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광민] 예수 vs. 오시리스 #1: 3일째 부활한 오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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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종교|철학

[© 최광민] 예수 vs. 오시리스 #1: 3일째 부활한 오시리스?

草人! 2021. 8. 1. 07:06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1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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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 vs. 오시리스 #1: 3일째 부활한 오시리스?

순서

  1. 어떤 주장: SBS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 
  2.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3. 플루타르코스가 기록한 "오시리스의 3일째 부활"?

      1. 어떤 주장: SBS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

      예수의 "3일째 부활"이라는 {복음서} 속의 모티프는 오시리스의 "3일째 부활"이란 모티프에서 정확히 표절된 것일까?

      우선, SBS의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 한 장면을 발췌한다.


      SBS 다큐멘터리,{신의 길, 인간의 길}의 한 장면.

      이 다큐멘터리는 여러 장면에서 원전을 잘못 인용하고 있는데, 짧게 말해서 이 장면 속의 등장하는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인용구문은 틀렸다. 정확히 말하면 플루타르코스는 {모랄리아}에 저렇게 적지 않았으며, 제작진은 플루타르코스의 원래 진술을 임의로 해석해서 위와 같은 "인용문"을 만들어냈다.

      잠시 뒤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2. 플루타르코스,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이집트 피라밋과 여러 신전에 남겨진 형태의 보다 더 오래된 오시리스-이시스 신화와 서기 1세기 말/2세기 초에 활동한 그리스 작가이자 아폴론 신관이었던 플루타르코스가 기록해 남긴 오시리스-이시스 신화는 대체로 큰 줄기는 일치하지만 세부사항에서는 다소 간의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일단 플루타르코스의 버전을 바탕으로 주로 이야기 해보겠다. 그 이유는 만약 이집트 계열의 카피캣 이론가들의 주장들 처럼 초기 기독교가 오시리스-이시스-호루스 신화에서 주요교리의 모티프를 차용/도용/표절한 것이라면, AD 1세기 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지배적인 형태로의 오시리스-이시스-호루스 종교가 그 모델이었다고 추측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가설이기 때문이며, 또한 알렉산드리아에는 서력기원 수 세기 이전부터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고 이집트의 초기 기독교 역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가 기록한 형태의 이집트 종교도 바로 알렉산드리아 버전이다. 따라서 이들 "예수=오시리스/호루스" 계열 카피캣 이론의 주장을 검토하기 위해 AD 1세기 즈음의 알렉산드리아 버전의 이들 신화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타당한 접근법이다.

      사람들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데, 사실 오시리스의 죽음에서 재생까지는 네 장면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보자.



      첫번째 장면에서 티폰/세트는 에티오피아의 여왕과 짜고서 오시리스를 시해할 계획을 세운다. 거사계획은 다음과 같다. 우선 세트는 오시리스의 신체치수를 정확하게 잰 다음, 오시리스가 누웠을 때 딱 맞는 크기로 만든 아름다운 나무상자를 준비해서 축제장에 가져간다. 오시리스를 비롯한 사람들이 상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자, 세트는 누구든 상자 안에 들어갔을 때 몸이 딱 맞는 사람에게 상자를 주겠노라고 약속한다. 이에 오시리스가 시도하게 되는데, 오시리스가 상자 속에 눕자 세트는 상자뚜껑을 닫고 못으로 고정한 후 녹인 납으로 상자를 밀봉해 버린다. 세트와 일당은 이 상자를 나일강에 띄워서 지중해로 흘려보낸다. 이 사건은 이집트력으로 Athyr달 17일, 당대의 율리우스력으로는 11월 3일에 해당한다. 이 날은 즉 오시리스가 시해당한 날로 기념된다.

      {모랄리아}에서 해당부분의 전문을 인용하겠다.


      Plutarch, {Moralia: Isis and Osiris}
      Published in Vol. V of the Loeb Classical Library edition, 1936

      XIII

      One of the first acts related of Osiris in his reign was to deliver the Egyptians from their destitute and brutish manner of living....Hence the Greeks came to identify him with Dionysus.

      During his absence the tradition is that Typhon attempted nothing revolutionary because Isis, who was in control, was vigilant and alert; but when he returned home Typhon contrived a treacherous plot against him and formed a group of conspirators seventy-two in number. He had also the co-operation of a queen from Ethiopia who was there at the time and whose name they report as so. Typhon, having secretly measured Osiris's body can having made ready a beautiful chest of corresponding size artistically ornamented, caused it to be brought into the room where the festivity was in progress. The company was much pleased at the sight of it and admired it greatly, whereupon Typhon jestingly promised to present it to the man who should find the chest to be exactly his length when he lay down in it. They all tried it in turn, but no one fitted it; then Osiris got into it and lay down, and those who were in the plot ran to it and slammed down the lid, which they fastened by nails from the outside and also by using molten lead. Then they carried the chest to the river and sent it on its way to the sea through the Tanitic Mouth. Wherefore the Egyptians even to this day name this mouth the hateful and execrable. Such is the tradition. They say also that the date on which this deed was done was the seventeenth day of Athyr, when the sun passes through Scorpion, dand in the twenty-eighth year of the reign of Osiris; but some say that these are the years of his life and not of his reign.


      ...(전략)...이집트인들은 이 일(=오시리스의 시해)이 일어난 날은 태양이 전갈자리를 지나가는 아튀르달 17일이라고 하며, 그 해는 오시리스의 재위 28년 차라고 말한다. 그러나 혹자는 이 28년이 재위연수가 아니라 오시리스의 나이였다고 한다 ---- 플루타르코스,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편] / 번역: 최광민

      두번째 장면은, 이시스가 남편의 시신이 담긴 상자를 찾아 지중해를 헤매다가, 마침내 해류를 타고 페니키아의 비블로스란 도시국에서 흘러간 상자/목관을 되찾아오는 모험 이야기에 해당한다. 이 모험담은 고대 이집트에서 매우 중요한 문학적/종교적 모티프였다.



      세번째 장면은, 어렵사리 되찾아 온 오시리스의 시신을 이집트 땅에 정중히 매장한 이시스가 부토(Buto)란 도시에서 양육되고 있던 아들 호루스 (이 버전에서 호루스는 이미 태어나 있다.)를 보러간 사이, 이 소식을 들은 티폰/세트가 달밤에 몰래 오시리스의 시신을 파내어 14토막을 낸 후 이집트 전역에 흩어버리는 이야기다. 이 소식을 들은 이시스는 파피루스로 엮은 배를 타고 오시리스의 토막난 시체를 찾아다니고 마침내 13토막을 수습하지만, 오시리스의 성기는 lepidotus, phagrus, oxyrynchus 란 세 물고기가 먹어버린 탓에 찾지 못하고, 대신 대체성기를 만들어 시신에 부착시킨다.

      XVIII.

      But when Isis had gone to see her son Horus (who was at nurse in the city Buto), and had put the coffer away, Typhon being out a hunting by moonlight came upon it, and recognizing the corpse, tore it into fourteen pieces, and scattered them abroad. Isis having heard of this, sought after the fragments, passing over the swamps in a papyrus boat; for which cause such as sail in papyrus boats are never injured by the crocodiles, because they either fear or respect the goddess, from this circumstance there are many places called “Tombs of Osiris” all over Egypt, because she, whenever she came upon a fragment of the body, there celebrated a funeral. Some deny this, but say that she made images and gave them to the several cities, giving them as the actual body, in order that they may receive honors from those sailing past, and that if Typhon should get the better of Horus, when searching for the real tomb he may be baffled, from many being so called and pointed out. Of the members of Osiris the only one Isis was unable to find was the genital member, for it had been thrown at first into the River, and lepidotus, phagrus, and oxyrynchus had fed upon it, which kinds of fish the natives scruple to eat above all others, and that Isis in its stead made a model and consecrated it, namely the phallus, in honor whereof the Egyptians hold a festival.

      그러나 이시스가 부토에서 양육되고 있던 아들 호루스를 만나러 (오시리스의) 관을 두고 간 사이, 달밤에 추적에 나선 티폰은 오시리스의 시신을 확인한 후, 그 몸을 14조각으로 찢어 멀리 내다가 흘어버렸다....[중략].....오시리스의 사체 중 이시스가 찾지 못한 것은 그의 성기였다. (티폰에 의해) 가장 먼저 강에 버려질 때 레피도토스, 파그로스, 옥시린코스(란 세 물고기)가 그것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 지방민들은 이 세 물고기 먹기를 모든 금기를 가운데서 가장 주저한다. 이시스는 그 대신 음경 모조물을 만들어 그것을 성별하였는데,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축제 때 이 음경을 기린다.....  --- 플루타르코스,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18장 / 번역: 최광민

      마지막으로 네번째 장면은 호루스의 탄생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알렉산드리아 버전에 따르면, 이시스에 의해 일시적으로 한번 재생된 오시리스의 몸이 세트에 의해 부관참시되기 전에 이미 호루스가 태어나 부토에서 양육되고 있었다. 즉, 이 경우에 오시리스는 원래의 성기를 통해 이시스를 회임시킨 것이다. 세트가 부관참시한 후 성기를 망실하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 된다.

      다음은 영국의 20세기 이집트학 학자 포크너 (Raymond Oliver Faulkner)의 번역한 피라밋 텍스트에서 발췌했다.


      R. O. Faulkner, {The Ancient Egyptian Pyramid Texts}

      Your sister comes to you rejoicing for love of you. You have placed her on thy phallus and your seed issues into her, she being ready as Sothis, and Horus-Sopd has come forth from you as Horus who is in Sothis. It is well with you through him in his name of 'Spirit who is in Dndrw-bark', and he has protects you in his name of Horus, the son who protects his father. --- R. O. FAlkner, {Pyramid Texts}, Utterance 366

      당신(=오시리스)의 누이(=이시스)가 당신과의 사랑에 기뻐하며 당신께 옵니다. 다신은 그녀를 남근 위에 앉히고, 당신의 씨를 그녀 안에 쏟습니다....[후략]....  --- 번역: 최광민




      3. 플루타르코스가 기록한 "오시리스의 3일째 부활"?

      그럼, SBS의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에 삽입된 인용의 문제가 무엇인지 원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제 39장에서 플루타르코스는 오시리스 축제의 진행과정과 나일강의 범람과 관련된 의미를 간략히 묘사한다. 신자들은 오시리스를 상징하는 소의 우상을 (상복을 상징하는) 검은 천으로 장식하고 오시리스가 살해된 날 (17일)부터 4일 간 애곡을 한다. 이틀 후인 19일 밤에, 신관이 이끄는 일단의 신자들은 금으로 된 정방형 상자가 담긴 상자/목관을 강으로 가져가서 강물을 떠 상자에 담으면서 "오시리스를 찾았다!!"라고 외친다.

      기원전 30년 경의 기록인 덴데라의 하토르 사원의 기록에 따르면, 서력기원 직전 무렵의 오시리스 축제는 Khoiak 달 12일-30일의 18일 간 열렸다. 기원전 300년 경의 Hibeth 파피루스 #27에 따르면 오시리스 축제는 Khoiak 26일이다.

      이시스/오시리스 축제는 변동하기 때문에, 기원 전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로도스 섬의 그리스 천문학자/수학자 Geminus는 BC 70년 경 혹은 AD 50년 경에 저술한 것으로 여겨지는 {Isagoge} 제 8장 속에서, "이집트력에 따른 이시스 축제 (=이시아)와 Eudoxus의 율리우스력에 따른 동지가 늘 일치했다"는 당대의 주장을 반박하며 그의 저술시점으로부터 "120년 전에는 이시스 축제와 동지가 일치했다"라고 진술했다. 따라서 이시스 축제는 태양력에서의 고정일인 동지일에 맞춰진 고정된 날의 축제가 아닌 것이다.

      서기 120년 경에 이 축제를 기록한 플루타르코스는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제 13장에서 Athyr달에 태양이 전갈좌를 지난다고 했다. 이것은 플루타르코스가 이 저작 속에서 전통 이집트력이 아닌 개정 알렉산드리아력을 따르고 있음을 시사한다.

      13 One of the first acts related of Osiris in his reign was to deliver the Egyptians from their destitute and brutish manner of living.68 This he did by showing them the fruits of cultivation, by giving them laws, and by teaching them to honour the gods. Later he travelled over the whole earth civilizing it without the slightest need of arms, but most of the peoples he won over to his way by the charm of his persuasive discourse combined with song and all manner of music. Hence the Greeks came to identify him with Dionysus. During his absence the tradition is that Typhon attempted nothing revolutionary because Isis, who was in control, was vigilant and alert; but when he returned home Typhon contrived a treacherous plot against him and formed a group of conspirators seventy-two in number. He had also the co-operation of a queen from Ethiopia71 who was there at the time and whose name they report as Aso. Typhon, having secretly measured Osiris's body cand having made ready a beautiful chest of corresponding size artistically ornamented, caused it to be brought into the room where the festivity was in progress. The company was much pleased at the sight of it and admired it greatly, whereupon Typhon jestingly promised to present it to the man who should find the chest to be exactly his length when he lay down in it. They all tried it in turn, but no one fitted it; then Osiris got into it and lay down, and those who were in the plot ran to it and slammed down the lid, which they fastened by nails from the outside and also by using molten lead. Then they carried the chest to the river and sent it on its way to the sea through the Tanitic Mouth. Wherefore the Egyptians even to this day name this mouth the hateful and execrable. Such is the tradition. They say also that the date on which this deed was done was the seventeenth day of Athyr, when the sun passes through Scorpion, and in the twenty-eighth year of the reign of Osiris; but some say that these are the years of his life and not of his reign --- Plutarch, {Moralia: Isis and Osiris}, Published in Vol. I of the Loeb Classical Library edition, 1936

      ....[전략]...이집트인들은 말하길, 이 일 (=오시리스의 시해)이 일어난 것은 태양이 전갈좌를 지나는 아튀르달 17일이며,  오시리스 재위 28년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재위 28년이 아니라 그의 나이 28세의 일이라고도 한다.... --- 플루타르코스,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 번역: 최광민



      수학자 오토 노이게바우어의 책 {A history of ancient mathematical astronomy} (Otto Neugebauer, 1975)의 계산에 따르면,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서 언급한 (알렉산드리아력의) Athyr달 17일부터 시작되는 4일 간의 애곡기간 첫날인 Athyr 17일은 서기 120년의 전통 이집트력에 따르면 Khoiak 달 22/23일에 해당하며, 이것은 현재력으로는 11월 13/14일에 해당한다. 이것은 (Philocalus 달력에 따르면) 서기 120년 로마에서는 이시스 축제인 "이시아"를 11월 2/3일에 열었다. 이 해의 축제 개시일인 Athyr 6일은 로마력 11월 2일에 대응한다. 서기 140년에의 축제개시일인 알렉산드리아력 Athyr 1일은 로마력 10월 28일에 대응한다. 이 계산은 천문학자 Geminos가 AD 50년에 위의 {Isagoge}를 저술했다는 가정에서 얻어진 날짜다.

      한편, 노이게바우어와는 조금 가정을 (가령, 게미노스의 활동시기) 취하는 다른 학자들은 몇몇 다른 날짜를 추정한다. 그러나 역시 이시스의 축제가 계속 변동한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따라서 태양주기에 맞춰 고정된 것이 아닌 것이다. 아래 도서는 Evans 번역의 {Isigoge}과 이를 해설한 {Geminos's "Introduction to the Phenomena": A Translation and Study of a Hellenistic Survey of Astronomy}. 게미노스의 기록을 바탕으로하는 이시아의 날짜 추정에 관한 연구의 역사를 함께 정리했다.


      Geminos's "Introduction to the Phenomena": A Translation and Study of a Hellenistic Survey of Astronomy ---James Evans

      그럼 다시 {모랄리아: 이시스와 오시리스} 제 39장의 내용을 옮긴다.

      ... The story told of the shutting up of Osiris in the chest seems to mean nothing else than the vanishing and disappearance of water. Consequently they say that the disappearance of Osiris occurred in the month of Athyr, at the time when, owing to the complete cessation of the Etesian winds, the Nile recedes to its low level and the land becomes denuded. As the nights grow longer, the darkness increases, eand the potency of the light is abated and subdued. Then among the gloomy rites which the priests perform, they shroud the gilded image of a cow with a black linen vestment, and display her as a sign of mourning for the goddess, inasmuch as they regard both the cow and the earth as the image of Isis; and this is kept up for four days consecutively, beginning with the seventeenth of the month. The things mourned for are four in number: first, the departure and recession of the Nile; second, the complete extinction of the north winds, as the south winds gain the upper hand; third, the day's growing shorter than the night; and, to crown all, the denudation of the earth together with the defoliation of the trees and shrubs at this time. On the nineteenth day they go down to the sea at night-time; and the keepers of the robes and the priests bring forth the sacred chest containing a small golden coffer, into which they pour some potable water which they have taken up, and a great shout arises from the company for joy that Osiris is found. Then they knead some fertile soil with the water and mix in spices and incense of a very costly sort, and fashion therefrom a crescent-shaped figure, which they clothe and adorn, thus indicating that they regard these gods as the substance of Earth and Water.



      SBS의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는 이 장면을 묘사한 플루타르코스의 위 진술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1) 임의로 "요약"하고 심지어 (2) "해석"까지 내렸는데, 그것이 바로 "17일째 날 오시리스가 죽고, 19일째 날 이시스가 오시리스를 다시 살려냈다"라는 문장이다.

      SBS의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 다시 인용한다.


      SBS 다큐멘터리,{신의 길, 인간의 길}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는 예수가 금요일에 죽어 일요일에 부활한 소위 "3일째 부활"이란 모티프가, 17일에 죽어 19일에 살아난 (즉, 역시 3일째 부활인) 오시리스 신화의 모티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혹은, 예수가 오시리스를 표절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진술은 틀렸다.

      우선, 예수는 ({복음서}에 따르면) 금요일 오후에 죽어 일요일 새벽에 부활했다. 그러니까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시간은 72시간(=3일)에 훨씬 못미친다. 그래서 금요일부터 계수하여 일요일 새벽은 "3일째"가 되는 것이다.

      그럼 오시리스가 과연 "3일째" 부활했는지 살펴보자. SBS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 진술하는 바와 같이 오시리스가 죽은 (날을 기념하는 날)은 "17일"이 맞다. 또 죽은 오시리스를 살려낸 것도 이시스 (와 네프티스)가 맞다. 플루타르코스는 물론 그렇게 적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 그의 말인 듯 언급된 것처럼, "19일째 날" 이시스가 오시리스를 다시 살려냈다고 적지 않았다. 이 19일은 그런 날이 아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당대의 이집트인들은 17일부터 오시리스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식 시작해서 아튀르 달 17일부터 시작해 4일간 오시리스의 죽음을 애도했다. 다시 플루타르코스의 해당진술을 인용한다.

      ....Then among the gloomy rites which the priests perform, they shroud the gilded image of a cow with a black linen vestment, and display her as a sign of mourning for the goddess, inasmuch as they regard both the cow and the earth as the image of Isis; and this is kept up for four days consecutively, beginning with the seventeenth of the month....



      왜 4일인가?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오시리스의 죽음을 상징하는 4가지 모티프와 관계있다. 제 1일차의 애도일은 나일강의 수위가 내려가는 것을 상징한다. 제 2일 차는 북풍이 멎는 것을, 제 3일 차는 밤이 점차 길어지는 것을 (즉, 추분), 제 4일차 나일강의 범람직전 마른 땅이 드러나는 것 (가뭄=세트의 지배)을 각각 상징한다. 플루타르코스의 해당진술을 다시 인용한다.

      ....first, the departure and recession of the Nile; second, the complete extinction of the north winds, as the south winds gain the upper hand; third, the day's growing shorter than the night; and, to crown all, the denudation of the earth together with the defoliation of the trees and shrubs at this time...

      그래서 17일부터 이어지는 4일 간의 애도는 오시리스가 죽어있는 기간, 즉 세트의 지배를 상징한다. 즉, 17-18-19-20일이 그 애도기간이다. 이것만으로도 벌써 오시리스의 부활이 "3일째"일 수 없다. 19일 밤에 살아났다면 왜 다음날에도 오시리스를 위해 애곡하는가?

      그럼 19일은 무슨 날인가?

      ....On the nineteenth day they go down to the sea at night-time; and the keepers of the robes and the priests bring forth the sacred chest containing a small golden coffer, into which they pour some potable water which they have taken up, and a great shout arises from the company for joy that Osiris is found. Then they knead some fertile soil with the water and mix in spices and incense of a very costly sort, and fashion therefrom a crescent-shaped figure, which they clothe and adorn, thus indicating that they regard these gods as the substance of Earth and Water.

      이 19일은 오시리스가 재생 혹은 부활한 날이 아니라 세트에 의해 상자 속에 봉인되어 바다로 흘러간 오시리스의 유해를 이시스가 비블로스에서 찾아낸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장면 #2).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저작 어디에서도 바로 이날 (19일, 3일째) 남편 오시리스를 "다시 살려냈다"고 적지 않았다. 이것은 SBS 제작진의 착각 혹은 "의도적" 실수라고 할 만하다.

      다만 플루타르코스는 이어지는 진술 속에서,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의 시신을 찾아낸 이 19일 밤에, 홁과 물과 비싼 향료를 섞어 "초생달처럼 생긴 상"을 만들고 거기에 옷을 입히고 경배하면서, 이 우상을 "땅과 물(의 원리)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적었다. 이 행위가 오시리스의 부활을 상징할까?
       
      왜 오시리스는 물과 흙을 반죽한 초생달로 표상된 것인가? 플루타르코스는 이집트인들은 티폰/세트를 태양에 표상하고 오시리스는 달에 표상하는데, 이는 이집트인들에게 있어 달은 "물기"와 관계 있어 동식물의 생장을 표상하기 때문이라고 진술한다.

      41 But the Egyptians, by combining with these physical explanations some of the scientific results derived from astronomy, think that by Typhon is meant the solar world, and by Osiris the lunar world; they reason that the moon, because it has a light that is generative and productive of moisture,242 is kindly towards the young of animals and the burgeoning plants, whereas the sun, by its untempered and pitiless heat, makes all growing and flourishing vegetation hot and parched, and, through its blazing light, renders a large part of the earth uninhabitable, and in many a region overpowers the moon. For this reason the Egyptians regularly call Typhon "Seth,"243 which, being interpreted, means "overmastering and compelling." They have a legend that Heracles, making his dwelling in the sun, is a companion for it in its revolutions, as is the case also with Hermes and the moon. In fact, the actions of the moon are like actions of reason and perfect wisdom, whereas those of the sun are like beatings administered through violence and brute strength. The Stoics244 assert that the sun is kindled and fed from the sea, but that for the moon the moving waters from the springs and lakes send up a sweet and mild exhalation. -- Plutarch, {Isis and Osiris}, Vol. V, Loeb Classical Library edition, 1936



      보다 더 오래된 피라밋 텍스트 등의 버전에서는 (이시스가 살려낸 후 다시 죽은 후) 세트에 의해 토막난 오시리스의 시신은 머리부터 시작해서 그로부터 14일이 지난 (이날은 다양하다) 30일에 비로소 오시리스가 완전히 재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신화적 모티프는 플루타르코스도 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오시리스가 살해된 17일은 흉한 날로 여겨져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17"이란 수를 기피했으며,  "14"는 보름달이 기울다가 초생달로 사라진 후 다시 나타나게 될 때까지의 기간을 암시한다고 적었다. 플루타르코는 또한 오시리스가 살해된 것으로 기념된 이 17일은 만월주기가 끝나는 날이며, 오시리스가 시해당한 나이 (28세)는 한 달을 상징한다고 진술한다.

      42 1 The Egyptians have a legend that the end of Osiris's life came on the seventeenth of the month, on which day it is quite evident to the eye that the period of the full moon is over.245 fBecause of this the p103Pythagoreans call this day "the Barrier," and utterly abominate this number. For the number seventeen, coming in between the square sixteen and the oblong rectangle eighteen, which, as it happens, are the only plane figures that have their perimeters equal their areas,246 bars them off from each other and disjoins them, and breaks up the ratio of eight to eight and an eighth247 by its division into unequal intervals. Some say that the years of Osiris's life, others that the years of his reign, were twenty-eight;248 368for that is the number of the moon's illuminations, and in that number of days does she complete her cycle. The wood which they cut on the occasions called the "burials of Osiris" they fashion into a crescent-shaped coffer because of the fact that the moon, when it comes near the sun, becomes crescent-shaped and disappears from our sight. The dismemberment of Osiris into fourteen parts they refer allegorically to the days of the waning of that satellite from the time of the full moon to the new moon. And the day on which she becomes visible after escaping the solar rays and passing by the sun they style "Incomplete Good"; for Osiris is beneficent, and his name means many things, but, not least of all, an active and beneficent power, as they put it. The other name of the god, Omphis, Hermaeus says means "benefactor" when interpreted.  -- Plutarch, {Isis and Osiris}, Vol. V, Loeb Classical Library edition, 1936

      또한 고대 이집트인들은 월력의 제 6일을 "오시리스의 승리"와 연관지어 "오시리스가 주인인 날"로 기념했다. 그것은 아마도 제 6일 차에 달이 새로이 차오르는 것이 현저하게 관측되기 때문이다. 가령, {이집트 사자의 서}로 흔히 불리는 {아니의 파피루스, The Papyrus of Ani}는 이렇게 기록한다.


      Budge, E. A. Wallis (Ernest Alfred Wallis), Sir, 1857-1934, {The papyrus of Ani; a reproduction in facsimile} (1913)

      http://archive.org/details/papyrusanireprod01budg/page/n9/mode/2up?view=theater

      I am with Horus on the day[s] of the festivals of Osiris, at the making of offerings and oblations, namely, on the festival which is celebrated on the sixth day of the month, and on the day of the Tenat festival in Anu. --- E.A.W. Budge, {The Papyrus of Ani}

      나는 오시리스 축제의 날들, 제물과 봉헌물을 만들 때, 달의 제 6일째와 아누달 축제의 테나트 축제의 날에 호루스와 함께 한다 --- 벗지, {아니의 파피루스}  / 번역: 최광민



      이집트 카르낙에 있는 Pet 신전은 한 달에 맞춰진 오시리스의 일대기에 봉헌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오시리스의 몸이 14조각으로 부관참시되는 것은 보름달로부터 14일 간이고, 새로운 달의 제 2일부터 찢겨진 몸의 부위가 맞춰지기 시작해서 제 6일에 오시리스는 "달로 들어"가며 (즉, 복귀하며), 보름달에 오시리스는 완전히 힘을 되찾아 적을 분쇄한다. 그러니까 오시리스의 부활, 정확히는 재생은 예수처럼 제 3일째 한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거의 보름에 걸쳐 원기를 회복해 가면 천천히 일어나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서력기원 직전 무렵의 오시리스 축제는 Khoiak 달 12일-30일의 18일 간 열렸다. 따라서 애곡기간 4일과 재생기간 14일을 합치면 18일이 완성된다.

      각설하고,

      오시리스는 과연 "3일 만에 부활"하였고, 따라서 예수는 오시리스를 완벽히 모방하였는가?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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