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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마르틴 하이데거, {사유란 무엇인가?}
草人!
2024. 4. 11. 14:16
작성
© 草人 최광민 2003-05-23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마르틴 하이데거, {사유란 무엇인가?}
순서
© 草人 최광민 2003-05-23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마르틴 하이데거, {사유란 무엇인가?}
순서
- {사유란 무엇인가?, Was Heisst Denken}
- 에온 엠메나이
- 그래서 존재란 무엇인가?
대학시절 읽었던 몇 되지 않는 '형이상학' 책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책들은 벨라 바이스마르의 {존재론}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유란 무엇인가?}였다. 전자의 경우 '보편논쟁'을 다루고 있는 제 2부가, 그리고 후자의 경우 '존재'의 개념을 다루고 있는 역시 제 2부만이 지금 기억 속에 남아있다.
마르틴 하이데거
§ {사유란 무엇인가?, Was Heisst Denken}
한 단어의 정의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사전을 이용한다. '원칙적으로' 사전은 한 단어를 정의하기 위해 사전 속에 수록되어 있는 다른 단어의 정의를 이용해야 한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반칙'이다.) 마치 유클리드 기하학의 기본공준으로부터 유클리드 기하학 속의 모든 정리들이 유도된 것과 같이, 문명의 개명 이래 축적되어 온 어휘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을 발달시켰다. 따라서 우리의 사유는 본질적으로는 그 이전에 있었던 모든 개념들의 정의를 벽돌삼아 쌓아올린 탑과 같은 것이다.
어떤 개념은 더 본질적인 개념으로 쪼개질 수 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쪼개 나가다보면, 우리는 더 이상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개념,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대로) 말로 정의할 수 없고 다만 '보여질 수' 밖에 없는 어떤 수준의 (버트란트 러셀 표현으로는) '원자적 정의'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모든 사전 속의 정의는 사실은 동어반복인 동시에 무한루프의 파라독스에 빠지는 셈이다.
§ 에온 엠메나이
일상용어에서는 사용되지는 않지만 너무나 유명한 단어 '존재'를 떠올려 본다. 그리스 철학의 역사에서 이 단어는 파르메니데스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거나 혹은 오늘날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파르메니데스에 의해 처음으로 정의된 것으로 여겨진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말의 정의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파르메니데스가 어떤 개념을 동원해서 '존재'를 정의했을 지를 유추해 들어간다.
현재 남은 파르메니데스의 말 가운데 {단편 6}에는 다음의 말이 등장한다.
책에 따르면 이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런 식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서는 파르메니데스의 잠언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하이데거는, 파라택시스(parataxis) 기법을 사용하여 이 경구를 아래와 같은 의미소로 쪼갠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각각은 아래와 같이 재해석 되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크레'를 "그것은 필요로 한다" 혹은 "필요로 한 것을 그것의 본질로 데려가고 그것의 본질 안에서 그것을 보존한다"로 번역한다. "필요로 한다"란 말은 여기서는 “필요해서 쓰여진 것을 그것의 고유한 본질의 보호 아래에 내맡기는” 것이란다.
하이데거는 ‘레게인’을 통상적인 의미인 ‘말하다’가 아니라 ‘놓다’로 옮긴다. 또 ‘노에인’은 통상적인 ‘사유하다’가 아닌 ‘보살핌 안으로 받아들이다’의 뜻으로 옮긴다. 그러니까 "앞에 놓여있는 것을 보살핌 안으로 받아들인다"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더욱 알쏭달쏭해 진다.
여기서 ‘테-테’가 레게인과 노에인을 연결한다고 여기는 하이데거는, 이것은 즉, 레게인과 노에인이 서로가 서로에게 순응하도록 합일되어 있다는 뜻으로 새긴다.
이제 슬슬 '존재'의 문제로 접근해 간다. 레게인과 노에인을 규정하면서 자기 곁으로 그것들이 오게 명령하는 것은 ‘에온 엠메나이’이다. 그런데 이 ‘에온 에메나이’는 또 무엇인가? ‘에온’ 은 명사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과 동사 ‘존재한다’를 동시에 뜻한다. 그래서 이 말은 ‘존재하고 있는 존재자’와 ‘존재자의 존재하기’를 모두 뜻한다. 그래서 바로 이 "에온 엠메나이"가 우리 인간들에게 "형이상학적 사유를 명령"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풀이다. 즉, 사유란 '에온 엠메나이"를 '레게인 테 노에인 테'하라는 명령이 떨어질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깊은 사유가 요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존재자의 존재’인 것이다.
§ 그래서 '존재'란 무엇인가?
이렇게 하이데거는 장황하고도 난해한 고대 그리스어 의미분석을 기술하긴 했지만 결국 '존재'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가 내린 '존재'의 정의란 '에온 엠메나이', 즉 '존재자의 존재'라는 동어반복적인 결론일 뿐이니까.
대신 하이데거는 책 제목의 {사유란 무엇인가?}를 대답하는 대신 "무엇이 우리를 사유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되물음으로써 그 '존재'를 우회적으로 (정의하는 대신) 묘사한다. 사유란 것은 “물음 속으로 들어와야 할 그것의 말 건넴에 귀기울이는 것”인데, 다시말해 사유해야 할 그것이 '말 건네고 있는 바로 그것'에 응답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것'이란 말할 나위없이 '존재'가 된다. 그래서 사유란 존재를 ‘회상’하는 행위인 것이다.
여기서 나와 같은 범속한 독자들은 원점으로 회귀한다.
그래서 도대체 "존재"란 무엇일까?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草人
한 단어의 정의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사전을 이용한다. '원칙적으로' 사전은 한 단어를 정의하기 위해 사전 속에 수록되어 있는 다른 단어의 정의를 이용해야 한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반칙'이다.) 마치 유클리드 기하학의 기본공준으로부터 유클리드 기하학 속의 모든 정리들이 유도된 것과 같이, 문명의 개명 이래 축적되어 온 어휘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을 발달시켰다. 따라서 우리의 사유는 본질적으로는 그 이전에 있었던 모든 개념들의 정의를 벽돌삼아 쌓아올린 탑과 같은 것이다.
어떤 개념은 더 본질적인 개념으로 쪼개질 수 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쪼개 나가다보면, 우리는 더 이상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개념,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대로) 말로 정의할 수 없고 다만 '보여질 수' 밖에 없는 어떤 수준의 (버트란트 러셀 표현으로는) '원자적 정의'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모든 사전 속의 정의는 사실은 동어반복인 동시에 무한루프의 파라독스에 빠지는 셈이다.
§ 에온 엠메나이
일상용어에서는 사용되지는 않지만 너무나 유명한 단어 '존재'를 떠올려 본다. 그리스 철학의 역사에서 이 단어는 파르메니데스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거나 혹은 오늘날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파르메니데스에 의해 처음으로 정의된 것으로 여겨진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말의 정의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파르메니데스가 어떤 개념을 동원해서 '존재'를 정의했을 지를 유추해 들어간다.
현재 남은 파르메니데스의 말 가운데 {단편 6}에는 다음의 말이 등장한다.
크레 토 레게인 테 노에인 테 에온 엠메나이,
χρὴ τὸ λἐγειν τε νοείν τ’ ἐὸν ἔμμεναι
책에 따르면 이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존재자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사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서는 파르메니데스의 잠언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하이데거는, 파라택시스(parataxis) 기법을 사용하여 이 경구를 아래와 같은 의미소로 쪼갠다.
크레 / 토 레게인 테 노에인 테 / 에온 / 엠메나이
하이데거에 따르면 각각은 아래와 같이 재해석 되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크레'를 "그것은 필요로 한다" 혹은 "필요로 한 것을 그것의 본질로 데려가고 그것의 본질 안에서 그것을 보존한다"로 번역한다. "필요로 한다"란 말은 여기서는 “필요해서 쓰여진 것을 그것의 고유한 본질의 보호 아래에 내맡기는” 것이란다.
하이데거는 ‘레게인’을 통상적인 의미인 ‘말하다’가 아니라 ‘놓다’로 옮긴다. 또 ‘노에인’은 통상적인 ‘사유하다’가 아닌 ‘보살핌 안으로 받아들이다’의 뜻으로 옮긴다. 그러니까 "앞에 놓여있는 것을 보살핌 안으로 받아들인다"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더욱 알쏭달쏭해 진다.
여기서 ‘테-테’가 레게인과 노에인을 연결한다고 여기는 하이데거는, 이것은 즉, 레게인과 노에인이 서로가 서로에게 순응하도록 합일되어 있다는 뜻으로 새긴다.
이제 슬슬 '존재'의 문제로 접근해 간다. 레게인과 노에인을 규정하면서 자기 곁으로 그것들이 오게 명령하는 것은 ‘에온 엠메나이’이다. 그런데 이 ‘에온 에메나이’는 또 무엇인가? ‘에온’ 은 명사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과 동사 ‘존재한다’를 동시에 뜻한다. 그래서 이 말은 ‘존재하고 있는 존재자’와 ‘존재자의 존재하기’를 모두 뜻한다. 그래서 바로 이 "에온 엠메나이"가 우리 인간들에게 "형이상학적 사유를 명령"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풀이다. 즉, 사유란 '에온 엠메나이"를 '레게인 테 노에인 테'하라는 명령이 떨어질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깊은 사유가 요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존재자의 존재’인 것이다.
§ 그래서 '존재'란 무엇인가?
이렇게 하이데거는 장황하고도 난해한 고대 그리스어 의미분석을 기술하긴 했지만 결국 '존재'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가 내린 '존재'의 정의란 '에온 엠메나이', 즉 '존재자의 존재'라는 동어반복적인 결론일 뿐이니까.
대신 하이데거는 책 제목의 {사유란 무엇인가?}를 대답하는 대신 "무엇이 우리를 사유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되물음으로써 그 '존재'를 우회적으로 (정의하는 대신) 묘사한다. 사유란 것은 “물음 속으로 들어와야 할 그것의 말 건넴에 귀기울이는 것”인데, 다시말해 사유해야 할 그것이 '말 건네고 있는 바로 그것'에 응답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것'이란 말할 나위없이 '존재'가 된다. 그래서 사유란 존재를 ‘회상’하는 행위인 것이다.
사유가 어디에서 발원하는지 그 유래를 꿰뚫어볼 때,그때 비로소 우리는 철학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서존재의 사유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Aus der Erfahrung des Denkens}, 마르틴 하이데거
여기서 나와 같은 범속한 독자들은 원점으로 회귀한다.
그래서 도대체 "존재"란 무엇일까?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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