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광민] 대망(大亡)의 메시아, 사바타이 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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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종교|철학

[© 최광민] 대망(大亡)의 메시아, 사바타이 즈비

草人! 2021. 9. 7. 14:26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9-03-07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대망(大亡)의 메시아, 사바타이 즈비

순서
  1. 낙지볶음과 카발라
  2. 하시드
  3. 사바타이 즈비
  4. 야코프 프란크
  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 낙지볶음과 카발라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으로 히브리어/아랍어/영어 비교문학을 전공하는 옛 룸메이트 모하메드 알-가반 선생이 최근 히브리어-아랍어-영어 번역가로 등단한 것 (책 소개: http://www.jewcy.com/post/boy)을 축하하기 위해 새로 생긴 한국식당에서 낙지볶음으로 식사를 했다.

새우 등이 금지된 유대교 율법의 식이규정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가다보니, 자연스럽게 모하메드가 박사과정 부전공으로 정한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 이야기로 넘어갔다. 무슬림이 카발라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으시다.

동유럽의 카발라를 말할때 빠져서는 안되는 인물이 몇 있는데, 이삭 루리아, 바알 셈 토브, 그리고....여기 소개하는 사바타이 즈비가 그들이다.




2. 하시드


Wikimedia Commons

전통적인 유대교 계율에 충실한 이들을 보통 "초정통주의자 ultra-orthodox"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하레딤'이란 용어로 지칭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스라엘이므로 그리 오래된 용어는 아니다. 이후 미국에 많이 분포한 '하시딤'들도 자신들을 역시 '하레딤'이라고 지칭하게 된다.

미국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의 길이나 공항에서 가끔 마주치는 이런 패션의 사람들은 대체로 유대교 "초정통주의자" (하레딤)들 가운데서도 주로 신비주의의 일파인 '하시드' 계열의 신자들인 '하시딤'으로 보면 된다.

'하시드'는 탈무드를 중시하는 측의 유대교 정통주의자로부터는 사실상 이단으로 배격당해 온 역사를 가진, 역사적으로는 300여년 전에 동부유럽 - 특별히 우크라이나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대교 종파다. 이들은 유대교의 랍비 전통을 고수하는 동시에 토라/탈무드 연구를 제 1의 목표로 하는 일반적인 정통파 유대교도들과는 달리, 보다 신을 개인적으로 혹은 신비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선호했고 따라서 토라를 읽거나 기도를 할때 몸을 격하게 앞뒤로 흔드는 등의 열광적인 태도를 보인다. 여러 랍비들의 보편적 권위를 수용하는 일반적인 정통파와 달리, 하시딤들은 특별히 자신들이 모시는 랍비 1인을 중심으로 집결하며 따라서 여러 특색있는 분파로 나뉘어 있다.

하레딤이지만 하시딤이 아닌 그룹은 보통 (하시딤 측 용어론) 미트나그딤 (Mithnagdim / 반대자) 혹은 리트박 (Litvak) 이라고 불린다. 후자의 용어는 이들의 중심지가 동북부 유럽 리투아니아 지역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하시디즘이 이들에게서 분파된 1700년대 후반 이래로 하시디즘을 수상하게 보고 경계해 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모든 하시딤은 하레딤이지만, 하레딤이 모두 하시딤은 아니다"라고 이해하면 정확하다.

하시디즘은 그 뿌리를 카발라에 두고 있다.{조하르}와 같은 류의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 서적에 기반을 둔 카발라의 연원을 두고 여러가지 논란이 있지만, 동유럽의 카발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카발라주의자는 16세기의 랍비 이삭 루리아 (1534 –1572)로 볼 수 있다. 신의 속성이라 할 수 있는 10개의 세피로트와 신성이라고 볼 수 있는 아인 소프의 관계를 우주발생론으로 설명한 그의 카발라 해석은 유대교 신비주의자 뿐 아니라 당시의 기독교 신비주의자들과 이슬람 신비주의자 (특히 수피)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랍비 이삭 루리아 사후 약 한 세기 후 그의 카발라 체계가 낳은 유대인 역사 최대의 엉뚱한 인물이 하나 등장했으니, 그의 이름은 랍비 사바타이 즈비 (1626 – 1676)다.




3. 사바타이 즈비

오토만 투르크 치하의 스미르나 출신의 랍비인 사바타이 즈비는 22세가 된 해인 1648년, 카발라주의의 경전이랄 수 있는 {조하르}의 해석에 기반해 자신이 당시의 유대인과 사라진 이스라엘의 사라진 열 부족을 아우르는 메시아임을 선포한다.


Shabbatai Zvi (출처:Wikimedia Commons) 

일반인들이 메시아로 받아주기엔 너무 젊은 탓이었는지, 한동안 그는 그다지 주요인물로 부각되지 않았다. 1650년 중/후반이 되면서 그의 사도들은 본격적 활동에 들어가 오토만 투르크의 지중해 지역에서 그가 메시아임을 열정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추종자들은 1666년에 천년왕국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독교 세대주의자들의 이론에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그의 인기는 그가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예루살렘을 차례로 순방하는 월드투어에 나서는 1660년대에 최대에 이른다. 이 무렵이 되면, 오토만 투르크 내의 유대인 뿐 아니라, 동유럽, 서유럽, 심지어 영국의 유대인 공동체들까지 이 메시아에 대한 기대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666년 암스테르담에서는 그가 메시아로서의 왕위에 올랐음을 선포하는 인쇄물까지 등장한다. 그는 유대인의 메시아와 구원자일 뿐 아니라 신의 독생자이기까지 하다.

"The first-begotten Son of God, Shabbethai Tebi, Messiah and Redeemer of the people of Israel, to all the sons of Israel, Peace! Since ye have been deemed worthy to behold the great day and the fulfilment of God's word by the Prophets, your lament and sorrow must be changed into joy, and your fasting into merriment; for ye shall weep no more. Rejoice with song and melody, and change the day formerly spent in sadness and sorrow into a day of jubilee, because I have appeared." 

신의 맏아들, 메시아, 이스라엘인의 구원자인 사바타이 즈비가 모든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평화를 전하노라. [후략].....

당시 오토만 투르크의 술탄인 파질 아함메드 파샤는 막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강화/우호조약을 맺고 나머지 제국영토를 안정화시킨 직후 였는데, 혜성같이 등장한 사바타이 즈비 같은 돌발변수가 달가왔을 리가 없다. 사바타이 즈비는 이스탄불에서 체포되어 아비도스의 형무소로 보내진 후, 고문과 회유를 거쳐 (혹은 자발적 결정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출처: Jewish Encyclopedia

투르크식 터번을 둘러 쓴 유대인의 메시아 사바타이 즈비는 자신의 개종을 정당화하면서 추종자들에게 선언한다. "신이 나를 무슬림으로 만드셨다. 그가 명하시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 God has made me an Ishmaelite; He commanded, and it was done". 

그것 참 편한 설명이다.

유럽과 오토만 투르크 치하에서 메시아를 대망하던 유대인 추종자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그로 인해 이슬람과 기독교 양측으로부터 엄청난 조롱을 받는 수모를 겪었던 탓인지, 지금도 유대교 랍비들은 사바타이 즈비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배교 후 (그러나 그는 이슬람 개종이 배교하고 생각하지 않았거나 아닌 척 했다), 그를 따르던 유대인들은 아래 삽화에서와 같이 사바타이 즈비를 반대해 배척당했던 정통파 랍비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두들겨 맞는 등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유대인들에게 공개적으로 두들겨 맞는 사바타이 즈비의 추종자들 (출처: Wikimedia Commons)




4. 야코프 프란크

한편, 사바타이 즈비는 한동안 술탄의 총애를 받다가 노년에는 한 마을에서 외롭게 여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를 메시아로 믿는 종파가 터키에 남아있다. 그의 인기가 높았던 폴란드 지역에서 그 직후 랍비 바알 셈 토브 (1698-1760)에 의해 오늘날 형태의 '하시디즘'이 등장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바알 셈 토브가 사바타이 즈비의 후계자인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이 하시디즘은 사바타이 즈비의 이후 추종자들에 의해 모종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폴란드 발 하시디즘을 놓고 동유럽의 유대인 사회는 양분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시디즘을 반대해오던 유대교 랍비들은 폴란드 발 하시디즘과 사바타이 즈비의 사상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아니나 다를까, 바알 셈 토브의 시대에 폴란드의 하시디즘은 또 하나의 메시아를 배출한다.

사바타이 즈비를 추종했던 아버지를 둔 야코프 프란크 (1726–1791)는 1759년에 이번에는 자신이 다윗왕과 사바타이 즈비를 계승한 메시아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사바타이 즈비 류"의 메시아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번에는 유대인 추종자 수 천명과 함께 자발적으로...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한다.

이 개종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단적 교리에 대해 로마카톨릭 교회법정은 그에게 13년의 감옥생활을 선물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이 사건을 핍박과 일종의 순교행위로 이해했고, 사바타이 즈비가 그랬던 것 같이 야코프 프란크에게도 죽는 날까지 추종자가 마르는 일이 없었다 한다.


군경의 감시하에서의 임종 (출처: Wikimedia Commons)




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야코프 프란크의 추종자였던 그의 조카는 프랑스 대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다른 추종자들은 나폴레옹의 유럽정복 때, 이번에는....

....나폴레옹을 메시아로 선포한다.

나폴레옹이 자유/평등/박애의 프랑스 정신에 따라 프랑스와 점령지의 유대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엘바섬에서 탈출했던 나폴레옹은 반-나폴레옹 연합세력에 각국 평균 1억파운드의 군사비 융자를 해 준 유대인 자본가 로드차일드 집안에 의해 완전히 패배를 맛봐야 했다. 게다가 이로 인해 로드차일드 집안 및 유대인 금융가들이 유럽 일대에서 대약진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나중에 이들이 영국정부를 압박하여 이스라엘 건국의 기반이 되는 벨푸어 선언을 이끌어 냈으니....

결국 나폴레옹이 유대인의 메시아이기는 했던 모양이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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