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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찬송의 형식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
草人!
2024. 7. 18. 00:13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4-02-03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찬송의 형식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
© 최광민, Kwangmin Choi, 200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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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의 형식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
북아프리카 히포 주교, 아우구스티누스
나는 감정을 지나치게 실어 노래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감정이 지나치게 실린 노래를 듣기도 좋아하지 않는다. 세속음악 뿐 아니라 종교음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따라서 나는 오늘날 소위 "현대식 예배/contemporary praise service/worship"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감성위주의 CCM 형식의 대중찬송에 대해 다소 간의 부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포맷은 한국에서는 "경배와 찬양"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져 왔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나의 우려는 CCM이라는 음악장르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 노래들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불리어지고 또 인도되고 있는가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고 해야 옳겠다.
대체로 컨템포러리 워십에 사용되는 CCM 찬양들은 전통적인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예배찬양 형식, 즉 루터교회의 소박한 합창형태의 코랄, 스위스 개혁교회의 제네바 시편으로 대표되는 단선율 제창, 그리고 영국교회의 앤덤 등의 다소 단조로운 형식 대신, 열정적인 찬양인도자들과 밴드에 의해 리드되는 일종의 무대 콘서트 형식을 예배에 도입했다. 많은 경우 무대로부터 들리는 이들 전문 찬양인도자들의 목소리와 밴드의 음악은 회중을 리드하는 동시에 압도한다. 나는 이것을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아울러 강한 비트의 반주와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반복해서 불리는 노래는 그 자체로서 이미 일종의 트랜스 효과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종종 회의한다: 사람들은 지금 '성령의 감동'과 '감정의 폭주'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대체로 컨템포러리 워십에 사용되는 CCM 찬양들은 전통적인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예배찬양 형식, 즉 루터교회의 소박한 합창형태의 코랄, 스위스 개혁교회의 제네바 시편으로 대표되는 단선율 제창, 그리고 영국교회의 앤덤 등의 다소 단조로운 형식 대신, 열정적인 찬양인도자들과 밴드에 의해 리드되는 일종의 무대 콘서트 형식을 예배에 도입했다. 많은 경우 무대로부터 들리는 이들 전문 찬양인도자들의 목소리와 밴드의 음악은 회중을 리드하는 동시에 압도한다. 나는 이것을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아울러 강한 비트의 반주와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반복해서 불리는 노래는 그 자체로서 이미 일종의 트랜스 효과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종종 회의한다: 사람들은 지금 '성령의 감동'과 '감정의 폭주'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감성을 고조시키는 CCM과 컨템포러리 예배에 대한 나의 이런 회의적인 입장은 중학교 2학년때 읽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에 라틴교회에서 회중들은 시편과 찬미가를 (오늘날의 의미처럼) "노래부르지" 않았다. 이들 시편과 찬미가가 오늘날의 의미처럼 노래불려지는 것은 그리스 교회의 관례를 당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라틴교회에 도입한 이후의 일이었다. (후대의 중세 로마카톨릭 교회는 아예 예배 중 회중찬송을 금지시켰다.)
9권 6-7장 발췌
How did I weep, in Thy Hymns and Canticles, touched to the quick by the voices of Thy sweet-attuned Church! The voices flowed into mine ears, and the Truth distilled into my heart, whence the affections of my devotion overflowed, and tears ran down, and happy was I therein.
Not long had the Church of Milan begun to use this kind of consolation and exhortation, the brethren zealously joining with harmony of voice and hearts. For it was a year, or not much more, that Justina, mother to the Emperor Valentinian, a child, persecuted Thy servant Ambrose, in favour of her heresy, to which she was seduced by the Arians. The devout people kept watch in the Church, ready to die with their Bishop Thy servant. There my mother Thy handmaid, bearing a chief part of those anxieties and watchings, lived for prayer. We, yet unwarmed by the heat of Thy Spirit, still were stirred up by the sight of the amazed and disquieted city. Then it was first instituted that after the manner of the Eastern Churches, Hymns and Psalms should be sung, lest the people should wax faint through the tediousness of sorrow: and from that day to this the custom is retained, divers (yea, almost all) Thy congregations, throughout other parts of the world following herein.
당신의 교회에서 감비롭게 들리는 당신의 찬송가와 칸티클 (역자주: 시편을 제외한 성서구절을 가사로 하는 성가곡)을 들으며 제가 얼마나 울었던지요. 그 노래들이 제 귀에 흘러올 때, 진리가 제 마음에 스며들고 헌신에 대한 나의 사랑이 넘쳐나는 눈물로 흘러 그 안에 행복을 느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밀라노 교회는 이러한 형식의 위로와 교훈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형제들은 목소리와 마음을 합하여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어린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친인 유스티나가 아리우스파 이단의 유혹을 받은 지 1년 혹은 조금 지난 즈음에 이단을 지지하여 당신의 종 암브로시우스를 박해하였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당신의 종인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함께 죽을 준비를 하고 교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여종인 나의 어머니는 그러한 염려와 경계의 역할을 짊어지고 기도에 힘쓰셨습니다. 아직 성령의 열기로 뜨겁진 않았던 우리는 이 놀랍고도 불안한 도시를 보고 여전히 동요되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이 이어지는 슬픔으로 낙심하지 않도록 동방교회의 방식에 따라 찬송가와 시편을 부르도록 처음 제정되었고, 그 날부터 지금까지 그 관례가 이 방식을 따르는 세상의 여러 (사실 거의 모든) 당신의 교회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 9권 6-7장 / 번역: 최광민
암브로시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교와 세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리우스파 이단자였던 로마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 치하에 있었던 박해 때 라틴교회에 도입된 그리스식 찬양방식이 얼마나 본인과 다른 신자들에게 위안이 되었는지를 적으면서 암브로시우스에게 감사하고 있다.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류의 찬양방식에 상당히 친숙했을 것이다. 그가 한동안 몸담았던 마니교는 교조 마니 때부터 이미 이런 식의 대중찬양을 선교에 사용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몇 세대 전 아리우스 논쟁이 진행 중일 때도, 아리우스는 자신의 신학을 일반대중이 쉽게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에 얹어 전파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암브로시우스가 라틴교회에 소개한 그리스 전통에 아낌없는 칭송을 던지는 것과는 별도로, 그는 동시에 이 "아름다운 찬송"들이 가질 수 있는 몇가지 위험요소들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찬미가의 가사를 실어나르는 멜로디에 신자들의 귀가 현혹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 이 순간 "아름다운 찬미가"는 찬송의 본질을 상실하게 된다. 일반인의 귀에는 어떻게 들릴 지 모르지만, 라틴교회의 그레고리오 성가와 그리스교회의 비잔틴 성가를 비교해 들어보면, 후자가 얼마나 감성적으로 풍부하고 강렬한지 금방 알 수 있다.
8권 10장 발췌
Let them no more say then, when they perceive two conflicting wills in one man, that the conflict is between two contrary souls, of two contrary substances, from two contrary principles, one good, and the other bad. For Thou, O true God, dost disprove, check, and convict them; as when, both wills being bad, one deliberates whether he should kill a man by poison or by the sword; whether he should seize this or that estate of another's, when he cannot both; whether he should purchase pleasure by luxury, or keep his money by covetousness; whether he go to the circus or the theatre, if both be open on one day; or thirdly, to rob another's house, if he have the opportunity; or, fourthly, to commit adultery, if at the same time he have the means thereof also; all these meeting together in the same juncture of time, and all being equally desired, which cannot at one time be acted: for they rend the mind amid four, or even (amid the vast variety of things desired) more, conflicting wills, nor do they yet allege that there are so many divers substances.
So also in wills which are good. For I ask them, is it good to take pleasure in reading the Apostle? or good to take pleasure in a sober Psalm? or good to discourse on the Gospel? They will answer to each, "it is good." What then if all give equal pleasure, and all at once? Do not divers wills distract the mind, while he deliberates which he should rather choose? yet are they all good, and are at variance till one be chosen, whither the one entire will may be borne, which before was divided into many. Thus also, when, above, eternity delights us, and the pleasure of temporal good holds us down below, it is the same soul which willeth not this or that with an entire will; and therefore is rent asunder with grievous perplexities, while out of truth it sets this first, but out of habit sets not that aside.
선한 의지도 마찬가지 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사도의 글을 읽고 즐거워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진중한 {시편}을 음미하는 것이 좋은 지, 혹은 {복음서}를 연구하는 것이 좋은지를 묻는다면, 그들은 어느 것이나 좋다고 말할 것입니다. ...[후략] / 번역: 최광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생의 어느 시점에서 찬송을 부르는 형식에 대한 관점을 다소 수정하게 된다. 암브로시우스가 도입한 동방의 전통에 대한 긍정을 철회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감각에의 현혹을 최소화하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우스가 도입한 형식, 즉 멜로디를 극도로 단순화하여 메시지, 즉 가사의 전달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영창'형식이 보다 안전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그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밀라노 교회에서 시편을 그리스 교회 풍으로 감성적으로 노래할때 느낀 감동과, 같은 시편을 아타나시우스의 알렉산드리아 교회 풍으로 읊조리며 노래할때 느낀 감동이 동일하다는 (동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10권 33장 발췌
The delights of the ear had more firmly entangled and subdued me; but Thou didst loosen and free me. Now, in those melodies which Thy words breathe soul into, when sung with a sweet and attuned voice, I do a little repose; yet not so as to be held thereby, but that I can disengage myself when I will. But with the words which are their life and whereby they find admission into me, themselves seek in my affections a place of some estimation, and I can scarcely assign them one suitable. For at one time I seem to myself to give them more honour than is seemly, feeling our minds to be more holily and fervently raised unto a flame of devotion, by the holy words themselves when thus sung, than when not; and that the several affections of our spirit, by a sweet variety, have their own proper measures in the voice and singing, by some hidden correspondence wherewith they are stirred up. But this contentment of the flesh, to which the soul must not be given over to be enervated, doth oft beguile me, the sense not so waiting upon reason as patiently to follow her; but having been admitted merely for her sake, it strives even to run before her, and lead her. Thus in these things I unawares sin, but afterwards am aware of it.
At other times, shunning over-anxiously this very deception, I err in too great strictness; and sometimes to that degree, as to wish the whole melody of sweet music which is used to David's Psalter, banished from my ears, and the Church's too; and that mode seems to me safer, which I remember to have been often told me of Athanasius, Bishop of Alexandria, who made the reader of the psalm utter it with so slight inflection of voice, that it was nearer speaking than singing. Yet again, when I remember the tears I shed at the Psalmody of Thy Church, in the beginning of my recovered faith; and how at this time I am moved, not with the singing, but with the things sung, when they are sung with a clear voice and modulation most suitable, I acknowledge the great use of this institution. Thus I fluctuate between peril of pleasure and approved wholesomeness; inclined the rather (though not as pronouncing an irrevocable opinion) to approve of the usage of singing in the church; that so by the delight of the ears the weaker minds may rise to the feeling of devotion. Yet when it befalls me to be more moved with the voice than the words sung, I confess to have sinned penally, and then had rather not hear music.
이런 감각의 속임수를 지나치게 엄격히 경계하다보니 잘못을 저지른 적도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이 노래로 불려질 때,그 감미로운 음악조차 내 귀와 교회의 귀에 들리자 않게 몰아냈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니시우스의 말이 떠오르면서 이것이 차라리 안전하다고 여겼습니다. 아타나시오스는 {시편}을 읽는 사람에게 노래라기 보다는 낭독처럼 여겨질 만큼 억양을 억눌러 읽으라고 했다는 것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앙을 회복하기 시작할 무렵 당신의 교회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듣고 눈물 흘리던 일을 기억하고, 지금도 노래가 맑은 소리와 정확한 박자로 불려지는 것을 듣거나, 멜로디보다는 그 내용에 감격하는 것을 보면, 그 습관이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다시 느낍니다. 이처럼 감각이 주는 즐거움이 내포한 위험과, 동시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효과라는 경험사이에서 지금도 오락가락하고 있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더라도 저는 교회에서 노래부르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결론을 냐리게 되었습니다. 귀를 즐겁게 하는 수단을 통해 마음이 연약한 사람에게 경건한 마음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에는 가사보다 노래 자체에 더 마음이 끌렸으므로 벌받기에 마땅한 죄를 지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 경우는 노래소리조차 듣지않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 번역: 최광민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민과 고백은 소위 "경배와 찬양"류의 찬양집회에 참여하는 회중들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할 부분이다. 무대에서 CCM 찬송을 인도하는 열정적인 인도자와 밴드의 멜로디를 귀에서 지우고, 그들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감격에 찬 표정과 조명효과를 눈에서 지우고, 또 그들이 몸담고 있는 공간의 뜨거움을 피부에서 지우고 난 후, 오직 그 가사 만으로 동일한 감동이 재현될 수 있다면 그 음악은 유효하다.
만약 재현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에 대해서 숙고해야 할 것이다. 성령은 감정을 통해 역사할 수는 있지만, 감정이 곧 성령은 아닐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South Park}의 한 "불경하기 그지없는" 에피소드는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http://www.southparkstudios.com/episodes/103772/?autoplay=fa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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