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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5-11-25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예수 vs. 예수 #5: 자유주의 신학 유감
순서
© 최광민 (Kwangmin Choi), 200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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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 vs. 예수 #5: 자유주의 신학 유감
순서
- 자유주의 신학
- 역사적 예수
- 혼란
- 트리레마
- 맺음말
§ 자유주의 신학
소위 자유주의 (liberal) 신학은 아마도 지난 2천년에 걸친 기독교 신학사에서도 가장 기이한 현상에 속할 것이다. 이 유형의 신학은 18-19세기 영국 계몽주의의 산물인 이신론과 대륙 합리론의 결과물인 독일의 고등성서비평이 융합된 형태를 기본얼개로 가지며, 강단신학의 형태로 오늘날 신학교 교육에서 사실상 '주류'로 자리잡았다. 현대에 "이름난" 서구의 신학자들은 대개 자유주의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표방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매우 다양한 신학적 혹은 종교사회적 관점을 포괄적으로 묶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이지만, 대체로 그 상대개념인 근본주의 신학과는 다음의 본질적인 차이를 가진다.
즉, 자유주의 신학은 일반적으로,
- 성서(원본)의 무오류성을 부정한다.
-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포함한 기적담을 (신화적 요소로 간주해) 부정한다.
- 전통적 의미의 원죄를 부정한다.
-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음을 인간의 죄를 대신 갚는(대속) 행위 임을 부정한다.
- 예수의 부활/재림/심판을 육체적인 것이 아닌 "영적상징"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바로 이 자유주의 신학의 관점들은 AD 2세기 초반까지는 이미 확립된 전통적인 (혹은 정통적인)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정확히 벗어난다. 여기서 이 전통적인 기독교를 "정통파"라고 지칭한다면 여기서 그노시스의 여러 일파는 최우선적으로 배제된다.
가령, 예수의 제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티오키아 주교/감독 이그나티오스 ( AD 35-98 혹은 50 117)는 AD 110년 경 (혹은 이전)에 트랄리아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이 적어보낸다.
AD 2세기 초/중반의 기독교 철학자이자 교부 유스티노스 (AD 100-c165)와, 특별히 AD 2세기 중/후반의 교부로서 예수의 제자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카포스를 친견한 이레네우스 (?-AD 202)는 그노시스 제파를 강렬히 비판하면서 당시에 이미 확립되어있던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정리한다.
이레네우스가 그의 저작 {모든 이단을 반박하며} 제 1권 10장 1절에 요약한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인용해 보자.
여기서 이레네우스가 사도들과 그 제자들을 통해, 즉, (최소한) 예수의 제자 요한과 그 제자 폴리카포스를 거쳐 자기에게까지 전수되었다고 선언하는 기독교의 "정통적" 교리는 다음과 같다.
따라서 AD 2세기의 이레네우스는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위의 신조 가운데 하나라도 거부하는 신학자들을 망설이지 않고 "이단자"로 선언할 것이다. 아마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너무 심오하고 시대를 앞섯던 탓에 이레네우스와 그의 스승 폴리카포스와 그의 스승이자 예수의 제자인 요한 모두가 정말로 예수를 오해했다고 맞받아치겠지만.
유신론 (종종 범신론) 계열 자유주의 신학자들 및 같은 궤적에 있는 사람(대체로 지성인)들은 예수를 몹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더러는 보수파 혹은 소위 "문자주의자" 기독교도들보다도 예수를 더 잘 알며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극진히 예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그들은 "예수가 자신을 일반 인간 이상의 존재로 주장했다"는 식의 역사적 기독교의 교리적 진술 자체를 예수에 대한 "오해"이며 또한 "모욕"으로 간주하고 분개하며, 따라서 사랑하는 예수를 열성적으로 "변호"해 그를 둘러싼 "신화적 오해"를 벗겨주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 계열 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십자가에서 처형된 후"부터 "2천 년간 오해받고 있는", 심지어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조차" 오해받은 예수를 그 "오해들"로부터 "구출"해 내는 작업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예수는, 가령,
란 따위의 "비이성적"이고 심지어 "미신적"인 주장을 편 "유치"한 사람일 리가 절대로 없기 때문에.
혹은 "20세기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주장처럼 어쩌면 "예수 스스로"가 "본인 자신"을 오해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으니, 어쩌면 이들의 작업은 심지어 예수를 "예수 본인의 오해"로부터 구출해 내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오해였는가?
"For they speak of Christ, not that they may preach Christ, but that they may reject Christ; and they speak of the law, not that they may establish the law, but that they may proclaim things contrary to it. For they alienate Christ from the Father, and the law from Christ. They also calumniate His being born of the Virgin; they are ashamed of His cross; they deny His passion; and they do not believe His resurrection. They introduce God as a Being unknown; they suppose Christ to be unbegotten; and as to the Spirit, they do not admit that He exists. Some of them say that the Son is a mere man, and that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are but the same person, and that the creation is the work of God, not by Christ, but by some other strange power." (Epistle to the Trallians, Ch. VI).
그들(=이단자들)은 비록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만,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부정한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 말하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율법에 반하는 것들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성부와 상관없는 존재로 만들고, 율법을 그리스도로 부터 분리시킨다. 그리스도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점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부정하며 그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신을 미지의 존재로 만들었고, 그리스도가 (성부로부터) 낳아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령에 관해 그들은 성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더러는 성자가 그저 인간일 뿐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양태론적으로 / 필자 주] 성부=성자=성령이 동일한 하나라고 말하거나, 성부가 그리스도(=성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기이한 능력을 통해 세상을 창조한 것이라고 말한다. --- 안티오키아 주교 이그나티오스, {트랄리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 6장 / 번역: 최광민
AD 2세기 초/중반의 기독교 철학자이자 교부 유스티노스 (AD 100-c165)와, 특별히 AD 2세기 중/후반의 교부로서 예수의 제자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카포스를 친견한 이레네우스 (?-AD 202)는 그노시스 제파를 강렬히 비판하면서 당시에 이미 확립되어있던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정리한다.
이레네우스가 그의 저작 {모든 이단을 반박하며} 제 1권 10장 1절에 요약한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인용해 보자.
https://www.archive.org/stream/irenaeus00irenuoft
1. The Church, though dispersed through our the whole world, even to the ends of the earth, has received from the apostles and their disciples this faith:
(현재) 교회는 세상 끝까지 널리 퍼져나가 있지만, (예수의) 사도들과 그의 제자들로부터 다음의 신조를 이어받았다:
[She believes]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the sea, and all things that are in them; and in one Christ Jesus, the Son of God, who became incarnate for our salvation; and in the Holy Spirit, who proclaimed through the prophets the dispensations(6) of God, and the advents, and the birth from a virgin, and the passion, and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and the ascension into heaven in the flesh of the beloved Christ Jesus, our Lord, and His [future] manifestation from heaven in the glory of the Father "to gather all things in one,"(7) and to raise up anew all flesh of the whole human race, in order that to Christ Jesus, our Lord, and God, and Saviour, and King, according to the will of the invisible Father, "every knee should bow, of things in heaven,, and things in earth, and things under the earth, and that every tongue should confess"(8) to Him, and that He should execute just judgment towards all; that He may send "spiritual wickednesses,"(9) and the angels who transgressed and became apostates, together with the ungodly, and unrighteous, and wicked, and profane among men, into everlasting fire; but may, in the exercise of His grace, confer immortality on the righteous, and holy, and those who have kept His commandments, and have persevered in His love, some from the beginning [of their Christian course], and others from [the date of] their repentance, and may surround them with everlasting glory.
교회는 한 분의 신, 즉 전능한 성부이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믿는다. 또한 교회는 한 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 그는 신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육체를 입으신 분이다. 교회는 또한 한 성령을 믿으며 성령이 신(=성부)의 섭리와, 사랑하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도래와, 성자가 처녀에게서 태어나심과, 그의 수난과, 죽음에서의 부활과, 육체로서 승천하심과, 장차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고 모든 인류를 새로운 육체 가운데 부활시키기 위해 성부의 영광 가운데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것을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하셨음을 믿는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성부의 뜻에 따라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무릎 꿇고 그를 경배하며, 모든 자들이 그 입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주님이자 신이며, 구원자이자 왕으로 고백하게 될 것임을 믿는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가 모두를 공정하게 심판할 것과, 악마들과 죄로 타락한 천사들과 거룩하지 않고 불의하며 사악하고 속된 인간들을 모두 함께 영원한 불 가운데 던지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의 은혜 가운데 살며 정의롭고 거룩하며 신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사랑 안에서 인내한 자에게는 영생을 주실 것과, 또한 처음부터 믿었거나 혹은 참회한 후부터 믿은 신자들을 영원한 영광으로 감싸실 것을 교회는 믿는다.
2. As I have already observed, the Church, having received this preaching and this faith, although scattered throughout the whole world, yet, as if occupying but one house, carefully preserves it. She also believes these points [of doctrine] just as if she had but one soul, and one and the same heart, and she proclaims them, and teaches them, and hands them down, with perfect harmony, as if she possessed only one mouth. For, although the languages of the world are dissimilar, yet the import of the tradition is one and the same. For the Churches which have been planted in Germany do not believe or hand down anything different, nor do those in Spain, nor those in Gaul, nor those in the East, nor those in Egypt, nor those in Libya, nor those which have been established in the central regions(1) of the world. But as the sun, that creature of God, is one and the same throughout the whole world, so also the preaching of the truth shineth everywhere, and enlightens all men that are willing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Nor will any one of the rulers in the Churches, however highly gifted he may be in point of eloquence, teach doctrines different from these (for no one is greater than the Master); nor, on the other hand, will he who is deficient in power of expression inflict injury on the tradition. For the faith being ever one and the same, neither does one who is able at great length to discourse regarding it, make any addition to it, nor does one, who can say but little diminish it.
내가 이미 목도한 바와 같이, 교회는 비록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지만 이 가르침과 이 믿음을 받아 마치 한 집에서처럼 이를 주의깊게 보존해 왔다. 또한 교회는 이 신조들을 마치 하나의 영혼을 가진 양, 마치 하나의 동일한 심장을 가진 양 보존하고 있으며, 이 신조들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또 마치 단 하나의 입을 가진 것처럼 완벽한 조화 가운데 후대에 전수한다. 세상의 언어가 모두 다르지만 교회의 전승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게르마니아에 설립된 교회에서 믿는 것은 히스파니아나 갈리아나 동방이나 이집트나 리비아나 혹은 세상 한 가운데 설립된 교회들이 믿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의 피조물인 한 태양이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것처럼, 전파된 진리는 세상을 비추고 있으며 진리를 알기 원하는 사람들을 깨닫게 하고 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지식이 탁월한 자들도 이와 다른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주님보다 더 클 순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표현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도 교회의 전승을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믿음은 늘 하나요 동일한 것으로, 그것을 길고 장황하게 논쟁하거나, 거기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 번역: 최광민
여기서 이레네우스가 사도들과 그 제자들을 통해, 즉, (최소한) 예수의 제자 요한과 그 제자 폴리카포스를 거쳐 자기에게까지 전수되었다고 선언하는 기독교의 "정통적" 교리는 다음과 같다.
- 창조주인 한 성부
- 주님이자 구원자인 한 성자/예수
- 성자의 도래를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한 한 성령
- 동정녀를 통한 예수의 육체적 탄생
- 예수의 육체적 수난, 육체적 죽음, 육체적 부활, 육체적 승천
- 예수의 육체적 재림
- 모든 인류 (선인+악인)의 육체적 갱신/부활
- 부활한 모든 인류에 대한 실재적인 최후의 심판
따라서 AD 2세기의 이레네우스는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위의 신조 가운데 하나라도 거부하는 신학자들을 망설이지 않고 "이단자"로 선언할 것이다. 아마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너무 심오하고 시대를 앞섯던 탓에 이레네우스와 그의 스승 폴리카포스와 그의 스승이자 예수의 제자인 요한 모두가 정말로 예수를 오해했다고 맞받아치겠지만.
유신론 (종종 범신론) 계열 자유주의 신학자들 및 같은 궤적에 있는 사람(대체로 지성인)들은 예수를 몹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더러는 보수파 혹은 소위 "문자주의자" 기독교도들보다도 예수를 더 잘 알며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극진히 예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그들은 "예수가 자신을 일반 인간 이상의 존재로 주장했다"는 식의 역사적 기독교의 교리적 진술 자체를 예수에 대한 "오해"이며 또한 "모욕"으로 간주하고 분개하며, 따라서 사랑하는 예수를 열성적으로 "변호"해 그를 둘러싼 "신화적 오해"를 벗겨주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 계열 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십자가에서 처형된 후"부터 "2천 년간 오해받고 있는", 심지어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조차" 오해받은 예수를 그 "오해들"로부터 "구출"해 내는 작업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예수는, 가령,
- "나는 신의 아들이다"라거나,
- "나 이외에는 신을 진정 알거나 본 자가 없다" 라거나,
- "나는 이 세상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 라거나,
- "(나에게 저지르지 않은) 너 개인의 죄를 내가 사면한다" 라거나
- "나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육체적으로 부활할 것이다"
란 따위의 "비이성적"이고 심지어 "미신적"인 주장을 편 "유치"한 사람일 리가 절대로 없기 때문에.
혹은 "20세기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주장처럼 어쩌면 "예수 스스로"가 "본인 자신"을 오해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으니, 어쩌면 이들의 작업은 심지어 예수를 "예수 본인의 오해"로부터 구출해 내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오해였는가?
§ 역사적 예수
자유주의 신학의 핵심에는 소위 '역사적 예수'가 있다. 자유주의 신학이 전성기를 누리던 19세기 독일신학계의 고등성서비평 작업의 주 관심사 역시 '역사적 예수'였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18세기 함부르크 대학의 라이마루스 (Raimarus)가 시작하였는데, 예수를 AD 1세기의 관점에서 재조명한 라이마루스는 (1)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와 (2) 추종자들에 의해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된' 예수를 분리해 보는 방법론의 선구자다. 라이마루스는 예수의 실제 가르침과 후대 저작인 복음서 속의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고 보았고, 예수는 신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믿고 가르친 종교적/정치적 혁명가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실패하여 처형당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예수가 처형된 후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감추고 예수의 부활과 재림을 조작한 것으로 보는 이 견해에 따르면, 결국 기독교의 기원은 예수의 제자들에 의한 일종의 "종교적 사기극"이 된다.
라이마루스와는 달리 슈트라우스 (Strauss)는 기적에 대한 복음서의 내용을 '사기극'이나 '허구'가 아닌 '신화"로 본다. 그는 당시 헤겔철학의 관점에서 신화를 절대정신의 표현이라고 보았고, 따라서 예수가 그 삶을 통해 불가지한 신을 인간에게 가시화시켜주었다는 관점에서 이해될 때만 예수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은 "사실"이 된다고 본다. 이를 "신화적 사실"이라고 불러보자. 이 이론은 예수를 역사와 무관하게 이해하려는 켈러 (Martin Käller) 와 불트만 (Rudoph Bultmann)의 그리스도론으로 계승된다.
{마가/ 마르코 복음서}와 가상의 {Q문서}를 가장 오래된 예수 전승으로 보는 이론을 창시한 홀쯔만 (Heinrich Julius Holzmann)은 이 문서들 이후의 문서들은 역사적 예수의 재구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다른 복음서들 뿐 아니라 바울의 서신들은 예수의 근본 가르침 혹은 기독교의 원형을 재구성하는데 완벽히 배제된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알베르트 슈바이처 (A. Schweitzer)는 19세기에 제시된 다양한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한차례 평가/정리한다. 19세기의 도덕주의적 관점에 기반해 예수를 정의로운 신의 나라를 선포했던 윤리적 스승으로 묘사한 리츨(Ritschl) 등 당시 연구자들의 논리를 반박한 슈바이처는, 유대교 종말론 전통의 틀에서 분석할 때만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신의 아들과 메시아로 묘사된 예수의 이미지가 후대 기독교도들의 작품이라고 본 브레데 (W. Wrede)의 주장에도 반대한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본인이 스스로를 메시야로 믿었다고 주장했고 결과적으로 이런 자기확신에 근거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가 죽은 예수는 "실패한 메시아"였던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AD 1세기 중/후반의 기독교도들이 메시아 예수에 대한 신앙을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예수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자각이 기독교의 뿌리라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이렇게 적는다
"예수는 초자연적인 신의 나라가 곧 출현하리라고 전했지만, 이 나라는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는 오류를 범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가 흔히 현대의 (기독교) 성자로의 간주하는 슈바이처는 그의 신학박사 학위에서 제시한 '메시아로서의 자기확신은 있었으나 실패한 메시아'란 입장으로 인해 목사안수를 받았던 루터교회로부터 파문당할 위기에 처했다. 슈바이처를 '원주민의 영혼에 위험을 가져다줄 자'로 간주한 교단본부는, 슈바이처가 의학박사를 취득해 루터교단의 지원으로 아프리카에 '의료선교'를 나갈 때 아프리카에서는 의사로서만 일하고 일체 선교활동은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슈바이처로부터 받았다. 이것이 바로 슈바이처가 기독교 선교가 아닌 의료사업에만 종사한 이유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로 파견되기 전에 루터교단에 다음의 서약을 했다.
"나는 의사로서만 일하고, 다른 일에 대해서는 잉어처럼 침묵하겠습니다."
'보수적'인 성향의 교회에서조차 기독교도의 모범으로 칭송되는 슈바이처는 사실은 이런 류의 '기독교도'였던 것이다.
한편, {복음서}에 기록된 바대로의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일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브레데의 노선으로 기울었다. 루돌프 불트만이 그중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는 양식비평을 통해 {마태(오)}, {마가/마르코}, {누가/루가} 등 공관복음 분석을 통해 {복음서}에 기반한 역사적 예수의 연구는 그다지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가 보기에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그의 후대 추종자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한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혹은 '고백된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고백'으로부터 '역사'를 재구성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따라서 불트만의 관심은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신화적인) 예수의 죽음/부활이란 모티프를 실존철학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현대적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이 된다. 결과적으로 신학은 역사학보다는 문화인류학과 심리학에 가까와지게 된 것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불트만의 견해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또 다시 뒤집힌다. 케제만 (E. Käsemann) 등은 오직 고백된 형태, 즉 신화화된 예수만 가지고 초기 기독교가 성립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대신 후대에 "신격화된" 예수의 이미지만 제거하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의 원형을 밝힐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계열의 신학자들은 바로 이 "예수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다양한 가설과 문서비평/역사비평 등의 방법론을 총동원했는데, 그 결과 어떤 단일한 예수의 원형이 아니라, 오히려 입증되기 힘든 가설들에 바탕한 너무나 다양하고 파편적인 예수의 이미지들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를 이끌어내고자 강박적으로 몰두한 결과, 서로 일관되지 못한 다양한 "신학"들을 대거 양산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 AD 2세기의 이레네우스에게로 돌아가 보자.
CHAP. XXI.--THE VIEWS OF REDEMPTION ENTERTAINED BY THESE HERETICS.
5. Others still there are who continue to redeem persons even up to the moment of death, by placing on their heads oil and water, or the pre-mentioned ointment with water, using at the same time the above-named invocations, that the persons referred to may become incapable of being seized or seen by the principalities and powers, and that their inner man may ascend on high in an invisible manner, as if their body were left among created things in this world, while their soul is sent forward to the Demiurge. And they instruct them, on their reaching the principalities and powers, to make use of these words: "I am a son from the Father--the Father who had a pre-existence, and a son in Him who is pre-existent. I have come to behold all things, both those which belong to myself and others, although, strictly speaking, they do not belong to others, but to Achamoth, who is female in nature, and made these things for herself. For I derive being from Him who is pre-existent, and I come again to my own place whence I went forth." And they affirm that, by saying these things, he escapes from the powers. He then advances to the companions of the Demiurge, and thus addresses them:--"I am a vessel more precious than the female who formed you. If your mother is ignorant of her own descent, I know myself, and am aware whence I am, and I call upon the incorruptible Sophia, who is in the Father, and is the mother of your mother, who has no father, nor any male consort; but a female springing from a female formed you, while ignorant of her own mother, and imagining that she alone existed; but I call upon her mother." And they declare, that when the companions of the Demiurge hear these words, they are greatly agitated, and upbraid their origin and the race of their mother. But he goes into his own place, having thrown [off] his chain, that is, his animal nature. These, then, are the particulars which have reached us respecting "redemption."(1) But since they differ so widely among themselves both as respects doctrine and tradition, and since those of them who are recognised as being most modern make it their effort daily to invent some new opinion, and to bring out what no one ever before thought of, it is a difficult matter to describe all their opinions. ---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1,
.....그러나 그들은 교리과 전통에 있어 매우 다양한데, 이들 가운데 가장 최신 유행을 이끄는 자들은 매일매일 새로운 견해를 발명해내고 있다. 사람들이 이전에 생각해 내지 못했던 새로운 견해들을 매일 매일 발명해내고 있기에, 이들의 견해를 모두 정리해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1권 / 번역: 최광민
AD 2-3세기의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역시 그노시스 계열의 이런 성향에 대해 일침을 가하면서 발렌티누스가 개시한 이 계열의 그노시스가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복잡하게 진화되었는지를 비판한다.
Valentinus, however, was as yet nowhere, and still the Valentinians derive their name from Valentinus. Axionicus at Antioch is the only man who at the present time does honour to the memory of Valentinus, by keeping his rules to the full. But this heresy is permitted to fashion itself into as many various shapes as a courtezan, who usually changes and adjusts her dress every day. And why not? When they review that spiritual seed of theirs in every man after this fashion, whenever they have hit upon any novelty, they immediately call their presumption a revelation, their own perverse ingenuity a spiritual gift; but (they deny all) unity, admitting only diversity. And thus we clearly see that, setting aside their customary dissimulation, most of them are in a divided state, being ready to say (and that sincerely) of certain points of their belief, This is not so; and, I take this in a different sense; and, I do not admit that. By this variety, indeed, innovation is stamped on the very face of their rules; besides which, it wears all the colourable features of ignorant conceits. --- Tertullian, {Adversus Valentinianos} iv,
발렌티누스의 원조 교리는 사라졌으나, 발렌티누스파는 여전히 그의 이름을 사용한다. 안티오키아의 악시오니코스만 발렌티누스의 교리를 현재까지 완전히 지키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 이단은 매일 옷을 갈아입는 고급창녀처럼 교리를 다양하게 변형시켜왔다. 안 그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영적 씨앗을 돌아보면서 그 안에 어떤 새로운 것이라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즉시 자신들의 생각이 '계시'이며 자신 만의 기괴한 독창성이며 영적 선물이라고 주장해 댄다. 그들은 통일성이 아닌 오직 다양성 만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의 통상적인 기만은 제쳐두더라도 그들 대부분이 늘 분열적이라는 점과 (불일치하는 / 필자 주) 각자의 믿음을 주창할 준비가 늘 되어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게 된다. (통일이 아닌 다양성을 추구하는 그들의 주장은 / 필자 주) 이것은 틀린 것이다. 나는 그들과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며, 그들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진실로 이런 다양성을 통해 발명된 것들이 바로 그들의 교리를 특징 짓는다. 아울러 이런 다양성은 무지한 허세가 보여주는 온갖 알록달록한 특징들로 채색되어 있다. ----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발렌티누스 반박} 4장 / 번역: 최광민
For although Valentinus seems to use the entire volume, he has none the less laid violent hands on the truth only with a more cunning mind and skill than Marcion. Marcion expressly and openly used the knife, not the pen, since he made such an excision of the Scriptures as suited his own subject-matter. Valentinus, however, abstained from such excision, because he did not invent Scriptures to square with his own subject-matter, but adapted his matter to the Scriptures; and yet he took away more, and added more, by removing the proper meaning of every particular word, and adding fantastic arrangements of things which have no real existence. -- Tertulian,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Chapter 38
비록 발렌티누스가 (기독교의 / 필자 주) 성서 전부를 사용하기는 했던 듯하나, 그는 마르키온보다 오히려 더 교활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진리를 유린했다. 마르키온은 펜 대신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칼을 사용했다. 그의 주장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교리와 일치되지 않는 / 필자 주) 성서(의 일부 / 필자 주)를 잘라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렌티누스는 자신의 교리에 맞게 성서를 새로 만드는 대신, 자신의 교리를 성서에 끼워 맞췄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성서에 사용된 특정 단어들의 적절한 의미를 제거하고, 또 존재하지도 않는 허망한 내용들을 삽입함으로써 (마르키온보다 / 필자 주) 성서를 더 많이 삭제하고, (성서에 없는 가르침을 / 필자 주) 더 많이 삽입한 것이다. ----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이단에 대한 처방} 38장 / 번역: 최광민
Their very unity, however, is schism. I am greatly in error if they do not among themselves swerve even from their own regulations, forasmuch as every man, just as it suits his own temper, modifies the traditions he has received after the same fashion as the man who handed them down did, when he moulded them according to his own will. The progress of the matter is an acknowledgment at once of its character and of the manner of its birth. That was allowable to the Valentinians which had been allowed to Valentinus; that was also fair for the Marcionites which had been done by Marcion— even to innovate on the faith, as was agreeable to their own pleasure. In short, all heresies, when thoroughly looked into, are detected harbouring dissent in many particulars even from their own founders. The majority of them have not even churches. Motherless, houseless, creedless, outcasts, they wander about in their own essential worthlessness. --- Tertulian,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Chapter 42
이단자들에게 통일이 있다면 이들이 분열한다는 사실 뿐이다. 내가 틀리지 않다면, 그들이 그들 자신의 교리를 변개시기고, 그것이 자신의 본성인 양 자신들에게 교리를 전수해 준 자 (=발렌티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도 제멋대로 전승을 바꾸고 있다. 이들은 시작 때부터 그리했던 것이다. 즉, 발렌티누스파가 이런 성향이 용인하는 것은, 바로 발렌티누스 자신이 그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르키온파가 그런 것은 자기 좋을대로 신앙을 바꾼 마르키온이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교회에 속해있지도 않다. 어머니도 없고, 집도 없고, (통일된 / 필자 주) 신조도 없고, 동떨어져 있으면서, 그들은 조금도 가치없는 것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이단에 대한 처방} 42장 / 번역: 최광민
발렌티누스파를 포함한 다양한 그노시스 이단자들의 다양한 신학들을 향한 AD 2-3세기 기독교 교부들의 이 냉소적인 지적을 근/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그동안 (강박적으로) 생산해 내왔고 또 왕성하게 새로이 생산하고 있는 현대적이고 현란하고 다양한 "신학들"에 적용해 보자. 해방 신학, 페미니즘 신학, 환경 신학, 게이 신학, 포스트모던 신학, 또 무슨 무슨 신학들.
§ 혼란
'역사적 예수'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는 예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 특별히 바울은 대체로 관심 밖에 있거나, 역사적 예수를 신화적/신앙적 존재로 승화 혹 변질시킨 인물로 여겨진다. 따라서 예수와 바울, 혹은 복음서와 나머지 신약성서는 분리된다.
라이마루스처럼 이 모든 것이 예수의 제자들이 만들어 낸 사기극이라면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말하는 것은 더이상 아무 의미도 없으니 아예 논외로 치자. 라이마루스의 궤적을 따르는 '신학자'들은 사실은 아예 '신학자'조차 아닐 것이다. 그들은 '역사가'와 '종교학자'일 뿐이다.
만약 슈바이처의 예수처럼 메시아로서의 자각 (혹은 과대망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아니었으므로) 실패하였다면 그 예수를 "믿는" 종교는 무엇이란 말일까? 그것은 "종교"이기는 할까? "과대망상가"를 혹은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종교?
만약 불트만의 예수처럼 역사적 인물과는 상관없는 일종의 가상의 존재라면 그 예수를 "믿는" 종교는 도대체 무엇일까? "믿음"이란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 걸까? 판타지?
사기꾼 혹은 망상가 였던 어떤 '역사적' 인물이 3년 간 펼친 행각에서 어떤 고매한 삶이나 윤리적 가르침이 있다 치자. 전자의 사실 (=사기꾼 혹은 망상가)은 접어두고, 후자의 가르침만 채택해 어떤 '철학적' 입장과 '이념'을 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사실을 무시하고 후자 만으로 종교를 성립시킨다면, 그 종교는 과연 '믿을' 만한 어떤 것일까? 그것은 "종교"일까 "철학"일까?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동조자들은 혹시 어떤 과대망상가라 하더라도 만약 그 사람에게 "확신"과 소위 "진정성" 있었고, 또 그 사상이 심오하고, 심지어 바람직한 삶을 살기만 했다면 그 사람을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고 정말로 믿는 것일까?
결과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재구성하기 어려운 역사적) 예수 자체를 뺀 기독교의 모든 것은 후세의 오해와 조작과 과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으며, 사실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작업은 사실상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그들이 신학교에서 '종교인'을 양성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해 솔직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들이 현재의 기독교가 예수 이후 십 수세기 동안 '잘못' 전수된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그들은 왜 그 현재의 '기독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떠나는 대신, 그 기독교의 틀 안에 계속해서 몸을 담고 있는 것일까? 이런 포지셔닝은 사실상의 위선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은 '역사적' 의미에서 '기독교도'들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대개 '우악스럽고 조악한' 근본주의자들보다 자신들이 보다 더 예수의 본질적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이들은 '역사적 기독교'의 신자는 결코 아니며, 대체로 본인들도 그렇게 인정하리라. 이들은 적어도 예수의 십자가형이 있었던 AD 33년 경 이후의 (최대한 AD 1세기 말) 기독교의 본래의 예수의 가르침과 상관없거나 혹은 왜곡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그 이후 십 수 세기의 기독교는 사실상 이들의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다.
그래서 대체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예수는 기독교가 냉정하게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는 그룹들, 가령 "여호와의 증인"에서 가르치는 예수보다도 '정통적'인 기독교로부터 멀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적어도 니케아 공회의까지만 소급할 경우) 자유주의 신학이 '정통' 기독교가 AD 2세기 부터 지속적으로 이단으로 정죄해 온 예수에 대한 교리 혹은 그리스도론보다도 더 '이탈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면서도, 기독교 정통의 입장에 보다 가까운 이단의 가르침이 기독교 신학교에서 배제되는 반면, 자유주의 신학이 신학교의 강단에서 '수준높은 신학적 입장'으로 용인되는 것은 내 눈에는 기이한 일이다. 아마도 AD 1-4세기를 살았던 모든 기독교 교부들의 눈으로 볼때도 기이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바울의 서신들과 복음서들에 "묘사"된 대로의 예수를 거부하는 정도의 단계에 이르면, 이들의 "기독교"는 "역사적 기독교"를 이탈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버전의) 예수가 등장하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 혹은 종교들이 창시된 것이라고 봐도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사유체계와 방법론이 '우수'하고 학문적으로 '세련'되었다는 것을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기독교의 옷을 입고 신학교의 교수와 교회의 목사로 활동하는 현상이 내게는 기이할 따름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독교"라는 종교에 묶어두는 거의 유일한 근거는 "용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적 기독교의 용어들을 그들의 신학에 맞춰 새롭게 재정의해 왔고, 또 "그래야 한다"며 그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레네우스는 동일한 이유로 스스로를 "기독교도"라고 주장한 그노시스 그룹들에 대해 일갈했던 것과 같이 말할 것이다.
2. Error, indeed, is never set forth in its naked deformity, lest, being thus exposed, it should at once be detected. But it is craftily decked out in an attractive dress, so as, by its outward form, to make it appear to the inexperienced (ridiculous as the expression may seem) more true than the truth itself. One far superior to me has well said, in reference to this point, A clever imitation in glass casts contempt, as it were, on that precious jewel the emerald (which is most highly esteemed by some), unless it come under the eye of one able to test and expose the counterfeit. Or, again, what inexperienced person can with ease detect the presence of brass when it has been mixed up with silver? Lest, therefore, through my neglect, some should be carried off, even as sheep are by wolves, while they perceive not the true character of these men,— because they outwardly are covered with sheep's clothing (against whom the Lord has enjoined us to be on our guard), and because their language resembles ours, while their sentiments are very different—
오류는 그 추한 알몸을 결코 드러내지 않지만, 일단 그 알몸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오류는 매력적인 옷으로 교묘하게 위장하기 때문에, 경험없는 사람들에는 오류가 진실보다도 더 진실처럼 여겨진다. 이 점에 대해서 나보다 훨씬 훌륭한 이가 이미 언급했다시피, 유리로 만든 교묘한 가짜 에머랄드가 위조품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를 전문적으로 감정하고 위조임을 입증할 수 있는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경험없는 사람들이 은에 동이 섞여있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까? 경험없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마치 양들이 늑대들에게 낚이듯이 이들에게 사로잡혀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겉으로 양의 가죽을 입고 있고, 그들의 용어는 우리의 용어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신학적) 견해는 우리와 매우 다르다. --- 번역: 최광민
.....But since they differ so widely among themselves both as respects doctrine and tradition, and since those of them who are recognised as being most modern make it their effort daily to invent some new opinion, and to bring out what no one ever before thought of, it is a difficult matter to describe all their opinions. ---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1, Chapters 21.5
.....그러나 그들은 교리과 전통에 있어 매우 다양한데, 이들 가운데 가장 최신 유행을 이끄는 자들은 매일매일 새로운 견해를 발명해내고 있다. 사람들이 이전에 생각해 내지 못했던 새로운 견해들을 매일 매일 발명해내고 있기에, 이들의 견해를 모두 정리해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번역: 최광민
다시 테르툴리아누스를 인용해 보자.
For although Valentinus seems to use the entire volume, he has none the less laid violent hands on the truth only with a more cunning mind and skill than Marcion. Marcion expressly and openly used the knife, not the pen, since he made such an excision of the Scriptures as suited his own subject-matter. Valentinus, however, abstained from such excision, because he did not invent Scriptures to square with his own subject-matter, but adapted his matter to the Scriptures; and yet he took away more, and added more, by removing the proper meaning of every particular word, and adding fantastic arrangements of things which have no real existence. -- Tertulian,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Chapter 38
비록 발렌티누스가 (기독교의 / 필자 주) 성서 전부를 사용하기는 했던 듯하나, 그는 마르키온보다 오히려 더 교활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진리를 유린했다. 마르키온은 펜 대신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칼을 사용했다. 그의 주장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교리와 일치되지 않는 / 필자 주) 성서(의 일부 / 필자 주)를 잘라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렌티누스는 자신의 교리에 맞게 성서를 새로 만드는 대신, 자신의 교리를 성서에 끼워 맞췄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성서에 사용된 특정 단어들의 적절한 의미를 제거하고, 또 존재하지도 않는 허망한 내용들을 삽입함으로써 (마르키온보다 / 필자 주) 성서를 더 많이 삭제하고, (성서에 없는 가르침을 / 필자 주) 더 많이 삽입한 것이다. ----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이단에 대한 처방} 38장 / 번역: 최광민
비슷한 느낌을 1923년 미국의 "근본주의" 장로교단 신학자 그레샴 메이천은 이렇게 진술한다.
In the sphere of religion, in particular, the present time is a time of conflict; the great redemptive religion which has always been known as Christianity is battling against a totally diverse type of religious belief, which is only the more destructive of the Christian faith because it makes use of traditional Christian terminology. This modern non-redemptive religion is called "modernism" or "liberalism." Both names are unsatisfactory; the latter, in particular, is question-begging. The movement designated as "liberalism" is regarded as "liberal" only by its friends; to its opponents it seems to involve a narrow ignoring of many relevant facts. And indeed the movement is so various in its manifestations that one may almost despair of finding any common name which will apply to all its forms. But manifold as are the forms in which the movement appears, the root of the movement is one; the many varieties of modern liberal religion are rooted in naturalism--that is, in the denial of any entrance of the creative power of God (as distinguished from the ordinary course of nature) in connection with the origin of Christianity. The word "naturalism" is here used in a sense somewhat different from its philosophical meaning. In this non-philosophical sense it describes with fair accuracy the real root of what is called, by what may turn out to be a degradation of an originally noble word, "liberal" religion. ---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 Liberalism} (1923)
특별히 종교 분야를 본다면, 현대는 갈등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늘 '기독교'라고 불려왔던 저 위대한 속죄의 종교는 이제 그와 전혀 다른 형태의 종교적 신념들과 싸우고 있는데, 이 신념들은 기독교의 전통적 용어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더욱 파괴적이다. 이 현대적인 비-속죄적 종교는 이른 바 '근대주의' 혹은 '자유주의'라 불린다. 두 이름 모두 사실은 만족스럽지 않다. 특별히 후자의 '자유주의'란 용어는 매우 논쟁적이다. '자유주의'라 불리는 이 운동은 그저 이를 따르는 자들이 '자유주의자들'이라서 '자유주의적'이라고 간주될 뿐이다. '자유주의'의 반대자들은 이 용례가 보다 타당한 비판관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실로 이 운동은 그 형태가 너무 다양해서 , 이 운동에 속한 모든 양상을 다 담아낼 어떤 공통적인 이름을 찾아내는 것이 거의 절망적이다......[후략] --- 그레셤 메이천, {기독교와 자유주의} (1923년) / 번역: 최광민
사실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학적 입장은 대체적으로 삼위일체, 속죄 등의 전통적 기독교 교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기독교라기 보다는 유니테리언 (Unitarian)의 입장에 가깝다. 아울러 기독교도 만의 제한적/배타적 구원을 말하는 전통 기독교에 반해 보편적 구원과 종교적 상대주의/다원주의를 말한다는 점에서는 보편구제론자/유니버설리스트(Universalist)에 가깝다. 이 둘은 미국에서는 유니테리언-유니버설리스트(UU)가 되어 하나의 종교그룹으로 존재하는데, 내가 사는 동네의 UU교회에서 밝힌 자신들의 입장은 아래와 같다.
Although UUism comes from a Christian tradition, ours is not a Christian church per se (a small percentage of UUs call themselves Christian), but it welcomes Christians, as it does all people, in its catholicity. Ours is a non-creedal, non-doctrinal religion. So as we are not a Christian church, neither are we Buddhist, Confucian, Hindu, Islamic, Judaic, nor Taoist. We do, however, draw wisdom from these and other of the world's religions, which inspires us in our ethical and spiritual life.
비록 UU가 기독교 전통에서 오긴했지만, 우리는 기독교 교회가 아닙니다. (UU의 아주 소수만이 자신들은 기독교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보편성 가운데서 기독교도들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비-신조적이고, 비-교리적인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가 아니며, 역시 불교도, 유교도, 힌두교도, 이슬람, 유대교, 혹은 도교도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운리적이고 영성적인 삶을 고무시켜주는 이들 세계종교로부터 지혜를 빌어옵니다.
Most UUs don't believe that Jesus was a supernatural being. Many would say that the power of his love, the penetrating simplicity of his teachings, and the force of his example of service on behalf of the disenfranchised and the downtrodden are what is crucial, not his supposed miraculous birth nor the claim that he was resurrected from the dead. Some would say that Jesus was the son of God, as we are all sons and daughters of God, but not the same as God. Generally UUs regard Jesus as one of several important moral and ethical teachers who have shown humans how to live a life of love, service, and compassion. Our concern is not with how he was born or how he died, but with how he lived.
대부분의 UU 신자들은 예수를 초자연적인 존재로 믿지않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예수의 사랑과 그의 단순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가르침과 예수가 눌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보여준 섬김의 모범이 보여준 힘들이 핵심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기적적인 탄생이라든지 죽음에서 부활한 이야기들은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만, 이는 우리가 신의 아들들과 딸들이라고 말할 때와 같은 뜻으로 그런 것이며 결코 신과 동등하다는 뜻으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UU신자들은 예수를 사랑과 봉사와 동정의 삶을 사람들에게 보여준 중요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스승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예수가 어떻게 태어나서 죽었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있습니다. -- 번역: 최광민
이 신조와 오늘날 "진보"신학자라고 스스로 자리매김하는 자유주의/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의 입장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세부에서는 다양한 이견이 있을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위의 진술은 두 그룹 사이에서 거의 동의점을 찾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UU의 이런 신조는 AD 1553년 장 칼뱅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있던 스위스 제네바에서 전통적인 니케아-칼케돈 신조의 삼위일체론을 거부하여 제네바 시 당국으로부터 화형당했던 유니테리언의 비조 미카엘 세르베투스의 가르침보다도 훨씬 더 역사적 기독교로부터 멀다.
그렇다면, 왜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포지션이 '전통적/역사적' 기독교가 아니라고 명쾌하게 밝히고 떠나는 대신 계속해서 기성교회 내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일까? 자신들이야말로 "진짜 기독교도"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이레네우스는 그노시스 발렌티누스파에게 했던 동일한 비판을 쏟아부을 것이다. 발렌티누스파 역시 자신들을 '진정한 기독교도'이며 '예수와 사도(특별히 바울)들의 정확한 가르침을 계승'했다고 자부했다.
나는 그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학문"이란 그림자와 "레토릭" 속에 숨지 말고, 보다 깔끔한 "문장"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여주길 바랄 뿐이다. 특별히 일반독자를 상대로 한 글들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레토릭은 지나치게 과도하여 종종 도무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물론 저자의 학문적 배경을 먼저 이해한다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쉽게 알아챌 수 있지만) 모호하다.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대부인 루돌프 불트만의 제자였지만 후일 그 학파에서 이탈한 에타 린네만 (Eta Linnemann)은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한 신학비평인 {Historical Criticism of the Bible: Methodology? or Ideology?, 성서역사비평: 방법론인가? 이데올로기인가?} 속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로서의 성공적이었던 자신의 "학문적" 삶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독일어의 영어번역판 (1990)에서 일부 발췌번역하겠다.
Eta Linnemann, {Historical Criticism of the Bible: Methodology or Ideology?}
"왜 역사비평신학 반대하시나요?"란 질문을 그동안 들어왔다. 우선은 이렇게 언급하고자 한다. 내가 역사비평신학에 반대하는 이유는, 나의 주님이자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골고타에서 이룬 영광스런 구원을 내가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루돌프 불트만, 에른스트 푹스,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게르하르트 에벨링의 제자로서, 나는 역사비평신학 분야의 최고 교수들을 스승으로 두었다. 다른 면을 보더라도 나는 내 분야의 연구에서 과히 나쁘지 않는 성과를 거두었다. 내 첫 책은 베스트셀러였고, 서독 브라운슈바이크 공대의 신학/종교교육 담당교수가 되었고, 엄격한 교수자격심사를 통과한 후에는 서독 마르부르크의 필립스 대학의 신학부로부터 명예 신약(성서)학 교수지위를 얻었다. 나는 신약학연구학회 ( Studiorum Novi Testamenti Societas)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동료학자들로부터 점점 더 인정을 받았다. 나는 역사비평신학 연구에 지적으로 몰두해 있었으며, 신학연구를 통해 신을 섬기며 복음의 선포에 일조하고 있다고 깊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관찰과 발견과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나는 내가 결코 원치 않았던 두가지 사실에 승복하게 되었다. 즉, (1) 어떤 "진리"도 "성서 텍스트에 관한 과학적 작업"을 통해서 드러나지는 않으며, (2) 그런 작업은 복음의 선포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더이상 부인할 수 없는 나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실재적인 깨달음이었다. 그 후, 신은 그의 은혜와 말씀을 통하여 이 (역사비평)신학의 이론적 차원에 대한 통찰을 얻게 하셨다. 역사비평신학은 신의 말씀에 바탕하는 대신 다양한 철학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철학들은 진리에 대한 과감한 정의를 내릴 수 있게 해주며, 신의 말씀을 진리의 근거에서 배제시킨다. 이런 철학들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가정을 취하는데, 즉 어느 누구도 성서 속의 신, 천지의 창조자, 우리 구원자와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 대한 유효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오늘날 나는 역사비평신학의 독점적인 성격과 세계에 퍼진 그 영향력을 심판의 징조 (로마서 1:18-32)로 깨닫게 되었다. 신은 이미 예언하였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디모데후서 4:3)“, 신은 "효과있는 미혹의 능력"을 보내어 그들이 거짓을 믿게"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데살로니가 후서 2:11).
[중략]
내 인생 처음으로, 검은색이 더 선명한 검은색으로, 흰색이 더 선명한 흰색으로, 그리고 더이상 두 색이 회색으로 뒤섞여 버리지 않게된 순간에 체험했던 환희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중략]
누군가의 지적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 속 성령의 증거를 통해, 그동안의 내 잘못된 가르침이 죄였다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동시에, 나는 이 죄 역시 예수가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용서되었기에 나는 기쁘고 감사드린다.
이것이 내가 역사비평신학을 반대하는 이유다. 나는 내가 내 삶을 예수께 맡기 전 내가 가르치고 저술한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긴다. 이 기회를 통해, 내가 이미 나의 두 책 {Gleichnisse Jesu...}와 {Studien zur Passionsgeschichte}를 비롯해 학술지에 기고한 나의 모든 논문을 내던져 버렸음을 알려드린다. 내가 소장한 모든 저술들을 나는 1978년 내 손으로 직접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만약 여러분이 내 책이나 논문들을 하나라도 서재에 가지고 계시다면, 나처럼 해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린다.
에타 린네만 교수(은퇴). 1985 7.5 --- 발췌번역: 최광민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든 에타 린네만의 책에서 읽은 이 서문은, (과)학계에 있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별히, 증명이 종종 불가능한 인문학 계열 학자들 가운데 자신의 학문적 과오 (혹은 "과오라고 생각한 것")에 대해 에테 린네만처럼 이토록 비장하게 "참회"한 사람은 과문한 탓인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참회"하려면 자신의 "학문적 오류"를 "죄"로 인지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처럼 자신의 "학문적 과오"를 "죄"라고까지 선언하는 사람을 나는 그다지 들어본 적 없다. 그녀의 "과오" 혹은 "오류"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일단 논외로 하자.
신은 어떤 (신)학자가 저지른 (신)학적 오류에 대해, 다만 그것이 "학문연구의 일환"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너그럽게 용서할 것인가? 아니면 학자와 선생으로서 그 권위를 "믿은" 그 제자들과 독자들에게 끼친 오류의 해악에 대해,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입을 빌어 아래와 같이 답할 것인가?
μὴ πολλοὶ διδάσκαλοι γίνεσθε, ἀδελφοί μου, εἰδότες ὅτι μεῖζον κρίμα λημψόμεθα.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야고보의 편지} 3:1
§ 트리레마 (Trilemma)
{반지의 제왕}의 작가 J.R.R. 톨킨의 대학동창으로 둘도 없는 친구이자 함께 캠브릿지 대학의 영문학 교수였던 C.S. 루이스의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는, 평생 미혼으로 살았던 C.S. 루이스가 제 2차 세계대전 전쟁고아 여럿을 돌보면서 그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고민하다가 구상하게 되었고, 이 이야기를 읽은 톨킨이 {반지의 제왕} 삼부작을 쓰게 된 사연으로도 유명하다.
C. S. Lewis, {나니아 연대기, The Chronicles of Narnia: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
이번에 영화화 된 것은 {나니아 연대기}의 제 1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나찌의 공습을 피해 어떤 한 교수의 시골 저택에 보내져 술래잡기를 하던 루시, 에드먼드, 수잔, 그리고 피터 페벤시 가의 네 남매가, 저택의 한 골방 속의 옷장을 통해 나니아라는 나라로 들어가 겪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말하는 동물들과 유니콘, 그리핀, 켄타우루스, 미노타우루스 등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족들이 살고 있는 그 땅은, 사악한 하얀마녀 제이디스의 저주로 100년 간 크리스마스가 없는 겨울로 지내게 되었는데, 이제 이 주인공 4남매는 신비롭고 용감하지만 다정한 사자인 나니아의 구원자 아슬란의 지휘 하에, 나니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대서사시와 같은 전투에 가담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있어 이 소설/영화에 대한 첫인상은 아마도 아이들을 위한 동화스런 "판타지"이리라. 그러나 이 소설/영화는 사실은 매우 "종교적"인 모티브를 담고 있으며, 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의 복음서를 알레고리로 처리하고 있다. 아마 기독교도라면 이 영화 속 곳곳에 자리잡은 기독교적 모티프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듯하다.
소설/영화에 사용된 유대-기독교적 모티프를 한번 정리해 보자:
... 나니아에는 한 예언이 있다. 인간 즉 "아담의 아들들과 이브의 딸들"이 올때, 마녀가 가져온 100년 동안 크리스마스가 없었던 겨울로부터 나니아를 회복시키고 왕좌에 오른다는 것이다. 아울러 지금 나니아를 비우고 있는 나니아의 진짜 수호자인 황금빛 갈기의 숫사자 아슬란이 이 모든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해 다시 오고 있다고 비버 부부가 말해주었을때, 페번시 가문의 네 아이들은 믿지 않는다. 한편 남매의 셋째인 에드먼드는 나니아의 왕을 시켜주겠다는 마녀의 유혹에 빠져 배신자의 길을 걷지만, 에드먼드가 바른 길로 돌아섰을때 마녀는 '배신자의 피는 내 것이다'라는 나니아의 법을 들어 에드먼드의 피를 요구한다. 마녀는 말한다.
"You know that every traitor belongs to me as my lawful prey and that for every treachery I have a right to kill.... And so that human creature is mine. His life is forfeit to me. His blood is my property... unless I have blood as the Law says all Narnia will be overturned and perish in fire and water."
이 법은 나니아의 바다 저 편에 있는 신비로운 황제에 의해 제정된 "Deep Magic"으로, 모든 배신자는 마녀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규정. 이 규정을 아슬란은 깨고자 하지 않는다. 대신 배신자인 에드먼드 대신 자신의 생명으로 피값을 치루겠다는 비밀협상을 마녀와 맺는다. 마녀가 "어리석은" 아슬란을 모욕한 후 돌제단 위에서 아슬란의 심장에 비수를 내리꽂은 다음날, 아슬란 없는 나니아의 해방군은 마녀의 막강한 병력 앞에 고전을 면치 못한다.
사실 그날 새벽, 마녀가 모르는 사이 영광스럽게 부활한 아슬란은 (사실 아슬란은 순수한 희생은 죽음을 무효화시킨다는 "Deeper Magic"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슬란은 미지의 황제가 제정한 두가지 원리를 하나도 깨지않고 오히려 둘 다 만족시키는 방법으로 에드먼드를 구원한다.), 그 부활을 목격한 두 자매와 함께 마녀의 성으로 먼저 가서 마녀가 오래전 얼음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은 나니아의 시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이들과 함께 전장으로 돌아와 마녀와 그의 군대를 괴멸시킨다. 승리를 얻은 아슬란은 예언대로 페벤시 가문의 4남매를 나니아의 왕과 여왕으로 봉하고, 홀로 해변을 걸어 어디론가 떠나간다. 언젠가 자신의 나라로 다시 돌아올 것이란 여운을 남기고.
잘 알려진 바대로 이 모든 이야기는 사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특별히 {창세기}와 {복음서}에 대한 메타포이다. 위의 줄거리 속에 아담과 하와의 거역, 그로 인해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 구약성서의 핵심정신인 '피의 보속을 통한 정의'의 원리,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에 대한 성서의 모티프가 넘쳐난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저 바다 건너에서 "Deep Magic"과 "Deeper Magic"를 제정한 신비로운 황제는 '성부'를 말한다. 나니아를 창조하고 돌보는 "사자" 아슬란은 '성자' 예수를 상징한다. (신약성서 속에서 예수는 성부와 함께 세상을 창조한 창조자로 표현된다.) 영화 속 설정에서도 그러하고, 예수가 속한 유다 부족의 상징이 사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백색마녀는 사탄을 의미하며, 페번시 가문의 네 아이는 인간의 상태를 상징한다. 특별히 에드먼드는 배반자로서의 인간 (e.g. 아담과 이브)를 뜻한다. 마녀의 성에 얼음으로 변해 전시되어 있는 나니아의 시민들은 스올(음부)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이미 죽은 사람들로서, 부활한 아슬란이 전장으로 막바로 달려가지 않고 이들을 먼저 구출하는 것 역시 신약성서의 한 테마에서 따온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를 단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말하고는 한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여기에 사용된 '사랑'이란 단어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더 정밀한 정의가 필요하다. 기독교의 교리체계는, 바로 이 {나니아 연대기} 속에 등장하는 주제처럼, 죄인은 죽음으로써 그 죄를 갚는다는 (유대교의) "피의 원리"과 선택된 메시아가 그 배신의 댓가를 대신 치른다는 (기독교만의) "대속의 원리" 위에 축조되어 있으며,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사랑"과 "평화"란, 두 원리 속에서 드러나는 신의 "사랑"이자, 그 결과 신과 누리는 "평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원리는 현대의 랍비-유대교보다는, 동물희생의 원리를 예수에게 투사시키고 또 십자가를 동물희생의 종결로 선언하는 기독교에 더 분명히 보존되어 있다. 즉, 2000년 전 예수 당시의 "성전 유대교(Temple Judaism)"에서는 "희생을 통한 보속"이란 관점이 분명했지만, AD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동물제물을 통한 제사행위가 사라져버린 현대의 '탈무드/랍비 유대교(Talmudic/Rabbinic Jadaism)'에서는 이 원리가 희석되어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성전 유대교"의 계승선 상에 있지, "탈무드/랍비 유대교"의 계승은 아니다.
이 소설의 저자인 북 아일랜드 출신의 C.S. 루이스는 기독교도의 가정에 태어났지만, 본인 스스로는 아주 오랫동안 무신론자였다. 그는 {Surprised Joy}와 {Mere Christinanity}에서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무척 화가 났었었다, (I was) very angry with God for not existing.라고 기술했다. 그렇게 무신론자로 살던 1931년 무렵, 옥스포드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이자 또 로마카톨릭 신자였던 톨킨 및 여러 친구들과 격렬한 토론을 벌인 후, 마침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영국국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이런 그의 개인사는 마치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 -> 신플라톤주의 -> 기독교로 개종한 종교적 편력과 닮아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사람들이 흔히 그러했던 것 처럼, C.S. 루이스 역시 기독교를 옹호하고 비판자로부터 교리를 방어하기 위한 일련의 책을 출판했다. 이러한 활동을 기독교에서는 "변증 (apologetics)"라고 하는데, 루이스는 당시의 영국과 유럽의 교회가 취했던 자유주의 신학 대신 꽤 정통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그가 취한 방법론은 유스티노스, 이레네우스, 히폴리투스, 에피파니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 다른 고대의 전투적 호교론자들이 취한 입장보다 꽤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C. S. Lewis, {Mere Christianity}
케임브릿지 대학의 영문과 및 비교문학 교수였지만, 루이스는 일반인들을 위해 쉽게 신학적 주제를 설명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런 저작 중 하나에 그의 유명한 {Mere Christianity 가 있다. 이 소책자에서 루이스는 기독교의 교리를 가급적 간단하고 쉽고 이성적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신앙의 선택'의 문제를 다루면서 신앙을 강요하는 대신 아래의 원리를 제시하고 독자의 선택을 종용한다.
"...A man who was merely a man and said the sort of things Jesus said would not be a great moral teacher. He would either be a lunatic - on the level with a man who says he is a poached egg - or he would be the devil of hell. You must take your choice. Either this was, and is, the Son of God, or else a madman or something worse. You can shut Him up for a fool or you can fall at His feet and call Him Lord and God. But let us not come with any patronizing nonsense about His being a great human teacher. He has not left that open to us..."
이 논증은 소위 {세정리, Trilemma, 3L} 혹은 라고도 불린다. 그의 논증은 "(기독교인든 아니든) 우리는 예수를 어떤 존재로 생각해야 하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이 말은 즉 기독교도 혹은 비-기독교도의 자의식 및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관계설정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역사적 예수는 대체로 아래의 세 유형 중 하나였을 것이다.
- 예수 = 미친 사람 (Lunatic) 혹은 과대망상가.
- 왜냐하면 (사실이 아닌데) 스스로 메시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혹은,
- 예수 = 사기꾼(Liar).
- 왜냐하면 (메시아가 아님을 알고도) 메시아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혹은,
- 예수 = 메시아(Lord).
- 왜냐하면 실제로 그는 메시아이고 또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정리를 꽤 좋아하는데, 블레이즈 파스칼이 자신의 {팡세}에서 사용한 소위 {파스칼의 도박, Pascal's Wager}, 즉 "기독교가 사실이면 믿으면 좋은 것이고, 사실이 아니더라도 손해 볼 것은 없다"는 식의 논증과 비교해보면 훨씬 관점이 뚜렷하다.
파스칼의 논리는 아래와 같다.
God is, or He is not. But to which side shall we incline? Reason can decide nothing here. There is an infinite chaos which separated us. A game is being played at the extremity of this infinite distance where heads or tails will turn up...Which will you choose then? Let us see. Since you must choose, let us see which interests you least. You have two things to lose, the true and the good; and two things to stake, your reason and your will, your knowledge and your happiness; and your nature has two things to shun, error and misery. Your reason is no more shocked in choosing one rather than the other, since you must of necessity choose. This is one point settled. But your happiness? Let us weigh the gain and the loss in wagering that God is. Let us estimate these two chances. If you gain, you gain all; if you lose, you lose nothing. Wager, then, without hesitation that He is. --- B. Pacal, {Penses}
파스칼이 생각한 도박은 (비록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분열되긴 했지만) 원칙적으로 '하나'의 종교와 '하나'의 '신'만이 용인되던 유럽사회에서는 해볼 만한 도박일 수는 있다. 그러나 다수의 종교와 다수의 신들 혹은 종교적 대상 가운데 하나를 걸어야 하는 도박이라면 그렇게 쉽게 판돈을 걸 수 없을 것이다. 너무 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하고, 솔직히 판돈을 한 군데 몰아 줄 객관적 근거를 찾기는 더 어렵다.
그에 비해 루이스의 정리는 비단 기독교의 예수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주요종교들의 교조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가령 한 종교의 창시자가 1-3의 사례라면? 만약 한 종교의 교조가 유일신과 하나이며 또한 신의 아들이라 말했는데, 혹은 우주의 원리를 깨닫고 니르바나를 이룬 붓다라고 말했는데, 혹은 유일신 알라의 최종적인 예언자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그저 과대망상가로 밝혀진다면 나는 여전히 그를 '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의 오묘하고 고매한 가르침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혹은 그들의 소위 "진정성"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나는 그를 더이상 '성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소위 "기독교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예수를 바라본 방식이다. 그가 보기에 예수는 임박한 종말을 믿고 행동한, 그러다 실패한 일종의 과대망상가였기 때문이다.
1-2사례라고 하면 이 경우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데, 이 경우 미쳤고 또 사기꾼인 자를 (상식적으로) '성인'이라고는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2-3 사례라면? 이 또한 일종의 형용모순(oxymoron)이다. 어떻게 '성인'과 '사기꾼'이 한 사람 속에 어우러질 수 있는가?
정리해 보자. 우리는 짜라투스트라, 고타마 싯달타, 마하비라, 예수, 무함마드, 라마 크리슈나를 모두를 그저 '성인'이란 한 카테고리에 넣어둘 수 있을까? 혹 그들의 삶의 모범, 혹은 윤리적 가르침 등 어느 수준까지만 고려한다면 가능할 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트리레마가 제시하는 모순 때문에 어느 수준부터는 모순없이 이들 모두를 동시에 '성인'의 반열에 동시에 올릴 수는 없다. 특별히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사실"의 문제와 직결되면 그렇다.
{나니아 연대기}의 아슬란으로 돌아가 설명하면 이렇게 된다. 마녀와의 전투를 앞둔 막중한 시점에서, 아슬란은 에드몬드를 위해 대신 희생을 치르겠다고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그 결정이 1번에 따른 것이라면, 그는 개죽음 (혹은 사자죽음?)을 당한 것이다. 2번이었다면 아슬란은 결코 에드먼드를 위해 대신 희생을 치른다는 식의 결심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슬란의 희생은 3번처럼 아슬란이 정말로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였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복음서 속에서 예수의 희생이 그가 정말로 '사람의 아들'이자 '신의 아들'이었을 때만 효력이 있는 것과 같다. 즉, 희생은 적법한 자의 희생일 경우에만 가치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무효이며 개죽음일 뿐이다.
물론 여기서 C.S. 루이스 논증은 한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Trilemma 에 따라 3번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이성적인 선택이고, 또 매우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필요하다. {성서}가 사실의 기록인 점에 한해서 그렇다는 것.
그런데 '성서'는 신인 예수가 바로 그렇게 모욕 당하고 죽고 부활했다고 진술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라틴교부로서는 '삼위일체'의 개념을 처음으로 가장 명료하게 표현한 인물이다). 따라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논리를 비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그런 부끄럽고 부적합하고 불가능한 이야기를 실제로 일어난 일로 적었다면, 이는 즉 오히려 믿을 만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란 취지로 말한 것이라 봐야 한다. 일종의, '역설을 통한 논증'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믿음과 이성/지성 사이에서 양자택일 하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믿음을 논증하기 위해 지성을 활용했다. 그러나 '일단 믿음을 가진 후' 믿음-이성을 대하는 신자의 자세를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이단자들/Heretics} 7장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이 북아프리카의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사야서}7장 9절 (καὶ ἐὰν μὴ πιστεύσητε οὐδὲ μὴ συνῆτε |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을 주제로 한 설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를 "믿음"으로써 그것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Crede, ut intelligas)
§ 맺음말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저작들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지성에 놀라는 동시에 또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논하는 그들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는 한편, 도대체 그들의 예수는 트리레마 몇 번에 속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나는 종종 궁금해한다.
그러나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은,
다시 수 없이 많은 이론과 학설들의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리라.
그러니 그저,
Give me that old time religion
It's good enough for me.
그래서 사실 우리의 '이성적' 선택은, 사실은 어떤 '믿음'에 기초할 수 밖에 없다. 즉, "{성서}를 사실의 기록이다"라는 진술이 여기서 하나의 의심할 수 없는 '공리(axiom)'로 받아들여진다는 조건 하에서만, Trilemma의 적용은 그 의미를 가진다. 이 공리를 수용하지 않으면, Trilemma에 대한 논의는 공허하다. 그러므로 합리적 논증은 믿음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는 있겠지만, 공리적 믿음 앞에 합리적 논증이 반드시 놓이지는 않는다.
그럼 이 믿음은 '맹목적 믿음'을 뜻하는 걸까?
그럼 이 믿음은 '맹목적 믿음'을 뜻하는 걸까?
보통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말 "나는 믿는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Credo quia absurdum"란 말이 이성/지성에 대한 믿음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많이 인용되지만, 사실 이 말은 테르툴리아누스가 한 말이 아니며, 따라서 잘못 인용된 것인데다가, 테르툴리아누스가 한 말의 맥락과 취지도 왜곡되어 있다. "Credi quia absurdum"이란 표현은 근세 초기인 특별히 지성주의와 카톨릭에 반대하는 측에서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변형되어 유포되어 온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가 {그리스도의 육체에 대하여 De carne Christi} 5장에서 한 말은 정확히는 "prorsus credibile est, quia ineptum est", 즉 "(그것은) 완전히 믿을 만 하다: 부적합하니까"와 "certum est, quia impossibile" 즉, "(그것은) 확실하다: 불가능하니까"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런 진술을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이 진술의 전후맥락은 아래와 같다.
테르툴리아누스는 (1) '나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인간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여도 신의 눈에는 지혜로운 일'이란 바울의 고백과 (2)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수사학에서 언질한 대로 '어떤 믿기 어려운 주장이 더 신뢰할 만할 수도 있는데, 믿기 어려운 주장을 굳이 지어낸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란 논리를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물질세계를 창조한 유대교의 신을 부정하고 따라서 예수의 육체성을 부정한 마르시온파 그노시스를 공박하기 위해 이 논고를 저술했다. 예수의 육체가 인간의 것과 다른 일종의 '가상의 육체'라는 마르시온파의 입장에서라면, 혹은 그리스 고등철학에서처럼 신은 영광의 존재요 제1원인이요 죽거나 고통을 당할 수 없는 아파테이아의 존재라면, 신은 같은 고대 지중해권 최고의 모욕적 형벌방식인 십자가형으로 처참하게 모욕당하거나 죽거나 부활할 수 없다. 그래서 신의 모욕-죽음-부활이란 개념은 이들의 입장에서는 '신의 속성상' '부적합'하고 '불가능'다.
테르툴리아누스가 {그리스도의 육체에 대하여 De carne Christi} 5장에서 한 말은 정확히는 "prorsus credibile est, quia ineptum est", 즉 "(그것은) 완전히 믿을 만 하다: 부적합하니까"와 "certum est, quia impossibile" 즉, "(그것은) 확실하다: 불가능하니까"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런 진술을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이 진술의 전후맥락은 아래와 같다.
"...crucifixus est dei filius: non pudet, quia pudendum est. et mortuus est dei filius: [prorsus] credibile est, quia ineptum est. et sepultus resurrexit: certum est, quia impossibile...." -- Tertulian, {De Carne Christi} 5:4
"... 신의 아들은 십자가형을 당했다. 나는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십자가형은 사실)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신의 아들은 죽으셨다. 이는 [분명히] 믿을만 하다: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분은 묻히셨고 다시 부활하셨다. 이는 확실하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테르툴리아누스, {그리스도의 육체에 대하여} 5:4 / 번역: 최광민
테르툴리아누스는 (1) '나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인간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여도 신의 눈에는 지혜로운 일'이란 바울의 고백과 (2)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수사학에서 언질한 대로 '어떤 믿기 어려운 주장이 더 신뢰할 만할 수도 있는데, 믿기 어려운 주장을 굳이 지어낸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란 논리를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물질세계를 창조한 유대교의 신을 부정하고 따라서 예수의 육체성을 부정한 마르시온파 그노시스를 공박하기 위해 이 논고를 저술했다. 예수의 육체가 인간의 것과 다른 일종의 '가상의 육체'라는 마르시온파의 입장에서라면, 혹은 그리스 고등철학에서처럼 신은 영광의 존재요 제1원인이요 죽거나 고통을 당할 수 없는 아파테이아의 존재라면, 신은 같은 고대 지중해권 최고의 모욕적 형벌방식인 십자가형으로 처참하게 모욕당하거나 죽거나 부활할 수 없다. 그래서 신의 모욕-죽음-부활이란 개념은 이들의 입장에서는 '신의 속성상' '부적합'하고 '불가능'다.
그런데 '성서'는 신인 예수가 바로 그렇게 모욕 당하고 죽고 부활했다고 진술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라틴교부로서는 '삼위일체'의 개념을 처음으로 가장 명료하게 표현한 인물이다). 따라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논리를 비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그런 부끄럽고 부적합하고 불가능한 이야기를 실제로 일어난 일로 적었다면, 이는 즉 오히려 믿을 만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란 취지로 말한 것이라 봐야 한다. 일종의, '역설을 통한 논증'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믿음과 이성/지성 사이에서 양자택일 하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믿음을 논증하기 위해 지성을 활용했다. 그러나 '일단 믿음을 가진 후' 믿음-이성을 대하는 신자의 자세를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이단자들/Heretics} 7장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For philosophy is the material of the world’s wisdom, the rash interpreter of the nature and dispensation of God. Indeed heresies are themselves instigated by philosophy… What indeed has Athens to do with Jerusalem? What has the Academy to do with the Church? What have heretics to do with Christians? Our instruction comes from the porch of Solomon, who had himself taught that the Lord should be sought in simplicity of heart. Away with all attempts to produce a Stoic, Platonic, and dialectic Christianity! We want no curious disputation after possessing Christ Jesus, no inquisition after receiving the gospel! When we believe, we desire no further belief. For this is our first article of faith, that there is nothing which we ought to believe besides.
...철학은 세상지식이며 신의 속성과 섭리를 대략 해석할 따름이다. 진실로 모든 이단은 철학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아테네 철학자들이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가 교회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단자들이 도대체 기독교도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의 가르침은 솔로몬 (성전)의 문간에서 온 것으로, 솔로몬은 단순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스토아적이고, 플라톤적이고,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적/변증법적 기독교를 추구하지 말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가진 후로 더 이상 호기심 찬 논쟁을 하지 않게 되었고, 복음을 받은 후론 더 이상의 탐구를 원치 않는다. 믿을 때 우리는 더 이상의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첫번째 신조이며, 이것 이외에 우리가 더 믿어야 할 것은 없다.... ---- 테르툴리아누스, {이단자들} 7장 / 번역: 최광민
......Ergo, carissimi, et ille quem contra me constitui, et propter cuius controversiam inter nos natam Prophetam iudicem postulavi, non nihil dicit etiam ipse, cum dicit: "Intellegam ut credam". Nam utique modo quod loquor, ad hoc loquor ut credant qui nondum credunt. Et tamen nisi quod loquor intellegant, credere non possunt, Ergo ex aliqua parte verum est quod ille dicit: "Intellegam ut credam", et ego qui dico, Sicut dicit Propheta: "Immo crede ut intellegas", verum dicimus, concordemus. Ergo intellege ut credas, crede ut intellegas. Breviter dico quomodo utrumque sine controversia accipiamus.Intellege, ut credas, verbum meum;Crede, ut intellegas, verbum Dei.----- Augustinus, {Sermo 43: DE EO QUOD SCRIPTUM EST IN ISAIA: "NISI CREDIDERITIS, NON INTELLEGETIS"}, http://www.augustinus.it/latino/discorsi/index2.htm
..... [전략] .... 물론 나는 아직 믿지 못하는 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믿기 위해 이해하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부분적으론 옳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이사야) 선지자 처럼 "오히려, 이해하기 위해 믿어라"라 말할 때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결론을 내려 봅시다. 즉, "믿기 위해 이해하고 - 이해하기 위해 믿어라". 양측이 이견없이 동의할 수 있게 이렇게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이해하라, 내 말을 믿기 위해
믿으라, 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 {설교 43: {이사야서}의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란 구절에 대해} / 번역: 최광민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철학'이 아닌 '종교'라 부른다.
§ 맺음말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저작들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지성에 놀라는 동시에 또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논하는 그들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는 한편, 도대체 그들의 예수는 트리레마 몇 번에 속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나는 종종 궁금해한다.
그러나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은,
다시 수 없이 많은 이론과 학설들의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리라.
그러니 그저,
Give me that old time religion
It's good enough for me.
내게 옛신앙을 주오
그거면 충분하다네.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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