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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15-12-16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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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예수 vs. 예수 #10: 빌라도는 어떤 "총독"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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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예수 vs. 예수 #10: 빌라도는 어떤 "총독"이었을까?
폰티우스 필라투스 (빌라도) 앞에 선 예수, AD 6세기, 이탈리아 라베나 Basilica of Sant'Apollinare Nuovo in Ravenna,
# 방문자 포럼에 게시된 질문에 대한 답변
[질문]
"......제가 아는 바로 성경외에 예수에 대한 가장 유명한 기록 2가지는 요세푸스와 타키투스의 기록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로는 타락한 것으로 악명 높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치밀한 계획에 따라 희생양으로 조작해서 처벌했다. 그들의 시조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미신이 새롭게 일어나서 유대지방(그 해악이 시작된 곳)뿐만 아니라 로마에도 퍼졌다. 수도에서 온갖 타락하고 수치스러운 행사를 벌이며 번성했다." 이 문구는 짧긴 하지만 예수의 실존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라고 보는데요...
이것에 대해 아래와 같이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첫째, 타키투스는 이전의 문서를 참조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떠돌던 소문을 수집한 것입니다 타키투스가 그 이전의 문서를 참조했다면, 당연히 유대 사령관(praefectus Iudaeae : 1961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빌라도의 비석에 새겨진 직책이다)으로 빌라도의 직책을 밝혔어야 했으나, 총독을 의미하는 procurator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므로, 타키투스는 이전의 문서자료를 참조한 것이 아니라 단지 떠도는 소문을 기록한 것임이 분명할 수 밖에 없지요..
둘째, 당시에는 (실제 사실과는 별개로) 빌라도의 직책이 총독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는 것이지요. 이런 소문은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떠돌았음이 명백하며 (사실 타키투스의 기록 외에는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했다는 로마의 기록은 전무하며,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했다는 것 자체가 소문일 뿐이었지요.) 볶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초기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빌라도의 직책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일뿐입니다. 결국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분명 빌라도를 총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둘째는 좀 억지 같아도 첫째에서 말한 '타키투스는 떠돌던 소문을 수집한 것이다' 얘기는 그럴듯해 보이는데...타키투스가 남긴 예수 관련 기록에 대한 학자들과 초인님의 생각은 어떤가요? ...."
이에 대해서는 제가 예전에 몇 개 글에서 적은 바 있는데요, 우선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주장 #1] ".....첫째, 타키투스는 이전의 문서를 참조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떠돌던 소문을 수집한 것입니다 타키투스가 그 이전의 문서를 참조했다면, 당연히 유대 사령관(praefectus Iudaeae : 1961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빌라도의 비석에 새겨진 직책이다)으로 빌라도의 직책을 밝혔어야 했으나, 총독을 의미하는 procurator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므로, 타키투스는 이전의 문서자료를 참조한 것이 아니라 단지 떠도는 소문을 기록한 것임이 분명할 수 밖에 없지요....."
[답변]
우선, 타키투스 및 동시대 몇몇 작가들의 기록들 가운데 당시의 악의적인 풍문을 옮긴 것들이 몇가지 있다.
가령, 1세기 후반의 작가들인 타키투스나 플루타르코스는 유대인들이 나귀(머리를 가진 신)을 신으로 숭배하거나, 혹은 돼지를 숭배하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적기도 했는데, 당대의 책임있는 지식인들에 의한 이런 잘못된 정보의 유포에 대해 유대교 제사장 출신인 요세푸스나 기독교 교부들이 강하게 불만을 토로하곤 한다. 타키투스는 요세푸스를 직간접적으로 알았던 듯 하며, 개인적으로 상당한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럼 위에 언급된 빌라도의 직위에 관한 타키투스의 진술이 과연 기독교도들의 '풍문'을 옮긴 것인가?
플라비우스 황실의 가신이었던 요세푸스나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던 타키투스 모두 로마의 공공문서들에 대한 접근권한이 있었다. 요세푸스가 40세에 쓴 {유대전쟁사}의 경우는 모국어인 아람어로 초고를 쓰고 이를 그리스어 번역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고, 50대 중반에 쓴 {유대고대사}는 그동안 그리스어를 더 연마해서 직접 그리스어로 작성한 것이다. 타키투스는 라틴어로 저술했다. 이 둘의 자료는 대체로 꽤 공식적이고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타키투스의 진술 가운데 기독교도들이 '타락한 의식'을 벌였다고 말하는 부분은 확실히 '풍문'을 옮긴 것이다. 기독교도들의 성찬식을 디오니소스/바쿠스교의 광란의 잔치 식으로 추측한 소문인 것인데, 사실은 그보다 더 나쁜 풍문 - 가령 바로 성찬식에서 어린 아이를 먹고, 아무하고나 (근친) 성관계를 갖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카더라는 소문을 더 확산시킨 것이 소위 유명한 로마의 작가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스승 프론토.....등등)이었고, 요세푸스나 기독교 교부들도 그들이 무책임하게 풍문을 전파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었다. 요새로 말하면 유명 웹싸이트, 게시판, 블로그 등등에 당당히 포스팅 되어 인터넷 상에서 퍼져나가는 왜곡된 정보들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관련해서는 이 글을 읽어보자. ('입맞춤에 대한 문헌적 이해' 섹션)
그럼 일단 타키투스의 {연감} 제 15권 44장을 읽어보자. 해당 언어는 라틴어로, 여기서 그리스도는 라틴어 '크리스투스' 혹은 '크레스투스', 기독교도는 '크리스티아노스' 혹은 '크레스티아노스', 그리고 빌라도의 직위는 '프로큐라토르'로 등장한다.
Et haec quidem humanis consiliis providebantur. mox petita dis piacula aditique Sibyllae libri, ex quibus supplicatum Vulcano et Cereri Proserpinaeque ac propitiata Iuno per matronas, primum in Capitolio, deinde apud proximum mare, unde hausta aqua templum et simulacrum deae perspersum est; et sellisternia ac pervigilia celebravere feminae quibus mariti erant. sed non ope humana, non largitionibus principis aut deum placamentis decedebat infamia quin iussum incendium crederetur. ergo abolendo rumori Nero subdidit reos et quaesitissimis poenis adfecit quos per flagitia invisos vulgus Christianos [Chrestianos] [ appellabat. auctor nominis eius Christus [Chrestus] Tiberio imperitante per procuratorem Pontium Pilatum supplicio adfectus erat; repressaque in praesens exitiabilis superstitio rursum erumpebat, non modo per Iudaeam, originem eius mali, sed per urbem etiam quo cuncta undique atrocia aut pudenda confluunt celebranturque. igitur primum correpti qui fatebantur, deinde indicio eorum multitudo ingens haud proinde in crimine incendii quam odio humani generis convicti sunt. et pereuntibus addita ludibria, ut ferarum tergis contecti laniatu canum interirent, aut crucibus adfixi aut flammandi, atque ubi defecisset dies in usum nocturni luminis urerentur. hortos suos ei spectaculo Nero obtulerat et circense ludicrum edebat, habitu aurigae permixtus plebi vel curriculo insistens. unde quamquam adversus sontis et novissima exempla meritos miseratio oriebatur, tamquam non utilitate publica sed in saevitiam unius absumerentur.
Such indeed were the precautions of human wisdom. The next thing was to seek means of propitiating the gods, and recourse was had to the Sibylline books, by the direction of which prayers were offered to Vulcanus, Ceres, and Proserpina. Juno, too, was entreated by the matrons, first, in the Capitol, then on the nearest part of the coast, whence water was procured to sprinkle the fane and image of the goddess. And there were sacred banquets and nightly vigils celebrated by married women. But all human efforts, all the lavish gifts of the emperor, and the propitiations of the gods, did not banish the sinister belief that the conflagration was the result of an order. Consequently, to get rid of the report, Nero fastened the guilt and inflicted the most exquisite tortures on a class hated for their abominations, called Christians by the populace. Christus, from whom the name had its origin, suffered the extreme penalty during the reign of Tiberius at the hands of one of our procurators, Pontius Pilatus, and a most mischievous superstition, thus checked for the moment, again broke out not only in Judæa, the first source of the evil, but even in Rome, where all things hideous and shameful from every part of the world find their centre and become popular. Accordingly, an arrest was first made of all who pleaded guilty; then, upon their information, an immense multitude was convicted, not so much of the crime of firing the city, as of hatred against mankind. Mockery of every sort was added to their deaths. Covered with the skins of beasts, they were torn by dogs and perished, or were nailed to crosses, or were doomed to the flames and burnt, to serve as a nightly illumination, when daylight had expired. Nero offered his gardens for the spectacle, and was exhibiting a show in the circus, while he mingled with the people in the dress of a charioteer or stood aloft on a car. Hence, even for criminals who deserved extreme and exemplary punishment, there arose a feeling of compassion; for it was not, as it seemed, for the public good, but to glut one man's cruelty, that they were being destroyed
참고로, '크리스투스/크레스투스' 상의 철자 i/e의 차이를 뭔가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으나, 사실 AD 2-3세기의 저작물이나 유물들을 보면 두 형태가 모두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작가들인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는 그리스어 '크리스토스 (그리스도 Χριστός)'를 라틴어로 옮기면서 "크레스투스"로 옮기거나 그리스어 '크리스티아노스'를 '크레스티아노스'로 옮겼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이 크레스투스가 기독교의 그 예수가 아니란 식의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발음상의 착각일 뿐이다. 타키투스의 친구이자 트라야누스 황제 때 비티비아 총독으로 그 지역 기독교도들을 취조했던 (소)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와 기독교도들을 처벌할 프로토콜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교환하면서 '크리스토 Christo' 와 '크리스티아니 Christiani' 를 사용한다.
타키투스의 저작들에 익숙했고, 그래서 타키투스 등 로마 작가가들이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해 잘못 기술하고 있는 내용들을 비판하기도 했던 AD 2세기 후반의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변증에서 로마인들이 기독교도들을 탄압하면서도 해당용어조차 제대로 모른다고 비판하고 있다.
"Christianus" vero, quantum interpretatio est, de unctione deducitur. Sed et cum perperam "Chrestianus" pronuntiatur a vobis — nam nec nominis certa est notitia penes vos —, de suavitate vel benignitate compositum est.
But Christian, so far as the meaning of the word is concerned, is derived from anointing. Yes, and even when it is wrongly pronounced by you Chrestianus (for you do not even know accurately the name you hate), it comes from sweetness and benignity. --- Tertullian, {Apology} Chapter 3
....."크리스티아누스 (기독교도)"란 단어의 의미를 따진다면, 그 단어는 '기름부음'이란 단어에서 왔다. (당신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이름 (=그리스도/크리스티아누스)조차 정확하게 모르면서) 당신들이 그 단어를 "크레스타누스"라고 잘못 발음할 때 조차, (잘못 발음된 / 필자 주) 그 단어 ("크레스티아누스")는 "달콤한" 혹은 "선한"이란 뜻을 가진다...... --- 테르툴리아누스, {변증} / 번역: 최광민
AD 4세기에 그리스어로 필사된 성서사본인 {코덱스 시나이쿠스}의 경우, {사도행전} 11:26, 26:7, 그리고 {베드로전서} 4:16에서 각각 그리스도인들 ("크리스티아노이")를 장음 '에타'를 써서 "크레스티아노이"로 표기한다. 이 세 군데 이외엔 모두 '크리스티아노이'로 되어 있다. 이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는 많은 필사오류를 가지고 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오/탈자가 수정된 흔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장음 '이오타 (ι)'가 사용된 "크리스토스 (Χριστός)"든 장음 '에타 (η)'가 사용된 "크레스토스 (Χρηστός)"든, "크리스티아노스"든 "크레스티아노스" 든 모두 동일한 "그리스도"와 "기독교도"를 말한 뿐인 것이다.
타키투스가 언급한 폰티우스 필라투스 (빌라도)의 직책에 관련된 논란은 사실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우선, 기독교도들의 초기 문서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작성되었고, 그리스어로 작성된 복음서나 요세푸스의 그리스어 문건에는 '총독'에 해당하는 로마의 라틴어 직위명 프리펙투스, 프로큐라토르, 레가투스 같은 용어가 해당 그리스어 단어들과 1:1로 대응되지 않는다.
AD 1세기 동안 유대아 지역에 파견된 로마 최고관리의 직위는 시대에 따라 변해갔다. 보호령이던 AD 6-41년에는 '프리펙투스'가, 잠깐의 자치령 후 로마의 직할령으로 바뀐 44-70년 경에는 '프라큐라토르'가 파견되었고,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는 '레가투스'가 범-시리아 지역을 직할통치하였다. 프리펙투스와 프로큐라토르는 모두 로마 기사계급이고, 레가투스는 그보다 상급인 원로원 계급 가운데서 임명되었다. 타키투스의 저술시점은 AD 100-110년 경으로, 그 당시의 유대아를 관할하는 최고 책임자의 직함은 레가투스였다.
군사사령관+관할지 사법책임자를 합친 형태의 직책인 프리펙투스가 "정황 상" 빌라도에게 해당될 것인데. 프로큐라토르는 대체로 징세책임을 가진 민간 관리를 말하지만 일부 로마령에서는 행정 및 군사업무도 담당했고 이집트 같은 직할령에서는 프리펙투스가 군사와 사법, 그리고 징세의 업무를 모두 맡았다. 그러니까 프로큐라토르의 업무 일부는 프리펙투스와 겹치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필론이나 요세푸스 등 유대인 저술가들의 그리스 문헌과 기독교 교부들의 문건들은 주로 '총독'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로 '에파르코스', '에피트로포스' 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이를 다시 옮긴 영어의 'governor'나 한국어 '총독'은 라틴어나 그리스어 용어에 대한 대략적인 번역어일 뿐이다. 그리스어로는 모두 '최고책임자', '지휘관' 정도의 뉘앙스로 이해하면 된다. 특히 {복음서}의 '헤게몬'은 프리펙투스를 말할 수도 있고, 프로큐라토르를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리스어로 씌여진 {복음서}들은 당연히 빌라도에 대해 라틴어 직위명이 아닌 그리스어로 '헤게몬 ἡγεμών' / '헤게모노스 ἡγεμόνος'을 빌라도에게 적용하고 있고, 히에로니무스가 AD 4세기 말에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에서는 '의장'과 비슷한 뉘앙스인 praesidēns를 사용한다. 즉, {복음서}는 아예 '프리펙투스'나 '프로큐라토르'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서} 27장의 용례를 살펴보자. 일단은 한국어 '총독'이라고 번역하겠다..
.....καὶ δήσαντες αὐτὸν ἀπήγαγον καὶ παρέδωκαν πιλάτῳ τῶ ἡγεμόνι....ὁ δὲ ἰησοῦς ἐστάθη ἔμπροσθεν τοῦ ἡγεμόνος· καὶ ἐπηρώτησεν αὐτὸν ὁ ἡγεμὼν λέγων, σὺ εἶ ὁ βασιλεὺς τῶν ἰουδαίων; ὁ δὲ ἰησοῦς ἔφη, σὺ λέγεις.....
.....Et vinctum adduxerunt eum, et tradiderunt Pontio Pilato præsidi....Jesus autem stetit ante præsidem, et interrogavit eum præses, dicens: Tu es rex Judæorum? Dicit illi Jesus: Tu dicis....
.....그들이 그 (예수)를 결박하고 끌고 나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예수가 총독 앞에서자 총독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고, 예수는 '네 말이 맞다 / 네가 그렇게 말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의 제 2부를 읽어보자.
타키투스가 2세대 전의 빌라도에 대해 언급할 때, 그 직함을 당대의 레가투스보다 "두 세대" 앞의 유대아 관할 직위인 "프리펙투스"가 아닌 "한 세대" 앞의 직위인 "프로큐라토르"로 표기한 것은 그의 단순한 착각일 수 있다. (착각이 아니라 빌라도 정말 '프리펙투스'인 동시에 '프로큐라토르'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것을 두고 "타키투스는 기독교도들의 풍문을 옮긴 것이며', 더 나아가 '따라서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너무 많이 논리가 도약한 것이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어로 작성된 신약성서나 초기 교부들의 기록에는 라틴어 직위명인 '프리텍투스'든 '프로큐라토르'든 아예 등장하지 않으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유대인 필론이나 요세푸스가 남긴 그리스어 문건에서도 프리펙투스와 프로큐라토르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라틴어로 작성된 타키투스의 글에서 빌라도의 라틴어 직위명을 그보다 한세대 직위명으로 잘못 기록했다면, 그것은 타키투스 본인의 착오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보통 라틴어 '프리펙투스'는 고대 기록 상 그리스어로 '에파르코스', 라틴어 '프로큐라토르'는 '에피파트로스'에 대응시키기는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가령, AD 6년에 유대아의 군사지휘관으로 부임한 (유대아 지역의 첫번째) 프리펙투스인 코포니우스를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에서는 '에피트로포스'로 호칭한다. {유대 고대사}에서는 '유대아 지역 전권지휘관'으로 표현하는데, 이때 황제는 그에게 '생사여탈권'이 부여했다. 즉, 군대지휘권 및 사법권을 가졌다는 뜻이다.
{유대 전쟁사} 2권 8장: '에피트로포스'
Τῆς δὲ Ἀρχελάου χώρας εἰς ἐπαρχίαν περιγραφείσης ἐπίτροπος τῆς ἱππικῆς παρὰ Ῥωμαίοις τάξεως Κωπώνιος πέμπεται μέχρι τοῦ κτείνειν λαβὼν παρὰ Καίσαρος ἐξουσίαν.
AND now Archelaus's part of Judea was reduced into a province, and Coponius, one of the equestrian order among the Romans, was sent as a procurator, having the power of [life and] death put into his hands by Caesar.
{유대 고대사} 18권 1장: 유대아 지역 전권사령관/지휘관/관리 ἡγησόμενος Ἰουδαίων τῇ ἐπὶ πᾶσιν ἐξουσίᾳ
Κυρίνιος δὲ τῶν εἰς τὴν βουλὴν συναγομένων ἀνὴρ τάς τε ἄλλας ἀρχὰς ἐπιτετελεκὼς καὶ διὰ πασῶν ὁδεύσας ὕπατος γενέσθαι τά τε ἄλλα ἀξιώματι μέγας σὺν ὀλίγοις ἐπὶ Συρίας παρῆν, ὑπὸ Καίσαρος δικαιοδότης τοῦ ἔθνους ἀπεσταλμένος καὶ τιμητὴς τῶν οὐσιῶν γενησόμενος, [2] Κωπώνιός τε αὐτῷ συγκαταπέμπεται τάγματος τῶν ἱππέων, ἡγησόμενος Ἰουδαίων τῇ ἐπὶ πᾶσιν ἐξουσίᾳ.
NOW Cyrenius, a Roman senator, and one who had gone through other magistracies, and had passed through them till he had been consul, and one who, on other accounts, was of great dignity, came at this time into Syria, with a few others, being sent by Caesar to he a judge of that nation, and to take an account of their substance. Coponius also, a man of the equestrian order, was sent together with him, to have the supreme power over the Jews.
그런데 요세푸스는 BC 7/6-4년 시리아 레가투스인 바루스가 부임할 때, 황제가 직접 특파하여 유대아 관련 사안을 처리한 사비누스에 대해서도 '(카이사로스) 에피트로포스'를 적용할 뿐더러, 클라우디아 황제 때 직할령이 된 유대아에 민간인 '프로큐라토르'로서 처음 부임한 파두스에 대해서도 동일한 '에피트로포스'를 적용한다.
그럼 도대체 그리스어 에피트로포스는 라틴어로 프리펙투스일까? 아니면 프로큐라토르일까?
{유대전쟁사} 2권 11장
Ταχέως δ᾽ ὡς ἂν ἐκ τοσαύτης ἀρχῆς πλοῦτος Ἀγρίππᾳ προσέρρει, καὶ τοῖς χρήμασιν αὐτὸς οὐκ εἰς μακρὰν κατεχρήσατο: τηλικοῦτον γὰρ τοῖς Ἱεροσολύμοις περιβαλεῖν ἤρξατο τεῖχος, ἡλίκον ἂν τελεσθὲν ἀνήνυτον Ῥωμαίοις ἐποίησεν τὴν πολιορκίαν. [219] ἀλλ᾽ ἔφθη πρὶν ὑψῶσαι τὸ ἔργον τελευτήσας ἐν Καισαρείᾳ, βεβασιλευκὼς μὲν ἔτη τρία, πρότερον δὲ τῶν τετραρχιῶν τρισὶν ἑτέροις ἔτεσιν ἀφηγησάμενος. [220] καταλείπει δὲ τρεῖς μὲν θυγατέρας ἐκ Κύπρου γεγενημένας, Βερνίκην καὶ Μαριάμμην καὶ Δρουσίλλαν, υἱὸν δὲ ἐκ τῆς αὐτῆς Ἀγρίππαν. οὗ παντάπασιν ὄντος νηπίου πάλιν τὰς βασιλείας Κλαύδιος ἐπαρχίαν ποιήσας ἐπίτροπον πέμπει Κούσπιον Φᾶδον, ἔπειτα Τιβέριον Ἀλέξανδρον, οἳ μηδὲν παρακινοῦντες τῶν ἐπιχωρίων ἐθῶν ἐν εἰρήνῃ τὸ ἔθνος διεφύλαξαν. [221] μετὰ ταῦτα καὶ ὁ βασιλεύων τῆς Χαλκίδος Ἡρώδης τελευτᾷ, καταλιπὼν ἐκ μὲν τῆς ἀδελφιδῆς Βερνίκης δύο παῖδας Βερνικιανόν τε καὶ Ὑρκανόν, ἐκ δὲ τῆς προτέρας Μαριάμμης Ἀριστόβουλον. τεθνήκει δ᾽ αὐτῷ καὶ ἕτερος ἀδελφὸς Ἀριστόβουλος ἰδιώτης καταλιπὼν Ἰωτάπην θυγατέρα. [222] οὗτοι μὲν οὖν ἦσαν, ὡς προεῖπον, Ἀριστοβούλου τοῦ Ἡρώδου παῖδες, Ἀριστόβουλος δὲ καὶ Ἀλέξανδρος ἐκ Μαριάμμης Ἡρώδῃ γεγόνεισαν υἱεῖς, οὓς ὁ πατὴρ ἀνεῖλεν: ἡ δὲ Ἀλεξάνδρου γενεὰ τῆς μεγάλης Ἀρμενίας ἐβασίλευσεν.
218] So now riches flowed in to Agrippa by his enjoyment of so large a dominion; nor did he abuse the money he had on small matters, but he began to encompass Jerusalem with such a wall, which, had it been brought to perfection, had made it impracticable for the Romans to take it by siege; but his death, which happened at Cesarea, before he had raised the walls to their due height, prevented him. He had then reigned three years, as he had governed his tetrarchies three other years. He left behind him three daughters, born to him by Cypros, Bernice, Mariamne, and Drusilla, and a son born of the same mother, whose name was Agrippa: he was left a very young child, so that Claudius made the country a Roman province, and sent Cuspius Fadus to be its procurator, and after him Tiberius Alexander, who, making no alterations of the ancient laws, kept the nation in tranquillity. Now after this, Herod the king of Chalcis died, and left behind him two sons, born to him of his brother's daughter Bernice; their names were Bernie Janus and Hyrcanus. [He also left behind him] Aristobulus, whom he had by his former wife Mariamne. There was besides another brother of his that died a private person, his name was also Aristobulus, who left behind him a daughter, whose name was Jotape: and these, as I have formerly said, were the children of Aristobulus the son of Herod, which Aristobulus and Alexander were born to Herod by Mariamne, and were slain by him. But as for Alexander's posterity, they reigned in Armenia.
그런데 예수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이자 지도층 인사였던 필론은 가이우스 칼리귤라 황제에게 사절로 다녀온 내용을 담은 한 저술에서, 이번에는 폰티우스 필라투스 (빌라도)를 또 '에피트로포스'라고 적는다.
{On the Embassy to Gaius}, XXXVIII
299..... Πιλᾶτος ἦν τῶν ὑπάρχων ἐπίτροπος ἀποδεδειγμένος τῆς Ἰουδαίας· οὗτος οὐκ ἐπὶ τιμῇ Τιβερίου μᾶλλον ἢ ἕνεκα τοῦ λυπῆσαι τὸ πλῆθος ἀνατίθησιν ἐν τοῖς κατὰ τὴν ἱερόπολιν Ἡρῴδου βασιλείοις ἐπιχρύσους ἀσπίδας μήτε ¦ μορφὴν ἐχούσας μήτε ἄλλο τι τῶν ἀπηγορευμένων, ἔξω τινὸς ἐπιγραφῆς ἀναγκαίας, ἣ δύο ταῦτα ἐμήνυε, τόν τε ἀναθέντα καὶ ὑπὲρ οὗ ἡ ἀνάθεσις.
Pilate was an official who had been appointed prefect of Judaea. With the intention of annoying the Jews rather than of honoring Tiberius, he set up gilded shields in Herod's palace in the Holy City. They bore no figure and nothing else that was forbidden, but only the briefest possible inscription, which stated two things - the name of the dedicator and that of the person in whose honor the dedication was made.
더 혼란스러운 용례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는 AD 6년 부임한 코포니우스 이후 AD 41년 경까지 유대아에 부임한 로마관리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바로 요세푸스의 이자료로 부터 역사가들이 유대아에 부임된 로마'총독'들의 리스트를 짜맞춘 것이란 점을 먼저 기억해 두도록 하자.
그런 그리스어로 기록된 이들의 직위명이 좀 불분명하다. 더 정확히는 이들이 라틴어로 '프리펙투스'들인지도 분명치 않다.
가령, AD 6년에 부임한 코포니우스의 직위는 그리스 원전에는 등장하지 않고 그저 "유대아를 담당하는 직위'라고 등장한다. 그의 후임인 마르쿠스 암비비우스의 직위도 언급되어 있지 않고 그냥 '후임'이다. 그 후임인 안니우스 루푸스의 직위도 언급되지 않고있고, 대신 그 후임인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의 직위명이 '에파르코스'이다. 그 후임인 폰티우스 필라투스 (빌라도)의 직위도 여기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필라투스의 후임인 마르켈루스의 경우는 이도저도 아닌 '에피멜레테스'로 언급된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BC 9-7/6년의 시리아 총독/레가투스인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에 대해서도 '에피멜레테스'란 용어를 적용했다). 마지막 프리펙투스로 여겨지는 마룰루스의 경우도 6장 말미에 (그나마 직위명이 아니라) '유대아 지역을 지휘하는'(ἱππάρχην δὲ ἐπὶ τῆς Ἰουδαίας ἐκπέμπει Μάρυλλον)' 인물로 등장한다.
바로 여기에 원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영어번역들에서는 이들을 모두 procurator나 governor란 식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사실 원전에는 그런 용어가 등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유대 고대사} 18권 2장
[29] Κωπωνίου δὲ τὴν Ἰουδαίαν διέποντος, ὃν ἔφην Κυρινίῳ συνεκπεμφθῆναι, τάδε πράσσεται. τῶν ἀζύμων τῆς ἑορτῆς ἀγομένης, ἣν πάσχα καλοῦμεν, ἐκ μέσης νυκτὸς ἐν ἔθει τοῖς ἱερεῦσιν ἦν ἀνοιγνύναι τοῦ ἱεροῦ τοὺς πυλῶνας.
[29] As Coponius, who we told you was sent along with Cyrenius, was exercising his office of procurator, and governing Judea, the following accidents happened.
[30] καὶ τότε οὖν ἐπεὶ τὸ πρῶτον γίνεται ἡ ἄνοιξις αὐτῶν, ἄνδρες Σαμαρεῖται κρύφα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ἐλθόντες διάρριψιν ἀνθρωπείων ὀστῶν ἐν ταῖς στοαῖς καὶ διὰ παντὸς τοῦ ἱεροῦ ἤρξαντο μὴ πρότερον ἐπὶ τοιούτοις νομίζοντες τά τε ἄλλα διὰ φυλακῆς μείζονος ἦγον τὸ ἱερόν.
As the Jews were celebrating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which we call the Passover, it was customary for the priests to open the temple-gates just after midnight. When, therefore, those gates were first opened, some of the Samaritans came privately into Jerusalem, and threw about dead men's bodies, in the cloisters; on which account the Jews afterward excluded them out of the temple, which they had not used to do at such festivals; and on other accounts also they watched the temple more carefully than they had formerly done.
[31] καὶ Κωπώνιος μετ᾽ οὐ πολὺ εἰς Ῥώμην ἐπαναχωρεῖ, διάδοχος δ᾽ αὐτῷ τῆς ἀρχῆς παραγίνεται Μᾶρκος Ἀμβιβουχος, ἐφ᾽ οὗ καὶ Σαλώμη ἡ τοῦ βασιλέως Ἡρώδου ἀδελφὴ μεταστᾶσα Ἰουλίᾳ μὲν Ἰάμνειάν τε καταλείπει καὶ τὴν τοπαρχίαν πᾶσαν, τήν τ᾽ ἐν τῷ πεδίῳ Φασαηλίδα καὶ Ἀρχελαΐδα, ἔνθα φοινίκων πλείστη φύτευσις καὶ καρπὸς αὐτῶν ἄριστος.
A little after which accident Coponius returned to Rome, and Marcus Ambivius came to be his successor in that government; under whom Salome, the sister of king Herod, died, and left to Julia, [Caesar's wife,] Jamnia, all its toparchy, and Phasaelis in the plain, and Arehelais, where is a great plantation of palm trees, and their fruit is excellent in its kind.
[32] διαδέχεται δὲ καὶ τοῦτον Ἄννιος Ῥοῦφος, ἐφ᾽ οὗ δὴ καὶ τελευτᾷ Καῖσαρ, δεύτερος μὲν Ῥωμαίων αὐτοκράτωρ γενόμενος ἑπτὰ δὲ καὶ πεντήκοντα τῆς ἀρχῆς ἔτη, πρὸς οἷς μῆνες ἓξ ἡμέραι δυοῖν πλείονες, τούτου δὲ αὐτῷ τοῦ χρόνου δεκατέσσαρα ἔτη συνῆρξεν Ἀντώνιος, βιώσας ἔτη ἑβδομηκονταεπτά. [33] διαδέχεται δὲ τῷ Καίσαρι τὴν ἡγεμονίαν Τιβέριος Νέρων γυναικὸς αὐτοῦ Ἰουλίας υἱὸς ὤν, τρίτος ἤδη οὗτος αὐτοκράτωρ, καὶ πεμπτὸς ὑπ᾽ αὐτοῦ παρῆν Ἰουδαίοις ἔπαρχος διάδοχος Ἀννίῳ Ῥούφῳ Οὐαλέριος Γρᾶτος:
After him came Annius Rufus, under whom died Caesar, the second emperor of the Romans, the duration of whose reign was fifty-seven years, besides six months and two days (of which time Antonius ruled together with him fourteen years; but the duration of his life was seventy-seven years); upon whose death Tiberius Nero, his wife Julia's son, succeeded. He was now the third emperor; and he sent Valerius Gratus to be procurator of Judea, and to succeed Annius Rufus.
[34] ὃς παύσας ἱερᾶσθαι Ἄνανον Ἰσμάηλον ἀρχιερέα ἀποφαίνει τὸν τοῦ Φαβί, καὶ τοῦτον δὲ μετ᾽ οὐ πολὺ μεταστήσας Ἐλεάζαρον τὸν Ἀνάνου τοῦ ἀρχιερέως υἱὸν ἀποδείκνυσιν ἀρχιερέα. ἐνιαυτοῦ δὲ διαγενομένου καὶ τόνδε παύσας Σίμωνι τῷ Καμίθου τὴν ἀρχιερωσύνην παραδίδωσιν.
This man deprived Ananus of the high priesthood, and appointed Ismael, the son of Phabi, to be high priest. He also deprived him in a little time, and ordained Eleazar, the son of Ananus, who had been high priest before, to be high priest; which office, when he had held for a year, Gratus deprived him of it, and gave the high priesthood to Simon, the son of Camithus;
[35] οὐ πλείων δὲ καὶ τῷδε ἐνιαυτοῦ τὴν τιμὴν ἔχοντι διεγένετο χρόνος, καὶ Ἰώσηπος ὁ καὶ Καϊάφας διάδοχος ἦν αὐτῷ. καὶ Γρᾶτος μὲν ταῦτα πράξας εἰς Ῥώμην ἐπανεχώρει ἕνδεκα ἔτη διατρίψας ἐν Ἰουδαίᾳ, Πόντιος δὲ Πιλᾶτος διάδοχος αὐτῷ ἧκεν.
and when he had possessed that dignity no longer than a year, Joseph Caiaphas was made his successor. When Gratus had done those things, he went back to Rome, after he had tarried in Judea eleven years, when Pontius Pilate came as his successor.
그럼 이 사람들의 라틴어 직위명은 무엇이었을까?
AD 6년부터 40년 사이의 유대아 담당 관리/지휘관의 직함이 '프리펙투스'라고 확정된 것은 20세기 중반에 카리사이라 마리티마에서 발견된 '빌라도 인각' 이후이다. 빌라도의 선임인 그라투스의 그리스어 직위가 '에파르코스'이고, 빌라도 인각에 등장하는 빌라도의 라틴어 직위가 '프리펙투스'이니, '에파르코스=프리펙투스'란 공식이 "유도"된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 인각이 발견되기 이전의 번역들에선 빌라도나 그 전후의 '프리펙투스'를 타키투스의 용례에 따라 영어로 procurator라고 하거나 혹은 그냥 governor라고 했던 것이다. 역사가가 아닌 일반독자들은 AD 6-40년 경까지의 유대아 '총독' 리스트가 이런 식으로 퍼즐을 짜맞춰 만들어진 사실은 모른다.
아무튼 그래서 "프리펙투스/에파르코스 + 프로큐라토르/에피트로포스"란 공식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 힘든 것이다.
[주장 #2] ".......둘째, 당시에는 (실제 사실과는 별개로) 빌라도의 직책이 총독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는 것이지요. 이런 소문은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떠돌았음이 명백하며 (사실 타키투스의 기록 외에는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했다는 로마의 기록은 전무하며,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했다는 것 자체가 소문일 뿐이었지요.) 볶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초기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빌라도의 직책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일뿐입니다. 결국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분명 빌라도를 총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답변]
여기 다시 '총독'이란 '한국어' 용어에 대한 혼란이 등장한다.
위의 주장은 '프로큐라토르' = '총독'으로 보는 듯 한데, 코이네 그리스어 복음서가 빌라도를 프리펙투스, 프로큐라토르, 레가투스 같은 라틴어 단어로 부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설령 AD 100년 경의 라틴 기독교도들이 빌라도의 직책을 라틴어 '프라큐라토르'로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빌라도의 역할이나 혹은 예수의 실존여부가 이 때문에 영향을 받는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가령, 조선시대 '한성부판윤 (漢城府判尹)'이던 아무개를 해방 후 용어 '서울시장'으로 언급한다고 해서, 조선시대의 그 아무개가 한성/서울의 행정이나 보안을 담당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사실, 예수가 실존하지 않았다거나 혹은 빌라도 치하에서 사형당하지 않은 공상적 인물이었다면, 왜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관리들은 바로 이 점을 활용하지 않았을까? 즉, 기독교들에 대해서 "너희들이 믿는 그 예수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적도 없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될 텐데 말이다.
가령, 타키투스와 비슷한 시기인 AD 111-113년 사이에 소아시아 폰투스와 비티니아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그 지역의 기독교도들에 대한 처리 문제에 대해 나눈 편지들을 보면, 플리니우스는 기독교에 대해 꽤 면밀한 조사를 벌였다. 플리니우스는 그 지역에서 황제숭배를 거부해 체포된 기독교도들을 취조한 후, 처벌에 관련된 공식 프로토콜에 대한 자문을 받기 위해 트라야누스 황제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트라야누스는 이때 굳이 기독교들을 추적해서 색출할 필요는 없지만, 일단 검거된 후에 로마의 신을 경배하는 식으로 배교하지 않으면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플리니우스를 포함해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관리들이나 기독교를 반박한 철학자들이 예수란 인물의 실재여부를 가지고 기독교를 공박한 경우는 알려진 바로는 없다.
Plinius Traiano Imperatori
Pliny the Younger, Letters 10.96-97
Pliny the Younger to the Emperor Trajan
Sollemne est mihi, domine, omnia, de quibus dubito, ad te referre. Quis enim potest melius vel cunctationem meum regere vel ignorantiam instruere? Cognitionibus de Christianis interfui numquam: ideo nescio quid et quatenus aut puniri soleat aut quaeri. Nec mediocriter haesitavi, sitne aliquod discrimen aetatum, an quamlibet teneri nihil a robustioribus differant; detur paenitentiae venia, an ei, qui omnino Christianibus fuit, desisse non prosit; nomen ipsum, si flagitiis careat, an flagitia cohaerentia nomini puniantur.
It is customary for me, sir, to refer to you in all matters wherein I have a doubt. Who truly is better able to rule my hesitancy, or to instruct my ignorance? I was never present at examinations of Christians, therefore I do not know what is customarily punished, nor to what extent, nor how far to take the investigation. I was quite undecided; should there be any consideration given to age; are those who are however delicate no different from the stronger? Should penitence obtain pardon; or, as has been the case particularly with Christians, to desist makes no difference? Should the name itself be punished (even if crimes are absent), or the crimes that go with the name?
Interim in iis, qui ad me tamquam Christiani deferebantur, hunc sum secutus modum. Interrogavi ipsos, an essent Christiani. Confitentes iterum ac tertio interrogavi supplicium minatus: perseverantes duci iussi. Neque enim dubitabam, qualecumque esset quod faterentur, pertinaciam certe et inflexibilem obstinationem debere puniri. Fuerunt alii similis amentiae, quos quia cives Romani erant, adnotavi in urbem remittendos. Mox ipso tractatu, ut fieri solet, diffundente se crimine, plures species inciderunt. Propositus est libellus sine auctore multorum nomina continens.
Meanwhile, this is the method I have followed with those who were brought before me as Christians. I asked them directly if they were Christians. The ones who answered affirmatively I questioned again with a warning, and yet a third time: those who persisted I ordered led [away]. For I have no doubt, whatever else they confessed to, certainly [this] pertinacity and inflexible obstinacy ought to be punished. There were others alike of madness, whom I noted down to be sent to the City, because they were Roman citizens. Soon in consequence of this policy itself, as it was made standard, many kinds of criminal charges occurred and spread themselves abroad. A pamphlet was published anonymously, containing the names of many.
Qui negabant esse se Christianos aut fuisse, cum praeeunte me deos appellarent et imagini tuae, quam propter hoc iusseram cum simulacris numinum adferri, ture ac vino supplicarent, praeterea male dicerent Christo, quorum nihil posse cogi dicuntur, qui sunt re vera Christiani, dimittendos esse putavi. Alii ab indice nominati esse se Christianos dixerunt et mox negaverunt; fuisse quidem, sed desisse, quidem ante triennium, quidam ante plures annos; non nemo etiam ante viginti. Hi quoque omnes et imaginem tuam deorumque simulacra venerati sunt et Christo maledixerunt.
Those who denied that they were or ever had been Christians, when they swore before me, called on the gods and offered incense and wine to your image (which I had ordered brought in for this [purpose], along with images of the gods), and also cursed Christ (which, it is said, it is impossible to force those who are real Christians to do) I thought worthy to be acquitted. Others named by an informer, said they had been Christians, but now denied [it]; certainly they had been, but had lapsed, some three years ago, some more; and more than one [lit. not nobody] over twenty years ago. These all worshiped both your image and the images of the gods and cursed Christ.
현재나 예전에 기독교도였던 적이 없다고 부인했던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제 앞에서 맹세하고 신들을 부르면서 (제가 이 목적으로 신들의 형상들과 함께 준비해 온) 폐하의 형상 앞에 분향하고 포도주를 부어 바치면서 그리스도를 저주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진짜 기독교도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행동입니다.)..... / 번역: 최광민
Adfirmabant autem hanc fuisse summam vel culpae suae vel erroris, quod essent soliti stato die ante lucem convenire carmenque Christo quasi deo dicere secum invicem seque sacramento non in scelus aliquod obstringere, sed ne furta, ne latrocinia, ne adulteria committerent, ne fidem fallerent, ne depositum appellati abnegarent; quibus peractis, morem sibi discedendi fuisse rursusque coeundi ad capiendum cibum, promiscuum tamen et innoxium; quod ipsum facere desisse post edictum meum, quo secundum mandata tua hetaerias esse vetueram.
They stated that the sum of their guilt or error amounted to this, that they used to gather on a stated day before dawn and sing to Christ as if he were a god, and that they took an oath not to involve themselves in villainy, but rather to commit no theft, no fraud, no adultery; not to break faith, nor to deny money placed with them in trust. Once these things were done, it was their custom to part and return later to eat a meal together, innocently, although they stopped this after my edict, in which I, following your mandate, forbade all secret societies.
그들은 (=배교자들) 말하길......기독교도들은 지정된 날 (=일요일) 동이 트기전 새벽에 모여 그리스도가 신이라도 되듯 (quasi deo) 그에게 찬미가를 부른다고 합니다....[후략] / 번역: 최광민
Quo magis necessarium credidi ex duabus ancillis, quae ministrae dicebantur, quid esset veri, et per tormenta quaerere. Nihil aliud inveni quam superstitionem pravam, immodicam.
All the more I believed it necessary to find out what was the truth from two servant maids, which were called deaconesses, by means of torture. Nothing more did I find than a disgusting, fanatical superstition.
Ideo dilata cognitione, ad consulendum te decucurri. Visa est enim mihi res digna consultatione, maxime propter periclitantium numerum. Multi enim omnis aetatis, omnis ordinis, utriusque sexus etiam vocantur in periculum et vocabuntur. Neque civitates tantum, sed vicos etiam atque agros superstitionis istius contagio pervagata est; quae videtur sisti et corrigi posse. Certe satis constat prope iam desolata templa coepisse celebrari, et sacra sollemnia diu intermissa repeti pastumque venire victimarum, cuius adhuc rarissimus emptor inveniebatur. Ex quo facile est opinari, qui turba hominum emendari possit, si sit paenitentiae locus.
Therefore I stopped the examination, and hastened to consult you. For it appears to me a proper matter for counsel, most greatly on account of the number of people endangered. For many of all ages, all classes, and both sexes already are brought into danger, and shall be [in future]. And not only the cities; the contagion of this superstition is spread throughout the villages and the countryside; but it appears to me possible to stop it and put it right. Certainly the temples which were once deserted are beginning to be crowded, and the long interrupted sacred rites are being revived, while food from the sacrifices is selling, for which up to now a buyer was hardly to be found. From which it may easily be supposed, that what disturbs men can be mended, if a place is allowed for repentance.
Trajan to Pliny the Younger
You observed proper procedure, my dear Pliny, in sifting the cases of those who had been denounced to you as Christians. For it is not possible to lay down any general rule to serve as a kind of fixed standard. They are not to be sought out; if they are denounced and proved guilty, they are to be punished, with this reservation, that whoever denies that he is a Christian and really proves it--that is, by worshiping our gods--even though he was under suspicion in the past, shall obtain pardon through repentance. But anonymously posted accusations ought to have no place in any prosecution. For this is both a dangerous kind of precedent and out of keeping with the spirit of our age.
게다가, 기독교 교부들은 예수의 탄생과 사형에 관한 자료가 로마의 공공문서고에 있으니 직접 확인 해보라고까지 말하곤 한다.
가령, 타키투스로부터 한 세대 뒤 AD 2세기 중반의 기독교 교부 유스티노스는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와 원로원 앞으로 보내는 공개변론서에서 예수의 처형은 빌라도에 의해서 이뤄졌으며, 이 사실은 빌라도가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장계 (ACTA)'에서 직접 확인해보라고 적는다.
여기서 '보고서/장계'란 고대 로마에서 파견된 관리가 통치 중 발생한 주요사건들을 기록해 황제나 원로원에 보낸 공문서를 말하는데, 만약 그런 것이 없고 유스티노스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만 유통되던 어떤 소문 (가령, 위경인 {빌라도의 보고서} 같은)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이라면, 그는 지금 로마황제와 원로원을 대상으로 하는 사기공갈극을 벌이는 셈이다.
유스티노스의 진술을 읽어보자.
And how Christ after He was born was to escape the notice of other men until He grew to man's estate, which also came to pass, hear what was foretold regarding this. There are the following predictions: —Unto us a child is born, and unto us a young ma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shall be upon His shoulders; Isaiah 9:6 which is significant of the power of the cross, for to it, when He was crucified, He applied His shoulders, as shall be more clearly made out in the ensuing discourse. And again the same prophet Isaiah, being inspired by the prophetic Spirit, said, I have spread out my hands to a disobedient and gainsaying people, to those who walk in a way that is not good. They now ask of me judgment, and dare to draw near to God. Isaiah 65:2, Isaiah 58:2 And again in other words, through another prophet, He says, They pierced My hands and My feet, and for My vesture they cast lots. And indeed David, the king and prophet, who uttered these things, suffered none of them; but Jesus Christ stretched forth His hands, being crucified by the Jews speaking against Him, and denying that He was the Christ. And as the prophetspoke, they tormented Him, and set Him on the judgment-seat, and said, Judge us. And the expression,They pierced my hands and my feet, was used in reference to the nails of the cross which were fixed in His hands and feet. And after He was crucified they cast lots upon His vesture, and they that crucified Him parted it among them. And that these things did happen, you can ascertain from the Acts of Pontius Pilate. And we will cite the prophetic utterances of another prophet, Zephaniah, to the effect that He was foretold expressly as to sit upon the foal of an ass and to enter Jerusalem. The words are these: Rejoice greatly, O daughter of Zion; shout, O daughter of Jerusalem: behold, your King comes unto you; lowly, and riding upon an ass, and upon a colt the foal of an ass. Zechariah 9:9. --- Justin the Martyr, {The First Apology} CH 35. Translated by Marcus Dods and George Reith. From Ante-Nicene Fathers, Vol. 1.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전략]...."그들이 내 손과 발을 찔렀다"라는 (다윗의 시편 / 필자 주)의 표현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손과 발이 못박힌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가 못박힌 후에, 그를 못박은 자들은 그의 옷가지를 두고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다. 이것이 정말로 일어난 사건임을, 당신들은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행적 / ACTA}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후략] --- 유스티노스, {첫번째 변론} 제 35장 / 번역: 최광민
.......And that it was predicted that our Christ should heal all diseases and raise the dead, hear what was said. There are these words: At His coming the lame shall leap as an hart, and the tongue of the stammerer shall be clear speaking: the blind shall see, and the lepers shall be cleansed; and the dead shall rise, and walk about. Isaiah 35:6 And that He did those things, you can learn from the Acts of Pontius Pilate. And how it was predicted by the Spirit of prophecy that He and those who hoped in Him should be slain, hear what was said by Isaiah. These are the words: Behold now the righteous perishes, and no man lays it to heart; and just men are taken away, and no man considers. From the presence of wickedness is the righteous man taken, and his burial shall be in peace: he is taken from our midst. Isaiah 57:1 --- Justin the Martyr, {The First Apology} CH 48. Translated by Marcus Dods and George Reith. From Ante-Nicene Fathers, Vol. 1.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전략]....우리의 그리스도가 온갖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린 것은 이미 예언되어 있었으니, 바로 다음이 그런 구절들이다: "그가 오실 때, 절름발이는 기뻐하며 뛸 것이며, 더듬는 자는 말할 것이요, 소경은 보게되고, 나병환자는 깨끗해 질 것이다. 죽은 자는 일어나 걸을 것이다". 그가 이런 일들을 실제로 하셨다는 것을, 당신들은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후략] --- 유스티노스, {첫번째 변론} 제 48장 / 번역: 최광민
AD 2세기 말,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트룰리아누스 역시 이 문건에 대해 그의 {변론}에서 두 번 언급한다. 예수가 처형 당한 당시의 황제 티베리우스는 예수의 처형에 관한 전모를 빌라도로부터 보고 받고 사안을 원로원에 보내 (예수를 신으로 간주할 것인지를) 심의시켰으나, 인간을 "신", 즉 "디부스"로 선포하는 권한을 가진 원로원이 이를 기각하였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수에 대해 호의를 가진 티베리우스는 대신 기독교도를 우회적으로 보호하였고, 그런 이유로 기독교 초창기에 복음의 전파가 용이했었다고 진술한다
.....Pilate, who in his conscience was a Christian, sent Tiberius Caesar an account of all these proceedings relating to Christ; and the Caesars had been Christians too, could the ages have borne it, if either such Caesars had not been necessary and unavoidable in such times, or could Christians have come to be Caesars...... --- Tertulian, {The Apology of Tertulian} CH.21, tr. WM. REEVE
...(내심) 기독교도였던 필라투스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내막을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적어 보냈다.... --- 테르툴리아누스 {변론} 제 21장 / 번역: 최광민
......BUT to see the rashness and injustice of the laws against us, let us cast an eye back upon their riginal, and we shall find an old decree,1 whereby the emperor himself was disabled from consecrating a new god, without the approbation of the senate. M. Aemilius learnt this with a witness, in the case of his god Alburnus.1 And this makes not a little for the honour of Christianity, to see the heathens in consult about making gods; and if the god is not such a deity as they like, he is like to be no God for them. Strange ! That the god is first to pray the man to be propitious, before the man will allow of his godship. By virtue of this old decree it was that Tiberius,2 in whose reign Christianity came into the world, having received intelligence from Judea about the miracles of Christ, proposed it to the senate, and used his prerogative for getting Him enrolled among the number of their gods. The senate, indeed, refused the proposal, as having not maturely weighed His qualifications for a deity; but Caesar stood to his resolution, and issued out severe penalties against all who should accuse the worshippers of Christ. Consult your annals,3 and there you will find Nero4 the first emperor who dyed his sword in Christian blood, when our religion was but just arising at Rome ..... --- Tertulian, {The Apology of Tertulian} CH.4, tr. WM. REEVE
....[전략]....이상한 일이다. (원로원이 신으로 선포해야 신으로 인정받는 / 필자 주) 인간으로부터 신으로 인정받으려면, 그 신은 이에 앞서 우선 인간에게 잘 보이도록 애걸해야하니 말이다. 기독교가 시작되던 때 권좌에 있던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가 베푼 기적들에 관한 보고를 받고나서 그의 특권으로 원로원이 그리스도를 신들 가운데 하나로 선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원로원은 그리스도가 신으로 선포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이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황제는 결정에 맞서, 기독교도를 기소하는 자들을 중죄로 다스리겠다고 선언했다. 당신들 (로마인)의 연감을 찾아보면, (티베리우스가 아닌) 네로가 우리 종교가 로마에 막 성장하던 때 그의 칼을 기독교도들의 피로 물들였던 첫번째 황제라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 테르툴리아누스, {변론} 제 4장 / 번역: 최광민
AD 4세기 초반의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제 2권 2장에 사용된 자료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변론}이다.
1. And when the wonderful resurrection and ascension of our Saviour were already noised abroad, in accordance with an ancient custom which prevailed among the rulers of the provinces, of reporting to the emperor the novel occurrences which took place in them, in order that nothing might escape him, Pontius Pilate informed Tiberius of the reports which were noised abroad through all Palestine concerning the resurrection of our Saviour Jesus from the dead. 2. He gave an account also of other wonders which he had learned of him, and how, after his death, having risen from the dead, he was now believed by many to be a God. They say that Tiberius referred the matter to the Senate, but that they rejected it, ostensibly because they had not first examined into the matter (for an ancient law prevailed that no one should be made a God by the Romans except by a vote and decree of the Senate), but in reality because the saving teaching of the divine Gospel did not need the confirmation and recommendation of men. 3. But although the Senate of the Romans rejected the proposition made in regard to our Saviour, Tiberius still retained the opinion which he had held at first, and contrived no hostile measures against Christ. 4. These things are recorded by Tertullian, a man well versed in the laws of the Romans, and in other respects of high repute, and one of those especially distinguished in Rome. In his apology for the Christians, which was written by him in the Latin language, and has been translated into Greek, he writes as follows: --- Translated by Arthur Cushman McGiffert.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우리 구세주의 놀라운 부활과 승천에 대한 소식이 나라 밖으로까지 이미 퍼져나갔을 때, 로마 지배지역의 통치자들이 지역에서 발생한 새로운 사건들을 황제에게 보고하여 황제가 하나라도 놓치지 않게 한 고대의 관례에 따라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우리 구세주인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사건에 관해 팔레스티나 전역에 파다하게 퍼진 내용을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는 그가 알게된 다른 기적들에 대해서도 보고하였고, 또 어떻게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는지와 현재 그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신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도 보고했다. 티베리우스는 (예수를 신으로 선포해 달라는 / 필자 주) 사안을 원로원으로 보냈는데, 명목상 원로원이 이 문제를 먼저 조사한게 아니기 때문에 원로원은 요청을 거부했다 (고대의 법에 따르면, 원로원의 표결과 선포없이는 누구도 로마인들에 의해 신으로 선포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을 구원하는 성스런 복음의 가르침은 인간이 확인해 줄 필요도, 추천해 줄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비록 로마 원로원이 우리의 구세주에 관한 (황제의) 제안을 거부하긴 했지만, 티베리우스 황제는 계속 그가 처음에 가졌던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지 못할 방안을 고안해 냈다. 이 내용은 로마법에 능통했고 다른 분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던 테르툴리아누스의 기록에 나와있다. 그는 특별히 로마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기독교도를 위한 그의 변론서는 라틴어로 씌여졌으며, 그리스어로도 번역되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후략] ---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 {교회사} 제 2권 2장 / 번역: 최광민
물론 유스티노스나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기독교 교부들이 로마의 공공문서들에 대한 접근권한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아울러 이들이 말하는 빌라도의 보고서 혹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치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애 대해서도 제 3의 자료를 통해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들 기독교 교부들이 빌라도가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보냈다는 문건에 관한 '풍문'을 굳게 믿었을 뿐이라면, 로마관리들이나 반-기독교 작가나 철학자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면서 '기독교의 예수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고, 빌라도가 집행한 그의 처형도 허구'라고 단 한 줄로 논평했으면 그보다 더 쉬운 기독교 반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식으로 기독교를 공박한 예는 전하지 않는다.
그럼 후대의 기독교도들이 그런 자료를 모두 분서갱유했을까? 그런데 분서갱유했다는 근거를 댈 수 없는 바로 그 순간 이런 주장들 역시 하나의 '믿음'으로 간주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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