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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9-09-23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茶人 센리큐 (千利休)와 一切唯心造
© 최광민, Kwangmin Choi, 200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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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人 센리큐 (千利休)와 一切唯心造
千利休, a portrait by Tōhaku Hasegawa (長谷川等伯)(born in 1539 and dead in 1610), calligraphy by Sōen Shunoku (春屋 宗園)(born in 1529 and dead in 1611). Copied from http://www.omotesenke.com/image/04_p_01.jpg (출처: Wikimedia Commons)
I.
흔히 중국에서의 차문화는 "다례/茶藝"로, 일본에서는 선불교적 가치(?)을 담은 "다도/茶道"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일본에 차가 도입된 것은 10세기 무렵 중국으로부터 불교 선종이 수입된 무렵이지만, 일본의 전국시대가 마칠 무렵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스승이자 정치적 멘터로 활동했던 대상인이자 재속승려였던 센리큐(千利休)가 이전의 선종에서 유래한 일본의 다도전통을 완성시킨 일본 다도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은 그의 다도에 따라 차를 마신다.
II.
1991년 작 일본영화 {센리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군 오나 노부나가에 이어 일본 막부의 실권자가 되는 시점에서 시작하여, 조선침공에 대한 견해차이를 가지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등 다른 다이묘들과 도요토미 정권이 일으키는 긴장 가운데 센리큐가 자살을 요구받는 기간 동안의 일본의 정국을 센리큐의 다도에 촛점을 맞추어 설명해 나간다. 이 영화는 센리큐의 죽음을 그가 도요토미의 중국정벌 계획에 (이 영화는 "조선침공"이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줄곳 "중국정벌"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 반대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센리큐 제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든 2가지 죄목으로 꼽히는,
- 생전에 다이도쿠지(大德寺)의 산문인 긴모가쿠(金毛閣)에 자신의 목상을 세운 점.
- 차와 다기의 감정에 있어 부정을 저지른 점.
은 비록 센리큐를 제거하기 위한 표적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서 거짓이라 할 수는 없다.
일개 차스승이 어떻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에 불만을 품은 다른 다이묘들의 암투가 벌어지는 오사카에서 그 정도 실권을 누렸는가 하는 역사적 사실을 이 영화를 보기 전만 해도 잘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분명히 그리고 있는 것 처럼, 사무라이들은 앞다투어 센리큐로부터 다도를 배우길 원했고 또 다도의 전통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길 원했다. 센리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속 차스승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다이묘들도 직간접으로 센리큐의 문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도요토미가 후일 센리큐에게 할복자살을 명령했을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현장에 3000명의 사무라이들을 파견해서 혹 있을 수 있는 다이묘들의 반란을 막았다.
아마도 센리큐가 일본의 무장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일본의 다도문화만이 가지고 있는 전통 차실인 스끼야(數奇室)의 좁고 밀폐된 구조가 가져다 준 부산물이었을 것으로 느껴진다. 스끼야는 매우 작고 한 사람 혹은 두사람 정도만이 그 안에 들어가서 차를 대접하고 대접받는다. 두 사람은 "공간적"으로 좁은 스끼야에서 "심리적"으로도 매우 긴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III.
이 영화에 등장하는 다기는 명나라에서 수입된 것 혹은 센리큐가 수하를 시켜 진흙으로 질그릇을 빚어 만드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영화가 말하지 않은 혹은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는데, 당시 센리큐가 최고의 다기로 격찬했던 것은 명나라 도자기잔이 아니라, 조선에서 수입된 막사발 이었다는 점이다.
센리큐는 오사카항에서 이 막사발을 받아들고는 감동하여 이것을 도요토미에게 바쳤고, 그것을 기점으로 일본 사무라이 (사무라이들은 다도가 일반인과 여자들에게 전해지는 것에 심리적으로 엄청나게 반발했던 것으로 보인다.)들 사이에 조선의 막사발이 고가로 거래되는 현상을 낳았다. (이것 중 하나는 현재 일본의 국보다.) 당시에 세계에서 제대로 된 도자기를 구울 수 있었던 나라는 명나라와 조선 뿐이었고, 일본은 도자기를 굽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일본인의 조선침공의 경제적 동기 중 하나가 조선 도자기의 확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전국시대 다른 지역보다 문화적으로 낙후되어있던 규슈지역의 다이묘들은 그런 이유로 조선에 적극적으로 파병하고, 사로잡은 조선의 도공들을 규수 일대에 정착시켰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센리큐가 비록 조선침공에 반대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자신이 완성/전파한 다도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조선 도자기에 대한 열망)로 인해 사무라이들이 조선을 침공하는 경제적 동기를 만들어 준 셈이다.
IV.
나는 차를 즐겨마시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도"를 즐긴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차를 마심에 있어 나에게 필요한 것은 투박한 머그잔 하나와 녹차 티백 뿐이다. 물은 브리타로 정수한 수돗물이요, 이 조차 전자렌지에 30초 간 돌려서 끓인다. 게다가 나는 한 티백을 적어도 2번은 우려 먹는다.
차를 마시는 것 그 자체보다는 차를 준비하는 과정을 더 강조하는 일본 다도의 견해로는 나의 음다법은 가히 경악스러운 수준이다. 그러나 센리큐는 한때 다도를 이렇게 정의했다.
다도란 그저 끓인 물에 차를 우려먹는 것이다.
종교의식과 같은 복잡한 순서의 강박적 준수, 스끼야 같은 은밀한 장소의 확보, 좋은 다구와 차의 구입이라는 요구사항에 완벽히 부합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차를 마신다면, 그것은 아름답게 정형화된 다도인지는 모르나 본질이 뒤바뀐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일본의 다도가 유래한 선불교적인 맛도 없다.
원효는 해골에 괴인 물을 먹고도 달다고 느꼈다. 나는 싸구려 머그잔에 티백을 담궈 수차례 우려먹어도 향기롭다고 느낀다. 그러니 내가 천하제일 다인(茶人)이라 불리던 센리큐보다 못할 것이 무엇인가?
一切唯心造. 一切唯心造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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