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종교|철학
[© 최광민] 크리스마스 특집 #4: 요셉과 마리아는 왜 베들레헴으로 갔던 것일까? : 예수의 탄생 연도 계산을 둘러싼 역사적 정황들
草人!
2021. 12. 13. 13:16
작성
© 草人 최광민 2003-12-30 / 2005-12-22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草人 최광민 2003-12-30 / 2005-12-22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크리스마스 특집 #4: 요셉과 마리아는 왜 베들레헴으로 갔던 것일까? : 예수의 탄생 연도를 둘러싼 역사적 정황들
순서
- 예수의 탄생 연도
-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서력기원 (AD) 계산법
- 엑시구스의 오류 (?)
- 초기 기독교의 전통적 출생 연도: BC 2/3년
- 아우구스투스의 "등록령"과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
- 왜, 무엇을 "등록"했는가?: 징세? 호적? 충성맹세?
- 정리
Augustus of Prima Porta, statue of the emperor Augustus in Museo Chiaramonti, Vatican, Rome. (source: Wikimedia Commons)
# 예수의 탄생 연도
예수의 탄생일에 대한 논쟁이 주로 문화인류학적인 것이라면, 예수의 탄생 연도에 대한 논쟁은 보다 정규 역사학적인 부류에 속한다.
흔히 사람들은 기독교가 시작된 이후부터 기독교도들은 당연히 예수의 탄생 연도를 기점으로 햇수를 셈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기독교도들은 첫 5세기 동안 예수를 시점으로 하는 연호방식, 즉 "주(님이)후 Anno Domini"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로마의 달력에 따라 햇수를 셈했다. 심지어 서력기원이 발명된 AD 5/6세기 이후에도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로마는 이미 망했음에도) 계속 로마의 연표에 따라 햇수를 셈하는게 관행이었다. 중세와 근세에는 각각 중앙국가 뿐 아니라 개개의 봉건영주국가들도 자신들만의 연호를 사용해서 혼란이 가중되었는데, 그때에도 로마의 연표가 일종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서력기원 (AD) 계산법
소 -스키티아 (오늘날의 루마니아-불가리아 지역) 출신의 수도사이자 학자인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 (AD 470-544)는 AD 500년 무렵에 로마에 와서 로마교회를 위해 일하게 되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숙한 그는 그리스어로 된 교회법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 특별히 지난 세기에 있었던 니케아 회의, 칼케돈, 사르디스 회의 결의문 및 사도헌장들을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수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수학에 관련된 소논문들을 몇 편 남겼는데, 당시 로마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수도사로 불렸다.
종종 그가 "크리스마스의 날짜를 12월 25일로 정했다"는 식의 오해를 접하게 되는데, 사실 그는 크리스마스의 날짜를 언급한 적이 없다. 그가 한 일은 연대를 계산하는 것이지 날짜를 특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진 두번째 오해는, 그의 목적이
예수의 탄생연도를 계산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일차적
목표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한 일은 당시에 사용되고 있던 부활절 산정방식 중
(로마식, 알렉산드리아식), 더 정확하다고 판단된 알렉산드리아 방식을 이용해서
앞으로의 부활절 날짜를 산출하는 일이었다.
흔히들 서력기원 (Anno Domini)을 처음 제안한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AD 원년의 연대를 계산할 때 실수를 해서 적어도 4년이 빠졌으며, 따라서 예수의 실제 탄생은 BC 4년 이전 (아마도 BC 6-8년)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이것은 현재의 "정설"이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이 정설이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 진다.
그런데 정말로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계산의 착오를 범했다면, 도대체 그는
어디서 잘못을 범했던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의 "정설"이 무슨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학자들 역시 도대체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어디서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가 참조한 자료에 문제가 있었던 건지 혹은 그가 단순히 계산을 잘못한 것인 지에 대해 모른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의 "정설"이 무슨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학자들 역시 도대체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어디서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가 참조한 자료에 문제가 있었던 건지 혹은 그가 단순히 계산을 잘못한 것인 지에 대해 모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저 "현재의 정설"은 사실은 추론이다. 그럼 어디서 그가 4년 (혹은 그
이상)을 빼먹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일까?
사실 이 문제는 디오니우스 엑시구스의 계산법 그 자체 보다는 헤롯대왕의 사망연도를 어떻게 정하는가에 달린 문제다. 즉, 이 논리는 (1)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AD 원년이 현재 주류설의 표준연표 속의 헤롯의 사망연도보다 4년 후이기 때문에 (2)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서력기원 계산법이 틀렸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래서 약간 동어반복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엑시구스는 헤롯의 사망 연도를 언급한 적도 없다. 그가 참고한 것은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집권 연도다.
물론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사용한 자료가 부정확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사실 그의 시스템에 따른 서력기원 원년 (AD 1년)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에 일반적으로 제안하던 BC 3/2년과도 살짝 일치하지 않는다.
사실 이 문제는 디오니우스 엑시구스의 계산법 그 자체 보다는 헤롯대왕의 사망연도를 어떻게 정하는가에 달린 문제다. 즉, 이 논리는 (1)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AD 원년이 현재 주류설의 표준연표 속의 헤롯의 사망연도보다 4년 후이기 때문에 (2)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서력기원 계산법이 틀렸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래서 약간 동어반복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엑시구스는 헤롯의 사망 연도를 언급한 적도 없다. 그가 참고한 것은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집권 연도다.
물론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사용한 자료가 부정확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사실 그의 시스템에 따른 서력기원 원년 (AD 1년)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에 일반적으로 제안하던 BC 3/2년과도 살짝 일치하지 않는다.
거기엔 또 엑시구스 나름의 설명이 가능하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시스템에서 AD 1년은 예수가 탄생한 해일 수도 있고, 예수가 태어난 바로 직후의 해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시스템에서의 1월 1일은 예수의 탄생일에 맞춘 것이 아니라, 로마달력 (율리우스력)의 신년 1월 1일에 맞춘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사가들은 고대기록에서 '세는 해'와 '채운 해'를 놓고 종종 고심하게 되는데, 이때 또 1년 정도의 오차가 발생 가능하다.
참고로 AD 1년의 바로 전 해를 BC 1년으로 하는 방식은 (즉, 0년이 없는), 엑시구스가 아니라 AD 8세기 영국의 수도사/역사가 베데/Bede가 도입했다. 현대 천문학자들은 이것 대신 0년 개념을 도입해서, AD 1년은 +1로, BC 1년은 0으로, 그리고 BC 2년은 -1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 시스템은 18세기의 천문학자 카시니가 1740년에 도입한 것이다. 천문학에서 사용되는 또 다른 방식은 1583년 Joseph Justus Scaliger가 제안한 방법이다. 그 당시에는 이미 서력기원이 있었음에도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군주의 집권일을 기준으로 하는 연호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 결과 역사를 기록하다보면 이 방식에 따른 연표가 모자이크처럼 되어 곤란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는 과거의 어떤 절대시점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연대표기법을 도입했다. 그는 28년주기, 19년주기, 그리고 15년주기를 함께 사용했다. 28년주기는 태양주기로 율리우스력에서 요일과 날짜가 정확하게 반복되는 주기이고, 19년주기는 달의 삭망패턴이 달력의 날짜에 (거의 정확히) 맞춰지는 주기이며, 마지막으로 15년주기는 로마의 징세주기였다. 이 시스템에서 어떤 한 해는 (S, G, I)의 조합으로 표기할 수 있다 (S=1~28, G=1~19, I=1~15). 이 세 주기가 겹치는 것은 28*19*15 = 7980년이 되는데, 바로 이 주기가 율리우스 주기/Julian Period가 되며, 이 시스템에 따른 원년은 (1,1,1)로 표기된다. 이 해는 BC 4713년 혹은 -4712년이다.
그럼,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제시한 서력기원 원년 계산법을 정리해 보자.
그는 AD 457년 아퀴텡의 빅토리우스 (Victorius of Aquitaine)가 작성한 로마식의 부활절 산정표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방식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작성되고 서방교회에도 잘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방식의 부활절 산정표를 기준으로 정확한 부활절 날짜를 계산해 나갔다. AD 311년 무렵부터 이집트 꼽트 교회가 사용하던 이 방식은, 라틴교회에서는 부활절을 계산하는데 사용되지 않았지만, 꼽트교회와 동방교회에서는 계속 사용되고 있었다.
로마에 알려진 라틴어 버전의 이 알렉산드리아식 산정표는 AD 444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로스의 비서였던 테오필로스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연표에 맞춰진 5번의 19년주기 (95년)가 기록되어 있다. 그 첫 연도는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ANNI DIOCLETIANI) 285년 후인 해이다. 그는 이 산정표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228-247년 간의 19년 주기를 이용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즉위연도에 맞춘 이 방식은 계산하기에 편리했는데, 연도들을 19로 나누게 될때 생기는 나머지값이 19년주기의 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이 부활절 산정표가 기독교를 가장 박해했던 로마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집권 (ANNI DIOCLETIANI)을 기준해서 표기되는 것이 영 못마땅했다. 그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ANNI DIOCLETIANI" 248년이 되던 해부터의 부활절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ANNI DOMINI NOSTRI JESU CHRISTI" 532년으로 표기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가 생각한 예수 탄생의 시점을 "간접적으로" 소급해볼 수 있다.
라틴어/영어 원문과 자세한 주석은 아래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ccel.org/ccel/pearse/morefathers/files/dionysius_exiguus_easter_01.htm
## 엑시구스의 오류 (?)
사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계산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부활절 계산에서 오류를 범했다고 볼 이유는 거의 없다. 진짜 주목해야 할 문제는 그가 제시한 디오클레티아누스/예수의 비교연표에 있다. 그의 방식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229년"이 "예수로부터 513년"이 되는데, "예수로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까지의 이 기간을 어떻게 산출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그가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집권기간을 살펴보면 왜 이 문제가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는 AD 284년 11월 20일에 집권했고 AD 286년 4월 1일까지는 단독집권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AD 305년 5월 1일까지는 동서로 분할한 제국 가운데 동부를 맡아 아우구스투스로 다스렸다. (서부는 막시미니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서 지배했다.)
여기서 우선 몇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는 자신이 편지를 기록한 AD 525년과 로마의 연표를 아래와 같이
일치시킨다.
# 초기 기독교의 전통적 탄생 연도: BC 2/3년
전편에서는 크리스마스의 날짜를 정하게 된 종교적/역사적 기원과, BC 3/2년 무렵에 일어난 특별한 천체현상인 3합에 대해 다뤘다. 이번에는 BC 3/2년이 로마제국에서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다루겠다.
이 문제는 예수의 탄생 연도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는 헤롯대왕의 사망시점을 정하는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사실 기독교 교부들의 기록들은 BC 3/2년을 예수의 탄생시점으로 설명하는 반면, 헤롯대왕의 사망을 기원년 4년으로 잡는 표준연표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BC 4년 이전으로 잡아야 한다.
헤롯대왕의 사망연도는 아직도 여전히 논쟁거리며, 이 글에서는 BC 3/2년을 예수가 탄생한 유력한 시점으로 잡겠다. 사실 BC 10년 - AD 1년 가운데 여러가지 가장 극적인 장면이 벌어지는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
정통파 교회가 인준한 네 권의 {복음서} 가운데서 예수의 탄생 전후의 일화를 가장 자세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은 {누가/루가의 복음서}다. 전통적으로 바울의 제자이자 의사였던 안티오키아 출신의 시리아인 누가/루가가 기록한 것이라고 여겨져온 이 {복음서}의 저자는, 이 기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면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임을 이 문서의 첫 머리에서 강조한다. 이 {누가/루가복음서}는 테오필로스에게 헌정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첫 대목을 읽어보자 ( 한국어 {공동번역}).
이 점을 우선 염두에 두고 자료들을 검토해 보자.
# 아우구스투스의 "등록령"과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
{누가/루가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의 일대기에 대해 자신 이전의 여러 사람들이 정리를 시도했었고, 자신 역시 자세히 조사해서 복음서를 엮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 그가 기록해 남긴 내용은 얼마나 정확할까?
이 진술에는 세가지 "역사적인 단서"들이 등장한다. (1) "아우구스투스" 때 전 제국에서 시행된 "호구조사령", (2) "첫번째" 호구조사령을 관할한 "시리아 총독 퀴리노 (퀴리니우스), 그리고 (3) "호구조사령" 혹은 "등록"이 그것들이다.
예수를 허구적인 인물로 간주하지 않는 한, 예수가 태어난 무렵이 로마의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시절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그 무렵 "온 로마제국"에서 시행했다는 "호구조사령" 혹은 "등록"의 정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그런데 아마도 위에 인용된 4절 가운데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제 2절에 등장하는 퀴리니우스의 당시 행적과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루가 복음서}는 그가 당시에 "시리아 총독"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비슷한 무렵에 씌여진 보다 공식적인 역사기록인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는 "징세를 목적으로 한"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의 센서스는 AD 6년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탄생을 BC 2/3년으로 보는 전통적인 교부들의 연표와 BC 4년으로 보는 현대의 표준연표에 따르더라도 8-10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혹자는 {복음서}의 '퀴리니우스'는 '퀸틸리우스 (바루스)'의 오기라고 보기도 한다.)
요세푸스를 인용한다.
루가를 요세푸스보다 더 공식적인 역사가로 볼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 역시 루가는 자료를 수집/정리할 때 연대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물론 그의 {복음서}를 그저 일반문서라고 본다면 기독교도들이 그다지 이 문제에 대해 민감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를 "영감받은 문서"로 간주하게 될 경우, 이 문제는 매우 껄끄러운 문제가 되어버린다. 만약 루가가 공식적인 역사기록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저질렀다면, 나머지 기록은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를 언급하는 제 2절을 필사오류 혹은 필사자에 의한 첨삭이라고 보는 설은 일단은 배제하도록 하겠다.
우선 코이네 그리스어로 작성된 {복음서}에 등장하는 로마관리의 표기는 로마식 호칭과 1:1 대응이 되지않는다는 점부터 먼저 설명해보자.
가령, 우리말로는 "총독"에 대응하는 라틴어는 '프로큐라토르' 혹 '프리펙투스' (빌라도의 경우)이거나 혹은 레가투스 (시리아 총독)이다. 이들 행정관에 대한 우리말 번역은 로마관리의 위계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 {복음서} 역시 "통치자/governor"란 일반적 단어인 그리스어 ἡγεμών를 사용해 "상급관리"를 모두 표현한다. 뒤에 등장할 퀴리니우스는 {복음서}에서는 ἡγεμονεύοντος τῆς συρίας hegemoneuontos tes Surias로 표현된다. "시리아 총괄지휘관"에 해당한다. 요세푸스의 경우, 유대아에 파견되는 로마관리들은 ἐπίτροπος 혹은, 특별히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경우 ἡγεμών ("Ant." xviii. 3, § 1)을 사용하며, 폰티우스 필라투스 이전의 유대아 군사담당관들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용어를 적용시킨다. 아켈라오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δικαιοδότης (=법관)으로 임명받은 퀴리니우스와 함께 유대아에 파견된 기사계급의 코포니우스의 역할은 "ἡγησόμενος Ἰουδαίων τῇ ἐπὶ πᾶσιν ἐξουσίᾳ" (=유대아 지역 전권대사)로 표현된다.
아래는 BC 10년에서 AD 4년까지의 "표준"연표에 따르는 시리아 총독/레가투스의 재임기간이다. 이 글에서 관심이 되는 BC 4-1년 간의 총독이 누구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표준연표에 대해서는 제 3부에서 다루겠다.)
우선, 퀴리니우스의 "센서스"가 AD 6/7년에 있었다는 요세푸스의 기록 (http://www.sacred-texts.com/jud/josephus/ant-18.htm)을 확인해 보자. 요세푸스는 이 시점을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를 패배시킨 해로부터 37년 후라고 진술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표준연표에 따르면 AD 6/7년이 된다.
인용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시리아 총독 / 레가투스 퀴리니우스는 AD 6/7년 사이에 징세용 센서스/등록 (역시 ἀπογραφαῖς)를 했다. 이것은 {루가/누가 복음서}에 이어지는 누가/루가의 또 다른 기록인 {사도행전} 5장 37절에 등장하는 호구조사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요세푸스도 유사한 기록을 남겼다.
우선 튜다에 대한 진술이다. 요세푸스가 기록하는 이 인물은 AD 46년에 죽었으므로 {사도행전}의 그 "튜다"일 수 없다. 이것이 요세푸스 혹은 {사도행전}의 저자, 혹은 {사도행전} 속 화자인 바리사이파의 지도자 가말리엘의 착오인지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논란이 있다.
AD 6년의 폭동과 관련된 가말라의 유다와 관련된 요세푸스의 진술은 {사도행전}과 일치한다.
그런데 복음서는 예수가 태어난 무렵의 센서스가 퀴리니우스의 "첫번째" 센서스였다고 진술한다. 만약 두 진술이 모두 맞다면 위에 언급된 퀴리니우스의 센서스는 그 후의 센서스일 가능성도 있다. 만약 퀴리니우스에 의한 여러 차례의 센서스가 없었다면, 왜 굳이 복음서의 저자는 "첫번째"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그런데 사실 {루가/누가 복음서} 제 2장은 퀴리니우스가 시행한 첫번째 / πρώτη "센서스"에 대해 그저 "등록/ ἀπογράφεσθαι / apographesthai"이라고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울러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ἡγεμονεύοντος 에 대응하는 아래 한국어 "총독"이란 용어는 적절한 용어사용이 아니다.
한편, 법률가 출신의 북-아프리카의 라틴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의 공식사료를 근거로 예수의 탄생 무렵에 여러 번의 센서스가 유대아 지역에서 시행되었으며, 특별히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사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시행한 센서스가 예수의 탄생 때 있었다고 한다. 복음서에 해박했던 테르툴리아누스는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투르니누스가 어떤 직위에서 센서스를 지시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제 1권 29장은 표준연표로 BC 6/5년 무렵 헤롯과 문제를 빚은 아라비아인 실레우스가 사투르니누스의 취조를 받은 후 로마로 보내지는 장면을 기술한다. 그런데 이때 요세푸스는 이 사투르니누스 (Σατορνίνῳ) 에 대해 "총독"이라는 직위명으로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로마가 시리아를 지휘/관리하기 파견한 관리 τῷδιέποντι τὴν Συρίαν ἀνεπέμφθησαν εἰς Ῥώμην" 로 부르고 있고, {유대고대사} 제 17권 1.1에서는 "시리아 에피멜레테스 τὸν τῆς Συρίας ἐπιμελητήν"라고 부르고 있다.
표준연표에 따르면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는 BC 10/9년부터 7/6년 사이에 "시리아 레가투스"였고,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는 AD 4/5년에 각각 "시리아 레가투스"였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언급한 사투르니누스는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다. 그의 라틴어 기록을 읽어보자.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문서보관소에 남아있는 센서스 기록이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이 아니냐며 반문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시대에 예수 탄생 무렵의 센서스/등록 기록이 (더 정확히는 요셉/마리아/예수의 센서스 기록이) 로마의 문서보관소에 남겨져 있었는지에 대해서 확인할 방법은 없다.
앞서 제시한 시리아 총독의 표준연표를 보면, 사투르니누스의 재임기간은 BC 9-6년이다. 그리고 BC 4-1년의 시리아 담당총독은 분명치 않다. 혹시 사투르니누스는 그 기간 동안 재임명 되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BC 2/3년 무렵 시리아에는 로마로부터 파견된 복수의 행정관들이 존재했던 것일까?
우선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자.
요세푸스는 시리아 총독 사투르니누스의 재임기간 중 다수의 행정관들이 실제로 있었음을 보여준다 (Josephus, Antiquities XVI.280, 285, 357, 361). 요세푸스가 명시하는 바에 따르면, 적어도 두 명의 군사지휘관 (사투르니누스와 볼룸니우스/Volumnius)이 동시에 재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이 처리안 사안을 언급할 때 사투르니누와 볼룸니우스를 늘 함께 묶어서 언급한다.
가령, 요세푸스는 사투르니누스 (Σατορνίνου)와 볼룸니우스 (Οὐολομνίου)을 묶어서 "시리아 지휘관/총독 τῶν Συρίας ἐπιστατούντων)으로 복수로 명시한다. 물론 둘이 같은 직위에 있은 것은 아니고 볼룸니우스가 레가투스인 사투르니누스의 직속인 트리부누스 밀리툼 (군사호민관)으로 켄투리온 (백부장)들의 상관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든 사안이 사트루니누스와 볼룸니누스 두 사람 모두의 승인을 얻어야 한 것으로 기술된다.
그럼 퀴리니우스도 사투르니누스와 함께 시리아에 파견된 이런 복수의 행정관 중 한 명이었을까? 사료상 분명치 않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통해 알려진 대로라면, 퀴리니우스가 "총독/레가투스라는 직위로 시리아에 부임한 것은 AD 6년의 일이다. 그때 퀴리니우스의 공식직함은 Legatus Augusti Pro praetore 였다. 황제/아우구스투스의 특사로서 원로원이 아닌 황제가 직속상관이란 뜻이다. 이 직책은 이전에 콘술이나 Praetor 를 맡은 경험이 있는 레벨의 원로원 의원에게 부여되었는데, 유대아 지역처럼 군단이 주둔하지 않는 속주는 로마의 기사계급 (eques)에서 임명된 praefecti (후대의 procuratores)이 담당했다. 징세와 재정에 대한 업무는 독자적인 프로큐라토르들이 담당해서 황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런데 퀴리니우스는 AD 6년 이전부터 시리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시리아통이었다. AD 1-4년,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20대의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시리아 안티오키아를 총괄할 때 그를 보좌하게 되었던 퀴리니우스는 당시의 명각에 따르면 안티오키아-피시디아에서 명예시장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퀴리니우스는 가이우스를 보좌해 안티오키아 일대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타키투스는 퀴리니우스가 사업감각에 뛰어났던 것으로 (Tacitus, Annals, III.48.) 묘사했고, 소아시아에서 벌인 군사작전에서의 그의 역할을 (아우구스투스의) "특사(special command)"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그에 대한 아우구스투스의 각별한 신임을 뜻할 수 있다 AD 6/7년에 시리아에 부임했을때, 요세푸스(Antiquities, 18.1.1)는 특이하게도 그를 그리스어로 δικαιοδότης / dikaiodotes (법관)으로 표기했다. 이 직위는 오직 요세푸스와 리키아에서 발굴된 명문에서만 발견된다.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총독의 사법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
테르툴리아누스보다 한두 세대 전 AD 2세기 중반에 살았던 유스티노스는, 로마의 사료에 따라 (전통적인 예수 탄생 연도인 BC 2/3년 무렵) 사투르니누스 당시에 퀴리니우스가 유대아를 담당한 (첫번째) "총독" (그리스어 에피프로포스)이었다고 말한다 (Apology, I.34). 이것은 복음서의 기록에 보다 가까운 형태의 기록이다.
유스티노스가 기독교 교부라는 이유로 이 진술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그의 대표저술 {변호/Apology}는 로마황제에게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한 저작이기 때문이다. 유스티노스는 이 저작을 로마황제 피우스와 그의 아들들인 철학자 베리시무스 및 루키우스에게 헌정했다. 따라서 이런 의도의 저작 속에서 유스티노스가 로마의 사료를 조작하는 자충수를 둘 확률은 그다지 높지않다. (피우스, 베리시무스, 루키우스가 이 저작을 정말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헌정사를 인용한다.
유스티노스의 {첫번째 변증} 1.34.2 를 원문에서 인용한다.
유스티노스는 퀴리니우스의 직위를 그리스어로 ἐπίτροπος 로 언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요세푸스 역시 로마의 해당 직위를 그리스어 ἐπίτροπος (Josephus, "Ant." xviii. 1, § 1; idem, "B. J." ii. 8, § 1)로 옮겼다.
특별히 {유대 고대사}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 적용시킨 그리스어 용어는 "ὁ τῆς Ἰουδαίας ἡγεμὼν (= 유대아 담당 (군사)지휘관)이다. 이것은 로마 직위 "프리펙투스"에 거의 근접한 정의다. 또한 폰티우스 필라투스 이전의 유대아 담당관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용어를 적용시킨다.
이 '에피트로포스'가 일반적으로 총독/legatus과 반-독립적으로 활동하는 황제 직속의 직책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당시 시리아 총독 사투르니누스와 별개로 시리아 관할권인 유대아에서 직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루가/누가복음서} 역시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legatus"라고 말한 적은 없고 다만 그리스어로 ἡγεμονεύοντος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BC 6-4년 당시 퀸틸리우스 바루스 당시의 시리아 군사/행정관은 단수로 표기하지만, 시리아 레가투스인 바루스와 대립적인 인물로 유대아에 내려와 독립적인 행동을 취한 사비누스란 인물도 등장한다. 이 인물은 황제가 직접 파견한 인물로서,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제 2권 2장에서는 이 사비누스 (Σαβῖνος)를 "시리아 에피트로포스 (ὁ τῆς Συρίας ἐπίτροπος)" 부르고 있고, {유대고대사} 17.221 에서는 '시리아 사안으로 파견된 황제특파 에피트로포스 (Καίσαρος ἐπίτροπος τῶν ἐν Συρίᾳ πραγμάτων) 로 불리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 왜, 무엇을 "등록"했는가?: 징세? 호적? 충성맹세?
위의 정황에 따라, (아마도) BC 3/2년 무렵에 (시리아 관할의 유대아를 담당한 행정관으로 활동한 퀴리니우스(?)에 의해) 시행된 센서스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보자.
몇가지 난점이 있다.
우선, BC 3/2년이 로마제국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시기였는지를 설명하겠다.
BC 3/2년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60세가 되던 무렵이다. 예수보다 약 1세기 이후에 태어난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는 예수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권좌에 오른 후 41년째 되는 해라고 적었다. 옥타비아누스는 BC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및 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시작했다.
BC 2년 1월 5일,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파테르 파트리에/Pater Patrie/국부'라는 호칭을 수여했다. 원로원이 그에게 '파테르 파트리에'를 수여한 이 날은 "화합"을 신격화한 콘코르디아 여신의 축제일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고도로 계산된 날짜다.
아우구스투스 본인이 76세때 직접 쓴 {Res Gestae}에 따르면, 통상적인 형태인 원로원과 군대의 충성맹세 뿐 아니라 모든 로마인의 이름으로 '파테르 파트리에'가 부여된 것이다.
이 '파테르 파트리에'는 아우구스투스 이전(과 이후)에도 키케로나 율리우스 카에사르 같은 몇몇 영웅들에게 수여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경우는 특별했다. BC 2년은 로마건국 75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고, 아우구스투스의 집권 25년을 기념하는 해 (silver jubilee)였다.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BC 27년에 이어) 직접 충성을 서약했을 뿐 아니라, 로마 전역의 거주민들이 아우구스투스에게 직접 충성서약을 해야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춘 대규모 축제들이 정부관리 하에 계획/집행되었다.
충성서약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된 제단에서 했다. 이 충성서약에 대해 남아있는 대표적인 유물은 북부 소아시아의 팔랑고니아/ Paphlagonia (현, 파지몬/Phazimon)에서 발굴된 기념비다. BC 3년 3월 6일의 충성서약 내용을 담고 있다.
로마의 변방이자 파르티아와의 접경지대로 로마와는 밀접한 동맹관계를 유지한 속국 아르메니아에서는, 로마에서 보내진 아우구스투스의 초상화가 모든 신전마다 배치되었고, 아마도 거기서 충성맹세를 해야 했던 듯 싶다. 아르메니아의 왕 압가르의 재위 2년 (BC 3년)의 일을 기록한 아르메니아 역사가 코레네의 모세의 기록이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AD 5세기의 역사가이자 신학자인 오로시우스 역시 유사한 기록을 남겼다.
그럼 유대아에서의 상황은 어땠는지 요세푸스의 기록으로 돌아가 보자. 요세푸스는 해당되는 충성맹세에 대해 {유대고대사}에 이렇게 적었다.
요세푸스는 헤롯대왕이 죽기 전 12-15개월 전에 유대아에도 충성서약을 요구하는 아우구스투스의 포고령이 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헤롯대왕의 죽음은 BC 4년이 될 수 없다. 헤롯의 사망 연도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3부에서 다루겠다) 모든 사람들이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충성을 서약해야 했다. 아마도 이 충성서약에 수반된 행정절차가 {누가의 복음서}가 말하는 "등록"을 뜻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종교적으로 배타적인 유대아 일대에서 유대인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에서 충성맹세를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유대아 일대에서 치러진 충성맹세의 자세한 형식에 대해서는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그럼 왜 요셉과 마리아는 동행했을까? 분명하지 않다. 가령, 충성맹세처럼 마리아 본인에 관련되어 있을 수 있고, 혹은 그저 산달이 임박했기 때문에 예수를 호적에 등록시키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복음서}를 제외한 현재까지 알려진 두개의 고대 사료는 로마의 등록/센서스 당시 등록 대상자들이 모두 본인들의 호적지로 돌아가야 했던 것으로 기록한다.
우선 AD 48년 이집트의 센서스와 관련된 파피루스 기록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세인 AD 48년 당시 65세였던 테르모우타리온(Thermoutharion)이란 자유인 여성이 센서스를 위해 귀향한 내용을 담는다. 이집트에서는 그리스계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도 센서스가 시행되기는 했지만, 징세 및 (아마도) 징병 목적으로 가족구성원 전원을 센서스 대상으로 하게 된 것은 로마지배 하에 들어간 후 BC 10년 경 무렵인 것으로 역사가들은 여긴다.
AD 104년 로마령 이집트의 프리펙투스였던 가이우스 비비우스 막시무스는 센서스/등록을 위해 본적지를 떠나 도시에 와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향령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귀향령의 목적은 포고령에 명시되어 있듯이 대체로 두가지인데 (1) (아마도 징세와 병역을 위한) 관례적 등록 (customary business of registration) + (2) 귀향한 자들을 농사일에 동원 (apply themselves to the cultivation)하기 위한 목적이다. 도시에 남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사전등록 할 것을 예외조항으로 두었다.
{복음서}에 따라 둘이 모두 다윗의 계보를 잇고 있기 때문에 메시아의 지위를 주장할 수 있는 다윗의 가문들 모두를 특별관리하기 위한 차원에서 둘이 모두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을 베들레헴에 모으는 것 자체가 이미 특별관리에 들어간다. 만약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베들레헴에서 등록해야 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베들레헴에 모인 유다부족원의 상당수는 다윗의 자손/즉 미래의 메시아를 자칭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분자로 간주될 수 있다. 혹은 아우구스투스의 포고령이 말 그대로 모든 신민들의 충성서약을 요구한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대아에서의 충성서약은 유대인 가운데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반발을 샀는데, 약 6천 명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충성서약을 거부했고, 이에 헤롯대왕은 이들에게 상당한 벌금을 물렸다. 바리새파들은 이 모든 상황을 헤롯왕가가 종식되고 새로운 왕가 혹은 메시아가 도래할 때가 임박한 징조로 해석했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되자 헤롯은 바리새파의 지도급 인사들과 궁정의 몇몇 인사,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을 모조리 처형하려고 시도한다.
요세푸스를 다시 인용한다.
관련된 사료는 Nepthali Lewis and Meyer Reinhold, eds. {Roman Civilization}, 2 vols. (NY: Harper Torchbooks), 2:34-35 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길 권한다.
# 정리
{복음서}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과 역사적 사실관계를 떠나 현대의 비교종교학자와 신학자들이 흔히 취하는 입장에서 {복음서}를 초기 기독교의 프로파겐다용 저작으로 해석하는 경우라면, 예수의 탄생을 다룬 마태/마태오와 누가/루가는 BC 10년에서 AD 1년 가운데 어떤 해를 예수의 탄생으로 정하는 것이 가장 극적이고 효과적이었을까?
표준연대표가 말하는 BC 4년 이전은 (아마도 BC 7-4년)은 메시아가 탄생하기에는 사실 대단히 무미건조한 시점이다. 그러나 BC 3/2년은 역사적으로나 천문학적으로 대단히 유의미한 시점에 해당한다. 심지어 세속권력을 상징하는 아우구스투스 및 로마의 새출발과 (신의 아들인) 예수의 탄생을 대조시킬 수 있는 절호의 모티프가 발견되기도 한다. 종교적으로 보더라도 유의미할 뿐 아니라, 심지어 {복음서}가 순수한 창작이었다고 보는 경우에도 BC 3/2년이 프로파겐다를 위해서는 가장 매력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럼 왜 표준연대표는 BC 4년 이전을 예수의 탄생시점으로 보는 것일까?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시스템에서 AD 1년은 예수가 탄생한 해일 수도 있고, 예수가 태어난 바로 직후의 해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시스템에서의 1월 1일은 예수의 탄생일에 맞춘 것이 아니라, 로마달력 (율리우스력)의 신년 1월 1일에 맞춘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사가들은 고대기록에서 '세는 해'와 '채운 해'를 놓고 종종 고심하게 되는데, 이때 또 1년 정도의 오차가 발생 가능하다.
참고로 AD 1년의 바로 전 해를 BC 1년으로 하는 방식은 (즉, 0년이 없는), 엑시구스가 아니라 AD 8세기 영국의 수도사/역사가 베데/Bede가 도입했다. 현대 천문학자들은 이것 대신 0년 개념을 도입해서, AD 1년은 +1로, BC 1년은 0으로, 그리고 BC 2년은 -1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 시스템은 18세기의 천문학자 카시니가 1740년에 도입한 것이다. 천문학에서 사용되는 또 다른 방식은 1583년 Joseph Justus Scaliger가 제안한 방법이다. 그 당시에는 이미 서력기원이 있었음에도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군주의 집권일을 기준으로 하는 연호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 결과 역사를 기록하다보면 이 방식에 따른 연표가 모자이크처럼 되어 곤란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는 과거의 어떤 절대시점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연대표기법을 도입했다. 그는 28년주기, 19년주기, 그리고 15년주기를 함께 사용했다. 28년주기는 태양주기로 율리우스력에서 요일과 날짜가 정확하게 반복되는 주기이고, 19년주기는 달의 삭망패턴이 달력의 날짜에 (거의 정확히) 맞춰지는 주기이며, 마지막으로 15년주기는 로마의 징세주기였다. 이 시스템에서 어떤 한 해는 (S, G, I)의 조합으로 표기할 수 있다 (S=1~28, G=1~19, I=1~15). 이 세 주기가 겹치는 것은 28*19*15 = 7980년이 되는데, 바로 이 주기가 율리우스 주기/Julian Period가 되며, 이 시스템에 따른 원년은 (1,1,1)로 표기된다. 이 해는 BC 4713년 혹은 -4712년이다.
그럼,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제시한 서력기원 원년 계산법을 정리해 보자.
그는 AD 457년 아퀴텡의 빅토리우스 (Victorius of Aquitaine)가 작성한 로마식의 부활절 산정표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방식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작성되고 서방교회에도 잘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방식의 부활절 산정표를 기준으로 정확한 부활절 날짜를 계산해 나갔다. AD 311년 무렵부터 이집트 꼽트 교회가 사용하던 이 방식은, 라틴교회에서는 부활절을 계산하는데 사용되지 않았지만, 꼽트교회와 동방교회에서는 계속 사용되고 있었다.
로마에 알려진 라틴어 버전의 이 알렉산드리아식 산정표는 AD 444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로스의 비서였던 테오필로스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연표에 맞춰진 5번의 19년주기 (95년)가 기록되어 있다. 그 첫 연도는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ANNI DIOCLETIANI) 285년 후인 해이다. 그는 이 산정표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228-247년 간의 19년 주기를 이용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즉위연도에 맞춘 이 방식은 계산하기에 편리했는데, 연도들을 19로 나누게 될때 생기는 나머지값이 19년주기의 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이 부활절 산정표가 기독교를 가장 박해했던 로마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집권 (ANNI DIOCLETIANI)을 기준해서 표기되는 것이 영 못마땅했다. 그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ANNI DIOCLETIANI" 248년이 되던 해부터의 부활절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ANNI DOMINI NOSTRI JESU CHRISTI" 532년으로 표기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가 생각한 예수 탄생의 시점을 "간접적으로" 소급해볼 수 있다.
라틴어/영어 원문과 자세한 주석은 아래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ccel.org/ccel/pearse/morefathers/files/dionysius_exiguus_easter_01.htm
## 엑시구스의 오류 (?)
사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계산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부활절 계산에서 오류를 범했다고 볼 이유는 거의 없다. 진짜 주목해야 할 문제는 그가 제시한 디오클레티아누스/예수의 비교연표에 있다. 그의 방식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229년"이 "예수로부터 513년"이 되는데, "예수로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까지의 이 기간을 어떻게 산출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그가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집권기간을 살펴보면 왜 이 문제가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는 AD 284년 11월 20일에 집권했고 AD 286년 4월 1일까지는 단독집권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AD 305년 5월 1일까지는 동서로 분할한 제국 가운데 동부를 맡아 아우구스투스로 다스렸다. (서부는 막시미니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서 지배했다.)
여기서 우선 몇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예수로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까지의 기간을 무엇을 (즉, 문헌, 역법) 근거로 계산했는가?
-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어떤 집권일"을 기준으로 당시의 부활절을 계산했는가?
- 예수의 "무엇을" 계산의 기준점으로 삼았는가?
"...The nineteen year cycle begins, which the Greek call Enneakaidekaeterida (nineteen yearly), established by the holy [Church] Fathers, in which you shall find fourteen paschal[ moon]s each time without error; you shall just bear in mind, in each of the years, which cycle of the moon and which nineteen year [cycle] prevails. In the present [year], in the consulship of Probus Junior, it is the thirteenth of the nineteen year cycle, and the tenth lunar one..."
(현대에 사용되는) 헤롯대왕의 사망연도를 기준으로 하는 불일치는 별도로
하고, 왜 그의 방식은 다른 기독교 교부들의 일반적으로 계산해 오던
예수탄생의 연도와도 2-3년의 오차를 보일까? 이 오차는 그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두가지 집권연도를 혼동한 결과일까? 아니면 그가 사용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의 다른 연표에 오차가 있었던 걸까?
# 초기 기독교의 전통적 탄생 연도: BC 2/3년
전편에서는 크리스마스의 날짜를 정하게 된 종교적/역사적 기원과, BC 3/2년 무렵에 일어난 특별한 천체현상인 3합에 대해 다뤘다. 이번에는 BC 3/2년이 로마제국에서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다루겠다.
이 문제는 예수의 탄생 연도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는 헤롯대왕의 사망시점을 정하는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사실 기독교 교부들의 기록들은 BC 3/2년을 예수의 탄생시점으로 설명하는 반면, 헤롯대왕의 사망을 기원년 4년으로 잡는 표준연표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BC 4년 이전으로 잡아야 한다.
헤롯대왕의 사망연도는 아직도 여전히 논쟁거리며, 이 글에서는 BC 3/2년을 예수가 탄생한 유력한 시점으로 잡겠다. 사실 BC 10년 - AD 1년 가운데 여러가지 가장 극적인 장면이 벌어지는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
정통파 교회가 인준한 네 권의 {복음서} 가운데서 예수의 탄생 전후의 일화를 가장 자세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은 {누가/루가의 복음서}다. 전통적으로 바울의 제자이자 의사였던 안티오키아 출신의 시리아인 누가/루가가 기록한 것이라고 여겨져온 이 {복음서}의 저자는, 이 기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면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임을 이 문서의 첫 머리에서 강조한다. 이 {누가/루가복음서}는 테오필로스에게 헌정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첫 대목을 읽어보자 ( 한국어 {공동번역}).
존경하는 데오필로님,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그 일들을 글로 엮는 데 손을 댄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이 쓴 것은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사실 그대로입니다. 저 역시 이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 둔 바 있으므로 그것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각하께 써서 보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하오니 이 글을 보시고 이미 듣고 배우신 것들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 한국어 {루가의 복음서, 공동번역}
이 점을 우선 염두에 두고 자료들을 검토해 보자.
# 아우구스투스의 "등록령"과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
{누가/루가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의 일대기에 대해 자신 이전의 여러 사람들이 정리를 시도했었고, 자신 역시 자세히 조사해서 복음서를 엮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 그가 기록해 남긴 내용은 얼마나 정확할까?
1 ἐγένετο δὲ ἐν ταῖς ἡμέραις ἐκείναις ἐξῆλθεν δόγμα παρὰ καίσαρος αὐγούστου ἀπογράφεσθαι πᾶσαν τὴν οἰκουμένην. 2 αὕτη ἀπογραφὴ πρώτη ἐγένετο ἡγεμονεύοντος τῆς συρίας κυρηνίου. 3 καὶ ἐπορεύοντο πάντες ἀπογράφεσθαι, ἕκαστος εἰς τὴν ἑαυτοῦ πόλιν. 4 ἀνέβη δὲ καὶ ἰωσὴφ ἀπὸ τῆς γαλιλαίας ἐκ πόλεως ναζαρὲθ εἰς τὴν ἰουδαίαν εἰς πόλιν δαυὶδ ἥτις καλεῖται βηθλέεμ, διὰ τὸ εἶναι αὐτὸν ἐξ οἴκου καὶ πατριᾶς δαυίδ, 5 ἀπογράψασθαι σὺν μαριὰμ τῇ ἐμνηστευμένῃ αὐτῶ, οὔσῃ ἐγκύῳ.
그 무렵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다. 이 첫번째 호구 조사를 하던 때 시리아에는 퀴리노라는 사람이 총독으로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등록을 하러 저마다 본고장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갔다. 베들레헴은 다윗 왕이 난 고을이며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 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루가의 복음서} 2장
이 진술에는 세가지 "역사적인 단서"들이 등장한다. (1) "아우구스투스" 때 전 제국에서 시행된 "호구조사령", (2) "첫번째" 호구조사령을 관할한 "시리아 총독 퀴리노 (퀴리니우스), 그리고 (3) "호구조사령" 혹은 "등록"이 그것들이다.
예수를 허구적인 인물로 간주하지 않는 한, 예수가 태어난 무렵이 로마의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시절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그 무렵 "온 로마제국"에서 시행했다는 "호구조사령" 혹은 "등록"의 정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그런데 아마도 위에 인용된 4절 가운데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제 2절에 등장하는 퀴리니우스의 당시 행적과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루가 복음서}는 그가 당시에 "시리아 총독"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비슷한 무렵에 씌여진 보다 공식적인 역사기록인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는 "징세를 목적으로 한"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의 센서스는 AD 6년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탄생을 BC 2/3년으로 보는 전통적인 교부들의 연표와 BC 4년으로 보는 현대의 표준연표에 따르더라도 8-10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혹자는 {복음서}의 '퀴리니우스'는 '퀸틸리우스 (바루스)'의 오기라고 보기도 한다.)
요세푸스를 인용한다.
Κυρίνιος δὲ τῶν εἰς τὴν βουλὴν συναγομένων ἀνὴρ τάς τε ἄλλας ἀρχὰς ἐπιτετελεκὼς καὶ διὰ πασῶν ὁδεύσας ὕπατος γενέσθαι τά τε ἄλλα ἀξιώματι μέγας σὺν ὀλίγοις ἐπὶ Συρίας παρῆν, ὑπὸ Καίσαρος δικαιοδότης τοῦ ἔθνους ἀπεσταλμένος καὶ τιμητὴς τῶν οὐσιῶν γενησόμενος, [2] Κωπώνιός τε αὐτῷ συγκαταπέμπεται τάγματος τῶν ἱππέων, ἡγησόμενος Ἰουδαίων τῇ ἐπὶ πᾶσιν ἐξουσίᾳ. παρῆν δὲ καὶ Κυρίνιος εἰς τὴν Ἰουδαίαν προσθήκην τῆς Συρίας γενομένην ἀποτιμησόμενός τε αὐτῶν τὰς οὐσίας καὶ ἀποδωσόμενος τὰ Ἀρχελάου χρήματα. [3] οἱ δὲ καίπερ τὸ κατ᾽ ἀρχὰς ἐν δεινῷ φέροντες τὴν ἐπὶ ταῖς ἀπογραφαῖς ἀκρόασιν ὑποκατέβησαν τοῦ μὴ εἰς πλέον ἐναντιοῦσθαι πείσαντος αὐτοὺς τοῦ ἀρχιερέως Ἰωαζάρου, Βοηθοῦ δὲ οὗτος υἱὸς ἦν. καὶ οἱ μὲν ἡττηθέντες τοῦ Ἰωαζάρου τῶν λόγων ἀπετίμων τὰ χρήματα μηδὲν ἐνδοιάσαντες: --- {Antiquities} 18.1.1
Now Cyrenius, a Roman senator, and one who had gone through other magistracies, and had passed through them till he had been consul, and one who, on other accounts, was of great dignity, came at this time into Syria, with a few others, being sent by Caesar to be a judge of that nation, and to take an account of their substance. Coponius also, a man of the equestrian order, was sent together with him, to have the supreme power over the Jews. Moreover, Cyrenius came himself into Judea, which was now added to the province of Syria, to take an account of their substance, and to dispose of Archelaus's money; --- Josephus, Antiquities, Flavius Josephus. The Works of Flavius Josephus. Translated by. William Whiston, A.M. Auburn and Buffalo. John E. Beardsley. 1895. 18.1.1
로마 원로원 의원인 퀴리니우스는 나중에 콘술이 될때까지 여러가지 다른 공직을 거쳤고, 다른 자료에 따르면 매우 위엄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카이사르에 의해 그 곳 (시리아)의 제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법관으로 발령받아 몇몇 사람들과 함께 시리아에 부임했다. 기사계급의 코포니우스가 함께 발령받았는데, 그는 유대아 일대를 치리하는 전권을 부여받은 관리가 되었다. 퀴리니우스는 당시 시리아에 병합된 유대아의 제반문제를 처리하고, 헤롯 아켈라오스의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 직접 유대아로 내려왔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8.1.1 / 번역: 최광민
루가를 요세푸스보다 더 공식적인 역사가로 볼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 역시 루가는 자료를 수집/정리할 때 연대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물론 그의 {복음서}를 그저 일반문서라고 본다면 기독교도들이 그다지 이 문제에 대해 민감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를 "영감받은 문서"로 간주하게 될 경우, 이 문제는 매우 껄끄러운 문제가 되어버린다. 만약 루가가 공식적인 역사기록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저질렀다면, 나머지 기록은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를 언급하는 제 2절을 필사오류 혹은 필사자에 의한 첨삭이라고 보는 설은 일단은 배제하도록 하겠다.
우선 코이네 그리스어로 작성된 {복음서}에 등장하는 로마관리의 표기는 로마식 호칭과 1:1 대응이 되지않는다는 점부터 먼저 설명해보자.
가령, 우리말로는 "총독"에 대응하는 라틴어는 '프로큐라토르' 혹 '프리펙투스' (빌라도의 경우)이거나 혹은 레가투스 (시리아 총독)이다. 이들 행정관에 대한 우리말 번역은 로마관리의 위계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 {복음서} 역시 "통치자/governor"란 일반적 단어인 그리스어 ἡγεμών를 사용해 "상급관리"를 모두 표현한다. 뒤에 등장할 퀴리니우스는 {복음서}에서는 ἡγεμονεύοντος τῆς συρίας hegemoneuontos tes Surias로 표현된다. "시리아 총괄지휘관"에 해당한다. 요세푸스의 경우, 유대아에 파견되는 로마관리들은 ἐπίτροπος 혹은, 특별히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경우 ἡγεμών ("Ant." xviii. 3, § 1)을 사용하며, 폰티우스 필라투스 이전의 유대아 군사담당관들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용어를 적용시킨다. 아켈라오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δικαιοδότης (=법관)으로 임명받은 퀴리니우스와 함께 유대아에 파견된 기사계급의 코포니우스의 역할은 "ἡγησόμενος Ἰουδαίων τῇ ἐπὶ πᾶσιν ἐξουσίᾳ" (=유대아 지역 전권대사)로 표현된다.
[55] Πιλᾶτος δὲ ὁ τῆς Ἰουδαίας ἡγεμὼν στρατιὰν ἐκ Καισαρείας ἀγαγὼν καὶ μεθιδρύσας χειμαδιοῦσαν ἐν Ἱεροσολύμοις ἐπὶ καταλύσει τῶν νομίμων τῶν Ἰουδαϊκῶν ἐφρόνησε, προτομὰς Καίσαρος, αἳ ταῖς σημαίαις προσῆσαν, εἰσαγόμενος εἰς τὴν πόλιν, εἰκόνων ποίησιν ἀπαγορεύοντος ἡμῖν τοῦ νόμου. [56] καὶ διὰ τοῦτο οἱ πρότερον ἡγεμόνες ταῖς μὴ μετὰ τοιῶνδε κόσμων σημαίαις ἐποιοῦντο εἴσοδον τῇ πόλει. πρῶτος δὲ Πιλᾶτος ἀγνοίᾳ τῶν ἀνθρώπων διὰ τὸ νύκτωρ γενέσθαι τὴν εἴσοδον ἱδρύεται τὰς εἰκόνας φέρων εἰς τὰ Ἱεροσόλυμα.....
[55] BUT now Pilate, the procurator of Judea, removed the army from Cesarea to Jerusalem, to take their winter quarters there, in order to abolish the Jewish laws. So he introduced Caesar's effigies, which were upon the ensigns, and brought them into the city; whereas our law forbids us the very making of images; on which account the former procurators were wont to make their entry into the city with such ensigns as had not those ornaments..... --- Flavius Josephus. The Works of Flavius Josephus. Translated by. William Whiston, A.M. Auburn and Buffalo. John E. Beardsley. 1895. 18.3.1
유대아 총독 필라투스가 겨울철 주둔지로 삼고 또 유대인들의 율법을 철폐하기 위해 카이사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는 황제의 초상을 군단기장에 설치되어있던 황제의 초상들을 예루살렘 안으로 들여왔는데, 우리의 율법은 사람을 그림/조상으로 묘사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던 바였다. 그래서 전임 총독들은 그런 형상이 설치된 기장을 들고 도시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었다....[후략]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3.1 / 번역: 최광민
아래는 BC 10년에서 AD 4년까지의 "표준"연표에 따르는 시리아 총독/레가투스의 재임기간이다. 이 글에서 관심이 되는 BC 4-1년 간의 총독이 누구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표준연표에 대해서는 제 3부에서 다루겠다.)
- Marcus Titius (BC 13/12년 - BC 10/9)
- Gaius Sentius Saturninus (BC 10/9 - BC 7/6)
- Publius Quinctilius Varus (BC 7/6 -BC 4년)
- 불분명 (BC 4년 - BC 1년) Lucius Calpurnius Piso?????
- Gaius Julius Caesar Vipsanianus (BC 1년 - AD 4년)
- Lucius Volusius Saturninus (AD 4-5년)
우선, 퀴리니우스의 "센서스"가 AD 6/7년에 있었다는 요세푸스의 기록 (http://www.sacred-texts.com/jud/josephus/ant-18.htm)을 확인해 보자. 요세푸스는 이 시점을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를 패배시킨 해로부터 37년 후라고 진술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표준연표에 따르면 AD 6/7년이 된다.
인용한다.
"... WHEN Cyrenius had now disposed of Archelaus's money, and when the taxings were come to a conclusion, which were made in the thirty-seventh year of Caesar's victory over Antony at Actium, he deprived Joazar of the high priesthood, which dignity had been conferred on him by the multitude, and he appointed Ananus, the son of Seth, to be high priest; while Herod and Philip had each of them received their own tetrarchy, and settled the affairs thereof. Herod also built a wall about Sepphoris, (which is the security of all Galilee,) and made it the metropolis of the country. He also built a wall round Betharamphtha, which was itself a city also, and called it Julias, from the name of the emperor's wife. When Philip also had built Paneas, a city at the fountains of Jordan, he named it Cesarea. He also advanced the village Bethsaids, situate at the lake of Gennesareth, unto the dignity of a city, both by the number of inhabitants it contained, and its other grandeur, and called it by the name of Julias, the same name with Caesar's daughter...." --- {Antiquities} 18.2.1
Κυρίνιος δὲ τῶν εἰς τὴν βουλὴν συναγομένων ἀνὴρ τάς τε ἄλλας ἀρχὰς ἐπιτετελεκὼς καὶ διὰ πασῶν ὁδεύσας ὕπατος γενέσθαι τά τε ἄλλα ἀξιώματι μέγας σὺν ὀλίγοις ἐπὶ Συρίας παρῆν, ὑπὸ Καίσαρος δικαιοδότης τοῦ ἔθνους ἀπεσταλμένος καὶ τιμητὴς τῶν οὐσιῶν γενησόμενος, [2] Κωπώνιός τε αὐτῷ συγκαταπέμπεται τάγματος τῶν ἱππέων, ἡγησόμενος Ἰουδαίων τῇ ἐπὶ πᾶσιν ἐξουσίᾳ. παρῆν δὲ καὶ Κυρίνιος εἰς τὴν Ἰουδαίαν προσθήκην τῆς Συρίας γενομένην ἀποτιμησόμενός τε αὐτῶν τὰς οὐσίας καὶ ἀποδωσόμενος τὰ Ἀρχελάου χρήματα. [3] οἱ δὲ καίπερ τὸ κατ᾽ ἀρχὰς ἐν δεινῷ φέροντες τὴν ἐπὶ ταῖς ἀπογραφαῖς ἀκρόασιν ὑποκατέβησαν τοῦ μὴ εἰς πλέον ἐναντιοῦσθαι πείσαντος αὐτοὺς τοῦ ἀρχιερέως Ἰωαζάρου, Βοηθοῦ δὲ οὗτος υἱὸς ἦν. καὶ οἱ μὲν ἡττηθέντες τοῦ Ἰωαζάρου τῶν λόγων ἀπετίμων τὰ χρήματα μηδὲν ἐνδοιάσαντες: --- {Antiquities} 18.1.1
"...NOW Cyrenius, a Roman senator, and one who had gone through other magistracies, and had passed through them till he had been consul, and one who, on other accounts, was of great dignity, came at this time into Syria, with a few others, being sent by Caesar to he a judge of that nation, and to take an account of their substance. Coponius also, a man of the equestrian order, was sent together with him, to have the supreme power over the Jews. Moreover, Cyrenius came himself into Judea, which was now added to the province of Syria, to take an account of their substance, and to dispose of Archelaus's money; but the Jews, although at the beginning they took the report of a taxation heinously, yet did they leave off any further opposition to it, by the persuasion of Joazar, who was the son of Beethus, and high priest; so they, being over-pesuaded by Joazar's words, gave an account of their estates, without any dispute about it. Yet was there one Judas, a Gaulonite, (1) of a city whose name was Gamala, who, taking with him Sadduc, (2) a Pharisee, became zealous to draw them to a revolt, who both said that this taxation was no better than an introduction to slavery, and exhorted the nation to assert their liberty; as if they could procure them happiness and security for what they possessed, and an assured enjoyment of a still greater good, which was that of the honor and glory they would thereby acquire for magnanimity ..." --- {Antiquities} 18.1.1
요세푸스에 따르면 시리아 총독 / 레가투스 퀴리니우스는 AD 6/7년 사이에 징세용 센서스/등록 (역시 ἀπογραφαῖς)를 했다. 이것은 {루가/누가 복음서}에 이어지는 누가/루가의 또 다른 기록인 {사도행전} 5장 37절에 등장하는 호구조사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36 πρὸ γὰρ τούτων τῶν ἡμερῶν ἀνέστη θευδᾶς, λέγων εἶναί τινα ἑαυτόν, ᾧ προσεκλίθη ἀνδρῶν ἀριθμὸς ὡς τετρακοσίων· ὃς ἀνῃρέθη, καὶ πάντες ὅσοι ἐπείθοντο αὐτῶ διελύθησαν καὶ ἐγένοντο εἰς οὐδέν. 37 μετὰ τοῦτον ἀνέστη ἰούδας ὁ γαλιλαῖος ἐν ταῖς ἡμέραις τῆς ἀπογραφῆς καὶ ἀπέστησεν λαὸν ὀπίσω αὐτοῦ· κἀκεῖνος ἀπώλετο, καὶ πάντες ὅσοι ἐπείθοντο αὐτῶ διεσκορπίσθησαν.
... 이전에 튜다가 나타나 자기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하자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니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자취도 없이 다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뒤 호구 조사 (ἀπογραφή / 등록)를 하던 때에도 갈릴래아 사람 유다 (혹은 가말라의 유다)가 나타나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한 일이 있었지만 그가 죽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 {사도행전} 5:37 (공동번역)
이에 대해서는 요세푸스도 유사한 기록을 남겼다.
우선 튜다에 대한 진술이다. 요세푸스가 기록하는 이 인물은 AD 46년에 죽었으므로 {사도행전}의 그 "튜다"일 수 없다. 이것이 요세푸스 혹은 {사도행전}의 저자, 혹은 {사도행전} 속 화자인 바리사이파의 지도자 가말리엘의 착오인지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논란이 있다.
1. NOW it came to pass, while Fadus was procurator of Judea, that a certain magician, whose name was Theudas, persuaded a great part of the people to take their effects with them, and follow him to the river Jordan; for he told them he was a prophet, and that he would, by his own command, divide the river, and afford them an easy passage over it; and many were deluded by his words. However, Fadus did not permit them to make any advantage of his wild attempt, but sent a troop of horsemen out against them; who, falling upon them unexpectedly, slew many of them, and took many of them alive.They also took Theudas alive, and cut off his head, and carried it to Jerusalem. This was what befell the Jews in the time of Cuspius Fadus's government. --- Flavius Jesephus {Jewish Antiquities}, 20.97-99 (5.1)
AD 6년의 폭동과 관련된 가말라의 유다와 관련된 요세푸스의 진술은 {사도행전}과 일치한다.
There was one Judas, a Galilean, of a city whose name was Gamala, who, taking with him Zadok, a Pharisee, became zealous to draw them to a revolt. Both said that this taxation was no better than an introduction to slavery, and exhorted the nation to assert their liberty; as if they could procure them happiness and security for what they possessed, and an assured enjoyment of a still greater good, which was that of the honor and glory they would thereby acquire for magnanimity. They also said that God would not otherwise be assisting to them, than upon their joining with one another in such councils as might be successful, and for their own advantage; and this especially, if they would set about great exploits, and not grow weary in executing the same. So men received what they said with pleasure, and this bold attempt proceeded to a great height. --- Flavius Josephus, {Jewish Antiquities} 18.4-6]
갈릴리인으로 가말라 출신의 유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리새인 자독을 끌어들여 반란을 선동했다. 그들은 이 징세는 노예가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면서,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유대인들에게 설파했다...[후략]...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4-6 / 번역: 최광민
Judas the Galilean was the author of the fourth branch of Jewish philosophy. These men agree in all other things with the Pharisaic notions; but they have an inviolable attachment to liberty, and say that God is to be their only Ruler and Lord. They also do not value dying any kinds of death, nor indeed do they heed the deaths of their relations and friends, nor can any such fear make them call any man lord. --- Flavius Josephus, {Jewish Antiquities} 18.23]
갈릴리인 유다는 유대교 사상의 네번째 분파를 시작한 인물이다. 이 사람들은 바리사이파의 주장과 모든 점에서 일치했지만. (외세로부터의 / 필자 주) 해방에 대한 철저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 만이 그들의 유일한 지배자이며 주님이라고 말했다....[후략]...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23 / 번역: 최광민
그런데 복음서는 예수가 태어난 무렵의 센서스가 퀴리니우스의 "첫번째" 센서스였다고 진술한다. 만약 두 진술이 모두 맞다면 위에 언급된 퀴리니우스의 센서스는 그 후의 센서스일 가능성도 있다. 만약 퀴리니우스에 의한 여러 차례의 센서스가 없었다면, 왜 굳이 복음서의 저자는 "첫번째"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그런데 사실 {루가/누가 복음서} 제 2장은 퀴리니우스가 시행한 첫번째 / πρώτη "센서스"에 대해 그저 "등록/ ἀπογράφεσθαι / apographesthai"이라고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울러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ἡγεμονεύοντος 에 대응하는 아래 한국어 "총독"이란 용어는 적절한 용어사용이 아니다.
2 αὕτη ἀπογραφὴ πρώτη ἐγένετο ἡγεμονεύοντος τῆς συρίας κυρηνίου. 3 καὶ ἐπορεύοντο πάντες ἀπογράφεσθαι, ἕκαστος εἰς τὴν ἑαυτοῦ πόλιν. 4 ἀνέβη δὲ καὶ ἰωσὴφ ἀπὸ τῆς γαλιλαίας ἐκ πόλεως ναζαρὲθ εἰς τὴν ἰουδαίαν εἰς πόλιν δαυὶδ ἥτις καλεῖται βηθλέεμ, διὰ τὸ εἶναι αὐτὸν ἐξ οἴκου καὶ πατριᾶς δαυίδ, 5 ἀπογράψασθαι σὺν μαριὰμ τῇ ἐμνηστευμένῃ αὐτῶ, οὔσῃ ἐγκύῳ.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다. 이 첫번째 호구 조사를 하던 때 시리아에는 퀴리노라는 사람이 총독으로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등록을 하러 저마다 본고장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갔다. 베들레헴은 다윗 왕이 난 고을이며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 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한편, 법률가 출신의 북-아프리카의 라틴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의 공식사료를 근거로 예수의 탄생 무렵에 여러 번의 센서스가 유대아 지역에서 시행되었으며, 특별히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사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시행한 센서스가 예수의 탄생 때 있었다고 한다. 복음서에 해박했던 테르툴리아누스는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투르니누스가 어떤 직위에서 센서스를 지시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제 1권 29장은 표준연표로 BC 6/5년 무렵 헤롯과 문제를 빚은 아라비아인 실레우스가 사투르니누스의 취조를 받은 후 로마로 보내지는 장면을 기술한다. 그런데 이때 요세푸스는 이 사투르니누스 (Σατορνίνῳ) 에 대해 "총독"이라는 직위명으로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로마가 시리아를 지휘/관리하기 파견한 관리 τῷδιέποντι τὴν Συρίαν ἀνεπέμφθησαν εἰς Ῥώμην" 로 부르고 있고, {유대고대사} 제 17권 1.1에서는 "시리아 에피멜레테스 τὸν τῆς Συρίας ἐπιμελητήν"라고 부르고 있다.
표준연표에 따르면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는 BC 10/9년부터 7/6년 사이에 "시리아 레가투스"였고,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는 AD 4/5년에 각각 "시리아 레가투스"였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언급한 사투르니누스는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다. 그의 라틴어 기록을 읽어보자.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문서보관소에 남아있는 센서스 기록이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이 아니냐며 반문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시대에 예수 탄생 무렵의 센서스/등록 기록이 (더 정확히는 요셉/마리아/예수의 센서스 기록이) 로마의 문서보관소에 남겨져 있었는지에 대해서 확인할 방법은 없다.
Et tamen quomodo in synagogam potuit admitti tam repentinus, tam ignotus, cuius nemo adhuc certus de tribu, de populo, de domo, de censu denique Augusti, quem testem fidelissimum dominicae nativitatis Romana archiva custodiunt?
.... And again how could he have been admitted into the synagogue, appearing so suddenly, so unknown, of whom no one till then was certain of his tribe, of his people, of his house, or even of census of Augustus, which the Roman archives keep in custody as a most faithful witness to the dominical nativity? -- Tertullian, {Against Marcion} 4.7.7a:
Sed et census constat actos sub Augusto nunc in Iudaea per Sentium Saturninum, apud quos genus eius inquirere potuissent..
..But it is established also that censuses had now been enacted under Augustus in Judea through Sentius Saturninus, about which they could have inquired of his race. -- Tertullian, {Against Marcion} 4.19.10:
앞서 제시한 시리아 총독의 표준연표를 보면, 사투르니누스의 재임기간은 BC 9-6년이다. 그리고 BC 4-1년의 시리아 담당총독은 분명치 않다. 혹시 사투르니누스는 그 기간 동안 재임명 되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BC 2/3년 무렵 시리아에는 로마로부터 파견된 복수의 행정관들이 존재했던 것일까?
우선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자.
요세푸스는 시리아 총독 사투르니누스의 재임기간 중 다수의 행정관들이 실제로 있었음을 보여준다 (Josephus, Antiquities XVI.280, 285, 357, 361). 요세푸스가 명시하는 바에 따르면, 적어도 두 명의 군사지휘관 (사투르니누스와 볼룸니우스/Volumnius)이 동시에 재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이 처리안 사안을 언급할 때 사투르니누와 볼룸니우스를 늘 함께 묶어서 언급한다.
가령, 요세푸스는 사투르니누스 (Σατορνίνου)와 볼룸니우스 (Οὐολομνίου)을 묶어서 "시리아 지휘관/총독 τῶν Συρίας ἐπιστατούντων)으로 복수로 명시한다. 물론 둘이 같은 직위에 있은 것은 아니고 볼룸니우스가 레가투스인 사투르니누스의 직속인 트리부누스 밀리툼 (군사호민관)으로 켄투리온 (백부장)들의 상관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든 사안이 사트루니누스와 볼룸니누스 두 사람 모두의 승인을 얻어야 한 것으로 기술된다.
그럼 퀴리니우스도 사투르니누스와 함께 시리아에 파견된 이런 복수의 행정관 중 한 명이었을까? 사료상 분명치 않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통해 알려진 대로라면, 퀴리니우스가 "총독/레가투스라는 직위로 시리아에 부임한 것은 AD 6년의 일이다. 그때 퀴리니우스의 공식직함은 Legatus Augusti Pro praetore 였다. 황제/아우구스투스의 특사로서 원로원이 아닌 황제가 직속상관이란 뜻이다. 이 직책은 이전에 콘술이나 Praetor 를 맡은 경험이 있는 레벨의 원로원 의원에게 부여되었는데, 유대아 지역처럼 군단이 주둔하지 않는 속주는 로마의 기사계급 (eques)에서 임명된 praefecti (후대의 procuratores)이 담당했다. 징세와 재정에 대한 업무는 독자적인 프로큐라토르들이 담당해서 황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런데 퀴리니우스는 AD 6년 이전부터 시리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시리아통이었다. AD 1-4년,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20대의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시리아 안티오키아를 총괄할 때 그를 보좌하게 되었던 퀴리니우스는 당시의 명각에 따르면 안티오키아-피시디아에서 명예시장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퀴리니우스는 가이우스를 보좌해 안티오키아 일대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타키투스는 퀴리니우스가 사업감각에 뛰어났던 것으로 (Tacitus, Annals, III.48.) 묘사했고, 소아시아에서 벌인 군사작전에서의 그의 역할을 (아우구스투스의) "특사(special command)"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그에 대한 아우구스투스의 각별한 신임을 뜻할 수 있다 AD 6/7년에 시리아에 부임했을때, 요세푸스(Antiquities, 18.1.1)는 특이하게도 그를 그리스어로 δικαιοδότης / dikaiodotes (법관)으로 표기했다. 이 직위는 오직 요세푸스와 리키아에서 발굴된 명문에서만 발견된다.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총독의 사법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
테르툴리아누스보다 한두 세대 전 AD 2세기 중반에 살았던 유스티노스는, 로마의 사료에 따라 (전통적인 예수 탄생 연도인 BC 2/3년 무렵) 사투르니누스 당시에 퀴리니우스가 유대아를 담당한 (첫번째) "총독" (그리스어 에피프로포스)이었다고 말한다 (Apology, I.34). 이것은 복음서의 기록에 보다 가까운 형태의 기록이다.
유스티노스가 기독교 교부라는 이유로 이 진술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그의 대표저술 {변호/Apology}는 로마황제에게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한 저작이기 때문이다. 유스티노스는 이 저작을 로마황제 피우스와 그의 아들들인 철학자 베리시무스 및 루키우스에게 헌정했다. 따라서 이런 의도의 저작 속에서 유스티노스가 로마의 사료를 조작하는 자충수를 둘 확률은 그다지 높지않다. (피우스, 베리시무스, 루키우스가 이 저작을 정말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헌정사를 인용한다.
To the Emperor Titus Ælius Adrianus Antoninus Pius Augustus Caesar, and to his son Verissimus the Philosopher, and to Lucius the Philosopher, the natural son of Caesar, and the adopted son of Pius, a lover of learning, and to the sacred Senate, with the whole People of the Romans, I, Justin, the son of Priscus and grandson of Bacchius, natives of Flavia Neapolis in Palestine, present this address and petition in behalf of those of all nations who are unjustly hated and wantonly abused, myself being one of them.
프리스쿠스의 아들이자 바키우스의 손자이자 팔레스티나의 플라비아 네아폴리스 태생인 나 유스티노스는, 온 세상에서 불공정하게 미움을 받고 탄압받고 있는 저를 포함한 사람들 (기독교도 -- 필자 주)을 대신하여, 황제이신 티투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 카에사르와, 학문을 애호하시는 황제의 친아들 철학자 베리시무스와 양자이신 철학자 루키우스, 성스런 원로원, 그리고 온 로마시민에게 본 논고와 청원을 제출합니다./ 번역: 최광민
유스티노스의 {첫번째 변증} 1.34.2 를 원문에서 인용한다.
Κωμη δε τις εστιν εν τη χωρα Ιουδαιων απεχουσα σταδιους τριακοντα πεντε Ιεροσολυμων, εν η εγεννηθη Ιησους Χριστος, ως και μαθειν δυνασθε εκ των απογραφων των γενομενων επι Κυρηνιου, του υμετερου εν Ιουδαια πρωτου γενομενου επιτροπου.
예루살렘에서 35 스타디아 떨어진 유대인들의 지역에 한 마을이 있는데,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습니다. 당신들은 이 사실을 퀴리니우스가 유대아 땅의 첫번째 담당관/지휘관/총독/επιτροπου이 되었을때의 센서스/등록(?) / απογραφων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번역: 최광민
유스티노스는 퀴리니우스의 직위를 그리스어로 ἐπίτροπος 로 언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요세푸스 역시 로마의 해당 직위를 그리스어 ἐπίτροπος (Josephus, "Ant." xviii. 1, § 1; idem, "B. J." ii. 8, § 1)로 옮겼다.
특별히 {유대 고대사}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 적용시킨 그리스어 용어는 "ὁ τῆς Ἰουδαίας ἡγεμὼν (= 유대아 담당 (군사)지휘관)이다. 이것은 로마 직위 "프리펙투스"에 거의 근접한 정의다. 또한 폰티우스 필라투스 이전의 유대아 담당관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용어를 적용시킨다.
[55] Πιλᾶτος δὲ ὁ τῆς Ἰουδαίας ἡγεμὼν στρατιὰν ἐκ Καισαρείας ἀγαγὼν καὶ μεθιδρύσας χειμαδιοῦσαν ἐν Ἱεροσολύμοις ἐπὶ καταλύσει τῶν νομίμων τῶν Ἰουδαϊκῶν ἐφρόνησε, προτομὰς Καίσαρος, αἳ ταῖς σημαίαις προσῆσαν, εἰσαγόμενος εἰς τὴν πόλιν, εἰκόνων ποίησιν ἀπαγορεύοντος ἡμῖν τοῦ νόμου. [56] καὶ διὰ τοῦτο οἱ πρότερον ἡγεμόνες ταῖς μὴ μετὰ τοιῶνδε κόσμων σημαίαις ἐποιοῦντο εἴσοδον τῇ πόλει. πρῶτος δὲ Πιλᾶτος ἀγνοίᾳ τῶν ἀνθρώπων διὰ τὸ νύκτωρ γενέσθαι τὴν εἴσοδον ἱδρύεται τὰς εἰκόνας φέρων εἰς τὰ Ἱεροσόλυμα.....
[55] BUT now Pilate, the procurator of Judea, removed the army from Cesarea to Jerusalem, to take their winter quarters there, in order to abolish the Jewish laws. So he introduced Caesar's effigies, which were upon the ensigns, and brought them into the city; whereas our law forbids us the very making of images; on which account the former procurators were wont to make their entry into the city with such ensigns as had not those ornaments..... --- Flavius Josephus. The Works of Flavius Josephus. Translated by. William Whiston, A.M. Auburn and Buffalo. John E. Beardsley. 1895. 18.3.1
가
유대아 담당 지휘관 필라투스가 겨울철 주둔지로 삼고 또 유대인들의 율법을 철폐하기 위해 카이사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는 군단기장에 설치되어있던 황제의 초상들을 예루살렘 안으로 들여왔는데, 우리의 율법은 사람을 그림/조상으로 묘사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던 바였다. 그래서 전직 지휘관들은 그런 형상이 설치된 기장을 들고 도시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었다....[후략]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3.1 / 번역: 최광민
이 '에피트로포스'가 일반적으로 총독/legatus과 반-독립적으로 활동하는 황제 직속의 직책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당시 시리아 총독 사투르니누스와 별개로 시리아 관할권인 유대아에서 직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루가/누가복음서} 역시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legatus"라고 말한 적은 없고 다만 그리스어로 ἡγεμονεύοντος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BC 6-4년 당시 퀸틸리우스 바루스 당시의 시리아 군사/행정관은 단수로 표기하지만, 시리아 레가투스인 바루스와 대립적인 인물로 유대아에 내려와 독립적인 행동을 취한 사비누스란 인물도 등장한다. 이 인물은 황제가 직접 파견한 인물로서,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제 2권 2장에서는 이 사비누스 (Σαβῖνος)를 "시리아 에피트로포스 (ὁ τῆς Συρίας ἐπίτροπος)" 부르고 있고, {유대고대사} 17.221 에서는 '시리아 사안으로 파견된 황제특파 에피트로포스 (Καίσαρος ἐπίτροπος τῶν ἐν Συρίᾳ πραγμάτων) 로 불리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 왜, 무엇을 "등록"했는가?: 징세? 호적? 충성맹세?
위의 정황에 따라, (아마도) BC 3/2년 무렵에 (시리아 관할의 유대아를 담당한 행정관으로 활동한 퀴리니우스(?)에 의해) 시행된 센서스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보자.
몇가지 난점이 있다.
- 이 센서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직접포고에 따른 것이며, 로마 전역에서 거의 동시에 실시된 듯 하다.
- 당시 유대인은 헤롯에게 세금을 직접 납부하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의 행정관이 "징세"를 목적으로 직접 센서스를 할 이유는 특별히 없다.
- {루가/누가 복음서} 원문은 이 센서스가 "등록"이라고 쓰고 있다.
- "무엇"을 "등록"했는가?
- 왜 모든 사람들이 고향, 정확히는 "씨족/clan의 등록지"로 돌아가야 했는가?
- 호적이 목적이라면, 왜 요셉은 만삭의 마리아까지 동행시켜야 했는가?
우선, BC 3/2년이 로마제국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시기였는지를 설명하겠다.
BC 3/2년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60세가 되던 무렵이다. 예수보다 약 1세기 이후에 태어난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는 예수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권좌에 오른 후 41년째 되는 해라고 적었다. 옥타비아누스는 BC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및 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시작했다.
BC 2년 1월 5일,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파테르 파트리에/Pater Patrie/국부'라는 호칭을 수여했다. 원로원이 그에게 '파테르 파트리에'를 수여한 이 날은 "화합"을 신격화한 콘코르디아 여신의 축제일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고도로 계산된 날짜다.
아우구스투스 본인이 76세때 직접 쓴 {Res Gestae}에 따르면, 통상적인 형태인 원로원과 군대의 충성맹세 뿐 아니라 모든 로마인의 이름으로 '파테르 파트리에'가 부여된 것이다.
"...35: In my thirteenth consulship [2 BC] the senate, the equestrian order and the whole people of Rome gave me the title of Father of my Country, and resolved that this should be inscribed in the porch of my house and in the Curia Julia and in the Forum Augustum below the chariot which had been set there in my honor by decree of the senate. 2 At the time of writing I am in my seventy-sixth year.....” --- {Res Gestae Divi Augusti/The Achievements of the Divine Augustus}[trans. P. A. Brunt and J. M. Moore], VI.35.
...내가 13번째 콘술을 맡을때 [BC2년], 원로원과 기사계급과 로마의 온 시민들이 나에게 국부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주었고, 원로원의 포고에 의해 나의 집 정문, 큐리아 율리아, 그리고 포룸 아우구스툼에 나를 기리기 위해 설치된 전차 아래 이 칭호가 새겨졌다. 내 나이 76세에 이것을 기록한다.... --- 번역: 최광민
이 '파테르 파트리에'는 아우구스투스 이전(과 이후)에도 키케로나 율리우스 카에사르 같은 몇몇 영웅들에게 수여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경우는 특별했다. BC 2년은 로마건국 75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고, 아우구스투스의 집권 25년을 기념하는 해 (silver jubilee)였다.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BC 27년에 이어) 직접 충성을 서약했을 뿐 아니라, 로마 전역의 거주민들이 아우구스투스에게 직접 충성서약을 해야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춘 대규모 축제들이 정부관리 하에 계획/집행되었다.
충성서약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된 제단에서 했다. 이 충성서약에 대해 남아있는 대표적인 유물은 북부 소아시아의 팔랑고니아/ Paphlagonia (현, 파지몬/Phazimon)에서 발굴된 기념비다. BC 3년 3월 6일의 충성서약 내용을 담고 있다.
Robert Kenneth Sherk, {The Roman Empire: Augustus to Hadrian}
ἀπὸ Αὐτοκράτορος Καίσ[αρος] | θεοῦ υἱοῦ Σεβαστοῦ ὑπατεύ[σαντος τὸ] | δωδέκατον ἔτους τρίτου, π[ροτέραι] | νωνῶν Μαρτίων ἐν Γάνγροις ἐν [κ]ά[στροις(?), ὅρ]||κος ὁ τελεσθ[εὶς ὑ]πὸ τῶ[ν] κατοικ[ούντων Πα]|φλαγονία[ν καὶ τῶν πραγ]ματευομ[ένων πα]|ρ’ αὐτοῖς Ῥ[ωμαίων]. | ὀμνύω Δία Γῆν Ἥλιον θεοὺς πάντα[ς καὶ πά]|σας καὶ αὐτὸν τὸν Σεβασ[τ]ὸν εὐνοή[σειν Καί]||σαρι Σεβαστῶι καὶ τοῖς τ[έκ]νοις ἐγγό[νοις τε] | αὐτοῦ πάν[τ]α τ[ὸ]ν τοῦ [βίου] χρόνον κ[αὶ λό]|γωι [κ]αὶ ἔργωι καὶ γνώμη[ι, φί]λους ἡγού[μενος] | οὓς ἂν ἐκεῖνοι ἡγῶντα[ι] ἐκχθρούς {ἐχθρούς} τε ν[ομίζων] | οὓς ἂν αὐτοὶ κρίνωσιν· ὑπέρ τε τῶν τ[ούτοις] || διαφερόντων μήτε σώματος φείσεσ[θαι μή]|τε ψυχῆς μήτε βίου μήτε τέκνων, ἀλ[λὰ παν]|τὶ τρόπωι ὑπὲρ τῶ[ν] ἐκείνοις ἀνηκό[ντων] | πάντα κίνδυνον ὑπομενεῖν· ὅ τί τε ἂ[ν αἴσ]|θωμαι ἢ ἀκούσω ὑπεναντίον τούτ[οις λε]||γόμενον ἢ βουλευόμενον ἢ πρασσό[μενον], | τοῦτο ἐγμηνύσειν τε καὶ ἐχθρὸν ἔσ[εσθαι τῶι] | λέγοντι ἢ βουλευομένωι ἢ πράσσο[ντί τι τού]|των· οὕς τε ἂν ἐκχθροὺς {ἐχθροὺς} αὐτοὶ κρίν[ωσιν, τού]|τους κατὰ γῆν καὶ θάλασσαν ὅπλο[ις τε] || καὶ σιδήρωι διώξειν καὶ ἀμυνεῖσ[θαι]. | ἐὰν δέ τι ὑπεναντίον τούτωι τ[ῶι ὅρκωι] | ποήσω ἢ μὴ στοιχούντως καθὼ[ς ὤμο]|σα, ἐπαρῶμαι αὐτός τε κατ’ ἐμοῦ καὶ σ[ώμα]|τος τοῦ ἐμαυτοῦ καὶ ψυχῆς καὶ βίου κα[ὶ τέ]||κνων καὶ παντὸς τοῦ ἐμαυτοῦ γέν[ους] | καὶ συνφέροντος ἐξώλειαν καὶ παν[ώλει]|αν μέχρι πάσης διαδοχῆς τῆς ἐ[μῆς καὶ] | τῶν ἐξ ἐμοῦ πάντων, καὶ μήτε σ[ώματα τὰ] | τῶν ἐμῶν ἢ ἐξ ἐμοῦ μήτε γῆ μ[ήτε θάλασ]||σα δέξαιτο μηδὲ καρποὺς ἐνέγ[κοι αὐτοῖς]. | κατὰ τὰ αὐτὰ ὤμοσαν καὶ οἱ ἐ[ν τῆι χώραι] | πάντες ἐν τοῖς κατὰ τὰς ὑ[παρχίας(?) Σε]|βαστήοις παρὰ τοῖς βωμοῖ[ς τοῦ Σεβαστοῦ]. | ὁμοίως τε Φαζιμωνεῖται οἱ [τὴν νῦν Νεάπο]||λιν λεγομένην κατοικοῦν[τες ὤμοσαν σύμ]|παντες ἐν Σεβαστήωι παρὰ τ[ῶι βωμῶι τοῦ] | Σεβαστοῦ.
In the third year from the twelfth consulship of the Emperor Caesar Augustus, son of a god, March 6, in the … at Gangra, the following oath was taken by the inhabitants of Paphlagonia and the Roman businessmen (pragmateuomenoi) dwelling among them: “I swear by Jupiter, Earth, Sun, by all the gods and goddesses, and by Augustus himself, that I will be loyal to Caesar Augustus and to his children and descendants all my life in word, in deed, and in thought, regarding as friends whomever they so regard, and considering as enemies whomever they so adjudge; that in defense of their interests I will spare neither body, soul, life, not children, but will in every way undergo every danger in defense of their interests; that whenever I perceive or hear anything being said or planned or done against them I will lodge information about this and will be an enemy to whoever says or plans or does any such thing; and that whomever they adjudge to be enemies I will by land and sea, with weapons and sword, pursue and punish. But if I do anything contrary to this oath, or not in conformity with what I swore, I myself call down upon myself, my body, my soul, my life, my children, and all my family and property, utter ruin and utter destruction unto all my issue and all my descendants, and may neither earth nor sea receive the bodies of my family or my descendants, or yield fruits to them.”
신의 아들이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독재관 (임페라토르)의 12번째 콘술 임기 3년 차 3월 6일에.....강그라에서 파피라고니아의 거주민 및 그들과 함께 거주하는 로마인 사업가들은 다음의 맹세를 바쳤다: 제우스와 땅과 해와 모든 신들과 여신들 앞에, 나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자녀와 후손들에게 내 평생 말로나 행위로나 마음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는 그들이 친구로 여기는 이들을 친구로 대할 것이며, 그들이 적으로 여기는 자들을 적으로 간주할 것이며, 황제와 그의 자녀와 후손들을 위해 내 몸과 영혼과 생명과 자식들을 아끼지 않을 뿐더러, 모든 위험을 감수할 것입니다. 이에 반하는 것들에 관해 알거나, 듣거나, 계획되거나, 실행되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이를 보고할 것이며 그들에 맞설 것입니다. 황제와 그의 집안이 적으로 간주하는 자들에 맞서 나는 창검을 들고 뭍과 바다에서 그들과 싸울 것입니다. 만약 내가 이 서약을 위반하거나 맹세를 어길 경우, 내 몸과 영혼과 생명과 자식들과 온 가족과 내 모든 소유가 멸망되는 저주가 내릴 것이며, 땅과 바다가 내 가족들의 몸을 받아주지도 않을 것이며, 그들을 위해 열매를 맺지도 않을 것입니다. / 번역: 최광민
--- tr. N. Lewis and M. Reinhold, Roman Civilization, Sourcebook II: The Empire (New York 1966) 34-35.
로마의 변방이자 파르티아와의 접경지대로 로마와는 밀접한 동맹관계를 유지한 속국 아르메니아에서는, 로마에서 보내진 아우구스투스의 초상화가 모든 신전마다 배치되었고, 아마도 거기서 충성맹세를 해야 했던 듯 싶다. 아르메니아의 왕 압가르의 재위 2년 (BC 3년)의 일을 기록한 아르메니아 역사가 코레네의 모세의 기록이다.
"...to Armenia, bringing the image of Augustus Caesar, which they set up in every temple..."--- Moses of Khorene’s {History of the Armenians}, II.26.
...아르메니아에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초상이 보내져 모든 신전마다에 설치되었다 --- 코레네의 모세, {아르메니아 역사}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AD 5세기의 역사가이자 신학자인 오로시우스 역시 유사한 기록을 남겼다.
"...Augustus] ordered that a census be taken of each province everywhere and that all men be enrolled. ... This is the earliest and most famous public acknowledgment which marked Caesar as the first of all men and the Romans as lords of the world, a published list of all men entered individually .... This first and greatest census was taken, since in this one name of Caesar all the peoples of the great nations took oath, and at the same time, through the participation in the census, were made apart of one society..."--- Orosius, VI.22 and VII.2.
그럼 유대아에서의 상황은 어땠는지 요세푸스의 기록으로 돌아가 보자. 요세푸스는 해당되는 충성맹세에 대해 {유대고대사}에 이렇게 적었다.
...These are those that are called the sect of the Pharisees, who were in a capacity of greatly opposing kings. A cunning sect they were, and soon elevated to a pitch of open fighting and doing mischief. Accordingly, when all the people of the Jews gave assurance of their good-will to Caesar, and to the king's government, these very men did not swear, being above six thousand; and when the king imposed a fine upon them, Pheroras's wife paid their fine for them. In order to requite which kindness of hers, since they were believed to have the foreknowledge of things to come by Divine inspiration, they foretold how God had decreed that Herod's government should cease, and his posterity should be deprived of it; but that the kingdom should come to her and Pheroras, and to their children.... --- Flavius Joshepus, {Antiquities} 17.2.4
바리새파라 불리는 종파가 있었는데, 그들은 헤롯대왕에 대해 극렬히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중략)....그런 이런 이유로, 모든 유대인들이 황제와 헤롯에게 충성서약을 해야 했을때, 약 6000명에 달하는 바리새파는 맹세하지 않았고, 헤롯이 그들에게 벌금을 부과했을때 페로라스의 처가 그들을 대신해서 벌금을 내주었다....(후략)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7.2.4 / 번역: 최광민
요세푸스는 헤롯대왕이 죽기 전 12-15개월 전에 유대아에도 충성서약을 요구하는 아우구스투스의 포고령이 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헤롯대왕의 죽음은 BC 4년이 될 수 없다. 헤롯의 사망 연도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3부에서 다루겠다) 모든 사람들이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충성을 서약해야 했다. 아마도 이 충성서약에 수반된 행정절차가 {누가의 복음서}가 말하는 "등록"을 뜻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종교적으로 배타적인 유대아 일대에서 유대인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에서 충성맹세를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유대아 일대에서 치러진 충성맹세의 자세한 형식에 대해서는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그럼 왜 요셉과 마리아는 동행했을까? 분명하지 않다. 가령, 충성맹세처럼 마리아 본인에 관련되어 있을 수 있고, 혹은 그저 산달이 임박했기 때문에 예수를 호적에 등록시키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복음서}를 제외한 현재까지 알려진 두개의 고대 사료는 로마의 등록/센서스 당시 등록 대상자들이 모두 본인들의 호적지로 돌아가야 했던 것으로 기록한다.
우선 AD 48년 이집트의 센서스와 관련된 파피루스 기록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세인 AD 48년 당시 65세였던 테르모우타리온(Thermoutharion)이란 자유인 여성이 센서스를 위해 귀향한 내용을 담는다. 이집트에서는 그리스계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도 센서스가 시행되기는 했지만, 징세 및 (아마도) 징병 목적으로 가족구성원 전원을 센서스 대상으로 하게 된 것은 로마지배 하에 들어간 후 BC 10년 경 무렵인 것으로 역사가들은 여긴다.
Selections from the Greek Papyri. Ed. and Trans. George Millig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0
https://archive.org/stream/selectionsfromg00milluoft
To Dorian strategus and…royal scribe and Didymus and … topogrammateis and komogrammateis from Thermoutharion the daughter of Thoonis with her guardian Apollionius the son of Sotades. There are living in the house which belongs to me in the South Lane…Thermoutharion, a freedwoman of the above-mentioned Sotades, about 65 years of age, of medium height, dark-complexioned, long-visaged, a scar on the right knee. Total—three persons. "I the above-mentioned Thermoutharion along with my guardian the said Apollonius swear by 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Emperor that assuredly the preceding document makes a sound and true return of those living with me, and that there is no one else living with me, neither a stranger, nor an Alexandrian citizen, nor a freedman, nor a Roman citizen, nor an Egyptian, in addition to the aforesaid. If I am swearing truly, may it be well with me, but if falsely, the reverse." In the ninth year of 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Emperor, Phaophi…. -- From: Selections from the Greek Papyri. Ed. and Trans. George Millig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0. (파피루스 .Oxyrhynchus. 255) (48 CE)
AD 104년 로마령 이집트의 프리펙투스였던 가이우스 비비우스 막시무스는 센서스/등록을 위해 본적지를 떠나 도시에 와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향령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귀향령의 목적은 포고령에 명시되어 있듯이 대체로 두가지인데 (1) (아마도 징세와 병역을 위한) 관례적 등록 (customary business of registration) + (2) 귀향한 자들을 농사일에 동원 (apply themselves to the cultivation)하기 위한 목적이다. 도시에 남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사전등록 할 것을 예외조항으로 두었다.
A. S. Hunt and C. C. Edgar. {Non-literary papyri with an English translation}, Published 1900 by Harvard University Press in Cambridge, Mass .
https://archive.org/stream/nonliterarypapyr02hunt
#220. EDICT OF VIBIUS MAXIMUS (A.D. 104)
Proclamation of Gains Vibius Maximus, praefect of Egypt:
이집트 프리렉투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막시무스의 포고령:
Της κατ οικιαν απογραφης ενεστωσης αναγκαιον εστιν πασιν τοις καθ ηντινα δηποτε αιτιαν αποδημουσιν απο των νομων προσαγγελλεσθαι επανελθειν εις τα εαυτων εφεστια ινα και την συνηθη οικονομιαν της απογραφης πληρωσωσιν και τη προσηκουση αυτοις γεωργιαι προσκαρτερησωσιν. ειδως μεντοι οτι ενιων των απο της χωρας η πολις ημων εχει χρειαν, βουλομαι παντας τους ευλογον δοκουντας εχειν του ενθαδε επιμενιν αιτιαν απογραφεσθαι παρα Βουλ....
The house-to-house census having started, it is essential that all persons who for any reason whatsoever are absent from their nomes be summoned to return to their own hearths, in order that they may perform the customary business of registration and apply themselves to the cultivation which concerns them. Knowing, however, that some of the people from the country are needed by our city, I desire all those who think they have a satisfactory reason for remaining here * to register themselves before
가구별 센서스가 시작되었으므로, 어떤 사유이든 출신지를 떠나있는 모든 사람들은 관례적인 등록 및 농사일을 돕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경우, 본인들이 도시에 남아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그 전에 등록하도록 하라..... / 번역: 최광민
Φηστω επαρχωι ειλης, ον επι τουτω εταξα, ου και τας υπογραφας οι αποδειξαντες αναγκαιαν αυτων την παρουσιαν λημψονται κατα τουτο το παραγγελμα εντος της τριακαδος του ενεστωτος μηνος Ε....
...Festus, praefectus alae, whom I have appointed for this purpose, from whom those who have shown their presence to be necessary shall receive signed permits in accordance with this edict up to the 30th of the present month Epeiph. . . . "
{복음서}에 따라 둘이 모두 다윗의 계보를 잇고 있기 때문에 메시아의 지위를 주장할 수 있는 다윗의 가문들 모두를 특별관리하기 위한 차원에서 둘이 모두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을 베들레헴에 모으는 것 자체가 이미 특별관리에 들어간다. 만약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베들레헴에서 등록해야 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베들레헴에 모인 유다부족원의 상당수는 다윗의 자손/즉 미래의 메시아를 자칭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분자로 간주될 수 있다. 혹은 아우구스투스의 포고령이 말 그대로 모든 신민들의 충성서약을 요구한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대아에서의 충성서약은 유대인 가운데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반발을 샀는데, 약 6천 명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충성서약을 거부했고, 이에 헤롯대왕은 이들에게 상당한 벌금을 물렸다. 바리새파들은 이 모든 상황을 헤롯왕가가 종식되고 새로운 왕가 혹은 메시아가 도래할 때가 임박한 징조로 해석했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되자 헤롯은 바리새파의 지도급 인사들과 궁정의 몇몇 인사,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을 모조리 처형하려고 시도한다.
요세푸스를 다시 인용한다.
"...There was moreover a certain sect of Jews who valued themselves highly for their exact knowledge of the law; and talking much of their contact with God, were greatly in favor with the women of Herod’s court. They are called Pharisees. They are men who had it in their power to control kings; extremely subtle, and ready to attempt any thing against those whom they did not like. When therefore the whole Jewish nation took an OATH to be faithful to Caesar, and [to] the interests of the king, these men, to the number of above six thousand, refused to swear. The king having laid a fine upon them, Pheroras’ wife [Herod’s sister-in-law] paid the money for them. They, in requital for her kindness (for they were supposed, by their great intimacy with God, to have attained to the gift of prophecy), prophesied that God having decreed to put an end to the government of Herod and his race, the kingdom would be transferred to her and Pheroras and their children. Salome [Herod’s sister], who was aware of all that was being said, came and told the king of them. She also told him that many of the court [of Herod] were corrupted by them.Then the king put to death the most guilty of the Pharisees, and Bagoas the eunuch, and one Carus, the most beautiful young man about the court, and the great instrument in the king’s unlawful pleasures. He [Herod] likewise slew every one in his own family, who adhered to those things which were said by the Pharisee. But Bagoas had been elevated by them and was told that he should some day be called father and benefactor of the [new] king, who was to be appointed according to their prediction, for this king would have all things in his power, and that he [the king] would give him [Bagoas] the capacity of marriage, and of having children of his own.” --- Josephus, Antiquities XVII.41–45
[전략]... 유대교 종파 가운데는 율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알고, 또 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에 자긍심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는데, 헤롯의 궁정의 여인들은 이들은 매우 좋아했다. 이들은 바리사이파 (= 바리새인)이라 불렸다. 이 힘을 통해 왕들을 견제해온 이들은 매우 예민한 사람들로 자신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온 유대아 왕국이 카이사르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할 때가 오자, 이 종파의 약 6천 명의 사람들은 맹세하기를 거부했다. 헤롯은 그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는데, 페로라스의 아내 [=헤롯의 제수]가 그들을 대신해서 벌금을 대납해 주었다..... [후략]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7장 발췌 / 번역: 최광민
관련된 사료는 Nepthali Lewis and Meyer Reinhold, eds. {Roman Civilization}, 2 vols. (NY: Harper Torchbooks), 2:34-35 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길 권한다.
Nepthali Lewis and Meyer Reinhold, eds. {Roman Civilization}
# 정리
{복음서}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과 역사적 사실관계를 떠나 현대의 비교종교학자와 신학자들이 흔히 취하는 입장에서 {복음서}를 초기 기독교의 프로파겐다용 저작으로 해석하는 경우라면, 예수의 탄생을 다룬 마태/마태오와 누가/루가는 BC 10년에서 AD 1년 가운데 어떤 해를 예수의 탄생으로 정하는 것이 가장 극적이고 효과적이었을까?
표준연대표가 말하는 BC 4년 이전은 (아마도 BC 7-4년)은 메시아가 탄생하기에는 사실 대단히 무미건조한 시점이다. 그러나 BC 3/2년은 역사적으로나 천문학적으로 대단히 유의미한 시점에 해당한다. 심지어 세속권력을 상징하는 아우구스투스 및 로마의 새출발과 (신의 아들인) 예수의 탄생을 대조시킬 수 있는 절호의 모티프가 발견되기도 한다. 종교적으로 보더라도 유의미할 뿐 아니라, 심지어 {복음서}가 순수한 창작이었다고 보는 경우에도 BC 3/2년이 프로파겐다를 위해서는 가장 매력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럼 왜 표준연대표는 BC 4년 이전을 예수의 탄생시점으로 보는 것일까?
현대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표준연대표의 근거는 요세푸스의 (다소
모순되는) 진술과 발견된 헤롯대왕의 아들들이 발행한 동전들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표준연대표이며, 헤롯대왕의 사망시점에 대한 역사학자들 간의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草人 최광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