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광민]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와 {확실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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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와 {확실성에 관하여}

草人! 2021. 11. 9. 14:02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5-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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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와 {확실성에 관하여}

순서
  1. 논리철학논고
  2. 확실성에 관하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Wikimedia Commons


1. {논리철학논고 /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대학 1학년 교양철학시간에 철학강사를 통해 어떤 멋진 이름을 가진 철학자와 그 철학자가 쓴 멋진 제목의 책 한 권을 알게 되었다. 그 철학자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그 책은 그의 {논리철학논고}였다. 그런데 이 강사는 수업시간 내내 {논리철학논고}라고 말하는 대신 {트락타투스 로지코필로소피쿠스}라는 이 책의 라틴어 제목만 줄창 읊어댔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저작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논리-철학 논고 /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이다. {논고}는 그때까지 논리학을 제대로 공부해보지 않은 나에게는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다. 첫 세 절은 상대적으로 용이한 편이지만, 프레게와 러셀의 논리기호들이 종횡무진 등장하는 제 4절부터는 지금 읽어도 미궁 속에 갇혀버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제 5절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다시 읽기가 편해지고 (사실상 내가 관심있는 내용도 제 5절부터 시작한다.) 그 유명한 7절로 종결될 때에는 상당한 전율을 느낄 수도 있다.



5.135 In no way can an inference be made from the existence of one state of affairs to the existence of another entirely different from it.

한 상황의 존립으로부터 전적으로 다른 상황의 존립을 추론할 수 없다.

5.136 There is no causal nexus which justifies such an inference.

그러한 추론을 정당화해줄 인과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5.1361 The events of the future cannot be inferred from those of the present. Superstition is the belief in the causal nexus.

현재의 사건으로부터 미래의 사건을 추론할 수 없다.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다.

6.32 The law of causality is not a law but the form of a law. *

인과율/인과법칙은 "법칙"이 아니라 "법칙의 형식"이다.

6.33 We do not believe a priori in a law of conservation, but we know a priori the possibility of a logical form.

우리는 (질량/에너지 등) 보존법칙을 선험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논리적 형식의 가능성을 "아는" 것이다.

6.34 All propositions, such as the law of causation, the law of continuity in nature, the law of least expenditure in nature, etc. etc., all these are a priori intuitions of possible forms of the propositions of science,

인과율....같은 법칙들은 모두, 과학의 명제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형식에 대한 선험적 통찰이다.

6.363. The process of induction is the process of assuming the simplest law that can be made to harmonize with our experience. This process, however, has no logical foundation but only a psychological one.

귀납의 과정은 우리의 경험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법칙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학적인 근거만 있을 뿐, 어떤 논리적 근거는 없다.

6.3631. It is clear that there are no grounds for believing that the simplest course of events will really happen.

이 가장 단순한 경우가 실제로 발생할 것이라 믿을 근거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6.36311. That the sun will rise to-morrow, is an hypothesis; and that means that we do not know whether it will rise.

내일도 태양이 떠오를 것이란 것은 가설이다. 즉, 우리는 태양이 내일도 떠오를 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6.37. A necessity for one thing to happen because another has happened does not exist. There is only logical necessity.

어떤 일이 발생했다고 해서, 다른 일이 따라서 발생해야 할 필연성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논리적 필연성 뿐이다.

6.371. At the basis of the whole modern view of the world lies the illusion that the so-called laws of nature are the explanations of natural phenomena.

근현대의 세계관 속에는 소위 '자연법칙'들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환상들이 깔려있다.

6.372. So people stop short at natural laws as something unassailable, as did the ancients at God and Fate. And they are both right and wrong. but the ancients were clearer, in so far as they recognized one clear terminus, whereas the modern system makes it appear as though everything were explained.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법칙들을 법접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기고 자연법칙들 앞에서 멈추어선다. 마치 고대인들이 신과 운명 앞에 멈추어섰던 것처럼. 그들 모두는 맞기도 하고 틀렸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모든 것은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 보이는데 반해, 고대인들은 분명한 한계를 인지했다는 점에서, 고대인들이 (현대인들보다) 더 분명하(게 멈추어 섰)다.

7절은 사실 이 지루했던 모든 논리적 여정의 압축이기도 하다.

7.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ß man schweigen.

언표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만 한다.




2. {확실성에 관하여 / On Certainty}

http://budni.by.ru/oncertainty.html

{논고}에서 너무 고생을 한 탓인지 나는 보다 평이한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찾아보게 되었고, 그때 발견된 책 한 권이 이 {확실성에 관하여}였다. 이 책은 그가 암으로 사망하기 몇 주전까지 그가 일기형식으로 적어나가던 메모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논고}처럼 "논리"에 집착하기보다는 자신의 논리적 확실성의 근간에 대한 되돌아 봄을 바탕에 깔고 있다. 비록 {논고}가 그에게 철학자로서의 큰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논고} 속의 서문에서 {논고}가 담고 있는 진실성은 "불가침"적이며 "결정적"이고, 이 문제에 관한 한 본질적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장담한던 자신만만하던 모습과는 달리, {확실성에 관하여} 속에서는 그런 오만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이 책은 죽음을 앞둔 비트겐슈타인이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끝없는 질문들의 연속들로 구성된다.

나는 이 책이 {논고}보다 더 좋았다. 무엇보다 수많은 기호 속에 주눅들지 않을 수 있었고, 또 수학적 논리에 천착한 전자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정의상 보다) 철학적이었다.

1951년 4월 27일에 기록된 {확실성에 관하여}의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676. "But even if in such cases I can't be mistaken, isn't it possible that I am drugged?" If I am and if the drug has taken away my consciousness, then I am not now really talking and thinking. I cannot seriously suppose that I am at this moment dreaming. Someone who, dreaming, says "I am dreaming", even if he speaks audibly in doing so, is no more right than if he said in his dream "it is raining", while it was in fact raining. Even if his dream were actually connected with the noise of the rain.

그러나 이런 경우들에 대해 내가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마취되어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만약 내가 마취된 것이라면. 그래서 마취가 내 의식을 빼앗은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실제로 말하고 사고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지금 꿈꾸고 있는 것이라고 진지하게 가정할 수 없다. 꿈을 꾸면서 "난 꿈꾸고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비록 그가 남들이 들을 정도로 말한다한들 옳지 않다. 이것은 마치 실제 비가오는 동안 그의 꿈 속에서 "비 오네" 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비록 실제로 그의 꿈이 억수같은 빗소리와 연관되어 있을지라도.

이틀 후인 4월 29일.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을 떠났다.



죽음이란 마취가 의식을 앗아가기 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며, 그는 독자들에게 무언가를 결론을 말해주고자 했을까? 아니면 {논고}의 그 유명한 7절처럼 질문을 가슴에 묻고 침묵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을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오류'의 문제에 집착했던 비트겐슈타인. 그는 오류를 왜 그리 두려워했을까? 임동확의 {오류는 나의 스승}가 그에게 다소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거꾸로 흐를 수는 없는 것이니.

오류는 나의 스승

- 임동확

우린 죽음에 이르기까지
결코 그 궁극을 가늠하지 못한다
어둠이 가을강처럼 아늑해진 후에야
겨우 불빛이 그 근원의 반경을 드러내듯
어찌하여 나를 버리느냐고
비탄의 피울림을 울던 극치에서야
그가 한 인간이었음을 증거하듯
이곳에서 완전을 꿈꾸는 자
사랑의 완성을 노래하는자\
내가 보기엔 가짜다
그리하여 늘 분명한 태도를 강요하는 자도
이미 체제의 편이다

자본이 몰염치를 화폐처럼 찍어내고
이념이 절망의 광기를 부도내듯
흠결 없는 자아란,
그래서 참회가 허용되지 않는 내부란,
얼마나 지루하고 끔찍한 학대인가
그렇다. 막장에서 돌아서는 것도
우리에겐 하나의 출구였듯

이제 오류는 나의 스승
그토록 깊은 나락의 미궁조차
내겐 공포라기보다 차라리 거대한 통로
그 거대한 종말론의 대지를 상속받고자 한다
오, 살아 있음의 이 태연한 흔적들이여
정말이지 잊고 싶은 것을 잊어버리며
아무래도 난 이곳에서 늙어가야겠다
잔정 많은 느티나무 뿌리처럼 얽힌 채
누군가 가던 그 길로 합류해야겠다

나는야 오류의 9회 졸업생.
과연 오류는 나의 스승.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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