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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불문학자 민희식 vs. 불교작가 민희식 | 제 1부: 한국이 낳은 어떤 "세계적(?)" 석학?

草人! 2024. 10. 8. 10:16
작성

© 최광민 2021-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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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광민] 불문학자 민희식 vs. 불교작가 민희식 | 제 1부: 한국이 낳은 어떤 "세계적(?)" 석학?

순서
  1. 블로그 이전 10주년 기념 미스테리 심층취재
  2. 제 1부: 한국이 낳았다는 어떤 세계적 석학?
    1. 민희식씨는 프랑스 "최고문화훈장" 수상자다?
    2. 민희식의 "예수 불자론"과 그 근거자료?
    3. 민희식의 마라난타 간다라 도래설과 그 근거자료?
    4. 민희식씨는 파키스탄에서 국빈대접을 받는 세계적 연구자다?
    5. 민희식씨의 {법화경과 신약성서}는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출판되었다?
    6. 민희식씨는 프랑스 정부 초빙 국빈 자격 혹은 정부 초빙으로 중근동·간다라 역사문화연구 중이다?
    7. 민희식씨는 프랑스-이스라엘 고고학 발굴단을 중동에서 이끌었다?
  3. 제 2부: 공포의 추천사
  4. 맺음말


유령



연재




# 블로그 이전 10주년 기념, 미스테리 심층취재

2010년 12월 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아주 성가신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짧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당시 나는 거의 10년 간 이글루스에 개인블로그를 꾸리고 있었는데, 2009년 12월 말 "아크나톤 18계명이 모세 10계명의 원전"이다란 글을 어떤 싸이트에서 읽은 지인이 내 의견을 물어왔다. 나로서는 처음 들어본 소리라 이에 대해 개인적인 호기심이 발동해 연말 크리스마스 휴가 중에 고대 이집트 관련 고고학 서적을 몇 권 읽어봤지만 도저히 해당 내용을 찾을 수 없었기에, 이집트 룩소르에서 발굴작업하는 미국 대학 소속 이집트학 연구자들 및 이집트인 저술가에게 연락을 취해 어떤 고대 자료에도 소위 "아크나톤 18계명" 같은 문건은 없다는 확답을 받았다.

이 내용이 20 여년 전에 봤던 어떤 UFO 관련 문건과 유사한 점을 기억해 내고, 해당 문건을 수 십년간 유포해 온 UFO 컬트 지도자에게까지 문의 이메일을 보내 "아크나톤 18계명" 혹은 "아톤 18계명"이란 것이 1990년대 UFO컬트에서 흘러나온 것이며 이때의 "아톤"은 고대 이집트 18왕조의 파라오 "아크나톤/아케나텐"의 신이던 "아톤/아텐"이 아니라 플레이아데스에서 우주선 함대를 이끌고 지구로 오는 장신의 대머리 외계인 함장이자 초월체인 "하톤"이며, 소위 "아톤 18계명"이란 것은 그 "하톤"이 지구로 송신한 전파메시지를 1990년도에 도리스 에커란 인물이 수신한 것이라 주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사해 보니, UFO컬트 중 꽤 여러 단체에서 경전처럼 받들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들 UFO 컬트들은 내가 전모를 밝하는 포스트를 올렸던 2010년 당시만 해도 이 '하톤'과 플레이아데스 발 우주함대가 2012년 지구를 제 5차원으로 초월/승격시킬 계획이라고 했는데, 마야 발 "2012년 12월 21일 종말" 소동이 슬그머니 지나 간 후 2012년 이후엔 어떻게 변명하시며 활동들 하시나 갑자기 궁금해 진다. "하톤"이 2012년에 지구에 왔거나, 그 해에게 지구가 제 5차원으로 이동했던 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자료 추적 과정에서 한국의 불문학자이자 동시에 아마추어 불교연구자인 민희식 교수 (이하, 민희식씨)가 이 "아크나톤 18계명은 모세 10계명의 원전"이란 주장을 2008년에 출판된 자신의 {성서의 뿌리}란 책의 한 장을 할애해 역사적 사실로 기술했고, 바로 이 내용을 민희식씨의 열독자(?)들이 그 책에서 발췌/정리해 블로그나 게시판을 통해 전파하고 있었다는 점을 아울러 발견했다.

솔직히 "아연실색"했다.

그야말로 "빅 조크"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자료를 충분히 제시하며 민희식씨의 주장을 반박한 글을 올렸던 이유는, 민희식씨가 내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어린 왕자}를 번역했던 분이고 연세도 아버지 또래로 많은 분이라 대놓고 가혹하게 비판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의 뿌리}란 책에 실린 많은 부분에 동의하지 않지만) 최소한 "아크나톤 18계명이 모세 10계명의 원전이다"란 그 장은 책 다음 판에서는 삭제하시라는 뜻으로 그 글을 썼던 것이다. 너무 당황스런 오류기 때문이다. 솔직히 {성서의 뿌리}란 책에 등장한 자료들 상당 부분의 오류를 다 지적하려면 내가 아예 한 권의 책을 써도 모자랄 정도였다.

아무튼 이 글을 이글루스 블로그에 포스팅한 이후 갑자기, 한 명 혹은 복수의 사칭자가 내 이름과 싸이트, 그리고 개인정보 등을 짜깁기 해서 네이버, 다음, 이글루스 등에 블로그를 개설하거나, 혹은 게시판들에 글을 쓰면서, 내가 마치 민희식씨의 그 책과 글을 옹호한다는 식의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네이버/다음/이글루스 등과 해당 블로거(들)에게 경고한 후 사칭자 혹은 사칭자들이 일시적으로 글을 내리거나 블로그를 폐쇄하거나, 혹은 제목과 글쓴 이 이름을 바꾸긴 했지만, 생각나서 찾아보니 여전히 건재하고 있고 아주 최근에도 역시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집사 조차 아닌 나는, 여전히 사칭자들의 그 공간 속에서는 "최광민 전도사, 목사, 장로, 신부등으로 요새도 활동하면서 민희식씨와 그 분의 저작물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웃음이 나긴 하지만, 특별히 대응할 필요도 없고 해서 10년 전과는 달리 그냥 내버려 두려고 한다. 





아무튼 그러다가 2011년 2월 28일에 급기야 이글루스 측에서 {성서의 뿌리}를 비롯해서 민희식씨의 책들과 비슷한 류의 책들을 다수 출판한 '블루리본'이란 출판사에서 내가 그 책의 내용을 "상습적으로 무단복제"해서 본문을 올리고 있고 변호사를 선임해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협박을 보내왔다. 친구와 후배 변호사에게 법리적 문제를 물어본 후 이글루스 측을 통해 충분히 소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라 그냥 소송하시라고 했는데, 그 이후로 연락을 들은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글루스가 "정당한 사유 없이는 포스팅을 비공개 처리하지 않는다"는 내규를 위반하고 "재판 받고 승소하면 글을 풀어주겠다"는 식으로 내 글을 계속 잠궈두는 통에 한 달 정도 고민하다 미련없이 이글루스를 떠나 구글 '블로거'로 옮겼다. '블로거'는 만약 누가 내 글에 대해 '부당하게 권리침해 소송'을 하면 '역으로 당할 수 있다'는 조항을 아예 명시해 두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글루스 측에선 '신고자 보호'란 명분으로 누가 신고한 것인지 조차 확인을 해주지도 않았다.

개인적으론 설마 교수까지 하신 민희식씨가 내 블로그 글에 정당하게 반론된 내용을 읽고 발끈해 해당 글을 '권리침해' 신고를 했을 것 같진 않다. 그럼 '블루리본 출판사'가 했을까? 아무래도 책 수입에 민감한 출판사 입장에선 그럴 수도. 하지만 내가 앞서 말한 사칭자들의 블로그나 웹페이지가 아예 그 책을 직접 도용하다시피 한 점을 발견해 친절하게도 그런 블로그나 싸이트 링크까지 정리해서 출판사(?) 측에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블로그나 싸이트는 당시에도 그렇고 현재까지도 건재하다. 혹시 또 모르겠다 - 그 사칭자들이 '블루리본' 출판사 관련인일지도. 아무튼 "블루리본 출판사"의 대표 이메일이나 전화번호도 인터넷 상에서 찾을 수 없었다.



아무튼 이 건은 블로그 이전과 동시에 내 관심을 떠났고, 대신 귀찮았던 과정은 아래 글에 자세히 적어 관련된 3글을 2100년까지 블로그 상단에 "영구 포스팅"하는 정도의 방식으로 소심한 '복수'를 실현했다.




내 블로그를 읽고 연락해 오시는 분들 가운데는 사칭자들의 블로그 포스팅을 읽고 구글검색했다가 우연히 내 블로그에 들어온 분이 몇 분 계셨는데,  대개 민희식씨의 책에 대한 양 측의 글 내용이 너무 달라서 진위를 물어오시는 분들 이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사칭자들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은 잘 인지하고 있었는데, 마침 블로그 이전 10주년이니 심심하던 차에 이와 관련된 '특집기획'을 꾸며 보기로 한다.

생각하는 장르는 '공포/미스테리물'.

제 1부에서는 민희식씨의 "필생의 연구주제" 및 이 분의 소위 "연구방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가늠해 볼 생각이며, 이 글의 핵심이라 할 제 2부에서는 인터넷 상에서 이 분의 저작이 대중들에게 어떤 식으로 과장되어 소개되고 있는지 지적해 보겠다. 독자들이 아마 상당히 놀라지 않을까 싶다.





제 1부: "한국이 낳"았다는 어떤 "세계적 석학"?

2010년 12월 말 코미디 같은 소위 '아크나톤 18계명' 주장의 출처인 민희식씨의 "노작" {성서의 뿌리}를 접하기 전 만해도, 나는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를 한국어 번역자이자 한국문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온 불문학자로 민희식씨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예전에 흥미로운 책이 있다며 아주 오래 전 불자이던 한 친구가 빌려줬던 {법화경과 신약성서}란 책을  받아서 몇 장 정도 잠깐 읽어본 기억이 들긴 했지만, 그때는 저자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아서 그 책의 저자가  그 민희식씨 인줄도  인지하지 못했다. 당시 그 책을 읽다가 피식 웃으며 덮어버린 이유는 독자들이 짐작하시는 대로. 

2010년 12월 말 소위 '아크나톤 18계명'에 대한 자료를 모으면서 민희식씨의 약력을 다시 꼼꼼하게 챙겨 보았었다. 

아무리 종교학을 전공하지 않은 불문학자 출신의 아마추어 종교연구자라 할지라도 "아크나톤 18계명" 같은 빅 조크를 그렇게나 당당하고 진지하게 책에 실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책 소개나 인터뷰에 등장하는 그의 약력, 그리고 그의 책을 추천하는 추천자들 대개가 상당한 유명인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주장을 펼 때 전공학위를 통해 축적한 체계적인 학습내용과 논증기법이 큰 도움이 되긴 하지만, 사실 어떤 "사실"을 기술하는데 있어 "전공학위"는 필요하지 않다. 논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실의 적시와 올바로 적시된 "정확한 사실"에 바탕한 "타당한 논리전개", 그리고 대립되는 주장들이 제시하는 반박근거들과의 교차검증이다. 이 세가지가 먼저 충족되지 않는 모든 주장은 기본적으로 일방적인 판타지로 흐르기 쉽다. 민희식씨의 저작물들에 등장하는 주장들 대개는 앞서 언급한 세가지 모두 충족되기 어렵다.

대학교수 은퇴 후 불문학자에서 전업 불교저술가, 아마추어 종교학자로 변신한 이후의 민희식씨의 족적을 1970년대 부터 역추적 하는 것은, 그가 왜 이런 류의 저작물에 "이런 무리한 방식"으로 올인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우선 그 동안 민희식씨가 수십년 간 펼쳐 온 "종교/역사 부문 연구"의 "학문적 신뢰도"를 포장하는데 사용되어 온 그의 "약력"부터 검증해 보자.



# 민희식씨는 "프랑스 최고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무엇보다 나를 아연실색하게 만든 것은 불문학자 민희식씨의 이력을 과장해서 마치 그가 국제적으로 저명한 "종교학자" 혹은 "고고학자"로 오인하게끔 의도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불교 쪽 미디어 및 인터넷 블로그들의 내용 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우선, 교보문고의 작가정보에서 민희식씨 항목을 인용한다.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남. 서울대 불문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수료.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 외국인교수 자격시험 합격. 플로베르 연구로 불문학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성균관대·이화여대·계명대·한양대 교수 역임. 1984, 1999년 국제 PEN 번역문학상 2차례 수상. 1985년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프랑스 최고문화훈장 받음. 프랑스·파키스탄정부 초빙으로 중근동·간다라 역사문화연구 중. 저서로는 《프랑스 문학사》, 《사르트르 연구》, 《법화경과 신약성서》, 《예수와 붓다》, 《불교의 고향 간다라》, 《예수의 생애》, 《금강반야바라밀경》, 《성서의 뿌리》, 《천수경》 등 200여 권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알라딘의 작가정보를 읽어보자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남 1957년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졸업, 同대학원 불어불문학과 수료 1964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 문학박사 학위 취득 연구논문 “플로베르의 성격과 작품 연구” 1965년 외무부 외교연구원 불어 강사 1966년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성균관대학교 부교수 1972년 이화여자대학교 외국어교육과 부교수, 교수 1980년 계명대학교 외국어대학 프랑스과 교수 1981년 한양대학교 불문과 교수 1984년 PEN번역 문학상 받음 1985년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문화공로훈장 받음 1999년 PEN번역 2차 수상 저서: 「프랑스문학사」, 「법화경과 신약성서」, 「불교와 서구사상」, 「토마스복음서와 불교」, 「어린왕자의 심층분석」, 「성서의 뿌리」 역서: 「현대불문학사」, 플로베르 「보바리부인」, 지드 「좁은문」, 뒤마피스 「춘희」, 「에밀」, 「시지프스의 신화」, 「한국시집(불역)」, 박경리 「토지(불역)」, 한말숙 「아름다운 연가(불역)」, 「김춘수시집(불역)」, 허근욱 「내가 설 땅은 어디냐(불역)」, 「불문학사 예술론」, 「행복에 이르는 길」 "


한 군데서는  "프랑스 최고문화훈장"이고,  다른 곳에서는 "문화공로훈장"이다. 아래 설명하겠지만 둘을 다른 "훈장"이다. 물론 민희식씨가 받은 "훈장"은 하나다.

그런가하면 민희식씨와 인연이 많은 불교매체인 {금강신문}에서는 다시 "최고문화훈장"이다.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179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로 프랑스 유학을 떠난 1세대 불문학자가 있다. 민희식(閔憙植, 87) 박사다.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박사는 프랑스 정부가 수여한 최고문화훈장 수상자이기도 하다. 60여 년 동안 불교사상을 통해 서양철학을 분석하는 학문적 성과를 올린 민 박사를 만나 그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느 누구도 민희식 교수가 (1) 프랑스 유학생 1세대이고 (2)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플로베르' 소설 연구로 '문학박사'를 취득했으며, (3) 한국에 돌아와 불문학자와 번역문학가로 활동했다는 점에 이의를 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1985년 "프랑스 정부" 혹은 "프랑스 대통령"이 민희식씨에게 수여한 "최고문화훈장" 혹은 "문화공헌훈장"은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떤 이유로 받은 것일까?

민희식씨의 소위 "비교종교학" 서적들을 홍보하는 싸이트들은 이 약력을 교묘하게 과장하여, 민희식씨가 "한국이 낳은" "비교종교학 석학"이라 (1)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프랑스 최고문화훈장을 받았고, 또 (2) 국빈대접을 받는다고 포장해 놓았다. 그리고 심지어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과장된 약력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꽤 있다.  

그의 책 광고들에서 흔히 묘사하듯 민희식씨가 소위 "프랑스 정부 최고문화훈장"을 받은 것은 60여 년 동안 불교사상 연구와, 기독교-불교 비교연구, 간다라 연구 등에서 학문적 성과"를 올렸기 때문일까? 

가령 불교매체 {금강신문}의 2020년 11월 인터뷰 기사에는 민희식씨가 받은 그 "훈장"을 이렇게 설명한다.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179

"... 민희식 박사는 오랫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공로1985년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최고문화훈장을 받았다. 이 상은 프랑스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1959년 한국인 최초로 노기남(1902~1984) 가톨릭 주교가 받은 이후 두 번째다. 1983년에는 발자크 원작 〈환멸〉로 국제 PEN 번역문학상도 수상했다...."


이런 문구를 읽게 되면, 마치 민희식씨가 "종교 연구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펼친 공로로 "최고문화훈장"을 받게 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기사에서도 말하듯 이 훈장은 "프랑스 문화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도대체 {예수불자론} 등의 연구를 이유로 그 훈장을 받을 리는 없다. 



{금강신문}에도 설명된 노기남 주교의 경우 프랑스 측이 그에게 훈장을 수여한 이유에 대해 {가톨릭 대사전}의 "노기남" 항목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일제말기(日帝末期)에 이르러 조선총독부의 종교탄압정책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한국에 있는 외국인 교구장을 모두 일본인으로 바꾸려 하자, 당시의 서울교구장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는 사임을 결심하고 후임자로 노기남 신부를 비밀리에 로마교황청에 추천함으로써 1942년 1월 4일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서울교구장 서리로 임명되는 한편 평양 · 춘천 양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었다. 교구장 서리고 착좌한 지 한 달도 못 되는 1942년 2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용산 성심신학교를 즉각 폐교하라는 통고를 받고, 서울에 있는 대신학생들을 덕원신학교로 옮겨 공부를 계속하게 하였다. 또 신사참배(神社參拜) 문제로 들볶인 그는 1942년 3월 일본에 가서 동경에 주재하는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와 동경 대교구장 도이(土井) 대주교와도 대책을 협의하였다. 1942년 11월 10일에는 서울교구장 서리에서 정식 교구장[代牧]으로 임명되어 콜바사(Colbasa) 명의 주교가 되었다. 그리고 1942년 12월 20일 명동대성당에서 주교 성성식(成聖式)을 가졌다. 그는 일제의 강제로 감금되어 있는 35명의 프랑스인 성직자아일랜드성직자들을 보호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그 공로 1962년 프랑스정부로부터 최고문화훈장인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를 수여받았다)

{가톨릭 대사전}에는 훈장 수여년도가 1959년이 아닌 1962년으로 되어 있기는 한데, 아무튼 노기남 주교가 받은 훈장은 이에 따르면 프랑스 "최고문화훈장" 혹은 "레지옹 도뇌르"다. 수상 이유는 프랑스인들을 보호한 공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2020년 {금강신문}의 민희식씨 인터뷰 기사의 설명을 보자.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179

"... 민희식 박사는 오랫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공로로 1985년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최고문화훈장을 받았다. 이 상은 프랑스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1959년 한국인 최초로 노기남(1902~1984) 가톨릭 주교가 받은 이후 두번째다. 1983년에는 발자크 원작 〈환멸〉로 국제 PEN 번역문학상도 수상했다...."

이 설명대로라면, 민희식씨는 1959년 노기남 주교에 이어 1985년 한국인으로 "두번째"로 "프랑스 최고문화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은 것이 된다. 

흠.... 노기남 주교와 민희식씨의 정확한 상훈내역에 대해 주한프랑스대사관과 주불한국대사관에 문의를 해두었으나 현재까지 연락을 받지 못했다. 

우선, "기사단" 체계를 본딴 프랑스의 훈장 체계부터 확실히 해두자.



##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나폴레옹 1세가 1802년 제정한 프랑스의 국가상훈제도인 "레지옹 도뇌르"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으로 총 5등급이 있다. 

  • 1등급: 그랑크루아(Légion d'Honneur Grand-Croix)
  • 2등급: 그랑도피시에(Légion d'Honneur Grand Officier)
  • 3등급: 코망되르(Légion d'Honneur Commandeur)
  • 4등급: 오피시에(Légion d'Honneur Officier)
  • 5등급: 슈발리에(Légion d'Honneur Chevalier)

한국인 수상자가 여럿 있는데, 가령 정명훈 (1992, 슈발리에), 김대중 대통령 (2000, 그랑크루아), 이건희 삼성회장 (2006년, 코망되르), 김홍남 국립박물관장 (슈발리에, 2008), 박태준 포스코회장, 조양호 한진그룹회장 (2015, 그랑도피시에), 임권택 감독 등이 수여한 바 있다. 현재 한국 민주당 당대표인 송영길 의원도 2009년 “송 의원이 17대 국회에서 한-프랑스 의원친선협회 회장직을 역임하며 양국 의회 간 협력 강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을 받았다.

  • 그랑크루아
    • 2000년 김대중 (대통령)
  • 그랑도피시에
    • 1990년 조중훈(전 한진그룹 회장 ·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
    • 2015년 조양호(전 한진그룹 회장 ·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
    • 2016년 반기문(제8대 유엔 사무총장, 전 외교통상부 장관)
  • 코망되르
    • 1990년 박태준(포스코 명예회장, 제3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 1996년 김우중(전 대우그룹 회장)
    • 2004년 이건희(삼성전자 회장)
    • 2016년 박삼구(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 오피시에
    • 2005년 김영옥(재미교포 참전용사)
    • 2005년 고홍식(삼성토탈 고문, 전 대표이사 사장)
    • 2006년 서경배(아모레퍼시픽그룹 대표이사 회장)
    • 2006년 이창동(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교수, 전 문화관광부 장관)
    • 2007년 정해주(전 통상산업부 장관 · 진주산업대학교 총장 · 한국항공우주산업진흥협회 회장)
    • 2007년 신동빈(롯데그룹 회장)
  • 슈발리에
    • 1992년 정명훈(전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 2002년 조남호(전 서울특별시 서초구 구청장)
    • 2003년 박용성(두산중공업 회장, 전 대한체육회 회장)
    • 2003년 최정화(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 이사장,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 2006년 홍성일(GNC미디어 대표이사, 한국미술저작권관리협회 회장)
    • 2007년 나도선(전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장)
    • 2007년 이우환(미술가, 일본 다마 미술대학 교수)
    • 2007년 임권택(영화감독,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 석좌교수)
    • 2008년 김종신(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 2008년 김홍남(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 2009년 송영길(국회의원, 전 인천광역시 시장)
    • 2011년 오정석(전 육군 제2군단 군단장)
    • 2014년 정태영(현대카드 · 현대캐피탈 · 현대커셜 부회장)
    • 2014년 김형수(프랑스 명예영사, 고은문화재단 이사장)
    • 2017년 신창재(교보생명보험 대표이사 회장)

그런데 프랑스의 상훈체계는 "프랑스 정부"가 국가차원에서 수여하는 최고등급의 "레지옹 도뇌르" 이외에도 여럿 있다. 일단 이 글에서는 프랑스 "문화부"가 수상주체인 문화예술공로훈장 (Ordre des Arts et des Lettres)프랑스 "교육부"가 수상주체인 "학술공로훈장 (Ordre des Palmes académiques) 을 설명해 보겠다.



## 문화예술공로훈장 (Ordre des Arts et des Lettres)

우선, 1957년 제정된 문화예술공로훈장 (Ordre des Arts et des Lettres)은 그 수상주체가 프랑스 "문화부"다. 프랑스 문화부에서 프랑스 및 세계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그 공로를 치하해 주는 것으로, 꼬망되르 (Commandeur) > 오피시에 (Officier) >  슈발리에(Chevalier)의 세 가지 등급이 있다. 꼬망되르가 가장 높은 등급.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씨가 2009년 "슈발리에급 문화예술공로훈장"을 수상한 후 다시 2019년에 "오피시에"를 받았다.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무려 두번 씩이나.


영화배우 윤정희씨도 2011년에 "오피시에"급 훈장을 받았다. 지휘자 정명훈은 "꼬망되르"급을 받았다.

민희식씨가 이 1957년 제정된 문화예술공로훈장 (Ordre des Arts et des Lettres) 을 받았다면 세 등급의 훈장수여자 중에 그 이름이 올라와 있어야 한다. 그럼 프랑스 문화부가 수여주체이고 민희식씨가 받았다는 "최고문화훈장" 혹은 "문화예술공로훈장"이란 코망되르, 오피시에, 슈발리에 가운데 무엇일까?

훈장수여자 리스트를 확인해 보자.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members_of_the_Ordre_des_Arts_et_des_Lettres

  • Commandeurs of the Ordre des Arts et des Lettres‎ (479 P)
    • 1985년 코망되르 수상자는  Yasuo Mizui, Mrinal Sen, Josef Tal  3인이다.
  • Officiers of the Ordre des Arts et des Lettres‎ (290 P)
    • 1985년 오피시에 수상자는 Lynn Chadwick 1인이다.
  • Chevaliers of the Ordre des Arts et des Lettres‎ (568 P)
    • 1985년 슈발리에 수상자는 없다.

민희식씨의 이름은 1960년대 이후 어디에도 수여자 명단에 없다. 물론 내가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럼 도대체 민희식씨가 수상했다는 "프랑스 최고문화훈장"이나 "문화공로훈장"이란 도대체 뭐란 말일까?



## 학술공로훈장 (Ordre des Palmes académiques)

아래 1985년 1월 5일자 중앙일보 기사는 민희식씨가 "프랑스 대통령"에게서 받았다는 소위 "프랑스 최고문화훈장"의 성격을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https://news.joins.com/article/1814226

민희식교수(한양대·불문학)가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공로훈장을 받았다. 민 교수는 프랑스 서적 1백권이상을 번역한 외국인을 대상으로한 프랑스예술원의 심사결과 공로훈장의 수상자가 됐다. --- [출처: 중앙일보] 불 문화훈장 받아

즉, "외국인으로서" "프랑스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 "프랑스 문화를 해외에 전파한 공로"를 "프랑스 예술원"이 심사해 "프랑스 정부"가 "문화공로훈장"을 수여한 것이다. 그가 받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최고문화훈장"이 아닌 것이다. 대상 역시 "프랑스 서적 번역인"으로 특정되어 있다.

그래서 아마도 민희식씨가 당시에 받은 상훈은 각국 프랑스 대사관에서 수상을 대리하는 "학술공로훈장 (Ordre des Palmes académiques) "과 동일 혹은 유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프랑스 문화 전파와 보급에 기여한 프랑스 국내/외 교수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수상주체는 "프랑스 교육부"다. 

https://en.wikipedia.org/wiki/Ordre_des_Palmes_acad%C3%A9miques

물론 이 훈장도 통상적으로 말하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와는 다른 제도다. 현행 "학술공로훈장 chevalier de l‘ordre des Palmes academiques제도는 1955년 재정비된 후 1963년 드골 대통령이 재개정했다.  코망되르, 오피시에, 슈발리에 3등급으로 되어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수여되는 훈장이다.

한국의 불어불문학과 교수들이나 프랑스와 관련된 학술연구로  "한국에서의 프랑스 문화 전파와 동북아시아 프랑스학 학술공동체 교류에 이바지한 공로"로 종종 프랑스 정부가 주는 교육학술교육훈장을 "종종" 받는다. 물론 프랑스 정부에서 주는 것이니 "프랑스 대통령"이 수상주체 이겠지만, 보통은 대사관에서 대리수상한다.

이 상을 수상한 몇몇 교수들을 골라 봤다.


즉, 프랑스 대사관 측의 설명에 따르면 민희식씨는 "프랑스 서적 1백 권 이상을 번역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프랑스 예술원의 심사결과 공로훈장의 수상자가 됐다.(1) 간다라를 오가며 예수가 인도/간다라에 가서 불교 - 특히 {법화경}을 배웠다거나, (2) 백제에 불교를 전한 서역승 마라난타의 고향이 간다라라는 등 민희식씨의 소위 "비교종교학" 연구업적으로 수상한 게 아니란 말이다.

따라서 인터넷 상의 민희식씨 약력에 흔히 소개되는 "세계적 (비교종교학) 석학으로 인정되어" "프랑스 대통령에게서 (친히)" 수상받은 프랑스 "최고문화훈장"이라 광고하는 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 등급과 성격에서 전혀 다른 훈장이기 때문이다. 

민희식씨는 그간의 책 소개, 인터뷰, 기사 등에 자신이 그렇게 소개되고 있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 걸까? 설마 모르고 계신 것일까? 그럴 리가 있을까?

그럼 이번에는 이 분의 지난 수십 년간 펼쳐 온 "연구" 가운데 핵심이 되는 두개의 주제인 (1) "예수 불자론"과 (2) "마나난타 간다라 도래설"이  정규학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 정리해 보겠다. 

특별히 민희식씨가 주장을 근거로 삼는 자료들의 출처와 제시방식 대해서만 초점을 맞춰보겠다.




# 민희식의 "예수불자론"과 그 근거자료?

민희식씨는 19세기 말 신원이 불확실한 인물인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출판한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나 20세기 초 미국 오하이오에서 천상영계의 아카샤 기록에 접신해 페르시아-인도-이집트 등지 활동한 예수의 일대기를 적었다는 리바이 다울링의 {보병궁 복음서} 같은 문서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 문서들을 예수의 인도 방문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료"로 제시해 왔다.


노토비치의 책이야 "고대역사기록"을 가장하였다 치더라도, 다울링의 {보병궁 복음서}는 입신상태로 받아 적은 책이라고 다울링 본인이 밝힌 바 있으니 검증 조차도 필요없는 오컬트 서적이다. 그런데 이 {보병궁 복음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예수와 간다라, 예수와 {법화경}을 연결짓는 민희식씨의 책이 바로 {법화경과 신약성서} 및 그 책에서 증보된 책들이다. 

그런데 나를 더 아연실색하게 만든 것은 불교계 {금강신문}이 2007년 {불교 知性의 대화}란 제호로 연재한 기획대담기사였다. 

당시 한양대 불문과 석좌교수이던 민희식 교수와 서울대 종교학과의 불교학자 윤원철 교수가 나눈 대담인데, 그때 대담자 윤원철 교수는 민희식씨의 {법화경과 신약성서}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기사링크: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35)

"최근에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면서 두 종교 사이의 관련성을 치밀하게 밝혀 낸 《법화경과 신약성서》 증보판을 내놓으셨습니다. 불문학을 전공하신 대학자이신데, 불교와 기독교를 공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 윤원철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그럼 서울대학교의 "정규 종교학자"이자 "불교학자"인 윤원철 교수 조차도 오컬트 문서인 {보병궁 복음서}를 신뢰할 말한 "사료"로 간주한단 말인가?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윤원철 교수의 수업을 들었던 서울대 종교학과 학생들에게 묻고 싶은 대목이다.



민희식씨는 또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외쳤다는 "엘리 엘리 사박타니"에 대해선 (엘리야가 언제부처 "천사"가 되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천사 에리야"와 "천사 라파엘"이 등장하는 본인 만의 특이한 해석을 시도하시기도 했다.

아래 글에 정리했다.


이외에도 1970년 대부터 민희식씨가 예수-인도/간다라, 예수-불교, 특별히 {복음서}-{법화경}을 연결시키기 위해 시도한 여러 저작물들에 발견되는 오류들은 상당한데, 나는 일일히 하나씩 반박하려다 반박할게 너무 많아 중도에 지쳐 그만두었다. (그런데 투입할 시간도 없고)

자세한 것은 아래 링크의 "예수 vs. 붓다" 시리즈를 하나씩 읽어보길 권한다. 아직도 많은 글들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로 비공개 저장되어 있다.


특별히 {법화경}에 특화된 "불제자 예수" 이론을 1970년대 부터 개척한 민희식씨는, 1990년 대 말부터는  대외적으로 "비교종교학자"를 표방하며, 이번에는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의 "신화적 모티프"를 모조리 주변 오리엔트 문명, 혹은 인도로 소급시키는 일련의 저작을 출판한다. 

물론 그런 "비교종교학적" 시도 자체는 학술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문제는 그 저작물에 사용된 자료들을 얼마나 충분히 이해하고 검증했는가? 이다. 

민희식씨가 출판한 책들이 자료를 나름 "방대히" 정리했을 지는 몰라도, 학술적 연구란 자료를 모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료의 신빙성을 확인과 그에 바탕해 타당한 논리를 전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솔직히 본인이 직접 모든 자료를 충분히 이해하고 검토한 것인지 조차  의문이 들 정도다. 내 느낌으론 자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럴싸한 모든 자료를 다 끌어다 모은게 아닌가 싶을 정도. 게다가 몇몇 자료는 해석이 틀렸거나 학계에서 오래전에 충분히 기각된 주장들이기도 하다. 



내 전공분야는 (자연)과학으로, 과학 분야에서 학사 하나, 석사 두개, 박사학위 하나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최소한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과학 비전공자들에게 설명할 수준은 감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인문/사회 부문에서 특정 분야가 뒤에 "과학"이란 명칭을 붙여 "인문과학" 혹은 "사회과학"이라 불리는 경우, 보편적 '과학'이 성립하기 위한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어 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이 경우 부실한 자료나 논리의 도약을 솎아 내는 것이 모든 연구의 제 1순위가 된다. 그리고 역사학과 고고학은 그런 "인문과학"의 분야에 속한다. 민희식씨의 원래 전공이 결코 "과학"이라 불리긴 힘든 "문학"이라 그런지 이런 엄격한 검증과정을 너무 쉽게 본 게 아닌가 싶다. 

사실 UFO컬트 문서를 고대 이집트 18왕조의 기록으로 보고 그 책에 "한 장 chapter" 씩이나 할애한 것 만으로도 솔직히 책 전체의 자료검증 수준을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미 10년 전에 충분히 잘못을 지적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칠 생각조차 없으시다)

심지어 본인의 주장들이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가령, 해당 책의 한 장에서는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 모세 십계명의 원전이다 237"라고 주장해 놓고는, 바로 다음 장에선 "아크나톤 18계명이 모세 10계명의 원전이다 244"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그럼 도대체 "모세 10계명"의 원전은 뭐란 말인가? 


그런가 하면, "케레트 서사시가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의 원전이다 134", "아크하트 서사시가 이삭 인신공희 이야기의 원전이다 146" 같은 장에서는 아예 카나안 지역의 우가리트 설화 "원전"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을 지어내 "원전"이라 주장하는 허수아비 논증을 펼치기도 한다.


지난 10여 년간 가끔씩 이 문제를 생각해 봤다. 도대체 이 분의 연구는 어디부터 꼬인 것일까? 아마도 아래 정리할 내용을 읽어보면, 이 분이 늘 이런 식의 논증패턴을 보이는 그 깊은 배경이 무엇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 민희식의 "마라난타 간다라 도래설"과 그 근거자료?

사실 난 이 주장의 "진위 자체"엔 크게 관심이 없다. 다만 민희식씨가 주장을 펼칠 때 자신의 "세밀한 근거"를 어떤 식으로 끌어오고 제시하는가에 대해서만 방점을 두도록 하겠다. 

민희식씨가 펼쳐 온 소위 "연구"의 두드러진 패턴은, "자신의 논점에 유리해 보이는 자료를 비판없이 모두 끌어다 붙이"는 동시에 미싱링크에 해당하는 자료는 종종 "왜곡" 및 "짜깁기/창작"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자료의 검증, 특별히 원전의 철저한 추적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자료의 출처표기와 검증은 모든 "현대적 연구"에서 요구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민희식씨는 이 요구조건을 종종 그냥 건너뛴다.

아런 허술한 역사연구 사례의 정점이 민희식씨가 1990년대부터 펼쳐 온 "마라난타 간다라 도래설"이다. 아래 기술한 내용에서는 "학설" 자체보다는 민희식씨가 자신의 주장을 "어떤 근거를 들어" 펼쳐온 것인지, 그리고 그 소위 "근거"들이 학문적으로 인정될 수준의 것인지, 그리고 그가 주장을 펼치는 방식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촛점을 맞춰보도록 하겠다.

민희식씨는 서북 인도/파키스탄의 간다라 지역이 본인이 사랑하는 {법화경}이 출현한 곳으로 여겨지는 지역이라 그런지 간다라 문명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하다. 이 애착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그의 "불제자 예수" 주장이고, 또 다른 방향으론 "마라난타 간다라 출신설"이다. 두개 주장의 뿌리는 사실은 같다. 예수는 대승불교의 중심지 "간다라"에 갔다왔고, 마라난타는 "간다라"에서 대승불교를 배워 백제로 왔다는 것. 즉, "간다라"가 키워드다. 

"마라난타 간다라 출신설"은 백제 침류왕 시절인 AD 384년 중국 동진에서 백제로 들어온 포교승 마라난타 (摩羅難陀)의 고향을 (1) 간다라 지역 쵸타 라호르로 특정하고, 또 (2) 마라난타가 도래해서 사찰을 지었단 전승이 있는 전남 영광군의 법성포(法聖浦), 영광군의 불갑사와 군산 불지사, 나주 불회사 등과 간다라를 연결시키려는 것이다.



문제는?

사실 "명쾌한 문헌 증거는 없다고 봐야 하겠지만" 호승 마라난타가 "어쩌면 서북인도 대승불교의 중심자"였던 간다라에서 중국을 거쳐 백제로 "왔을 수는 있다". 

그런데 "마라난타"란 승려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사료가치가 떨어지는 {해동고승전}의 내용의 전부다. 인도나 중국 측 기록은 아예 없다.

우선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권 제24 백제본기 제2 침류왕(枕流王)

九月,
胡僧摩羅難陁自晉至, 王迎校勘 001之, 致宫内禮敬焉. 佛法始於此.



[원년(384)] 9월에 외국 승려[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註 001가 진(晉)나라에서 오니 왕이 맞아 궁궐 안으로 모시고 예우하며 공경하였다. 불교[佛法]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註 002

이어서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권 제3, 흥법(興法第三) 난타벽제(難陁闢濟)조

難陁闢濟


百濟夲記云. 第十五 僧傳云十四, 誤.枕流王即位甲申
東晉孝武帝大元校勘 004九年, 胡僧摩羅難陁至自晉, 迎置宫中禮敬. 明年乙酉創佛寺於新都漢山州, 度僧十人, 此百濟佛法之始. 又阿莘王即位大校勘 005元十七年二月, 下敎崇信佛法求福. 摩羅難陁譯云童學 其異迹詳見僧傳..

난타벽제(難陁闢濟)

백제본기(百濟本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註 014 제15대 ≪승전(僧傳)≫에서는 14대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침류왕(枕流王) 즉위 갑신(甲申)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註 015 9년(384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晉)에서 왔는데, [그를] 맞이하여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예우하였다. 이듬해 을유(乙酉)(385년)에 절을 새 서울 한산주(漢山州)에 세우고, 승려 열 명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 불교의 시초이다. 또 아신왕(阿莘王)이 즉위한 태원 17년(392년) 2월에 교령을 내려서 불법을 신봉하여 복을 구하라.註 016 마라난타는 번역하면 동학(童學)이라고 한다. 그의 특이한 행적은 ≪승전≫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마지막으로 {해동고승전}이다

釋摩羅難陀校勘 221胡僧也. 神異感通莫測校勘 222階位, 約志遊方不滯一隅. 按古記, 本從竺乾入于校勘 223中國附材校勘 224校勘 225身徵烟召侶, 乘危駕險任歷艱校勘 226辛有緣則隨, 無遠不履. 當百濟第校勘 227十四校勘 228枕流王卽位九校勘 229年九月, 從晋乃來王出郊迎之, 邀宮中校勘 230敬奉供養禀受其說. 上好校勘 231下化, 大弘佛事共賛奉行, 如置郵而傳校勘 232命. 二年春剏校勘 233寺於漢山度僧十人, 尊法師故也. 由是百濟校勘 234次高麗而興佛敎焉, 逆數至摩騰入後漢校勘 235二百八十有年矣. 耆老記云, “句高麗校勘 236始祖朱蒙娶高麗女生二子, 曰避流· 恩祖. 校勘 237 二人同志南走至漢山開國.” 今廣州是也. 本以百家渡河校勘 238故名百濟. 後於公州扶餘郡前後相次而立都.

승려 마라난타(釋摩羅難陀)는 호승(胡僧)註 187이다. 신이(神異)와 감통(感通)은 정도를 짐작할 수 없었으며, 사방으로 주유(周遊)함에 뜻을 두어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고기(古記)를 살펴보면, 그는 원래 천축으로부터 중국으로 들어와 인재를 따라 몸을 의지하고 남모르게 벗을 불렀으며, 그는 위험에 부딪치고 험난한 일을 겪었지만 어려움과 괴로움을 무릅쓰고 인연이 있으면 따라나서,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밟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백제 제14대註 188침류왕(枕流王) 즉위 원년(384)註 189 9월에 그가 진나라에서 오니 왕은 교외에까지 나가 그를 맞이하였으며, 궁중에 모시고 공경히 받들어 공양하면서 그의 설법을 들었다.註 190 윗사람들이 좋아하니 아래 사람들도 교화되어, 불사를 크게 일으켜 함께 찬송하고 봉행하니, 마치 파발을 두어 왕명을 전하는 것같이 빨랐다.註 191 2년(385) 봄, 한산(漢山)에 절을 창건하고 승려 열 명을 출가시키니,註 192 그것은 법사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는 고구려 다음으로 불교를 일으켰으니, 거슬러 계산하면 마등(摩騰)이 후한에 들어온 지 280여 년이었다.

호승 마라난타가 (1) 간다라 '쵸타 라호르' 출신이며 (2) 간다라의 불교승원에서 대승불교를 배운 그가 이후 (3) 탁실라, 페샤바르를 거쳐 돈황, 장안 등을 거쳐 백제로 왔다는 민희식씨의 이토록 "구체적"인 주장을 사실로 입증할 증거는?

놀랍게도 자료가 학계에 공식적으로 제시된 바 "없다"

간다라 불교미술사를 전공했고 중앙아시아 학회장을 역임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이주형 교수는 파키스탄의 "Centre for Gandharan and Buddhist Studies 간다라-불교 연구센터" 에서 발행하는 2019년 영문학술지 {Gandharan Studies 간다라 연구}에 {승려 마라난타는 정말 간다라에서 한국으로 갔을까? Did the Monk Maranant’a Really Come from Gandhāra to Korea?}란 25장짜리 논문을 기고했다. 참고로 이주형 교수 본인은 불교도로 보인다.

서울대 이주형 교수
학회지 {중앙아시아연구}

해당 영문 논문은 아래서 읽을 수 있다.

논문링크:


이 논문에는, (1)  "마라난타의 출신지"에 대해 주장할 때마다 민희식씨가 줄곳 내세웠던 소위 "근거"들의 정체에 대해 이주형 교수가 민희식씨 본인에게 직접 문의했던 일화와 (2) 소위 그 허술한 "근거"가 학술지를 통해서가 아닌 신문기사나 대중적인 책이나 매체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 어떻게 지난 30년 간 한국에 퍼졌는가가 자세히 실려 있다. 

이 논문이 비록 민희식씨의 "마라난타 간다라 도래설"에 대한 비판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이 논문을 읽고나서 민희식씨의 허술한 (1) 연구 "방식", (2) 연구 "성과", 그리고 (3) 학계에서의 평가에 대해 그동안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의문들이 상당부분 풀렸다.

가령, 논문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민희식씨가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는 방식은 대개 이런 식이다. 

How can one believe that the birthplace of a person from ancient India can be pinpointed with such minute precision? Being extremely incredulous of the claim, I once personally asked its primary exponent, Min Hee Sik (Min Hŭi-sik in proper Korean romanization), for its evidence. He only gave me an evasive answer, saying that the record exists in a French work without specification. The answer itself seemed to me highly doubtful because it can be rightfully questioned how the information regarding the birthplace of such a person as Maranant’a is handed down to us through a French record.

고대 인도에서 온 사람의 출생지를 어떻게 그렇게 정밀하게 특정할 수 있을까?
이 주장을 도저히 믿을 수 없기에 나는 한번은 이 주장의 최초 주창자인 민희식에게 그 증거에 대해 개인적으로 물어본 적 있었다. 그는 모호하게 답하면서 그저 특정되지 않은 프랑스 자료에 기록에 있다는 식으로만 답했다. 이 답변 자체가 나로서는 매우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마라난타 같은 개인의 출생지 정보가 프랑스 측 자료를 통해 우리에게 전수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 타당하게 질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Did the Monk Maranant’a Really Come from Gandhāra to Korea?} / 번역: 최광민

2001년 민희식씨는 한 불교매체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공개했다고 하지만, 이주형 교수는 여기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민희식씨는 그 글에서 자신이 유럽과 일본의 많은 도서관에서 그 자료를 취합했다고 또 주장할 뿐, 도대체 어떤 제목의 무슨 자료를 또 어디서 어떤 경로로 구했다는 것인지 전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이주형 교수는 민희식씨가 2001년에 출판한 65페이지 짜리 소책자 {간다라에서 영광까지}의 내용을 영어로 번역해 길게 인용한다.

민희식씨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한 본인의 설명은 이렇다: 

민희식씨가 1959년 프랑스 정부장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간 다음 해 봄에, Michel Victor 교수가 자신에게 국제학생친선모임에서 한국문화에 대해 발표하라고 했기에 한국에서 자료를 요청했는데, 한국사상에 대한 자료가 마땅치 않다고 교수에게 답하자 Victor 교수는 그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가보라고 했다고 한다. 민희식씨는 국립도서관에 한국불교와 유교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백제로 간 마라난타의 고향이 초타 라호르란 사실을 발견했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면서 당시 발표준비 노트를 준비하느라 바빴고, 이후에는 전공공부에 바빴기 때문에 그 주제에 대해 더 연구할 시간이 없었다"라고 적는다.

즉, 민희식씨의 주장대로라면 "마라나타의 출신지가 초타 라호르"란 그 "증거"를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주형 교수는 사실 민희식 교수가 도대체 어떤 자료를 말하는 것인지 조차 불분명하다고 비판한다.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했다는그런 자료는 지난 20년 간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검색이 되지도, 학문적인 공식통로로 발표된 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주형 교수는 그런 자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아마도 민희식씨가 본인의 기억을 "왜곡"했거나 혹은 자신이 그런 증거를 발견했다고 "착각"하고 같은 주장을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20년 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결론 내린다.



사실 동일한 책에서 민희식씨는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두번째 "증거"에 대해 언급한다. 파키스탄의 저명한 고고학자 "아슈라프 칸이 수집한 고대문헌들"에 가운데 있다는 한 기록이 바로 그 증거란 것. 

민희식씨 본인의 설명은 이렇다: 민희식씨는 1998년 파키스탄 탐방에서 돌아와 {간다라 불교의 고향}이란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출판과 관련해 2001년 {현대불교}에 이렇게 기사화도 되었다.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0501

1999년 간다라 미술 전람회가 서울과 부산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파키스탄 문화부 고고박물국장인 아슈라프 칸이 총 기획을 맡았다.

https://news.joins.com/article/3794528

그때 전남 장성에 있는 백양사 주지 모씨가 영광 법성포에 마라나타 도래 기념물을 세울 계획을 진행 중이었는데, 그때 그가 민희식씨와 함께 파키스탄에 같이 가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전남 영광군 군수, 공무원들, 관광사업가, 그리고 교수들이 인도의 마투라 유적을 보고, 이어서 파키스탄에 가서 간다라 미술을 탐방한 후 마라난타의 고향(?)인 초라 라호르의 갈리 마을도 방문했다는 것이다.

민희식씨는 저 책에서 바로 그 무렵 영국에서 돌아온 저명한 고고학자인 아슈라프 칸이 자신에게 "초타 라호르 출신인 마라난타가 중앙아시아에서 톈산산맥을 넘어 중국을 거쳐 백제로 간 여정"의 내용에 아울러 심지어 지도까지 딸린 문서를 건네 주면서, 이 문서와 지도는 영국 대영방물관 도서관에서 아슈라프 칸 본인이 복사한 것이라고 민희식씨에게 말해주었다고 진술한다.

민희식씨는 칸이 건넨 문서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주장한다. 민희식씨 저 {간다라에서 영광까지}의 내용이다. 이주형 교수의 영어논문에서 번역한다.

“In AD 384, an Indian monk Maranantha or Mallananda (Gandhara = Chota Lahors) (Salatura) reached the kingdom of Paekche and propagated the Dharma. From Korea (Paekche), Bouddhisme [sic.] reached Japan in AD 552 (Min 2001A, 5)

AD 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 혹은 말라난다 (간다라 = 초타 라호르) (살라투라)는 백제왕국에 도착해 불법을 전파했다. 한국 (백제)로부터 AD 552년 불교는 일본으로 전해졌다" / 번역: 최광민 


문제는? 도대체 이 문건의 출처는 뭐란 말인가?

민희식씨는 예전에는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었다는 자료의 출처를 명쾌하게 제시하지 않은 채, 이번에는 바다 건너 "런던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있다는, 그것도 역시 정체불명의 자료를 또 제시한 셈이다. 

게다가 민희식씨의 책에 이 자료와 함께 제시된 소위 "지도"는 고지도도 아니고, 심지어 1947년 독립한 "파키스탄"이란 국명이 영어로 씌여진 데다가 "둔황"은 프랑스 제국주의 시절의 표기법인 "Touen-Houang"이나 영국 제국주의 시절의 표기법인 웨이드-자일스 방식의 "Tun-huang" 조차도 아닌, 1982년에 국제적으로 처음 인정되었고 그나마도 1990년대에 들어서야 자리잡은 중국 한어병음표기법에 따라 "Dunhuang"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니 최소한 지도 그 자체만 보면 이건 아주 최근에 누군가 만든 것이다.

아슈라프 칸은 1999년 한국에서 간다라 미술 전람회가 열릴 무렵 한국을 방문한 바 있고, 이후 한국의 학자들과 교류가 있었다. 칸을 파키스탄 "동료"로 부르는 이주형 교수는 논문에서 본인이 칸과 나눈 개인적인 대화 내용도 공개했다.

이주형 교수에 따르면, 칸은 민희식씨가 칸이 파키스탄에서 출판한 책 혹은 기사내용을 잘못 인용한 것 같다고 털어놨다. 칸에 따르자면, 자신이 마라난타에 대해 알고 있던 내용은 사실은 모두 민희식씨에게서 들은 내용에 바탕했다는 것이다. 즉, 민희식씨에게 아슈라프 칸이 건네줬다고 주장한 그 "증거"란 바로 민희식씨 본인의 주장이 칸을 거쳐 다시 자기 자신이 증거로 "셀프인용"된 셈이 된다. 일종의 "순환논증"이다. 자신의 "주장"을 담은 문건을 "인용"한 후, 그걸 다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로 삼은 것이다. 이건 학술연구에 있어서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기초 중의 기초다.

(나는 이주형 교수의 논문을 읽고 나서 위 내용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아슈라프 칸 교수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냈으나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

게다가 민희식씨는 마라난타의 출신지 및 그의 여정에 대한 증거로 영어와 프랑스어로 된 27건의 자료, 그리고 25건의 일본 자료를 "주요 참고자료"라며 그 책에 제시했지만, 이 자료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이주형 교수는 그 자료 안에는 "마라난타의 출생지"는 고사하고 "마라난타 본인"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고 일갈한다.

즉, 이 모든 것은 민희식씨의 상상 속 산물이란 것.



이주형 교수는 계속해서 민희식씨가 제시해 온 다른 소위 "증거"를 반박하고 있다. 이어지는 민희식씨 버전의 진술을 이렇다:

1999년 간다라 문화에 대한 책을 써달라는 파키스탄 문화부 장관의 초청을 받고 파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한국 영사가 자신을 초대해 간다라 문화연구의 권위자인 아흐마드 하산 다니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민희식씨가 마라난타에 대해 다니에게 묻자, 다니는 민희식씨에게 다음에 만나면 보다 탄탄한 자료를 주겠노라고 답했다는 일화를 전한다. (이주형 교수는 이를 아흐마드 하산 다니의 일종의 인사치례였을 뿐이라 추정한다) 이어 파키스탄 문화부 장관이 영광군수와 일행을 초대한 자리에서 문헌적인 검증에 기반해 양측의 협조로 파키스탄 측이 발굴을 진행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고 이 기사가 파키스탄 전역에 보도되었다고 한다.

이후 협력을 토론하기 위해 민희식씨는 위에 언급된 아슈라프 칸을 포함한 파키스탄 고고학자 두 명과 초타 라호르를 "답사"했는데, 그 직전 칸은 그 지역에서 마라난타와 관련된 구전설화가 남아 있는지 사전조사했었다. 민희식씨의 말에 따르면 몇몇 현지인들이 마라난타 이야기처럼 들리는 구전을 진술했다는 것이다. 이 자체는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이주형 교수와 아슈라프 칸을 포함한 파키스탄 연구자들 버전의 상황설명은 꽤 다르다. 한국에서 온 일행들의 기사가 파키스탄 매체를 통해 보도된 후 초타 라호르 지역 사람들이 갑자기 "마라난타"란 이름에 노출되었고 매체의 관심을 받게 되자 유사한 "설화"들이 마치 마라난타에 대한 것처럼 가공되었을 것이라 의심한다. 이런 일들은 역사학과 인류학 연구에서 꽤 흔하게 일어난다. 가령, 19세기에 고대 인도문명에 경도되어 그 신비를 체험하고자 지역을 방문한 서구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내용"을 구술해 주던 사례들은 이미 학계에 잘 보고되어 있다. 그게 돈 때문이든, 허세 때문이든.

민희식씨는 이런 식으로 수집된 이야기들을 가공해 {구전설화에 따른 마라난타의 생애}란 책을 또 펴내는데, 이주형 교수는 대부분의 자료가 일화적 전설 수준이고, 또 그나마도 민희식씨 본인의 상상으로 재가공된 것으로 보고 그 책을 자세히 인용하면서 철저히 반박한다. 그 무엇보다도, 현재 기록에 남은 어떤 서역승의 일대기도 민희식씨가 재구성한 마라난타의 행적보다 자세하지 않다. 이주형 교수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아울러 민희식씨가 마라난타의 여정에 대해 제시한 어떤 내용도 알려진 어떤 사료에 바탕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인도와 중국 기록에 조차 남아있지 않고, 한국 측 기록에서조차 몇개 일화만 남아있는 그 마라난타에 대한 기록을 어떻게 20세기에 저렇게 자세히 재구성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아흐마드 하산 다니가 정말로 그런 기록을 알고 있었다면, 왜 그는 이렇게 놀랄만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를 단 한번도 학계에 공식발표 한 적이 없단 말인가? 그래서 이주형 교수는 다니와 관련된 민희식씨의 진술 역시 허언으로 간주한다.



논문의 말미에 이주형 교수는 왜 자신이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분량에 해당하는 민희식씨의 진술을 이 논문에 직접인용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I have so far cited Min’s claims regarding Maranant’a’s birthplace at great length. Perhaps one might wonder whether it was necessary to quote all these words surely deplorable in academic standard in such detail. However, I believe that reading Min’s claim in his own words must help the readers see for themselves what was really wrong. It is truly lamentable that claims based on such sloppy grounds have held sway over the Buddhist community in Korea and the learned public in Pakistan for the last full two decades. -- Juhyung Rhi, {Did the Monk Maranant’a Really Come from Gandhāra to Korea?}

나는 지금까지 마라난타의 출신지에 대한 민(희식)의 주장에 대해 많은 분량 인용했다. 아마도 학문적 기준으로 절망적인 수준의 이런 모든 진술들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인용할 필요가 있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희식)의 주장을 그의 말로 직접 읽어봄으로써 독자들 스스로 무엇이 문제인지 보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이런 허술한 기반을 가진 주장들이 한국의 불교계와 파키스탄의 교육받은 대중들 사이에 지난 20년 내내 떠돌아 다녔다는 사실은 진정 개탄할 일이다 ---- 이주형, {승려 마라난타는 정말 간다라에서 한국으로 갔을까?}  / 번역: 최광민

그리고 결론에서 다시 한번 큰 우려를 밝힌다.

The assertion that Maranant’a’s birthplace is identified as Chota Lahor in Pakistan is most likely a fictional idea generated by confusion or illusion. It is lamentable that these baseless claims have been almost established as historical facts over the last two decades both in Korea and Pakistan. The greater shame would be if Koreans and Pakistanis continue to accept this misunderstanding and the chain of almost farcical events it has generated. I urge that these claims be straightened out as soon as possible unless anyone wishes to continue to profit from this ludicrous pageantry. -- Juhyung Rhi, {Did the Monk Maranant’a Really Come from Gandhāra to Korea?}

마라난타의 출신지를 파키스탄에 있는 초타 라호르로 특정하는 주장은 거의 확실히 혼동과 상상에서 시작된 공상에 불과하다. 이런 근거없는 주장들이 지난 20년 간 한국과 파키스탄에서 역사적 사실로 거의 확정된 양 굳어졌다는 사실은 개탄스럽다. 만약 한국인과 파키스탄인들이 이런 잘못된 인식과 또 이 주장이 불러일으킨 우스꽝스럽기까지한 연속적인 사태를 계속해서 받아들인다면, 더욱 수치스런 일이 될 것이다. 이 바보같은 쑈를 통해 이득을 얻을 생각이 없다면 이런 주장들은 가급적 빨리 정리되어야 한다고 나는 촉구한다. ---- 이주형, {승려 마라난타는 정말 간다라에서 한국으로 갔을까?}  / 번역: 최광민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이주형 교수는 마지막 문단에서 꽤 완곡하게 썼지만, 사실 "이 모든 소동을 통해 이익을 취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그룹은 분명 있다. 그리고 이주형 교수 등이 제기하는 비판에 그들이 예민하게 반응할 이유는 아주 많다.

이 "연구"는 파키스탄 간다라 지역과 전남 영광 지역의 "관광사업"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간다라 연구}에 이주형 교수의 논문이 개제된 후, 불교매체 {법보신문}에서 이주형 교수와 불갑사 주지 만당 비구가 해당 주제를 놓고 격론을 벌인다. 앞서 논문이 주로 "민희식씨의 근거자료"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법보신문}에서의 논쟁에 "민희식"이란 이름은 배제되었다. 이 문제에 있어 민희식씨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배제되어 있는 것은 좀 의아스럽다.


왜 불갑사 주지인 만당 비구는 왜 이렇게 비분강계 하실까? 마라난타가 배편으로 "전남 영광 법성포(法聖浦)"로 들어와 "불갑사"를 창건했다는 창건설화에 근거할 때 전남 영광과 불갑사는 소위 "마라난타 간다라 출신설"의 한국 측 메카가 되기 때문. 그리고 전남 영광군과 해당 불교관계자들은 전남 영광 법성포/불갑사 성지화 사업을 위해 2010년 무렵부터 파키스탄을 오가며 이 사업에 큰 공을 들이고 있었다.



# 민희식씨는 파키스탄에서 국빈대접을 받는 세계적 연구자다?

"국빈"의 정의는 무엇일까?

2012년 파키스탄 현지 영자신문 {Dawn}의 기사를 읽어보자. 우선 2012년 3월 17일 기사다. 한국어 영자 표기에 약간의 오류가 있다.

Korean team visits Buddhist sites
https://www.dawn.com/news/703530/korean-team-visits-buddhist-sites

TAXILA, March 17: A four-member team of professionals from South Korea on Saturday visited Buddhist sites and Taxila Museum
The group comprising renowned scholar of Gandhara Prof Min Hee Sik, tourism promoter Kwah Munil, Lee Won Jong of Tehdi Sect Buddhism and Prak Jong, another tourism promoter. The group came here on the invitation of Tourism Corporation of Khyber-Pakhtunkhwa (KP) and Gandhara Art and Culture Association of Pakistan.

[중략]

Lee Won Jong, follower of Mahyana form of Buddhism, said Korean monks were keen to support establishment of Gandhara University at Taxila which would not only promote religious tourism but also help exchange scholars between two countries.

Talking to newsmen, Gandhara Art and Culture Association Pakistan Chairperson Ms Easter Park said the group’s visit to different sites in Taxila and KP would pave the way to fetch religious tourists from Korea.

탁실라, 3월 17일, 한국에서 방문한 4인의 전문가가 토요일 불교 유적지와 탁실라 박물관을 방문했다.
일행은 저명한 간다라 연구자인 민희식 교수, 관광 프로모터 과(?) 문일, 천태종 이원종, 그리고 또 다른 광광프로모터 박종씨다. 일행은 파키스탄 키베르-팍툰카 및 간다라 예술문화협회 초청으로 방문했다. / 번역: 최광민

[중략]

대승불교도인 이원종은 한국승려들은 탁실라의 간다라 대학 설립에 관심이 있으며, 종교순례관광 뿐 아니라 양국 학자 간 교류에도 도움이 되리라 말했다.

간다라 예술 문화 협회의 파키스탄 회장인 박 에스더는 탁실라와 키베르팍툰카 다른 유적지 방문이 한국인 순례객 유치에 초석을 놓을 것이라 말했다.  / 번역: 최광민

3월 19일 일행은 페샤와르를 방문한다.  현지 기사 두개와 영자신문 {코리아헤럴드} 기사 하나를 소개한다.


이 기사에는 일행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가 나온다. 가령, 천태종 불자/승려(?)로 소개된 이원종씨는 지속해서 승려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종교계 측 인사로 보인다. 이들은 관광청 측의 안내를 받아 유적지를 방문하고 간다라 관광객 유치에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보안문제에 대해 관광청 측의 설명을 들었다. (당시 파키스탄은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요 활동지였다).



이 기사에서 파키스탄인과 거주해 파키스탄에 거주하고 있는 "간다라 예술 문화 협회 Gandhara Crafts and Culture Association"의 대표로 다시 언급된 "박 에스더" 가 이 모임에서 관광객 유치에 실무적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아울러 간다라 관광유치와 유적 보존 문제를 한국 측과 협의하고자 열망을 비춘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이 "박 에스더"란 사람은 아래 2001년 {중앙일보} 기사에 등장하는 "박교순 시인"과 동일인물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4126914

"...정년퇴임 직전 박교순(43.시인)씨를 만난 인연도 묘하다. 개신교도인 박씨는 혼자 파키스탄을 여행하다가 간다라 불교에 주목하게 됐고, 관련 서적을 구하기 위해 서울 성북동의 한 고서점을 우연히 찾았다가 민교수 얘기를 들었다. 그 고서점은 근처에 사는 민교수가 간다라 관련 책과 자료를 기증한 곳. 이후 박씨는 간다라 불교연구를 위해 파키스탄으로 유학을 떠났고, 간다라 현장에서 민교수의 연구성과를 점검하는 대리인 역할을 해왔다. 일은 술술 풀려나갔다. 동양에서 온 여 시인의 열정에 주목한 현지 언론이 박씨에 대해 보도를 했고, 그 보도를 본 고위관료가 민교수를 초청했다...."

{법보신문}의 2004년 기사에서는 민희식/박교순씨가 공저한 {불교의 고향, 간다라}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4823

"...민희식(전 한양대)교수와 박교순 시인이 선보인 《불교의 고향 간다라는 간다라 불교를 집중 조명한 책이다.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초청 받은 두 저자가 간다라 발굴 연구 계획에 관한 토론과 답사 한 것을 토대로 엮었다. 민교수는 간다라에 대한 자료 수집을, 박 시인은 간다라 유적지 현장 답사를 맡았다..."

민희식씨와의 협력에 대한 박교순씨 본인의 진술은 이렇게 기사화되어 있다.

http://www10.breaknews.com/serial_read.html?uid=519068&section=sc5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나는 강남 소망교회를 다녔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유럽여행을 준비하던 차에 우연치 않게 1998년 종교 발상지인 파키스탄을 방문했는데 이슬람국가지만 박물관에 간다라 불상들이 많았어요. 저도 모르게 간다라 불상미술에 빠져들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파키스탄 정부에서 한국의 불교신자들이 성지순례 및 관광객을 유치하는 차원에서 국보급 진품 70여 점을 전시하도록 한 것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지난날 교과서에는 동진에서 마라난타 승려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했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알렉선더 대왕이 동방원정을 통하여 간다라 미술이 꽃피울 때 이곳 간다라에서 마라난타 승려가 실크로드를 거쳐 백제 침류왕의 초청으로 전라남도 영광 법성포에 불교가 도입되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박교순씨가 1998년 파키스탄을 방문하고 1999년 계간 {세기문학}에 {스와트의 간다라 사원 유적지에서}라는 글을 투고한 것으로 보아, 이 무렵 "간다라"에 올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박교순 (박 에스더)씨의 링크드인을 보면 2002년 이래로 파키스탄에 거주하면서 2002에서 2010년 사이에 펀잡대학에서 역사학으로 석사와 박사를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떤 주제로 학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간다라에서의 동서교류를 주제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2012년 3월 21일의 일정에 대한 현지 보도내용은 아래와 같다.

https://buddhistartnews.wordpress.com/2012/03/27/khyber-pakhtunkhwa-minister-wants-archaeological-artifacts-back/

Hee Sik Min, Jong Yung Park, CEO of Win-Win Tours, Moon Duck Wak (GM of Win-Win) and Won Jong Lee) Tendai Sect of Buddhists), Director General, Archaeology, Shah Nazar Khan, General Manager, Tourism Information Centres), Mohammad Ali Syed, Curator, Peshawar Museum, Nidaullah Sehrai and Consultant, Tourism Corporation, Khyber Pakhtunkhwa, Zahoor Ahmad Durrani were also present. The minister said that the provincial government would utilise the services of private sector for the promotion of tourism in the province.


민희식, 윈-윈관광 대표 박종영, 윈-윈관광 전무 문덕왁(?), 천태종 이원종, 고고학 책임자 샤 나자르 칸....... 등이 참석했다. 장관은 지역정부가 이 지역의 관광증진을 위해 민간부분의 지원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 번역: 최광민

이 답사단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다시 4월 27년부터 5월 3일 간 또 다른 답사단이 한국에서 방문한다. 초청대상은 "대한민국 지키기 불교도 총연합 (대불총"으로 19명 승려 및 재가신자들이 방문단에 포함되어 있다. 아래 글을 보면 파키스탄 방문시점에서 "작년 5월"에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었다고 적은 것으로 보아 방문시점은 역시 2012년이다.

이 답사 내용은 동국대 송재운 교수가 {간다라의 불교를 찾아서}란 제목으로 태고종 {한국불교}에 연재한 기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전재/재배포 허용). 파키스탄을 방문한 이들은 민희식씨의 "마라난타 간다라 도래설"을 굳게 믿는 분들이다.


https://www.nabuco.org/news/article.html?no=5148

".... 초청자는 카이버 팍툰카와주 정부의 문화관광부 (스포츠 관광 청소년 고고학 박물관 업무 관장) 셰드 아킬 샤 (Syed Aqil Shah) 장관이고, 초청대상자는 대불총(大佛總-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대불총’ 박희도(전육군 참모총장) 공동대표회장을 단장으로, 이건호 공동회장을 부단장으로 하여 활안(活眼). 법일(法日) 두 스님을 법주로 모시고 모두 19명이 일행이 되어 4월 27일부터 5월 3일까지 7일간 파키스탄 간다라의 불적(佛蹟)들을 답사하였던 것이다......[중략]..... 민희식 교수는 1950년대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현재까지 42번이나 간다라 지역을 답사하면서 간다라 문화를 연구하고 있는 이 방면의 권위자이다..."  송재운, {한국불교신문} 

https://www.nabuco.org/news/article.html?no=5149

간다라 예술문화협회 줄피가르 라힘(Zulfigar Rahim) 회장과 박교순 동사무총장, 그리고 관광부의 컨설턴트 몇분, 우리로 말하면 옛날 내무부 치안 담당과장 1명,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직함을 가진 분들이 나와서 우리들 목에 긴 화환을 걸어주면서 박수로 맞는 것이다. 우리 일행을 초청 한것이 카이버 팍툰카와((Khyber Pakhtunkhwa)주 정부이고 또한 연방정부도 거기에 관여 하였기에 이처럼 국빈 대우 못지 않은 영접을 하는 것이었다. 목에 걸린 화환에서는 장미꽃 향기가 코를 스치며 긴 여정의 피로를 풀어 준다.

5성급인 펄 콘티넨탈(Pearl Continental) 호텔에서 파키스탄의 첫 밤을 보내고 28일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는 맑고 덥다. 여행은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먹고 자는 것이 우선 좋아야 한다. 우리는 대접을 받는 처지였지만 이 분들의 호의로 국빈급의 경호와 숙소, 음식이 모두 일류였다. 아침 후 첫 방문지는 펀잡주 주지사의 영빈관. 모두 정장을 하고 나오라기에 왜 그러나 했더니, 이곳 주지사가 우리 한국 방문단을 환영하는 뜻으로 초청했다는 것이다.

https://www.nabuco.org/news/article.html?no=5150

점심 후 우리가 초타나호르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가 좀 지나서 이다. 초타 라호르는 마라난타의 고향이다. 그래서 찾은 것이다. 이곳의 옛 절터라고도 전해 오는 부디(Budhi) 언덕 낮으막한 평지에 우리는 자리를 깔고 준비해 온 과일을 진설하고 모두 모여서 법요식을 가졌다. 아주 정중하고 장엄하게 1600여년 전에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 스님을 기리면서 일종의 재(齋)를 올린 것이다.

이날 우리들의 행사에는 이곳 마을 주민 200여명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이곳을 ‘미라노’라고 한다며 우리를 환영했다. 오늘 날 전남 영광 법성포에는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공원을 만들고 간다라 유품관을 열었으며 간다라식 수투파 등 많은 불상을 조성해 놓고 있다. 간다라를 4번이나 방문하여 그곳 가람의 형식과 똑 같게 재현 한것이라 한다. 간다라 지역에서 가져 온 여러 불상과 조형물들도 전시되어 있다. 미라노 마을 마라난타의 고향을 떠나 우리가 페샤와르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가 지나서 였다.


자, 파키스탄은 민희식씨나 혹은 한국에서 온 방문자들을 어떤 이유에서 "환대"한 것일까? 그것도 학술단체로 보기 힘든 "대한민국 지키기 불교도 총연합" 같은 민간단체를 초대해서 말이다. 

민희식씨 등의 설명에선 왠지 "학술적"인 이유인 듯 보인다. 그러나 현지 신문의 기사를 통해 보면 "환대"의 이유는 "한국 관광객 유치"가 그 핵심이며, 지방정부도 한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관광사업 유치를 목표로 파키스탄 중앙/지방정부에서 한국에서 온 "이해관계자"들을 "융숭히 대접"한 것을 두고 "국빈으로 대접 받았다"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https://imnews.imbc.com/news/2012/culture/article/3071435_31052.html

한국 측 방문에 대한 답방 차원에서 2012년 5월 30-31일 파키스탄 카이버박툰카와 주정부의 셰드 아킬 샤 문화관광장관이 전남 영광의 불갑사와 마란난타 유물관, 만불전, 법성포의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불사" 등을 논의 하기도 했다.

이듬 해 2013년 4월에 있었던 전남 영광군 관계자들의 방문기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news.joins.com/article/11191144

https://news.joins.com/article/11320831

"[영광=뉴시스] 맹대환 기자 = 전남 영광군은 정기호 군수가 파키스탄 키베르 팍툰크와 주정부 초청으로 13일부터 21일까지 군의원 1명, 관계 공무원 등 5명과 함께 백제불교문화의 원류인 간다라 지방을 방문한다고 10일 밝혔다.......이번 방문은 한-파키스탄 우호교류 45주년 및 수교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4일 파키스탄 국립예술원에서 마라난타의 일생을 조명하는 리셉션에 영광군수를 초청한데 따른 것이다. 영광군과 파키스탄은 지난 2000년 4월 파키스탄 초청으로 첫 방문을 시작으로 금번이 공식 일정으로는 두 번째 방문이다. 파키스탄은 지난 2008년 9월에 파키스탄 관광청장과 대사 등 5명이, 2012년에는 파키스탄 키베르 팍툰크와 주정부의 문화관광장관 및 간다라문화예술협회장 등 8명이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와 불갑사 등을 방문하고 정 군수와 면담을 갖는 등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영광군을 방문한 바 있다. 

정 군수 일행은 이번 방문을 통해 유네스코에 등록된 간다라 고대유적의 관광자원화 사례를 살펴보고 마라난타존자의 고향 조타라호르와 간다라 최대 문화유적을 보유하고 있는 키베르 팍툰크와 주를 방문해 문화교류 방안을 협의 할 계획이다."

정리한다면, 파키스탄 중앙/지방정부는 민희식씨를 (간다라 문화 연구의 권위자라기 보다는) "간다라 지역 한국 관광객 유치"란 목표를 위한 (+ 아마도 한국 측 지원금 조달) 가교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민희식씨 역시 자신의 "연구"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관광유치"는 좋은 미끼였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간의 윈-윈 Win-Win 이라고나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2012년 민희식씨의 답사 때 수행한 관광회사 이름도 "윈-윈관광"이다)

이를 아주 깔끔하게 전한 한국 신문기사 두 개만 옮기겠다.


아무튼 2016년 무렵까지 한국 측 지자체 사업은 아래와 같이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사실 파키스탄 정부는 민희식씨의 "예수 불자론"의 핵심을 제공한 19세기 말 서북인도 발 이슬람 이단 "아마디야 이슬람"을 이슬람 조차 아닌 이교도로 간주해서 탄압한다. 그런 파키스탄 정부가 "예수는 10대 말부터 서른 즈음까지 간다라에서 불교를 공부했으며, 십자가 사건이 있은 후엔 간다라로 와서 해로하고 죽은 불교도였다"는 식의 민희식씨의 "연구"를 지지해서 과연 그를 '국빈' 대접할까? 파키스탄 정부나 학계 인사들이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럴리가?), 설령 알더라도 관광사업 추진차원에서 아마 그 부분은 그냥 묵인한 것은 아닐까?



# 민희식씨의 {법화경과 신약성서}는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출판되었다?

"1986년 출판된 {법화경과 신약성서}이 원래 프랑스에서 UNESCO의 지원을 받아 출판한 것이고 국내에서는 26판이 발간된 바 있다"란 주장은 어떨까? 

유네스코?

보통 "유네스코"라고 하면 국제연합 UN 산하의 유네스코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보통 개별국가 차원에서 활동하는 "유네스코"는 유엔산하 단체가 아니라, "유네스코"에 가입한 국가에서 자체적으로 설치한 각국의 "유네스코 위원회 National Commissions for UNESCO"다. 

가령,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대한민국이 유네스코 활동에 관한 법률 제7조에 의거 설치한 독립된 위원회이며, 유엔 유네스코의 직속기관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율적으로 설치한 위원회일 뿐이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프랑스어 사용권 국가들에게 한국의 역사, 문화 등에 대한 정보와 연구 동향을 소개하고, 해외 한국학 연구를 지원할 목적으로 1969년 6월 프랑스어 일년에 두번 출간되는 {Revue de Coree 레뷔 드 코레}란 잡지를 창간했는데, 그 잡지에 민희식씨가 종종 글을 실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불어 사용 국가에 본격적인 한국문화 소개서가 될 불어판 계간지 『레뷔·드·코레』창간호를 냈다. 4×6배판 50여 면의 이 잡지는 유네스코 동서문화 가치 상호평가의 일환으로 문화 소개에 역점을 두고 발간한 최초의 정기 간행물. 창간호의 내용을 보면 전해종 교수의 ‘동서사상의 충돌’, 장덕순 교수의 '한국현대문학 속의 전설’, 이선근 교수의 ‘1860~1919년의 한국의 사상’, 백현기 박사의 ‘한국의 사회구조와 교육에 미친 그 영향’ 등 충실한 논문과 민희식 교수의 춘향전역, 국보급 도자기 천연색 사진과 음악 관계 기사가 들어있다.-- 『경향신문』 1969.6.11.

"프랑스"에도 "프랑스 유네스코 위원회 Commission nationale française pour l'UNESCO"가 있고, 뒤에서 말하겠지만 민희식씨 설명에 등장하는 그 "유네스코"는 "프랑스 유네스코 위원회"다.


프랑스 "유네스코 (위원회)"와의 관련은 2012년 4월 23일 자 {현대불교}의 기사에 이렇게 등장한다. 민희식씨 본인의 설명을 들어보자. (http://buddhisttimes.org/board2/olden/article7.html)

“불문학도였으니 50년대 프랑스 유학을 가서 서구 문명을 접하게 됐어요. 저도 거기서 불문학 공부를 해야 했으니 성경을 읽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느낀 게 그쪽 사람들은 자국 문화에 자부심이 아주 크다는 거였어요. 그때 깨달았죠. 서양 것을 알기 전에 우리 것을 먼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하지만 한국에 연락을 해도 우리나라 사정이 워낙 안 좋아 책을 구하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담당 교수한테 어려움을 토로했더니 그곳의 국립도서관에 가서 찾아보라고 하더라고요. 거기서 동양문화를 공부할 수 있었죠”

이후
 그는 유네스코의 추천을 받아 한국 관련 책을 쓰게 된다. 당시 유네스코 측에서 참고서적으로 동양문고 총서를 건네주었는데 거기에는 중국 인도 등 동양 각 국의 문화 철학 관련 서적 25권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를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게 해주는 책 한 권을 만나게 된다. 바로 〈법화경〉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돼 그는 불문학자이자 종교학자로 자리매김하는 아주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 {현대불교} 2012년 4월 23일,  정혜숙 기자

"유네스코의 추천을 받아" 썼다는 "한국 관련 책"은 무엇일까? 혹시 "예수 간다라 유학설", "예수 카쉬미르 이주설", 혹은 "마라난타 간다라 도래설" 같은 것일까? 혹시 프랑스유네스코에서 지원(?)받은 25권의 동양 관련 참고서적 지원을 "유네스코의 지원"이라 말하는 것일까? "건네받았다"는 건 또 무슨 뜻일까?

2020년 11월 17일 불교매체 {월간금강}의 설명도 유사한데 약간 결이 다르다. 여기선 1986년 판 {법화경과 신약성서}가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출간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읽어보자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179)

민 박사는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불어로 번역된 불경(佛經)과 성경 공부에 심취했다. 불교와 기독교를 공부한 이유는 당시 미쉘 위똘이라는 교수가 현대불문학 강의를 하면서 “전공 공부를 할 땐 항상 다른 공부도 같이 하라.”고 조언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아침 경서(經書)를 정독할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그런데 아침마다 성경을 읽었지만 갈수록 늘어가는 의문에 쉽게 답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유네스코의 추천을 받아 한국 관련 책을 쓰게 됐다당시 유네스코 측에서 참고서적으로 동양문고총서를 건네주었는데 인도·중국 등 동양 각국의 철학·문화 관련 서적 25권이었다. 그중에 〈법화경〉이 있었다. ,...[중략]... 민희식 박사는 귀국 후 불경과 성경의 공통점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학계와 종교계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오히려 모두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 일부 종교인들은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고 비난했다. 그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연구를 계속했다. 1986년 펴낸 그의 대표작 〈법화경과 신약성서〉는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출간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법화경〉을 역해(譯解)해 신약성서의 뿌리가 된 부분들을 찾아 제시했다. 또 부처와 예수의 닮은 점을 살폈다. 이 책은 유럽의 성서학자는 물론 국내 학계와 종교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민 박사는 이후 기독교인으로부터 “죽여 버리겠다.”는 살해협박도 많이 받았다. 특히 〈법화경과 신약성서〉와 2008년 출간한 〈성서의 뿌리〉는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귀에 거슬리는 내용이 많았던 모양이다. 기독교계에서는 수년 간 이 책들을 수거하고, 파기·처분했다. -- 출처 : 격월간 <금강> 2020년 11월 17일, 조용주 기자

이 기사 뒷부분의 과장된 내용은 일단 무시하자. 그나저나 2012년 {현대불교}의 기사와 2020년 {금강}의 기사의 "유네스코의 추천을 받아 한국 관련 책을 쓰게 됐다당시 유네스코 측에서 참고서적으로 동양문고총서를 건네주었는데 인도·중국 등 동양 각국의 철학·문화 관련 서적 25권이었다."는 정확하게 똑같으니 놀랍다. 두 기사의 간격이 8년인데, 게다가 기사를 작성한 기자도 다른데 말이다. 게다가 2020년 조용주 기자 버전은 2012년 기사에서 "진화"까지 되었다. 2021년 {현대불교} 기사에서 민희식씨가 "유네스코에서 책을 건네 받고 거기서 {법화경}을 운명적으로 만난 건 그가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시절"이다. 즉, 1회 사건이다. 그런데 2020년 기사에선 마치 이 "사건 뒤"인 1986년에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법화경과 신약성서}를 쓴 것 처럼 기술해 놓았다.



사실 1986년 판 {법화경과 신약성서}는 프랑스에서 출판된 것도 아니고, (어느 사칭자 블로그의 정보처럼 그 책의 국내 28판이 나왔단 정보는 국립도서관 서지정보에도 없다. (28쇄라면 또 모르겠다). 그 책의 출판이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았다"는 설명을 덥썩 물기 전에, 민희식씨 본인이 그 "유네스코의 지원"에 대해 1986년 판 {법화경과 신약성서} 서문에 직접 적은 내용부터 찾아보길 바란다.

"..나는 프랑스 유학 시절 프랑스 문학을 연구하면서 방학 때 시간이 있을 때는 가리 말 출판사에서 나온 동양문화 총서를 즐겨 읽었다.이 책들은 내가 프랑스에서 한국시집을 출판하기 위하여 유네스코 (UNESCO) 에 갔을 때 기증받은 것이다 . 중국, 일본의 문학 에 관한 책도 재미 있었지만 인도 문학 의 쟈타카나 라마야나, 마하바라타는 특히 감동적 이었다 ....."  ---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 1986년

즉, 그의 약력이나 기사 등에 등장하는 식으로 "민희식씨의 불교/법화경"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장서를 지원"한 것이 아니라, 유학 시절 프랑스 유네스코 위원회 (행사)에서 기증받은 책들을 읽다가 {법화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나중에 {법화경과 신약성서}를 집필했다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 (1) 프랑스 유학시절
  • (2) 한국시집을 프랑스에서 출판하러 ("...유네스코의 추천을 받아 한국 관련 책을 출판하게 된다...."란 진술의 정확한 의미) 
  • (3) 유네스코(프랑스위원회)에 들렀을 때 얻어온 
  • (4) 프랑스 가리말 (= 아마 갈리마르 Gallimard) 출판사의 동양고전총서 25권,

결국 이게 "유네스코의 지원"인 셈이다.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계시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내가 이 블로그에서 이슬람과 관련해 쓰는 글에 인용되는 {코란} 내용은 내가 블루밍턴의 모스크에 초대받아 방문했을때 이맘에게서 선물받은 {코란}을 사용한 것이다. 

이 {코란}은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 종교청의 지원으로 해당 모스크가 구입한 것인데, 그럼 내 블로그는 '사우디 아라비아 종교청의 지원'으로 운영된다고 말해야 할까?



# 민희식씨는 프랑스 정부 초빙 국빈 자격 혹은 정부 초빙으로 중근동·간다라 역사문화연구 중이다?


아래 블로그를 방문해 글을 읽어보자.


오, 아래 블로그는 대놓고 내 이름을 사칭한 사칭자의 블로그!


물론 민희식씨가 {법화경과.....} 나 {성서의 뿌리}, 그리고 마라난타에 대한 수많은 책을 쓰며 중/근동 및 간다라 문화와 역사를 "연구"했다고 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작업을 프랑스 "정부"의 심지어 "초빙"으로 수행한 것일까?

또 다른 기사를 보자.

[인터뷰] 간다라 본격 연구 민희식 교수 (2001년 중앙일보)
https://news.joins.com/article/4126914

"....보다 본격적으로 접근한 곳이 파리 국립도서관의 문헌실이다. 제국주의 시절 동양의 중요한 문헌들을 가져다 잔뜩 모아놓은 곳. 그러기를 6년,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귀국길에 처음으로 파키스탄 간다라 지방을 찾았다. 프랑스 정부에서 준 귀국 비행기 티켓을 몰래 되팔았다. 당시 비행기 티켓은 지금 가치로 1천만원대에 이르렀고, 그 돈이면 파키스탄을 돌아보고 배편으로 귀국하기에 충분했다...."

민희식씨는 플로베르 소설로 "문학박사"를 받은 후 막바로 귀국했으며, 그 귀국길에 간다라를 들러왔을 뿐이다. 물론 거기서 발굴 같은 걸 한 적은 분명 없을 것이다.

  • 프랑스 정부장학금을 받는 유학생에게 프랑스 정부가 귀국길에 비행기표를 사주면 그것으로 "프랑스 국빈"이 되는 것일까?
  • "프랑스어 도서를 100권 이상 번역"한 공로로 "학술공로훈장"을 수여받으면 "프랑스 국빈"이 되는 것일까?

혹시 "국빈"이라면, 프랑스 정부가 민희식씨의 프랑스 방문 때 어떤 대우를 해주는지 누군가 알려주시면 나의 의심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불교 잡지인 {월간 금강}에 2020년 11월에 실린 인터뷰에는 민희식 교수의 경력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179

"....민희식 박사는 불경과 성경 이외에도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간다라 지역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했다. 2008년경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ez Musharraf) 파키스탄 대통령을 예방했는데, 무샤라프 대통령은 그에게 동서양 문화교차의 중심지였던 간다라·스와트·탁트히바이·라호르 지역의 고고학적 문화재 발굴 및 연구 프로젝트를 맡겼다. 그는 페샤와르 국립박물관(Peshawar Museum) 등 5개 박물관과 함께 고고학 연구 활동을 펼쳤다. 또 프랑스·이스라엘 정부 초빙으로 양국 고고학발굴단을 이끌고 이스라엘·터키·이집트 등에서 발굴 및 연구조사도 진행했다....."

솔직히 2008년 실각해 영국으로 망명한 무샤라프 대통령이 민희식씨에게 간다라와 주변 일대의 "발굴 연구 프로젝트"를 "맡겼다"는 말은 또 어떻게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열정을 가진 한 동양의 교수에게 한번 잘 해보시라는 대통령의 덕담을 아전인수로 해석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실각/망명하기 전 무샤라프가 민희식씨에게 뭔가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맡긴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 정도 대사업을 민희식씨가 파키스탄 독재자에게 직접 수주했다면, 파키스탄 학계, 한국 학계, "정규"언론, 혹은 파키스탄 박물관 정보에 기사가 검색되어야 정상이 아닐까? 고고학자도 아닌 불문학자 출신의 재야연구자가 파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한 단독 딜을 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중립적이고 객관적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은 민희식씨의 책, 인터뷰, 그리고 그의 책들을 광고하는 블로그에만 등장한다. 

진실은 이미 파키스탄 현지 신문기사에 대체로 잘 설명되어 있지 않은가. 민희식씨가 "현지답사"를 가서 박물관 관계자와 고고학자들의 설명을 받은 것을 두고 "지역의 고고학 발굴"을 주도했거나 혹은 "협업"한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민희식씨와 그의 불교 관련 저작들을 "허위광고"하고 있는 "해방1신학 전도사"란 블로거의 블로그에 기사형식으로 실은 {성서의 뿌리 저자 민희식 박사 프랑스-파키스탄 공동 발굴단 이끌다} 란 포스팅을 한번 보자.

https://blog.naver.com/ecclesiastee/10186235132

요약한다면, 민희식씨는 (1) 유럽에서 활동하며, (2) 프랑스-파키스탄 공동발굴단을 이끌었고 (3) 이 발굴작업에는 민희식씨의 "프랑스 제자"들이 참가했고 (4) 심지어 "목사"인 민희식씨의 아들도 참가했다. 

모두 허위 혹은 과장이다. 왜? 민희식씨의 활동지는 (간다라 답사를 위한 파키스탄 등지 방문을 빼면) 주로 한국이고, (2) 공동발굴단을 "이끈"게 아니라 간다라 지역을 지역 박물관 학자들과 "답사"한 것이며, (3) 파키스탄 측 주요 연구자인 아슈라프 칸과 몇몇 파키스탄 측 학자들이 "프랑스에서 고고학 학위"를 한 것이지 이들이 "민희식씨의 프랑스 제자"인 것도 아니며, (4) 민희식씨의 아들이 "목사"라는 건 출처불명이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 간의 자료에서도 민희식씨의 아들이 언급된 걸 읽어본 적이 없다).  



# 민희식씨는 프랑스-이스라엘 고고학 발굴단을 중동에서 이끌었다? 

 더 놀라운 주장도 있다.

불교 잡지인 {월간 금강}에 2020년 11월에 실린 인터뷰에는 민희식 교수의 "학문적 성취"에 대해 또 다른 놀라운 진술을 하고 있다. "또 프랑스·이스라엘 정부 초빙으로 양국 고고학발굴단을 이끌고 이스라엘·터키·이집트 등에서 발굴 및 연구조사도 진행했다"는 것이다.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179
"....민희식 박사는 불경과 성경 이외에도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간다라 지역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했다. 2008년경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ez Musharraf) 파키스탄 대통령을 예방했는데, 무샤라프 대통령은 그에게 동서양 문화교차의 중심지였던 간다라·스와트·탁트히바이·라호르 지역의 고고학적 문화재 발굴 및 연구 프로젝트를 맡겼다. 그는 페샤와르 국립박물관(Peshawar Museum) 등 5개 박물관과 함께 고고학 연구 활동을 펼쳤다. 또 프랑스·이스라엘 정부 초빙으로 양국 고고학발굴단을 이끌고 이스라엘·터키·이집트 등에서 발굴 및 연구조사도 진행했다....."

"불문학" 전공자에게 설마 그럴 리가. 도대체 언제 그런 일을 하셨다는 걸까? 고고학 학위가 전무한 불문학자에게 프랑스와 이스라엘 정부가 쟁쟁한 자국의 발굴단들을 "지휘"하도록 했다는 말인가?

진위? 민희식씨는 학위 마친 후 유럽에서 활동하지 않았으며, 고고학자 였던 적도 없거니와, 심지어 이스라엘이나 프랑스 정부 초청으로 두 나라 "고고학발굴단"을 이끈 적도, 이스라엘, 터키, 이집트 등지에서 발굴이나 연구를 한 적도 없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사실 10년 전에 민희식씨 {성서의 뿌리}를 광고하던 블로그 등에선 민희식씨가 이집트, 이스라엘, 터키, 이라크 등을 직접 답사해서 그 책을 썼다는 식의 광고가 대부분이었다가 2014년 무렵 부터 아예 민희식씨가 "발굴 고고학자였다"는 주장이 등장했던 것 같은데, 그때 혹시 몰라서 2010년 소위 "아크나톤 18계명" 확인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2명의 미국인 이집트 룩소르 발굴고고학자와 2인의 (꽤 유명한) 이스라엘 고고학자 2인에게 혹시라도 그 무렵 이스라엘-프랑스 연합 발굴단을 이끈 민희식 이란 이름의 "고고학자"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지 물어 봤었다.

이미 나를 통해 "아크나톤 18계명이 모세 10계명의 원전"이다란 주장을 민희식씨가 한국에서 펼치고 있다는 점을 들었던 그들이 내 질문에 뭐라고 답했는지는..... 도저히 민망해서 굳이 여기 적지 않겠다.

자, 그럼 이제부터'전설의 고향'보다 더 무서운,본편으로 들어가겠다.



草人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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