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종교|철학

[© 최광민] 예수 vs. 붓다 #5: 예수와 기독교 교부들은 윤회와 환생을 가르쳤을까?

草人! 2022. 8. 7. 11:06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9-03-02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모든 글과 번역문 들에 대해 (1) 복제-배포, (2)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 (3) 화면캡처를 금하며, (4) 인용 시 글의 URL 주소 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예수 vs. 붓다 #5: 예수와 기독교 교부들은 윤회와 환생을 가르쳤을까?

요약

AD 1-4세기의 기독교 교부들, 심지어 예수 본인이 "플라톤 철학" 혹은 "불교"발 윤회/환생이론을 믿고 가르쳤다는 속설들이 역사적, 문헌적 증거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 막연한 "추론"임을 {복음서}들과 교부들의 글 원전을 직접 인용하면서 살펴본다.

순서
  1. 톨레. 레게.
  2. 어떤 주장
    1. 이상훈, {X-바이블}
    2.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
  3. 세례자 요한
  4. 예수와 베드로
  5. 유대교 바리새파 (Φαρισαῖοι 파리사이오이)와 바울
  6. {에녹서} (제 1 에녹)
  7. 요한, {요한계시록}
  8. 순교자 유스티노스
  9.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10. 루그두눔 주교 이레네우스
  11. 로마 사제 히폴리투스
  12.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13.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
  14. 히에로니무스
  15. 히포 주교 아우구스티누스
    1. 정리

      § 톨레. 레게.

      AD 4/5세기에 활동했던 북아프리카 출신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에서 우선 인용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책을 중2 때 처음 읽었을때, 이 장면이 내겐 가장 인상깊었다.


      http://archive.org/stream/confessionsofsta00auguuoft?ui=embed#page/n7/mode/2up

      I cast myself down I know not how, under a certain fig-tree, giving full vent to my tears; and the floods of mine eyes gushed out an acceptable sacrifice to Thee. And, not indeed in these words, yet to this purpose, spake I much unto Thee: and Thou, O Lord, how long? how long, Lord, wilt Thou be angry, for ever? Remember not our former iniquities, for I felt that I was held by them. I sent up these sorrowful words: How long, how long, “tomorrow, and tomorrow?” Why not now? why not is there this hour an end to my uncleanness?

      (전략)...."오, 주님,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 언제까지 제게 진노하실 겁니까? 영원히 그리하실 겁니까? 예전에 지은 죄는 그만 잊어주십시오. 저도 그 죄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압니다." 저는 이 말을 고통스럽게 내뱉었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입니까? 내일, 내일이면 되겠습니까? 왜 지금은 안됩니까? 왜 지금 이 순간에 제 죄를 씻어주시지 않습니까?" / 번역: 최광민

      So was I speaking and weeping in the most bitter contrition of my heart, when, lo! I heard from a neighbouring house a voice, as of boy or girl, I know not, chanting, and oft repeating. ‘Take up and read; Take up and read.’ [’Tolle, lege! Tolle, lege!’] Instantly, my countenance altered, I began to think most intently whether children were wont in any kind of play to sing such words: nor could I remember ever to have heard the like. So checking the torrent of my tears, I arose; interpreting it to be no other than a command from God to open the book, and read the first chapter I should find…

      그렇게 가슴 속 고통 가운데서 말하며 울고 있을때, 이웃에 사는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모를 아이가 내가 모르는 어떤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 톨레, 레게! 톨레 레게!". 순간 제 안색이 변하면서 그런 노래를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던가를 생각해 보았지만, 그 노래를 예전에 들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퍼붓는 가운데 일어나 이것이 성서를 펴고 제가 찾은 첫 장을 읽으라고 당신이 명령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번역: 최광민

      Eagerly then I returned to the place where Alypius was sitting; for there had I laid the volume of the Apostle when I arose thence. I seized, opened, and in silence read that section on which my eyes first fell: ‘Not in rioting and drunkenness, not in chambering and wantonness, not in strife and envying; but put ye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make not provision for the flesh, in concupiscence.’ [Romans 13:14-15] No further would I read; nor needed I: for instantly at the end of this sentence, by a light as it were of serenity infused into my heart, all the darkness of doubt vanished away.”1

      성급히 알리피우스가 앉아있는 자리로 돌아왔는데, 제가 사도 바울의 편지를 거기에 놓아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편지를 집어 펼친 후 눈에 가장 먼저들어온 곳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3:14-15]. 더 읽지 않았고, 더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문장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한 고요한 빛이 제 가슴 속에 파고들며 모든 의심의 어듬이 사라졌습니다.... / 번역: 최광민

      --- Aurelius Augustine, The Confessions of St. Augustine, translated by Edward Pusey. Vol. VII, Part 1. The Harvard Classics. New York: P.F. Collier & Son, 1909–14; Book Eight, Chapter 12, Paragraphs 27-28. 번역: 최광민

      오랫동안 깊은 고뇌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를 해방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철학과 수사학을 어려서부터 연마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익숙했던 현란한 사변도, 교묘한 논리도, 격정적 논쟁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논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철학적 사유와 추론과 논리부터 들이미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논리는 증명의 형식이지 증명 자체는 아니다. 더구나 근거자료에 바탕하지 않았음에도 정교한 논리로 무장한 사유는 언뜻 웅혼해 보일지는 모르나, 종종 한낱 판타지로 결론나기 쉽다. 그래서 증명에 있어 "사실확인"이 모든 종류의 '사유'에 앞서는 것이다.  잘못된 내용에 바탕한 정교한 논리로 대체 무엇을 "증명"하겠다는 것인가?  이것을 증명이라고는 부를 수 있을까?

      사실 현란한 논리와 방대한 사유체계의 도움없이도, 그저 책상에 앉아서 1차자료를 꼼꼼히 읽어보는 것만으로 증명이 충분할 때가 많다. 그러니 격렬한 논쟁에 앞서 원 자료부터 찾아 읽어볼 일이다.

      에베레스트산이 '존재'하는 것을 '증명'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가서 그 산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주장이 어떤 '텍스트'에 등장한다는 주장을 '증명'하거나 혹은 '반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란한 논리를 통한 논증이 아니라 그냥 그 텍스트를 펼쳐서 들여다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권한다.

      논쟁에 앞서,
      타당한 자료를 먼저,

      집어서. (톨레)
      읽어라. (레게)




      § 어떤 주장

      구글 검색 결과를 우선 살펴보자. (링크)


      구글 검색

      이 내용들은 안티-기독교를 표방하는 단체 (가령, 반기련) 등에서 즐겨 사용하는 이상훈 편저 {X-Bible}이란 문건의 {전생과 윤회에 대하여}란 한 장에서 복사되어 계속해서 유포된 것으로 보이는데, {X-Bible}이란 이 문건은 다시 "전생최면치료요법"을 시술한다는 정신과 의사 김영우씨의 책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 및  서울 답십리에 본부를 둔 기독교 이단 의중교회/의중신학교의 창설자이자 "참 예수"인 천수남씨 (필명: 둘로스 데우 C)의 {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 란 두 책에서 내용을 가져온 듯 싶다. 그러나 대체로 천수남씨의 주장을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천수남씨에 대해서는 두 링크로 대신한다.


      일단 모든 논의에 앞서 무엇보다 용어의 정확한 사용이 중요하다. 위의 주장들은 "윤회", "환생", "소생", "부활" 같은 용어들의 의미를 뒤섞어 사용하고 있다.

      "윤회"란 "계속해서" 다른 육체로 거듭해 "태어나는 것", 즉 "환생"하는 것을 말한다. "부활" 혹 "소생"이란 죽은 자 본인이 자신의 자의식을 가지고 (혹은 동일한 영혼을 가지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즉, 윤회/환생"은 "다시 아기로 태어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부활/소생"은 그렇지 않다. 초기 기독교가 전파된 그리스/로마/이집트/북아프리카 지역의 사람들은 전자의 환생/윤회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기독교의 '부활' 개념을 배척했다.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럼 이 {X-바이블} 무료배포판 (http://xbible.com.ne.kr)을 통해 그 주장의 근거를 파악해 보도록 하자.

      뒤에서 개별적으로 자세히 다루겠지만, 우선은 위 문건들의 내용 가운데 "틀린" 내용들은 미리 "붉은 색"으로 강조하겠다.  이 틀린 내용들은 저자(들)이 해당 내용을 원전을 읽지 않고 피상적으로만 이해한데다가 역사를 엉터리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X-바이블}이란 문건의 해당단락을 한번 읽어보자.

      예수의 가르침 이후 초기 기독교에서 윤회와 환생은 정식으로 인정되던 교회신학의 일부였다. 서기 2세기경 로마에 최초의 기독교학교를 설립했던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는 환생을 가르쳤고, 그리스의 신학자 오리게네스(Origenes)와 성 히에로니무스(St. Hieronimus),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도 환생설을 가르쳤다. 당시의 크고 강력했던 기독교 종파인 그노시스파(영지주의)와 마니교도들도 윤회설을 가르쳤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 역사의 약 400년간 환생설은 보편적인 가르침의 일부였다. 그러나 종교와 권력이 결탁하면서, 개인적인 노력과 발전으로 영혼의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와 황제의 권위가 무너진다는 정치적 우려에 따라 윤회를 가르치던 당시의 용어인 '선재론(先在論)'의 개념이 교회신학에서 삭제되었다.

      서기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80?∼337)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신약성경에 실려 있던 윤회에 대한 언급들을 없애기로 결정하여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모든 복음서에서 환생을 암시하는 구절들을 완전히 삭제해 버렸고, 6세기경 동로마제국의 폭군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는 독단적으로 윤회설을 이단이라고 결정하고, 553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환생사상을 가르쳤던 오리게네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황제와 그의 아내는 윤회사상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서로마제국에서는 오리게네스의 윤회설이 널리 퍼져 인정받고 있었다. 황제는 동로마의 승정 159명을 초대하고 서로마로부터는 6명의 승정만을 초대해 공의회를 열었고, 당시의 교황은 동서 로마가 같은 수의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으면서도 공의회에 불참한 뒤 그 회의에서 결정된 윤회설의 이단 규정과 오리게네스의 파문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세기 이후 환생설을 신봉하던 교파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면서, 기독교가 지배하던 서양에서는 환생설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注1]

      그러나 환생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이단으로 몰렸던 교파들의 신앙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르네상스 시대에 잠깐 지성인들의 관심을 끌었다가 곧 잊혀진 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운동으로 이어지며 기존의 기독교 교리에 도전하게 되었다. 신지학자들은 불교와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연구하여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과 조화시키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후략] ...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거대해진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라즈니쉬가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콘스탄틴황제이다"라고 까지 했을까?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는 진리를 왜곡한 대죄인이다. 예수님도 그 자신의 진리가 오늘날 이토록 왜곡된 데 대해 통탄하고 있지 않을까? 비록 Bible의 내용 중 윤회, 전생에 관련된 구절을 다 삭제했다고 했으나 둘로스 데우·C(본명:천수남)의 저서 <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를 보면 아직도 삭제되지 않고 용케 살아 남아 있는 구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둘로스 데우·C는 그 자신이 기독교 보수신학을 나온 목회자라서 다른 목사들의 분노가 거셀 것이라 염려하면서도 하나님을 거룩한 진리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로 인하여 오염되거나 하나님의 참뜻이 왜곡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 글을 썼다고 머리글에서 그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 내용을 한 번 살펴 보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사후세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과 내생이 있다는 것은 의심 없이 믿고 있으나 전생이 있다는 것은 모두 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만사에는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뿌리 없는 나무도 없듯이 전생이 있기 때문에 가는 곳이 있는 것이며 전생이 있기 때문에 현생과 내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기독교인들은 외면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전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회들이며 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전생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중략]

      엘리야(요한)같은 선지자도 영혼의 완성을 위해 환생해 오는 마당에 우리같은 범부가 단 한 번의 삶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은 교만함과 더불어 영적세계를 전혀 모르는 무식의 소치가 아닌가? 석가모니도 여러 번 환생한 끝에 부처가 된 마당에 우리 인간의 불완전한 영혼이 어떻게 단 1회의 경험만으로 완전해질 수 있겠는가? 또 단 한 번뿐인 기회를 주고서 그 시기에 예수를 믿은 사람은 구원이 되고 안 믿은 사람은 영원히 지옥에 보낸다는 게 합리적인 이야기인가? 그러면 기독교나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믿음의 기회조차 접하지 못한 채 훌륭한 삶을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은 다 지옥에 가 있단 말인가? 만약 인간에게 전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각자마다 부귀빈천의 운명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평생 고난 속에 사는 사람들은 '욥'처럼 하느님이 시험해서인가?  --- 이상훈, {X-바이블} 무료배포판, [전생과 윤회에 대하여]

      이 짧은 글 안에 이렇게 많은 오류가 자리잡고 있다. 윤회와 환생을 가르친 초기 기독교 교부 유스티노스?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히에로니무스? 아우구스티누스? 몹시 흥미로운 주장들의 나열이다. 위에 하이라이트한 내용들이 왜 (1) 틀렸거나 (2) 근거가 없는 것인지는 이어지는 장에서 이들 교부들이 정말로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길 바란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위의 진술이 왜 틀린 것인지, 역사적 사실은 무엇인지 일단 간단하게만 짚어보고 넘어가겠다. 위의 주장을 펼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오리게네스의 "영혼선재설"이 정확히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을 뿐더러, 오리게네스의 "영혼선재설"이 "윤회/환생설"인양 착각하고 있다.

      이들의 "틀린" 진술 ([오류])과 "사실"([팩트])을 대비해 보겠다.

      • [오류] 예수의 가르침 이후 초기 기독교에서 윤회와 환생은정식으로 인정되던 교회신학의 일부였다. 
        • [팩트] 환생/윤회에 관한 언급을 남긴 AD 2-5세기의 초기 기독교 교부들 전부는 (피타고라스/플라톤 철학의) 윤회/환생설을 거부했고, 윤회/환생설은 "정식"으로 "이단" 및 "이교"설로 치부되었다.
      • [오류] 서기 2세기경 로마에 최초의 기독교학교를 설립했던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는 환생을 가르쳤고, 그리스의 신학자 오리게네스(Origenes)와 성 히에로니무스(St. Hieronimus),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도 환생설을 가르쳤다
        • [팩트] 유스티노스,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히에로니무스, 아우구스티누스 전부는 윤회/환생설을 "비판"하고 대신 기독교의 "부활"을 옳은 교리로 가르쳤다. 이들은 다만 그들의 저작들 속에서 기독교의 "부활"을 설명하면서 피타고라스/플라톤 철학 및 이교의 "윤회/환생설"을 대비시켰을 뿐이다.
      • [오류] 이처럼 초기 기독교 역사의 약 400년간 환생설은 보편적인 가르침의 일부였다. 
        • [팩트] 윤회/환생설은 초기 400년 간에도 이미 "보편적"으로 기독교와 무관한 "이단" 혹은 "이교"의 교리로 간주되었다.
      • [오류] 그러나 종교와 권력이 결탁하면서, 개인적인 노력과 발전으로 영혼의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와 황제의 권위가 무너진다는 정치적 우려에 따라 윤회를 가르치던 당시의 용어인 '선재론(先在論)'의 개념이 교회신학에서 삭제되었다.
        • [팩트] 기독교 초기 신학자 몇몇, 특별히 오리게네스와 그 후학의 이론인 "영혼선재론"은 "윤회/환생설" 혹은 "영혼전이설" 과 전혀 무관한 개념이다. 필자(들)은 두 개념을 계속해서 착각하고 있다. 오리게네스의 "영혼선재설"에서 영혼은 인간의 탄생 전 어느 시점에 신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지, 전생의 사람이나 다른 생명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 [팩트] 오리게네스의  "영혼선재론"  이미 그 전부터 교부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비판을 받고 있었다. 황제의 정치적 고려는 이집트 단성파와 화해를 모색해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었다. 물론 황제가 화해를 시도한 이집트/시리아의 단성파나 황제가 박해한 동방의 양성파 네스토리우스파는 윤회/환생을 믿지도 않았다. 
      • [오류] 서기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80?∼337)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신약성경에 실려 있던 윤회에 대한 언급들을 없애기로 결정하여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모든 복음서에서 환생을 암시하는 구절들을 완전히 삭제해 버렸고, 
        • [팩트] 니케아 공회의에서는 윤회/환생에 대해 아예 다룬 바가 없으며, 복음서에서 관련 구절을 삭제한 적도 없다. 아울러 콘스탄티누스는 이 건에 전혀 개입한 적이 없다. (콘스탄티누스는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에게 콘스탄티노플에서 사용할 성서 사본의 필사를 요청한 것이지, 사본의 조작을 지시한 것이 아니다.)
      • [오류] 6세기경 동로마제국의 폭군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는 독단적으로 윤회설을 이단이라고 결정하고, 553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환생사상을 가르쳤던 오리게네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황제와 그의 아내는 윤회사상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을 신격화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 [팩트] 유스티니아누스는 "윤회" 혹은 "환생"에 대해 말한 적 없다. 그는 양성파와 오리게네스의 교리를 정죄하는 공회의를 소집하고 그 결의사항을 시행한 것이다. 이 회의는 2년 전에 있었던 지역회의에서 양성파 네스토리우스파에 속하는 신학자 3명 (몹수에스티아 주교 테오도레토스, 키로스 주교 테오도레토스, 에뎃사 주교 이바스) 저작 몇몇을 정죄한 내용을 재확인하고 오리게네스의 몇몇 이론을 정죄한 것인데, 이들 네스토리우스를 비롯한 양성파는 시리아 안티오키아에 기반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나 오리게네스는 윤회나 환생을 가르친 적이 없다.  
        • [팩트]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의는 오리게네스의 이론을 정죄했지만, 정죄된 내용은 윤회/환생설이 아니라 오리게네스의 (1) 영혼선재론과 (2) 만유회복 (아포카타스타시스 ἀποκατάστασις) 이론이었다. 오리게네스는 이 이론들을 하나의 '가설'로 제시했지 윤회/환생설을 공인된 교리로서 가르치지 않았을 뿐더러 그의 복음서 주석에서 비판했다.
        • [팩트]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처 테오도라는 지난 세기에 이단으로 정죄해 분리된 이집트의 단성파와 다시 연대하면 이집트의 정치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뜬금없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의 신격화라니? 유스티니아누스가 오리게네스의 이론을 정죄한 전문은 오리게네스를 다루는 아래 장에 적겠다.
      • [오류] 당시 서로마제국에서는 오리게네스의 윤회설이 널리 퍼져 인정받고 있었다. 
        • [팩트] 오리게네스는 "윤회설" 을 주장한게 하니라, 윤회설과는 전혀 다른 주장인 "영혼선재설"을 가설의 형식을 빌어 제시했다.
        • [팩트] 윤회/환생설은 원래 피타고라스/플라톤 철학의 일부였고, 피타고라스/플라톤 철학자들과 그와 유사한 교리를 가진 그리스/로마 철학자들은 윤회/환생을 믿었다.
        • [팩트] 윤회/환생설과는 별도인 "영혼선재설"은 서방이 아니라 이집트와 그리스, 그리고 동방에서 유행했다. 오리게네스가 이집트 출신으로 주로 팔레스티나 카이사리아에서 활동해서 후학들도 주로 동방에 근거지를 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리게네스와 그 후학은 윤회/환생을 믿지 않고, 대신 기독교의 "부활"을 믿었다.
      • [오류] 황제는 동로마의 승정 159명을 초대하고 서로마로부터는 6명의 승정만을 초대해 공의회를 열었고, 당시의 교황은 동서 로마가 같은 수의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으면서도 공의회에 불참한 뒤 그 회의에서 결정된 윤회설의 이단 규정과 오리게네스의 파문을 승인하지 않았다. 
        • [팩트] 참석한 총 152명의 주교 가운데 16명의 주교만 서방교회를 대표했다. (일리리쿰 9명, 북아프리카 7명). 이탈리아에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로마주교 비길리우스는 동고트족의 침략을 피해 콘스탄티노플에 피신해 있었고, 이탈리아 전역이 동고트족의 약탈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 [팩트] 다시 말하지만 공회의는 "윤회/환생설"을 다룬 바 없다. 로마주교 (교황) 비길리우스와 유스티아누스 황제 간의 갈등은 공회의 10년 전인 AD 543년으로 거슬러 간다. 당시 유스티니아누스는 오리게네스의 (윤회/환생설이 아니라) "영혼선재설"과 "아포카타스타시스" 등의 교리를 정죄하고 주교들의 인준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오리게네스 학파의 좌장이던 카파도키아 카이사리아 주교인 테오도레토스 아스키다스가 황제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집트/시리아 단성파 교회와 화해를 모색하는 차원에서 양성파 네스토리우스파를 압박하자고 제안하고 황제는 이를 수락한다. 이어 황제는 안티오키아에 기반한 양성파 주요 신학자 3인을 정죄하는데, 이때 로마 주교 비길리우스는 양성파 네스토리우스파만을 겨냥한 이 조치가 부당하며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파 모두를 정죄한 칼케돈 공회의의 결의를 손상시키는 것이라 생각하여 반발했고, 이 강경한 자세가 10년 후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의까지 이어진 것이다. 즉, 비길리우스는 "오리게네스의 환생/윤회설"을 지지해서 공회의를 보이콧한게 아니란 뜻이다. 비길리우스는 공회의 후 16인의 서방주교들과 함께 공회의와 유사한 결론을 내긴 했다. 그러나 양성파 네스토리우스파를 정죄하기 위해 칼케돈 공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단성파 교회가 오리게네스 학파와 연대하여 교회 내부 치리에 관련된 내용에 직접 공권력을 개입시킨데 대한 불쾌감을 보였다.  
      • [오류] 그럼에도 불구하고 6세기 이후 환생설을 신봉하던 교파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면서, 기독교가 지배하던 서양에서는 환생설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팩트] AD 6세기 이후, 즉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의 주요 공격목표는 "환생설"을 신봉하던 교파가 아니라, 에페소스/칼케돈 공회의의 결의에 불복해 분리해 나간, 양성파 (네스토리우스파)였고, 이를 통해 공회의는 단성파와의 화해를 시도했으나 결국 불발되었다. 
      • [오류]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운동으로 이어지며 기존의 기독교 교리에 도전하게 되었다. 신지학자들은 불교와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연구하여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과 조화시키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 [팩트] "인도가 세계문명의 기원"이라고 주장한 19세기 발 유사종교 신지학이야말로 "초기 기독교는 환생/윤회"를 믿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장본인이다
      • [오류]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거대해진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라즈니쉬가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콘스탄틴황제이다"라고 까지 했을까?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는 진리를 왜곡한 대죄인이다. 예수님도 그 자신의 진리가 오늘날 이토록 왜곡된 데 대해 통탄하고 있지 않을까? 
        • [팩트]  뜬금없이 왜 요기 라즈니쉬가 여기에?
      • [오류] 비록 Bible의 내용 중 윤회, 전생에 관련된 구절을 다 삭제했다고 했으나 둘로스 데우·C(본명:천수남)의 저서 <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를 보면 아직도 삭제되지 않고 용케 살아 남아 있는 구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 [팩트] "삭제되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윤회/환생과 관련된  내용이 아닌지 직접 확인해 보자.
      • [오류] 엘리야(요한)같은 선지자도 영혼의 완성을 위해 환생해 오는 마당에 우리같은 범부가 단 한 번의 삶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은 교만함과 더불어 영적세계를 전혀 모르는 무식의 소치가 아닌가? 
        • [팩트] 도대체 성서나 교부들의 저작 어디에 엘리야가 "영혼의 완성"을 위해 환생했다고 하던가?

      아울러 위에 언급한 두 명의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유스티니아누스)와 오리게네스의 파문과 관련된 (보편)공회의들에 대해서는 나의 다른 글들을 함께 참고하기 바란다.




      한편, 1908년 미국에 처음 등장한 신비주의 채널링 문서 {보병궁 복음서}를 역사적 진본문서로 간주하여 (혹은 착각하여) 상당부분을 그대로 인용할 뿐 아니라, 거기에 바탕하여 "예수=불제자"론 같은 여러 무리한 이론을 세운 민희식씨의 {법화경과 신약성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예수는 윤회전생도 믿고 있었으나 자기의 설법을 통해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예수는 간다라 지방에서 마니트라 스님에게 불교의 가르침, 4성제·8정도에 대해 배웠으나........" --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가이아씨앤디) [예수의 기본적인 불교수행]

      심지어 인도까지 가서 윤회/환생에 관한 불교교리를 배워 온 예수?


      더욱 흥미로운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들이 증거로 제시하는 소위 근거자료를 직접 들여다보면 보다 더욱 흥미로와질 것이다. 물론 부정적인 쪽으로.

      강조할 점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비판하는 소위 "윤회/환생설"이란 피타고라스/플라톤 철학의 윤회/환생설이란 점이다. 물론 카르마를 통한 징벌/보상체계로서의 불교식 윤회론과 피타고라스/플라톤 철학의 윤회/환생관은 유사한 점이 많지만, 기독교 교부들의 비판은 정확히는 피타고라스/플라톤 철학의 윤회/환생관을 향해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 특별히 AD 2세기의 교부들인 유스티노스와 루그두눔 (리옹) 주교 이레네우스는 피타고라스/플라톤식 윤회/환생관에서 전생에서 다음 생으로 넘어갈때 전생의 모든 기억을 잃게 된다는 설정을 격렬히 비판했다.




      § 세례자 요한

      예수가 환생/윤회를 믿었다는 주장은, 기본적으로는 성서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의 역할에 대한 {복음서}들의 진술로부터 비롯되었다.

      구약성서의 예언서 {말라기}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다음의 예언을 담는다.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 --- 한국어 공동번역, {말라기} 4장

      이런 배경 속에서 예수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그 때에 제자들이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놓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엘리야는 벌써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사람의 아들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이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태오 복음서 17장}

      예수께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놓을 것이다. 그런데 성서에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너희에게 말해 두거니와, 사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엘리야는 벌써 왔었고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르코 복음서} 9장

      그런데 예수는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라고 지칭하는 반면, 정작 요한 본인은 자신이 "엘리야"도 혹은 "그 예언자" (즉,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장차 도래할 모세와 같은 예언자(=메시아)")도 아니라고 말한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다. 이 때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히 말해 주었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다시 묻자 요한은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요?" 그들이 다시 물었을 때 요한은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해 줄 말이 있어야 하겠으니 당신이 누군지 좀 알려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이렇게 다그쳐 묻자 요한은 그제야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하고 대답하였다.  ---한국어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1장

      이런 외견상 불일치는 대체로 {루가의 복음서}의 진술에서 해소된다.

      그 때에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가리야. 하느님께서 네 간구를 들어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터이니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사람이 또한 그의 탄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는 주님 보시기에 훌륭한 인물이 되겠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나 그 밖의 어떤 술도 마시지 않겠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을 것이며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주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데려올 것이다.

      17 καὶ αὐτὸς προελεύσεται ἐνώπιον αὐτοῦ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δυνάμει ἠλίου, ἐπιστρέψαι καρδίας πατέρων ἐπὶ τέκνα καὶ ἀπειθεῖς ἐν φρονήσει δικαίων, ἑτοιμάσαι κυρίῳ λαὸν κατεσκευασμένον.

      그가 바로 엘리야의 정신
      과 능력 (πνεύματι καὶ δυνάμει) 가지고 주님보다 먼저 올 사람이다. 그는 아비와 자식을 화해시키고 거역하는 자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하게 하여 주님을 맞아들일 만한 백성이 되도록 준비할 것이다."  --한국어 공동번역, {루가의 복음서} 1장

      {루가의 복음서}의 장면에서 천사는 요한의 아버지인 제사장 즈가리야에게 그의 아들 요한이 "엘리야의 영/정신(=프뉴마)과 능력(=듀나미스)"을 가지고 "주님"보다 먼저와서 예비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요한이 엘리야 본인이라는 뜻으로 꼭 해석할 이유는 없다. 이 논증은 뒤에 설명할 오리게네스의 주석에도 등장한다.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 예수와 베드로

      {히브리 성서}, 즉 {구약성서}에는 {신약성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승에 대한 언급이 매우 드믈다. 하지만 {히브리 성서}들은 대체로 저승에서는 의식이 없거나 있더라도 낮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 전도서 9:4-6, 10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 시편 6:5

      …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 --- 시편 31:17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 시편 115:17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 시편 30:9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곳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 이사야 38:18-19

      이에 반해 {신약성서}, 가령 {복음서} 속 예수의 거지 나사로/부자/아브라함의 영혼 이야기나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장로/순교자들은 상대적으로 활발한 의식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가령, {요한계시록}에서 순교자들은 아래와 같이 자신들의 무고한 죽음을 신원해 달라고 외친다.

      그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또 그들이 말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지배자님,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지배자님께서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어 우리가 흘린 피의 원한을 풀어 주시겠습니까?"  --- 한국어 새번역, {요한계시록} 6장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신과 맘몬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질타한 예수는, 이어서 어떤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인지에 대해 부자와 거지 라자로스 (나사로)의 이야기를 가르친다. 성서에는 사후세계에 대한 진술이 그리 많지 않은데, 따라서 이 내용을 그저 공상적인 비유로 받아들일지 혹은 실제로 이것이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왔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도들은 이 내용을 "사실", 혹은 "사실을 반영한 비유"로 간주했다.



      일단 내용을 읽어보자. AD 1세기 중후반에 작성되어 회람된 {루가/누가의 복음서} 제 16장의 내용이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나서, 예수를 비웃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율법과 예언자는 요한의 때까지다. 그 뒤로부터는 하나님 나라가 기쁜 소식으로 전파되고 있으며, 모두 거기에 억지로 밀고 들어간다. 율법에서 한 획이 빠지는 것보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것이 더 쉽다.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며,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사람도 간음하는 것이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22 ἐγένετο δὲ ἀποθανεῖν τὸν πτωχὸν καὶ ἀπενεχθῆναι αὐτὸν ὑπὸ τῶν ἀγγέλων εἰς τὸν κόλπον ἀβραάμ· ἀπέθανεν δὲ καὶ ὁ πλούσιος καὶ ἐτάφη. 23 καὶ ἐν τῶ ᾅδῃ ἐπάρας τοὺς ὀφθαλμοὺς αὐτοῦ, ὑπάρχων ἐν βασάνοις, ὁρᾷ ἀβραὰμ ἀπὸ μακρόθεν καὶ λάζαρον ἐν τοῖς κόλποις αὐτοῦ.

      그러다가,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서 묻히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24 καὶ αὐτὸς φωνήσας εἶπεν, πάτερ ἀβραάμ, ἐλέησόν με καὶ πέμψον λάζαρον ἵνα βάψῃ τὸ ἄκρον τοῦ δακτύλου αὐτοῦ ὕδατος καὶ καταψύξῃ τὴν γλῶσσάν μου, ὅτι ὀδυνῶμαι ἐν τῇ φλογὶ ταύτῃ. 25 εἶπεν δὲ ἀβραάμ, τέκνον, μνήσθητι ὅτι ἀπέλαβες τὰ ἀγαθά σου ἐν τῇ ζωῇ σου, καὶ λάζαρος ὁμοίως τὰ κακά· νῦν δὲ ὧδε παρακαλεῖται σὺ δὲ ὀδυνᾶσαι. 26 καὶ ἐν πᾶσι τούτοις μεταξὺ ἡμῶν καὶ ὑμῶν χάσμα μέγα ἐστήρικται, ὅπως οἱ θέλοντες διαβῆναι ἔνθεν πρὸς ὑμᾶς μὴ δύνωνται, μηδὲ ἐκεῖθεν πρὸς ἡμᾶς διαπερῶσιν.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 받는 이 곳에 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부자는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 한국어 새번역, {누가복음} 16장

      예수는 여기서 죽은 자의 영혼이 저승 (스올, 하데스)에서 겪는 상태를 설명하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바리새인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주기위해 그저 우화를 사용한 것일까? 일단은 텍스트의 내용에 대해서만 고려해 보자.

      이 진술에 따르자면,

      • (아마도 선인이었을) 거지 나사로와 (아마도 탐욕스러웠을) 부자는 모두 죽어 저승 (히브리어 스올, 그리스어 하데스)로 간다. 
      • 그런데 이 저승은 깊은 구덩이로 나뉘어져서 서로 왕래할 수는 없으나 (큰 소리로) 의사를 교환할 수 있다. 한 편에는 악인이, 다른 한 편에는 선인이 거주한다. 전자에서 악인은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고, 후자는 "아브라함의 품"이라 불려지는 곳에서 상대적으로 안온하게 보내고 있다. 
      • 저승에서의 망자들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부자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 자신의 가족들에게 가서 자신을 대신해서 경고를 전하게 해달라는 간청을 아브라함에게 하고 있다. 혹시 이 진술로부터 "예수는 윤회와 환생을 믿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여기서 부자가 말하는 것은 "윤회/환생"이 아니라 즉각적인 "소생"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역시 그런 의미로 말하고 있다.

      그럼 예수가 말하는 저 "저승"은 무엇, 혹은 어디인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때 그 곁에 있던 강도에게 예수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다. 예수는 부활 후에 성부의 곁으로 올라갔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의 '낙원'은 천상이 아닌 저승의 개념이며, 사실상  '아브라함의 품'과 같은 개념이라고 초기 기독교도들은 여겼다.

      가령, {복음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41 καὶ ἡμεῖς μὲν δικαίως, ἄξια γὰρ ὧν ἐπράξαμεν ἀπολαμβάνομεν· οὖτος δὲ οὐδὲν ἄτοπον ἔπραξεν. 42 καὶ ἔλεγεν, ἰησοῦ, μνήσθητί μου ὅταν ἔλθῃς εἰς τὴν βασιλείαν σου.

      41 Et nos quidem juste, nam digna factis recipimus: hic vero nihil mali gessit. 42 Et dicebat ad Jesum: Domine, memento mei cum veneris in regnum tuum.

      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그를 모독하며 말하였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43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ῶ,
      ἀμήν σοι λέγω, σήμερον μετ᾽ ἐμοῦ ἔσῃ ἐν τῶ παραδείσῳ.

      43 Et dixit illi Jesus: Amen dico tibi: hodie mecum eris in paradiso.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 한국어 새번역, {누가복음} 23장

      저자가 예수의 사도 베드로 본인이라면 그가 죽기 전 바빌론 (로마)에서 머물던 AD 60년대, 베드로가 아니라고 보는 학자들도 다른 교부들에 의한 인용문제를 고려할 때 AD 80년대까지는 회람된 것으로 여기는 {베드로 전서} 3장은 이렇게 진술한다.

      18 ὅτι καὶ χριστὸς ἅπαξ περὶ ἁμαρτιῶν ἔπαθεν, δίκαιος ὑπὲρ ἀδίκων, ἵνα ὑμᾶς προσαγάγῃ τῶ θεῶ, θανατωθεὶς μὲν σαρκὶ ζῳοποιηθεὶς δὲ πνεύματι· 19 ἐν ᾧ καὶ τοῖς ἐν φυλακῇ πνεύμασιν πορευθεὶς ἐκήρυξεν, 20 ἀπειθήσασίν ποτε ὅτε ἀπεξεδέχετο ἡ τοῦ θεοῦ μακροθυμία ἐν ἡμέραις νῶε κατασκευαζομένης κιβωτοῦ, εἰς ἣν ὀλίγοι, τοῦτ᾽ ἔστιν ὀκτὼ ψυχαί, διεσώθησαν δι᾽ ὕδατος. 21 ὃ καὶ ὑμᾶς ἀντίτυπον νῦν σῴζει βάπτισμα, οὐ σαρκὸς ἀπόθεσις ῥύπου ἀλλὰ συνειδήσεως ἀγαθῆς ἐπερώτημα εἰς θεόν, δι᾽ ἀναστά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22 ὅς ἐστιν ἐν δεξιᾷ [τοῦ] θεοῦ, πορευθεὶς εἰς οὐρανόν, ὑποταγέντων αὐτῶ ἀγγέλων καὶ ἐξουσιῶν καὶ δυνάμεων.

      18 Quia et Christus semel pro peccatis nostris mortuus est, justus pro injustis, ut nos offerret Deo, mortificatus quidem carne, vivificatus autem spiritu.
      19 In quo et his, qui in carcere erant, spiritibus veniens prædicavit: 20 qui increduli fuerant aliquando, quando exspectabant Dei patientiam in diebus Noë, cum fabricaretur arca: in qua pauci, id est octo animæ, salvæ factæ sunt per aquam. 21 Quod et vos nunc similis formæ salvos fecit baptisma: non carnis depositio sordium, sed conscientiæ bonæ interrogatio in Deum per resurrectionem Jesu Christi. 22 Qui est in dextera Dei, deglutiens mortem ut vitæ æternæ hæredes efficeremur: profectus in cælum subjectis sibi angelis, et potestatibus, et virtutibus.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가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 물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가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 한국어 새번역, {베드로 전서} 3장

      여기서 "(감)옥에 있는/갇혀있는 (φυλακή)  영들", "죽은 자"를 모든 죽은 자로 해석해야 하는 지는 논란이 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스올/음부에 있는 자들이긴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노아의 대홍수 때 불순종한 자들"로 특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 되기는 한다.



      같은 편지의 제 4장은 또 이렇게 말한다.

      6 εἰς τοῦτο γὰρ καὶ νεκροῖς εὐηγγελίσθη ἵνα κριθῶσι μὲν κατὰ ἀνθρώπους σαρκὶ ζῶσι δὲ κατὰ θεὸν πνεύματι.

      6
      Propter hoc enim et mortuis evangelizatum est: ut judicentur quidem secundum homines in carne, vivant autem secundum Deum in spiritu.

      죽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모든 사람이 심판받는 대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 한국어 새번역, {베드로 전서} 4장

      이 편지는 "바울"의 (어려운) 가르침을 일반 신자들이 해석하는 문제를 두고 신중할 것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바울이 에페소스의 기독교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베드로가 위에서 언급하는 것과 유사한 내용이 등장한다. 일단은 문자적으로만 읽어보자.

      8 διὸ λέγει, ἀναβὰς εἰς ὕψος ᾐχμαλώτευσεν αἰχμαλωσίαν, ἔδωκεν δόματα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9 τὸ δὲ ἀνέβη τί ἐστιν εἰ μὴ ὅτι καὶ κατέβη εἰς τὰ κατώτερα [μέρη] τῆς γῆς; 10 ὁ καταβὰς αὐτός ἐστιν καὶ ὁ ἀναβὰς ὑπεράνω πάντων τῶν οὐρανῶν, ἵνα πληρώσῃ τὰ πάντ

      8 Propter quod dicit: Ascendens in altum, captivam duxit captivitatem: dedit dona hominibus. 9 Quod autem ascendit, quid est, nisi quia et descendit primum in inferiores partes terræ? 10 Qui descendit, ipse est et qui ascendit super omnes cælos, ut impleret omni

      성서에도 "그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사로잡은 자들을 데리고 가셨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셨다."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올라가셨다는 말은 또한 땅 아래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로 내려가셨던 바로 그분이 모든 것을 완성하시려고 하늘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제 4장 8:10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간 저승 ("아브라함의 품")은 (최종적이지는 않지만) 일종의 낙원이다. 예수와 그 옆의 사형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그 날 (오늘) 간 곳도 "천상"이 아니라 "낙원 /파라다이스"다. 그리고 베드로의 편지에서 예수는 "감옥에 있는 / 갇혀있는 영들"에게로 가서 복음과 구원을 선포했다. 이 두 단서를 일관적으로 연결하는 가장 쉬운 해법은 예수는 음부/하데스, 혹 "아브라함의 품"에 내려갔다가 부활했다는 해석일 것이다. 고대의 기독교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해석했다.



      이 개념은 AD 8세기 초반에 오늘날 형태를 갖춘 {사도신조}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12개 신조로 구성된 {사도신조}의 제 5조는 "(나는)....(그가) 음부에 내려 가셨다가, 3일째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믿는다)"이다.

      그리스어 / 라틴어
      1. Πιστεύω εἰς θεòν πατέρα, παντοκράτορα, ποιητὴν οὐρανοῦ καὶ γῆς
        •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aeli et terrae,
        •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성부를 믿습니다.
      2. Καὶ (εἰς) Ἰησοῦν Χριστòν, υἱὸν αὐτοῦ τòν μονογενῆ, τòν κύριον ἡμῶν,
        • et in Iesum Christum, Filium Eius unicum, Dominum nostrum,
        • 또 그 (성부)의 외아들인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3. τòν συλληφθέντα ἐκ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γεννηθέντα ἐκ Μαρίας τῆς παρθένου,
        • 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셨고,
      4. παθόντα ἐπὶ Ποντίου Πιλάτου, σταυρωθέντα, θανόντα, καὶ ταφέντα,
        • passus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mortuus, et sepultus,
        • 폰티우스 필라투스 때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장례 치러졌다가
      5. κατελθόντα εἰς τὰ κατώτατα, τῇ τρίτῃ ἡμέρᾳ ἀναστάντα ἀπò τῶν νεκρῶν,
        • descendit ad inferno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 음부/저승/낮은 곳에 내려가셨다가죽은 지 제 3일에 부활하셨고,
      6. ἀνελθόντα εἰς τοὺς οὐρανούς, καθεζόμενον ἐν δεξιᾷ θεοῦ πατρὸς παντοδυνάμου,
        • ascendit ad caelos, sedet ad dexteram Dei Patris omnipotentis,
        • 승천하여 전능한 성부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며,
      7. ἐκεῖθεν ἐρχόμενον κρῖναι ζῶντας καὶ νεκρούς.
        • inde venturus est iudicare vivos et mortuos.
        • 거기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8. Πιστεύω εἰς τò πνεῦμα τò ἅγιον, 
        • Credo in Spiritum Sanctum,
        • 성령과.
      9. ἁγίαν καθολικὴν ἐκκλησίαν,  ἁγίων κοινωνίαν,
        •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
        • 거룩한 보편(καθολικὴν)교회와 (한 몸으로서의 모든 / 필자 주)성도들의 교제와
      10. ἄφεσιν ἁμαρτιῶν, 
        • remissionem peccatorum,
        • 죄의 사면과
      11. σαρκὸς ἀνάστασιν, 
        • carnis resurrectionem,
        • 육체의 부활과
      12. ζωὴν αἰώνιον.  Αμήν.
        • vitam aeternam. Amen
        •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사도신조}을 신앙고백으로 공공예배에 즐겨 사용하는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공식 한국어 {사도신조}에는 이 "음부에 내려가셨다가"란 구절이 제 5조에서 삭제되어 있다. 즉,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삭제) ,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란 식으로 되어있다.

      물론 한국어에서만 그렇지, 다른 나라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이 구절을 여전히 사용한다. AD 350년 경 루피누스의 사본에 등장하는 이 소위 "음부강하" 구절은, 비록 칼뱅이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담} #44,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50에서 장소적 개념이 아닌 "극한의 고통의 표현"으로 풀이했다고는 해도 그 구절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사도신조} 자체가 정경적 지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이 문구를 임의로 삭제한 것은 월권이다.

      사실 이 구절은 장로교단 측 언더우스 선교사의 1894년 번역이나 1905년 장로교 선교사 협의회에서 번역에는 "그리스도가 지옥에 내려가셨다" 라고 원래 들어 있었지만,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존 웨슬리가 작성한 1784년의 감리교 신조에 이 구절이 생략된 것에 따라 한국 감리교 선교부에서도 1897, 1902, 1905년 번역에서 이를 생략하였다. 이후 한국의 장로교 및 감리교 선교회 측에서 1908년 {합동 찬송가}를 발행하는 과정에서 장로교가 감리교 측의 요청에 따라 이 구절을 빼게 된 것이다.
       


      참고로, 현행 {사도신조}의 원형이 되는 신조들은 적어도 AD 4세기 말에는 동/서방 지역교회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가장 오래된 원형으로 여겨지는 형태는 AD 2세기 말 소아시아 출신으로 갈리아 리그두눔 (리옹)의 주교였던 이레네우스의 {이단반박}에 등장한다.

      1. The Church, though dispersed through our the whole world, even to the ends of the earth, has received from the apostles and their disciples this faith:

      (현재) 교회는 세상 끝까지 널리 퍼져나가 있지만, (예수의) 사도들과 그의 제자들로부터 다음의 신조를 이어받았다:

      [She believes]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the sea, and all things that are in them; and in one Christ Jesus, the Son of God, who became incarnate for our salvation; and in the Holy Spirit, who proclaimed through the prophets the dispensations(6) of God, and the advents, and the birth from a virgin, and the passion, and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and the ascension into heaven in the flesh of the beloved Christ Jesus, our Lord, and His [future] manifestation from heaven in the glory of the Father "to gather all things in one,"(7) and to raise up anew all flesh of the whole human race, in order that to Christ Jesus, our Lord, and God, and Saviour, and King, according to the will of the invisible Father, "every knee should bow, of things in heaven,, and things in earth, and things under the earth, and that every tongue should confess"(8) to Him, and that He should execute just judgment towards all; that He may send "spiritual wickednesses,"(9) and the angels who transgressed and became apostates, together with the ungodly, and unrighteous, and wicked, and profane among men, into everlasting fire; but may, in the exercise of His grace, confer immortality on the righteous, and holy, and those who have kept His commandments, and have persevered in His love, some from the beginning [of their Christian course], and others from [the date of] their repentance, and may surround them with everlasting glory.

      교회는 한 분의 신, 즉 전능한 성부이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믿는다. 또한 교회는 한 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 그는 신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육체를 입으신 분이다. 교회는 또한 한 성령을 믿으며 성령이 신(=성부)의 섭리와, 사랑하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도래와, 성자가 처녀에게서 태어나심과, 그의 수난과, 죽음에서의 부활과, 육체로서 승천하심과, 장차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고 모든 인류를 새로운 육체 가운데 부활시키기 위해 성부의 영광 가운데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것을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하셨음을 믿는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성부의 뜻에 따라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무릎 꿇고 그를 경배하며, 모든 자들이 그 입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주님이자 신이며, 구원자이자 왕으로 고백하게 될 것임을 믿는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가 모두를 공정하게 심판할 것과, 악마들과 죄로 타락한 천사들과 거룩하지 않고 불의하며 사악하고 속된 인간들을 모두 함께 영원한 불 가운데 던지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의 은혜 가운데 살며 정의롭고 거룩하며 신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사랑 안에서 인내한 자에게는 영생을 주실 것과, 또한 처음부터 믿었거나 혹은 참회한 후부터 믿은 신자들을 영원한 영광으로 감싸실 것을 교회는 믿는다. --- 이레네우스, {모든 이단을 반박하며} / 번역: 최광민

      이 원형에는 '수난'과 '부활' 사이에 '음부강하' 구절은 나타나지 않는다.

      AD 4/5세기 무렵 당시 로마교회에서 사용되던 신조 ('구 로마신조')에도 아직은 그 구절이 없다. 이 신조는 루피누스가 전한 라틴어 형태와 안키라 주교 마르켈리우스의 그리스어 형태로 남아있다.

      • Πιστεύω οὖν εἰς θεòν πατέρα παντοκράτορα·
      •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
        • 나는 믿습니다: 전능하신 성부를
      • καὶ εἰς Χριστὸν Ἰησοῦν, τὸν υἱὸν αὐτοῦ τὸν μονογενῆ, τὸν κύριον ἡμῶν,
      • et in Christum Iesum filium eius unicum, dominum nostrum,
        • 또한 그의 독생자이자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 τὸν γεννηθέντα ἐκ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καὶ Μαρίας τῆς παρθένου,
      • qui natus est de Spiritu sancto ex Maria virgine,
        • 그는 성령을 통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 τὸν ἐπὶ Ποντίου Πιλάτου σταυρωθέντα καὶ ταφέντα
      • qui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est et sepultus,
        • 폰티우스 필라투스 치하에 십자가형을 받으시고 장사지내졌다가
      • καὶ τῇ τρίτῃ ἡμέρα ἀναστάντα ἐκ τῶν νεκρῶν,
      •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 삼일 째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 ἀναβάντα εἰς τοὺς οὐρανούς
      • ascendit in caelos,
        • 승천하셨고
      • καὶ καθήμενον ἐν δεξιᾳ τοῦ πατρός, ὅθεν ἔρχεται κρίνειν ζῶντας καὶ νεκρούς·
      • sedet ad dexteram patris, unde venturus est iudicare vivos et mortuos;
        • 성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심과
      • καὶ εἰς τò ἅγιον πνεῦμα
      • et in Spiritum sanctum,
        • 성령과
      • ἁγίαν ἐκκλησίαν,
      • sanctam ecclesiam,
        • 거룩한 교회와
      • ἄφεσιν ἁμαρτιῶν,
      • remissionem peccatorum,
        • 죄를 용서해 주심과
      • σαρκὸς ἀνάστασιν,
      • carnis resurrectionem.
        • 육체의 부활과
      • ζωὴν αἰώνιον.
        • 영생을 (믿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팔레스티나에서 오래 활동했던 수도사/사제인 티라니우스 루피누스가 (부임지 미상)의 주교 라우렌티우스의 요청을 받고 (그의 고향인) 이탈리아 아퀼레이아 지역에서 사용되던 형태의 신조를 위의 구 로마신조와 비교해 주석을 남겼는데, 이 형태에서는 '음부강하' 구절이 등장한다. 그가 기록한 아퀼레이아 교회의 신조는 아래와 같다.

      • Credo in Deo Patre omnipotenti invisibili et impassibili
        • 나는 믿습니다: 보이지 않고 또 불변하는 성부 하느님을
      • Et in Jesu Christo, unico Filio ejus, Domino nostro 
        • 그의 독생자이자 우리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 Qui natus est de Spiritu Sancto ex Maria Virgine 
        • 그는 성령을 통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고
      • Crucifixus sub Pontio Pilato, et sepultus 
        • 폰티우스 필라투스 치하에 십자가형을 당해 장사지내졌고
      • Descendit ad inferna;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 음부에 내려갔다가 제 3일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 Ascendit in cœlos; sedet ad dexteram Patris; 
        • 승천하시고, 성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 Inde venturus est judicare vivos et mortuos; 
        •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거기서 오실 것임을.
      • Et in Spiritu Sancto 
        • 또한 성령과
      • Sanctam Ecclesiam 
        • 거룩한 교회와
      • Remissionem peccatorum
        • 죄의 용서와
      • Hujus carnis resurrectionem
        • 이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AD 6-7세기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교회에서도 이 구절이 사용되는데, AD 8세기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그누스 (샤를마뉴)는 그가 지배하던 서유럽 전 지역에서 이 마지막 형태의 신조를 도입했고, 마침내 로마에도 수용되었다. 이것이 현행 {사도신조}가 된다.



      각설하고,

      죽은 자의 영혼이 죽은 후 즉시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는 개념은 후대 라틴교회의 해석이고,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고대의 교부들과 동방의 교회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한 죽은 자의 영혼은 대체로 부활과 최후의 심판 때 까지 제 3의 장소에서 머문다는 해석을 견지해 왔다. 서방교회는 예수의 처형과 부활, 승천 이후 이 "아브라함의 품"은 스올/하데스에서 천상으로 옮겨졌다고 차차 여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스올/하데스에는 악인과 불타는 연못만 남는 셈이다. 악인들에게 할당한 곳은 {복음서}에서 그리스어로 게헨나 (γέεννα)로 음역된다.

      스올/하데스에 수용되어 있는 영혼들은 대심판이 있기 전엔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을까? {복음서}에는 예수가  산에 올라가 기도할 때 하늘에서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히브리 성서}에 따르면 모세는 죽었고 엘리아는 죽지않고 하늘로 승천했다. 그럼 죽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는 그렇다치고  죽은 모세의 영혼은 스올/하데스에서 왔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엘리야 처럼 신은 모세에게도 특별한 예외를 두어 비록 몸이 죽긴 했으나 그의 영혼을 (스올/하데스에서) 천상으로 불러들였을까? 예수가 나흘 만에 살린 베타니의 라자로스/나사로의 영혼은 어디에 머물다 왔을까? 몸에 남아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하데스에서 예외적으로 소환된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여전히 확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신약성서}의 내용들이 저승을 윤회란 시스템 가운데 죽은 자들이 다음 생으로 태어날 때까지, 즉 환생을 기다리는 대기장소로 보고 있다곤 말하기 힘들 것이다.

      톨레.
      레게.




      § 유대교 바리새파 (Φαρισαῖοι 파리사이오이)와 바울

      혹자는 원래 유대교에는 윤회나 환생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요세푸스의 진술을 그 근거로 든다. 이것은 '윤회'나 '환생'이란 용어의 정의를 명확하지 않게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그럼 요세푸스가 정확히 뭘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예수로부터 한 세대 후의 제사장 가문 출신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BC 2세기를 전후하여 생겨난 유대교의 세 분파를 설명하면서, 특별히 사두개 (Σαδδουκαῖοι 사두카이오이, צְדוּקִים 세두킴)와 바리새파 (Φαρισαῖοι 파리사이오이, פְּרִישַׁיָּא 페리사야)의 근본적인 차이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청년시절 요세푸스는 바리새파의 전통 아래서 교육받은 제사장인 동시에, 엣세네파 스승의 지도를 받기도 했었다.

       [162] Δύο δὲ τῶν προτέρων Φαρισαῖοι μὲν οἱ μετὰ ἀκριβείας δοκοῦντες ἐξηγεῖσθαι τὰ νόμιμα καὶ τὴν πρώτην ἀπάγοντες αἵρεσιν εἱμαρμένῃ τε καὶ θεῷ προσάπτουσι πάντα, [163] καὶ τὸ μὲν πράττειν τὰ δίκαια καὶ μὴ κατὰ τὸ πλεῖστον ἐπὶ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κεῖσθαι, βοηθεῖν δὲ εἰς ἕκαστον καὶ τὴν εἱμαρμένην: ψυχήν τε πᾶσαν μὲν ἄφθαρτον, μεταβαίνειν δὲ εἰς ἕτερον σῶμα τὴν τῶν ἀγαθῶν μόνην, τὰς δὲ τῶν φαύλων ἀιδίῳ τιμωρίᾳ κολάζεσθαι. [164] Σαδδουκαῖοι δέ, τὸ δεύτερον τάγμα, τὴν μὲν εἱμαρμένην παντάπασιν ἀναιροῦσιν καὶ τὸν θεὸν ἔξω τοῦ δρᾶν τι κακὸν ἢ ἐφορᾶν τίθενται: [165] φασὶν δ᾽ ἐπ᾽ ἀνθρώπων ἐκλογῇ τό τε καλὸν καὶ τὸ κακὸν προκεῖσθαι καὶ κατὰ γνώμην ἑκάστου τούτων ἑκατέρῳ προσιέναι. ψυχῆς τε τὴν διαμονὴν καὶ τὰς καθ᾽ ᾄδου τιμωρίας καὶ τιμὰς ἀναιροῦσιν. [166] καὶ Φαρισαῖοι μὲν φιλάλληλοί τε καὶ τὴν εἰς τὸ κοινὸν ὁμόνοιαν ἀσκοῦντες, Σαδδουκαίων δὲ καὶ πρὸς ἀλλήλους τὸ ἦθος ἀγριώτερον αἵ τε ἐπιμιξίαι πρὸς τοὺς ὁμοίους ἀπηνεῖς ὡς πρὸς ἀλλοτρίους. τοιαῦτα μὲν περὶ τῶν ἐν Ἰουδαίοις φιλοσοφούντων εἶχον εἰπεῖν. ---- J. BJ 2.8.14

      [162] But then as to the two other orders at first mentioned, the Pharisees are those who are esteemed most skillful in the exact explication of their laws, and introduce the first sect. These ascribe all to fate [or providence], and to God, and yet allow, that to act what is right, or the contrary, is principally in the power of men, although fate does co-operate in every action. They say that all souls are incorruptible, but that the souls of good men only are removed into other bodies, - but that the souls of bad men are subject to eternal punishment. But the Sadducees are those that compose the second order, and take away fate entirely, and suppose that God is not concerned in our doing or not doing what is evil; and they say, that to act what is good, or what is evil, is at men's own choice, and that the one or the other belongs so to every one, that they may act as they please. They also take away the belief of the immortal duration of the soul, and the punishments and rewards in Hades. Moreover, the Pharisees are friendly to one another, and are for the exercise of concord, and regard for the public; but the behavior of the Sadducees one towards another is in some degree wild, and their conversation with those that are of their own party is as barbarous as if they were strangers to them. And this is what I had to say concerning the philosophic sects among the Jews.  --- Flavius Josephus. {The Wars of the Jews}, tr. William Whiston, A.M., Ed.

      .....[전략]... 바리새파는 율법의 해설에 있어 가장 탁월한 것으로 여겨지며 유대교의 첫번째 종파를 이룬다. 이들은 모든 것을 신의 섭리/예정으로 이해하지만, 선악의 선택은 인간의 의지 아래 있으며. 단, 신의 섭리/예정이 인간의 모든 행위와 함께 작용한다고 여긴다.  그들은 모든 영혼은 불멸하며, 선인의 영혼은 몸에서 나와 다른 육체로 가지만, 악인의 영혼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에 반해 두번째 종파를 구성하는 사두개파는 신의 예정/섭리를 완전히 부정하며, 신은 인간의 행위에 관여하지 않으며, 인간은 내키는 대로 선악을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있다고 여긴다. 또한 그들은 영혼이 불멸한다는 믿음과 저승/하데스에서의 형벌과 보상에 대한 믿음을 버렸다....[후략] / 번역: 최광민

      여기서 요세푸스가 사용한 μεταβαίνειν (μεταβαίνω) 이란 한 몸에서 다른 몸 (ἕτερον σῶμα)으로 옮겨진다는 뜻이다. 그럼 요세푸스가  "바리새파는 선인의 영혼이 다른 육체로 옮겨가는 것"이라 말한 것은 "환생/윤회"를 뜻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한 세대 후에 그가 저술한 {유대 고대사} 18장의 설명을 읽어보자.

      [11] The Jews had for a great while had three sects of philosophy peculiar to themselves; the sect of the Essens, and the sect of the Sadducees, and the third sort of opinions was that of those called Pharisees; of which sects, although I have already spoken in the second book of the Jewish War, yet will I a little touch upon them now.  --- Flavius Josephus. The Works of Flavius Josephus. Translated by. William Whiston, A.M. Auburn and Buffalo. John E. Beardsley. 1895.  J. AJ 18.1.2

      유대교에는 오랫동안 특이한 견해를 가진 세가지 종파가 있어왔다. 엣네네파, 사두개파, 그리고 바리새파라 불리는 그룹들이다. 이미 {유대 전쟁사} 제 2권에서 언급했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그들에 대해 잠시 다루겠다.  / 번역: 최광민

      [12] Οἵ τε γὰρ Φαρισαῖοι τὴν δίαιταν ἐξευτελίζουσιν οὐδὲν ἐς τὸ μαλακώτερον ἐνδιδόντες, ὧν τε ὁ λόγος κρίνας παρέδωκεν ἀγαθῶν ἕπονται τῇ ἡγεμονίᾳ περιμάχητον ἡγούμενοι τὴν φυλακὴν ὧν ὑπαγορεύειν ἠθέλησεν. τιμῆς γε τοῖς ἡλικίᾳ προήκουσιν παραχωροῦσιν οὐδ᾽ ἐπ᾽ ἀντιλέξει τῶν εἰσηγηθέντων ταῦτα οἱ θράσει ἐπαιρόμενοι. [13] πράσσεσθαί τε εἱμαρμένῃ τὰ πάντα ἀξιοῦντες οὐδὲ τοῦ ἀνθρωπείου τὸ βουλόμενον τῆς ἐπ᾽ αὐτοῖς ὁρμῆς ἀφαιροῦνται δοκῆσαν τῷ θεῷ κρίσιν γενέσθαι καὶ τῷ ἐκείνης βουλευτηρίῳ καὶ τῶν ἀνθρώπων τῷ ἐθελήσαντι προσχωρεῖν μετ᾽ ἀρετῆς ἢ κακίας. [14] ἀθάνατόν τε ἰσχὺν ταῖς ψυχαῖς πίστις αὐτοῖς εἶναι καὶ ὑπὸ χθονὸς δικαιώσεις τε καὶ τιμὰς οἷς ἀρετῆς ἢ κακίας ἐπιτήδευσις ἐν τῷ βίῳ γέγονεν, καὶ ταῖς μὲν εἱργμὸν ἀίδιον προτίθεσθαι, ταῖς δὲ ῥᾳστώνην τοῦ ἀναβιοῦν. [15] καὶ δι᾽ αὐτὰ τοῖς τε δήμοις πιθανώτατοι τυγχάνουσιν καὶ ὁπόσα θεῖα εὐχῶν τε ἔχεται καὶ ἱερῶν ποιήσεως ἐξηγήσει τῇ ἐκείνων τυγχάνουσιν πρασσόμενα. εἰς τοσόνδε ἀρετῆς αὐτοῖς αἱ πόλεις ἐμαρτύρησαν ἐπιτηδεύσει τοῦ ἐπὶ πᾶσι κρείσσονος ἔν τε τῇ διαίτῃ τοῦ βίου καὶ λόγοις.

      [12] Now, for the Pharisees, they live meanly, and despise delicacies in diet; and they follow the conduct of reason; and what that prescribes to them as good for them they do; and they think they ought earnestly to strive to observe reason's dictates for practice. They also pay a respect to such as are in years; nor are they so bold as to contradict them in any thing which they have introduced; and when they determine that all things are done by fate, they do not take away the freedom from men of acting as they think fit; since their notion is, that it hath pleased God to make a temperament, whereby what he wills is done, but so that the will of man can act virtuously or viciously. They also believe that souls have an immortal rigor in them, and that under the earth there will be rewards or punishments, according as they have lived virtuously or viciously in this life; and the latter are to be detained in an everlasting prison, but that the former shall have power to revive and live again; on account of which doctrines they are able greatly to persuade the body of the people; and whatsoever they do about Divine worship, prayers, and sacrifices, they perform them according to their direction; insomuch that the cities give great attestations to them on account of their entire virtuous conduct, both in the actions of their lives and their discourses also.

      .....[중략].....바리새파가 모든 것을 예정/운명/섭리에 기탁한다고 해서, 인간에게서 행동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아니다.....[중략].....그들은 또한 영혼은 자체로는 불멸하며, 저승에서 (그 영혼이) 그들이 이전에 얼마나 선하고 악했는가에 따라 상과 벌을 받는다고 믿는다. 악인은 영원한 감옥에 갇힐 것이고, 선인은 부활하여 다시 살게 될 것이다.....[후략].... / 번역: 최광민

      [16] But the doctrine of the Sadducees is this: That souls die with the bodies; nor do they regard the observation of any thing besides what the law enjoins them; for they think it an instance of virtue to dispute with those teachers of philosophy whom they frequent: but this doctrine is received but by a few, yet by those still of the greatest dignity. But they are able to do almost nothing of themselves; for when they become magistrates, as they are unwillingly and by force sometimes obliged to be, they addict themselves to the notions of the Pharisees, because the multitude would not otherwise bear them.

      사두개파가 믿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몸이 죽을 때 영혼도 함께 죽는다고 믿는다....[후략] ---- 
       번역: 최광민

      [18] The doctrine of the Essens is this: That all things are best ascribed to God. They teach the immortality of souls, and esteem that the rewards of righteousness are to be earnestly striven for; and when they send what they have dedicated to God into the temple, they do not offer sacrifices because they have more pure lustrations of their own; on which account they are excluded from the common court of the temple, but offer their sacrifices themselves; yet is their course of life better than that of other men; and they entirely addict themselves to husbandry. It also deserves our admiration, how much they exceed all other men that addict themselves to virtue, and this in righteousness; and indeed to such a degree, that as it hath never appeared among any other men, neither Greeks nor barbarians, no, not for a little time, so hath it endured a long while among them. This is demonstrated by that institution of theirs, which will not suffer any thing to hinder them from having all things in common; so that a rich man enjoys no more of his own wealth than he who hath nothing at all. There are about four thousand men that live in this way, and neither marry wives, nor are desirous to keep servants; as thinking the latter tempts men to be unjust, and the former gives the handle to domestic quarrels; but as they live by themselves, they minister one to another. They also appoint certain stewards to receive the incomes of their revenues, and of the fruits of the ground; such as are good men and priests, who are to get their corn and their food ready for them. They none of them differ from others of the Essens in their way of living, but do the most resemble those Dacae who are called Polistae [dwellers in cities].


      엣세네파는 모든 것이 신의 섭리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으며, 끊임없이 노력하여 선인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여긴다....[후략]..... / 번역: 최광민



      일단 사두개파의 경우, 죽으면 영혼도 사라지는 것이니 환생/윤회, 구천을 떠도는 망자의 영혼 같은 개념이 등장할 수 없다.

      자, 그럼 요세푸스는 여기서 바라새파나 엣세네파가 '환생'을 믿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그는 여기서 ἀναβιοῦν (ἀναβιόω) 재생/부활, 특별히 '육체적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설명은 '윤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나 피타고라스-플라톤 철학에 등장하는 '윤회'는  "의인과 악인 모두"에 대한 상벌체계에 해당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악인은 (윤회/환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고, 오직 의인만 육체로 부활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이 경우 "윤회"란 바리새파/엣세네파의 관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육체적 부활"을 의인들이 새로운 몸을 받고 다시 "태어나는 것", 즉 "환생"으로 볼 수 없는 이유 역시 자명하다. 만약 이 "부활"이 윤회에 따른 "환생"이라면,  환생한 사람들, 즉 현 세계의 사람들은 사실은 모두 "의인"들이어야 한다는 모순이 발생하지 않겠는가?  즉, 바리새파와 엣세네파의 개념에서의 부활이란 세상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이지 윤회/환생처럼 현재 진행형은 아닌것이다.



      '이방인에게 보내진 사도'인 바울은 원래 바리새파의 양대 좌장이었던 힐렐의 손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은 바리새파 유대교인이었고, 영혼불멸과 육체의 부활이란 두 교리가 얼마나 유대교에서 민감한 부분인지 정확히 알던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23장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성전모욕과 소요혐의로 체포된 바울이 이 문제를 두고 한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

      6 γνοὺς δὲ ὁ παῦλος ὅτι τὸ ἓν μέρος ἐστὶν σαδδουκαίων τὸ δὲ ἕτερον φαρισαίων ἔκραζεν ἐν τῶ συνεδρίῳ, ἄνδρες ἀδελφοί, ἐγὼ φαρισαῖός εἰμι, υἱὸς φαρισαίων· περὶ ἐλπίδος καὶ ἀναστάσεως νεκρῶν [ἐγὼ] κρίνομαι.7 τοῦτο δὲ αὐτοῦ εἰπόντος ἐγένετο στάσις τῶν φαρισαίων καὶ σαδδουκαίων, καὶ ἐσχίσθη τὸ πλῆθος. 8 σαδδουκαῖοι μὲν γὰρ λέγουσιν μὴ εἶναι ἀνάστασιν μήτε ἄγγελον μήτε πνεῦμα, φαρισαῖοι δὲ ὁμολογοῦσιν τὰ ἀμφότερα. 9 ἐγένετο δὲ κραυγὴ μεγάλη, καὶ ἀναστάντες τινὲς τῶν γραμματέων τοῦ μέρους τῶν φαρισαίων διεμάχοντο λέγοντες, οὐδὲν κακὸν εὑρίσκομεν ἐν τῶ ἀνθρώπῳ τούτῳ· εἰ δὲ πνεῦμα ἐλάλησεν αὐτῶ ἢ ἄγγελος _10 πολλῆς δὲ γινομένης στάσεως φοβηθεὶς ὁ χιλίαρχος μὴ διασπασθῇ ὁ παῦλος ὑπ᾽ αὐτῶν ἐκέλευσεν τὸ στράτευμα καταβὰν ἁρπάσαι αὐτὸν ἐκ μέσου αὐτῶν, ἄγειν τε εἰς τὴν παρεμβολήν.

      그 의회에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두 파가 있는 것을 알고 바울로는 거기에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내 부모도 바리사이파 사람입니다. 내가 이렇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우리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믿는 대로 나도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의회는 갈라지고 말았다. 사두가이파는 부활도 천사도 영적 존재도 다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바리사이파는 그런 것이 다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내가 몹시 소란해졌다. 바리사이파에서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조금도 잘못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만일 영적 존재나 천사가 그에게 말해 주었다면 어떻게 할 셈입니까?" 하고 내대며 바울로를 두둔하였다. 논쟁이 심해지자 파견대장은 바울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을까 염려하여 자기 부하들을 내려보내며 바울로를 거기에서 빼내어 병영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하였다  / 한국어 {공동번역}, 사도행전 23:6-10

      바울이 말하는 "죽은 자의 부활"은 "선인"과 "악인" 모두의 부활이다.  예루살렘을 방문 중이던 바울이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의 기소를 받아 펠릭스 총독 앞에서 신문 받으면서 한 진술에서, 바울은 자기 뿐 아니라 (주로) 바리새파로 구성된 이들 종교지도자들 역시 동일한 부활을 믿는다고 설명한다.

      14 ὁμολογῶ δὲ τοῦτό σοι ὅτι κατὰ τὴν ὁδὸν ἣν λέγουσιν αἵρεσιν οὕτως λατρεύω τῶ πατρῴῳ θεῶ, πιστεύων πᾶσι τοῖς κατὰ τὸν νόμον καὶ τοῖς ἐν τοῖς προφήταις γεγραμμένοις, 15 ἐλπίδα ἔχων εἰς τὸν θεόν, ἣν καὶ αὐτοὶ οὖτοι προσδέχονται, ἀνάστασιν μέλλειν ἔσεσθαι δικαίων τε καὶ ἀδίκων.

      14 Confiteor autem hoc tibi, quod secundum sectam quam dicunt hæresim, sic deservio Patri et Deo meo, credens omnibus quæ in lege et prophetis scripta sunt: 15 spem habens in Deum, quam et hi ipsi exspectant, resurrectionem futuram justorum et iniquorum.

      그러나 나는 총독님께 이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데,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도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곧 그것은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장차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 한국어 새번역, {사도행전} 24장 14-15

      혹시 바울이 여기서 윤회나 환생을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하는가? 바울은 예수의 '육체적 부활'과 "장차", 즉 미래의 최후의 심판에 있을 온 인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육체적 부활'은 바리새파의 믿음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란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톨레.
      레게.




      § 위경 {에녹서} (에녹 I) 

      현재 에티오피아어 번역으로만 전문이 존재하고, 그리스어, 아람어, 라틴어로 일부 사본이 전하는 BC 2세기 경의 위경 {에녹서}는 초기 일부 기독교 교부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 받았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이 문서에 준-정경적 지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신약성서 {유다서}는 {창세기} 6장의 '타락한 천사들'과 네피림에 관해 이 {에녹서}와 병렬구문을 가진다. 단성파이자 이집트 꼽트교회의 자매교회인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이 {에녹서}를 구약성서 정경 가운데 한 권으로 간주한다.


      {에녹서}의 정경적 지위와는 별도로, 이 문건은 AD 1세기를 전후해서 유대인들의 사고 속에 저승 (음부)의 개념과 부활의 개념이 어떻게 자리잡고 있었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문건이다.

      여기 등장하는 저승 (스올, 하데스)의 개념은 AD 3세기 로마 사제 히폴리투스가 그리스인들에게 기독교의 저승/심판/부활개념을 설명한 문건에도 "아브라함의 품"이란 개념으로 등장한다. 그 무렵의 랍비 문헌에도 역시 유사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R. H. Charles의 영어번역을 기본으로 하되 Richard Laurence의 번역을 함께 참조하겠다.


      https://archive.org/details/thebookofenoch00unknuoft

      1 And thence I went to another place, and he mountain [and] of hard rock. 2 And there was in it four hollow places, deep and wide and very smooth. How smooth are the hollow places and deep and dark to look at.

      거기서 나는 (=에녹 / 필자 주) 다른 장소로 이동했는데, 거기서 높은 바위산을 보았고 텅 빈 네 군데 장소를 보았다. 그 내부는 깊었고 넓었고 매끈했다. 그 공간들은 매우 깊고 또 어두웠다.  / 번역: 최광민

      3 Then Raphael answered, one of the holy angels who was with me, and said unto me: 'These hollow places have been created for this very purpose, that the spirits of the souls of the dead should 4 assemble therein, yea that all the souls of the children of men should assemble here. And these places have been made to receive them till the day of their judgement and till their appointed period [till the period appointed], till the great judgement (comes) upon them.'

      나와 동행하던 거룩한 천사 중 하나인 라파엘이 내게 말했다: "이 장소들은 영혼들, 즉 죽은 자의 영혼들이 모이는 장소다. 그들을 위해 조성된 장소이다. 여기에 모든 인간의 영혼들이 모이게 된다. 그 정해진 날, 큰 심판일 때까지 여기서 머문다" / 번역: 최광민

      I saw (the spirit of) a dead man making suit, 5 and his voice went forth to heaven and made suit. And I asked Raphael the angel who was 6 with me, and I said unto him: 'This spirit which maketh suit, whose is it, whose voice goeth forth and maketh suit to heaven '

      나는 한 영혼이 하늘에 신원하면서 그의 목소리가 하늘에 닿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나와 동행한 천사인 라파엘에게 이 영혼에 대해 물었다: "지금 저 신원하는 이 영혼은 누구이며, 누구의 목소리가 하늘에 닿아 신원하는 것입니까?"/ 번역: 최광민

      7 And he answered me saying: 'This is the spirit which went forth from Abel, whom his brother Cain slew, and he makes his suit against him till his seed is destroyed from the face of the earth, and his seed is annihilated from amongst the seed of men.'

      라파엘은 내게 말했다. "이것은 형 카인에게 살해당한 아벨의 영혼이며, 카인의 자손이 땅에서 멸망되도록, 그의 자손이 인간 가운데서 진멸되길 신원하는 것이다" / 번역: 최광민

      8 The I asked regarding it, and regarding all the hollow places: 'Why is one separated from the other' 

      그때 나는 그 문제 (심판)과 이 곳의 장소들에 대해 라파엘에게 물었다: "왜 영혼들은 각기 나뉘어 수용되어 있습니까?" / 번역: 최광민

      9 And he answered me and said unto me: 'These three have been made that the spirits of the dead might be separated. And such a division has been make (for) the spirits of the righteous, in which there is the bright spring of 10 water. And such has been made for sinners when they die and are buried in the earth and judgement has not been executed on them in their 11 lifetime. Here their spirits shall be set apart in this great pain till the great day of judgement and punishment and torment of those who curse for ever and retribution for their spirits. There 12 He shall bind them for ever. And such a division has been made for the spirits of those who make their suit, who make disclosures concerning their destruction, when they were slain in the days 13 of the sinners. Such has been made for the spirits of men who were not righteous but sinners, who were complete in transgression, and of the transgressors they shall be companions: but their spirits shall not be slain in the day of judgement nor shall they be raised from thence.'

      라파엘은 답했다: "죽은 자의 영혼은 세 군데로 나뉘어 수용되는데 의인들의 영혼이 이렇게 나뉘어 수용된다. 거기에는 빛나는 샘이 있다. 같은 방식으로 죄인들도 그들이 죽어 땅에 묻힐 때 이렇게 분리수용된다. 이들은 생전에 벌을 받지 않고 죽은 자들이다. 그들의 영혼은 나뉘어 수용되며, 영원히 저주받은 그들이 큰 심판일이 올 때까지  여기서 받을 징벌과 고통을 엄청날 것이며 이곳에 영원히 묶이게 될 것이다. 이 격리구간은 불의한 자들과 죄인들의 영혼을 위해 조성된 것이다. 죄를 지은 자, 불경한 일에 연루된 자, 그들을 본받은 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의 영혼은 심판일에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곳에서 일어나지도 (육체를 받고 부활하지도 / 필자 주) 못할 것이다" ." / 번역: 최광민

      14 The I blessed the Lord of glory and said: 'Blessed be my Lord, the Lord of righteousness, who ruleth for ever.'

      나는 신을 찬미하였다: "나의 주님, 영원히 통치하실 영광과 정의의 주님은 찬양받으소서!"

      ---- {Book of Enoch}, Tr. R. H. Charles (1917) / 번역: 최광민



      {에녹서} (제 1 에녹) 51장은 신의 입을 빌어 최후의 심판일에 선택받은 자 (=메시아)가 죽은 자들을 심판할 것을 예언한다. 의인은 부활하여 영원히 살 특권을 얻을 것이고, 악인은 부활하나 장차 육체를 부여받지 못하고 심판 후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1. And in those days shall the earth also give back that which has been entrusted to it, And Sheol also shall give back that which it has received, And hell shall give back that which it owes. 5a. For in those days the Elect One shall arise, 2. And he shall choose the righteous and holy from among them: For the day has drawn nigh that they should be saved. 3. And the Elect One shall in those days sit on My throne, And his mouth shall pour forth all the secrets of wisdom and counsel: For the Lord of Spirits hath given (them) to him and hath glorified him. / {Book of Enoch I}, LI, tr.  R. H. Charles

      그 날 땅은 묻혔던 사람들을 다시 토해내고, 음부 (스올)은 수용해 두었던 자들을 다시 되돌려 보낼 것이다. 그리고 지옥도 가두었던 자 (악인)을을 토해낼 것이다. 그 날, 선택받은 자 (=메시아)이 의롭고 거룩한 자들은 그 가운데서 골라낼 것이다. 그들이 구원받을 날은 멀지 않다. 그는 그 날 내 왕좌에 앉을 것이며, 그의 입에서는 모든 지혜와 경륜의 비밀이 흘러나올 것이다. 영들의 주인 (신, 성부)는 그 (메시아)에게 이것들을 주어 그를 영화롭게 하였다. ---- {Book of Enoch}, Tr. R. H. Charles (1917) / 번역: 최광민

      혹시 여기서 윤회나 환생의 개념을 찾아낼 수 있을까?

      톨레.
      레게.




      § 요한, {요한 계시록}

      저자를 특정하는데 있어 AD 2-5세기 기독교 교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었지만, 예수의 사도로부터 2세대 안에 있는 교부인 순교자 유스티노스와 리그두눔 주교 이레네우스는 이 문서의 저자를 "예수의 사도 요한"으로 특정했다. 이레네우스는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카포스를 청문한 인물이다.

      {요한 계시록} 제 20장은 죽은 자들이 최후의 심판 때까지 어떤 상태로 있는지를 설명한다.

      우선, 소위 "천년왕국" 직전에 의인들이 죽음에서 부활하는 "첫째 부활"이다. 물론 이 부활은 환생이나 윤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첫째 부활" 때 부활하는 자들은 영생을 누린다, 즉 "둘째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나는 또 한 천사가 아비소스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용, 곧 악마요 사탄인 그 옛 뱀을 붙잡아 결박하여, 아비소스에 던지고 닫은 다음에, 그 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 동안 가두어 두고, 천 년이 끝날 때까지는 민족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사탄은 그 뒤에 잠시 동안 풀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4 καὶ εἶδον θρόνους, καὶ ἐκάθισαν ἐπ᾽ αὐτούς, καὶ κρίμα ἐδόθη αὐτοῖς, καὶ τὰς ψυχὰς τῶν πεπελεκισμένων διὰ τὴν μαρτυρίαν ἰησοῦ καὶ διὰ τὸν λόγον τοῦ θεοῦ, καὶ οἵτινες οὐ προσεκύνησαν τὸ θηρίον οὐδὲ τὴν εἰκόνα αὐτοῦ καὶ οὐκ ἔλαβον τὸ χάραγμα ἐπὶ τὸ μέτωπον καὶ ἐπὶ τὴν χεῖρα αὐτῶν· καὶ ἔζησαν καὶ ἐβασίλευσαν μετὰ τοῦ χριστοῦ χίλια ἔτη. 5 οἱ λοιποὶ τῶν νεκρῶν οὐκ ἔζησαν ἄχρι τελεσθῇ τὰ χίλια ἔτη. αὕτη ἡ ἀνάστασις ἡ πρώτη. 6 μακάριος καὶ ἅγιος ὁ ἔχων μέρος ἐν τῇ ἀναστάσει τῇ πρώτῃ· ἐπὶ τούτων ὁ δεύτερος θάνατος οὐκ ἔχει ἐξουσίαν, ἀλλ᾽ ἔσονται ἱερεῖς τοῦ θεοῦ καὶ τοῦ χριστοῦ, καὶ βασιλεύσουσιν μετ᾽ αὐτοῦ [τὰ] χίλια ἔτη.

      4 Et vidi sedes, et sederunt super eas, et judicium datum est illis: et animas decollatorum propter testimonium Jesu, et propter verbum Dei, et qui non adoraverunt bestiam, neque imaginem ejus, nec acceperunt caracterem ejus in frontibus, aut in manibus suis, et vixerunt, et regnaverunt cum Christo mille annis. 5 Ceteri mortuorum non vixerunt, donec consummentur mille anni. Hæc est resurrectio prima. 6 Beatus, et sanctus, qui habet partem in resurrectione prima: in his secunda mors non habet potestatem: sed erunt sacerdotes Dei et Christi, et regnabunt cum illo mille annis.

      내가 또 보좌들을 보니,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나는,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베인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서, 천 년 동안 그와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둘째 부활"은 "첫째 부활" 때 부활하지 못한 모든 인류의 부활이며, 이들은 징벌로서 "둘째 사망"을 겪는다.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은 옥에서 풀려나서,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고 그들을 모을 것인데, 그들의 수는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면으로 올라와서, 성도들의 진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도시를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들을 미혹하던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로 던져졌는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영원히, 밤낮으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11 καὶ εἶδον θρόνον μέγαν λευκὸν καὶ τὸν καθήμενον ἐπ᾽ αὐτόν, οὖ ἀπὸ τοῦ προσώπου ἔφυγεν ἡ γῆ καὶ ὁ οὐρανός, καὶ τόπος οὐχ εὑρέθη αὐτοῖς. 12 καὶ εἶδον τοὺς νεκρούς, τοὺς μεγάλους καὶ τοὺς μικρούς, ἑστῶτας ἐνώπιον τοῦ θρόνου, καὶ βιβλία ἠνοίχθησαν· καὶ ἄλλο βιβλίον ἠνοίχθη, ὅ ἐστιν τῆς ζωῆς· καὶ ἐκρίθησαν οἱ νεκροὶ ἐκ τῶν γεγραμμένων ἐν τοῖς βιβλίοις κατὰ τὰ ἔργα αὐτῶν. 13 καὶ ἔδωκεν ἡ θάλασσα τοὺς νεκροὺς τοὺς ἐν αὐτῇ, καὶ ὁ θάνατος καὶ ὁ ᾅδης ἔδωκαν τοὺς νεκροὺς τοὺς ἐν αὐτοῖς, καὶ ἐκρίθησαν ἕκαστος κατὰ τὰ ἔργα αὐτῶν. 14 καὶ ὁ θάνατος καὶ ὁ ᾅδης ἐβλήθησαν εἰς τὴν λίμνην τοῦ πυρός. οὖτος ὁ θάνατος ὁ δεύτερός ἐστιν, ἡ λίμνη τοῦ πυρός. 15 καὶ εἴ τις οὐχ εὑρέθη ἐν τῇ βίβλῳ τῆς ζωῆς γεγραμμένος ἐβλήθη εἰς τὴν λίμνην τοῦ πυρός.

      11 Et vidi thronum magnum candidum, et sedentem super eum, a cujus conspectu fugit terra, et cælum, et locus non est inventus eis. 12 Et vidi mortuos, magnos et pusillos, stantes in conspectu throni, et libri aperti sunt: et alius liber apertus est, qui est vitæ: et judicati sunt mortui ex his, quæ scripta erant in libris, secundum opera ipsorum: 13 et dedit mare mortuos, qui in eo erant: et mors et infernus dederunt mortuos suos, qui in ipsis erant: et judicatum est de singulis secundum opera ipsorum. 14 Et infernus et mors missi sunt in stagnum ignis. Hæc est mors secunda. 15 Et qui non inventus est in libro vitæ scriptus, missus est in stagnum ignis.

      나는 크고 흰 보좌와 거기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마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또 죽은 사람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다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책들을 펴놓고, 또 다른 책 하나를 펴놓았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가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고, 사망과 지옥도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망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사망입니다.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다 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 한국어 새번역, {요한 계시록}

      제 21장에서는 보좌에 앉은 신은 "둘째 사망"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5 καὶ εἶπεν ὁ καθήμενος ἐπὶ τῶ θρόνῳ, ἰδοὺ καινὰ ποιῶ πάντα. καὶ λέγει, γράψον, ὅτι οὖτοι οἱ λόγοι πιστοὶ καὶ ἀληθινοί εἰσιν. 6 καὶ εἶπέν μοι, γέγοναν. ἐγώ [εἰμι]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ὦ, ἡ ἀρχὴ καὶ τὸ τέλος. ἐγὼ τῶ διψῶντι δώσω ἐκ τῆς πηγῆς τοῦ ὕδατος τῆς ζωῆς δωρεάν. 7 ὁ νικῶν κληρονομήσει ταῦτα, καὶ ἔσομαι αὐτῶ θεὸς καὶ αὐτὸς ἔσται μοι υἱός. 8 τοῖς δὲ δειλοῖς καὶ ἀπίστοις καὶ ἐβδελυγμένοις καὶ φονεῦσιν καὶ πόρνοις καὶ φαρμάκοις καὶ εἰδωλολάτραις καὶ πᾶσιν τοῖς ψευδέσιν τὸ μέρος αὐτῶν ἐν τῇ λίμνῃ τῇ καιομένῃ πυρὶ καὶ θείῳ, ὅ ἐστιν ὁ θάνατος ὁ δεύτερος.

      5 Et dixit qui sedebat in throno: Ecce nova facio omnia. Et dixit mihi: Scribe, quia hæc verba fidelissima sunt, et vera. 6 Et dixit mihi: Factum est: ego sum alpha et omega, initium et finis. Ego sitienti dabo de fonte aquæ vitæ, gratis. 7 Qui vicerit, possidebit hæc: et ero illi Deus, et ille erit mihi filius. 8 Timidis autem, et incredulis, et execratis, et homicidis, et fornicatoribus, et veneficis, et idolatris, et omnibus mendacibus, pars illorum erit in stagno ardenti igne et sulphure: quod est mors secunda.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신실하지 못한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 한국어 새번역, {요한 계시록}

      따라서 죽은 자가 기다리는 것은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둘째 사망" 뿐이다. 혹시 여기서 윤회나 환생의 개념을 추출할 수 있을까?



      AD 307년, 훗날 콘스탄티누스 1세의 종교자문이자 그의 아들 크리스푸스를 가르치기도 했던 북아프리카 출신 라틴교부이자 수사학자 락탄티누스는 이 "둘째 사망"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Man, therefore, was made from different and opposite substances, as the world itself was made from light and darkness, from life and death; and he has admonished us that these two things contend against each other in man: so that if the soul, which has its origin from God, gains the mastery, it is immortal, and lives in perpetual light; if, on the other hand, the body shall overpower the soul, and subject it to its dominion, it is in everlasting darkness and death. And the force of this is not that it altogether annihilates the souls of the unrighteous, but subjects them to everlasting punishment. And the force of this is not that it altogether annihilates the souls of the unrighteous, but subjects them to everlasting punishment. We term that punishment the second death, which is itself also perpetual, as also is immortality. We thus define the first death: Death is the dissolution of the nature of living beings; or thus: Death is the separation of body and soul. But we thus define the second death: Death is the suffering of eternal pain; or thus: Death is the condemnation of souls for their deserts to eternal punishments. This does not extend to the dumb cattle, whose spirits, not being composed of God, but of the common air, are dissolved by death. --- Lactantinus Book II. Of the Origin of Error

      인간은 그래서 서로 다르고 상반되는 구성물로 이뤄져 있는데, 이는 마치 세상 자체가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같다. 그는 이 두가지 구성물으 사람 안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만약 신에게서 온 영혼이 주도력을 획득하며, 인간은 불멸하며 영원한 빛 속에 살 수 있다. 반대로 육체가 영혼을 압도하여 육체의 영역으로 영혼을 복종시키면, 그는 영원한 어둠과 죽음 가운데 있게 된다. 이 영향력은 불의한 자의 영혼을 철저하게 멸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별의 대상이 되게 한다. 우리는 이 형벌을 "둘째 사망"이라고 부르는데, 이 형벌 또한 영속적이며 또한 불멸하다. 우리는 "첫째 사망"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 경우 죽음은 생물의 속성이 분해되는 것이며, 신체와 혼의 분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의하는 "둘째 사망"의 경우, 죽음은 영원한 고통을 말하며, 따라서 영원한 형벌 가운데 버려지는 영혼의 정죄에 해당한다. 이 형벌은 그 영이 신적이지 않고 공기로 구성되어 죽으면 흩어지는 지각없는 짐승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 락탄티누스, {오류의 기원들} 제 2권 / 번역: 최광민

      톨레.
      레게.




      § 유스티노스 (AD 100 - 165)

      흔히들 기독교 초기 교부이자 기독교 "철학자"인 유스티노스를 "기독교 윤회론자"로 언급하고는 하는데, 이것은 사실을 정반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오류가 발생하였는지에 대해서 다루겠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그의 저작 {트리폰과의 대화, Dialogue with Trypho} 제 4장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이끌어내는데, 그 주장에 따르면 바로 여기에서 유스티노스가 윤회와 환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심지어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읽어보자. 해당 부분을 그리스어 영어번역에서 한국어로 중역하겠다. 이 장면은 유스티노스가 네아폴리스 혹은 에페소스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기독교도 노인을 만나 대화를 나눈 후 플라톤 철학을 버리는 계기가 된 사건을, 유스티노스 본인이 유대인 (랍비) 트리폰에게 설명하는 대목이다. (http://khazarzar.skeptik.net/books/justinus/tryphong.htm)


      http://archive.org/stream/writingsofjustin00justuoft?ui=embed#mode/2up

      Πῶς οὖν ἄν, ἔφη, περὶ θεοῦ ὀρθῶς φρονοῖεν οἱ φιλόσοφοι ἢ λέγοιέν τι ἀληθές, ἐπιστήμην αὐτοῦ μὴ ἔχοντες, μηδὲ ἰδόντες ποτὲ ἢ ἀκούσαντες

      How, then, should the philosophers judge correctly about God, or speak any truth, when they have no knowledge of Him, having neither seen Him at any time, nor heard Him?

      [기독교도 노인] 철학자들이 신에 대해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 신을 본 적도 그의 말을 들을 적도 없다면, 도대체 철학자들은 어떻게 신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하거나 어떤 진리를 말할 수 있다는 건가요?


      Οὐ γάρ, φημί. Πῶς οὖν ἄν, ἔφη, περὶ θεοῦ ὀρθῶς φρονοῖεν οἱ φιλόσοφοι ἢ λέγοιέν τι ἀληθές, ἐπιστήμην αὐτοῦ μὴ ἔχοντες, μηδὲ ἰδόντες ποτὲ ἢ ἀκούσαντες; Ἀλλ' οὐκ ἔστιν ὀφθαλμοῖς, ἦν δ' ἐγώ, αὐτοῖς, πάτερ, ὁρατὸν τὸ θεῖον ὡς τὰ ἄλλα ζῶα, ἀλλὰ μόνῳ νῷ καταληπτόν,
      ὥς φησι Πλάτων, καὶ ἐγὼ πείθομαι αὐτῷ.

      Justin: But, father, the Deity cannot be seen merely by the eyes, as other living beings can, but is discernible to the mind alone, as Plato says; and I believe him.

      [철학자 유스티노스] 플라톤이 말한 바대로, 다른 생명체와 달리 성부, 즉 신을 단순히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만 정신을 통해 인식할 수 있죠. 저는 그 말을 믿습니다.

      [Chapter 4. The soul of itself cannot see God]

      Old Man: Is there, then, such and so great power in our mind? Or can a man not perceive by sense sooner? Will the mind of man see God at any time, if it is uninstructed by the Holy Spirit?

      [노인] 우리 정신 안에 그렇게 큰 능력이 있나요? 인간은 감관을 통해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없나요? 성령의 지도를 받지 않아도 인간의 정신은 신을 아무 때라도 볼 수 있습니까?

      Justin: Plato indeed says that the mind's eye is of such a nature, and has been given for this end, that we may see that very Being when the mind is pure itself, who is the cause of all discerned by the mind, having no colour, no form, no greatness—nothing, indeed, which the bodily eye looks upon; but It is something of this sort, he goes on to say, that is beyond all essence, unutterable and inexplicable, but alone honourable and good, coming suddenly into souls well-dispositioned, on account of their affinity to and desire of seeing Him.

      Old Man: What affinity, then, is there between us and God? Is the soul also divine and immortal, and a part of that very regal mind? And even as that sees God, so also is it attainable by us to conceive of the Deity in our mind, and thence to become happy?

      Justin: Assuredly.

      ‘And do all the souls of all living beings comprehend Him?’ he asked; ‘or are the souls of men of one kind and the souls of horses and of asses of another kind?’

      [노인] 모든 생물들의 영혼은 신을 인식할 수 있나요? 인간의 영혼과 말이나 나귀의 영혼은 서로 다른 존재인가요?

      “ ‘No; but the souls which are in all are similar,’ I answered.

      [유스티노스] 아닙니다. 그러나 영혼들은 전체적으로 볼때 서로 유사합니다.

      “ ‘Then,’ says he, ‘shall both horses and asses see, or have they seen at some time or other, God?’

      [노인] 그럼 말이나 나귀의 영혼도 때때로 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인가요?

      “ ‘No,’ I said; ‘for the majority of men will not, saving such as shall live justly, purified by righteousness, and by every other virtue.’

      [유스티노스]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오직 올바로 살며 정의 및 다른 덕목들에 의해 순결해진 사람들만 그럴 수 있습니다.

      “ ‘It is not, therefore,’ said he, ‘on account of his affinity, that a man sees God, nor because he has a mind, but because he is temperate and righteous?’

      [노인] 그러니까 인간과 신의 친밀도에 관한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인간은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바르고 옳기 때문에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이겠군요.

      “ ‘Yes,’ said I; ‘and because he has that whereby he perceives God.’

      [유스티노스] 그렇습니다. 그는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가 신을 볼 수 있는 겁니다.

      “ ‘What then? Do goats or sheep injure any one?’

      [노인] 그렇다면.... 염소나 양이 다른 동물들에게 다른 상해를 입히던가요?

      “ ‘No one in any respect,’ I said.

      [유스티노스] 그렇지 않습니다.

      “ ‘Therefore these animals will see [God] according to your account,’ says he.

      [노인] 그렇다면 이 동물들도 신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No; for their body being of such a nature, is an obstacle to them.’

      [유스티노스] 아니죠. 그들의 육체가 방해가 되어 그들은 그리하지 못합니다.

      “He rejoined, ‘If these animals could assume speech, be well assured that they would with greater reason ridicule our body; but let us now dismiss this subject, and let it be conceded to you as you say. Tell me, however, this: Does the soul see [God] so long as it is in the body, or after it has been removed from it?’“

      [노인] (전략) 자, 그럼 이 경우에 대해 말해 보시지요. 영혼은 육체 안에 있을때 신을 봅니까? 아니면 육체를 떠났을 때 그러합니까?

      ‘So long as it is in the form of a man, it is possible for it,’ I continue, ‘to attain to this by means of the mind; but especially when it has been set free from the body, and being apart by itself, it gets possession of that which it was wont continually and wholly to love.’

      [유스티노스] 육체 안에 있을때는 정신을 통해 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는 영혼이 육체를 떠났을 때나 육체로부터 거리를 둘 때 가능합니다. (후략)

      “ ‘Does it remember this, then [the sight of God], when it is again in the man?’

      [노인] 영혼은 다시 사람의 몸에 들어올때 전에 신을 보았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나요?

      "It does not appear to me so," I said.

      [유스티노스] 그럴 것 같진 않군요

      “ ‘What, then, is the advantage to those who have seen [God]? or what has he who has seen more than he who has not seen, unless he remember this fact, that he has seen?’

      [노인] 그렇다면 신을 보았다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나요? 만약 그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신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나요?

      “ ‘I cannot tell,’ I answered.

      [유스티노스] 차이를 말할 수 없습니다.

      Αἱ δὲ ἀνάξιαι ταύτης τῆς θέας κριθεῖσαι τί πάσχουσιν; ἔφη.

      ‘And what do those suffer who are judged to be unworthy of this spectacle?’ said he.

      [노인] 신을 볼 자격이 없는 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무엇인가요?

      Εἴς τινα θηρίων ἐνδεσμεύονται σώματα, καὶ αὕτη ἐστὶ κόλασις αὐτῶν.

      ‘They are imprisoned in the bodies of certain wild beasts, and this is their punishment.’

      [유스티노스] 들짐승의 몸에 유폐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그들에 대한 징벌입니다.


      Οἴδασιν οὖν ὅτι διὰ ταύτην τὴν αἰτίαν ἐν τοιούτοις εἰσὶ σώμασι καὶ ὅτι ἐξήμαρτόν τι

      ‘Do they know, then, that it is for this reason they are in such forms, and that they have committed some sin?’

      [노인] 그럼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짐승이 된 이유를 알고 있거나, 그들이 전에 어떤 죄를 지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요?


      “ ‘I do not think so.’

      [유스티노스] 아니라고 봅니다.


      Οὐδὲ ταύταις ἄρα ὄφελός τι τῆς κολάσεως, ὡς ἔοικεν· ἀλλ' οὐδὲ κολάζεσθαι αὐτὰς λέγοιμι, εἰ μὴ ἀντιλαμβάνονται τῆς κολάσεως.

      “ ‘Then these reap no advantage from their punishment, as it seems: moreover, I would say that they are not punished unless they are conscious of the punishment.’

      [노인] 그렇다면 그들은 이 징벌을 통해서 얻는 것이 없겠네요
      . 아울러 자신이 벌을 받고있다는 의식이 없다면 그들이 정말 벌을 받고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겠군요.

      "No indeed."

      [유스티노스] 그 말이 맞습니다

      Οὔτε οὖν ὁρῶσι τὸν θεὸν αἱ ψυχαί, οὔτε μεταμείβουσιν εἰς ἕτερα σώματα· ᾔδεσαν γὰρ ἂν ὅτι κολάζονται οὕτως, καὶ ἐφοβοῦντο ἂν καὶ τὸ τυχὸν ἐξαμαρτεῖν ὕστερον. νοεῖν δὲ αὐτὰς δύνασθαι ὅτι ἔστι θεὸς καὶ δικαιοσύνη καὶ εὐσέβεια καλόν, κἀγὼ συντίθεμαι, ἔφη.

      Therefore souls neither see God nor transmigrate into other bodies; for they would know that so they are punished, and they would be afraid to commit even the most trivial sin afterwards. But that they can perceive that God exists, and that righteousness and piety are honourable, I also quite agree with you,’ said he.

      [노인] 그래서 영혼은 신을 보지도 못하고, 또 다른 몸으로 옮겨가지도 않겠군요. 왜냐하면 그들은 벌을 받고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자신들이 범한 아주 사소한 죄에 대해서도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고, 정의와 경건함이 칭송받을 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당신의 설명에 매우 동의합니다.


      “ ‘You are right,’ I replied.

      [유스티노스] 당신 말이 맞습니다.


      --- 유스티노스, {트리폰과의 대화, Dialogue with Trypho}, Ante-Nicene Fathers, Vol. I / 번역: 최광민 



      기독교도 노인과 철학자 유스티노스는 여기서 영혼의 신적기원과 불멸성을 논하면서 순수한 영혼은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당시 플라톤 철학에 매료되어 있던 유스티노스는 윤회/환생을 "언급"한다. 그런데 "유스티노스가 윤회/환생을 믿고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리, 기독교도 노인과의 대화의 마지막에서 유스티노스는 윤회와 환생에 관한 플라톤의 주장을 "기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유스티노스가 의도했던 바이다.

      이 결론을 이끌기 위해 노인은 문답법을 사용한다. 우선 플라톤의 입장에서의 업보에 의해 죄인의 영혼이 동물의 몸으로 환생한다는 플라톤의 교리를 옮긴다. 그리고나서 환생할때 영혼은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게 된다는 플라톤의 교리를 역시 옮긴 후, 그렇다면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방식의 환생을 통한 징벌은 (혹은 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카르마에 따른 보상체계로서의 윤회는) 논리적으로 옳지 않으며, 따라서 "영혼은 신을 볼 수도 다른 육체로 환생하지도 않는다"는 결론을 문답법을 통해 유스티노스로부터 얻어낸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윤회/환생론을 거부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교리에 따라 윤회와 환생과정에서 과거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게 된다면, 따라서 징벌을 받는 자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타당한 형식의 징벌이 될 수 있겠는가?



      아래 대화만 뚝 잘라내면 마치 유스티노스가 플라톤의 윤회/환생이론을 믿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노인] 신을 볼 자격이 없는 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무엇인가요?

      [유스티노스] 그들은 어떤 들짐승의 몸에 유폐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그들에 대한 징벌입니다.

      물론 이 무명의 기독교도 노인과 만나기 전에는 플라톤 철학의 추종자였던 유스티노스가 당시까지는 플라톤의 이론을 믿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플라톤 철학자 유스티노스는 기독교도 노인과의 대화를 위해 플라톤 철학의 교리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기독교도 된 후에도 그것을 "믿거나" 심지어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인용된 문장을 읽을때는 인용된 문장의 앞뒤의 맥락을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결국 이 대화 속에서 유스티노스가 플라톤에게 동의한 플라톤 철학의 교리는 "인간은 정신을 통해서 신을 인식할 수 있다"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유스티노스는 기독교도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플라톤 철학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어 "기독교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래서 소위 "윤회/환생론자" 유스티노스란 그가 플라톤 철학에 머물던 시절에나 적용되는 말일 뿐이다. 앞의 대화에서도 보이듯,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엔 (징벌적) 환생과 윤회에 대한 플라톤 철학의 교리를 모두 버렸다.

      유스티노스는 사실 아래와 같은 몸-혼-영 삼분론으로 인간의 구성과 부활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한다.

      The resurrection is a resurrection of the flesh which died. For the spirit dies not; the soul is in the body, and without a soul it cannot live. The body, when the soul forsakes it, is not. For the body is the house of the soul; and the soul the house of the spirit. These three, in all those who cherish a sincere hope and unquestioning faith in God, will be saved. -- {On Resurrection} Chapter X

      부활은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영은 죽지 않으며, 몸 안에는 혼이 있고, 혼이 없으면 몸은 살지 못한다. 혼은 몸을 떠나나 몸은 그렇지 못하다. 영이 머무는 곳은 혼이다. 신에 대한 신실하고 의심없는 믿음을 사모하는 이들 안에 있는 이 셋 (=몸, 혼, 영)은 장차 구원받을 것이다.... --- 유스티노스, {부활에 대하여} 제 10장 / 번역: 최광민

      톨레.
      레게.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클레멘트 (AD c150 - c215)

      이런 류의 주장 속에서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스(트) 역시 "윤회론을 가르친 기독교 교부"로 주장되는 인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마도 그리스 아테네 태생으로 보이는 그는 플라톤 철학의 교육을 받은 인물로, 그의 많은 논증은 플라톤 철학의 용어와 색채를 보이고 있으며, 따라서 그가 플라톤 철학의 영혼전이설을 믿은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는 있다.

      아래 구절이 바로 그런 가르침을 입증한다면서 종종 제시된다. 사실 이런 주장을 유포하는 이들은 한가지 잘못 알고 있는데, 이 구절은 클레멘스에게 일반적 형태의 "윤회/환생론자"가 아니라 플라톤식 "영혼선재론자"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을 뿐인 내용이다. 플라톤의 영혼선재론은 윤회론이나 환생론과는 꽤 다른 수준의 이야기다.

      그럼 한번 읽어보자.


      Clement of Alexandria, {The exhortation to the Greeks}, https://archive.org/details/theexhortationto00clemuoft


      http://archive.org/stream/writingsofclemen01clem?ui=embed#mode/2up

      Whether, then, the Phrygians are shown to be the most ancient people by the goats of the fable; or, on the other hand, the Arcadians by the poets, who describe them as older than the moon; or, finally, the Egyptians by those who dream that this land first gave birth to gods and men: yet none of these at least existed before the world.

      우화 속의 염소 이야기를 보면 프리기아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다. 반면, 아카디아인들의 시에 따르면 그들은 달보다도 오래된 민족이다. 이집트인들에 따르면 땅이 먼저 신들과 사람들을 낳았다. 그러니까 신들과 인간은 세상이 있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 번역: 최광민



      But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were we, who, because destined to be in Him, pre-existed in the eye of God before—we the rational creatures of the Word of God, on whose account we date from the beginning; for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그러나 신 안에 존재하게 정해진 우리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이미 선재하고 있었다. 신의 말씀(=로고스)에 의한 이성적인 피조물인 우리는 태초로부터 있었는데, 태초에 말씀이 계셨기 때문이다. / 번역: 최광민

      Well, inasmuch as the Word was from the first, He was and is the divine source of all things; but inasmuch as He has now assumed the name Christ, consecrated of old, and worthy of power, he has been called by me the New Song. This Word, then, the Christ, the cause of both our being at first (for He was in God) and of our well-being, this very Word has now appeared as man, He alone being both, both God and man— the Author of all blessings to us; by whom we, being taught to live well, are sent on our way to life eternal. For, according to that inspired apostle of the Lord, "the grace of God which brings salvation has appeared to all men, teaching us, that, denying ungodliness and worldly lusts, we should live soberly, righteously, and godly, in this present world; looking for the blessed hope, and appearing of the glory of the great God and our Saviour Jesus Christ." Titus 2:11-13

      --- Clement of Alexandria, {Exhortation to the Heathen} Source. Translated by William Wilson. From Ante-Nicene Fathers, Vol. 2.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5.)  번역: 최광민

      사실 클레멘스는 여기서 영혼의 "물리적" 선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클레멘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태초에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인간은 신의 예정 안에 존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왜? 인간의 영혼은 이성/로고스적인 존재로서 로고스에 참여하고 있는데, 한편 신의 말씀인 로고스 (성자, 예수)는 태초부터 성부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기는 했어도 대체로 건전한 기독교 교리를 믿고 가르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다. 따라서 그는 통상적 의미의 "영혼선재론자"로 분류되기에도 타당하지 않다.

      "영혼선재론", 심지어 "윤회/환생론"을 "믿고" 또 "가르쳤다"는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스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톨레.
      레게.




      § 리그두눔 주교 이레네우스 (? - AD 202)

      시리아 혹은 소아시아 출신일 것으로 추정되는 루그두눔(=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는 예수의 사도로부터 두 세대 안에 있는 인물로서,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예수의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카포스를 청문했다. 이레네우스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와 함께 AD 2세기 말의 가장 영향력있는 신학자로 꼽힌다.

      그노시스 이단 전문가인 이레네우스는 영혼의 윤회와 환생에 관한 피타고라스/플라톤 철학의 주장들을 교회에 침투시킨 자들을 거침없이 이단으로 간주하고 비난한다.

      한 예를 읽어보자. 플라톤 철학의 영혼론에 대해 이레네우스는 아래와 같이 일갈한다.


      http://archive.org/stream/writingsofirenae01iren?ui=embed#mode/2up

      Absurdity of the doctrine of the transmigration of souls.

      1. We may subvert their doctrine as to transmigration from body to body by this fact, that souls remember nothing whatever of the events which took place in their previous states of existence. For if they were sent forth with this object, that they should have experience of every kind of action, they must of necessity retain a remembrance of those things which have been previously accomplished, that they might fill up those in which they were still deficient, and not by always hovering, without intermission, round the same pursuits, spend their labour wretchedly in vain (for the mere union of a body [with a soul] could not altogether extinguish the memory and contemplation of those things which had formerly been experienced ), and especially as they came [into the world] for this very purpose. For as, when the body is asleep and at rest, whatever things the soul sees by herself, and does in a vision, recollecting many of these, she also communicates them to the body; and as it happens that, when one awakes, perhaps after a long time, he relates what he saw in a dream, so also would he undoubtedly remember those things which he did before he came into this particular body. For if that which is seen only for a very brief space of time, or has been conceived of simply in a phantasm, and by the soul alone, through means of a dream, is remembered after she has mingled again with the body, and been dispersed through all the members, much more would she remember those things in connection with which she stayed during so long a time, even throughout the whole period of a by past life.

      2. With reference to these objections, Plato, that ancient Athenian, who also was the first to introduce this opinion, when he could not set them aside, invented the [notion of] a cup of oblivion, imagining that in this way he would escape this sort of difficulty. He attempted no kind of proof [of his supposition], but simply replied dogmatically [to the objection in question], that when souls enter into this life, they are caused to drink of oblivion by that demon who watches their entrance [into the world], before they effect an entrance into the bodies [assigned them]. It escaped him, that [by speaking thus] he fell into another greater perplexity. For if the cup of oblivion, after it has been drunk, can obliterate the memory of all the deeds that have been done, how, O Plato, do you obtain the knowledge of this fact (since your soul is now in the body), that, before it entered into the body, it was made to drink by the demon a drug which caused oblivion? For if you have a remembrance of the demon, and the cup, and the entrance [into life], you ought also to be acquainted with other things; but if, on the other hand, you are ignorant of them, then there is no truth in the story of the demon, nor in the cup of oblivion prepared with art.

      이 견해를 처음 도입한 고대 아테네인 플라톤은, 이런 반론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주장의 근거로 '망각의 컵'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난점을 회피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고, 단지 영혼들이 할당된 새로운 육체로 들어가기 직전에 입구를 지키는 다이몬에 의해서 망각의 음료를 마시게 된다며 교조적으로 답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함으로써 플라톤은 더 난처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만약 망각의 음료를 먹은 후 그 전에 있었던 모든 기억들이 삭제되는 것이라면...오, 플라톤이여! (현 육체 속에 영혼이 들어있는)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이 지식을 얻은 것인가? 육체로 들어 오기 전에 다이몬에 의해 주어진 약에 의해 모두 잊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만약 당신이 다이몬과 컵과 육체로 들어오는 입구를 기억한다면, 다른 모든 것들도 기억함이 분명하다. 반면, 만약 당신이 그런 것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다이몬이니 망각의 컵이니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 / 번역: 최광민

      3. In opposition, again, to those who affirm that the body itself is the drug of oblivion, this observation may be made: How, then, does it come to pass, that whatsoever the soul sees by her own instrumentality, both in dreams and by reflection or earnest mental exertion, while the body is passive, she remembers, and reports to her neighbours? But, again, if the body itself were [the cause of] oblivion, then the soul, as existing in the body, could not remember even those things which were perceived long ago either by means of the eyes or the ears; but, as soon as the eye was turned from the things looked at, the memory of them also would undoubtedly be destroyed. For the soul, as existing in the very [cause of] oblivion, could have no knowledge of anything else than that only which it saw at the present moment. How, too, could it become acquainted with divine things, and retain a remembrance of them while existing in the body, since, as they maintain, the body itself is [the cause of] oblivion? But the prophets also, when they were upon the earth, remembered likewise, on their returning to their ordinary state of mind, whatever things they spiritually saw or heard in visions of heavenly objects, and related them to others. The body, therefore, does not cause the soul to forget those things which have been spiritually witnessed; but the soul teaches the body, and shares with it the spiritual vision which it has enjoyed.

      4. For the body is not possessed of greater power than the soul, since indeed the former is inspired, and vivified, and increased, and held together by the latter; but the soul possesses and rules over the body. It is doubtless retarded in its velocity, just in the exact proportion in which the body shares in its motion; but it never loses the knowledge which properly belongs to it. For the body may be compared to an instrument; but the soul is possessed of the reason of an artist. As, therefore, the artist finds the idea of a work to spring up rapidly in his mind, but can only carry it out slowly by means of an instrument, owing to the want of perfect pliability in the matter acted upon, and thus the rapidity of his mental operation, being blended with the slow action of the instrument, gives rise to a moderate kind of movement [towards the end contemplated]; so also the soul, by being mixed up with the body belonging to it, is in a certain measure impeded, its rapidity being blended with the body's slowness. Yet it does not lose altogether its own peculiar powers; but while, as it were, sharing life with the body, it does not itself cease to live. Thus, too, while communicating other things to the body, it neither loses the knowledge of them, nor the memory of those things which have been witnessed.

      5. If, therefore, the soul remembers nothing of what took place in a former state of existence, but has a perception of those things which are here, it follows that she never existed in other bodies, nor did things of which she has no knowledge, nor [once] knew things which she cannot [now mentally] contemplate. But, as each one of us receives his body through the skilful working of God, so does he also possess his soul. For God is not so poor or destitute in resources, that He cannot confer its own proper soul on each individual body, even as He gives it also its special character. And therefore, when the number [fixed upon] is completed, [that number] which He had predetermined in His own counsel, all those who have been enrolled for life [eternal] shall rise again, having their own bodies, and having also their own souls, and their own spirits, in which they had pleased God. Those, on the other hand, who are worthy of punishment, shall go away into it, they too having their own souls and their own bodies, in which they stood apart from the grace of God. Both classes shall then cease from any longer begetting and being begotten, from marrying and being given in marriage; so that the number of mankind, corresponding to the fore-ordination of God, being completed, may fully realize the scheme formed by the Father.

      --- Irenaeus of Lyon, {Against Heresies}, Book 2, Chapter 33, Translated by Alexander Roberts and William Rambaut. From Ante-Nicene Fathers, Vol. 1.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5.) 번역: 최광민

      이레네우스를 윤회/환생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의 {이단을 반박하며}를 전혀 읽어보지 않고 그저 상상 속의 주장만 펼치는가 보다.

      톨레.
      레게.




      § 로마 사제 히폴리투스 (AD 170 - 235)

      루그두눔 주교 이레네우스의 제자로 전해지는 로마 사제 히폴리투스는 그의 {그리스인들에게 고함: 하데스/저승에 대해, Discourse To The The Greeks Concerning Hades}에서 초기 기독교도들의 저승관과 부활관을 플라톤의 저승/환생/윤회개념과 대비시킨다. (이 논문은 영어로 번역되면서 한때 요세푸스의 저작으로 잘못 분류된 적이 있다.)

      이 문서에 묘사된 저승/하데스는 {복음서}와 {요한 계시록}의 묘사를 증보한 것으로, 앞서 언급한 {에녹서}의 묘사와 매우 흡사하다. 초기 기독교의 개념 속에서 "모든 죽은 자"는 저승에 가서 선인/악인으로 구분되어 심판 때까지 수용된다.  여기엔 윤회/환생의 개념이 등장할 수 없다. (1) 모든 죽은 자가 저승에서 분리수용되어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며, (2) 이 심판은 세상의 마지막에 한 차례 있는데다가, (3) 죽은 자가 육체를 부여받는 것은 이 때 한번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하데스는 두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의인들은 "아브라함의 품"의 평온함 가운데서 최후의 심판과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는 반면, 악인들은 실재적인 징벌은 아직 내려져 있지 않지만 불연못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장차 지옥에서의 징벌을 예상하면서 최후의 심판까지 공포 속에 보내게 된다. {요한 계시록}에 따르면, 이 불연못은 "둘째 부활"로 부활하는 자들이 "둘째 사망"과 함께 던져질 최후의 형벌이다.

      William Whiston의 번역으로 해당부분을 읽어보자.

      1. NOW as to Hades, wherein the souls of the of the good things they see, and rejoice in the righteous and unrighteous are detained, it is necessary to speak of it. Hades is a place in the world not regularly finished; a subterraneous region, wherein the light of this world does not shine; from which circumstance, that in this region the light does not shine, it cannot be but there must be in it perpetual darkness. This region is allotted as a place of custody for souls, in which angels are appointed as guardians to them, who distribute to them temporary punishments, agreeable to every one's behavior and manners.

      ......[전략]....
      이 장소 (하데스)는 영혼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관리하기 위해 천사들이 배정되어 있으며 그들은 영혼들을 각자의 행위와 삶에 따라 일시적인 징벌을 부과한다.  / 번역: 최광민

      2. In this region there is a certain place set apart, as a lake of unquenchable fire, whereinto we suppose no one hath hitherto been cast; but it is prepared for a day afore-determined by God, in which one righteous sentence shall deservedly be passed upon all men; when the unjust, and those that have been disobedient to God, and have given honor to such idols as have been the vain operations of the hands of men, as to God himself, shall be adjudged to this everlasting punishment, as having been the causes of defilement; while the just shall obtain an incorruptible and never-fading kingdom. These are now indeed confined in Hades, but not in the same place wherein the unjust are confined. 3. For there is one descent into this region, at whose gate we believe there stands an archangel with an host; which gate when those pass through that are conducted down by the angels appointed over souls, they do not go the same way; but the just are guided to the right hand, and are led with hymns, sung by the angels appointed over that place, unto a region of light, in which the just have dwelt from the beginning of the world; not constrained by necessity, but ever enjoying the prospect of the good things they see, and rejoice in the expectation of those new enjoyments which will be peculiar to every one of them, and esteeming those things beyond what we have here; with whom there is no place of toil, no burning heat, no piercing cold, nor are any briers there; but the countenance of the fathers and of the just, which they see always, smiles upon them, while they wait for that rest and eternal new life in heaven, which is to succeed this region. This place we call The Bosom of Abraham.

      이 곳에는 꺼지지 않는 불의 연못이 있는데 아직까지는 아무도 불연못에 던져지지는 않았다고 우리는 여긴다. 그러나 이 연못은 신의 정의로운 심판이 온 인류에게 내려질 때까지 미리 준비되어 있는 장소다. 부정한 자와 신에게 불복한 자들, 그리고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헛된 우상을 마치 신 본인인 양 숭배했던 자들은 타락을 세상에 불러들였기에 이 영원한 징벌 가운데 던져질 것이다. 반면에 정의롭게 살았던 자는 썩지않고 영원히 시들지 않는 왕국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정의로운 이들이 현재 하데스/저승에 현재 격리되어 있긴 하지만, 부정한 자들과 같이 격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중략]... (의인을 위한) 이 장소를 우리는 "아브라함의 품"이라 부른다. / 번역: 최광민

      4. But as to the unjust, they are dragged by force to the left hand by the angels allotted for punishment, no longer going with a good will, but as prisoners driven by violence; to whom are sent the angels appointed over them to reproach them and threaten them with their terrible looks, and to thrust them still downwards. Now those angels that are set over these souls, drag them into the neighborhood of hell itself; who, when they are hard by it, continually hear the noise of it, and do not stand clear of the hot vapor itself; but when they have a near view of this spectacle, as of a terrible and exceeding great prospect of fire, they are struck with a fearful expectation of a future judgment, and in effect punished thereby: and not only so, but where they see the place [or choir] of the fathers and of the just, even hereby are they punished; for a chaos deep and large is fixed between them; insomuch that a just man that hath compassion upon them cannot be admitted, nor can one that is unjust, if he were bold enough to attempt it, pass over it.

      불의한 자들은.......[중략]....천사들에게 이끌려 지옥의 변두리로 끌려간다....[중략]....거기 서서 끊임없는 지옥의 소음과 뜨거운 연기 가운데서....[중략]... 그들은 미래에 있을 두려운 심판을 떨며 기다리는데 이렇게 사실상 그들은 징벌을 받고 있다.....
      / 번역: 최광민

      5. This is the discourse concerning Hades, wherein the souls of all men are confined until a proper season, which God hath determined, when he will make a resurrection of all men from the dead, not procuring a transmigration of souls from one body to another, but raising again those very bodies, which you Greeks, seeing to be dissolved, do not believe [their resurrection]. But learn not to disbelieve it; for while you believe that the soul is created, and yet is made immortal by God,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Plato, and this in time, be not incredulous; but believe that God is able, when he hath raised to life that body which was made as a compound of the same elements, to make it immortal; for it must never be said of God, that he is able to do some things, and unable to do others. We have therefore believed that the body will be raised again; for although it be dissolved, it is not perished; for the earth receives its remains, and preserves them; and while they are like seed, and are mixed among the more fruitful soil, they flourish, and what is sown is indeed sown bare grain, but at the mighty sound of God the Creator, it will sprout up, and be raised in a clothed and glorious condition, though not before it has been dissolved, and mixed [with the earth]. So that we have not rashly believed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for although it be dissolved for a time on account of the original transgression, it exists still, and is cast into the earth as into a potter's furnace, in order to be formed again, not in order to rise again such as it was before, but in a state of purity, and so as never to be destroyed any more. And to every body shall its own soul be restored. And when it hath clothed itself with that body, it will not be subject to misery, but, being itself pure, it will continue with its pure body, and rejoice with it, with which it having walked righteously now in this world, and never having had it as a snare, it will receive it again with great gladness. But as for the unjust, they will receive their bodies not changed, not freed from diseases or distempers, nor made glorious, but with the same diseases wherein they died; and such as they were in their unbelief, the same shall they be when they shall be faithfully judged.
      --- Hippolytus of Rome, {Discourse To The Greeks Concerning Hades}, tr. William Whiston

      이것이 하데스/저승에 대한 설명이다. 거기서 모든 영혼은 신이 정한 때까지 기다리며 격리되어 있다. 신이 모든 사람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킬 때, 그는 영혼을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전이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바로 그 몸을 부활시킬 것이다. 당신들 그리스인들은 몸이 죽어 해체되어 버린다고 보고 부활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배워서 믿도록 하라. 당신들은 플라톤의 교리에 따라 영혼이 창조되었으되 신에 의해 불멸하게 만들어졌다고 믿는데 이것은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다. 신의 능력을 믿어라. 신이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진 육체를 다시 부활시킬때 신은 그 육체를 불멸하는 몸으로 만드실 수 있다. 신이 어떤 것은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그레서 우리는 육체가 비록 해체되긴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육체가 다시 부활할 것을 믿는다 ...[중략]... 모든 부활한 육체에는 그 자신의 영혼이 다시 회복될 것이다.....[후략]  ---
      히폴리투스, {그리스인들에게 고함: 하데스에 관하여} ./ 번역: 윌리엄 휘스턴 / 중역: 최광민

      히폴리투스의 이 논고는 죽은 육체는 해체되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그 몸의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래서 대신 환생/윤회를 골자로 한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관념을 기독교의 "육체적 부활과 영혼의 회복"이란 교리와 대비시킨 것이다.  즉, 인간은 한 번 죽고, 동일한 영혼에 의해 한 번 부활하고, 한 번 심판받는다.

      히폴리투스의 묘사 가운데, 윤회나 환생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보이는가?

      톨레.
      레게.




      §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AD 160 - 225)

      같은 시대에 활동한 북 아프리카의 교부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 (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이하, 테르툴리아누스)도 종종 "윤회론자"의 리스트에 오른다. 다음의 구절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읽어보자.


      http://archive.org/stream/apologyoftertul00tert?ui=embed#mode/2up

      CHAPTER XLVIII. CONCERNING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Let us now consider a little the different treatment of a philosopher and a Christian. If a philosopher affirms, as Laberius from Pytha- goras has done, that after death the soul of a man departs into a mule, and that of a woman into a serpent, and turns all the sails of eloquence to carry this absurd point, shall not he find credit, and harangue some of you into abstinence even from the flesh of animals ? And will not many scruple to eat a piece of beef, for fear of eating a piece of their ancestors ?

      But now if a Christian shall affirm that man shall be made man again after death, and Caius rise the very same Caius again, he is in danger of being mobbed, and having all the sticks and stones in the street presently about his ears. But if you can find it reasonable to believe the transmigration of human souls from body to body, why should you think it incredible for the soul to return to the substance it first inhabited?

      죽은 이가 다시 동일한 사람으로 - 즉, 죽은 가이우스가 다시 동일한 가이우스로 - 부활한다고 기독교도들이 말하면, 기독교들은 즉시 길거리에서 막대와 돌맹이로 두들겨 맞을 것이다. 만약 인간의 영혼이 다른 몸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주장을 이성적이라고 당신들이 믿는다면, 왜 이 영혼들이 원래의 몸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주장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인가? / 번역: 최광민

      --- 테르툴리아누스, {변증, Apology} 48. 번역: 최광민

      여기서 테르툴리아누스가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다른 몸으로의 환생"에 대해 "언급"한 것이, 곧 그가 그 종교의 환생교리에 "동의"했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그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그 주장을 '언급'했을 뿐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최후의 심판 때 죽은 자의 영혼이 부활한 새로운 몸으로 돌아올 것을 믿었다. 즉, 한 사람은 한번 태어나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한다.인용 시 앞뒤를 잘라버린 탓에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윤회와 환생을 "믿고" 심지어 "가르친" 테르툴리아누스?

      톨레.
      레게.




      §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 (AD 184-253)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오리게네스는 AD 230년 알렉산드리아 주교 데메트리오스의 허가없이 방문 중이던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리아 마리티마에서 사제직을 받은 일로 징계를 받아 사제직이 (최소한 알렉산드리아 주교의 관할권 아래 있던 이집트에서) 무효화된 동시에 추방된 후, 팔레스티나로 활동지를 옮겨 주로 카이사리아 마리티마에서 활동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아마도 소위 "윤회론자 기독교 교부"로 언급되는 인물들 가운데 오리게네스 만큼 혐의가 크게 드리워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탁월한 교부"로는 칭송되지만 "위대한 성인"으로 공경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그의 몇몇 저술과 학설이 AD 544년과 553년에 각각 이단설로 정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신학사에 있어서의 오리게네스의 위치는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오리게네스가 정말 윤회와 환생을 믿었는가? 아니면 플라톤 철학에 경도된 그의 신학과 저술들이 그의 학설에 대한 그런 오해를 불러온 것일까?

      그런데 AD 543년 콘스탄티노플 (지역)회의와 AD 5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 5차 공회의에서 각각 정죄된 오리게네스의 신학은, 윤회나 환생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혼은 세상의 창조 이전에 존재했었다는 (그래서 현 세상의 창조 이전의 세상을 가정하는) '영혼선재론'과 또 소위 '아포카타스타시스(ἀποκατάστασις)', 혹은 만유회복설, 즉 모든 영혼과 만물의 최종적 회복에 관련된 것 등 이었다.



      우선, 그의 "영혼선재론"부터 살펴보자.

      우선은 오리게네스의 "영혼선재설"이란 불교나 피타고라스/플라톤 철학의 교리에서처럼 그 영혼이 인간 혹은 동물로서의 과거, 즉 "전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란 점을 강조해두겠다. 오리게네스의 이론은 "영"이 인간의 "영혼"으로 오기 전의 상태에 대한 것이다. 윤회/전생과는 무관한 개념이다. 

      오리게네스의 '영혼선재론'은 그저 '영혼이 창조 이전에 존재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예정론"과 연관된 훨씬 복잡한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오리게네스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 어떤 "과거"시점에 신에 의해 직접 창조된다. 그래서 "선재"한다. 즉, 개개 인간의 탄생에 앞서 미리 피조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리게네스의 '영혼선재론'의 기본이며, 따라서 이 '영혼선재론'은 한 영혼의 '전생'과 '윤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리게네스와 달리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영혼이 그 부모로부터 (마치 염색체를 물려받듯) 전수된다고 보았고,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죄가 그 자손들에게 전이된 것으로 '원죄'를 이해했다. 이것은 주로 북-아프리카 라틴교회의 이해였다. 반면, 주로 팔레스티나에서 활동한 히에로니무스는 인간 개인이 탄생할 때마다 신이 그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주로 동방교회들의 이해였다. 히에로니무스와 동시대인이자 북-아프리카 히포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라틴교회의 당시 전통에 따라 때로는 영혼이 부모로부터 전수된다고 보기도 하고, 때로는 히에로니무스처럼 새롭게 창조된다고도 여기는 절충적 입장을 취했다.

      오리게네스 식의 영혼선재론은 AD 553년 콘스탄티노플 제 2차 공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이론이 탄생 이전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근거가 취약한' 가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리게네스의 이 '영혼선재론'은 "신이 구원할 인간을 예정하는 근거"에 대한 그의 논증에서 발전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에 대해 {히브리 성서}의 마지막 책인 예언서 {말라기}에서 히브리인의 신 야훼는 에서(의 후손 / 에돔인)이 아닌 야곱(의 후손 / 히브리인)에 대한 그의 "편애"를 드러낸다.

      다음은 주님께서 말라기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신 말씀이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나 주가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더냐? 나 주가 말한다. 그런데도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에서가 사는 언덕은 벌거숭이로 만들고, 그가 물려받은 땅은 들짐승들에게 넘겨 주었다. 에서의 자손인 에돔이, '비록 우리가 쓰러졌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세우겠다' 하고 장담하지만,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세울 테면 세워 보라고 하여라. 내가 기어이 헐어 버리겠다. '악한 나라, 주에게 영원히 저주받은 백성' 이라고 불릴 것이다. --- 한국어 새번역 {말라기} 1:2-3

      바울은  이 내용을 그의 {로마서} 9장 12-13에서 재인용하면서, 구원에 있어서의 신의 전적인 선택권과 또 자비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이 구절의 해석은 종종 모호해서 현대에서 한 측에서는 이를 "이중중복예정론" (= 태어나기 전에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각각 나누었다는 설명)의 근거로 삼고, 다른 한 축에서는 신의 "예지에 따른 예정"이란 관점으로 이해한다.)

      그뿐만 아니라, 리브가도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수태하였는데,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이라는 원리를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이 살아 있게 하시려고, 또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 한국어 새번역, {로마서} 9:12-13

      신은 도대체 무얼 근거로 이란성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에 대한 호불호를 정했다는 것일까? 오리게네스는 실제로 설령 에서가 죄를 지을 성향을 더 가졌다고는 해도, 태어나서 실제로 그 죄를 범하기 훨씬 이전에 신이 그 '성향'만 가지고 '에서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신은 영혼의 창조자인 동시에 그 영혼의 성향조차 창조해 이미 알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는 또 야훼가 예례미아를 예언자로 세우면서 한 선언을 옮긴다.

      내가 받은 야훼의 말씀은 이러하였다."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한국어 공동번역, {예레미아} 1:4-5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이런 결론을 도출한다: 신은 야곱과 예레미아가 앞으로 태어나서 할 일이 아니라 그들이 "태어나기 전", 즉 "영의 상태"에서 한 어떤 성향/행위에 근거해 신이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혼의 "윤회"나 "환생"과 관련된 주장일까? 

      물론 아니다. 오리게네스의 주장은 순수하고 원초적인 "영", 즉 "누스"가 "영혼", 즉 "프쉬케"로 강등되었다는 뜻이며, 그 정도에 따라 신의 결정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오리게네스의 이 "영혼선재설"과 "아포카타스타시스 (만유회복)" 이론에 따른 오리게네스의 영혼관을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 신이 창조한 영 (그리스어=누스)들 가운데 일부는 계속 영으로 남기로 선택하고, 일부는 영혼 (그리스어=프시케, 라틴어=아니마)가 되기로 선택한다. 즉, 강등된다. 오리게네스가 보기에 후자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는데, 결국 영혼/프시케는 육체에 속박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란 영/누스가 영혼/프시케를 선택한 결과 육체에 갇히는 벌을 받은 영/누스가 된다. 따라서 오리게네스가 보기에 인간의 구원사란, 육체에 속박된 영혼/프시케가 본래의 영/누스로 회복되는 과정이 된다. 심지어 (진위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오리게네스는 악마들 조차도 이 만유회복의 과정에서 다시 돌이킬 수 있을 것으로 여긴 듯 싶다.

      오리게네스의 가정에 따르면 영은 최소한 한 번의 이 선택을 한다. 따라서 오리게네스의 '아포카타스타시스' 교리에 따르더라도 "영이 영혼이 되는" 것이지 윤회/전생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리게네스는 영들이 이성/로고스가 없는 동물의 몸으로 떨어진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게다가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에 따라 "각 개인", 즉 "각 영혼"의 육체적 부활을 믿었다. 불교나 피타고라스/플라톤 철학에서는 자아를 유지한 각 개별적 영혼의 육체적 부활을 말하는 것이 그들의 교리와 일치할 수 없다.

      AD 543년 콘스탄티노플 지역회의의 판정을 재비준한 AD 553년 제 2차 콘스탄티노플(통산 제 5차) 공회의는 이단으로 판정된 오리게네스의 가르침들을 15개 조항으로 나눠 설명한다. 그럼 여기 어디에 "윤회"와 관련된 주장이 등장하는지 살펴보자. 이 공회의 결의문의 그리스어 원(사)본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꽤 긴 라틴어 사본은 전해진다. 속설들에서 흔히 "오리게네스의 윤회설을 정죄"한다고 주장되는 내용들을 강조해 보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기 언급된 것은 오리게네스의 "윤회론"이 아니라 "영혼선재설" 및 그에 이어지는 "만유회복설 / 아포카타스타시스"에 관한 오리게네스의 이론이다. 라틴어 사본의 영어번역에서 한국어로 중역한다.

      I.

      If anyone asserts the fabulous pre-existence of souls, and shall assert the monstrous restoration which follows from it: let him be anathema.

      영혼선재설 같은 허망한 주장을 펼치거나, 영혼선재설에 따라 괴이한 (만물의 - 필자 주) 회복에 대해 주장하는 자는 누구든 파문당할 것이다. / 번역: 최광민

      II.

      If anyone shall say that the creation (τὴυ παραγωγὴν) of all reasonable things includes only intelligences (νόας) without bodies and altogether immaterial, having neither number nor name, so that there is unity between them all by identity of substance, force and energy, and by their union with and knowledge of God the Word; but that no longer desiring the sight of God, they gave themselves over to worse things, each one following his own inclinations, and that they have taken bodies more or less subtile, and have received names, for among the heavenly Powers there is a difference of names as there is also a difference of bodies; and thence some became and are called Cherubims, others Seraphims, and Principalities, and Powers, and Dominations, and Thrones, and Angels, and as many other heavenly orders as there may be: let him be anathema.

      "모든 이성을 갖춘 존재들의 창조"란 육체가 없고 숫자로나 이름으로 구분돠지 않는 오직 지성/이성 만의 창조를 뜻한다고 주장하.....[중략]....는 자들은 누구든 파문할 것이다. / 번역: 최광민

      III.

      If anyone shall say that the sun, the moon and the stars are also reasonable beings, and that they have only become what they are because they turned towards evil: let him be anathema.

      해와 달과 별들이 이성을 가진 존재이며, 또 (순수한 영이었던 / 필자 주) 그것들이 악으로 기울었기에 현재 모습으로 되었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 파문할 것이다 /
      번역: 최광민.
      IV.

      If anyone shall say that the reasonable creatures in whom the divine love had grown cold have been hidden in gross bodies such as ours, and have been called men, while those who have attained the lowest degree of wickedness have shared cold and obscure bodies and are become and called demons and evil spirits: let him be anathema,.

      이성을 갖춘 피조물 가운데 신적 사랑이 식어 인간이 가진 육체 같은 몸을 가지게 된 존재가 인간이라 불리고, 가장 악하기에 차갑고 불명확한 몸을 가지게 된 존재를 악마와 악령이 되었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 파문할 것이다 / 번역: 최광민

      V.

      If anyone shall say that a psychic (ψυχικὴν) condition has come from an angelic or archangelic state, and moreover that a demoniac and a human condition has come from a psychic condition, and that from a human state they may become again angels and demons, and that each order of heavenly virtues is either all from those below or from those above, or from those above and below: let him be anathema.

      영혼의 상태가 본래 천사적 혹은 대천사적 상태에서 온 것이며, 더 나아가 악마적이거나 인간적 상태가 영혼적 상태로부터 유래했다고 말하거나, 혹은 인간의 상태로부터 인간이 다시 천사적 혹은 악마적 상태로 변할 수 있다거나, 혹은 천상의 여러 등급의 대천사들이 (= heavenly virtues) 그 아래 혹은 그 위에서 온 것이라거나, 혹은 그 모두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나 파문한다/ 번역: 최광민 

      VI.

      If anyone shall say that there is a twofold race of demons, of which the one includes the souls of men and the other the superior spirits who fell to this, and that of all the number of reasonable beings there is but one which has remained unshaken in the love and contemplation of God, and that that spirit is become Christ and the king of all reasonable beings, and that he has created318 all the bodies which exist in heaven, on earth, and between heaven and earth; and that the world which has in itself elements more ancient than itself, and which exists by themselves, viz.: dryness, damp, heat and cold, and the image (ιδέαν) to which it was formed, was so formed, and that the most holy and consubstantial Trinity did not create the world, but that it was created by the working intelligence (Νοῦς δημιρυργός) which is more ancient than the world, and which communicates to it its being: let him be anathema.

      VII.

      If anyone shall say that Christ, of whom it is said that he appeared in the form of God, and that he was united before all time with God the Word, and humbled himself in these last days even to humanity, had (according to their expression) pity upon the divers falls which had appeared in the spirits united in the same unity (of which he himself is part), and that to 319restore them he passed through divers classes, had different bodies and different names, became all to all, an Angel among Angels, a Power among Powers, has clothed himself in the different classes of reasonable beings with a form corresponding to that class, and finally has taken flesh and blood like ours and is become man for men; [if anyone says all this] and does not profess that God the Word humbled himself and became man: let him be anathema.

      VIII.

      If anyone shall not acknowledge that God the Word, of the same substance with the Father and the Holy Ghost, and who was made flesh and became man, one of the Trinity, is Christ in every sense of the word, but [shall affirm] that he is so only in an inaccurate manner, and because of the abasement (κενώσαντα), as they call it, of the intelligence (νοῦς); if anyone shall affirm that this intelligence united (συνημμένον ) to God the Word, is the Christ in the true sense of the word, while the Logos is only called Christ because of this union with the intelligence, and e converso that the intelligence is only called God because of the Logos: let him be anathema.

      IX.

      If anyone shall say that it was not the Divine Logos made man by taking an animated body with a ψυχὴ῾ λογικὴ and νοερὰ, that he descended into hell and ascended into heaven, but shall pretend that it is the Νοῦς which has done this, that Νοῦς of which they say (in an impious fashion) he is Christ properly so called, and that he is become so by the knowledge of the Monad: let him be anathema.

      X.

      If anyone shall say that after the resurrection the body of the Lord was ethereal, having the form of a sphere, and that such shall be the bodies of all after the resurrection; and that after the Lord himself shall have rejected his true body and after the others who rise shall have rejected theirs, the nature of their bodies shall be annihilated: let him be anathema.

      XI.

      If anyone shall say that the future judgment signifies the destruction of the body and that the end of the story will be an immaterial ψύσις, and that thereafter there will no longer be any matter, but only spirit νοῦς): let him be anathema.

      장차 있을 심판은 육체 (=물질)의 종말을 뜻하며 따라서 미래가 오직 비물질적이며 더이상 물질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영 (누스) 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라 주장하는 자는 누구나 파문할 것이다. / 번역: 최광민

      XII.

      If anyone shall say that the heavenly Powers and all men and the Devil and evil spirits are united with the Word of God in all respects, as the Νοῦς which is by them called Christ and which is in the form of God, and which humbled itself as they say; and [if anyone shall say] that the Kingdom of Christ shall have an end: let him be anathema.

      XIII.

      If anyone shall say that Christ [i.e., the Νοῦς] is in no wise different from other reasonable beings, neither substantially nor by wisdom nor by his power and might over all things but that all will be placed at the right hand of God, as well as he that is called by them Christ [the Νοῦς], as also they were in the feigned pre-existence of all things: let him be anathema.

      XIV.

      If anyone shall say that all reasonable beings will one day be united in one, when the hypostases as well as the numbers and the bodies shall have disappeared, and that the knowledge of the world to come will carry with it the ruin of the worlds, and the rejection of bodies as also the abolition of [all] names, and that there shall be finally an identity of the γνῶσις and of the hypostasis; moreover, that in this pretended apocatastasis, spirits only will continue to exist, as it was in the feigned pre-existence: let him be anathema

      모든 이성을 지닌 존재들이 언젠가 하나로 연합하게 되어 물리적 숫자와 육체의 구별이 사라지게 된다고 주장하거나.. [중략]...공상적인 영혼선재설 및 만유회복설 (아포카타스타시스)에 따라 오직 영 (누스)만이 궁극적으로 계속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누구나 파문할 것이다. / 번역: 최광민

      XV.

      If anyone shall say that the life of the spirits (νοῶν) shall be like to the life which was in the beginning while as yet the spirits had not come down or fallen, so that the end and the beginning shall be alike, and that the end shall be the true measure of the beginning: let him be anathema.

      태초에는 영(누스)들이 세상에 내려오거나 타락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주장하거나, 태초와 종말에 영의 상태가 유사할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혹은 종말 시의 상태가 태초의 상태와 진실로 같다고 하는 자는 누구나 파문할 것이다. / 번역: 최광민



      오리게네스의 교설에 대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본인의 정죄내용 역시 공회의의 결의와 대동소이하다.

      1

      Whoever says or thinks that human souls pre-existed, i.e., that they had previously been spirits and holy powers, but that, satiated with the vision of God, they had turned to evil, and in this way the divine love in them had died out (ἀπψυγείσας) and they had therefore become souls (ψυχάς) and had been condemned to punishment in bodies, shall be anathema.

      인간의 영혼이 선재하던 영이자 거룩한 능력들이자 신의 지복을 누리다가, 타락하여 그 안의 신적 사랑이 고갈됨으로써 비로소 영혼이 되었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자는 누구나 파문한다. / 번역: 최광민

      2

      If anyone says or thinks that the soul of the Lord pre-existed and was united with God the Word before the Incarnation and Conception of the Virgin, let him be anathema.

      주님의 영혼이 선재하였고, 성처녀 (마리아)에게 육화되어 수태되기 전에 그 영혼이 신의 말씀 (로고스)와 결합하였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자는 파문한다. / 번역: 최광민

      3

      If anyone says or thinks that the body of our Lord Jesus Christ was first formed in the womb of the holy Virgin and that afterwards there was united with it God the Word and the pre-existing soul, let him be anathema.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성처녀 (마리아)의 태에 수태가 된 후 로고스이신 신과 선재하던 영혼이 결합되었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자들은 파문한다. / 번역: 최광민

      4

      If anyone says or thinks that the Word of God has become like to all heavenly orders, so that for the cherubim he was a cherub, for the seraphim a seraph: in short, like all the superior powers, let him be anathema.

      5

      If anyone says or thinks that, at the resurrection, human bodies will rise spherical in form and unlike our present form, let him be anathema.

      부활 때에 인간의 몸이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둥근 구처럼 부활될 것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자들은 누구나 파문한다. / 번역: 최광민

      6

      If anyone says that the heaven, the sun, the moon, the stars, and the waters that are above heavens, have souls, and are reasonable beings, let him be anathema.

      7

      If anyone says or thinks that Christ the Lord in a future time will be crucified for demons as he was for men, let him be anathema.

      그리스도께서 인간 뿐 아니라 장차 악마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렸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자들은 누구나 파문한다. / 번역: 최광민

      8

      If anyone says or thinks that the power of God is limited, and that he created as much as he was able to compass, let him be anathema.

      9

      If anyone says or thinks that the punishment of demons and of impious men is only temporary, and will one day have an end, and that a restoration (ἀποκατάστασις) will take place of demons and of impious men, let him be anathema.

      악마들과 불경한 자들에 대한 징벌이 그저 일시적이며 언젠가는 징벌이 끝 날때가 있고, 종국에는 악마와 불경한 자들이 회복 (아포카타스타시스)될 것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자들은 누구나 파문한다. / 번역: 최광민

      Anathema to Origen and to that Adamantius, who set forth these opinions together with his nefarious and execrable and wicked doctrine and to whomsoever there is who thinks thus, or defends these opinions, or in any way hereafter at any time shall presume to protect them.

      이 생소한 교리에 대해 동서방의 교회는 제 5차 공회의인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오리게네스의 이 교리들을 정죄한 것이다. 이전 공회의들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사람들 (가령, 아리우스, 네스토리우스)에 이어 오리게네스의 이름이 보인다.

      If anyone does not anathematize Arius, Eunomius, Macedonius, Apollinaris, Nestorius, Eutyches and Origen, as well as their impious writings, as also all other heretics already condemned and anathematized by th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and by the aforesaid four Holy Synods and [if anyone does not equally anathematize] all those who have held and hold or who in their impiety persist in holding to the end the same opinion as those heretics just mentioned: let him be anathema.

      오리게네스는 여러 항목에서 이단판정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이단설과 관련된 그의 저작들을 파기되거나 수정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겨진 내용만 가지고는 그의 원래 입장을 완전히 복원하기는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리게네스의 몇몇 교리가 이단 판정되기 전, 그에게 비판적이던 다른 교부들의 글에 인용된 오리게네스의 책 내용을 통해 유추하더라도 오리게네스가 플라톤식의 윤회론을 믿고 공개적으로 가르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리게네스에 대한 이단정죄가 윤회론이나 환생론 때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1978년 신지학자인 Geddes McGregor가 {Reincarnation in Christianity}란 대중적인 저작을 통해 오리게네스가 윤회/환생론자였다는 주장을 확산시켰다. 모든 종교의 기원이 인도에 있으며, 예수도 인도의 철학을 연구하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마담 블라바트스키 발 유사종교 신지학의 기본철학이므로 신지학의 신봉자인 그의 주장은 그리 놀랍지 않다. 물론 그는 오리게네스의 관련 저작이 모두 파기된 탓에 (사실이 아니다 / 필자 주)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없다며 한 발을 빼긴했다. 오리게네스의 어떤 저작이 "윤회론" 때문에 파기된 것이라면, 왜 오리게네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공회의의 정죄 대상에는 그의 "윤회론" 관련 내용이 등장하지 않을까?

      과연 오리게네스는 윤회와 환생을 믿고 심지어 가르쳤을까? 오리게네스 본인의 진술을 직접 읽어보자.


      http://archive.org/stream/antenicenefather09robeuoft?ui=embed#mode/2up

      "[Scripture says] 'And they asked him, "What then? Are you Elijah?" [John 1:21] and he said, "I am not."' No one can fail to remember in this connection what Jesus says of John: 'If you will receive it, this is Elijah, who is to come' [Matt. 11:14]. How then does John come to say to those who ask him, 'Are you Elijah?'--'I am not'? . . . 

      one might say that John did not know that he was Elijah. This will be the explanation of those who find in our passage a support for their doctrine of reincarnation, as if the soul clothed itself in a fresh body and did not quite remember its former lives. . . . [H]owever, a churchman, who repudiates the doctrine of reincarnation as a false one and does not admit that the soul of John was ever Elijah, may appeal to the above-quoted words of the angel, and point out that it is not the soul of Elijah that is spoken of at John's birth, but the Spirit and power of Elijah" 

      혹자는 요한이 자신이 (전생에 / 필자 주) 엘리아였음을 몰랐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런 주장은 위의 일화를 통해 그들의 환생교리를 뒷받침하려는 자들의 설명이 될 것이다. 그 교리에 따르면, 영혼은 이전의 몸에서 새로운 몸으로 옮겨갈때 전생의 기억을 거의 잃는다 

      그러나 환생교리의 잘못을 지적하고 요한의 영혼이 결코 엘리아인 적이 없었다라고 반박하는 기독교도는 위에 인용된 천사의 말들이 요한이 태어날때 천사가 한 말은 그가 "엘리아의 영혼"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엘리아의 영과 능력"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 번역: 최광민

      -- 오리게네스, {요한복음 주석 / Commentary on John 6:7}

      여기서 오리게네스가 "요한이 자신이 엘리야였음을 몰랐다"라는 주장이 환생론을 뒷받침한다고 한 이유는, 이 설명의 근거가 피타고라스/플라톤 철학의 환생이론이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의 윤회/환생설에 따르면, 요한이 전생에 엘리야였더라도 (플라톤 철학이 주장하듯) 환생 직전에 "망각의 컵"을 마시고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잊었기 때문에 자신이 "엘리아였음"을 잊었던 것이 된다. 물론 오리게네스는 플라톤 철학의 이 개념을 수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오리게네스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아 본인인가?' 아니면 '엘리아의 영과 능력'을 가진 자인가?'란 논증을 통해, 피타고라스/플라톤적인 환생설에 해당하는 전자와, 기독교의 가르침인 후자를 대비시키고 있다.



      더 읽어보자.

      "As for the spirits of the prophets, these are given to them by God and are spoken of as being in a manner their property (slaves), as 'The spirits of the prophets are subject to the prophets' [1 Cor. 14:32] and 'The Spirit of Elijah rested upon Elisha' [2 Kgs. 2:15]. Thus, it is said, there is nothing absurd in supposing that John, 'in the Spirit and power of Elijah,' turned the hearts of the fathers to the children and that it was on account of this Spirit that he was called 'Elijah who is to come'" 

      (전략)...."엘리야의 영이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즉,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났으며,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는 자이며, 또한 그가 영에 관한 "장차 올 엘리야"로 불렸다는 것이 전혀 이상한 설명이 아니다. . 번역: 최광민

      -- 오리게네스, {요한복음 주석 / Commentary on John 6:7}

      여기서 오리게네스는 전자의 플라톤의 입장이 아닌 후자의 기독교도 입장을 강조한다. 더 읽어보자.

      "If the doctrine [of reincarnation] was widely current, ought not John to have hesitated to pronounce upon it, lest his soul had actually been in Elijah? And here our churchman will appeal to history, and will bid his antagonists [to] ask experts in the . . . doctrines of the Hebrews if they do really entertain such a belief. For if it should appear that they do not, then the argument based on that supposition is shown to be quite baseless"

      만약 환생의 개념이 널리 퍼진 것이라면, 실제로 요한이 엘리아의 환생이었다면 요한은 그렇게 말하는데 주저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중략)... 만약 히브리인들이 환생을 믿지않았다면, 환생설에 기초한 논증들은 근거없을 뿐이다. / 번역: 최광민

      -- 오리게네스, {요한복음 주석 / Commentary on John 6:7} 번역: 최광민

      앞서 말한대로, 오리게네스는 한 주제에 대한 두가지 논증 모두 일단 타당하다고 가정하여  병치시킨 후, 그 중 하나를 골라내는 방식으로 논증을 전개한다. 본인에 의해 명시되었다시피, 오리게네스는 최종적으로는 환생설에 기초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 본인이다"라는 주장이 유대/기독교 입장에서 근거없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마태 복음서 주석}에서는 오리게네스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여기서는 보다 더 명시적으로 윤회설을 기각한다.

      "Now the Canaanitish woman, having come, worshipped Jesus as God, saying, 'Lord, help me,' but he answered and said, 'It is not possible to take the children's bread and cast it to the little dogs.' . . . [O]thers, then, who are strangers to the doctrine of the Church, assume that souls pass from the bodies of men into the bodies of dogs, according to their varying degree of wickedness; but we . . . do not find this at all in the divine Scripture" (Commentary on Matthew 11:16).

      가나안 여인이 와서 예수를 신으로 경배하며 말하길, "주여, 도와주소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는 답하길, "자녀의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줄 수 없다"라고 했다. ..... 기독교의 교리에 낯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인간의 영혼이 사악한 정도에 따라 인간의 몸에서 개의 몸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우리는 성서에서 그런 주장을 찾을 수 없다./ 번역: 최광민

      In this place [when Jesus said Elijah was come and referred to John the Baptist] it does not appear to me that by Elijah the soul is spoken of, lest I fall into the doctrine of transmigration ,which is foreign to the Church of God, and not handed down by the apostles, nor anywhere set forth in the Scriptures"

      [예수가 세례자 요한을 다시 온 엘리아라고 언급하는 장면에서] 예수는 엘리아의 '영혼'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나는 보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영혼전이설을 말하는 것이 될 터인데, 이런 생각은 기독교에는 낯선 것일 뿐더러 사도들에 의해 전해진 것도 아니며, 성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후략) / 번역: 최광민

      --- 오리게네스, {마태 복음서 주석} 13:1  Translated by Allan Menzies. From Ante-Nicene Fathers, Vol. 9. Edited by Allan Menzies.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96.

      윤회/환생설을 '믿고', 또 '가르친' 오리게네스?

      톨레.
      레게.




      § 히에로니무스 (AD 347 - 420)

      AD 5세기의 대표교부이자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성서를 번역한 ({불가타}) 유세비우스 소포르니우스 히에로니무스 (이하, 히에로니무스)가 윤회나 환생을 믿거나 가르쳤다면 그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동시대인이던 박학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조차 히에로니무스의 지성(과 불같은 성격) 앞에서는 쩔쩔맸었으니, 만약 동서방 교회 전체를 대표하던 당대의 대표지성인 히에로니무스가 윤회론자였다면 그 영향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종종 히에로니무스와 다투긴 했지만, 히에로니무스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평가는 아주 단호했다: "히에로니무스가 모르면, 아무도 모른다."

      히에로니무스가 윤회를 믿고 가르쳤다는 주장이 버젓이 출판되고 또 인터넷에 떠도는 걸 보면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오류가 시작되어 축적된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지경이다.

      히에로니무스가 윤회설을 믿고 가르쳤다는 식의 주장들이 근거로 들이미는 두가지 자료는 히에로니무스가 남긴 여러 편의 편지 가운데 두 편, 즉 {아비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와 {데메트리아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럼 역시 두 편지의 전문을 직접 읽어보고, 과연 히에로니무스가 영혼의 윤회를 믿거나 가르치는지 살펴보자.



      우선 대략 AD 410년에 씌여진 {아비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살펴보자. 히에로니무스는 10여 년 전에 팜마키우스 (Pammachius)가 보내준 오리게네스의 {첫번째 원리들} 사본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한다. 팜마키우스는 오리게네스의 이 작품이 후대의 루피누스에 의해 렌더링되는 과정에서 변형된 부분을 찾아 중립적으로 교정해 줄 것을 히에로니무스에게 문의한 것이었다. 히에로니무스의 버전을 받아 읽은 팜마키우스는 오리게네스의 교리가 위험하다고 여겨 이 문건을 유통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어떤 제 3의 인물이 이 버전을 팜마키우스에게 빌린 후 동의없이 급히 필사본을 만들어 유통시켰다. 이 과정에서 필사오류가 적지않게 삽입되었는데, 이 사본을 입수한 아비투스는 히에로니무스에게 사건의 정황에 대한 설명을 요청한다. 이것이 이 편지의 배경이다.

      한번 읽어보자. 요점은 오리게네스가 제시하고 있는 "가정"들이다.   


      http://archive.org/stream/LettersAndSelectWorks/letters_and_select_works?ui=embed#mode/2up

      To Avitus:  (전략) 3. Then, when he comes to deal with rational creatures and to describe their lapse into earthly bodies as due to their own negligence, he goes on to say: “Surely it argues great negligence and sloth for a soul so far to empty itself as to fall into sin and allow itself to be tied to the material body of an unreasoning brute;” and in a subsequent passage: “These reasonings induce me to suppose that it is by their own free act that some are numbered with God’s saints and servants, and that it was through their own fault that others fell from holiness into such negligence that they were changed into forces of an opposite kind.” He maintains that after every end a fresh beginning springs forth and an end from each beginning, and that wholesale variation is possible; so that one who is now a human being may in another world become a demon, while one who by reason of his negligence is now a demon may hereafter be placed in a more material body and thus become a human being. So far does he carry this transforming process that on his theory an archangel may become the devil and the devil in turn be changed back into an archangel. “Such as have wavered or faltered but have not altogether fallen shall be made subject, for rule and government and guidance, to better things—to principalities and powers, to thrones and dominations”; and of these perhaps another human race will be formed, when in the words of Isaiah there shall be “new heavens and a new earth.’3369 But such as have not deserved to return through humanity to their former estate shall become the devil and his angels, demons of the worst sort; and according to what they have done shall have special duties assigned to them in particular worlds.” Moreover, the very demons and rulers of darkness in any world or worlds, if they are willing to turn to better things, may become human beings and so come back to their first beginning. That is to say, after they have borne the discipline of punishment and torture for a longer or a shorter time in human bodies, they may again reach the angelic pinnacles from which they have fallen. Hence it may be shewn that we men may change into any other reasonable beings, and that not once only or on emergency but time after time; we and angels shall become demons if we neglect our duty; and demons, if they will take to themselves virtues, may attain to the rank of angels.

      그리고 그(=오리게네스)는 이성적인 피조물들이 그 자신들의 과실로 인해 육체에 갇혀 지내는 동안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
      [오리게네스] 한 영혼은 지극한 과실과 태만으로 인해 (충만에서 / 필자 주) 결핍되어 죄의 상태로 빠지고 그 결과 짐승의 물질적 육체에 결합하기 된다고 분명 논증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오리게네스] 이런 추론을 통해, 그들의 자유로운 행위의 결과는 어떤 이들은 신의 성인들과 종들로 여겨지고, 또한 역시 그 자신들의 과실로 다른 사람들은 거룩에서 타락해 그와 정반대 방향의 과실로 추락해 버리는 것이라 가정할 수 있다". 오리게네스는 주장하길, 매번의 종말마다 새로운 시작이 열리고, 각각의 시작은 각각의 끝이 있으며, 전체적인 다양한 변화가 가능하리라고 주장했는데, 그래서 지금 인간인 자가 아마도 다음 세계에서는 악마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의 과실로 인해 현재 악마인 자는 나중에 보다 물질적인 육체에 결합하고 그래서 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런 식으로 그는 이 변성의 과정을 이론화 하면서, 대천사도 악마가 될 수 있고, 마찬가지지로 악마도 대천사로 돌아갈 수도 있으리라 보았다. [중략] 더 나아가, 어떤 세계 혹은 세계들 속의 그 악마들과 어둠의 지배자들이 더 나은 존재가 되길 바란다면, 그들도 아마 인간이 되거나 혹은 원래 그들의 초기 상태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보았다. 즉, 그들이 징벌과 체벌을 통한 단련을 인간의 육체 가운데 길거나 혹은 짧게 견디어 낼 수 있다면, 그들도 아마 타락하기 이전의 천사의 지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도 아마 다른 이성적인 존재로 바뀔 수 있는데, 그것도 한번 뿐 아니라 시간을 통해 계속해서 변해갈 수 있으리라 추론했다. 우리 인간들과 천사들은 우리의 의무를 등한시 한다면 악마가 되고, 반대로 악마들이 덕성을 지켜나간다면 천사의 지위를 얻으리라고 본 것이다.

      4. Bodily substances too are to pass away utterly or else at the end of all things will become highly rarified like the sky and æther and other subtle bodies. It is clear that these principles must affect the writer's view of the resurrection. The sun also and the moon and the rest of the constellations are alive. Nay more; as we men by reason of our sins are enveloped in bodies material and sluggish; so the lights of heaven have for like reasons received bodies more or less luminous, and demons have been for more serious faults clothed with starry frames. This, he argues, is the view of the apostle who writes:— the creation has been subjected to vanity and shall be delivered for the revealing of the sons of God.

      That it may not be supposed that I am imputing to him ideas of my own I shall give his actual words. "At the end and consummation of the world", he writes, "when souls and beings endowed with reason shall be released from prison by the Lord, they will move slowly or fly quickly according as they have previously been slothful or energetic. And as all of them have free will and are free to choose virtue or vice, those who choose the latter will be much worse off than they now are. But those who choose the former will improve their condition. Their movements and decisions in this direction or in that will determine their various futures; whether, that is, angels are to become men ordemons, and whether demons are to become men or angels." Then after adducing various arguments in support of his thesis and maintaining that while not incapable of virtue the devil has yet not chosen to be virtuous, he has finally reasoned with much diffuseness that an angel, a human soul, and a demon— all according to him of one nature but of different wills— may in punishment for great negligence or folly be transformed into brutes. Moreover, to avoid the agony of punishment and the burning flame the more sensitive may choose to become low organisms, to dwell in water, to assume the shape of this or that animal; so that we have reason to fear a metamorphosis not only into four-footed things but even into fishes.


      지어낸 이야기를 그 (=오리게네스 / 필자 주)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오리게네스 본인의 말을 그대로 옮기기로 하겠다. 오리게네스는 말하길, "세상의 종말의 날에, 이성이 부여된 영혼과 존재들을 주님은 그들의 감옥 (=육체 / 필자 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예전에 느렸거나 혹은 동적이었던 정도에 따라 천천히 혹은 빠르게 날아 올라갈 것이다. 그들 모두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또 자유롭게 선/악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악을 선택하는 존재는 현 상태보다 더 못한 상태로 떨어진다. 그러나 선을 선택하는 존재는 현 상태보다 나아질 것이다. 선 혹은 악을 선택하는데서 일어나는 그들의 운동과 결정은 그들의 다양한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 천사는 인간 혹은 악마가 될 수 있으며, 악마가 인간이 되거나 천사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중략]  --- 번역: 최광민

      Then, lest he should be held guilty of maintaining with Pythagoras the transmigration of souls, he winds up the wicked reasoning with which he has wounded his reader by saying: I must not be taken to make dogmas of these things; they are only thrown out as conjectures to show that they are not altogether overlooked.

      피타고라스의 영혼전이설을 주장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오리게네스는 독자들에게 좋지않은 영향을 준 그의 사악한 생각들을 다음의 말로 얼버무렸다: "[오리게네스] 이런 생각들을 교리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이 사유들은 이런 주장들이 완전히 무시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추론으로 제시되었을 뿐이다." / 번역: 최광민

      --- Source. Translated by W.H. Fremantle, G. Lewis and W.G. Martley.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6.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93.) 번역: 최광민

      히에로니무스가 윤회/환생론자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근거하고 있다는 문서를 직접 들여다 본 적 없이 이런 주장을 펼치는 모양이다. 히에로니무스가 "오리게네스를 격렬하게 비판"한 것이 바로 이 편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히에로니무스는 그 본인이 윤회나 환생설을 믿거나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피타고라스의 윤회/환생설을 애매한 논조로 소개함으로서 기독교도 독자들의 혼란을 일으킨 오리게네스를 비난하고 있다. 따라서 아비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히에로니무스가 윤회/환생설을 개인적으로 믿거나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된다.

      아울러 이 기록은 환생/윤회에 관한 오리게네스의 원래 입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히에로니무스의 이 기록은 오리게네스가 이단으로 정죄된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의보다 1세기 정도 앞선 기록이기 때문에, 오리게네스의 일부 주장이 이단으로 정죄된 후 수정/폐기 전에 알려진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히에로니무스가 인용한 오리게네스의 글의 논조가 바로 윤회/환생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대표적인 태도였다고 볼 이유는 상당하다. 그럼 히에로니무스의 글에 등장한 오리게네스가 윤회를 '믿고', '가르치'는가? 히에로니무스가 그를 비난하고 있단 점을 고려하더라도, (오리게네스의 개인적 믿음은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공개적으로 그런 가르침을 폈을 것으로 여기긴 힘들다. 



      이번에는 히에로니무스가 귀부인 데메트리아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자.

      16. I have all but passed over the most important point of all. While you were still quite small, bishop Anastasius of holy and blessed memory ruled the Romanchurch. In his days a terrible storm of heresy came from the East and strove first to corrupt and then to undermine that simple faith which an apostle has praised. Romans 1:8 However the bishop, rich in poverty and as careful of his flock as an apostle, at once smote the noxious thing on the head, and stayed thehydra's hissing. Now I have reason to fear— in fact a report has reached me to this effect— that the poisonous germs of this heresy still live and sprout in theminds of some to this day. I think, therefore, that I ought to warn you, in all kindness and affection, to hold fast the faith of the saintly Innocent, the spiritualson of Anastasius and his successor in the apostolic see; and not to receive any foreign doctrine, however wise and discerning you may take yourself to be. Men of this type whisper in corners and pretend to inquire into the justice of God.

      Why, they ask, was a particular soul born in a particular province? What is the reason that some are born of Christian parents, others among wild beasts and savage tribes who have no knowledge of God? Wherever they can strike the simple with their scorpion-sting and form an ulcer fitted to their purpose, there they diffuse their venom. Is it for nothing, think you,— thus they argue—that a little child scarcely able to recognize its mother by a laugh or a look of joy, which has done nothing either good or evil, is seized by a devil or overwhelmed with jaundice or doomed to bear afflictions which godless men escape, while God's servants have to bear them?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왜 어떤 영혼은 특정한 곳에 태어나는가? 누근 기독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또 누군 들짐승으로 태어나며, 또 누군 신을 모르는 야만족으로 태어나는가?라고. 그들의 독침으로 순박한 자들을 공략하여 목표한 바대로 상처를 입힐 때마다, 그들은 그들의 독을 그 안에 밀어넣는다....[중략] / 번역: 최광민

      Now if God's judgments, they say, are true and righteous altogether, and if there is no unrighteousness in Him, we are compelled by reason to believe that our souls have pre-existed in heaven, that they are condemned to and, if I may so say, buried in human bodies because of some ancient sins, and that we are punished in this valley of weeping for old misdeeds.

      그들은 말하길, 만약 신의 심판이 옳고 정의롭고, 신은 오직 정의롭기만 하다고 가정한다면, 이성적으로 우리는 다음을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즉,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선재했었다가 어떤 죄로 인해 영혼이 인간의 몸에 갇히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우리는 옛 죄로 인해 눈물의 골짜기에서 징벌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번역: 최광민

      This according to them is the prophet's reason for saying: Before I was afflicted I went astray, and again, Bring my soul out of prison. They explain in the same way the question of the disciples in the gospel: Who did sin, this man or his parents, that he was born blind? John 9:2 and other similar passages.

      This godless and wicked teaching was formerly ripe in Egypt and the East; and now it lurks secretly like a viper in its hole among many persons in those parts, defiling the purity of the faith and gradually creeping on like an inherited disease till it assails a large number.

      이 불경스럽고 사악한 가르침은 예전에 이집트와 동방에서 무르익었고, 현재는 구멍에 숨어있는 독사처럼 그 지역의 사람들을 유혹하여 신앙의 순결성을 타락시키고 많은 수가 될때까지 유전병처럼 점차 퍼지고 있다./ 번역: 최광민

      But I am sure that if you hear it you will not accept it. For you have preceptresses under God whose faith is a rule of sound doctrine. You will understand what I mean, for God will give you understanding in all things. You must not ask me on the spot to give you a refutation of this dreadful heresy and of others worse still; for were I to do so I should criticize where I ought to forbid, and my present object is not to refute heretics but to instruct a virgin. However, I have defeated their wiles andcounterworked their efforts to undermine the truth in a treatise which by God's help I have written; and if you desire to have this, I shall send it to you promptly and with pleasure. I say, if you desire to have it, for as the proverb says, wares proffered unasked are little esteemed, and a plentiful supply brings down prices, which are always highest where scarcity prevails.

      --- Source. Translated by W.H. Fremantle, G. Lewis and W.G. Martley.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6.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93.) Revised and edited for New Advent by Kevin Knight. 

      히에로니무스는 여기서 윤회/전생론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설명한 오리게네스의 영혼선재설과 이와 결부된 만유회복론/아포카타스타시스 교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히에로니무스는 바로 이 사상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히에로니무스는 인간의 영혼은 그 육체가 만들어질 때 함께 창조된다고 보았으므로, 태어나기 이전의 영혼이 죄나 실수를 저지를 방법이 도무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윤회/환생설을 "믿고", 심지어 "가르친" 히에로니무스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톨레.
      레게.




      § 히포 주교 아우구스티누스 (AD 354 - 430)

      AD 5세기 서방 라틴교회, 나아가 후대 종교개혁의 신학에 혁혁한 영향을 미친 아우구스티누스가 윤회/환생론자였다면 그 영향력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며, 윤회/환생을 조금도 믿지않았던 후대의 로마카톨릭 신학자들이나 종교개혁자들이 최소한 아우구스티누스를 변명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젊은 날 윤회/환생설을 믿던 마니교도이기는 했지만, 마니교와 플라톤 철학을 떠나 기독교도가 된 후로 그런 가르침을 글로 남기거나 가르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윤회/환생설을 일련을 글 속에서 비판했다.

      그의 {신국론} 10장을 발췌한다. 그는 여기서 기독교를 맹공하고 이교를 옹호했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포르피리우스가 원조 플라톤주의의 윤회/환생론으로부터 포르피리우스 자신 특유의 윤회/환생론을 어떻게 개발했는가를 설명한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시 "플라톤 철학"으로 불리던 철학은 대체로 플로티노스에 의해 변형된 "신-플라톤 철학"을 뜻한다.


      http://archive.org/stream/worksofaureliusa01augu?ui=embed#mode/2up

      Chapter 30.— Porphyry's Emendations and Modifications of Platonism.

      If it is considered unseemly to emend anything which Plato has touched, why did Porphyry himself make emendations, and these not a few? For it is very certain that Plato wrote that the souls of men return after death to the bodies of beasts. Plotinus also, Porphyry's teacher, held this opinion; yet Porphyry justly rejected it. He was of opinion that human souls return indeed into human bodies, but not into the bodies they had left, but other new bodies. 

      플라톤이 다룬 내용을 고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면, 왜 포르피리우스는 플라톤의 교리를 상당히 손질한 것일까? 인간의 영혼이 짐승의 몸으로 환생할 수 있다고 플라톤이 적은 것은 확실하다. 포르피리우스의 스승인 플로티노스도 같은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포르피리우스는 옳게도 이 견해를 거부했다. 포르피리우스는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몸으로만 환생한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영혼이 떠난 원래의 몸이 아닌 새로운 몸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번역: 최광민

      He shrank from the other opinion, lest a woman who had returned into a mule might possibly carry her own son on her back. He did not shrink, however, from a theory which admitted the possibility of a mother coming back into a girl and marrying her own son. How much more honorable a creed is that which was taught by the holy and truthful angels, uttered by the prophets who were moved by God's Spirit, preached by Him who was foretold as the coming Saviour by His forerunning heralds, and by the apostles whom He sent forth, and who filled the whole world with the gospel,— 

      그는 (포르피리우스)는 가령 한 여자가 나귀로 환생해서 자기 아들을 등에 태우게 된다는 식의 견해는 주저했지만, 그 여자가 여자로 다시 태어나 자신의 아들과 결혼할 수 있을 가능성은 인정했다. 그러니 거룩하고 믿을 만한 천사들에 의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예언자들에게 전해져 선포되었고, 그보다 앞서 온 자들에 의해 도래한 구원자로 예언되었던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 / 필자 주) 가르치셨고, 또 그가 파송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한 그의 사도들에 의해 선포된 이 믿음은 (포르피리우스의 그것보다 / 필자 주) 얼마나 더 고상한가! / 번역: 최광민

      how much more honorable, I say, is the belief that souls return once for all to their own bodies, than that they return again and again to various bodies? Nevertheless Porphyry, as I have said, did considerably improve upon this opinion, in so far, at least, as he maintained that human souls could transmigrate only into human bodies, and made no scruple about demolishing the bestial prisons into which Plato had wished to cast them. 

      영혼들이 다른 몸으로 계속 환생한다는 주장보다, 원래의 몸으로 단번에 되돌아 온다는 믿음 (=기독교의 부활 -- 필자 주)은 얼마나 더 고귀한가? 물론 포르피라우스의 주장은 내가 앞서 말한대로 플라톤의 원래 믿음보다 상당히 나아지기는 했다. 최소한 포르피리우스는 플라톤의 원래 주장을 버리고 인간의 영혼은 (짐승이 아닌) 오직 인간의 육체에서만 환생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번역: 최광민

      He says, too, that God put the soul into the world that it might recognize the evils of matter, and return to the Father, and be for ever emancipated from the polluting contact of matter. And although here is some inappropriate thinking (for the soul is rather given to the body that it may do good; for it would not learn evil unless it did it), yet he corrects the opinion of other Platonists, and that on a point of no small importance, inasmuch as he avows that the soul, which is purged from all evil and received to the Father's presence, shall never again suffer the ills of this life. By this opinion he quite subverted the favorite Platonic dogma, that as dead men are made out of living ones, so living men are made out of dead ones; and he exploded the idea which Virgil seems to have adopted from Plato, that the purified souls which have been sent into the Elysian fields (the poetic name for the joys of the blessed) are summoned to the river Lethe, that is, to the oblivion of the past,

      That earthward they may pass once more,
      Remembering not the things before,
      And with a blind propension yearn
      To fleshly bodies to return.

      This found no favor with Porphyry, and very justly; for it is indeed foolish to believe that souls should desire to return from that life, which cannot be very blessed unless by the assurance of its permanence, and to come back into this life, and to the pollution of corruptible bodies, as if the result of perfect purification were only to make defilement desirable. For if perfect purification effects the oblivion of all evils, and the oblivion of evils creates a desire for a body in which the soul may again be entangled with evils, then the supreme felicity will be the cause of infelicity, and the perfection of wisdom the cause of foolishness, and the purest cleansing the cause of defilement. And, however long the blessedness of the soul last, it cannot be founded on truth, if, in order to be blessed, it must be deceived. For it cannot be blessed unless it be free from fear. But, to be free from fear, it must be under the false impression that it shall be always blessed,— the false impression, for it is destined to be also at some time miserable. How, then, shall the soul rejoice in truth, whose joy is founded on falsehood? Porphyry saw this, and therefore said that the purified soul returns to the Father, that it may never more be entangled in the polluting contact with evil. The opinion, therefore, of some Platonists, that there is a necessary revolution carrying souls away and bringing them round again to the same things, is false. But, were it true, what were the advantage of knowing it? Would the Platonists presume to allege their superiority to us, because we were in this life ignorant of what they themselves were doomed to be ignorant of when perfected in purity and wisdom in another and better life, and which they must be ignorant of if they are to be blessed? If it were most absurd and foolish to say so, then certainly we must prefer Porphyry's opinion to the ideaof a circulation of souls through constantly alternating happiness and misery. And if this is just, here is a Platonist emending Plato, here is a man who saw what Plato did not see, and who did not shrink from correcting so illustrious a master, but preferred truth to Plato.

      --- Source. Translated by Marcus Dods.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2.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7.) Revised and edited for New Advent by Kevin Knight. 번역: 최광민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포르피리우스의 윤회/환생설을 지지하던가? 그는 인간이 짐승으로 환생할 수 있다는 플라톤의 원 주장에 비해 인간은 인간으로만 환생한다는 포르피리우스의 견해가 그나마 낫다고 '소개'할 뿐이다. 그나마도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부활'의 교리에 비해 열등한 설명으로 치부한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가 포르피리우스를 옹호할 이유도 없다. 포르피리우스는 당시 기독교 교부들의 공적이었고, 기독교 교부들은 여러 저술들을 통해 포르피라우스를 맹공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윤회/환생을 '믿고', 심지어 '가르치기까지' 했을까?

      톨레.
      레게.




      § 정리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어떤 내용을 인용할때 전체맥락을 모두 인용하지 않고 일부 구절만 문맥과 상관없이 따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군가가 이렇게 잘못 인용한 것을 원전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가져다 쓰면 오류는 일파만파 확산된다.

      톨레.
      레게.

      타당한 자료를,
      또한 정확하게.


      草人


      © 최광민, Kwangmin Choi, 2008-03-02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