없다. 누구도 아들과 딸의 생일을 기념했다는 경우가 없다. 오직 죄인들만이 이런 생일을 축하했을 따름이다. 성자들은 그들의 생일을 경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 날을 저주했다. --- 오리게네스, {레위기 강론} (VIII.3.2) / 번역: 최광민

        그는 AD 3세기 초반의 (최소한 이집트 교회 및 시리아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했던 교회축일을 적고 있는데, 여기에는 주일, 유월절 준비일, 유월절/부활절, 오순절이 언급되어 있지만 성탄절을 축제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을 축일로서 기념하는 일은 당시에 없었거나 혹은 모든 지역교회에 의무적으로 지켜진 것이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If it be objected to us on this subject that we ourselves are accustomed to observe certain days, as for example the Lord's day, the Preparation, the Passover, or Pentecost, I have to answer, that to the perfect Christian, who is ever in his thoughts, words, and deeds serving his natural Lord, God the Word, all his days are the Lord's, and he is always keeping the Lord's day. He also who is unceasingly preparing himself for the true life, and abstaining from the pleasures of this life which lead astray so many—who is not indulging the lust of the flesh, but "keeping under his body, and bringing it into subjection,"— such a one is always keeping Preparation-day. Again, he who considers that "Christ our Passover was sacrificed for us," and that it is his duty to keep the feast by eating of the flesh of the Word, never ceases to keep the paschal feast; for the pascha means a "passover," and he is ever striving in all his thoughts, words, and deeds, to pass over from the things of this life to God, and is hastening towards the city of God. And, finally, he who can truly say, "We are risen with Christ," and "He has exalted us, and made us to sit with Him in heavenly places in Christ," is always living in the season of Pentecost; and most of all, when going up to the upper chamber, like the apostles of Jesus, he gives himself to supplication and prayer, that he may become worthy of receiving "the mighty wind rushing from heaven," which is powerful to destroy sin and its fruits among men, and worthy of having some share of the tongue of fire which God sends. --- Origen, {Against Celsus} VIII 22

        ...우리는 주일, 유월절 준비일, 유월절 (=부활절), 오순절과 같은 날을 기념하며,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신의 로고스/말씀이신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 기독교도들은 모든 날들을 주님의 것으로 여기고 늘 주일을 준수한다..... 오리게네스, {켈수스를 반박하며} 8권 22장 / 번역: 최광민

        이것은 예수의 탄생일, 즉 크리스마스를 경축하는 기독교의 관례가 부활절이나 주현절과는 달리 상당히 오랫동안 정착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물론 요세푸스와 오리게네스의 진술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생일까지 몰랐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생일을 당연히 알고는 있었을 테지만, 그들은 그저 그 날을 "경축"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이유로 예수의 실제 탄생일에 대한 여러 이견들이 고대사회에 분분했던 것일까? 불분명한 여러 전승에 아울러 실제 크리스마스가 교회력에 정착되기까지 사용되던 여러 역법들이 그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것은 아닐까?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http://kwangmin.blogspot.com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12-30 2005-12-22 201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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