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광민]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티벳 사자의 서: 바르도 퇴돌}과 칼 융의 {사람과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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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종교|철학

[© 최광민]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티벳 사자의 서: 바르도 퇴돌}과 칼 융의 {사람과 상징}

草人! 2021. 12. 13. 21:17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5-08-10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바르도 퇴돌}과 칼 융

{바르도 퇴돌: 티벳 사자의 서}

1.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한국문학사 어디에서도 비슷한 작품을 찾기힘든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는 "유리"라는 가상의 공간에 사는 한 승려의 입을 빌어 기독교-불교-도교-연금술이라는 동양과 서양의 사상을 종행무진 토해낸다. 이 작품을 소설이라 불러야 할지, 주인공의 말을 빌어 "잡설"이라고 해야 할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 책을 펴면 나오는 그의 문장은 무척 길지만, 각 문장은 시와 같이 일종의 운율을 가진 것처럼 들려 지루하지는 않다.

{죽음의 한 연구} 도입부에서,

"....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년 오줌 누듯 여덟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羑里)로도 모인다. 유리에서는 그러나, 가슴에 불을 지피고는, 누구라도 사십일을 살기가 용이치는 않다. 사십일을 살기 위해서는 아뭏든 누구라도, 가슴의 불을 끄고, 헤매려는 미친 혼을 바랑 속에 처넣어, 일단은 노랗게 곰을 띄워 내든가, 아니면 일단은 장례를 치러놓고 홀아비로 지나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른다. 또 아니면, 사막을 사는 약대나, 바다밑을 천년 한하고 사는 거북이나처럼, 업(業) 속에 유리를 사는 힘과 인내를 갖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리를 사는 힘과 인내로써, 운산이나 눈뫼나 비골을 또한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인데, 이리의 무리는 눈벌판에서 짖으며 사는 것이고, 신들은 그렇지, 그들은 어째도 구름 한자락 휘감아 덮지 않으면 잠을 설피는 것이다...."

티벳불교의 장례문서인 {바르도 퇴돌}과 심층심리학자 칼 융의 {사람과 상징}을 읽고나면 훨씬 편하게 읽을 수 있다.




2. 티벳불교 {바르도 퇴돌}

전문: http://www.sacred-texts.com/bud/tib/psydead.htm

이집트 {死者의 書}에 빗대 서구학자들이 티벳의 {死者의 書}라 불렀던 이 {바르도 퇴돌}은, 대승불교와 밀교가 혼합된 티벳불교인 라마교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니르바나에 들게하기 위해 사후 49일 동안 치르는 의식을 설명하는 종교문서에 해당한다.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는 이 {바르도 퇴돌} 속의 사상과 연금술의 주요개념을 문학적으로 차용한 작품이다. 이 {바르도 퇴돌}은 많은 심리학자와 정신분석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특별히 칼 융은 이 문서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서구에 소개될 때 서문을 쓰기도 했다.

라마교 승려는 죽은 자의 시신 곁에서 제를 올리면서 그 영혼이 이 세상에 윤회하는 것을 막고 49일 안에 니르바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사자에게 이 {바르도 퇴돌}을 정성껏 읽어준다. ({바르도 퇴돌}에 따르면 인간은 (오온으로 상징되는)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렬해서 니르바나 대신 윤회를 선택하게 된다.) 이 과정 중에서 밀교의 표상대로, 때로 붓다와 보디사트바들은 온화한 얼굴로, 그리고는 다시 공포의 얼굴로 등장해 사자를 열반으로 인도하지만, 결국 그 영혼이 윤회를 선택하게 된다면 라마교 승려는 좋은 부모 밑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염원하며 49재를 올리게 된다. 따라서 {바르도 퇴돌}은 같은 모티프가 (열반에 이르는 방법) 다른 얼굴로 계속 반복되는 구조를 가졌다 할 수 있다.

읽기는 쉽지 않지만, 이 한 권의 책 속에는 티벳불교 라마교의 종교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만큼 밀교와 티벳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한번 도전해볼 만한 작품이다. 내용은 때때로 그로테스크 하지만, 그 안에는 사자를 안식에 이르게 도와주려는 따뜻한 마음이 어려있기도 하다.




3. 칼 구스타프 융, {사람과 상징, Man and His Symbols}


Carl Gustav Jung, {Man and His Symbols}

학부시절, 심리학 과목 숙제로 {정신분석학 입문}을 읽고난 후부터 프로이트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랄까, 프로이트는 인간의 꿈과 무의식을 일종의 음습한 쓰레기하치장 같은 곳으로 만들어버렸고, 모든 인간을 일종의 강박증 환자로 만들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 그래서 찾아보게 된 책들이 프로이트의 제자였지만 무의식에 대한 관점의 차이 및 기타 갈등으로 스승과는 다른 길을 찾아간 사람, 칼 구스타프 융의 저작들이었다.

융에게 있어 무의식은 '억압된 성욕의 배설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진 또 하나의 '나'이며, 어둡고 음습한 것이라기 보다는 미지의 신비로 가득찬, 그래서 두렵고 경이로운 '누미노제'의 대상이다. 그래서 융에게 있어서 꿈은 의식의 하수구가 아니라, 무의식이 의식에게 보내는 강렬한 메시지다. 

그래서인지 융의 책을 읽으면 그날 밤 나는 반드시 강렬한 이미지의 꿈을 꾸게 된다. 아마도 자기암시의 효과가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융과 그의 동료들이 원래 BBC를 위해 작업한 대본을 증편해 단행본으로 낸 것이며, 1장에서 융 본인이 개체화과정을 설명하고 나머지 장들은 그의 동료들이 독립적으로 추가했다. 칼 융은 초기에는 그노시스를 통해 무의식을 연구했지만 이후 주제를 연금술로 옮겼고, 이 연금술과 관련된 융의 해석은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에 주요 모티프로 등장한다.

예전에 이 책의 제목을 {사람과 (사람의) 상징들}이 아니라, {남자와 그의 상징}이라고 번역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Man = 남자.

생각해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왠지 후자 (=남자와 그의 상징)에서는 강렬한 에로티시즘의 아우라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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